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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가 시조사당까지 지은 유일한 중원국가 ...고구려... 개요

monocrop 2007. 2. 27. 20:24

 

고구려 개요

 

삼국시대의 고대국가 중 하나.

서기 전후 무렵 성립되어 668년에 멸망하였으며, 한반도(韓半島) 북부와 남만주(南滿洲) 일대를 근거지로 번성하였다.

 

역사


성립
고구려족(高句麗族)은 만주(滿洲)지방에 살던 부여족(扶餘族)에서 갈라져 나온 민족으로 처음에는

쑹화강[松花江] 유역에 살았는데 BC 2세기경부터 남하(南下)하여 동가강유역에서 압록강(鴨綠江) 유역에 걸친 산악지대에 살면서 수렵생활을 하였다.

처음에 고구려족은 현도군의 지배권안에 있었으나, 그 지방이 산악지대이므로 중국의 지배력이 철저하지 못하였다.

민족의식에 눈뜬 이들은 중국에 대하여 꾸준한 저항을 계속하였으며, 부족간 통일의 필요성을 느끼고 강한 부족을 중심으로 한데 뭉쳐 집권국가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주몽(高朱蒙;東明聖王)이 졸본부여(卒本扶餘:桓仁지방)에 고구려를 세운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BC37년으로 되어 있다.

AD 3년 주몽의 아들 유리왕 때에 수도를 국내성(國內城; 지금의 通溝)지방으로 옮겼고, 6대 태조왕(太祖王고; 재위 53146)때부터 차츰 다른 부족들을 정복하여 강토를 넓히고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209(산상왕 13)에는 환도성(丸都城)을 축조하였다.

 

외세와의 투쟁
고구려가 일어난 땅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한반도에 침입하는 중도에 위치했으므로 그들과 끊임없이 싸움이 벌어졌다.

특히 고구려가 압록강 하류를 공격하여 중국 본토와 낙랑군(樂浪郡) 사이의 교통을 위협하자 당시 중국의 삼국(三國) 가운데 하나로 북쪽을 차지하고 있던 위()나라는 장수 관구검(毋丘儉)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치게 하여 224(동천왕 18) 수도 환도성을 함락시킨 적이 있었다.

이같은 위기를 겪으면서도 고구려는 점차 세력을 확대하여 313(미천왕 14)에는 400여년이나 내려 오던 낙랑군과 그 남쪽의 대방군(帶方郡)을 정복하여 한반도에서 중국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이어 19대 광개토왕(廣開土王;재위 391413) 20대 장수왕(長壽王;재위 413491)에 이르러 대대적인 정복을 감행하여 북()으로는 쑹화강, (西)로는 랴오허강[遼河]을 넘었고, ()으로는 아산(牙山)과 삼척(三陟)을 연결하는 선까지 진출하여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루었는데, 427년 장수왕은 수도를 환도성으로부터 평양(平壤)으로 옮겼다.

이리하여 고구려는 남쪽으로 신라·백제와 맞서고 서쪽으로는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 겨루게 되었다. 마침내 598(영양왕 9)수나라 문제(文帝)는 수륙 30만 군대를 거느리고 랴오허강까지 쳐들어왔으나 고구려의 반격·질병·풍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뒤를 이어 즉위한 양제(煬帝) 역시 군비를 정돈하여 612(영양왕 23) 113만 군대를 거느리고 랴오허강을 건너 요동성(遼東城:지금의 遼陽)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의 수비가 견고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자, 양제는 따로 30만 군대를 거느리고 압록강 서쪽으로 진출하였다.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은 후퇴를 가장하고 수나라 군대를 유인하여 살수(薩水:지금의 淸川江)에서 일대 반격전을 전개해서 섬멸, 30만중에서 살아 돌아간 자는 겨우 2000여 명이었다.

한편 수군(水軍) 7만의 병력이 300척의 배로 대동강에 이르러 평양을 공격하였으나, 영양왕의 아우 건무(建武)가 복병(伏兵)으로 이를 무찔렀다. 그 뒤에도 양제는 여러 차례 고구려를 치려고 군대를 움직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고구려가 중국의 동북방에 강대한 세력으로 군림하여 중국과 대립할 뿐 아니라 북쪽의 돌궐(突厥) 등과 내왕하니 중국으로서는 큰 위협이 되었다.

 

수나라 다음에 일어난 당()나라도 이같은 고구려를 두고 안심할 수 없어서

태종(太宗) 644(보장왕 3) 30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수도 낙양(洛陽)을 출발하여 다음해 봄에 랴오허강 건너 요동성 백암성(白巖城)을 총공격하였으나 60여 일의 공격에도 고구려군은 끝까지 항전하여 태종은 마침내 후퇴하였다. 당나라 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고종(高宗)도 여러 차례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고구려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영도하에 국민이 일치단결하였고 군대가 막강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 고종은 신라군과 힘을 합하여 660년 먼저 백제를 공격한 뒤 그 여세를 빌어 이듬해에 평양을 포위·공격하였으나 연개소문이 이끄는 군대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크게 패하고 돌아갔다.

 

멸망
666
(보장왕 25) 연개소문이 죽은 후 그의 세 아들 남생(男生)·남건(男健)·남산(男産)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나라의 형편이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이 기회를 틈타 667년 이적(李勣)·설인귀(薛仁貴)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 50, 김인문(金仁問)이 이끄는 신라군 27만이 합세하여 평양을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이듬해인 668(보장왕 27) 나당(羅唐) 연합군의 맹렬한 공격 앞에 마침내 항복, 보장왕과 중신들은 당나라 군대에 붙잡혀서 장안(長安)으로 갔다. 이때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謹府)를 설치하고 고구려의 영토를 9도독부와 42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제도


정치
고구려는 본디 소노(消奴)·절노(絶奴)·순노(順奴)·관노(灌奴)·계루(桂婁) 5부족으로 형성되어 처음에는 소노부에서 부족연맹의 장()인 왕이 나왔으나 후에는 계루부가 이를 대신하였다.

5부족은 항상 고구려의 중심세력이 되었는데 중앙집권제가 확립되고 부족제도가 무너짐에 따라 이들의 집단제도는 행정구역으로 개편되었다. 각 부족의 장을 대가(大加)라 하고 그 밑에 사자(使者)·조의(早衣)·선인(先人) 등의 벼슬을 두었는데, 이것은 옛날 중국의 경대부(卿大夫)가 거느리던 가신(家臣)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부족의 장이 아니라도 왕족의 경우는 일가의 적통장자(嫡統長子)가 대가의 자격을 가졌는데, 이것을 고추가(古雛加)라고 불렀다.

이 밖에 전에 왕위를 차지했던 소노부의 대가와, 대대로 왕실과 혼인한 절노부의 대가도 고추가의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다.

고추가는 백제의 길사(吉師), 신라의 거서간(居西干)과 같이 <귀인(貴人)>이라는 뜻이다.

중앙에서 임금의 지시를 받아 국정을 담당한 총리적인 벼슬이 대로(對盧)와 패자(沛者)였는데, 대로 밑에 주부(主簿)·우태(優台)·승()이 있고 그 밑에 사자 이하 선인까지 있다. 그리고 대로 위에 상가(相加)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왕가의 직속 신하가 아니라 각 부의 대가 중에서 뽑힌 일종의 대변자(代辯者)였다.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에는 관직의 서열이 정비되어 국가의 기밀·법령제정·징발·관작(官爵)을 취급하는 고위관리로서

대대로(大對盧)·태대형(太大兄;莫離支)·울절(鬱折)·태대사자(太大使者)·조의두대형(鳥衣頭大兄)을 두었고 그 밑에

대사자(大使者)·대형(大兄)·발위사자(拔位使者)·상위사자(上位使者)·소형(小兄)·제헝(諸兄)·과절(過節)·부절(不節)·선인(先人 또는 仙人)을 두었다.

또 왕족이나 이에 준한 가문의 대가(大加)에게 주던 고추가는 관직명(官職名)이 되어 외빈(外賓)을 접대했는데 태대사자의 품관이 이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대막리지(大莫離支)는 대대로(大對盧), 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는 태대대로의 별칭(別稱) 이었다.

 

행정
초기 5부족의 집단체제가 그대로 행정구역체제로 발전하여 동·서·남·북·중() 5부로 나뉘었다.

즉 계루부는 내부(內部 또는 黃部), 소노부는 서부(西部 또는 右部), 절노부는 북부(北部 또는 後部),

순노부는 동부(東部 또는 左部), 관노부는 남부(南部 또는 前部)라 하였고 이들이 사는 행정구역을 통틀어서 내평(內評)이라 하였다. 지방도 5()로 나누었고 부 밑에 성()이 있었다. 부의 장관을 욕살(褥薩), 성의 장관을 처려근지(處閭近支) 또는 도사(道使)라 하였는데, 각각 관료와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고구려는 국민개병주의(國民皆兵主義)로 문무(文武)의 관리가 구분되지 않았으며 군대에는 대모달(大模達;중국의 衛將軍 같은 것)·말객(末客;중국의 郎將 같은 것) 등의 직위가 있다. 평양 이외의 국내성(지금의 通溝)·한성(漢城;지금의 載寧)을 별경(別京)으로 삼았다.

 

사회·경제
왕족과 5부의 장()인 대가(大加) 그 일가 친척, 그 밑에서 일을 보는 관료들이 지배층을 형성하였는데, 이들은 군사·정치·교육·제사 등을 담당하였고 농경에는 종사하지 않았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노동을 지배하는 권력계급으로, 지위에 따라 의관(衣冠)도 달랐다. 농민·노예 등을 하호(下戶)라 하였는데 이들은 직접 육체노동을 하는 피지배층이었다.

부족사회의 특징은 고구려 말까지 이어져 가부장적(家父長的) 지배체제가 유지되었고,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대가(大加)의 회합인 제가(諸加)의 회의도 말엽까지 계속 이어졌다. 법이 매우 엄하여 반역자에게는 군중이 모인 가운데 우선 화형(火刑)을 가한 다음에 목을 베며, 재산을 몰수하고 처자를 종으로 삼았다.

전쟁에 진 자와 사람을 죽인 자, 강도 등도 사형에 처했다. 도둑질을 한 자는 12배의 배상을 물어야 했고, 우마(牛馬)를 죽인 자는 종으로 삼았다. 기본산업은 농업이고, 어업이 그 다음이었다. 토지는 개념상으로 국가에 소속되었으나, 실제로는 왕자와 귀족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이들은 토지와 아울러 농민도 지배하였다. 수공업이 발달하여 금속기구·목기(木器)·토기·혁구(革具) 등을 만들었고, 직조(織造)기술도 발달하여 세포(細布)는 화폐의 구실도 하였다. 또 고구려는 낙랑군을 정복하여 그곳의 발달된 기술을 배웠고, 철이 많이 나는 평곽(平郭;지금의 鞍山 부근)을 점령함으로써 철공업(鐵工業)이 발달되어 나라가 강성해지는 원동력이 되었다.

상업은 주로 물물교환이었고 이웃나라들과도 모피(毛皮)·철구(鐵具)·세포(細布) 등의 교역이 있었다. 세금에는 2개의 종류가 있었는데, 사람에게 부과하는 것을 세()라 하여 포()와 곡()으로 받았고, 매호(每戶)에 부과하는 것을 조()라 하여 곡식으로만 받았다. 세는 1명에 포 5필 또는 곡 5섬이었고, 조는 3등급으로 나누어 1등은 1, 2등은 7, 3등은 5말이었다.

 

문화


교육
중국과의 지리적 관계로 건국 전부터 한문이 사용된 것으로 짐작되나

372(소수림왕 2)에 비로소 중국식 태학(太學)을 세웠고, 이해에 전진(前秦)의 임금 부견(符堅)이 불상(佛像)·불경(佛經)·승려(僧侶)를 보내옴으로써 불교가 들어왔으며 다음해에 율령(律令)을 제정하였다.

태학에서는 중국의 고전과 아울러 무술도 가르쳤다. 이 문무일치의 교육은 후기에 들어와서 더욱 보급되어 전국 각지에 경당이라고 하는 사립학교를 세워 미혼남자들을 모아 고전과 궁술(弓術)을 가르쳤다. 태학에는 귀족의 자제들이 들어갔고 경당에는 평민의 자제들이 들어 갔다.

 

국사편찬
한학이 퍼짐에 따라 국사(國史)도 편찬하게 되었는데, 기록에 나타난 것을 보면 연대와 편찬자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유기(留記)》라는 100권의 국사책이 일찍부터 내려오고 있었다.

600(영양왕 11)에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에게 이것을 추려 《신집(新集) 5권을 만들게 하였으나, 《유기》와 《신집》은 오늘날 모두 전하지 않는다.

 

시가·음악
고구려의 문학은 왕자 호동(好童)이나 온달(溫達)이야기의 설화문학이 전해지고, 유리왕의 《황조가(黃鳥歌)》와 을지문덕의《오언시(五言詩)》 등 몇몇 시가(詩歌)가 《고려사(高麗史)》에 전해질 뿐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고구려의 악기에는 관()·현()·격타악(擊打樂)을 합하여 모두 14종이 있었으며, 악곡에는 《지서가(芝栖歌)》·《지서무(芝栖舞)》·《공후인》 등이 있었다.

또 재상 왕산악(王山岳)은 진()나라로부터 들여온 칠현금(七絃琴)을 개량하여 거문고를 만들고, 100곡이 넘는 악곡도 엮었다. 고구려의 음악은 수·당에도 전해져 많은 영향을 주었다.

미술
고구려의 미술은 고분(古墳)에 남아 있는 벽화(壁畵)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용총(舞踊塚)·각저총(角抵塚) 등 초기의 그림은 표현에 있어 기법이 서툴렀으나, 화상리(花上里) 감신총(龕神塚) 등 중기의 그림은 섬세한 사실(寫實)의 필치로 당시의 풍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사신총(四神塚) 등 후기 벽화는 강한 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웅대하고 건실한 기풍을 나타내고, 사실을 초월하여 사의(寫意)의 경지에 들어섰다.

또한 강서고분에 그려진 사신도(四神圖)는 고구려시대 최고의 걸작으로 색의 조화가 뛰어나며, 쌍영총에서 발굴된 기마상(騎馬像)·남녀입상(男女立像) 등은 당시의 풍속을 알려준다. 고분의 구조나 규모로 볼 때 건축기술 또한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풍속
고구려인들은 검소하고 무()를 숭상하여 말타기·활쏘기에 능하였다. 궁궐·관청·절 등과 귀족의 집들은 기와를 덮고 일반 민가는 초가였으며 온돌을 사용하였다. 남자들은 모자를 썼는데, 특히 관료들의 모자는 소골(蘇骨)이라 하여 깃을 꽂고 금은으로 장식하였다.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주름잡힌 치마를 입었고 저고리는 무릎까지 내려왔다. 상류층에서는 바둑·투호(投壺)·축국(蹴鞠) 등 중국식 놀이를 하였고, 평민들은 춤·노래·씨름·석진(石戰)을 즐겼다. 장례식은 성대히 치러졌으며 여러 가지 부장물(副葬物)을 관 속에 넣는 후장(厚葬)의 풍족이 있었다. 10월에는 동맹(同盟)이라 하여 고대사회에 널리 유행하던 추기(秋期) 부족공동체의 대제전(大祭殿)인 국중(國中)대회를 열었다.

 

 

종교


불교
불교가 공식적으로 고구려에 들어온 것은 372(소수림왕 2) 전진왕 부견이 승려 순도(順道)를 시켜 불경과 불상을 보낸 때였으나, 그 이전에도 어느 정도 유포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순도가 들어온 2년 후인 374년에는 진나라 승려 이도(阿道)가 들어왔고, 그 다음 해에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워 순도와 아도로 하여금 각각 그곳에서 불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소수림왕 다음인 고국양왕(故國讓王;재위 384390) 때에는 어명을 내려 불법을 숭상하라고 권장했고, 광개토왕은 즉위한 다음해인 392년 평양에 9개의 절을 더 세웠으며, 395년에는 진()나라의 승려 담시(曇始)가 경률(經律) 수십부를 가지고 와서 활발히 전도하였다. 576(평원왕 18)에는 고구려의 승려 의연(義淵)이 위()·제() 2대의 숭통(僧統)으로 이름이 높던 법상(法上)에게 가서 불교사를 배워 왔고, 같은 시대의 승려 낭()은 양()나라에 가서 불법을 공부하였다. 625(영류왕 8)에 일본으로 건너간 혜관(惠灌)은 일본 삼론종(三論宗)의 개조(開祖)가 되었고, 평원왕 때 담징(曇徵)은 일본 호류사[法隆寺]의 벽화를 그렸을 뿐 아니라 지묵(紙墨)·맷돌 등을 전하였다. 이밖에 영양왕 때 보덕(普德)은 백제로 옮겨가서 열반종을 창시하였으며 혜량(慧亮)은 신라에 가서 그 곳 불교에 공헌함으로써 초대 국통(國統)이 되었다.

도교
도교(道敎)가 공식적으로 고구려에 들어온 것은 624(영류왕 7)으로, 당나라 고조(高祖)의 명을 받들어 도사(道使)가 천존상(千尊像)과 도법을 가지고 와서 노자(老子)를 강론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뒤 643(보장왕 2) 연개소문이 임금에게 권하여 당나라로부터 도사 숙달(叔達) 이하 8명을 데려다가 불사(佛寺)를 몰수해서 그 곳에 머물게 함으로써 도교숭상이 표면화되었다. 이로 인하여 650(보장왕 9) 고구려의 이름난 승려 보덕화상(普德和尙)이 불만을 돕고 백제로 망명하는 등 말기에 들어 점차 불교 세력이 쇠퇴하였다.

 

 

고구려건국의 역사적 의의

 

고구려는 어떤 나라인가?
작성자: 군불견 (레벨5)      등록일:06.07.01



1.
동서 6천리의 대제국

중국 25사 중 하나인 『수서』를 보면 고구려의 영토를 '동서 6천리'라고 기록하였다.

동서 6천리 이 말은 고구려 동쪽에서 서쪽에 이르는 영토가 6천리라는 것이다. 6천리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는 우리가 생각했던 이상으로 엄청난 영역을 소유한 대제국이었다.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또는 국내성 기준)을 중심으로 볼 때 고구려의 영토는 동쪽으로는 사할린 앞바다 서쪽으로는 만리장성 이남에 이르렀다고 추정할 수 있다.

(고구려의 젖줄인 요하가 현재의 랴오허 강이 아닌 서쪽의 난하라면 고구려의 서방경계는 태원이남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가 만리장성 이남 즉 북경지방까지 진출했다는 근거로

북경 근처의 고구려의 성터인 고려영高麗營, 평안남도 대흥시 덕흥리 고분벽화의 주인공인

유주자사 진(유주는 오늘날 북경을 포함한 하북성 일대), (태원 부근)에 고구려인 56만명이 가득했다는 위서의 기록을 들 수 있다.

또한 『수서』 「고구려전」을 보면 고구려 침략을 앞둔 수 양제가 고구려인들이 수나라 이전, 발해에서 요서지방의 갈석산에 이르는 넓은 땅을 확보하여 집단적 농경생활을 함으로써 중원땅이 고구려인의 땅이 된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 놀랄만한 사실¹을 밝힌 바 있다.

 

이렇듯 고구려는 우리가 상상했던 이상으로 넓은 영토를 차지한 대제국이었다.

*-"
고구려의 소추(小醜:더러운 꼬맹이)가 혼미하여 공손치 못하고 발해와 갈석 사시에 무리를 모으고, 요동과 예맥의 땅을 잠식하였다. 한나라와 위나라가 정복을 반복하니 그 둥지가 잠시 흐트러졌다가 다시 그 종족이 옹기종기 모여 냇가의 발대처럼 번성하였다."(중략)

-수 양제의 조서- *

2.
풍요로운 경제대국

고구려의 지리적 위치하면 떠올리는 이미지가 바로 만주지방, 산악지역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구려가 식량이 부족한 가난한 국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구려는 가난한 국가가 아닌 풍요로운 경제대국이다. 물론 고구려 건국 당시에는 주변이 산악지역이라 주변 부락, 국가들을 상대로 약탈을 벌여 먹고 살아야 했다. 하지만 끊임없는 고구려의 팽창과 광개토호태왕의 정벌 이후 고구려는더 이상 주변을 약탈하여 먹고 사는 가난한 국가가 아니었다.

광개토호태왕의 정벌 후 고구려는 요동과 요서, 평안도와 황해도, 한강유역 그리고 송화강과 우수리강 일대의 평야지역을 확보하여 더 이상 굶주림을 겪지 않을 정도로 부국(富國)이 되었다.

광개토태왕비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상업을 천시한 조선과 달리 고구려는 상업을 대대적으로 장려하였다.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의 미천왕이 봉상왕에게 쫓길 때 소금장수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소금은 나라의 전매품으로 개인이 장사를 하는 것을 금하고 나라에서 통제하였다. 하지만 고구려에서는 소금 판매가 다른 나라에 비해 비교적 자유로웠다. 물론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의 주인은 귀족층, 국가였을테지만 그 소금을파는 사람들은 대개 을불(미천왕), 재모와 같은 일반 평민이었을 것이다.

개인이 소금장수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고구려가 상업을 장려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고구려는 국초에 한나라와의 국경지방에 책구루를 설치하여 물자를 교환하는 등 교역에도 관심이 많았다. 상업이 발달한 고구려에서는 시장이 존재하였다.

『삼국사기』「온달전」을 보면 시장의 존재가 나타난다.

여기서 온달은 나라에서 파는 국마를 사는데 고구려에서는 국가가 시장에 물건을 내다 팔 정도로 상업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대릉하 유역의 유성에는 대규모의 국제시장인 고려시장이 있었다. 이 곳은 북방의 유목민족과 농경민족, 수렵민족이 모여 대규모로 교역을 하는 국제시장이다.

그런데 수서 위운기전을 보면 수나라가 거란을 정복할 때 군사 2만명을 고려시장에 교역하러가는 상인단으로 위장하여 거란을 안심시킨 뒤 거란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2만명의 위장 상인단을 거란족들이 교역단으로 착각했을 만큼 고려시장의 규모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상업을 권장한 고구려는 수레의 중요성을 일찍이 알아 수레를 통한 운송을 권장하였다. 수레는 짐을 대량으로 옮기는데 유용하여 상업의 발달, 도시의 발달, 거대 건축물의 축성 등 사회 전 분야 발달에 기폭제가 된다. 수레는 오늘날의 자동차, 기차 등으로 발전된 옛 사람들의 과학지식의 결정체이며, 문명을 특징짓는 잣대와도 같은 것이다. 일찍이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수레의 중요성을 언급한 바 있다. 수레라는 운송수단이 있으면 교통이 발달하고, 또한 각 지역간의 물자가 오가며 국가의 부를 증진시킨다. 고구려는 수레를 장려했디 때문에 전국적인 유통망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이는 국력증강에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상업정책으로 고구려는 북위와 매년 금 200, 백은 400근이나 되는 엄청난 교역을 할 수 있었다.

                                          

 3. 높은 수준을 갖춘 문명대국

"
나무를 베거나 말에 먹이를 주는 천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서적을 좋아하였을 뿐 아니라, 사통팔달한 거리에 각각 커다란 구조물을 설치하여 이를 경당이라 하고, 자제가 혼인하기 전 주야로 여기서 독서하면서 활쏘기를 즐겼다. 책은 『오경』과 『사기』, 『한서』, 범엽의 『후한서』, 『삼국지』, 손성의 『진춘추』, 『옥편』, 『자통』, 『자림』이 있었고 또 『문선』이 있어 이를 소중히 여겼다."                                                      

『구당서』「고구려전」

위 기록에 의하면 당시 고구려인들은 일반 평민들까지 서적을 좋아할 만큼 대단히 학구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고구려의 교육수준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 높았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당 태종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낼 때 사신으로 뽑힌 주자사에게 고구려의 학문수준이 매우 높고, 학문을 중히 여겨 고구려의 학문수준이 당과 동등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당 태종이 고구려를 문화강국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또한 5 16국시대 혼란을 피해 많은 중국인들이 고구려로 넘어왔다가 이후 남북조시대 들어서 중국이 안정되자 많은 귀화 중국인들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이들이 중국으로 건너가자마자 이들은 높은 벼슬을 받았다. 이는 고구려라는 입김과 함께 이들이 고구려에서 학문을 제대로 배워, 높아진 그들의 학문수준을 유감없이 발휘했음을 보여준다.

즉 당시 고구려의 학문수준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배움에 대한 높은 학구열... 이것은 고구려가 강력한 제국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의 축성술 또한 상당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의 성은 중국의 성들과 달리 자연환경을 이용하여 쌓았고 중국의 성들이 벽돌을 이용한데 비해 고구려의 성은 돌로 쌓았기 때문에 적군의 침입에도 견고하게 방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는 성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성을 쌓을 때 계단식으로 안으로 들여서 쌓았다. 고구려 성은 방어시설로 대표적인 시설물인 치, 옹성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치는 성을 둘러싼 성벽 중 凸모양으로 볼록튀어나온 부분으로 사방의 적을 공격할 시 유리하였다. 옹성은 성문을 둥그렇게 말아 쌓은 방어시설로 적군을 가두어 섬멸하는데 유용한 방어시설이다.

이러한 축성술 덕분에 중국인들은 고구려가 성을 잘 쌓고 잘 지킨다고 평가하였다.

일찍이 수나라, 당나라가 고구려를 이기지 못한 것도 이러한 고구려의 독특한 성 구조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고구려가 뛰어난 문화수준을 갖춘 문명국임을 보여준다.

대개 고분벽화들은 여름철 바깥과의 온도차이로 이슬이 맺히는 현상이 일어나 벽면이 번들거리고 물감이 흘러 제대로 본래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보통이다. 또한 벽면에 칠한 석회가 떨어져 나가 그림 자첵 사라지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오회분 4호묘를 비롯한 많은 고구려 고분 벽화들은 원래의 색을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다.

이는 과학적 지식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려진 것으로 이러한 기법 덕택에 고구려 고분벽화는 본래의 색을 잃지 않고 오늘날 까지 남아있을 수 있었다. 이는 고구려인의 벽화 처리 기술이 당대 세계 최고의 기술을 보유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 고분벽화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가받는 벽화는 단연 사신도 벽화이다. 사신은 동서남북 4방위의 수호신으로 동쪽의 靑龍 서쪽의 白虎 남쪽의 朱雀 북쪽의 玄武이다. 사신도 고분벽화는 뛰어난 생동감과 화려한 색채를 자랑하여 예술적 가치가 대단히 높은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고구려는 뛰어난 천제관측기술을 지닌 과학강국이었다. 고구려 시대 하늘을 그린 천상분야열차지도는 서기 1세기 경 국내성의 하늘을 그린 천문도라고 한다.

천상분야열차지도에 그려진 황도 28수와 북두칠성은 그 당시에 그러한 천문관측이 가능했는가를 의심할 정도로 뛰어한 천문관측기술을 고구려가 보유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세종실록지리지』 「평양부」에는 고구려에 천문대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일자라 하여 천제관측과 관련된 천문관리가 존재하기도 하였다. 천문학의 발전은 고구려인으로 하여금 근해 항해나 초원이나 대륙의 먼 거리 여행을 가능하게 하였고 농업과 어업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으며, 고구려인들의 정신세계를 풍부하게 하는데도 기여했다. 고구려의 천문학은 백제와 신라, 왜에도 전파되었고,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렇듯 고구려는 우리가 상상했던 이상으로 중국을 능가하는 뛰어난 문명을 지닌 대제국이었다. 그래서 고구려 연구가인 김용만 선생은 고구려를 <문명대국>이라 표현한 바 있다.

 

 4.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진 또 하나의 중국, 천자국天子國 고구려
고구려는 우리 역사상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진 유일한 국가였다. (정식사서로 인정받지 못한 한단고기에 의거하면 천자, 천손은 우리 민족이고 지나(중국)는 천자의 개념을 도용한 것이라 한다)

고구려의 위대한 정복군주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은 독자적인 연호 영락(永樂)을 정함으로써 중국과 대등한 국가임을 선포하였다.

고구려가 연호를 정했다는 것은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 아니라는 얘기인데,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중국 사학자들의 주장은 이런 기본적인 상식조차 무시한 처사이다.(한단고기를 보면 고구려는 국초부터 연호를 사용했다고 씌여있다. 추모성제:다물) 광개토호태왕 사후 아들 장수태왕에 의해 세워진 광개토태왕릉비에 당시 고구려인들의 천하관이 잘 담겨있다.

호태왕비를 보면 고구려인들은 스스로를 "천손"이라 부르는데 이는 하늘의 자손이라는 뜻으로, 중국의 천자와 동격이다. 그리고 시조 추모성제를 천제지자, 일월지자로 표현하는데 이는 말 그대로 하느님의 아들 천자를 말하는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고구려 임금이 하늘의 명을 받아 세상을 다스린다고 믿었다. 그리고 광개토호태왕의 위력이 사해에 떨쳤다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서 사해는 중국 천자만이 쓸 수 있는 것으로 고구려가 사해라는 표현을 사용했음은 고구려가 천자국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모두루 묘지명을 보면 고구려를 "천하사방 가장 성스러운 곳"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고구려의 천하관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중원 고구려비를 보면 고구려가 신라를 동이라 표현하는데 이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하여 주변국을 오랑캐로 보는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엿 볼 수 있다. 신채호 선생이 쓴 『조선상고사』를 보면 고구려가 순 우리 말로 가우리라고 한다고 기록하였는데, 가우리는 중앙, 중경, 중국을 의미한다고 한다.

고구려의 천하관이 중국 천하관과 다른 것은 중국은 자신들의 천하관만 인정하는 편협하고 폐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비해 고구려는 자국의 천하관과 함께 다른 지역의 천하관과 공존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는 고구려 직할지인 1차 천하관, 고구려의 속국들을 포함하는 2차 천하관, 그리고 병립하는 몇 개의 천하로 구성되는 동아시아 전체를 3차 천하관으로 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구려는 자신들의 천하관을 독자적으로 세움과 동시에 다른 지역의 천하관을 인정하는 다원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폐쇄적인 중국 천하관이 아닌 개방성을 가진 고구려야말로 진정한 천하관을 지닌 천자국이라 할 수 있다.

                                                  

 

 

5. 군사강국 고구려

고구려는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국가였을 뿐 아니라 군사력 또한 막강한 군사강국이었다. 고구려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동아시아를 지배한 천자국이었다. 고구려의 건국지는 오늘날 남만주 일대로 이 곳은 기본적으로 산이 많고 평야가 부족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고구려는 일찍이 주변 지역을 약탈하여 식량을 공급하였다. 이는 고대 유목민의 유속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는 국초부터 강력한 국력을 과시하여 이에 위협을 느낀 이웃 국가 한나라가 책구루에 교역을 허가하여 고구려의 비위를 맞추는데 급급하였다.

고구려 3대 대무신왕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낙랑국과 당시 북만주 일대를 지배한 단군조선 이후 등장한 강국 부여를 정복하여 동북아의 패자로 급부상하였고, 5대 모본왕 때는 한나라를 공격하여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차지하였다. 삼국사기를 보면 "재위 2년 그 해 봄 왕은 대군을 동원하여 한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하였다. 요동태수 채동이 은의와 신의로써 대접하므로 다시 화친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거하면 당시 고구려가 한을 공격할만큼 국력이 강성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고구려의 중심지인 동가강 유역에서 이들 지역은 굉장히 먼 거리로, 고구려가 이 지역을 습격하여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고구려가 막강한 기마군단(개마무사병)을 보유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8대 신대왕 때 "후한이 대군을 이끌고 침입했으나 명림답부가 좌원에서 한의 군대를 격파하여 한 사람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당시 고구려의 국력을 가늠하게 할 수 있는 기록이라 하겠다.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룩한 광개토호태황의 정식명칭은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으로 이는 '국강상에 묻힌 나라의 영토를 크게 넓히고 백성들을 평안하게 해준 위대한 왕'이라는 뜻이다. 그 시호 답게 광개토호태왕은 사방으로 영토를 크게 개척하여 북으로는 시베리아, 서북으로는 동몽골, 동으로는 연해주, 남으로는 한강, 서로는 요서지역과 황하유역까지 차지하였다. 그의 아들 장수태왕은 고구려를 더욱 부강하게 만들었다. 장수태왕은 당시 국제정세를 이용하여 고구려의 국력을 키웠다.

고구려의 강성기인 서기 5세기 경 당시 중원은 북쪽의 북위, 남쪽의 남조로 나뉘었는데 당시 막강한 국력을 자랑한 북위가 고구려에 꼼짝못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있다.

① 고구려가 북위 왕실의 계보系譜를 바치게 하였고 북위는 고구려의 요청에 따라 북위 왕실의 계보를 고구려에 바쳤다
.

일반적으로 한 나라의 왕실의 계보(족보)는 곧 그 나라의 역사서인데, 한 나라의 역사서를 바치게 할 수 있는 나라는 그 나라의 상국上國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당시 주 왕실이 여러 제후국들의 계보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그 나라들의 상국 즉 주나라가 중원의 천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구려가 북위 왕실의 계보를 바치라고 요구하고 북위가 왕실계보를 바친 것은 당시 북위의 국력보다 고구려의 국력이 더 강하였음을 시사한다 할 수 있다
.

②장수왕이 죽자 북위의 고조가 소위모(흰색모자)와 포심의(상복)를 입고 동쪽 교외로 나가 애도를 표하는 의식을 거행하였고, 북위의 세종은 508년 고구려 시조를 제사지내는 고려묘라는 사당을 세웠다
.

신라 무열왕이 죽었을 때 당고종이 애도를 거행한 적은 있으나 사당까지 세우고, 임금이 직접 행하지는 않았다. 중원의 어떤 나라도 다른 나라의 왕이 죽었다고 상복을 입고, 왕이 직접 애도식을 주관하며 그 나라의 시조를 제사지내는 사당을 지어준 예는 없었다. 마찬가지로 고구려도 중원의 어느 왕이 죽었어도 직접 상복을 입은 적이 없다
.

남북조 시대 막강했던 북위가 이렇듯 고구려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우리는 여테껏 영광스러운 사실을 몰랐다. 이런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우리는 고구려의 진면목에 한 발짝 다가설 수 있는 것이다. 혹시 아는가? 만약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고구려는 엄청나게 강력한 대제국大帝國이고, 중국(북위)을 속국으로 삼은 천자국天子國이라는 것을.......

 

 

6. 천하의 중심 고구려
                      "세계 대전사에 빛나는 전사(戰史) 고수·고당(高隋·高唐) 대전
"

고구려가 강대국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 바로 고수·고당(高隋·高唐) 대전이라 하겠다
.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쳐들어 왔으나 오히려 고구려에 참패하였고, 당나라 또한 고구려를 쳐들어왔으나 패배의 쓴 맛을 보아야 했다. 특히 수의 고구려 원정은 수의 멸망을 야기했으니, 어떻게 보면 고구려가 수나라를 멸망시켰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①고구려와 수나라 대전


수나라의 고구려 침입은 경이적인 사건이었다. 고구려라는 나라를 치는데 무려 400만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400만 명, 이 숫자는 그 당시 중원 전체 인구의 약 10분의 1로 당시 수나라가 고구려를 치는데 온 국력을 들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수대전(高隋大戰)의 첫 싸움은 고구려의 요서침공에서 시작되었다. 중원을 통일한 수 문제(文帝)는 수나라가 고구려와는 비교도 안되는 큰 나라이니 까불지 말고 어서 항복하라는 오만방자한 국서를 보냈고, 이에 당시 고구려 왕인 영양왕은 강이식(姜以式) 대장군의 주청을 받아들여 고구려병 5만과 말갈병 1만을 합한 도합 6만명의 군사로 수나라의 영주를 공격하였다.¹

우리는 고구려가 항상 방어만 해온 수동적인 국가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역사교육의 탓이다. 사실 고구려는 방어만 한 수동적인 국가가 아니라 오히려 적국을 공격할 역량을 지닌 능동적인 국가였다.(이는 모본왕의 한 침공에서 알 수 있다)

113
만명의 군사로 고구려를 침공한 수 양제는 고구려의 요충지 요동성을 포위하였다. 하지만 고구려의 방어가 철벽같이 뛰어나 도저히 함락할 수 없자 우문술, 우중문을 불러 별동대 30만을 주고 고구려의 도성인 평양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

고구려가 수나라 30만 대군을 물리친 살수대첩(薩水大捷)에서 우리는 한 가지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사실 살수대첩의 빛나는 승리는 패강(浿江:학계에서는 대동강이라 주장하나, 여러 서적을 고찰해볼 때 패강은 대동강이 아닌 랴오허 강 한 지류)승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패강대첩이란 무엇인가? 이 전투는 수나라 해군 총독 내호아(來護兒)가 패강에서 왕제(王弟) 건무(建武)가 이끄는 고구려 수군에 패배한 전투이다. 이 전투로 수나라 수군은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져 우문술(宇文述)이 이끄는 수나라 별동대(30만 대군)에 식량을 원조할 수 없었고, 이에 수나라 별동대는 굶주림에 허덕였다.  수나라 군의 사정을 꿰뚫은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은 거짓으로 7번 패하여 수나라 군을 살수까지 유인한 후 살수에서 공격하니 30만 대군 중 살아 돌아간 자가 2,700여 명이었다. 이것이 고구려 전사(戰史)에 길이 빛나는 살수대첩(薩水大捷)이다. 우리는 살수대첩의 공을 을지문덕 장군의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살수대첩은 을지문덕 장군이 없었으면 이루어지지 못했을 정도로 을지문덕 장군의 공은 크다
.

하지만 살수대첩의 주역을 을지문덕 장군 한 사람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살수대첩에는 숨은 주역이 또 한 사람 있었으니 바로 왕제(王弟) 건무(建武)이다. 건무 장군의 패강 승전이 있었기에 살수대첩이라는 빛나는 전사가 나올 수 있었다. 신채호 선생은 살수대첩의 전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

"
고구려가 이 때(건무가 내호아의 수군을 박살 낸 패강승전을 말하는 것) 이미 이길 지위를 차지하였으니 만일 전공의 차례를 따진다면 왕제 건무가 을지문덕보다 앞섰다고 할 것이다. 왕제 건무의 공이 이같이 컸지마는 역사를 읽는 사람들이 흔히 을지문덕만 아는 것은 무슨 연고인가? 사마온공(司馬溫公)의 통감고이(通鑑考異)에 내호아가 양식 배를 잃지 아니했더라면 우문술의 살수패전이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대개 옳은 말이다
."

단재가 지적했듯 살수대첩은 을지문덕 장군 혼자만의 공이 아니다. 그렇다고 건무장군의 공이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살수대첩의 공은 을지문덕 장군과 건무 장군, 그리고 나라를 지키고자 한 모든 고구려인들의 공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인들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군신관민이 일치단결하지 않았다면, 을지문덕 장군과 건무장군이 없었다면 고구려의 빛나는 승리는 거머쥘 수 없었을 것이다
.

수나라는 거듭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무참히 패하고, 거기다가 무리한 고구려 원정으로 백성들의 사기가 떨어졌을 뿐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가뭄으로 인한 식량 수급의 악화, 곳곳의 제후들의 발란(양현감 등)으로 인해 수 왕조는 건국 30여년 만에 망하고 중원 곳곳은 춘추전국시대를 방불하는 군웅할거시대(郡雄割據時代)가 도래하였다. 만약 고구려가 이 호기를 놓치지 않았다면 능히 장안에 입성하여 중원의 패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고구려가 이 호기를 놓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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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조선상고사, 신채호, 일신서적출판사
, 1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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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


  혼란에 빠진 중원을 통일한 사람은 당나라를 세운 고조(高祖) 이연(李淵)으로 그는 아들 이세민(李世民)의 활약으로 혼란에 빠진 중원을 통일, () 왕조를 개창하였다. 이 때 고구려왕은 패강승전의 주역 건무가 영양왕의 뒤를 이어 영류왕으로 즉위하였다. 영류왕은 과거 수나라를 물리친 패기와는 달리, 당에 대해 안전노선을 추구하였다. 그는 전란으로 황폐해진 요동지방의 복구에 신경을 써, 가급적 당나라와의 충돌을 피하려 하였다. 당나라 또한 건국 초라 나라 안정에 힘을 기울여 고구려에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그들은 수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호시탐탐 고구려를 노리고 있었다.

  당나라의 검은 속셈을 모르는 영류왕은 당나라가 원하는대로 하는 굴욕적인 외교를 펼쳐, 무사들의 불만을 샀고, 더군다나 고구려의 전통정책인 남수북진(南守北進:남쪽은 지키고 북쪽으로 진출한다)의 정책을 포기하고, 북수남진(北守南進:북쪽은 지키고 남쪽으로 진출한다)정책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영류왕의 정책은 무사계층의 불만을 낳았고, 특히 동부대인(기록에 따라 서부대인으로 나온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반발이 컸다.  영류왕은 당에서 파견한 첩자 진대덕이 고구려 산천을 유람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자, 그가 산천유람을 하도록 허락하였는데, 이는 진대덕으로 하여금 고구려의 기밀을 누출하게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또한 당의 요청에 따라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건설한 전승기념탑인 경관을 헐어버렸다. 경관을 헐어버린 것은 고구려인의 자존심을 짓밞는 처사이다
.

경관 사건으로 영류왕은 백성들에게 신임을 잃었으며, 또한 강경파의 비판이 두려워진 영류왕은 강경파의 거두인 연개소문을 천리장성 축조 책임자로 임명하였고, 그가 부임지로 가는 도중 죽일려고 모의하였으나, 낌새를 먼저 알아챈 연개소문이 영류왕과 온건파 대신들을 주살²하고 스스로 신크말치(태대막리지)의 자리에 올라 국정을 휘어잡고, 영류왕의 조카 보장을 왕위에 않히니 이 사람이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태왕(寶藏太王)이다. 정권을 잡은 연개소문은 대당화친책에서 대당강경책으로 정책을 선회하였고, 고구려와 당은 전란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

아버지를 폐위시키고, 형과 동생을 죽여 제위에 오른 당 태종(太宗) 이세민 644 7, 많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원정을 감행한다. 이세민은 전쟁의 명분으로 "고구려 개소문은 그 임금을 시해하고 백성들을 학대하고 있으므로 어찌 인정상 참을 수 있으리오"란 유교적 논리를 명분으로 삼아 자신이 일으킨 침략의 대의를 밝혔다.³


645
년 당 태종이 이끄는 당군은 고구려의 요동지방을 차례로 유린한다. 이미 요동성과 개모성, 백암성 등 여러 성이 당군에 함락되고 당군은 고구려의 요충지이자, 철의 산지인 안시성에 집결하였다.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구원하기 위해 대로(大盧) 고정의, 북부욕살 고연수(高延壽),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이 이끄는 15만 대군을 안시성에 급파하였다. 고연수고혜진은 고정의의 말을 듣지 않고 당군을 공격하다, 함정에 빠져 고구려 군사 3,6800명을 잃었고 자신들은 당의 포로가 되었다. 다행히 고정의가 이끄는 응원군이 와 당에 의해 전멸될 뻔한 많은 고구려군이 구원되었다.

일반적으로 당의 침입으로 안시성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고구려군이 패전했다고 알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물론 고구려가 요동성 등 주요 성들이 함락되는 위기를 맞았으나 아직까지 고구려가 우세한 입장이었다. 건안성의 승리에서도 그렇고 곳곳에 고구려군의 유격작전으로 당군은 피로한 상태였다. 『삼국사기』 보장왕 8년조 사론을 보면

"
유공권의 소설에 가로되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와 말갈을 합친 군대가 40리에 뻗치었는데, 이세민이 이를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빛이 있었다' 하였으며, '육군은 고구려군의 승리가 되어 거의 떨치지 못했고 염탐하는 자가 고하기를 이세적이 거느리는 흑기군이 포위되었다고 하자, 이세민이 크게 두려워했다'고 했다. 비록 스스로 빠져나왔다고 했으나, 위험함이 저와 같은데, 『신·구당서』와 사마광의 『자치통감』에는 이를 언급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자기 나라를 위해 부끄러운 일을 감추기 위함이 아닌가
"

라고 기록되어 있다. 주필산 전투에서 당군은 고구려군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음을 알 수 있다
.

당 태종은 이와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안시성을 공략하려 했으나, 안시성주 양만춘(陽萬春)의 끈질긴 방어로 성을 함락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성을 점령하기 위해 힘들게 쌓은 토산을 빼앗겼으며, 양만춘에 의해 당 태종은 한쪽 눈을 잃었다. 곧 겨울이 닥치고, 고구려군의 게릴라전에 지친 당군은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당나라군을 고이 보낼 고구려군이 아니었다
.

고구려군의 집요한 추격과, 퇴로를 막은 일단의 고구려군에 의해 당으로의 퇴로가 막힌 당 태종은 늪지대가 펼쳐진 요택으로 퇴로를 삼았다. 곳곳에 진흙펄이 펼쳐진 요택지방으로의 퇴로는 당군에게 너무 가혹한 퇴각길이었다. 당 태종 스스로가 말 안장에 통나무를 대어 직접 나를만큼 고된 행군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군의 추격은 늦춰지지 않았다
.

한편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만리장성을 넘어 산해관에 육박해 있었다. 이 때의 상황을 조선상고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
연개소문이 요동의 싸움을 양만춘, 추정국 두 사람에게 맡기고 정병 3만으로 적봉진(赤峰鎭:지금의 열하부근)으로 나가 다시 남으로 나아가 장성을 넘어 상곡(上谷:지금의 하간) 등지를 습격하니 당의 태자 치()가 어양(漁陽)에 머물러 있다가 크게 놀라 급함을 알리는 봉화를 들어 횃불이 하룻밤에 안시성까지 연락되었다. 당 태종은 임유관 안에 변란이 일어났음을 알고 곧 군사를 돌이키려고 하였다. 오골성주 추정국과 안시정주 양만춘은 그 봉화로 연개소문이 이미 목적지에 이르렀음과 당 태종이 장차 도망할 것을 짐작하고 추정국은 전군을거느리고 안시성 동남쪽 좁은 골짜기로 몰려나와서 당의 군사를 돌격하고, 양만춘은 성문을 열고 급히 내달아 공격하였다. 당의 군사가 서로 짓밟으며 도망했다
."

                                                            (중략
)

"
연개소문이 지나(支那:중국)에 침입한 것도 기록에는 보이지 아니하였으나, 오늘 북경 조양문(朝陽門) 7리지(里地)의 황량대로 비롯하여, 산해관까지 이르는 동안에 황량대라 이름하는 지명이 10여 처인데, 전설에 '황량대'는 당 태종이 모래를 쌓아 양저(糧儲:양식 쌓은 곳)라고 속이여, 고구려인이 내습하면 복병으로 요격하였다 한 곳이라 하니, 이는 연개소문이 당 태종을 북경까지 추격한 유적이며, 산동·직예 등지에 띄엄띄엄 '고려' 2자로 관한 지명이 있고, 전설에는 이것이 다 연개소문이 점령하였던 고지라 하며 가장 최저(最著)한 자는 북경 정안문(定安門) 60리 허의 고려진(高麗鎭)과 하간현(河間縣) 서북 12리 허()의 고려성(高麗城)인 바 …
"

학계에서 아직 정식사서로 인정받지 못한 한단고기(桓檀古記)에 의하면 당나라군이 고구려에 침입했을 때부터 계속 연패하였으며, 중국사서와 삼국사기에 기록된 당 태종에 사로잡힌 고연수 등은 오히려 한단고기를 보면 안시성 동쪽에서 안시성을 응원하며 당 태종을 괴롭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놀라운 것은 고구려군이 퇴각하는 당 태종을 추격하였고, 추격에 지치고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진 것을 안 당 태종 이세민이 연개소문에게 항복을 청했고, 연개소문은 양만춘, 추정국을 거느리고 당의 수도 장안성(長安城)에 입성하여 당 태종의 항복을 받은 후, 하북, 산서, 산동, 강좌(양쯔강 이북) 지방을 할양받았다고 적혀있다.  

 

한단고기가 현재 세인으로부터 찬반론을 일으키고 있고, 학계에서는 위서라 단정짓지만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 기사의 석연찮은 점(당 태종의 병력 손실이 얼마 되지 않는 점, 안시성 전투를 빼고 모든 전투에서 당이 승리했다는 점), 삼국사기의 미묘한 의문을 보건대 한단고기 관련기사를 무시하기보다는 일단 관심을 갖고 검토해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고수대전, 고당대전이 고구려의 승리로 돌아간 것은 비단 고구려와 당뿐만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 정세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당이 패전함으로써 한반도를 직접 영유하려던 당의 계획은 죄절되었는데 이는 동아시아 전체를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으려던 계획이 좌절된 것을 의미한다. 당은 함락시킨 고구려성을 당의 행정구역으로 편재해 이 지역을 직접 지배하려 하였고, 또한 동아시아의 모든 나라를 수직적인 조공관계로 재편함으로써 자신들의 천하관을 관철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런 당의 의도가 고구려에 패전함으로써 좌절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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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만의 천하를 관철시키기 위해 다른 국가의 천하를 짓밟으려 했던 당 태종은 결국 또 다른 천하관을 가진 또 하나의 중국 고구려에 의해 철저히 패배하였다. 오히려 자신은 고구려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해 죽고 만 것이다. 고수·고당대전의 승리로 고구려의 천하관은 더욱 굳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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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대전·고당대전의 승리로 고구려는 예전처럼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진 동방의 패자임을 실력으로 입증한 셈이다. 고수·고당대전의 승리는 고구려만의 것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 승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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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단고기에 의하면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였다는 대신 영류왕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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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실 당 태종의 명분은 허황된 이론일 뿐이다. 당 태종은 자신이 황제 위에 오르기 위해 자신의 형과 동생을 죽였고, 아버지를 강제로 폐위했으며, 동생의 아내를 능욕한 천하에 둘도 없는 대죄인이다. 그런 그가 어찌 구국을 위해 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에게 유교적 논리를 내세울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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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당나라가 고연수 15만 대군을 물리치려면, 이보다 많은 수의 군사를 동원해야 하는데 당군이 동원한 군사는 고작 3만명이다. 또한 고연수가 항복한 6 23, 고구려군과 맞서 선봉에 나섰다가 죽은 왕군악의 부대는 무엇을 말할까? 만약 고연수 15만 대군이 항복했다면 왕군악 부대는 고구려군과 싸울 필요가 없다. 이는 안시성 구원군 15만 대군의 실질적 주력이 고연수가 이끄는 부대가 아닌 대로 고정의가 이끄는 군대라는 것을 말해준다. 즉 왕군악의 군대를 물리친 것도, 고연수가 이끈 3만의 고구려군을 구원한 것도 고정의가 이끄는 고구려군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