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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에 대한 인문학의 오독 | 나는작가다 게시판

monocrop 2011. 6. 20. 03:06

아라니(tiger2020)
/ 2011. 06. 06  21:30 /출처 및 원문보기

 

 

외람되게 들릴 지는 모르겠으나..
한국 사회에서 논의되는 지적 담론들을 보면 답답한 생각이 듭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신자유주의 비판인데요..
자음과 모음에서도 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논의들이 있더군요.
인문학이 바라보는 신자유주의는 100% 부정적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상당히 아이러니 한 것이 있어요.
부르디외의 방법론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들여다 보면 그 비판이 신자유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철학이나 원리를 향하고 있다기 보다 헤게모니를 위한 진영의 논리와 '입장'이 대부분
이라는 겁니다.
왜 그럴까..
신자유주의 (neo classical libertism)를 이해하려면 고전적 자유주의 (classical libertism)
의 철학에 대한 선 이해가 요청되죠. 신자유주의란 바로 이 고전적 자유주의의 부활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율, 책임, 공동체 보다는 개인의 자유. 최소한의 정부 등등..
인문학에서 이 고전적 자유주의에 대한 거부나 배제는 없습니다.
있다면 공동체주의라는 대척점에서 토론은 있죠. 하지만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간의
논쟁을 보자면 자유주의 진영의 판정승에 가깝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평등보다는 자유를 확장하는 쪽으로 발전해 왔으니까요.
그렇다면 이런 자유주의의 부활, 즉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왜 인문학, 특히 좌파코드로
부터 날선 공격을 받게되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 이념을 부활 시킨 미 레이건 정부의 글로벌 헤게모니의 확보,
이로 인한 동구와 옛 소련의 몰락 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때만 해도 신자유주의 비판은 그렇게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문제는 후쿠야마같은
덜 떨어진 이들이 뭐, 역사의 종말 따위로 설레발을 치면서 논쟁을 촉발시켜 버렸죠,
여기에 랙서스와 올리브나무와 같은 책들이 거의 마스터베이션 수준으로 거들었죠.
저는 후쿠야마와 같은 사이비 자유주의나 그를 비판하는 반자유주의자나 인문학적으로
신자유주의를 심하게 오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다아윈의 진화론에
대해 한 쪽에서는 인간을 원숭이 그 자체로 보려는 유물론자들과 신의 창조를 주장하는
신학자들간에 싸움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인 것이죠.
어떨 때는 인문학자들이란 기본적으로 뻔뻔하거나 아니면 아이큐가 한 참 낮은 것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 때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왜곡과 편파를 잘 하는지..
하지만 부르디외의 시각으로 보자면 또 이해하지 못하란 법도 없죠.
결국 담론의 내용은 헤게모니와 관련된 '입장', 즉 아비튀스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 비판은 마르크시즘의 가차없는 붕괴와 이를 변호하려는 좌파 지식인들의 정치적
위기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는 생각입니다.
(비난이 아니라 해설입니다. )

 

동구권과 소련의 붕괴는 유로 코뮤니즘 지식인들에게는 재앙의 수준이었지요.
이로인해 순수한 철학적 담론이 아닌 정치적 입장이 신자유주의 논쟁에 깊숙히
개입하고 있습니다. 진실을 호도하고 왜곡하면서까지 말이죠.
신자유주의는 경제학의 몇가지 명제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경제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마치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 신학적으로 비판하는
것과 같은 오류가 반복됩니다.
이걸 아주 재미있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제 전공이 경제학이고 국제 금융시장에서도 일한
경험이 있으니 어느 정도 믿으셔도 좋습니다. ^^;
우선 가치(Value)라는 문제입니다.
경제원론에 등장하는 바로 공기와 다이아몬드의 패러독스입니다.
공기는 우리에게 필수 불가결한데도 공짜고 다이아몬는 없어도 그만인데 가격이
상당히 높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희소성때문입니다.
자유주의 경제, 즉 고전경제학은 가치의 속성이 바로 이 희소성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가격이란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죠. 이것은 생물학에서
진화론을 발견한 것과 같습니다.
가치의 두 측면, 즉 공기는 사용가치가 높지만 다른 것과 교환될 수 있는 교환가치가
낮고 다이아몬드는 사용가치는 낮지만 희소성으로 교환가치가 높은 것이죠.
이때 시장에서 가격은 바로 이 교환가치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물건도 그 공급이 수요보다 많다면 가격은 낮아지는 것이죠.
반면에 마르크스는 어떤 상품의 가치는 노동으로 부터 파생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말해 어떤 상품의 교환가치, 즉 가격은 거기에 투입된 노동력에 비례한다고 본 것이죠.
마르크스의 이론대로라면 김제동의 1시간 방송 출연료와 방송국 PD의 임금격차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방송국 PD의 노동력이나 노동가치가 김제동보다 한 열배는 낮기 때문일까요?
아니죠. 김제동에 대한 수요가 그 방송국의 PD수요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김제동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의 제작PD는 다른 PD가 할 수 있지만 김제동은 다른 인물로 교체해서는
수요자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공기와 다이아몬드의 패러독스가 다시
설명되는 것이죠.
이게 바로 신자유주의의 원리입니다.
만일 김제동씨가 진정 신자유주의를 반대하고 싶다면 같은 방송에 출연하는 출연자들의
출연료를 다 똑같이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맞겠죠. 하지만 그가 그렇게 할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제 보다 더 인기있는데 왜 내 출연료가 제와 같아야 해? 이렇게
반발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에 대한 수요가 커질 수록 그 사람의 수입은 더욱 느는 반면, 공급이 많아지는 사람의 수입은
감소하죠. 이 변동이 급격하게 일어난 것이 양극화의 원인입니다.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에는 IT혁명과
서비스 시장의 혁명, 그리고 금융시장 혁명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들의 영역에 정부가 적극 개입해서 시장을 통제하고 대기업의 신규산업 진출을
막았죠. 만일 지난 10년안에 정부가 기간 통신망 독점을 풀고 모든 통신사업자에게 망을
개방했다면 엄청난 통신시장의 폭발이 있었을 겁니다. 당연히 휴대폰 요금도 내려갔을 겁니다.
지금 삼성을 비롯 통신사업자가 한 6-7개 쯤 존재했을 겁니다. 지방에도 부산텔레콤, 광주텔레콤, 강원
텔레콤 등 많은 사업자가 생겨나고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갖게 됐을 겁니다.

 

물론 시장이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정치적 영향을 받는 정부의 공무원이 결정하는 것
보다는 시장에 맡기는 것이 실패할 가능성이 더 적다는 것이 자유주의자들이 발견한 사실이죠.
만일 시장이 아닌 정부에게 자원의 배분을 맡기려 한다면 그 정부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미래에
대해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전세계에 그런 국가는 없죠. 금번 저축은행
사태를 보십시오.
민일 정부가 저축은행에 대한 규제대신에 영업을 자유롭게 해 주고 이용자들에게는 부도가 날 수
있으니 조심해서 자기 판단으로 이용하라고 했다면 누구든 저축은행을 이용할 때 자신의 돈을 이
은행이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겠는 지 알고 싶어할 것이고 당연히 그 은행들의 신용도를 평가하는
정보 제공업자들이 나타났을 겁니다.
그랬다면 오늘과 같은 사건은 일어나기 힘들죠. 자율과 경쟁이 규제와 관리보다 투명성과 효율성을 더
잘 보장해 줄 수 있다는 것이죠.
양극화를 해소하는 방법은 그 사회에 초과수요가 있는 분야에 더 많은 공급자들을 창출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그 사회변동에 맞는 교육이 개혁되어야 하죠.
얼마전 대학 등록금 문제로 어떤 여학생이 3개의 아르바이트를 해도 등록금을 벌 수가 없다고
눈물로 호소하는 장면을 보고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기술과 사회변동을 따라가지
못하는, 다시 말해 기업이 필요로하는 인력을 공급하지 못하는 우리 대학의 진학률이 83%를
넘어 100%에 달한다고 해도 졸업후 학생들의 취업은 어려울 겁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제대로 된, 다시말해 논쟁거리라도 될 만한 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을 도입해 본 적이 없
습니다. 온갖 정부의 규제와 관치로 땜질해 왔죠.오죽하면 아시아의 2대 미스테리가 바로 한국이 자본주
의 국가라는 점과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라는 농담이 다 나오겠습니까.
이런 자유주의 한번 제대로 못해본 나라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이 치열하다는 것은 어쩌면
봉숭아 학당보다 더 웃기는 코미디인 거죠.
문학과 철학, 그리고 예술이 정치 진영의 논리를 대변하고 도구로 전락해서 봉사해야한다면
우리가 거기에서 기대할 수 있는 건 도대체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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