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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구려의 후예 라후족

monocrop 2007. 2. 28. 02:56

라후족은 동남 아시아 황금의 삼각지대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는 55개 소수종족중의 한 종족으로써 중국 운남성 서남부에 25만, 미얀마 서북부 15만, 태국 북부 4만, 라오스 서북부 1민명 정도가 살고 있으며 필리핀 북부에도 일부가 살고 있지만 아직까지 인구수가 밝혀진 것이 없다. 1)

특히 라후족은 언어, 민속, 탄생설화, 유전자, 체형등이 우리민족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밝혀져 우리민족과의 종족적 동질성에 관해 국내 학계및 독서계에 주목을 받아왔다. 2) 때문에 이 연구는  라후족의 기원에 대해 역사학적으로 추적하므로써 과연 그들이 우리민족과 어떤 종족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구명하기 위해 실시했다.
라후족은 오늘날까지 문자생활을 해오지 않아 그들의 역사를 기록 해 놓은것이 없고, 최근에서야 구전되어 오던 일부 내용을 한자(漢字)를 사용해서 기록한 것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라후족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부득이 우리나라와 중국측의 기록을 토대로 조사하고, 빈약하나마 그들의 최근 기록과 구전을 보충자료로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연구에 필요한 자료의 부족을 극복하기 위해 연구자는 먼저 라후족이 우리나라에서 이동해간 종족이였다고 가정을 하고, 우리민족 가운데 중국으로 집단적으로  이주해간 역사적 배경을 먼저 살펴 보았다.

         [ 모용외는 번번히 부여 사람들을 잡아다가 중국에 팔았다. 이것을 중국에서는 불쌍히
          여겨 조서를 내려 이들을 돌려 보내고, 이 후로는 부여 포로를 매매하지 못하도록 금
          지 하였다 ] 3)

연나라 모용외가 수시로 침략을 해서 부여 사람들을 잡아다가 중국에 노예로 팔아 먹었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모용외에게 붙들려간 부여 사람들은 노예 신분 이었으므로 라후족처럼 집단을 이루어 종족적으로 흔적을 남길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 관구검(母丘儉)이 구려(句麗)를 치자 구려왕(宮; 太祖大王)은 옥저로 달아났다. 이에
          관구검의 군사는 계속 진격해서 옥저의 여러 부락을 점령하고, 포로로 잡아간 사람이
          3천명이나 되었다 ] 4)

관구검은 연나라 사람이다. 고구려에 침입해서 3천명을 잡아 갔다는 기록인데 우리측의 기록인 삼국사기에는 태조대왕때의 사건이 아니고 그 후대인 동천왕(東川王 20년,246 AD) 때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 ...관구검의 군사가 뒤를 쫒아 고개를 넘어 수레를 매달고 말을 묶어 가지고 환도산(丸
          都山)에 올라 그 도읍을 무찔렀다. 이 때 목베고 사로잡은 고구려 백성이 만여명이나
          되었다. 이에 위궁(位宮; 山上王)은 혼자서 아내와 자식만 대리고 멀리 도망했다 ] 5)

또다시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입해서 고구려 수도인 환도성을 빼앗고 상당수의 고구려 백성을 붙잡아 갔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변방지역에서 붙들어간 이민족의 포로들은 대개 군사들에게 전리품으로 나누어 주었거나 노예로 팔았으므로 팔려간 그들이 집단적으로 자립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 강제(康帝) 건원 원년(東晉 4대왕; 343 A D)에 모용외의 아들 황(晃)이 군사를 거느리
          고 와서 치자 고구려왕 유대(劉代)가 그와 더불어 싸워서 패해서 말 한필만 타고 도망
          했다. 황은 기세를 몰아서 그를 쫒아 환도(丸都)에 이르러 그 궁실들을 불태우고 남자
          5만 여명을 포로로 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 6)

이 기록은 삼국사기에도 실려있다. 즉, 고국원왕(故國原王) 12년에 있었던 사건이다. 당시 고구려의 인구로 보면 실로 엄청난 숫자의 우리나라 백성이 포로가 되어 중국으로 끌려 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포로들은 모두 남자였으므로 중국에서 가정과 부락을 이루어 집단적으로 살았으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이상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중국으로 이주한 우리민족의 일부가 종족적인 특징을 유지하며 오늘날까지 살아 남았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마도 뿔뿔이 흐터져 중국 사람으로 동화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의 기록은 중국으로 붙들려간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고구려 사람으로 살고 있을 가능성을 높혀주고, 라후족과 연관지어 생각 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어 주목을 끈다.

          [ 총장 2년(唐高宗 總章 2年, 669 A D)에 고구려 백성 3만명을 강회(江淮)와 산남(山
           南)으로 이주 시켰다 ] 7)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망해 많은 수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당군에게 포로로 붙들려간 기록이다.

다음 당군은 그들의 전리품으로 얼마만한 고구려 사람들을 끌고 갔는지 우리측 기록인 삼국사기를 살펴보기로 하자.

           [ 당 총장(唐總章) 2년(669 A D) 4월, 당 고종은 우리나라 사람 38,300호(戶)를 강회
            남쪽과 산남, 경서 제주의 광막한 땅에 옮기었다] 8)

다음은 그 이후에 이었던 중국측 기록이다.
[ 장(寶臧王)은 또 말갈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는데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 제
            (당고종)은 그를 소환하여 공주로 추방하고, 그 백성들을 하남(河南), 농우(農右) 등
            지에 나누어 살게 했다 ] 9)

앞에서도 언급 했드시 이상의 삼국사기와 당서의 기록은 라후족의 기원과 관련지어 볼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삼국사기에 붙잡혀간 고구려 백성의 숫자를 38,300호라고 기록했드시 당시 당군은 고구려 유민들을 가족단위(家族單位)로 붙들어 가서 정착시켰다는 점이다. 당시 당나라는 중국민족과 적대적인 강력한 고구려를 아예 말살시켜버리려는 초토화 정책을 써서 20만명이 넘는 고구려 사람들을 붙잡아간 것이다. 아무튼 고구려 백성들은 남부여대하고 중국 땅으로 끌려가서 대를 이어 가정을 이루고 살았을 것이다.

다음은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고구려 포로들은 광막한 땅에 옮겨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허허벌판에서 고구려 포로들만 따로 살게 한것이다. 이것은 고구려 포로들이 그들끼리 마을을 이루고 살면서 고구려의 언어, 풍속등을 지키며 독자적으로 살았을 가능성을 시사 하고 있다.
당시 고구려 백성들이 당군에게 포로로 끌려가서 정착했던 장소를 알아보자. 10)

         (1)  강회남(江淮南) .......... 지금의 안휘성과 강소성 일대
         (2)  산남(山南)   .............. 지금의 사천성과 감숙성 남부 일대
         (3)  경서(京西)   .............. 지금의 감숙성 북부 일대
         (4)  하남(河南) .................. 지금의 하남성
         (5)  농우(農右) .................. 지금의 청해성 서부및 신장 위그르 자치주

                지    도 ; 고구려 포로 정착지
                --------  

여기서 라후족의 기원을 찾기 위해 꼭 밝혀야 할 문제는 과연 고구려 포로들이 언제까지 중국인으로 동화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살아 남았냐는 것이다.
먼저 강회남(안휘성, 강소성)과 하남으로 끌려갔던 고구려 포로들을 살펴보자. 이들은 당시에도 인근에 중국인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가장 먼저 중국인으로 동화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 시기는 아마도 고구려인 이정기(李正己)가 치.청(淄.靑) 15주를 점거한 후 그의 손자가 되는 이사도(李師道) 때에 이르러 멸망하고 당의 중앙집권이 강화된 이후의 일 이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이를 뒷받침 해 줄만한 기록이 남아있다.

             [是以自李正己襲奪其業後 淄靑一鎭亦與河同風 遂爲唐代中央政府之鉅愚 推求其故 實
             由其統治者本從河朔胡化集團中分出也 ] 11)

             [ 初正己盜有靑운十二州 傳襲四世垂五十年 人俗頑驚 不知禮敎...... ] 12)

위의 기록은 이정기 일가가 55년 동안 점거하고 있던 치.청등 12개 주는 풍속이 당나라와 아주 달랐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래서 당나라는 이정기를 토벌한 후(819 A D) 주민들을 중국식으로 교화를 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다. 위의 기록에 의해서 중국의 강회남과 하남지역은 고구려가 망한 후 150년 동안이나 이정기를 비롯해서 주민들이 고구려의 풍속을 지키며 살았다는 사실을 유추 해석해 볼 수 있다. 그때의 상황은 이정기가 망하고 19년 후(838 A D) 이정기의 본거지였던 산동반도를 여행했던 일본의 구법승(求法僧) 원인(圓仁)의 일기체 기행문에서도 발견된다. 13) 원인은 그때까지도 많은 신라인(고구려인) 부락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의 기록에 의하면 중국의 하남과 강회남 지역의 고구려 유민들은 고구려가 망하고 나서도 1백5십년 이상 중국인으로 동화되지 않고 고구려의 유풍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점차 중국사람으로 동화되어 오늘날 그 일대는 옛 고구려 풍속 몇가지만이 흔적처럼 남아있을 뿐이다.

다음은 경서와 산남지역으로 끌려가서 정착한 고구려 유민들이다. 이곳도 중국인의 본거지인 중원과 가까웠던 지리적 여건상 당나라 말엽까지는 고구려 유민들이 모두 한족으로 동화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농우(農右)로 끌려간 고구려 포로들이다. 당시의 농우는 지금의 청해성 청해호(靑海湖) 부근, 감숙성, 신장 위그르 자치주로써 오늘날 까지도 한족들이 발을 붙이기가 힘든 땅이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장족, 위그르족이 주가 되어 살고 있으며 이들이 독립을 하겠다고 폭동을 일으켜서 중국 정부가 진압을 하고 있는 상황에 있다. 그러면 당나라는 왜 일부 고구려 포로들을 당시로는 변방 불모지인 농우로 보냈을까 하는 점을 알아 보자.

고구려가 망하고, 고토에 남은 백성들이 고구려 회복운동을 일으키자 당나라 조정에서는 이를 무마할 목적으로 붙잡아왔던 보장왕 이하 신하들을 다시 고구려 땅으로 돌려 보네 자기네들의 감시하에 고구려를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보장왕이 말갈과 연결을 맺어 당나라를 배반하고 독립운동을 하자 이 낌새를 눈치챈 당나라는 보장왕은 공주(공주)로 귀양보네고 나머지 반란에 가담했던 백성들을 모조리 붙잡아 당나라의 서북부 변방 불모지 농우로 보네버렸다.  당나라 조정은 고구려 유민들에게 반란죄를 물어 가혹한 처사를 내린 것이다.

농우로 끌려간 고구려 백성들은 불모의 땅에서 마을을 이루고 그들 스스로 대를 이어가며 살아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음 기록을 보면 그들 주변에 한족(漢族)은 없었고, 아마도 강족(羌族)과 위그르족이 고원과 사막을 의지하고 살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 凡關內 有團結兵 秦成岷渭河蘭六州 有高麗羌兵 ] 14)  

위 기록에 의하면 진(秦), 성(成), 민(岷), 위(渭), 하(河), 란(蘭) 6주(오늘날 청해성 청해호 주변과 감숙성 남중부 일대)에 고구려(高句麗)와 강족(羌族)이 단결병(團結兵)으로 편제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단결병이란 변방에서 사는 사람들을 농한기에 군사훈련을 시켰다가 유사시에 군인으로 써먹는 향토병 성격의 군사조직 이었다. 이점을 고려해 보면, 고선지 장군의 서역 정벌군을 형성한 대부분의 병사들도 고구려 유민들이었을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 대장 고선지가 그리고 싸움을 맡았던 대부분의 병사들이 고구려 사람들 이었기 때문에 민족적인 일체감이 생겨 전투력을 극대화 시켰고, 이 힘은 천험의 천산산맥을 넘어 서역을 정벌하는 대 위업을 달성하는 원동력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위의 구당서 기록에 눈여겨 볼 부분이 있다. 바로 란(蘭) 6주에 고구려와 강족으로 편성된 단결병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농우로 붙잡혀 온 고구려 사람들이 그 지역의 선주민 이었던 강족과 인접해서 살았다는 근거를 제시해 준다.

그러면 그 후 농우지역으로 끌려갔던 고구려 사람들은 어찌되었을까 ?  아마도 일부는 당시 서쪽으로 몽고까지 세력을 떨치고 있던 티벳족과 그리고 일부는 이웃하고 살던 강족이나 위그르족으로 용해되어 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주체성이 강했던 일부 고구려 사람들은 서남쪽으로 이주를 해서 오늘날 운남성과 미얀마(버마) 서북부 일대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 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청해성, 감숙성의 농우지역에서 고구려 유민들과 이웃하고 살았던 강족(羌族) 일부와 또 자기네들의 종족적 기원을 같은 강족에 두고 있는 이족(夷族)들도 운남성으로 민족 이동을 해와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미얀마 서부 살윈강 중하류에서 살고 있는 카렌족들 마저도 자기네들의 종족 기원을 강족에 두고있는 것을 보면 어느땐가 농우지역으로부터 중국 서남부로의 대규모 민족 이동이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고구려 사람들과 오랫동안 이웃하고 살았던 이족의 언어, 풍속, 농사법 가운데는 우리민족의 것과 유사한 것들이 많이 발견되는 것이다.

그럼. 그들이 언제 농우지역에서 중국 서남부 운남지역으로 이주해 왔느냐가 풀어야할 다음 과제이다. 그들이 한결같이 티벳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 당시 청해성, 감숙성, 신장 위그르 일대가 티벳의 세력권에 있었던 10-13 세기 무렵에 민족 이동이 있었다고 쉽게 추측해 볼 수가 있다.

그럼. 강족 곁에서 살았던 고구려 유민들은 어찌 되었을까 ? 농우로 유배되었던 고구려 유민에 대해서 우리나라와 중국측 기록이 더 이상 없으므로 이제는 고구려 유민이었을 개연성이 높은 라후족이 어떤 경로를 통해 민족적인 엑소더스를 했을까 하는 문제를 라후족 편에서 추적해 보기로 하자. 라후족과 거의 동시대에 운남성 일대로 이주해 왔으리라고 추측되는 이족은 자체 문자가 있어 일부 기록이 남아 있지만, 라후족은 기록해 둔 것이 없다. 더욱이 몇십대를 살아 오는동안 인멸되어 남은것은 오직 빈약한 구전(口傳) 뿐이다. 라후족 구전의 대부분은 시가(詩歌)의 형태로 되어있다. 그 내용을 보면 중국 군대와 처절한 싸움을 담은 서사시적인 것이 많은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라후족은 수백년 동안 중국 군대와 싸우며 쫒겨 다니는 과정에서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구전 중 다음의 것은 그들의 종족적 기원을 밝히는데 주목할만하다.
 [ 라후족의 원거주지는 마메 무메이다. 중국과 싸워 패해서 포로가 되어 뻬핑, 천혜,
             를 거쳐 농우로 끌려와서 살았다. 현재 운남성, 미얀마, 태국 북부에서 살고 있는
             라후족은 모두다 농우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다 ]

그럼. 라후족의 구전에 나오는 지명들이 오늘날 어디인가 알아보자.
  
          (1)  마메 무메
                마메     ..............알 수 없다. 아마도 고구려때 평양에 마읍산(馬邑山)이 있었던 것
                             으로 보아 마읍산(馬邑山) 앞 들(평야) 가 아니었을까 ?    
                무메     ..............  알 수 없다.
           (2)  뻬핑  .................  당시의 북평군(北平郡), 오늘날 하북성 란하 동쪽, 진황도시 서
                               쪽, 당시 고구려의 서쪽 국경 15)            
           (3)  천혜(天內)  ....... 내몽고 남부 16)
           (4)  농우(農右)  ....... 청해성 청해호(靑海湖) 동남부, 당시의 농우도는 오늘날
                                신장 위그르 전역및 감숙성 일부 포함  

                 지도 ; 고구려 포로 이동및 라후족 이동경로
                 ------------------------------------

그들의 구전에 내려오는 이동경로와 정착지를 보면 그들 조상이 중국과의 전쟁에 패해서 붙잡혀 온 곳은 고구려 땅일 수 밖에 없다. 라후족의 출발지점(마메 무메)가 어딘가 불확실 하지만 그들이 고구려의 서부 국경지대 이였던 뻬핑(北平郡)을 경유했고, 서쪽으로 천혜(天內)를 거쳐 정착해서 살았던 곳이 바로 보장왕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려 했던 고구려 백성들이 끌려와 정착했던 장소 농우(農右)와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사실은 후세에 기록한 라후족의 역사서도 분명히 밝히고 있다.

          [ .... 所以古歌中的江西應是今靑海湖반的江西 ] 17)
          ( ...그러므로 옛 노래에 나오는 강서라는 곳은 지금의 청해호 서쪽을 이른다)
라후족이 고구려 유민들의 후예라면 운남성으로 이동하기 전에 농우에서 적어도 3-6 백년동안 살았을 것이다. 그 후 라후족은 이웃하며 살았던 강족(후에 이족)과 함께 서남방으로 이동해왔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라후족의 의식속에는 당나라 포로가 되어 오랫동안 대를이어 살았던 유배지 농우(農右)가 자기네들의 옛 고향으로 기억되어 있는 것이다. 더우기 오늘날 라후족이 사용하는 언어의 문법은 90% 이상, 그리고 풍속도 언어에 버금갈 정도로 우리와 같을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세계적으로 우리민족에게서만 발견되는 색동옷, 씨름, 호랑이 숭배, 소도(蘇塗)와 제천의식은 물론 정선 아리랑 가락을 부르고, 또 체질인류학(體質人類學)적으로 유전자와 체형이 우리민족의 것과 같은것을 보면 그들이 바로 고구려가 망한후 농우지역으로 끌려갔던 고구려 유민의 후예들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가 없다. 역사는 가끔 기적같은 사건을 만든다. 그러나 이 기적을 통해서 1,200년 전에 헤어진 동족을 찾는것은 오늘날 한반도에서 살고있는 우리의 민족적 과제이기도 하다.

중국 서남부, 미얀마 동북부, 라오스 서북부, 태국 북부가 접경을 하고 있는 일명 황금의 삼각지대 일대에는 약 50만명의 라후족이 살고 있다. 이 연구는 왜 라후족의 언어, 풍속, 탄생설화, 체질등이 우리민족과 그렇게도 유사한가 그 내력을 밝히기 위해 역사학적으로 고찰한 것이다.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망하고 옛 고구려 영토에 반당 독립운동이 일자 당나라는 붙잡아왔던 보장왕을 다시 옛 고구려 영토로 보네 무마하려 했다. 그러나 보장왕마저 반당집단에 연계되자 당나라는 보장왕을 공주(工州)로 귀양 보네고 고구려 백성 상당수를 당나라 서북부 농우로 보네 정착 시켰다.

세월이 흐르면서 다른 지역으로 끌려갔던 고구려 백성들은 모두 한족화(漢族化)가 되었는데, 오직 강족과 이웃하고 살았던 농우지역의 고구려 백성들은 10-13세기 중국의 서남쪽 운남지역으로 이주했다. 이 사실은 오늘날 운남성에서 거주하는 이족, 강족의 기록과 라후족의 구전과 일치한다. 즉, 고구려 유민의 후손들인 라후족은 고구려 옛 영토 마메 무메(?) - 하북성 동남부(뻬핑)) - 내몽고(천혜) - 청해성 서부(농우) - 운남성(대리)의 경로로 이동해왔음이 확실해 보인다.

라후(호랑이를 기르는) 라는 종족 이름은 그들이 포로로 붙들려 가서 정착한 이후에도 고구려의 예족(濊族)처럼 사당안에 호랑이 그림을 붙여놓고 숭배했으므로 중국 사람들이 이를 빗대어 불렀던 것이 오늘날 종족 명칭으로 정착해 버린 것이다.

 

※ 만일 이러한 사실이 사실이라면 망국에결과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로 이어지는지 알 수 있겠지요.

    일제때도 마찬가지고 라후족 이들이 정말로 고구려에 후손 또다른 우리라면 그들이 얼마나 피눈물    을 흘렸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 한편이 저려옵니다.  나라 잃은 민족에 참담함을 가장 잘보여주는 이가슴아픈 현실을 다시는 당하지 말아야 할 것 입니다.

           참 고 문 헌

    1. Anthony Walker, Peoples of the Golden Triangle  pp 172
    2. 김병호, 소설 치앙마이, 매일경제신문사 pp 220 - 296
    3. 房玄齡, 李延壽, 晉書 四夷傳 夫餘國
    4. 陳 壽 , 三國志 東夷傳 東沃沮
    5. 姚思廉, 魏徵 , 梁書 諸夷傳 高句麗
    6. 姚思廉, 魏徵,  梁書 諸夷傳 高句麗
    7. 歐陽脩, 宋기,  唐書 東夷傳 高句麗
    8. 金富軾, 三國史記 高句麗 本紀 第十 寶臧王 下
    9.  上同
   10. 孫進己(林東錫 譯), 東北民族源流 (地圖) 東文選
   11 劉 구  舊唐書 卷162 曺華傳
   12. 陳寅각,  唐代政治史術論稿, 中央硏究院歷史言語硏究所 特刊之三 民國 60年 臺北
   13. 圓仁, 入唐求法巡禮行記
   14. 劉 순,  舊唐書 卷43. 職官2
   15. 孫進己(林東錫 譯),  東北民族源流 (地圖), 東文選
   16.  上同
   17. 胡禮克,  拉祜族 歷史考 PP 1-5

출처 : 파랑새는 오늘도 비상을 꿈꾼다
글쓴이 : 다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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