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관련 글들/한국사관련 글들

탐라, 탐모라,제주,대만....담로라는 것은...

monocrop 2009. 7. 10. 23:33

탐라, 탐모라,제주, 대만...그리고 담로라는 것은...

 

다음 글들 출처 : http://www.coo2.net / 자유게시판

 

 

 

VPHIL (2009-07-09 15:12:46, Hit : 404, Vote : 4
 http://myspace.com/vphilmusic
 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10952§ion=section78

 탐라국이 대만이 맞다면?

혼자 해결해보려 했으나 도저히 궁금해서 참을수가 없습니다.


 

먼저, 제 성씨는 양씨입니다.梁 남원양씨인데요.
역사를 아는것은 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것이기도 하기에 저의 선조, 성씨의 글들을 읽어 보던중 막막해서 글을 올립니다.

제가 한국에서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학교숙제로 자신의 성의 본관,파,몇 대인지등 자신의 뿌리를 알아오라는 과제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때 전 지금은 고인이신 할아버님댁에 가서 할아버지께 여쭈어보니 우리 양씨는 제주도 탐라에서 일어나 고씨 부씨 량씨가 삼성으로 하나여서 예전엔 서로 결혼도 못하게 되어있었다 하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선 우리 선조는 제주도의 삼성혈에서 비롯되어 제가 27대손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곤 일대 시조의 이름도 말씀해 주셨는데 그이름이 '양을라'이고 파는 '장양공파'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어린제게 무엇이 그렇게 신기하고 제 맘을 끌리게 한지는 모르겠으나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때의 말씀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납니다.

그리알고 살아오던 중 플러스코리아의 '백제의 속국인 탐라국의 위치는 어디?'라는 글을 읽고 약간의 충격에 휩싸였는데요, 글에서는 탐라국이 대만이라 하더군요. 그럼 저의 시조신화 = 제주시조신화 삼성혈 에서 말하는 한라산은 '아리산'='옥산'이 되는 것이며 제 시조는 대만땅에서 시작된것이됩니다.
남들에게는 모르겠으나 저희 남원양씨 집안에게는 크나큰 충격이 되는것이지요. 제가 나중에 자식에게도 뭐라 설명해줘야 할지 모르겠고요. 할아버님이 알고 계신 제주 = 탐라 , 시조 '양을라'라는 지식은 인터넷에서 찾거나 한것은 아니실텐데 말입니다. 할아버지도 또한 제 증조부님이나 고조부님께 말로 전해들은 예기임이 확실하니까요.

아래는 네티즌 문답란을 보다가 발견한 '배성영' 씨의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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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온 김에 삼성혈을 둘러보고 관련 애니메이션까지 보고 왔습니다만
삼성혈에서 보여주던 애니메이션의 내용과
인터넷을 뒤져 살펴본 내용이 시대까지 거슬러 틀린점을 보이기에
여기까지 찾아와서 도움을 청합니다.


삼성혈 내에서 보여주던 애니메이션에서는
고/양/부을라의 발생 시기가
고조선 단군왕검의 발생시기와 비슷하다고 하던데
여러모로 검색을 해 보던중 어느분께서,
고/양/부을라는 단지 당시 탐라국의 지배계층이었을뿐
이미 신석기 시대부터 인간이 살고있었던 제주도의
태초 인간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고'씨는 시조는 고구려의 고주몽이라 알고 있던 저에게
고/양/부을라의 삼성혈 설화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었습니다.
정말 애니메이션에서 보여준 대로 삼성혈 발생이 단군왕검 발생시기와 비슷하다면
고주몽 설화의 '고'씨 시조설화는
이제껏 받아들여지던 대로가 아닐것 같다는 생각도 들기도 하고..


삼성혈 발생의 정확한 시기와
고을라와 고주몽의 관계에 대해
궁금합니다.
아시는게 있으시다면 답변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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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영씨는 고부량 발생시기가 단군왕검의 발생시기와 비슷하다 하셨습니다.
그럼 어찌 저는 시조는 버젓이 '양을라'= 탐라국의 일대 왕,시조 인데 27대손이 될수 있는걸까요.
우리 선조님들이 역사 왜곡으로 인해 그 수많은 윗대의 선조님들을 짤라먹게 된것일까요?

아래는 배성영씨글 댓글에서 발쵀된 자료입니다. (야후지식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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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혈 신화

탐라에는 태초에 사람이 없었다. 옛 기록(동문선, 고려사, 영주지)에 이르기를 기이하게 빼어난 산이 있는데 한라산이라 한다. 구름과 바다가 아득한 위에 완연히 있는데 그 主山(주산)인 한라산이 그의 신령한 화기를 내리어 북쪽 기슭에 있는 모흥이라는 곳에 三神人(삼신인)을 同時(동시)에 탄강 시켰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4,300여년 전의 일이다.

三神人이 태어난 곳을 모흥혈(毛興穴)이라 하는데 三神人이 湧出(용출)①하였다 하여 三姓穴(삼성혈)이라 하며 3개의 地穴(지혈)이 있다. 이 神人들을 이름하여 乙那(을나)라 하며 세성씨의 시조이시며 탐라국을 개국하시었다.

그들의 모양은 매우 크고 도량이 넓어서 인간사회에는 없는 신선의 모습이었다. 이 삼신인은 가죽옷을 입고 사냥을 하는 원시의 수렵생활을 하며 사이좋게 살았다.

하루는 한라산에 올라가 멀리 동쪽 바다를 보니 자주색 흙으로 봉한 木函(목함)이 파도를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그 목함을 따라 지금의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에 이르러 목함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 알 모양으로 된 둥근 玉函(옥함)이 있었으며 자주빛 옷에 관대를 한 使者(사자)가 있었는데 그 사자가 玉函을 연즉 靑衣(청의)②를 입고 姿色(자색)③이 출중하고 稟質(품질)④이 端雅(단아)한 공주 세사람이 좌석을 整齊(정제)⑤하여 같이 앉았고, 또 우마와 오곡의 종자를 가지고 와서 연혼포의 해안 언덕에 내 놓으니 삼신인이 자축하여 말하기를 “이는 반듯이 하늘에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것이다”하여 기뻐했다. 使者가 두 번 절하고 엎드려 말하기를 “나는 동해 碧浪國(벽랑국)⑥의 사자 올시다. 우리 임금님이 세공주를 낳으시고 나이가 성숙함에도 배필을 정하지 못하여 한탄하던 차에 하루는 紫宵閣(자소각)⑦에 올라 서쪽 바다를 바라보니 자주빛 기운이 하늘에 이어지고 상서로운 빛이 영롱한 가운데 명산이 있는데 그 명산에 三神人이 강임하여 장차 나라를 세우고자 하나 배필이 없음으로 이에 臣(신)에게 명하여 세분 공주를 모시고 오게 하였으니 伉儷(항려)⑧의 예식을 갖추어 큰 國業(국업)⑨을 성취 하시옵소서”하고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는 동쪽 하늘로 사라져 버렸다. 이에 三神人은 祭物(제물)을 정결하게 갖추고 목욕재계하여 하늘에 고하고 각기 세 公主와 혼인하여 연못 옆 동굴에서 신방을 차리고 생활하니 인간으로의 생활이 시작이며 이로써 농경사회로 발전하고 정주의 기초가 됐다 하겠다

그래서 자주빛 함이 올라온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를 延婚浦(연혼포)라 하며 지금도 삼공주가 도착할 때 함께 온 말의 발자국들이 해안가에 남아 있다. 또한 삼신인이 목욕한 연못을 婚姻池(혼인지)⑩라 부르며 신방을 꾸몄던 굴을 神房窟(신방굴)⑪이라 하며 그 안에는 각기 3개의 굴이 있어 현재까지 그 자취가 보존되고 있다.

삼신인은 각기 정주할 생활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도읍을 정하기로 하고 한라산 중턱에 올라가서 거주지를 선택하는 활을 쏘아 제주를 삼분하여 제1도와 제2도와 제3도로 정하니 이로부터 비로소 산업을 이룩하여 오곡을 심고 우마를 길러 촌락이 이루어 졌으며 자손이 번성하여 탐라국의 기초를 이룩했다.

그 활 쏘은 지역을 射矢長兀岳(사시장올악)이라 하며 활이 명중한 돌을 한데 모아 보존하니 제주시 화북경의 三射石(삼사석)이라 하는데 조선조 영조 11년(서기1735) 김정목사가 삼신인의 활 솜씨를 경탄하여 기념코자 『三射石』이란 비를 세우고 비면에 시를 지어 추모하니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4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그후 역사시대에 이르러서는 탐라국 왕손들이 신라에 입조하여 작호를 받았으며 신라, 백제, 고구려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유구왕국과도 독립국가로서 교류하고 소규모나마 물물을 교환하는 해상교역 활동도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그후 수천년간 탐라국으로의 왕국을 유지 하다가 고려시대에 합병됐다.

그래서 이 삼성혈은 탐라국의 시조이신 삼신인 즉, 三乙那(삼을나)왕께서 湧出(용출)하여 제주를 개황한 한반도에서 가장 오랜 현존 유적이다. 또한 이 신비한 성혈에는 눈이 많이 오거나 빗물이 수없이 내려도 쌓이거나 고이지 않으며 면면이 이어온 수백년된 고목들도 모두 다 혈을 향하여 고개를 숙여 경배하듯 가지들을 팔벌려 감싸 안고 있다.

삼성혈에 처음 설단하여 치제한 때에는 서기 1526년(중종21) 이수동목사에 의하여 처음으로 조정을 대표하여 제주목사가 홍문과 표단을 설치하여 봉향하였으며 특히 유교국시의 조선조에 와서는 조정의 각별한 배려와 역대 목사들의 존숭치적으로 더욱 신성시하였다. 1785년에는 정조대왕이 “三姓祠”(삼성사)라는 편액을 친히 하사하시어서 王(왕)에 대한 예우로써 國祭(국제)⑫로 봉향하도록 하교하였다.

제향은 매년 4월 10일에 춘기대제를 10월 10일에는 추기대제를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봉향하고 12월 10일에는 건시대제라하여 혈단에서 드리고 있는데 모든 제관들은 왕에 대한 예우로써 금관제복을 착용하여 3일전에 입재하여 목욕재계하고 제향에 임한다. 그리고 이 건시대제는 조선시대에는 국제로 모시다가 현재는 제주도민제로 봉행하고 있으며 초헌관은 제주도지사, 아헌관. 종헌관은 덕망있는 사회 지도층 인사중에서 추천된 인사가 맡고 있다.

인류 역사의 변천과 국가 형성 과정을 보면 통치 지역이나 권력을 중심으로 한 투쟁의 연속인 것이 상례처럼 보이지만 三神人이 세공주를 맞이하여 아무런 다툼이 없이 배필을 정한 것이나 생활의 터전을 활을 쏘아 정한 것이나 분할지역을 정한 후에는 지역을 확대하기 위한 영토전쟁이 없었던 것은 오늘날 제주인의 평화 존중의 정신이며 수눌음⑬ 과 조냥 ⑭정신 및 자립과 화합정신의 기틀이요, 이러한 정신이 바탕이 되어 척박한 땅을 일구면서도 부를 창조하였고 외세의 침략에 굴하지 아니한 강인한 개척의 정신을 이루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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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글에서 말하는 '삼성혈은 탐라국의 시조이신 삼신인 즉, 三乙那(삼을나)왕께서 湧出(용출)하여 제주를 개황한 한반도에서 가장 오랜 현존 유적이다.'에서의 삼성혈을 전 어렸을때 가족들과 다녀왔습니다. 이런 실증이 있는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대만의 있는것을 역사가 잘못인식되어 비슷한곳에 그 신화만 옮겨져 있는것입니까?
솔직히 제가 '양을라'시조의 이름을 할아버지께 들은 기억이 뚜렷해서 어느 자료에서 탐라국 시조의 이름이 '고을나'라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할아버지의 말씀과 너무나도 맞아 떨어지는 예기이니까요. 그렇다고 제 할아버님께서 특히 역사에 관심이 많으신 분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증조부님이나 고조부님께 전해 내려온 이야기를 손자에게 해주신것 뿐이죠.

어제 강원SBS인지 울산SBS인지에서 (해외라 인터넷 실시간으로 보기때문에 서울SBS는 나오지않습니다 -_-) '테마스페셜'인가를 보여주는데 제주도 말의 방목이 원나라에서 일본정벌을 위해 들여와 시작되었다고 그곳 현지 마부들도 인터뷰하고 쓰는 전문용어나 방언중에 몽고어에 영향을 받은 언어가 많다고 하는것을 방송으로 보았습니다.

이렇게 제주도 현지의 탐라국의 흔적이 있다고 보면 그렇다 할수있는것 같아 참으로 혼동되고 헷갈립니다. 제 후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진실을 알고싶습니다. 탐라가 대만이라면 제 부모님들과는 달리 저는 대만으로 여행가 제 자식들에게 아리산을 보여주어야 하니까요.

구리넷의 지식인님들, 그리고 사학자님들께 머리숙여 답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VPHIL (2009-07-09 15:16:48)  
아 참고로 예전 네티즌 자유 게시판에 '하카인, 객가인'에 대한글에서 '초립동이'님이 우연히 디스코버리 채널에서 대만의 고대성씨중 고씨 부씨 양씨가 많다고 하셨던것도 기억이 납니다. (???)
좌계 (2009-07-09 15:52:20)  
/ VPHIL 님

혼란해 할 필요가 없을 듯 합니다.
현 제주도(濟州道)는 사서(史書)에 두가지 지명(地名)으로 나옵니다.
첫째는 주호(州胡)이고, 또 하나는 탐라국(耽羅國)입니다.

대만(臺灣) 지역이 ‘탐라국(耽羅國)’이라고 생각하는 근거는 사서(史書)에 탐라국(耽羅國) 이라고 적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탐라국(耽羅國)과 음(音)이 비슷한 <탐미다례(耽彌多禮)> 혹은 <침미다례> 혹은 <탐모라국(耽毛羅國)>이 ‘탐라국’의 이칭(異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탐모라국(耽毛羅國)에 대한 사서(史書)의 묘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원문(原文)
#隋書卷81-列傳第46-百濟-07/07
◉其南海行三月, 有<躭牟羅國>, 南北千餘里, 東西數百里, 土多麞鹿, 附庸於<百濟>. <百濟>自西行三日, 至<貊國>云.


해석(解釋) :
그 ‘남쪽 바다’로 삼 개월을 가면, 탐모라국(耽牟羅國)이 있는데, 남북(南北)이 천여리(千餘里)이고, 동서(東西)가 수백리이다. 땅에는 노루와 사슴이 많고, 백제에 부용(附庸)한다. 백제에서 서쪽으로 삼일(三日)을 가면 맥국(貊國)에 이른다.

즉 탐모라국(耽毛羅國)은 동서(東西)로 얇은 수백리이고, 남북(南北)으로 길게 나 있는 모양인데, 이런 모양의 섬(島)이 바로 대만(臺灣)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주도(濟州道)는 동서(東西)로 길고, 남북(南北)으로 얇은 모양이 되어서 “제주도(濟州道)는 탐모라국(耽毛羅國)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사학자(史學者)들이 “탐라국(耽羅國)=탐모라국(耽毛羅國)”으로 생각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런데 좌계가 볼때에는 탐모라국(耽毛羅國)은 대만(臺灣)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날의 ‘뉴질랜드’를 묘사한 글입니다.

맥제(百濟)는 오늘날 광동성(廣東省)에 주로 해외(海外) 진출 기지가 있었고, 또 쟈바, 뉴기니 등등의 섬(島)에도 광활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읍니다.

참고적으로 말씀드리면, 좌계는 쟈바. 뉴기니 등지에 있던 맥제(百濟)를 대도(大島)-맥제(百濟)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남해(南海) 쪽으로 3개월을 가면”이라고 할때의 출발점은 어디까지나 광동성(廣東省) 맥제(百濟)이거나, 대도(大島) 맥제입니다.

범선(帆船)으로 3개월 간다는 것은 대단히 멀리 가는 것입니다.
‘컬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하면서 대서양(大西洋)을 건너는데 걸릴 시간이 2개월입니다.

따라서 위 기록을 선박과 고대 맥제(百濟)의 해양진출을 고려해서 읽는다면, 합당한 탐모라국(耽毛羅國)의 위치로 잡을수 있는 것은 바로 오늘날의 ‘뉴질랜드’입니다.

이곳에는 자연히 노루와 사슴이 많은 것이지요.

탐모라국(耽毛羅國)에서 3일 정도 더가면 다다른다는 맥국(貊國)을 좌계는 오늘날의 호주(濠洲) 즉 ‘오스트레일리아’로 보고 있습니다.

사서(史書)에 맥국(貊國)의 영토는 “천리(千里)를 겹겹히 에워싼 것 같다.” 고 무척 광대무변(廣大無邊)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만(臺灣)에서 범선(帆船)을 타고 서(西)쪽으로 3일가면, 대만(臺灣)보다 큰 섬이 전혀 안나타납니다.

따라서 탐모라국(耽毛羅國)과 탐라국(耽羅國)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좌계 역시 “대만(臺灣)=탐모라국(耽毛羅國)”이라는 등식(等式)을 지니고 있었지만, 최근에 우리의 선박(船舶)을 연구하면서, 이 탐모라국(耽毛羅國)이 ‘뉴질랜드’인 것으로 지리비정을 새롭게 하게 된 것입니다.

대만(臺灣)은 단주(亶州)로 사서(史書)에 나옵니다.

오늘날 제주도(濟州道)는 탐라국(耽羅國) 주호(州胡) 2 가지로 불리웠기 때문에, 큰 혼란을 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대 선박의 탁월한 능력’을 잃어버려서.....
“지리비정이 아시아(Asia)에 머무르고 있는 한계(限界)에 갇혔다.”는 것이 좌계가 선박(船舶)을 연구하게 된 계기인 것입니다.
좌계 (2009-07-09 16:35:54)  
/ VPHIL 님

신기하게도 좌계가 오늘날 대만(臺灣)이 탐라국(耽羅國)이란 명칭으로써 “찝어서 설명”하는 사서(史書)를 좌계는 아직까지 보지 못하였습니다.

추가하신 글에서 “아 참고로 예전 네티즌 자유 게시판에 '하카인, 객가인'에 대한글에서 '초립동이'님이 우연히 디스코버리 채널에서 대만의 고대성씨중 고씨 부씨 양씨가 많다고 하셨던것도 기억이 납니다. (???) ”로 말씀하신 것이 오히려 ‘놀라운 발견’이 됩니다.

혹 구체적인 자료를 찾게 되면 이 싸이트(site)에 오히려 올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제주도(濟州道)를 탐라국(耽羅國)으로 묘사한 것은 사서(史書)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서(史書)에 오늘날 제주도(濟州道)를 탐라국(耽羅國)이라고 “찝어서 설명한 것‘은
<北史 卷九十四 列傳第八十二 (7) - 倭國 >에 나타납니다.


원문(原文)과 해석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원문(原文)]
<大業>三年, 其王<多利思比孤>遣朝貢. 使者曰: [聞海西菩薩天子重興佛法, 故遣朝拜, 兼沙門數十人來學佛法.]

[해석 옮김]
'대업'삼년, 그 왕 '다리사비고'가 조공을 받쳤다.
사신가 말하길 바다 서쪽의 보살인 천자께서 불법을 일으키니 고로 조배합니다.
아울러 승려 수십명을 보내어 불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했다.

[원문(原文)]
國書曰: [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 無恙.]云云. 帝覽不悅, 謂鴻 卿曰: [蠻夷書有無禮者, 勿復以聞.]

[해석 옮김]
국서에 이르기를 “태양이 나오는 곳의 천자가 태양이 지는 곳의 천자에게 서를 보낸다.
걱정이 없으신가?!..“ 운운하니 제가 보고 기뻐하지 않자. 홍려경이 이르러 말하길”만이의 서에는 예가 없는 것이 있다. 다시는 가르침을 받지 말라. 하였다.“

[원문(原文)]
明年, 上遣文林郞<裴世淸>使<倭國>, 度<百濟>, 行至<竹島>, 南望<耽羅國>, 經<都斯麻國>, 逈在大海中.
又東至<一支國>, 又至<竹斯國>. 又東至<秦王國>, 其人同於<華夏>, 以爲<夷洲>, 疑不能明也.
又經十餘國, 達於海岸. 自<竹斯國>印, 皆附庸於<倭>.

[해석 옮김]
다음해 문림랑 '배세청'을 '왜국'의 사신으로 보냈는데 '백제'를 건너서 '죽도'에 이르러,
남쪽으로 '탐라국'을 바라보면서, '도사마국'을 거쳐서 큰바다 가운데를 향하고 있었다.
또 동으로 '일지국'에 이르고, '죽사국'에 이르렀다. 또 동으로 '진왕국'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은 '중국인'이니, '이주'사람인지 의심이 드는데 확실하지 않다.
또 십여국을 지나 바닷가에 이르렀다. 스스로 '죽사국'의 동쪽으로 모두 '왜'를 따르고 있었다.

- 각설(却說)
위 글에 보면 수(隋)의 ‘배세청’이란 사신(使臣)이 가는 일정이 나와있는데, 그중에 “度<百濟>, 行至<竹島>, 南望<耽羅國>, 經<都斯麻國>, 逈在大海中.”이란 귀절이 나옵니다.

오늘날 논란(論難)이 약간 있지만 ‘도사마국’은 대마도(對馬島)로 봅니다.
즉 ‘배세청’은 한반도 남해안을 통해서 일본의 ‘큐슈(구주(九州)’로 들어갔는데, 자연히 ‘남쪽으로 탐라국(耽羅國)을 보면서’ 가게 된 것입니다.

아무튼, 좌계가 사서(史書)에서 탐라국(耽羅國)이라고 “찝어서” 제주도(濟州道)를 지칭하면서 설명한 글은 위 북사(北史)가 유일(唯一)합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Mimesis (2009-07-09 22:38:06)
VPHIL님/ 간절히 구하시니....얻으셨네요.^^
VPHIL (2009-07-09 23:14:53)  
먼저, 정성어린 답변해주신 좌계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좌계님의 탐모라국 = 뉴질랜드설은 신선하게 받아드려집니다.
제가 지금 구년째 살고있는곳이 바로 호주 Australia인데, 이곳 친한친구들중
뉴질랜드 원주민들인 마우리족 녀석들이 있습니다.
이 친구들 말로는 마우리의 원류가 동아시아에서 시작되어 내려왔다고 했던것이 기억이 납니다,
Naha라는 지명까지 예를들면서 까지 말이죠.
이 녀석에 의하면 자기들은 그 예기를 굳게 믿는다 하면서, 그래서 자기들이 아시아인들과 쉽게 잘 어울린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마우리들은 피부색이 좀더 검고 체구가 클뿐,
동양인과 같은 째진 눈(Chinky eyes)을 갖고있으며,
우리와 같이 형,동생 문화가 있고 가족을 중시하는 사상을 갖고 있습니다.
백제해상세력이나 옛날 왜의 후손이 세월이 흘러 갈라져나가 유전자도 변하고
그곳 뉴기니, 솔로몬제도등 기후 환경에 적응하면서 마우리족이 되었는지도 모를일입니다.

화두를 바꾸어 말하기전, 일단 저는 좌계님께 따지려는 것이 절대 아님을 말씀드리고 싶슴니다.
전 좌계님의 역사에대한 노력과 열정에 새발의 피도 안된다고 생각함을 먼저 밝힙니다.

자유게시판에서 '탐라'로 검색을 해서 글들을 차례대로 읽어 보던중 좌계님의 글이 있어서 유심히 읽어보았는데요, 고구려의 대운하, 백제,왜, 신라,인덕천황, 금성,자명고등 과학기술에 관한 글이었습니다.

좌계님의 글중에 ->
[태왕]太王의 <獨山斬倭>의 비밀: “합비(合肥)-금성(金城),<關防路>,<大運河>-[3]

2008-07-28 14:18:15

내용중략'

"그래서 ‘고구리 사초’에서는 독산참왜(獨山斬倭)라는 문장 다음에 ‘<耽羅>主<月孫>来降献土物.’ - 즉 “<탐라>주 <월손>이 찾아와서 항복하고 토산물을 바쳤다.”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여기서 탐라(耽羅)의 위치는 오늘날 대만(臺灣)이 되는 것이고, 이는 맥제(百濟)와 고일본(古日本)의 영향권에 있는 대표적인 나라였던 것입니다.

즉 독산참왜(獨山斬倭)로써 태왕(太王)은 조용히 고일본(古日本)이 장악하고 있는 대해양국가 내부(內部)에 균열(龜裂)이 생기게 한 것입니다."

중략'

라고 하셨는데요, 이 글에서 좌계님은 '탐라 = 대만' (탐모라 = 대만 도 아닌)이라 보고 계십니다. 제게는 혼동될수밖에 없는 부분입니다.

거두절미하고, 탐라=탐랑?=탐모라? or 탐라 = 제주? 대만? 탐모라 = 대만? 에 대해선 좀더 많은 자료들과 연구가 필요한 과제인듯 싶습니다.

어찌돼었던, 좌계님의 소중한 답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Mimesis (2009-07-10 01:26:02)
한편으론 많은 유물과 기록들이 현 제주도 남아 있기도 하고...
옛 기록들은 (특히 수서) 내용이 현 제주도와는 잘 않맞고...
어떻게 정리되는 것이 합당한 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래는 참고로 적어 놓습니다.


고려의 제주(탐라)는 산동성 巨野澤 일대- target=_blank>http://cafe.daum.net/dobulwonin/GBuY/157


남송과 탐라와 왜의 인접기록/ 남송-고려-금의 위치 관계Target=_blank>http://cafe.daum.net/dobulwonin/Gjtl/20

(내용발췌)
※ 원사 열전 “탐라” 을 보면 ; 탐라耽羅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음을 봅니다.

  耽 羅 , 高 麗 與 國 也 。 世 祖 既 臣 服 高 麗 , [以 耽 羅 為 南 宋 、 日 本 衝 要 , 亦 注 意 焉 ]。



탐라(耽羅)는 고려와 같은 나라이다. 세조때 이미 고려를 복속시켜 신하로 하였다. 이 탐라는 남송과 일본이 충돌하는 요지이며, 또 주의해야한다 .(새겨서 조심해야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엄청난 강역의 파괴를 일으키는 내용이다.

즉 남송과 일본이 가깝게 근접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기록이며, 이때 탐라가 이들의 주위에 있어 항상 남송과 일본의 이해 관계가 상충되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에 현재의 열도에 당시의 <일본>이 있었다면 <남송>과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탐라니 뭐니 요충지니 뭐니 할 필요도 없다는 점이다.

고려의 탐라와 남송과 일본이 서로 근접해 있으면서 탐라가 일종의 완충지 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하니 주의해야 한다, 또는 남송과 일본의 요충지라는 기록을 남길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
고려는 한반도 개경에 왕도를 두고 탐라 즉 제주는 대륙의 장강 이북지역이라는 역사 해설은 구차한 변명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고려는 대륙의 중원에 있었던 왕조라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라는 것이다. ...
(후략)
좌계 (2009-07-10 10:13:19)  
/ VPHIL 님.

1. 호주 Australia의 현장정보를 전(傳)해 주신 점이 대도(大島) 맥제(百濟)를 연구함에 있어서 여간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기하게도 사서(史書)에는 이 지역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지만, 맥제(百濟), 신라(新羅), 고구리(高句麗) 사람들이 이 지역에서 고일본(古日本)과 경쟁하고, 오늘날 ‘보르네오(=칼리만탄) 지역에 있던 고일본(古日本)을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께서 멸망시키고, 창선도(彰善島)란 고구리 직할지를 만든 것을 “설마..??”하고 있습니다.
계속 현장정보를 전(傳)해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2. 좌계 역시 ‘탐라(耽羅)=탐모라국(耽毛羅國)=대만(臺灣)’이란 관념에서 벗어난 것은 <[태왕]太王의 <獨山斬倭>의 비밀: “합비(合肥)-금성(金城),<關防路>,<大運河>-[3]>이란 글을 쓴 한참 후입니다.

조금 전(前)에 ‘글’을 다음과 같이 수정(修正)하였습니다.

“여기서 탐라(耽羅)는 오늘날 제주도(濟州道)로써
그래서 ‘고구리 사초’에서는 독산참왜(獨山斬倭)라는 문장 다음에 ‘<耽羅>主<月孫>来降献土物.’ - 즉 “<탐라>주 <월손>이 찾아와서 항복하고 토산물을 바쳤다.”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여기서 탐라(耽羅)의 위치는 여기서 탐라(耽羅)는 오늘날 제주도(濟州道)로써, 이는 맥제(百濟)와 고일본(古日本)의 영향권에 있는 대표적인 나라였던 것입니다.

탐라(耽羅)는 주호(州胡)라고도 사서(史書)에 언급되는데, 태왕(太王)시절에 대해양세력인 왜(倭)와 고일본(古日本)이 그 세력을 일본열도까지 미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보해야하는 교두보(橋頭堡)였기에 서로 그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경쟁의 지역이었던 것입니다.

즉 독산참왜(獨山斬倭)로써 태왕(太王)은 조용히 고일본(古日本)이 장악하고 있는 대해양국가 내부(內部)에 균열(龜裂)이 생기게 한 것입니다.“

3. 중요한 것은 대만(臺灣)입니다.
“ ‘우리 역사’와 대만(臺灣)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 특히 “오늘날 제주도(濟州道)에 있었던 탐라국(耽羅國)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고대의 왜(倭) - 이는 일본열도 큐슈(구주(九州))에서 해양(海洋)을 통해서 태국(泰國)까지 걸쳐있는 해양세력입니다. -와 어떤 관계에 대만(臺灣)이 관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계속 관심을 쏟아야한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제주도(濟州道)’에 있었던 탐라국(耽羅國)은 주호(州胡)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 주호(州胡)는 신기하게도 ‘키작은 선비족(鮮卑族)’들을 모아서 제주도(濟州道)의 ‘화산(火山)돌(石)’이 가벼워서 물(水)에 뜨니깐, ‘움직이는 섬(島)’을 제조(製造)한 것같은 기록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한반도 남해안의 구야한국(狗邪韓國)은 대왜(大倭), ‘대가야’로써 묘사되고 있는데, 놀랍게도 “큐슈(구주(九州))의 왜왕(倭王)이 ‘해양세력’들에게 전달하는 일체의 문서(文書)와 물품(物品)에 대해서 ‘수색해서 통제하는’ 자사(刺史)와 같은 일을 하였다.”라고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대왜(大倭)에서 가장 멀리 갈수 있는 ‘인공(人工) 섬(島)’ 제작을 ‘탐라국(耽羅國)’에서 제작한 흔적은 국명(國名)에서도 느낄수 있습니다.

탐라(耽羅)의 라(羅)는 ‘네트워크(network)’란 의미입니다. 망라(網羅)한다는 말에서 그 용례(用例)를 찾을수 있습니다.

그런데 탐(耽)은 ‘기쁨으로 즐기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순수한 한자(漢字)의 어감(語感)으로 말하자면, 탐라국(耽羅國)이 ‘해양세력을 네트워크(network)할수 있는 ’인공(人工) 섬(島)‘을 제작하는 대왜(大倭)의 ’세계진출 기지‘로도 볼수 있습니다.

아무튼 탐라국(耽羅國)과 탐미다례, 탐모라도는 구분하여야하며, 이럴 경우, “오늘날 대만(臺灣)의 고명칭이 무엇인가?”가 매우 중요해집니다.
좌계 (2009-07-10 10:34:26)  
/ Mimesis 님

오래만에 뵙습니다. 올려주신 아래의 자료가 무척 놀랍습니다.

[원문(原文)]
耽 羅 , 高 麗 與 國 也 。 世 祖 既 臣 服 高 麗 , [以 耽
羅 為 南 宋 、 日 本 衝 要 , 亦 注 意 焉 ]。

[옮기신 글]
탐라(耽羅)는 고려와 같은 나라이다. 세조때 이미 고려를 복속시켜 신하로 하였다. 이 탐라는 남송과 일본이 충돌하는 요지이며, 또 주의해야한다 .(새겨서 조심해야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엄청난 강역의 파괴를 일으키는 내용이다.

즉 남송과 일본이 가깝게 근접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기록이며, 이때 탐라가 이들의 주위에 있어 항상 남송과 일본의 이해 관계가 상충되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에 현재의 열도에 당시의 <일본>이 있었다면 <남송>과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탐라니 뭐니 요충지니 뭐니 할 필요도 없다는 점이다.

고려의 탐라와 남송과 일본이 서로 근접해 있으면서 탐라가 일종의 완충지 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하니 주의해야 한다, 또는 남송과 일본의 요충지라는 기록을 남길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

- 각설(却說) 하옵고,
하도 경이(驚異)스러운지라, 직접 원사(元史) 원문(原文)을 찾아보았습니다.


원사(元史) 원문(原文)


  ○耽羅

  耽羅,高麗與國也。世祖既臣服高麗,以耽羅為南宋、日本沖要,亦注意焉。至元六年七月,遣明威將軍都統領脫脫兒、武德將軍統領王國昌、武略將軍副統領劉傑往視耽羅等處道路,詔高麗國王王禃選官導送。時高麗叛賊林衍者,有餘黨金通精遁入耽羅。九年,中書省臣及樞密院臣議曰:「若先有事日本,未見其逆順之情。恐有後辭,可先平耽羅,然後觀日本後否,徐議其事。且耽羅國王嘗來朝覲,今叛賊逐其主,據其城以亂,舉兵討之,義所先也。」十年正月,命經略使忻都、史樞及洪茶丘等率捕船大小百有八艘,討耽羅賊黨。六月,平之,於其地立耽羅國招討司,屯鎮邊軍千七百人。其貢賦歲進毛施布百匹。招討司後改為軍民都達魯花赤總管府,又改為軍民安撫司。

  三十一年,高麗王上言,耽羅之地,自祖宗以來臣屬其國;林衍逆党既平之後,尹邦寶充招討副使,以計求徑隸朝廷,乞仍舊。帝曰:「此小事,可使還屬高麗。」自是遂複隸高麗。

위 원문(原文)을 읽어보니 탐라(耽羅)는 오늘날 제주도(濟州道)이고, 일본(日本)은 오늘날 일본열도에 있는 나라를 뜻합니다.

그리고 내용은 원(元)과 대항한 고리(高麗)의 삼별초가 모시는 고리(高麗)와 원(元)을 따르는 고리(高麗)가 갈등하고, 실질적으로는 고리(高麗)에 두 왕조(王朝)가 있었는데, 원사(元史)에는 삼별초의 임연(林衍)과 김통정(金通精)이 탐라(耽羅)에 들어가서 활동하는 것에 대한 대처(對處)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것이 <時高麗叛賊林衍者,有餘黨金通精遁入耽羅> 즉 “이때 고리(高麗)의 반적인 임연이란 자와 그 (삼별초)의 여당(餘黨)인 김통정이 탐라(耽羅)로 숨어들었다.”에서 잘 드러납니다.

즉 ‘옮기신 글’은 대륙(大陸)의 고리(高麗)가 있고, 오늘날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제주(濟州)가 탐라(耽羅)이고, 이 지역이 일본(日本)과 남송(南宋)의 요충지라는 식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원사(元史) 탐라(耽羅) 원문은 정반대로 기술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삼별초’들이 오늘날 제주도(濟州道)인 탐라에 들어가서 오늘날 일본열도(日本列島)와 남송(南宋)을 연결시키어서 반(反) - 원(元)나라 세력을 총집결시키는 ‘요충지(要衝地)’이니깐 원(元)의 세계전략의 입장에서 주의(注意)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탐라(耽羅)는 또한번 오늘날 제주도(濟州道)임이 사서(史書)에 의해서 확인이 된 것입니다.

보다 명확히 탐라(耽羅)의 ‘위치’를 찾게하는 사료(史料)의 언급에 감사드립니다.
좌계 (2009-07-10 16:55:33)  
/ 잘못된 글에 대한 사과(謝過)

위 좌계의 ‘댓글’ 가운데, “오늘날 대만(臺灣)이 사서(史書)에 단주(亶州)로 나온다.”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밝힙니다.

오늘날 사서(史書)에 나오는 대만(臺灣)은 이주(夷州)입니다.
단주(亶州)는 오늘날 일본열도의 혼슈(본주(本州))에서 태평양 쪽에 있는 기이(紀伊)반도(半島)에 오른쪽에 있는 <미에 현[三重縣]>입니다.

이는 태백일사(太白逸史) 고구리국본기(高句麗國本紀)에 다음과 같은 기사(記事)에 의해서 알수 있습니다.
[원문(原文)]
<秦時徐市自 東冶海上直 至那覇經種島 而沿瀨戶內海 始到紀伊 伊勢舊有 徐福墓祠 或曰亶州 徐福所居云>

[해석]
진(秦)나라때 서시(徐市)가 동야(東冶) 해상(海上)에서 곧바로 나패(那覇)에 이르러, 종도(種島)를 지나 뇌호내해(瀨戶內海)를 따라 비로소 기이(紀伊)에 도착하였다. (이 기이(紀伊)는) 이세(伊勢)가 옛적에 있었던 곳인데, 서복(徐福)의 묘사(廟祠)가 있다. 혹은 말하기를 단주(亶州)라고 하는데, 서복(徐福)이 살던 곳이라고 일컬어진다.

<미에 현[三重縣]>에 대한 소개
target=_blank>http://cafe.daum.net/tour9999/BqEy/54?docid=1BctL|BqEy|54|20080113002417&q=%DF%B2%F1%EC%FA%E3&srchid=CCB1BctL|BqEy|54|20080113002417


삼중현(三重縣)을 찾을 수 있는 일본지도
target=_blank>http://www.nihongo.co.kr/map.html


좌계가 이주(夷州)와 단주(亶州)를 착각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착각을 하게 된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은 항시 이주(夷州)와 단주(亶州)를 붙여서 부르는 이상한 습관이 중국대륙에 산 사람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오(吳)의 손권(孫權)은 이주(夷州)와 단주(亶州)를 “오(吳)나라를 개척하는 일종의 노예들을 대량으로 가져올려는” 뜻에서 정벌을 하였는데, “이주(夷州)에서 전염병과 토착민들의 반발로 병력 대부분을 잃고, 또 단주(亶州)는 멀어서 못갔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신라(新羅)의 경주(慶州)가 오늘날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라고 할때 자주 나타나는 왜(倭)가 이주(夷州)에 그 본거지를 두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손권(孫權)은 “이주(夷州)에 왜(倭)들이 일본열도를 이동하였다.”는 어떤 정보와 또 왜(倭)에 대한 과소평가로 무모한 정벌(征伐)을 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이주(夷州)와 단주(亶州)를 혼동한 것에 대해서 사과(赦過)드립니다.
Mimesis (2009-07-10 23:30:47)
좌계님 정말 감사합니다. 또 많이 가르쳐 주시네요.

원문 해석 능력이 없어 한계를 여실히 느낍니다만, 그렇다고 전혀 언급을 않하면 작은 것이라도 '배우고 깨우칠' 기회조차 없어지는 것 같아서 눈여겨 봐두었던 사이트의 글 참고로 올려본 것입니다.
VPHIL님이 질의하신 내용 관련하여서는 댓글이 아닌 하나의 항목으로 정리할 만한 내용이 아닌가 생각만 해봅니다.

사실, 저는...아직도 좌계님이 올리신 글들 다 못좇아간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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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본  (2009-02-07 17:14:37, Hit : 889, Vote : 11
 임나(任那)는 담로(擔魯)의 이형표기였을 것

양서(梁書) 백제전(百濟傳)에 따르면 백제는
"읍(邑)을 담로(擔魯)라고 하는데, 중국의 군현(郡縣)과 같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양서보다 이른 시기에 씌여진 남사(南史) 백제전(百濟傳)에는 이 담로를 '簷魯'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 百濟國號王所都城曰固麻,邑曰簷魯,

여기서 담로의 담은 각각 擔 또는 簷 이렇게 표현되는 데
남사가 양서보다 일찍 편찬되었으므로 양서의 擔魯는 남서의 簷魯를 잘 못 베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강희자전에 보면 이 남서의에 대해
《廣韻》屋簷。與檐同。《釋名》簷,檐也,接檐屋前後也。亦作櫩。이렇게 표현합니다.

즉 광운에서는 이 簷은 지붕과 지붕이 연접해 있는 처마들을 말하며 그것은 檐과 같다고 하고
석명에서는 簷,檐也라고 다시 확인이 됩니다.

따라서 양서의 저자는 남사의 簷을 그 뜻과 음이 같은 檐자로 적는 다는 것이 그만 擔자로
잘못 적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남서의 簷魯는 그 발음이 '담로'였을까요?
결론 부터 말씀드리면 '아니다'입니다. 그 보다는 '얌로' 또는 "임로"에 가까왔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여기에는 중요한 수수께끼를 풀 실마리가 있습니다.

簷의 발음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를 처마 첨, 이라고 발음합니다.
하지만 簷의 중국발음은 '얀'(yan)입니다.

집운과 정운의 발음을 따르면 '염'/임에 가깝죠 ==> 《集韻》余廉切《正韻》移廉切

● 簷 / yánㄧㄢˊ (chinese etymology)

백제와 일본은 한자음에 대해 북경음이 아닌 오(吳)음을 따랐을 것이기에
이 음을 광동어에서 추적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Cantonese
Hanzi
簷 (yim4)


즉 남서에 쓰여진 簷魯를 당시 백제가 차용한 오음으로 읽으면 '임로/임노'가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때 백제의 簷魯(임노)와 임나(任那)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우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가 설명하고 있는 임나일본부의 설명을 봅시다.

============================================================================================
천관우(千寬宇)는 ≪일본서기≫의 임나관계 기록들을 재해석,
기록의 주어를 왜왕이 아닌 백제왕으로 봄으로써 ‘왜의 임나 지배’가
아닌 ‘백제의 가야 지배’라는 시각으로 가야사를 복원하고자 하였다.

그는 근초고왕이 369년에 가야지역을 정벌해 백제권에 편입시킨 후,
가야 지배를 위해 설치한 파견군사령부가 이른바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그리고 5세기부터 6세기 초에는 군사령부가 김천·달성 등의
낙동강 중·상류방면에 있었고, 530년대 이후에는 진주·함안
등의 낙동강 하류방면에 있었다는 것이다.

김현구(金鉉球)는 보다 신중하게 긴메이기의 기록만을 이용해,
임나일본부는 백제가 가야 통치를 위해 설치한 기관이었다는
천관우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6, 7세기
백제와 야마토 사이의 외교관계의 특징을 용병관계(傭兵關係)로 파악하였다.
=============================================================================================

김현구의 연구를 보면  백제가 가야통치를 위해 설치한 기관이 '임나일본부'라는 점에서
바로 이 임나와 백제의 簷魯(임노)간의 연결고리를 발견 할 수 있는 것이죠.

다시말해 일본은 백제의 고마나리를 중심으로 백제가 설치한 22개의 簷魯(임노)와 연합했을 가능성
입니다.

그러한 簷魯(임노)가 또 다른 이형표기를 통해 임나(任那)로 사용된 것이 아니냐는 것이 저 솔본의
추측입니다.

任那라는 뜻은 '맡겨진 땅' 즉 봉분 받은 땅이라는 의미로부터 그것이 우리가 담로제라고 알고 있는
백제의 簷魯(임노)를 뜻과 발음이 일치하게 적은 일본측의 기록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광개토왕비문의 백잔,신라 구시속민의 백잔(百殘)은 이 簷魯(임노)를 뜻하고
이 簷魯(임노)가 왜와 세력을 결합한 것을 고구려는 임나(任那)로 본 것이 아니었을까요?




-솔본-



...................mimesis

                   다음은 KBS '일요스페셜' - 백제 22담로의 비밀 에서 담로의 어휘가 퍼져 있거나 현재에도 흔적이

                   찾아지는 곳을 표기한 장면입니다.

 






Mimesis (2009-02-08 04:37:36)  
담로의 발음에 대한 추적은 간략하고 짧게 언급하셨습니다만, 충격적이네요.

저 개인적으로는 백잔과 임나에 대한 솔본님의 추측이 옳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시기에 따른 위치 비정은 아직 정리되어 받아들이진 못하고 있지만, '임나신론'(김문배.김인배 저)에서
지적한 백잔과 임나에 대한 해석이 솔본님의 추측 내용과 일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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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솟대 (2009-04-23 13:21:46, Hit : 322, Vote : 3
 EJo_Nation_Land_Map___7C_End.jpg (400.2 KB), Download : 23

 [re] 7C말 열도는 하이(蝦夷)와 백제담로의 분할통치시대

     : 삼국시대 왜는 열도와 전혀 무관



그림 1. 열도를 통치한 하이(蝦夷)의 시대별 강역 변화
          [7C~15C까지는 열도는 남북국시대 혹은 이국시대로 보아야 한다]

지금 일본열도에 일본이란 나라가 있다고 시초부터 그들이 그곳에 살았던 것은 역사에 대한 몰이해로 인한 강단과 일본인들의 오인입니다.

그들이 열도에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것은 백제가 멸망한 이후 수십년이 흐른 후였으며 고구려-백제-신라시대의 지나사서에 등장하는 왜와는 전혀 다른 세력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4C이전의 열도는 단군조선의 강역이았고 이후 부여-고구려에 신속되거나 복속된 지역이며 가야와 신라의 진출 이후의 시기를 한정해 본다면  열도의 남부는 고대의 가야나 신라나 백제가 정복한 강역으로  열도의 북부는 15세기초엽까지도  하이(蝦夷)의 강역으로 나누어 보아야 옳을 것입니다.

고대에  5세기말부터 ~ 7세기말까지 현 일본열도는 두개의 세력으로 분할되어 통치되고 있었습니다.
열도북부는  하이(蝦夷)의 강역이었고   열도 남부는 백제 담로의 강역이었습니다.

5세기말의 하이(蝦夷)와 해외침입세력과의 국경은 열도 남부의 주인이 계속 바뀌었지만 7세기말까지 변함없이 현 일본열도의 절반을 자신들의 땅으로 유지할만큼 세력이 강력하였고 진국-발해=사신이 해풍으로 인하여 하이(蝦夷)땅에 표류하여 억류된 기록이 있을 정도로 여러 사서에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백제패망후 성립된 왜국과 함께 열도를 양분하여 통치하였던 하이(蝦夷, 일본어로 에조)는 원래 고대에 에미시 혹은 에비시라고도 불렀으나 헤이안시대(794~1192) 후기부터는 하이(蝦夷, 일본어로 에조)라고만 부르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아이누(Ainu)라는 다른 호칭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참조> 아이누족(Ainu), 하이(蝦夷, 일본어로 에조)
현 일본열도내 아이누 민족(Ainu, 일본어: アイヌ民族)은  8~9세기이후 백제의 패망으로 인한 왜국의 성립과 함께 왜국측의 계속적인 침략정책으로 동북쪽으로  밀려나서 9세기이후에는 도호쿠지방북부와 훗카이도만이 자신들의 땅으로 남아 세력이 점차 약해지기 시작했고 15C 임진란이후로 도쿠가와막부때부터는 도호쿠북부지방에서조차도 왜인들이 침략해 들어와 여기에서도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였고 19세기 메이지시대에 이르러서는 일본이 무력으로 강제 흡수합병하여 마지막 남은 그들의 영토인 훗카이도마저도 상실하고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였다.
이후 민족 말살정책과 철저한 탄압으로 인하여 인구가 급속하게 감소하여 오늘날의 일본 홋카이도지방에 남은 수는 대략 10만명에 불과하다.



이들 열도의 신생왜국이, 삼국시대의 해상활동을 왕성히 하던 왜와는 무관하다는 점은 그들의 열악한 해상항해능력으로도 입증된다 할 수 있습니다.

백제가 멸망하고 열도에 남은 백제담로세력이 새로이 나라를 세웠음에도 백제멸망후 180년이 지났음에도 그들은 항해할 선박을 건조하지 못하여 839년에도 신라선6척을 수입하여 운용하였고 839년에 이르러서야 역사 시초로 대양항해능력이 있는 능능파해한다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의 집성체인 <신라선>의 건조를 시도하게 됩니다.
심지어 항해할 배의 선장과 선원조차도 신라인을 고용해야 했습니다.


추가로, 장보고 의 출생년도는 알수없지만 사망한 년도는 846년입니다
장보고가 이미 해적소탕을 완전히 끝내고 무역선과 함께 회역사(廻易使)를 일본 조정에 파견한 것이  840년(문성왕 2)입니다.
대양항해할 선박도 없는 주제에 백제 패망후 성립된 현 열도의 신생 왜국이 무슨 주제로 해적이 되어 노략질을 하겠습니까?


항해술에도 무지한 신생 왜국이 대양을 건너서 해적질을 한다는 것은 기지도 못하는 갓난얘기가 서커스공연을 하는 격이지요.

그럼에도 강단은 일본인들의 사서조차도 무시하며 고구려-백제-신라시대의 왜와 현 열도의 왜국을 동일시하는 황당무계한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장보고활약시에 나온 해적들은 건조는 커녕 대양을 항해할 줄도 모르는 무지한 열도 남부의 신생국인 백제담로후예인 왜국인들이 아니라 바로 백제와 고구려, 특히 백제의 대륙 왜 세력이라 보는 것이 맞습니다.

현 차이나대륙동부의 하수와 해안가에서 고대 삼한시대부터 삼국멸망기까지 강안이나 해안가에서 해상활동을 업으로 하던 세력이 바로 지나사서의 왜의 정체라 보는 것이 맞습니다.

백제패망후 180년이 지난후에도 선박건조는 물론 항해조차도 할 줄 모르는 무지한 열도의 신생왜국은 차이나사서에 등장하는 왜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보여집니다.

거론되어지는 汗人등이 바로 지나사서의 '왜'의 정체임을 규명할 수있다면  대륙에서 활동하던 수상세력의 실체를 규명하여 대륙동안의 해상활동역사의 큰 축을 이루는 고대 한민족의 한 갈래를 밝혀내고 동아시아 고대 해양활동사를 복원해내는 금자탑을 쌓는 세기적인 업적이 되리라 봅니다.

문제는 강단에서 이 문제에 관심있는 양반이 한 두명도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민족사학에서도 두~세분이 이 분야에도 침착하셔서 그 해상활동사를 연구해 많이 밝혀내셨지만 그 해상활동세력의 기원을 명확히 규명해내지까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다행히 좋은 사료를 여러분께서 계속 소개해주시고 계시니 누군가 좋은 결과를 얻으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앞으로, 고대 동아시아 해양사 복원이란 휼룡한 업적을 어느 분들이 나오셔 이루게 되실지 정말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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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운] 오랑캐들이 바다를 건너는 배를 박(舶:큰배 박,장삿배 박,상선 박)이라하고 한다.

[속일본후기] 승화 6년(839년) 7월 17일 "조정은 대재부에 하달하기를 신라선은 풍파를 능히 감당할 수 있으니 건조하라"

[속일본후기] 승화 6년 9월13일  대마도가 조정에 보낸 공문
         "항해는 풍파로 위험한 것이어서 해마다 조공과 네 차례의 공문을 보낼 때마다 번번히 표몰합니다.
          전문컨대 신라선이 능능파해한다고 하오니 바라건대 신라선 6척중 1척을 분급해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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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말 7세기, 열도는 하이(蝦夷)와 백제담로 둘로 양분. / (2008-11-10 21:31:37, Hit : 621, Vote : 34)

글 : 솟대

 

고대 5세기말부터 6세기와 7세기의 현 일본열도는 둘로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열도북부는  하이(蝦夷)의 강역이었고   열도 남부는 백제 담로의 강역이었습니다.
물론, 열도의 절반인 열도남부가 누구의 땅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각각 다릅니다.
어떤이는 가야의 땅으로 어떤이는 백제의 땅으로 어떤이는 신라의 땅으로 어떤이는 열도왜로 보기도 합니다.
여기서, 주된 견해는 부여등에 의해 개척되어 신라,가야등이 본격적으로 진출하고 가야가 아우르다가 5,6세기로 넘어가면 백제가 이를 뺏아 열도의 남부에는 백제의 담로가 설치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7세기후반에도 교또지방까지 하이(蝦夷)의 강역이라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하지만, 열도북부는 9세기에도 여전히 대부분 하이(蝦夷)의 강역이었고 도호쿠지방의 대부분은 조선조 전기에도 왜가 아닌 하이(蝦夷)의 땅이었습니다.

물론, 현재의 오끼나와는 19세기말 일본이 미국에 굴복하여 개화할때까지도 일본과는 전혀 무관한 별개의 왕국으로 존재했었습니다.

이러한 하이(蝦夷)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의 일본영토도 또한 열강의 서세동점시기에 이루어진 근대의 산물임을 주지하여야 합니다.
조선전기까지도 열도는 본토마저도 남북으로 그땅의 주인이 달리 분할되어 있었습니다.
일본영토가 고대부터 현재의 강역이었다는 잘못된 인식은 버려야 합니다.

현재, 하이(蝦夷)의 후예들은 러시아와 일본땅에 그들이 살던 강역이 편입되어 소수민족으로 전락해버렸으며 일본에는 현재 18세기,19세기까지도 자신들의 마지막 남은 고향이었던 북해도(훗카이도)에서마저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여 그들의 고유문화도 여행객들의 관광상품으로 전락하여 있는 처지입니다.
이들은 부여계와는 무관하고 배달국시대와 그 이전의 역사의 후예라 보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참조> 일본열도의 지역별구분
"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ko/2/22/Japan_map_korean.png "

 

반대로 왜곡된 2세기말 신라의 왜국 정복- 신라세력 '비미호'의 반정과 왜국평정(完)

 

글 : 솟대 / (2008-07-03 02:10:26, Hit : 1019, Vote : 83)


선생님 답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신공이 허구의 인물이고 하대신라때에도 왜는 월해능력이 없었으니 2세기말 왜의 위치가 열도라고 가정한다면 더욱 신공의 신라정벌이 허구라고 저도 공감하지만 신공이란 인물을 어디에서 만들어냈냐에 대해서는 약간 다른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바로, 비미호가 신라선의 지원으로 무기,군수,병력등을 보급받아 끝까지 반대하던 왜세력을 토벌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신공관련 견해는 김성호선생님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에서 언급된 견해가 맞지 않을까 보고 있습니다.)

신라,백제부분은 아는 바가 별로 없지만 요점은 히미꼬(=비미호)는 한국과 지나의 사서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실존인물이지만 신공이라는 인물은 일본서기에만 등장하는 허구의 인물이라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공은 한국이나 지나의 사서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인데 완전히 위조해냈거나 아니면 일본서기를 편찬할때 다른 인물의 모티브를 가져와 존재하지 않는 신라정벌설을 만들어서 부풀렸거나 이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공이라는 인물의 모티브를 어디서 따왔느냐가 중요한데 지나의 각종 사서나 한국의 사서에서 찾을 수 있는 왜국역사에서 유일하게 여왕의 모티브를 가져올 수 있는 인물은 비미호뿐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쪽 방면은 잘 모르오니 혹시 고대 왜사에서 모티브가 될만한 다른 왜국 여왕이 있었으면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문제는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여왕 신공의 신라정벌을 정설로 만들고자 일본서기에 나오는 2세기 후반의 신공이 4세기 역사서에까지 등장하는 모순을 궤변으로 변론하고  여기다 칠지도까지 신공과 연결시키려는 요설을 주장한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일본서기를 배제하고 지나와 한국의 사서만으로 보면 비미호(=히미코)는 신라 아달라왕대의 인물이 확실하며 전쟁을 벌여 당시의 지배자이던 남자왕을 척살하고 여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공통점입니다.
2세기 후반(대략 173~178년)에 비미호란 여자가 어떤 세력을 뒤에 업고 왕권을 놓고 전쟁을 벌였는데 암살이든 전투에서의 승리이든 상대방인 왜왕을 죽이고 기존의 왕의 지지세력인 반대세력과 혈전을 벌여 그들을 축출하고 왜국을 통합하여 여왕이 된 것은 분명한데 세오녀설화가 아달라왕시기임을 고려할때 이는 비미호가 신라세력을 뒤에 업고 현존하는 왜왕과 그 지지세력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 생각됩니다.

세오녀 바로 비미호(히미코)는 천일창의 후손이라는 견해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신라의 세오녀가 왜국에 정착한 후 세력을 키우고 드디어 신라의 지원을 받아 왜국을 정복한 즉 신라가 왜국을 사실상 번국으로 귀속시킨 치욕적인 사실을 은폐하고자 신공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내고 그 모티브를 비미호에서 따와 신라세력이 왜를 정복한 사실을 반대로 뒤집어 신공이 신라를 정벌했다는 거짓을 일본서기에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본서기를 편찬한 시기는 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의 담로국이었던 열도왜가 혼자서 독립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서 그 정당성을 세우고자 역사를 왜곡하여 기술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왜가 백제의 담로국이었으므로 자신들로서는 모국인 백제를 멸망시킨 원흉인 신라가 2세기말경에 왜국내의 신라세력인 비미호-세오녀-를 지원하여 왜국을 정복한 사실 자체가 치욕이었으므로 이를 역사에서 지워 감추고 싶었고 실제 역사에서는 신라세력에 패배한 것을 일본서기에서나마 신라를 정벌한 것으로 하여 위안을 삼고자 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일본은 신공을 칠지도와 연결시키려고 3세기중반과 4세기말로 되어있는 신공말년기록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일본서기의 신공 55년 초고왕 사망기록이 근초고왕을 잘못 기록했다며 신공55년이 근초고왕 사망년도인 375년이라고 하여 신공을 4세기말까지 살은 슈퍼걸로 만들어 2세기말의 인물이라고 기록된 신공(신공원년 179년)의 치세를 4세기말까지 늘려 놓고 그리한 결과 신공 55년은 서기 255년이 되어 근초고왕 사망년도인 375년과 1백 20년의 차이가 나서 신공의 1년이 1백20년간이 되는 모순이 생기자 삼국사기와 기년을 맞춘다고 2주갑인상이라는 궤변으로 다시 일본서기의 기년을 올려버리는 말도 안되는 장난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칠지도와 연결시키려는 지나친 무리수이고  신공은 가상의 조작인물일 뿐이며 신라세력 비미호가 2세기말 반란을 일으켜 왜를 차지하였고 칠지도는 2세기말의 비미호와는 전혀 무관한 거의 2백여년 후인 4세기 후반에 가야세력을 정복하고 열도왜를 차지한 백제세력이 번국인 열도담로국에 내린 유물로 보는 것이 맞지 않나 싶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일본인들은 일본서기에서 신라를 정벌했다는 허구의 인물인 신공이라고 생각하는 지나와 한국측 사서에 등장하는 비미호의 왕국 바로 야마타이국을 찾아내고자 황국사관이 난무하던 제국주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눈에 불을 켜고 전국을 헤매며 찾아다녔지만 결국 열도내에서는 2세기말에 해당하는 어떠한  관련 유물이나 유적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일본내에서조차 야마타이국의 동남아시아 자바,수마트라위치설까지 등장하였고 비미호의 시대보다 200년이나 훨씬 더 오래된 사가현의 요시노가리유적을 억지로라도 연결시켜보려고 무리했을 정도입니다.
(발췌인용 - 야마모토 히로우미의 교양인을 위한 일본사)


이로 볼때, 이 시기까지는 운영자님께서 비정하고 계신 것처럼 왜의 강역을 일본인들이 전혀 고려하지 못했던 산동반도 이남의 남부로 보는 것이 옳은 방향이 아닌가 생각하였습니다.
다만, 초기 한나라때는 낙랑해중(발해만일대)의 도서국들로 흩어져 있다가 지나 삼국분열기인 위나라때에 이르러서는 해안을 따라 남으로 이동하여 백제와 신라의 아래녁인 대륙의 남부연안에 완전히 정착해 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즉, 신라세력의 왜국진출과 왜국복속을 담은 세오녀이야기의 실재 인물인  '비미오'는 존재한 시기가 2세기말이지만 활동한 지역도 대륙의 남안이었고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가상인물 '신공'으로 연결시키려고 애쓰는  칠지도유물은 2백여년 후의 4세기후반 일본열도에서의 백제세력이 남겼으므로  아무리 일본인들이 신공이라 주장하는 '비미오'를 칠지도에 연결시키려 일본열도를 헤집어도 시간과 공간이 완전히 다르므로 비미호의 야마타이국 관련유적이 나오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 가 합니다.
(기년은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하였습니다.)

삼국사기 기년을 따르면 아달라왕 20년인 서기 173년에 '비미호'가 사신을 파견 반란을 위한 신라 아달라왕의 지원을 요청하여 6년간의 혈전(일본서기상의 9년간 재위했다는 중애천왕재위기간중 편년기사 공백기: 중애 3년~중애 8년)이 벌어졌고 신라의 지원으로 이 전쟁에서 승리한 '비미호'가 신라 아달라왕 26년인 서기 179년에 여왕으로 신라의 분국인 왜녀왕으로 등극한 것이 됩니다.  
신라가 왜국을 병합하여 '비미호'를 신라의 제후국인 번국 '야마타이국'의 여왕으로 세운 것입니다.
물론, 남당선생님의 백제왕기에 따르면 등극한 해는 조금 다르겠지요.
중요한 점은 신라 아달라왕 26년이 바로 '비미호'가 왜여왕이 된 재위 1년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  신라 아달라왕 26년 = 신라번국인 야마타이연합국 '비미호' 재위 1년  "

일본인들은 '야마타이국'에 대하여 그들은 일본서기에서 신공의 바로 전왕인 중애가 척살되었음을 일부학자만 인정하고 있지만 왜국왕이 척살되었던 이 시기에 왜국은 분열되어 수많은 소국으로 나뉘어 세력항쟁을 하였는데 '히미코'가 이를 통합하여 여왕으로 등극하고 30여개의 소국을 복속하여 거느린 '야마타이국 연합'을 형성하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히미코'의 왜국의 실체가 수많은 소국들이 '야마타이국'의 권위를 인정하고 복종하는 느슨한 연합국체제라는 점은 주나라때 또는 춘추시대때의 주나라와 제후국의 상하 관계 정도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연합국체제의 나라가 강력한 왕권제의 나라였어도 국력을 다 기울여도 이기기 어려운 신라를 정벌했다는 것은 넌센스이지요. 그것도 신라의 지원을 받아서야 겨우 고만고만한 소국들을 간신히 병합하여 '야마타이연합국'을 이루었으니까요.


>> 관련사서기록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왕 20년(서기 173년) 왜녀왕 '히미꼬=비미호가 사신을 파견하였다"

<위지> '왜인전'의 남자왕-중애로 추정-과 여왕인 히미꼬(비미호) 왕권교체기 내전기록
"왜국도 원래부터 역시 남자왕이 70~80년을 통치해 왔으나 왜국에 난리가 나서 수년동안 서로 싸우다가 '히미꼬'를 여왕으로 공립했다"

<후한서> '왜전'
"서로 정벌하며 싸우느라 수년동안 주인이 없었다"

<위지>
"경초2년(서기 238년) 왜국 여왕이 대부...등을 사신으로 보내왔다."

<삼국지(三國志) > 동이전
위 명제 조예 경초(景初) 연간(237~239)에 위의 명제가 사마의(司馬懿)를 시켜서 공손씨인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하고 238년 유흔(劉昕)과 선우사(鮮于嗣)를 보내서 낙랑군과 대방군도 평정하였다.

<북사> '왜인전'
3세중반인 위 애제 조방(曹芳) 정시 연간(서기 240~249)에 비미호(히미꼬) 사망




>
>삼국사기 백제본기 백제왕 재위기간.
>1, 溫祚王(온조왕) 재위 46년, B.C 18~A.D 28
>2, 多婁王(다루왕) 재위 50년, 28~77년
>3, 己婁王(기루왕) 재위 52년, 77~128년
>4, 蓋婁王(개루왕) 재위 39년, 128~166년
>5, 肖古王(초고왕) 재위 49년, 166~214년
>6, 仇首王(구수왕) 재위 21년, 214~234년
>7, 沙泮王, 沙沸王(사반왕) 234년
>8, 古爾王(고이왕) 재위 53년, 234~286년
>
>백제왕기 기년
>仇知王(구지왕), 재위 39년, 188년 - 226년
>肖古王(초고왕), 재위 29년, 226년 - 254년 (20년이 적음)
>仇首王(구수왕), 재위 11년, 254년 - 264년 (10년이 적음)
>古爾王(고이왕), 재위 23년, 264년 - 286년 (30년이 적음)
>
>고구려사초 기년 vs 고구려본기 기년
>
>芻牟大帝 재위19년 BC37 ~ BC19 동명성왕 재위19년 BC37 ~ BC19
>光明大帝 47년 BC19 ~ AD28 유리명왕 37년 BC19 ~ AD18
>大武神大帝 37년 28 ~ 64 대무신왕 27년 18 ~ 44
>閔中帝 5년 64 ~ 68 민중왕 5년 44 ~ 48
>慕本帝 6년 68 ~ 73 모본왕 6년 48 ~ 53
>神明仙帝 40년 73 ~ 112
>太祖皇帝 35년 112~ 146 태조대왕 94년 53 ~ 146
>次大帝 20년 146 ~ 165 차대왕 20년 146 ~ 165
>新大帝 15년 165 ~ 179 신대왕 15년 165 ~ 179
>故國川帝 19년 179 ~ 197 고국천왕 19년 179 ~ 197
>山上大帝 31년 197 ~ 227 산상왕 31년 197 ~ 227
>東襄大帝 22년 227~ 248 동천왕 22년 227 ~ 248
>中川大帝 23년 248 ~ 270 중천왕 23년 248 ~ 270
>西川大帝 23년 270 ~ 292 서천왕 23년 270 ~ 292
>烽上帝 9년 292 ~ 300 봉상왕 9년 292 ~ 300
>美川大帝 32년 300 ~ 331 미천왕 32년 300 ~ 331
>
>남당 유고(신라사초) 기년 vs 삼국사기 기년
>
>1 혁거세 (재위 61년)BC57- AD4
>2 남해 (재위 21년) 4- 24
>3 유리 (재위 34년) 24- 57
>4 탈해 (재위 24년) 57- 80
>5 파사 (재위 33년) 126 ~ 158 (재위 33년) 80- 112
>6 지마 (재위 33년) 159 ~ 191 (재위 23년) 112- 134
>7 일성 (재위 21년) 192 ~ 212 (재위 21년) 134- 154
>8 아달라(재위 31년)213 ~ 243 (재위 31년) 154- 184
>9 벌휴 (재위 13년) 244 ~ 256 (재위 13년) 184- 196
>10 나해 (재위 35년) 257 ~ 291 (재위 35년) 196- 230
>11 조분 (재위 18년) 292 ~ 309 (재위 18년) 230- 247
>12 첨해 (재위 15년) 310 ~ 324 (재위 15년) 247- 261
>13 미추 (재위 25년) 325 ~ 349 (재위 24년) 261- 284
>14 유례 (재위 15년) 350 ~ 364 (재위 15년) 284- 298
>15 기림 (재위 7년) 364 ~ 370 (재위 13년) 298- 310
>16 흘해 (재위 8년) 370 ~ 377 (재위 47년) 310- 356
>17 내물 (재위 26년) 377 ~ 402 (재위 47년) 356- 402
>18 실성 (재위 16년) 402 ~ 417 (재위 16년) 402- 417



솟대 (2008-07-03 12:21:08)  
여러가지 사료를 비교해볼때 '비미호' 재위기간은 상당히 길었으며 신라왕대에 관해서는 남당의 신라사초보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의 기년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참고로 '비미호'의 등극과 사망년도를 비교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신라사초기년에 따르면 '비미호'의 왜왕 등극시기인 아달라왕 재위 26년은 서기 238년이고
삼국사기기년에 따르면 '비미호'의 왜왕 등극시기인 아달라왕 재위 26년은 서기 179년입니다.
왜여왕 '비미호'의 사망시기는 정시연간인 서기 240~249년의 일입니다.

'비미호'가 사망한 것은 최대한 길게 잡으면 249년이지만 유력한 사망년도로 추정되는 서기 247년으로 가정할때 신라사초의 기년을 따르면 '비미호'는 재위 10년만에 일찍 사망한 것이 됩니다.

삼국사기기년을 따르면 역시 동일한 247년 사망으로 볼때는 재위 69년에 사망한 것이 됩니다.

'히미꼬'를 모티브로 만들어낸 일본서기상의 '신공'이라는 가상인물에 대해 일본측은 재위 70년만인 248년 사망으로 최종적으로 주장하고있습니다
卑弥呼(ひみこ、175年頃? - 248年頃)[일본 위키피디아사전 발췌]
솟대 (2008-07-03 12:45:55)  
어떤 사료의 기년을 따르는 것이 맞는지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사료가 있었네요.
이제 찾았습니다. 양서梁書의 기록입니다.
" 光和中(178年-184年)卑弥呼が共立され倭を治め始める。"『梁書』

광화光和(178年三月-184年)은 찾아보니 동한東漢-후한- 멸망기의 통치자인 영제靈帝 유굉劉宏의 연호라 합니다.
아들인 한소제 유변(漢少帝 劉辯)은 동탁에게 죽음을 당하는 인물이고 다른 아들인 진류왕이 동탁에 의해 유변변을 대신하는 왕으로 옹립됩니다.

최소한 서기 184년에 '비미호'가 왜왕으로 등극하였으므로 '비미호'의 재위를 서기 238년으로 본 신라사초기년은 잘못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삼국사기기년에 따르는 것이 맞고 남당사서내의 '신라사초'와 '고구려-백제사초'의 관계는 '신라사초'의 기년설정이 잘못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이라 사료됩니다.

이로볼때 '신라사초'의 진위여부를 떠나 남당선생이 일본측 사고를 열람할때 신라사료는 '일본서기'의 신공관련부분에 유리한 텍스트만을 일본측이 열람하게 하였다 생각됩니다. 거기서 서술한 기년이 틀렸다는 것이지 '신라사초'가 무조건 위서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신라사초는 일본측에 의해 선택되어진 텍스트라 할 수 있으므로 그 해석이나 적용에 매우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다른 사료의 보완정도로 보아야 하지 대립되는 내용일 경우 '신라사초'만으로 단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 될 수 있습니다. 남당사료에서는 '고구려사초'등에 더 무게 방점을 두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합니다.
정성일 (2008-07-03 19:35:46)  
솟대님 저도 처음엔 비미호과 여왕이므로 일본서기에 유일한 여왕인 신공황후와 연관이 있지 않을 까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 제가 내린 결론은 신공과 비미호는 절대 같은 인물이 될 수 없습니다.
신공과 비미호는 동시대의 인물이 아니며, 비미호는 일본서기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느왕의 비였거나, 태후였을 것입니다.
신공황후는 백제 근초고왕과 같은 시대의 인물로 나타나면서도 기년은 전혀 엉뚱합니다.
기년이 약 120년 차이가 납니다.
신공황후가 죽였다는 신라왕은 거짓이라고 들 하는데 과장됨도 있고,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 기년과도 맞지가 않지요.
대부분은 우로태자가 죽은 사건과 연관시키는데 도무지 기년이 맞지를 않지요.
지금의 삼국사기 신라본기로는 절대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1. 신공황후를 비미호와 동일한 인물로 설정하게 한다면(일본서기의 기년을 인정)
a.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과 비교하면 신공황후는 2-3세기의 인물이 되고,
b. 남당유고 신라사초 아달라이사금과 비교하면 신공황후는 3세기의 인물이 되고,

2. 신공황후를 칠지도와 연관하여 근초고왕과 동시대의 인물로 판단한다면(일본서기의 기년을 부정하고 백제의 기년으로 정리)
a.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근초고왕은 4세기의 인물이므로, 신공황후 또한 4세기의 인물이고,
b. 남당유고 신라사초에는 우로태자는 미추이사금 시기에 죽었으므로 역시 4세기의 인물입니다.
정성일 (2008-07-03 20:18:21)  
남당 유고중에 고구려사초에 중점을 두어야 하지 않느냐는 말씀 무슨 뜻인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고구려사초와 신라사초 둘 중의 하나는 위서입니다.
신라사초에 중점을 두면 삼국사기 또한 위서가 되지요.
저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으며, 지금이라도 백기를 들고 항복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어쩌면 이병도 처럼 고구려는 태조왕 이전을, 백제는 고이왕 이전을, 신라는 내물왕 이전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면 마음 편하겠지요.

제가 현재 부딪혀야 할 사람들은 강단, 재야, 고구려사관을 가진 일반네티즌, 심지어 일본 사학자들과도 싸워야 합니다.
김부식도 포기하고, 일연도 포기하고, 이병도도 포기하고, 남당 박창화도 포기하고, 세연님도 포기했습니다.
고대사에 책을 펴낸 교수님들의 얼굴어 똥칠하고, 말 그대로 고대사의 핵폭탄인데, 정말이지 맞아 죽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입니다.
저 또한 이병도 만큼의 명성(악명)을 이룰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성일 (2008-07-03 20:35:10)  
마음이 다 잡아지지 않아서 그렇지 남당 유고의 해석은 마무리 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후대에게 빚을 지우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공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고 그저 악명만 이루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솟대 (2008-07-04 00:23:09)  
너무 극단적으로 판정하셔서 너무 심각하게 보시는 것 같아요.
신공은 역사상으로 존재한 적이 없는 허구의 인물입니다.
신공이 실존인물이라고 증명해준 근거가 없으므로 비미호와 동시대의 인물인지 검토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신공은 일본 서기에서만 등장하는 70년을 재위하고서도 2세기에서 4세기까지 400여년을 통치했다는 황당무게한 허구일 뿐이니 고민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실존인물인 비미호에 대해서만 검토하면 되지요.
제가 보기에는 신라사초의 기년설정은 잘못되었지만 기년이 틀렸다고 모든 것이 위서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시각이죠.
삼국사기등의 태조왕 이전이나 고이왕 이전이나 내물왕 이전을 믿을 수 없다면 70년 재위에 400년을 통치했다는 SF소설인 일본서기는 아궁이에 던져 다 태워버려야죠.

그것은 아닌지 않은지요. 일본서기가 왜곡된 사서이지만 거기에서 변형이전의 원래의 실사의 줄거리를 캐낼 수 있으니까요. 제가 보기에는 정성일 선생님이 너무 극단적으로 판단하시는 것 같습니다.
고민할 거리는 되지만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리 심각한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위서라는 단어에 얽매이면 SF소설을 써버린 일본서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량폐기해야 되고 그리 따지면 지나의 사서나 한국의 사서나 조금이라도 잘못이 없는 사서는 하나 없으니 다 위서가 되버리니 남당의 사료인 고구려사초와 신라사초중 하나는 위서다 생각하고 대립적으로 보지 말고 공통되는 부분에서부터 출발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외람되지만, 제가 보기에는 남당사료에 대한 이해는 이제 기어다니다 걸음마 배울단계인데 너무 극단적인 대립구도의 견지로 보시는 것 같습니다. 저희가 장님 코끼리 더듬는 모양이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중요한 것은 일본서기의 허구적 인물인 신공은 심지어는 신라사나 백제사의 기년추정에 필요한 아무런 기초자료 하나조차도 제공을 하지 못하는 스토리이므로 지워버리고 얽힌 신라와 백제 초기사에 관련해 실사를 밝혀낸 단초가 무엇인지를 먼저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것은 바로 지나사서와 한국사서에서 공통적으로 입증된 실존인물인 비미호에서 출발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비미호는 수많은 지나사서에 관련자료와 기년추정을 할 만한 자료가 충분히 있고 한국측 사서에도 관련자료가 있는데다가 사서에서 인정되는 실존인물이며 또한 신라초기사와 백제초기사 기년추정에도 중요한 단서 아니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신공이라는 황당무계한 스토리나 남당사서의 신라사초와 고구려사초를 대립관계로만 보는 틀에 구속되어 얽매이지 않고 앞으로 기존 지나와 한국측 사료와 남당사료들사이의 공통된 분모를 찾으려고 노력한다면 얽힌 실타래가 분명히 풀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솟대 (2008-07-04 00:54:43)  
선생님.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혁거세 재위 전체 번역문이 있으신가요?
필요해서 찾아볼려는데 찾기가 쉽지 않네요.
정성일 (2008-07-04 13:04:59)  
솟대님 역사광복운동본부라는 가면 삼국사기, 삼국유사, 중국25사 등의 해석본이 있습니다.
이 해석본은 제가 해석한 글이 아닌 그곳에서 퍼온 것입니다.

始祖<朴赫居世>居西干 (시조 박혁거세)

○始祖, 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 <五鳳>元年, 甲子, 四月丙辰[一曰正月十五日], 卽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國號<徐那伐>. 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 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高墟村>, 三曰< 山><珍支村>[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村{加里村}> , 六曰<明活山><高耶村>, 是爲<辰韓>六部. <高墟村>長<蘇伐公>望<楊山>麓, <蘿井>傍林間, 有馬 而嘶, 則往觀之, 忽不見馬, 只有大卵. 剖之, 有 兒出焉, 則收而養之. 及年十餘{三} 歲, 岐 然夙成. 六部人以其生神異, 推尊之, 至是立爲君焉. <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 故以朴爲姓. 居西干, <辰>言王.[或云呼貴人之稱.]
시조의 성은 박씨이며,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 4월 병진[정월 15일 이라고도 한다.]에 왕위에 올랐다. 왕호는 거서간이다. 이 때 나이는 열 세 살이었으며 나라 이름은 서라벌이었다.
이보다 앞서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에 분산되어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의 양산촌이라 하고, 둘째는 돌산의 고허촌이라 하고, 셋째는 취산의 진지촌[혹은 간진촌이라고도 한다.]이라 하고, 넷째는 무산의 대수촌이라 하고, 다섯째는 금산의 가리촌이라 하고, 여섯째는 명활산의 고야촌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옆의 숲 사이에 말이 꿇어 앉아 울고 있었다. 그가 즉시 가서 보니 말은 갑자기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이 있었다. 이것을 쪼개자 그 속에서 어린아이가 나왔다. 그는 이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아이의 나이 10여 세가 되자 지각이 들고 영리하며 행동이 조신하였다. 6부 사람들이 그의 출생을 기이하게 여겨 높이 받들다가, 이 때에 이르러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진한 사람들은 호(匏)를 "박"이라고 하였는데, 처음의 큰 알이 박의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그의 성을 박이라고 하였다. 거서간을 진한에서는 왕이라고 하였다.[혹은 귀인을 칭하는 말이라고도 한다.]

○四年, 夏四月辛丑朔, 日有食之.
4년 여름 4월 초하루 신축일에 일식이 있었다.

○五年, 春正月, 龍見於<閼英井>, 右脇誕生女兒. 老 見而異之, 收養之, 以井名, 名之. 及長有德容. 始祖聞之, 納以爲妃, 有賢行, 能內輔, 時人謂之二聖.
5년 봄 정월, 용이 알영 우물에 나타나서 오른 쪽 옆구리로 여자아이를 낳았다. 한 노파가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데려다 길렀다. 우물 이름으로 그녀의 이름을 지었다. 그녀는 자라면서 덕스러운 용모를 갖추었다. 시조가 이를 듣고 그녀를 왕비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행실이 어질고 내조가 훌륭하여 당시 사람들이 두 사람의 성인이라고 불렀다.

○八年, <倭>人行兵, 欲犯邊, 聞始祖有神德, 乃還.
8년, 왜인이 군사를 동원하여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시조에게 하늘에서 내려준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갔다.

○九年, 春三月, 有星 于王良.
9년 봄 3월, 왕량 성좌에 혜성이 나타났다.

○十四年, 夏四月, 有星 于參.
14년 여름 4월, 삼성 성좌에 혜성이 나타났다.

○十七年, 王巡撫六部, 妃<閼英>從焉. 勸督農桑, 以盡地利.
17년, 왕이 6부를 순행하며 위문하는 길에, 왕비 알영도 수행하였다. 백성들에게 농사와 양잠을 권하고, 농토를 충분히 이용하도록 하였다.

○十九年, 春正月, <卞韓>以國來降.
19년 봄 정월, 변한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해왔다.

○二十一年, 築京城, 號曰<金城>. 是歲, <高句麗>始祖<東明>立.
21년, 서울에 성을 쌓고 금성이라고 불렀다. 이 해에 고구려 시조 동명이 왕위에 올랐다.

○二十四年, 夏六月壬申晦, 日有食之.
24년 여름 6월 그믐 임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二十六年, 春正月, 營宮室於<金城>.
26년 봄 정월,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三十年, 夏四月己亥晦, 日有食之. <樂浪>人, 將兵來侵, 見邊人夜戶不 , 露積被野, 相謂曰: "此方民, 不相盜, 可謂有道之國. 吾 潛師而襲之, 無異於盜, 得不愧乎?" 乃引還.
30년 여름 4월 그믐 기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낙랑 사람들이 군사를 동원하여 침범하려다가, 국경 부근 사람들이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으며, 노적가리가 들에 가득 쌓인 것을 보고 서로 말했다.
"이 지방 사람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도덕이 있는 나라라고 할만하다. 우리가 이러한 사람들을 군대로 몰래 기습한다는 것은 도적과 다름없으니 이는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그들은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三十二年, 秋八月乙卯晦, 日有食之.
32년 가을 8월 그믐 을묘일에 일식이 있었다.

○三十八年, 春二月, 遣<瓠公>聘於<馬韓>. <馬韓>王讓<瓠公>曰: "<辰>·<卞>二<韓>爲我屬國, 比年不輸職貢, 事大之禮, 其若是乎?" 對曰: "我國自二聖肇興, 人事修, 天時和, 倉庾充, 人民敬讓.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而吾王謙虛, 遣下臣, 修聘, 可謂過於禮矣, 而大王赫怒, 劫之以兵, 是何意耶?" 王憤欲殺之, 左右諫止, 乃許歸. 前此, <中國>之人, 苦<秦>亂, 東來者衆, 多處<馬韓>東, 與<辰韓>雜居, 至是 {寢} 盛. 故<馬韓>忌之, 有責焉. <瓠公>者, 未詳其族姓. 本<倭>人, 初以瓠繫腰, 渡海而來, 故稱<瓠公>.
38년 봄 2월에 호공을 보내 마한을 예방하였다.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으며 말했다.
"진한과 변한은 우리 나라의 속국인데, 근년에는 공물을 보내오지 않았소. 대국을 섬기는 예절이 이와 같은가요?"
호공이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에 두 분의 성인이 출현하면서, 사회가 안정되고 천시가 조화를 이루어, 창고가 가득 차고, 백성들은 공경과 겸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진한의 유민들로부터 변한,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두려워하고 심복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임금이 겸손하여 저를 보내 귀국을 예방하게 하였으니, 이는 오히려 지나친 예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왕께서 크게 성을 내고 무력으로 위협하시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측근들이 간하여 이를 말리자 그의 귀국을 허락하였다. 이보다 앞서 중국 사람들 중에 진(秦)나라가 일으킨 난리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다가, 동쪽으로 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 가운데의 대부분은 마한 동쪽에서 진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었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 점점 번성하자 마한이 이를 싫어하여 이와 같이 책망했던 것이다.
호공이란 사람은 그 집안과 성씨가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본래 왜인이었는데, 처음에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 왔기 때문에 호공(匏公)이라고 불렀다.

○三十九年, <馬韓>王薨. 或說上曰: "<西韓>王前辱我使, 今當其喪, 征之其國, 不足平也?" 上曰: "幸人之災, 不仁也." 不從, 乃遣使弔慰.
39년, 마한왕이 별세하였다. 어떤 사람이 왕에게 말했다.
"서한왕이 이전에 우리 사신을 모욕했습니다. 이제 그 국왕이 죽은 기회를 이용하여 공격하면, 그 나라를 충분히 평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다른 사람의 재난을 우리의 행복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행위이다."
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곧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四十年, <百濟>始祖<溫祚>立.
40년, 백제 시조 온조가 왕위에 올랐다.

○四十三年, 春二月乙酉晦, 日有食之.
43년, 봄 2월 그믐 을유일에 일식이 있었다.

○五十三年, <東沃沮>使者來, 獻良馬二十{百} 匹, 曰: "寡君問{聞} <南韓>有聖人出, 故遣臣來享."
53년, 동옥저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며 "우리 임금이 남한에 성인이 났다는 말을 들었기에 저를 보내 이를 바칩니다"라고 말했다.

○五十四年, 春二月己酉, 星 于河鼓.
54년, 봄 2월 기유에 혜성이 하고 성좌에 나타났다.

○五十六年, 春正月辛丑朔, 日有食之.
56년, 봄 정월 초하루 신축일에 일식이 있었다.

○五十九年, 秋九月戊申晦, 日有食之.
59년, 가을 9월 그믐 무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六十年, 秋九月, 二龍見於<金城>井中, 暴雷雨, 震城南門.
60년, 가을 9월, 두 마리의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났다. 우레와 비가 심하고 성의 남문에 벼락이 쳤다.

○六十一年, 春三月, 居西干升遐, 葬<蛇陵>, 在<□巖寺{曇巖寺}> 北.
61년, 봄 3월, 거서간이 별세하였다. 사릉에 장사지냈다. 사릉은 담암사 북쪽에 있다.
솟대 (2008-07-04 16:03:35)  
선생님 감사합니다. 박혁거세 재위기간의 기록이 필요했는데 정말 감사드립니다.
수고스럽게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