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대륙진출
한국의 국사교과서는 고구려 영토를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국한하고 있으나 이것은 극히 일부분이고 사서와 유적으로 고구려의 강역을 다시 살펴본다
고구려는 대륙의 서화(西華)동쪽지역부터 한반도까지를 통치했다는 기록이 사서와 유적으로 증명 되고 있습니다.
참고- 호우총
http://blog.naver.com/casahoo/20001708661
먼저 한반도의 고구려유물을 살펴보면 경주 황남대총에서 '영락(永樂)'이라는 광개토왕 연호가 새겨진 항아리와 평남 대흥리에서 발굴된 유주자사 진(鎭)의 묘와 평안도에 있는 평양성벽각자, 태천의 고구려성벽각자가 있으며 고구려고분으로 한강의 석촌고분, 안동과 경주의 방형묘가 있다.
<위서>, <북사>
[섭라(涉羅)를 고구려가 백제에게 빼앗겼다]
*섭라- 안휘성
<당서>, <삼국사기>
[항성(項城)을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빼앗으려 하였다]
*항성- 하남성
<후한서
[태원(太原)을 모본왕 2년에 평정하였다]
*태원- 산서성
<당서>, <삼국사기>
[신성(新城), 은산(銀山)에서 당과 고구려가 전투를 하였다]
<당서>
[선비(鮮卑)는 유리왕때부터 고구려민(高句麗民)이다]
<북사>
[신라는 고구려, 백제에 속하여 있었다]
대륙의 하남성 서화(西華)의 동쪽부터 고구려의 영토를 나타내는 기록이 화하족과 한국사서에 있고 고구려 유주자사 진의 묘비에도 광녕(廣寧), 대(代)가 광개토왕시대에 고구려의 땅이라는 내용도 있습니다.
참고- 고구려
http://blog.naver.com/casahoo/20001708965
그리고 <삼국사기>에 고구려의 유리왕이 3년과 24년에 기산(箕山)으로 사냥하는 기록이 나옵니다.
지금도 대륙의 요(遼)지역에 기산이 있고 태원지역의 유차, 태곡은 옛 기(箕)땅이며 고구려 모본왕 2년대의 평정지로 어양, 상곡, 북평, 태원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기산은 허유산(許由山)이라고도 하며 동쪽으로는 언월산(堰月山)이 연결이 되어 있고 남쪽으로는 소웅산(小熊山) 서쪽은 복우산(伏牛山)에 접하며 북쪽으로는 영하(潁河)가 있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의 영역은 대륙의 서화(西華)중심의 남쪽 월(越)에서 부터 섭라(涉羅), 태원(太原), 광녕(廣寧)으로 이어지는 지역과 선비족(鮮卑族)의 영역을 포함하였고 동으로는 한반도의 서라벌까지였습니다.
지도- 고구려의 진출지명
계속해서 화하족기록에서 살펴보면 <후한서>49년에 한(漢)나라와 고구려의 전투지명으로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이 나오고 121년에 한(漢)과 고구려의 전투지명에 광양(廣陽), 탁(啄), 요대(遼隊), 신창(新昌)이 그리고 146년에는 한(漢)과 고구려의 전투지명으로 서안평(西安平)이 나온다.
그리고 현재의 북경지역에서 동북쪽에 고려영이 있으며 이 곳이 어양입니다.
<삼국사기>'모본왕'
二年春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而遼東太守祭隆以恩信待之乃復和親
[2년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쳤으나 요동태수 제융이 은혜와 신뢰로 대우하였으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삼국지>에도 121년의 전투지역으로 요동(遼東), 146년 전투지역으로 신안(新安), 서안평(西安平)이 나오고 242년의 기록에도 서안평(西安平)이 나온다.
참고- 서안평, 대륙영토 고구려
http://blog.naver.com/casahoo/20001708491
http://blog.naver.com/casahoo/20001371651
그리고 <광개토대왕비문>에 보면 [토번을 정벌했다]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고구려가 토번을 정벌했다는 것은 티베트까지 진출했다는 것이고 계속해서 비문에 염성(鹽城)이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그 위치는 강소성에 있는 현재의 염성시이다.
<광개토대왕비문>
鹽城倭滿倭潰城大□□□□□□□□□□□,九盡尖羅人戎兵 ....
[염성 왜만왜궤성 대 .......................... 구진수첨라인수병....]
이 비문내용은 영락10년의 기록으로 염성에서 왜구를 막았다는 것으로 현재 대륙의 강소성 염성시에 염성을 소개하는 글이 있는데 살펴보겠습니다.
[염성 소개글]
염성의 축성은 진(晋)나라 안제(安帝)때에 쌓았을 것이다. 그때의 염성은 토성(土城)이었고 성의 모양이 표주박처럼 생겨서 지금까지 표성(瓢城)이라 부른다... (중략) ...그리고 명(明)나라 영락(永樂)16년에 왜구를 막기 위해 벽돌로 성을 개축했다
글의 내용에서 진안제(晉安帝)는 사마덕종(司馬德宗)으로 고구려 광개토왕시대의 화하족의 진(晋)나라 왕입니다.
따라서 진안제때 개축을 했다는 것은 바로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쌓은 성이라는 것이고 영락(永樂)16년은 406년이며 진나라 안제2년이 됩니다.
<광개토대왕비문>
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 .... 相遇王重要截刺倭寇潰敗斬殺無數
[영락14년 갑진년 왜가 수시로 대방경계를 침입하여..... 왜구를 궤멸시켜 참살한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비문의 기록은 영락 14년때의 기록으로 염성시가 성을 소개하는 내용에도 [영락16년에 성을 개축했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광개토대왕비문의 왜구를 궤멸시킨 사실과 연호로 봤을 때 염성(鹽城)은 광개토왕때에 이 지역에 고구려가 있었고 성을 쌓고 개축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염성지역의 몽롱탑전설에 당(唐)나라 태종과 고구려 연개소문의 전투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광개토대왕이 양자강 이남까지 진출했고 당나라와 전쟁을 한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몽롱탑 전설- 당나라의 이세민(태종)이 고구려 군대의 추격에서 탈출하는 얘기
계속해서 <위서>를 보면 [398년 북위의 수도 업에 고구려인 46만명과 기술자 10만명이 가득했다]라고 나오는데 모본왕이 평정한 시기로 업은 산서성 태원이다.
또 <진서>에 고구려가 후연(後燕)을 공격하는 내용이 있는데 <진서>의 이 기록 이후에 화하족 사서에서 후연이 등장하지 않는데 당시 화북지역에 있던 후연을 멸망시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최치원의 <낙랑비문>
[고구려와 백제는 강성할 때 백만이었고 북으로 유, 연, 제, 노를 소란케 하였고 남으로는 오, 월을 정벌하여 중국의 큰 좀이 되었다]
*유, 연- 하북성 제, 노- 산동성 오, 월- 양자강지역
<환단고기>
[문자명왕때에 신라인을 복건성 천주로 이주시켰다]
*천주- 양자강남부의 홍콩지역
당시의 서라벌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었으니 신라인을 이주시킬 수 있었으며 이 기록을 보면 고구려가 남쪽으로 양자강지역의 오(吳), 웥(越)과 복건성 천주(泉州)까지 진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사기>'명림답부열전'에 고구려와 한(漢)나라의 좌원대첩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이 전쟁으로 동한(東漢)은 멸망하고 대륙은 400년간 혼란기에 접어듭니다.
<삼국사기>에 한(漢)의 현도군 태수 경림(耿臨)이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했는데 고구려의 명림답부가 기병 수천명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좌원(坐原)에서 한군(漢軍)을 대패시키고 승리한 기록이 있습니다.
*명림답부(明臨答夫)- 차대왕을 폐하고 신대왕을 세우고 국상이 된 인물
당시 동한(東漢)은 영제시대로 관료와 환관이 권력다툼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환관 조절과 '십상시'라고 불리는 10명의 환관들이 권력을 장악합니다.
정권을 장악한 '십상시'들은 민심을 잡기 위해서 환관 경림을 총사로 십만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지만 패하고 모두 사망합니다.
그런데 <삼국지>와 <후한서>'영제본기'에는 한줄도 기록되지 않았고 경림이라 이름도 없는데 이유는 화하족의 춘추필법이라는 역사서 서술방식때문입니다.
동한(東漢)은 좌원대첩의 패배로 타격을 입고 요동의 공손탁이 독립했으며 황건적의 반란이 일어나고 서량의 군벌 동탁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무정부상태가 됩니다.
*좌원대첩의 패배로 한(漢)은 망하고 위, 촉, 오의 삼국시대가 시작됨
이렇게 고구려는 건국초기부터 화하족세력을 격퇴하고 성장면서 동아시아대륙의 맹주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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