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런 당 태종도 고구려 침공에 실패한 뒤 “만일 위징(당 태종에게 간언을 서슴지 않던 신하)이 있었더라면 나에게 이번 걸음을 하지 않게 했을 것”이라며 탄식했다. 중국 사서에서는 보이지 않고 ‘삼국사기’에만 나타나 있는 고구려군에 대한 당 태종의 공포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주필산 전쟁에서 고구려는 말갈과 군사를 합쳐 사방이 40리에 뻗치니 태종은 이를 바라보고 두려운 빛이 있었다. 육군(六軍, 중국 천자 군대의 총칭)이 고구려 군대에 눌려 거의 떨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척후(斥候)가 이세적의 대장기인 검은 깃발이 포위되었다고 아뢰니 황제가 크게 두려워했다.’
당 헌종 때 태자태보 벼슬을 지냈던 유공권의 소설에 기록된 당시의 상황이다. 그래서였을까. 당 태종은 죽으면서 고구려 침공을 중지하라는 유지를 내렸다.
물론 당 태종은 1차 원정이 실패로 끝난 뒤에도 군사를 보내 재차 고구려 침공에 나서기도 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렇지만 300년 당나라 역사에서 최강의 황제였던 태종이 채 이루지 못한 고구려 정벌의 꿈은 묘하게도 그가 그토록 못미더워했던 아들 고종에 의해 이뤄졌다.
고종은 마음도 약하고 몸도 병약한 인물이었다. 심신이 쇠약해 황후인 측천무후가 섭정해야 했던 황제였다. 그런데 묘하게도 고종은 고구려 침공에 집착했다. 병이 나 측천무후에게 섭정을 맡겼음에도 고구려 정벌을 단행하려다 무측천의 반발로 중지하기도 했다. 일본의 역사소설가로 대하소설 ‘측천무후’의 작가인 하라 모모요는 고종이 무측천에 대한 열등감의 발로로 적극적인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고종 역시 678년 토번의 침공으로 안서 4진을 잃자 고구려 정벌을 후회했다.
동국대 이기동 교수의 논문을 보면 당 태종은 “고구려는 요수를 건널 수 없었고, 백제는 감히 황해를 초월할 수 없었는데도 지난날 빈번하게 해마다 군대를 보내면서 널리 나라의 물자를 허비했다. 비록 지난 일이지만 나는 이를 후회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렇듯 고구려 멸망의 앞뒤를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고구려 멸망의 원인을 단선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역사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좋은 자세가 아닌 듯하다. 다만 역사의 우연이 펼쳐졌던 밑바탕에 대한 이해가 그나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최근 동국대 이기동 교수는 고구려 멸망 원인에 대한 주목할 만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교수의 논지는 바로 고구려가 외교적 실착으로 망했다는 것이다. 최근의 대미·대북정책이 국운을 좌우할 사회적 아젠다로 설정된 현실에 비춰볼 때 이교수의 분석은 눈길을 끈다. 이교수는 ‘고구려가 멸망한 것은 당이 한창 중천에 높이 뜬 태양인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고구려는 660년대의 격류에서 잠시 발을 뺄 적절한 계기를 포착하는 데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668년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2년이 흐른 670년에는 토번과 싸움에서 참패당한다. 당의 대외정책도 공세에서 수세로 바꾸었다. 당이 신라와 전쟁을 계속하지 못한 채 물러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 뒤 측전무후 집정 때 명재상인 적인걸이 692년 안서의 4진(鎭)을 포기할 것을 상소했다. 적인걸은 이 상소에서 하늘이 낳은 사이(四夷)는 모두 선왕이 봉한 역외(域外)라고 강조한 데서 알 수 있듯 당나라도 일단 전성기가 지나자 현상 유지에 급급한 형편이었다.
중천에 뜬 태양이 어느덧 기울기 시작했던 것이다. 고구려가 더욱 유연한 자세를 취해 무후(武后) 집권 초기의 신경질적 고구려 침략 야욕을 조금이라도 완화시켰더라면 머지않아 대외 위기가 사라져 그 뒤 오랫동안 안녕을 구가(謳歌)했을 것이라고 이교수는 주장했다.
‘주필산 전쟁에서 고구려는 말갈과 군사를 합쳐 사방이 40리에 뻗치니 태종은 이를 바라보고 두려운 빛이 있었다. 육군(六軍, 중국 천자 군대의 총칭)이 고구려 군대에 눌려 거의 떨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척후(斥候)가 이세적의 대장기인 검은 깃발이 포위되었다고 아뢰니 황제가 크게 두려워했다.’
당 헌종 때 태자태보 벼슬을 지냈던 유공권의 소설에 기록된 당시의 상황이다. 그래서였을까. 당 태종은 죽으면서 고구려 침공을 중지하라는 유지를 내렸다.
물론 당 태종은 1차 원정이 실패로 끝난 뒤에도 군사를 보내 재차 고구려 침공에 나서기도 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렇지만 300년 당나라 역사에서 최강의 황제였던 태종이 채 이루지 못한 고구려 정벌의 꿈은 묘하게도 그가 그토록 못미더워했던 아들 고종에 의해 이뤄졌다.
고종은 마음도 약하고 몸도 병약한 인물이었다. 심신이 쇠약해 황후인 측천무후가 섭정해야 했던 황제였다. 그런데 묘하게도 고종은 고구려 침공에 집착했다. 병이 나 측천무후에게 섭정을 맡겼음에도 고구려 정벌을 단행하려다 무측천의 반발로 중지하기도 했다. 일본의 역사소설가로 대하소설 ‘측천무후’의 작가인 하라 모모요는 고종이 무측천에 대한 열등감의 발로로 적극적인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고종 역시 678년 토번의 침공으로 안서 4진을 잃자 고구려 정벌을 후회했다.
동국대 이기동 교수의 논문을 보면 당 태종은 “고구려는 요수를 건널 수 없었고, 백제는 감히 황해를 초월할 수 없었는데도 지난날 빈번하게 해마다 군대를 보내면서 널리 나라의 물자를 허비했다. 비록 지난 일이지만 나는 이를 후회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렇듯 고구려 멸망의 앞뒤를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고구려 멸망의 원인을 단선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역사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좋은 자세가 아닌 듯하다. 다만 역사의 우연이 펼쳐졌던 밑바탕에 대한 이해가 그나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최근 동국대 이기동 교수는 고구려 멸망 원인에 대한 주목할 만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교수의 논지는 바로 고구려가 외교적 실착으로 망했다는 것이다. 최근의 대미·대북정책이 국운을 좌우할 사회적 아젠다로 설정된 현실에 비춰볼 때 이교수의 분석은 눈길을 끈다. 이교수는 ‘고구려가 멸망한 것은 당이 한창 중천에 높이 뜬 태양인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고구려는 660년대의 격류에서 잠시 발을 뺄 적절한 계기를 포착하는 데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668년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2년이 흐른 670년에는 토번과 싸움에서 참패당한다. 당의 대외정책도 공세에서 수세로 바꾸었다. 당이 신라와 전쟁을 계속하지 못한 채 물러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 뒤 측전무후 집정 때 명재상인 적인걸이 692년 안서의 4진(鎭)을 포기할 것을 상소했다. 적인걸은 이 상소에서 하늘이 낳은 사이(四夷)는 모두 선왕이 봉한 역외(域外)라고 강조한 데서 알 수 있듯 당나라도 일단 전성기가 지나자 현상 유지에 급급한 형편이었다.
중천에 뜬 태양이 어느덧 기울기 시작했던 것이다. 고구려가 더욱 유연한 자세를 취해 무후(武后) 집권 초기의 신경질적 고구려 침략 야욕을 조금이라도 완화시켰더라면 머지않아 대외 위기가 사라져 그 뒤 오랫동안 안녕을 구가(謳歌)했을 것이라고 이교수는 주장했다.
출처 : 한배달아리랑연구회
글쓴이 : 아리랑 원글보기
메모 :
'History-NEWS > 구리·고조선·부여·고구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위성으로 찾은 위만 왕검성과 고구려 요동성 (0) | 2007.03.06 |
---|---|
[스크랩] 위성으로 찾는 고구려 안시성과 백암성 (0) | 2007.03.06 |
[스크랩] 고구려의 최대강역 (0) | 2007.03.02 |
[스크랩] 을지문덕(乙支文德: ?~?) (0) | 2007.02.28 |
[스크랩] 키르기스스탄인들 고구려 후손 자처 (0) | 2007.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