7세기에 접어들면서 동아시아의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중국은 남북조시대 말기였는데 남조는 동진(東陳)이 쇠퇴말로를 걷고 있었고 북조도 5호 16국시대가 마무리되고 북주가 북위마저 제압하면서 남조로도 침공의 손길을 뻗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581년 양견(문제)은 북주의 국호를 '수'로 고치고 589년에는 동진마저 멸망시키면서 남북조의 통일과 함께 중원의 패자로 자리 잡게 된다.
또한 요서지방과 서해 서안 대륙지역을 지배하던 백제와 수와의 전면전이 벌어진다. 수세에 몰리던 백제는 고구려에 구원병을 요청했으나 고구려는 남쪽 변방을 괴롭히던 백제와 수나라 모두의 양패구상과 그로 인한 세력약화를 원했고 이 기회에 백제의 대륙 영토도 흡수하면서 그 세력권을 넓히는 한편 수나라와의 대치국면을 서쪽방면 멀리 두고자 했기 때문에 백제를 돕지 않고 이를 방관한 것이다.
그 결과 백제는 패배했고 해군력은 엄청난 손실을 입었으며 대륙에서 밀려나게 된다. 당시 고구려는 평원왕시대를 거쳐 590년에는 영양왕(평양왕이라고도 함)이 즉위하여 통치하던 시절이었고 중원정벌론자로서 국방과 외치를 중시했던 그인지라 수의 움직임에 대비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고구려는 수와의 전쟁을 불가피하게 보고 있었던지라 급기야 영양왕 9년에 선공에 나선다. 고구려는 자신의 통치아래 있던 말갈족을 주력부대로 앞세워 요수를 건너 영주(營州)를 공격하여 점령해 버리고는 전략요충지로 삼는 한편 성을 쌓고 군사력을 증강했던 것이다.
그런데 수나라는 즉각 응전에 나서는 행동을 보인다. 이러한 양국의 움직임은 결국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의 선공에 이어 수의 전면 반격이 이어진 것이다. 문제는 30만의 병사를 앞세워 고구려 군을 공격한다. 그러나 때마침 장마철이라 보급로가 끊기고 군량이 떨어지고 유행병마저 돌면서 퇴각했고, 해상병력으로 평양을 직접 공격하고자 했으나 폭풍으로 배가 많이 침몰한 데다 평양 근처의 고구려 주력 해군의 공격으로 전멸당하다시피 완패한다. 특히 원래부터 중원대륙 서북방쪽에 있었던 수나라였던지라 수군이 강할 리는 만무했던 만큼 해군력의 열세로 우세를 잡지 못한 것이다.
이후 양국은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소강상태를 보이게 된다. 그러나 수나라는 604년에 양제가 아버지 문제를 죽이고 집권하면서 정세는 급변하다. 그는 아버지의 아내마저 자기 아내로 삼은 패륜아였고 이성적인 지도자가 아니었다. 난폭하고 급한 성정인지라 곧바로 고구려를 향해 칼날을 겨눈다. 612년 영양왕 23년에 2백만의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고구려와 수의 군사는 요수를 사이에 두고 충돌하면서 대대적인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개전 초기부터 고구려군이 수의 도하작전을 저지하면서 도무지 전진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부교를 완성하고 인해전술로 밀어부치면서 요동성까지 이르렀으나 여기서 또다시 수차례의 공방전을 벌였고 고구려의 완강한 농성으로 인해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된다. 이미 봄이 지나고 여름마저 지났고 군사의 사기는 형편없었으며 양제 자신도 요동성 서쪽의 육합성(六合城)에 머물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내호아의 수군이 패수를 공격하여 승리했고 그 승세를 몰아 계속 전진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러나 후방군의 합류도 기다리지 않은 채 성급한 공격에 몰두했고 고구려군이 성안의 빈 절에 복병을 매복해 두고 싸우다가 거짓 패하여 달아나자 이에 성을 점령한 수나라 군이 방심한 채로 있다가 일시에 공격당하는 결과를 맞게 된다.내호아는 자기 목숨도 겨우 건져 해포로 도망하여 주둔한 채 움직이지 못한다.
이후 다시 전열을 정비한 수나라는 우문술을 부여도로, 우중문을 낙랑도로, 기타 병력은 요동성을 우회하여 고구려군 요새로 집결하여 압박했다. 이에 영양왕과 고구려 조정은 을지문덕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수나라를 토벌케 한다. 원래 을지문덕은 계루부 출신의 귀족이었고 시문에도 뛰어났다. 특히 무장으로서 전략과 용병에 탁월했던 그였고 고구려의 손꼽히는 명장이었다. 이런 까닭에 영양왕은 을지문덕으로 하여금 고구려군을 지휘케 한 것이다.
영양왕은 먼저 을지문덕으로 하여금 적진에 거짓 항복케 하여 적의 군사력과 허실을 알아보도록 한다. 당시 양제도 우중문에 밀서를 보내 고구려의 임금이나 을지문덕이 오는 기회가 있으면 반드시 사로잡도록 해 두었고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을지문덕은 우중문의 진영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수나라 진영내의 의견으로 인해 을지문덕을 놓아 보내게 되고 이내 후회한 우중문이 사람을 보내 그를 다시 불렀으나 을지문덕은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강을 건너 고구려 진영으로 가 버렸다.
그리고나서 을지문덕은 적의 상황을 파악한 만큼 심사숙고하면서 수차례의 작전회의를 거친 끝에 '유인책을 통한 섬멸전'을 시도한다. 당시 수나라 군은 길고긴 전선을 이동하느라 지친데다 오랜 시간이 걸려도 뚜렷한 전과없이 시간만 흘렀고 무엇보다 식량마저 떨어져버린 상태였다. 게다가 지휘부도 을지문덕을 돌려보낸 책임을 놓고 서로 싸우고 있었고 작전계획도 제대로 수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좌익군을 맡고 있던 우문술은 군량마저 떨어지자 회군하려 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중문은 양제의 비위에 맞추느라 10만의 군사를 내주면 승리하겠노라고 했고 이에 양제는 그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재차 공격케 한다. 그러나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되면서 지루한 소모전 양상을 나타낸다.
이런 중에 나날이 지치고 굶주려가는 수나라 군대를 더욱 지치게 하기 위해 을지문덕은 싸울 때마다 거짓 패하여 달아났고 결국은 수나라 군대는 하루 사이에 일곱번 싸워 일곱 번 모두 이기면서 전진하다보니 어느새 살수까지 건너 진을 치게 된다. 그러나 수나라 군대는 이동로와 병참선이 길어진 데다 더욱 더 지칠대로 지친 상태가 된다.
이 때 을지문덕은 사신을 보내 거짓 항복하는 척하고 군사를 후퇴시켜 물려 놓는다면 항복하겠다고 한다. 이에 고구려에 승리하기는 어려움을 안 우문술이 항복을 구실로 퇴각하기 시작한다. 이 때를 노린 고구려군은 사방에서 공격해 들어갔다. 수나라 군대는 도망가기에 바빠 서로 밟혀죽기도 하는 등 일대 혼란에 빠지면서 전열은 완전히 무너졌고 뒤에서 쳐오는 고구려군의 맹공에 하나하나 죽어갔다. 특히 살수에 이르러 수나라 군대가 반 정도 건너갈 즈음 고구려군은 총공세를 감행하여 대부분을 몰살시켜 버렸다. 퇴각 중이었던 다른 수나라 군대까지해서 30만이 넘는 군사가 전멸해 버린 것이다.
고구려는 수와의 전쟁을 통해 그 힘을 더욱 대내외에 과시했고 공세적인 국가운영에 나선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중국까지 정벌하여 천하통일을 꿈꾸는 연개소문의 등장과 함께 당과의 길고긴 전쟁을 벌이게 된다.
수나라는 전쟁에서 완패한데다 곳곳에서 반란마저 일어나 내정의 혼란까지 겹쳐 쇠퇴일로를 걷게 되고 급기야 618년에는 양제가 암살당하고 3,4대 임금이 제위를 잇기도 하나 이미 국세는 기울었고 이듬해인 619년에 이연에 의해 세워진 당에 의해 멸망한다.
역사는 흐른다. 그러나 승자는 당당한 역사의 주역이 되는 법이다. 7세기 초반 고구려의 역사는 승리의 역사이기에 더욱 빛이 난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을지문덕이 서 있다. '누구도 을지문덕을 지날 수 없다'는 말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새겨 두어야 할 것이다.
을지문덕이 우중문을 희롱한 시(詩)가 너무나 유명해서 적어본다.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 : 을지문덕 오언고시
신책구천문(神策究天文) 그대의 신기한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묘산궁지리(妙算窮地理) 오묘한 계산은 땅의 이치를 꿰뚫었도다.
전승공기고(戰勝功旣高) 그대 전쟁에 이겨 이미 공이 높으니
지족원운지(知足願云止)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
[참고사항]
《자치통감》에는 을지문덕을 위지문덕(尉支文德) 이라고도 표기하였다. 《삼국사기》 을지문덕전에서는 그의세계(世系)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해동명장전 海東名將傳》에는 “을지문덕은 평양 석다산(石多山) 사람이다.”고 하였다.
그런데 ‘을지’라는 성에 대하여 고구려 관위명(官位名)의 하나인 우태(于台)와 같이 연장자·가부장(家父長)을 뜻한다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을’만이 성이요 ‘지’는 존대의 접미사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또, 선비족(鮮卑族) 계통의 성인 ‘울지(尉遲)’씨와 같은 것으로 보아 을지문덕을 선비족계통의 귀화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어 논란이 되고
살 수 대 첩 (Goguryeo's Great Victory at Salsu River against the Sui Dynasty)
살수대첩 [薩水大捷]에 대하여
612년(고구려 영양왕 23) 평양성 부근까지 침략하였다가 후퇴하는 수(隋)나라의 군대를 고구려가 살수(薩水;지금의 청천강)에서 크게 격파한 싸움. 581년 수왕조가 개창되면서 고구려와 수나라는 평화적 관계를 수립,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수나라가 남조의 진(陳)나라를 치고 통일제국을 수립한 뒤, 돌궐·토욕혼(吐谷渾;선비족의 일파) 등 주변세력에 대해 압력을 가하면서 고구려의 영향권인 거란·말갈 등에까지 세력을 뻗쳐옴에 따라, 요서(遼西)방면으로의 진출을 노리던 고구려와 충돌하게 되었다. 598년(영양왕 9) 고구려의 요서 공격과 수륙양로를 통한 수나라의 반격은 양국의 대립관계를 표면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612년 수나라는 수륙양로를 통하여 제2차 침공을 시작하였다. 수나라 육군은 탁군(지금의 北京)에 집결하여 좌우 각각 12군으로 편성하였고, 동원된 병력은 113만 3800명, 군량운반자는 정규군의 배가 되었으며, 군대를 출발시키는 데에도 40일이 소요되었다. 수나라군은 요동성(遼東城)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과 지휘계통의 혼란 등으로 지구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에 수나라군은 우중문(于仲文)·우문술(宇文述) 등을 지휘관으로 한 30만 5000명의 별동대를 편성하여 평양성 30리 지점까지 진군하였다.
그러나 수나라군의 지휘부 내부의 불화, 물자부족 등으로 더 이상의 진군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수나라군의 약점을 간파한 주장(主將)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수나라군을 내륙 깊숙히 유도하여 그들의 능력을 한계점에 이르게 한 뒤 거짓 항복을 하여 퇴각하게 하였다. 수나라군이 살수를 건너고 있을 때, 배후에서 공격하여 수나라 장수 신세웅(辛世雄)을 전사시키는 등 큰 전과를 올려 요동성까지 돌아간 병력은 2700명에 불과하였다. 한편, 패수(지금의 대동강)를 통하여 평양성을 공격하려던 수나라의 해군도 고건무(高建武)가 지휘하는 고구려 결사대에 의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다. 수륙양면에서 큰 손실을 입은 수나라는 두번째 침략도 실패로 끝났다. 이 싸움에서 수나라는 고구려의 요하 서쪽 무려라를 장악하는 데 불과했으며, 이 참패를 만회하기 위해 613년과 614년에 고구려를 다시 침공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고, 이로 인하여 수나라 내부의 동요가 일어나 패망을 재촉하게 되었다. 고구려도 되풀이되는 수나라의 침공을 격퇴하여 국제사회에서의 위치는 신장시켰으나 많은 국력소모로 뒷날 멸망에 이르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후세에 살수대첩을 말하는 이가 거의 을지문덕 한 사람의 계획으로 치고 또 을지문덕이 겨우 수천 명의 군사로 수의 수백만 대군을 격파한 줄로 말하는데 이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 말이다.
고구려가 망할 때에도 상비군이 30만이나 되었으니, 하물며 영양왕의 전성시기의 일이랴. 이때에는 오히려 30만명이 넘었을 것이고 또 광개토왕의 비문에 "왕이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나갔다."고 한 것으로 보거나 양제의 고구려에 대한 선전 조서로 보거나 아무튼 고구려의 수군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으니 수군은 대략 수만명에 가까웠을 것이다. 이 30여만 명으로 남쪽의 백제와 신라를 경계하는데 몇만명이 들렀을 것이거니와, 그 나머지도 20여만 명이 되니, 이 20만 명은 수에 대항하는 전사가 되었을 것이 아닌가. 물론 수륙군의 대원수는 왕의 아우 건무요 육군의 원수는 을지문덕이었는데, 수양제가 수륙 양면의 방어를 다 중히 여기는 가운데 먼저 지키고 나중에 싸우는 것으로 계획의 중심을 삼아 육상의 장사들은 인민에게 명하여 양식을 거두어 가지고 모두 성에 들어가 있게 하고, 수군도 각각 요새항구의 안전지대로 물러나 지켜 싸움을 피하다가 수의 군사가 양식이 떨어 지기를 기다려서 공격하게 하였다.
을지문덕이 수의 군사를 깊이 꾀어 들이려고 요하 서북쪽에 있던 군사를 거두어들여 요하를 지키니, 그 해 3월에 수의 군사가 요하에 이르러 서쪽 연안 수백리에 진을 쳤다. 마치 벌떼 처럼 우굴우굴 하고 군사의군사의 장비와 군기가 울굿불굿 햇빛에 빛났다.수의 군사중 첫째가는 용장 선봉의 맥철장이 부교를 매어 동쪽 언덕에 대려고 하므로 을지문덕이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맡아 치게 해서 맥철장등 장사 수십명과 군졸 1만여 명을 목베고 부교를 끊어 버리니, 수의 군사중에서 잠수를 잘 하는 자와 헤엄 잘치는 자가 상을 탐내서 다투어 물에 뛰어 들어 격전을 벌이면서 부교를 다시 매었다.
을지문덕이 일정한 계획에 따라 거짓 패하여 퇴군하니, 수의 양제가 그 전군을 휘몰아 요하를 건너와서 어영군과 좌익위 대장군 등으로 하여금 요동성을 포위 공격 하게 하고, 좌둔위 대장군 토우서 등 10여 군단으로 하여금 그 부근의 성들을 포위 공격하게 하고 좌익위 대장군 우문술 등 9군단은 을지문덕을 추격하여 평양을 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우익위 대장군 내호아가 강회의 수군 10여만명을 거느리고 양식 실은 배를 호위하여 동래(지금의 연대)에서 출발, 창해(발해만)를 건너 패강(대동강) 어귀로 들어오므로, 왕제 건무가 비밀히 수군 장졸을 후미진 항구에 숨겨두고 평양성 아래 인가에는 집집마다 재물을 내놓고 수의 군사가 상륙하는 것을 내 버려두니, 정병 4만명을 뽑아서 패강을 거슬러 올라와 성 아래로 돌진 하였다. 재물을 노략질 하느라 대오가 어지럽게 무너지니,이때 건무가 결사대 5백 명을 뽑아 성곽과 빈 절에서 내달아 돌격해서 깨뜨리고 모든 군사에게 호령하여 수의 군사를 추격하게 하였다. 여기 저기 숨어 있던 수군들도 일시에 내달아 함께 공격하니 수의 군사가 강 어귀에 이르러 배를 다투어 서로 짓밟아 죽는 자가 수없이 많았고 양식 실은 배가 다 없어지니 이미 평양성에 침입해 있던 우문술 등의 대군이 무엇을 먹고 싸우랴? 고구려가 이때에 이미 이길 지위를 차지하 였으니 가 을지문덕보다 앞섰다고 할 것이다.
왕제 건무의 공이 이같이 컸지마는 역사를 읽는 사람들이 흔히을지문덕만 아는 것은 무슨 연고인가? 사마온공의 통감고이에 내호아가 양식배를 잃지 아니했더라면 우문술의 살수의 패전이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대개 옳은 말인가 한다.
을지문덕이 요하에서 퇴군하여 수의 군사의 허실을 탐지해 보고자 하여 거짓 항복을 청하는 사자가 되어, 수의 진중에 들어가서 그 내부 형편을 살펴 보고 돌아 오는데, 우문술 등이 그의 용모와 체구가 위엄있고 건장함을 보고 놀라 이 사람이 고구려의 대왕이나 대대로 인가 보다 하고 사로잡지 못했음을 후회하고 사람을 보내서 다시 만나기를 청하였다.문덕은 이때 이미 패강의 승전을 듣고, 우문술 등의 모든 군사들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눈치 채었으므로, 이미 반드시 이길 기틀을 잡았는데 어찌 다시 범의 굴에 들어가랴?
달려 돌아 오면서 수의 군사를 유인하기 위해 요새를 만나면 가끔 머물러 접전하다가 거짓 패하여 하루 동안에 일곱 번 패하니 우문술 등이 크게 기뻐하여 고구려 군사는 하잘 것이 내쳐 달려와 살수(지금의 청천강)를 건너 평양에 이르렀다.
평양에 이르니 성 안과 성 밖의 인가가 고요하여 사람이란 그림자도 볼 수 없고, 개소리 닭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므로 우문술이 의심이 나서 나가지 못하고 사람을 보내서 닫힌 성문을 두드리니 성중에서 대답하기를 "우리가 곧 항복하려고 땅과 인구의 문서와 장부를 조사하는 중이니 대군은 성 밖에서 닷새만 기다리시오."했다. 전보 같은 것이 없던 고대이므로 우문술 등은 내호아가 패전한 것을 까맣게 모르고 내호아가 오기를 기다려서 함께 공격 하려고 성 안에서의 요구를 승낙하고 성 부근에 진을 쳤다. 군사들이 시장하여 약탈하려고 하되 집집이 다 비어 아무것도 없었다. 닷새가 지나 열흘이 되어도 성 안에서는 아무런 동정이 없으므로 우문술이 군사를 지휘하여 성을 공격하니, 성 위 사면에 고구려의 깃발이 일시에 꽂히고 화살과 돌이 비오듯이 쏟아졌다.
을지문덕이 통역으로 하여금 큰소리로 "너의 양식 실은 배가 바다에 가라 앉아 먹을양식은 끊어지고 평양성은 높고 튼튼하여 넘어 올 수 너희들이 어떻게 하겠느냐?" 하고 외치게 하고 포로로 잡은 수의 수군장졸들의 도장과 깃발을 던져 주었다. 수의 군사들이 그제야 내호아가 패한줄을 알고군심이 갑자기 소란해져 싸울 수가 없어서 우문술 등이 물러나 돌아 가는데, 을지문덕은 미리 사람을 보내서 모래 주머니로 살수의 상류를 막고 정병 수만 명을 뽑아서 천천히 한가롭게 수의 군사를 뒤쫓게 하였다. 살수에 이르니 배가 하나도 없어서 우문술 등이 물의깊고 얕은데를 알지 못하여 머뭇 거리는데 돌연 일곱사람의 고구려 중이 다리를 걷고 물에 들어서면서 "오금에도 차지 않는 물이요." 하고 건너가니 수의 군사가 크게 기뻐하며 다투어 물에 들어섰다. 채 중류에 이르지 못했을 때 상류의 모래 주머니로 막은 물을 터 놓아 물이 사납게 내리 닥치는데 을지문덕의 군사가 뒤쫓아 와서 맹렬히 공격하니, 수의 군사는 거의가 칼과 화살에 맞아 죽고 물에 빠져 죽고 목숨을 건진자는 하루 낮 하루 밤 사이에 450리나 도망가 압록강을 건너 달아나 요동성에 이르렀을 때는 우문술 등 아홉 군단 30만 5천 명이 다 죽고 겨우 2천7백명밖에 되었으니 백에 하나도 살아남지 못하였고 무기와 그 밖의 몇만 수레의 물건들이 죄다 고구려의 노획품이 되었다.
양제의 어영군과 그 밖의 10여군단 수십만명 군사가 오혈흘과 요동 각지의 성들을 공격 하였으나 하나도 함락 시키지 못했을뿐 3월로부터 7월까지 무릇 4,5달 동안에 고구려 사람들의 화살에 맞아 죽어서 성 아래에 해골이 산을 이루었고, 또 양식을 얻지 못하여 장졸이 굶주리다가 우문술 등이 패하여 돌아감을 보자 더욱 싸울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양제는 오히려 최후의 요행을 얻을까 하여 모든 군사들을 오혈흘 성 아래에 집합 시켰는데 을지문덕이 이를 깨뜨려 사람과 말을 수없이 죽이고 노획한 물건이 한없이 많았다.
뒤에 고구려가
망하매 당의 장수 설인귀가 그 경관을 헐고 백탑을 세웠는데, 세상 사람들이 이를 당태종이 안시성을 공격 할때 장수 울지경덕이 세운 것이라 하지마는 이는 잘못 전해진 말이다. 수의 24군단 수 백명이 이에 전멸하고, 오직 호분낭자 위승문의 패잔군 수천이 남아 있어 양제를 보호해 가지고 도망하였다.
수서에 살수에서의 우문술의 패전을기록하고 오혈흘에서의 양제의 패전을 기록하지 아니한 것은 이른 바 높은이의 수치를 숨기기 위한 춘추필법이니, 춘추필법을 알아야만 지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요하를 건너 00리에 발착수가 있는데, 이것을 수라 이름 하였지마는, 실은 수(강물)이 아니라 유명한 요동의 200리 진수렁이요 그 일명을 요택이라 하는 것으로, 당태종 요택 매골의 조서를 보면 , 당시 수의 군사가 이땅에서 매우 많이 죽었음을 알 수 있다.이것도 대개 고구려 군사의 추격에 죽은 것일 것이다. 말하자면 이 전쟁은 패강.살 수.오혈흘 포함한 것으로 으뜸가는 공은 패강의 싸움이고 다음은 살수의 싸움이고 마지막을 오열홀의 싸움이었는데 모두 통틀어서 살수대첩이라 일컬음이 옳지 않지마는, 오랜동안 씌어온 것이므로 그대로 쓴다.
출전/발췌 : 조선 상고사, 신채호저,일신서적출판사,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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