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 탐모라,제주, 대만...그리고 담로라는 것은...
다음 글들 출처 : http://www.coo2.net / 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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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yspace.com/vphilmusic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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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10952§ion=section7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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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국이 대만이 맞다면? 혼자 해결해보려 했으나 도저히 궁금해서 참을수가 없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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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참고로 예전 네티즌 자유 게시판에 '하카인, 객가인'에 대한글에서 '초립동이'님이 우연히 디스코버리 채널에서 대만의 고대성씨중 고씨 부씨 양씨가 많다고 하셨던것도 기억이 납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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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PHIL 님 혼란해 할 필요가 없을 듯 합니다. 현 제주도(濟州道)는 사서(史書)에 두가지 지명(地名)으로 나옵니다. 첫째는 주호(州胡)이고, 또 하나는 탐라국(耽羅國)입니다. 대만(臺灣) 지역이 ‘탐라국(耽羅國)’이라고 생각하는 근거는 사서(史書)에 탐라국(耽羅國) 이라고 적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탐라국(耽羅國)과 음(音)이 비슷한 <탐미다례(耽彌多禮)> 혹은 <침미다례> 혹은 <탐모라국(耽毛羅國)>이 ‘탐라국’의 이칭(異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탐모라국(耽毛羅國)에 대한 사서(史書)의 묘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원문(原文) #隋書卷81-列傳第46-百濟-07/07 ◉其南海行三月, 有<躭牟羅國>, 南北千餘里, 東西數百里, 土多麞鹿, 附庸於<百濟>. <百濟>自西行三日, 至<貊國>云. 해석(解釋) : 그 ‘남쪽 바다’로 삼 개월을 가면, 탐모라국(耽牟羅國)이 있는데, 남북(南北)이 천여리(千餘里)이고, 동서(東西)가 수백리이다. 땅에는 노루와 사슴이 많고, 백제에 부용(附庸)한다. 백제에서 서쪽으로 삼일(三日)을 가면 맥국(貊國)에 이른다. 즉 탐모라국(耽毛羅國)은 동서(東西)로 얇은 수백리이고, 남북(南北)으로 길게 나 있는 모양인데, 이런 모양의 섬(島)이 바로 대만(臺灣)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주도(濟州道)는 동서(東西)로 길고, 남북(南北)으로 얇은 모양이 되어서 “제주도(濟州道)는 탐모라국(耽毛羅國)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사학자(史學者)들이 “탐라국(耽羅國)=탐모라국(耽毛羅國)”으로 생각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런데 좌계가 볼때에는 탐모라국(耽毛羅國)은 대만(臺灣)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날의 ‘뉴질랜드’를 묘사한 글입니다. 맥제(百濟)는 오늘날 광동성(廣東省)에 주로 해외(海外) 진출 기지가 있었고, 또 쟈바, 뉴기니 등등의 섬(島)에도 광활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읍니다. 참고적으로 말씀드리면, 좌계는 쟈바. 뉴기니 등지에 있던 맥제(百濟)를 대도(大島)-맥제(百濟)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남해(南海) 쪽으로 3개월을 가면”이라고 할때의 출발점은 어디까지나 광동성(廣東省) 맥제(百濟)이거나, 대도(大島) 맥제입니다. 범선(帆船)으로 3개월 간다는 것은 대단히 멀리 가는 것입니다. ‘컬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하면서 대서양(大西洋)을 건너는데 걸릴 시간이 2개월입니다. 따라서 위 기록을 선박과 고대 맥제(百濟)의 해양진출을 고려해서 읽는다면, 합당한 탐모라국(耽毛羅國)의 위치로 잡을수 있는 것은 바로 오늘날의 ‘뉴질랜드’입니다. 이곳에는 자연히 노루와 사슴이 많은 것이지요. 탐모라국(耽毛羅國)에서 3일 정도 더가면 다다른다는 맥국(貊國)을 좌계는 오늘날의 호주(濠洲) 즉 ‘오스트레일리아’로 보고 있습니다. 사서(史書)에 맥국(貊國)의 영토는 “천리(千里)를 겹겹히 에워싼 것 같다.” 고 무척 광대무변(廣大無邊)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만(臺灣)에서 범선(帆船)을 타고 서(西)쪽으로 3일가면, 대만(臺灣)보다 큰 섬이 전혀 안나타납니다. 따라서 탐모라국(耽毛羅國)과 탐라국(耽羅國)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좌계 역시 “대만(臺灣)=탐모라국(耽毛羅國)”이라는 등식(等式)을 지니고 있었지만, 최근에 우리의 선박(船舶)을 연구하면서, 이 탐모라국(耽毛羅國)이 ‘뉴질랜드’인 것으로 지리비정을 새롭게 하게 된 것입니다. 대만(臺灣)은 단주(亶州)로 사서(史書)에 나옵니다. 오늘날 제주도(濟州道)는 탐라국(耽羅國) 주호(州胡) 2 가지로 불리웠기 때문에, 큰 혼란을 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대 선박의 탁월한 능력’을 잃어버려서..... “지리비정이 아시아(Asia)에 머무르고 있는 한계(限界)에 갇혔다.”는 것이 좌계가 선박(船舶)을 연구하게 된 계기인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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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PHIL 님 신기하게도 좌계가 오늘날 대만(臺灣)이 탐라국(耽羅國)이란 명칭으로써 “찝어서 설명”하는 사서(史書)를 좌계는 아직까지 보지 못하였습니다. 추가하신 글에서 “아 참고로 예전 네티즌 자유 게시판에 '하카인, 객가인'에 대한글에서 '초립동이'님이 우연히 디스코버리 채널에서 대만의 고대성씨중 고씨 부씨 양씨가 많다고 하셨던것도 기억이 납니다. (???) ”로 말씀하신 것이 오히려 ‘놀라운 발견’이 됩니다. 혹 구체적인 자료를 찾게 되면 이 싸이트(site)에 오히려 올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제주도(濟州道)를 탐라국(耽羅國)으로 묘사한 것은 사서(史書)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서(史書)에 오늘날 제주도(濟州道)를 탐라국(耽羅國)이라고 “찝어서 설명한 것‘은 <北史 卷九十四 列傳第八十二 (7) - 倭國 >에 나타납니다. 원문(原文)과 해석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원문(原文)] <大業>三年, 其王<多利思比孤>遣朝貢. 使者曰: [聞海西菩薩天子重興佛法, 故遣朝拜, 兼沙門數十人來學佛法.] [해석 옮김] '대업'삼년, 그 왕 '다리사비고'가 조공을 받쳤다. 사신가 말하길 바다 서쪽의 보살인 천자께서 불법을 일으키니 고로 조배합니다. 아울러 승려 수십명을 보내어 불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했다. [원문(原文)] 國書曰: [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 無恙.]云云. 帝覽不悅, 謂鴻 卿曰: [蠻夷書有無禮者, 勿復以聞.] [해석 옮김] 국서에 이르기를 “태양이 나오는 곳의 천자가 태양이 지는 곳의 천자에게 서를 보낸다. 걱정이 없으신가?!..“ 운운하니 제가 보고 기뻐하지 않자. 홍려경이 이르러 말하길”만이의 서에는 예가 없는 것이 있다. 다시는 가르침을 받지 말라. 하였다.“ [원문(原文)] 明年, 上遣文林郞<裴世淸>使<倭國>, 度<百濟>, 行至<竹島>, 南望<耽羅國>, 經<都斯麻國>, 逈在大海中. 又東至<一支國>, 又至<竹斯國>. 又東至<秦王國>, 其人同於<華夏>, 以爲<夷洲>, 疑不能明也. 又經十餘國, 達於海岸. 自<竹斯國>印, 皆附庸於<倭>. [해석 옮김] 다음해 문림랑 '배세청'을 '왜국'의 사신으로 보냈는데 '백제'를 건너서 '죽도'에 이르러, 남쪽으로 '탐라국'을 바라보면서, '도사마국'을 거쳐서 큰바다 가운데를 향하고 있었다. 또 동으로 '일지국'에 이르고, '죽사국'에 이르렀다. 또 동으로 '진왕국'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은 '중국인'이니, '이주'사람인지 의심이 드는데 확실하지 않다. 또 십여국을 지나 바닷가에 이르렀다. 스스로 '죽사국'의 동쪽으로 모두 '왜'를 따르고 있었다. - 각설(却說) 위 글에 보면 수(隋)의 ‘배세청’이란 사신(使臣)이 가는 일정이 나와있는데, 그중에 “度<百濟>, 行至<竹島>, 南望<耽羅國>, 經<都斯麻國>, 逈在大海中.”이란 귀절이 나옵니다. 오늘날 논란(論難)이 약간 있지만 ‘도사마국’은 대마도(對馬島)로 봅니다. 즉 ‘배세청’은 한반도 남해안을 통해서 일본의 ‘큐슈(구주(九州)’로 들어갔는데, 자연히 ‘남쪽으로 탐라국(耽羅國)을 보면서’ 가게 된 것입니다. 아무튼, 좌계가 사서(史書)에서 탐라국(耽羅國)이라고 “찝어서” 제주도(濟州道)를 지칭하면서 설명한 글은 위 북사(北史)가 유일(唯一)합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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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PHIL님/ 간절히 구하시니....얻으셨네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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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정성어린 답변해주신 좌계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좌계님의 탐모라국 = 뉴질랜드설은 신선하게 받아드려집니다. 제가 지금 구년째 살고있는곳이 바로 호주 Australia인데, 이곳 친한친구들중 뉴질랜드 원주민들인 마우리족 녀석들이 있습니다. 이 친구들 말로는 마우리의 원류가 동아시아에서 시작되어 내려왔다고 했던것이 기억이 납니다, Naha라는 지명까지 예를들면서 까지 말이죠. 이 녀석에 의하면 자기들은 그 예기를 굳게 믿는다 하면서, 그래서 자기들이 아시아인들과 쉽게 잘 어울린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마우리들은 피부색이 좀더 검고 체구가 클뿐, 동양인과 같은 째진 눈(Chinky eyes)을 갖고있으며, 우리와 같이 형,동생 문화가 있고 가족을 중시하는 사상을 갖고 있습니다. 백제해상세력이나 옛날 왜의 후손이 세월이 흘러 갈라져나가 유전자도 변하고 그곳 뉴기니, 솔로몬제도등 기후 환경에 적응하면서 마우리족이 되었는지도 모를일입니다. 화두를 바꾸어 말하기전, 일단 저는 좌계님께 따지려는 것이 절대 아님을 말씀드리고 싶슴니다. 전 좌계님의 역사에대한 노력과 열정에 새발의 피도 안된다고 생각함을 먼저 밝힙니다. 자유게시판에서 '탐라'로 검색을 해서 글들을 차례대로 읽어 보던중 좌계님의 글이 있어서 유심히 읽어보았는데요, 고구려의 대운하, 백제,왜, 신라,인덕천황, 금성,자명고등 과학기술에 관한 글이었습니다. 좌계님의 글중에 -> [태왕]太王의 <獨山斬倭>의 비밀: “합비(合肥)-금성(金城),<關防路>,<大運河>-[3] 2008-07-28 14:18:15 내용중략' "그래서 ‘고구리 사초’에서는 독산참왜(獨山斬倭)라는 문장 다음에 ‘<耽羅>主<月孫>来降献土物.’ - 즉 “<탐라>주 <월손>이 찾아와서 항복하고 토산물을 바쳤다.”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여기서 탐라(耽羅)의 위치는 오늘날 대만(臺灣)이 되는 것이고, 이는 맥제(百濟)와 고일본(古日本)의 영향권에 있는 대표적인 나라였던 것입니다. 즉 독산참왜(獨山斬倭)로써 태왕(太王)은 조용히 고일본(古日本)이 장악하고 있는 대해양국가 내부(內部)에 균열(龜裂)이 생기게 한 것입니다." 중략' 라고 하셨는데요, 이 글에서 좌계님은 '탐라 = 대만' (탐모라 = 대만 도 아닌)이라 보고 계십니다. 제게는 혼동될수밖에 없는 부분입니다. 거두절미하고, 탐라=탐랑?=탐모라? or 탐라 = 제주? 대만? 탐모라 = 대만? 에 대해선 좀더 많은 자료들과 연구가 필요한 과제인듯 싶습니다. 어찌돼었던, 좌계님의 소중한 답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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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론 많은 유물과 기록들이 현 제주도 남아 있기도 하고... 옛 기록들은 (특히 수서) 내용이 현 제주도와는 잘 않맞고... 어떻게 정리되는 것이 합당한 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래는 참고로 적어 놓습니다. 고려의 제주(탐라)는 산동성 巨野澤 일대- target=_blank>http://cafe.daum.net/dobulwonin/GBuY/157 남송과 탐라와 왜의 인접기록/ 남송-고려-금의 위치 관계Target=_blank>http://cafe.daum.net/dobulwonin/Gjtl/20 (내용발췌) ※ 원사 열전 “탐라” 을 보면 ; 탐라耽羅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음을 봅니다. 耽 羅 , 高 麗 與 國 也 。 世 祖 既 臣 服 高 麗 , [以 耽 羅 為 南 宋 、 日 本 衝 要 , 亦 注 意 焉 ]。 탐라(耽羅)는 고려와 같은 나라이다. 세조때 이미 고려를 복속시켜 신하로 하였다. 이 탐라는 남송과 일본이 충돌하는 요지이며, 또 주의해야한다 .(새겨서 조심해야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엄청난 강역의 파괴를 일으키는 내용이다. 즉 남송과 일본이 가깝게 근접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기록이며, 이때 탐라가 이들의 주위에 있어 항상 남송과 일본의 이해 관계가 상충되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에 현재의 열도에 당시의 <일본>이 있었다면 <남송>과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탐라니 뭐니 요충지니 뭐니 할 필요도 없다는 점이다. 고려의 탐라와 남송과 일본이 서로 근접해 있으면서 탐라가 일종의 완충지 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하니 주의해야 한다, 또는 남송과 일본의 요충지라는 기록을 남길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 고려는 한반도 개경에 왕도를 두고 탐라 즉 제주는 대륙의 장강 이북지역이라는 역사 해설은 구차한 변명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고려는 대륙의 중원에 있었던 왕조라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라는 것이다. ... (후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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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PHIL 님. 1. 호주 Australia의 현장정보를 전(傳)해 주신 점이 대도(大島) 맥제(百濟)를 연구함에 있어서 여간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기하게도 사서(史書)에는 이 지역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지만, 맥제(百濟), 신라(新羅), 고구리(高句麗) 사람들이 이 지역에서 고일본(古日本)과 경쟁하고, 오늘날 ‘보르네오(=칼리만탄) 지역에 있던 고일본(古日本)을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께서 멸망시키고, 창선도(彰善島)란 고구리 직할지를 만든 것을 “설마..??”하고 있습니다. 계속 현장정보를 전(傳)해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2. 좌계 역시 ‘탐라(耽羅)=탐모라국(耽毛羅國)=대만(臺灣)’이란 관념에서 벗어난 것은 <[태왕]太王의 <獨山斬倭>의 비밀: “합비(合肥)-금성(金城),<關防路>,<大運河>-[3]>이란 글을 쓴 한참 후입니다. 조금 전(前)에 ‘글’을 다음과 같이 수정(修正)하였습니다. “여기서 탐라(耽羅)는 오늘날 제주도(濟州道)로써 그래서 ‘고구리 사초’에서는 독산참왜(獨山斬倭)라는 문장 다음에 ‘<耽羅>主<月孫>来降献土物.’ - 즉 “<탐라>주 <월손>이 찾아와서 항복하고 토산물을 바쳤다.”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여기서 탐라(耽羅)의 위치는 여기서 탐라(耽羅)는 오늘날 제주도(濟州道)로써, 이는 맥제(百濟)와 고일본(古日本)의 영향권에 있는 대표적인 나라였던 것입니다. 탐라(耽羅)는 주호(州胡)라고도 사서(史書)에 언급되는데, 태왕(太王)시절에 대해양세력인 왜(倭)와 고일본(古日本)이 그 세력을 일본열도까지 미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보해야하는 교두보(橋頭堡)였기에 서로 그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경쟁의 지역이었던 것입니다. 즉 독산참왜(獨山斬倭)로써 태왕(太王)은 조용히 고일본(古日本)이 장악하고 있는 대해양국가 내부(內部)에 균열(龜裂)이 생기게 한 것입니다.“ 3. 중요한 것은 대만(臺灣)입니다. “ ‘우리 역사’와 대만(臺灣)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 특히 “오늘날 제주도(濟州道)에 있었던 탐라국(耽羅國)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고대의 왜(倭) - 이는 일본열도 큐슈(구주(九州))에서 해양(海洋)을 통해서 태국(泰國)까지 걸쳐있는 해양세력입니다. -와 어떤 관계에 대만(臺灣)이 관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계속 관심을 쏟아야한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제주도(濟州道)’에 있었던 탐라국(耽羅國)은 주호(州胡)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 주호(州胡)는 신기하게도 ‘키작은 선비족(鮮卑族)’들을 모아서 제주도(濟州道)의 ‘화산(火山)돌(石)’이 가벼워서 물(水)에 뜨니깐, ‘움직이는 섬(島)’을 제조(製造)한 것같은 기록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한반도 남해안의 구야한국(狗邪韓國)은 대왜(大倭), ‘대가야’로써 묘사되고 있는데, 놀랍게도 “큐슈(구주(九州))의 왜왕(倭王)이 ‘해양세력’들에게 전달하는 일체의 문서(文書)와 물품(物品)에 대해서 ‘수색해서 통제하는’ 자사(刺史)와 같은 일을 하였다.”라고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대왜(大倭)에서 가장 멀리 갈수 있는 ‘인공(人工) 섬(島)’ 제작을 ‘탐라국(耽羅國)’에서 제작한 흔적은 국명(國名)에서도 느낄수 있습니다. 탐라(耽羅)의 라(羅)는 ‘네트워크(network)’란 의미입니다. 망라(網羅)한다는 말에서 그 용례(用例)를 찾을수 있습니다. 그런데 탐(耽)은 ‘기쁨으로 즐기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순수한 한자(漢字)의 어감(語感)으로 말하자면, 탐라국(耽羅國)이 ‘해양세력을 네트워크(network)할수 있는 ’인공(人工) 섬(島)‘을 제작하는 대왜(大倭)의 ’세계진출 기지‘로도 볼수 있습니다. 아무튼 탐라국(耽羅國)과 탐미다례, 탐모라도는 구분하여야하며, 이럴 경우, “오늘날 대만(臺灣)의 고명칭이 무엇인가?”가 매우 중요해집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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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mesis 님 오래만에 뵙습니다. 올려주신 아래의 자료가 무척 놀랍습니다. [원문(原文)] 耽 羅 , 高 麗 與 國 也 。 世 祖 既 臣 服 高 麗 , [以 耽 羅 為 南 宋 、 日 本 衝 要 , 亦 注 意 焉 ]。 [옮기신 글] 탐라(耽羅)는 고려와 같은 나라이다. 세조때 이미 고려를 복속시켜 신하로 하였다. 이 탐라는 남송과 일본이 충돌하는 요지이며, 또 주의해야한다 .(새겨서 조심해야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엄청난 강역의 파괴를 일으키는 내용이다. 즉 남송과 일본이 가깝게 근접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기록이며, 이때 탐라가 이들의 주위에 있어 항상 남송과 일본의 이해 관계가 상충되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에 현재의 열도에 당시의 <일본>이 있었다면 <남송>과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탐라니 뭐니 요충지니 뭐니 할 필요도 없다는 점이다. 고려의 탐라와 남송과 일본이 서로 근접해 있으면서 탐라가 일종의 완충지 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하니 주의해야 한다, 또는 남송과 일본의 요충지라는 기록을 남길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 - 각설(却說) 하옵고, 하도 경이(驚異)스러운지라, 직접 원사(元史) 원문(原文)을 찾아보았습니다. 원사(元史) 원문(原文) ○耽羅 耽羅,高麗與國也。世祖既臣服高麗,以耽羅為南宋、日本沖要,亦注意焉。至元六年七月,遣明威將軍都統領脫脫兒、武德將軍統領王國昌、武略將軍副統領劉傑往視耽羅等處道路,詔高麗國王王禃選官導送。時高麗叛賊林衍者,有餘黨金通精遁入耽羅。九年,中書省臣及樞密院臣議曰:「若先有事日本,未見其逆順之情。恐有後辭,可先平耽羅,然後觀日本後否,徐議其事。且耽羅國王嘗來朝覲,今叛賊逐其主,據其城以亂,舉兵討之,義所先也。」十年正月,命經略使忻都、史樞及洪茶丘等率捕船大小百有八艘,討耽羅賊黨。六月,平之,於其地立耽羅國招討司,屯鎮邊軍千七百人。其貢賦歲進毛施布百匹。招討司後改為軍民都達魯花赤總管府,又改為軍民安撫司。 三十一年,高麗王上言,耽羅之地,自祖宗以來臣屬其國;林衍逆党既平之後,尹邦寶充招討副使,以計求徑隸朝廷,乞仍舊。帝曰:「此小事,可使還屬高麗。」自是遂複隸高麗。 위 원문(原文)을 읽어보니 탐라(耽羅)는 오늘날 제주도(濟州道)이고, 일본(日本)은 오늘날 일본열도에 있는 나라를 뜻합니다. 그리고 내용은 원(元)과 대항한 고리(高麗)의 삼별초가 모시는 고리(高麗)와 원(元)을 따르는 고리(高麗)가 갈등하고, 실질적으로는 고리(高麗)에 두 왕조(王朝)가 있었는데, 원사(元史)에는 삼별초의 임연(林衍)과 김통정(金通精)이 탐라(耽羅)에 들어가서 활동하는 것에 대한 대처(對處)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것이 <時高麗叛賊林衍者,有餘黨金通精遁入耽羅> 즉 “이때 고리(高麗)의 반적인 임연이란 자와 그 (삼별초)의 여당(餘黨)인 김통정이 탐라(耽羅)로 숨어들었다.”에서 잘 드러납니다. 즉 ‘옮기신 글’은 대륙(大陸)의 고리(高麗)가 있고, 오늘날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제주(濟州)가 탐라(耽羅)이고, 이 지역이 일본(日本)과 남송(南宋)의 요충지라는 식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원사(元史) 탐라(耽羅) 원문은 정반대로 기술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삼별초’들이 오늘날 제주도(濟州道)인 탐라에 들어가서 오늘날 일본열도(日本列島)와 남송(南宋)을 연결시키어서 반(反) - 원(元)나라 세력을 총집결시키는 ‘요충지(要衝地)’이니깐 원(元)의 세계전략의 입장에서 주의(注意)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탐라(耽羅)는 또한번 오늘날 제주도(濟州道)임이 사서(史書)에 의해서 확인이 된 것입니다. 보다 명확히 탐라(耽羅)의 ‘위치’를 찾게하는 사료(史料)의 언급에 감사드립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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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된 글에 대한 사과(謝過) 위 좌계의 ‘댓글’ 가운데, “오늘날 대만(臺灣)이 사서(史書)에 단주(亶州)로 나온다.”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밝힙니다. 오늘날 사서(史書)에 나오는 대만(臺灣)은 이주(夷州)입니다. 단주(亶州)는 오늘날 일본열도의 혼슈(본주(本州))에서 태평양 쪽에 있는 기이(紀伊)반도(半島)에 오른쪽에 있는 <미에 현[三重縣]>입니다. 이는 태백일사(太白逸史) 고구리국본기(高句麗國本紀)에 다음과 같은 기사(記事)에 의해서 알수 있습니다. [원문(原文)] <秦時徐市自 東冶海上直 至那覇經種島 而沿瀨戶內海 始到紀伊 伊勢舊有 徐福墓祠 或曰亶州 徐福所居云> [해석] 진(秦)나라때 서시(徐市)가 동야(東冶) 해상(海上)에서 곧바로 나패(那覇)에 이르러, 종도(種島)를 지나 뇌호내해(瀨戶內海)를 따라 비로소 기이(紀伊)에 도착하였다. (이 기이(紀伊)는) 이세(伊勢)가 옛적에 있었던 곳인데, 서복(徐福)의 묘사(廟祠)가 있다. 혹은 말하기를 단주(亶州)라고 하는데, 서복(徐福)이 살던 곳이라고 일컬어진다. <미에 현[三重縣]>에 대한 소개 target=_blank>http://cafe.daum.net/tour9999/BqEy/54?docid=1BctL|BqEy|54|20080113002417&q=%DF%B2%F1%EC%FA%E3&srchid=CCB1BctL|BqEy|54|20080113002417 삼중현(三重縣)을 찾을 수 있는 일본지도 target=_blank>http://www.nihongo.co.kr/map.html 좌계가 이주(夷州)와 단주(亶州)를 착각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착각을 하게 된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은 항시 이주(夷州)와 단주(亶州)를 붙여서 부르는 이상한 습관이 중국대륙에 산 사람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오(吳)의 손권(孫權)은 이주(夷州)와 단주(亶州)를 “오(吳)나라를 개척하는 일종의 노예들을 대량으로 가져올려는” 뜻에서 정벌을 하였는데, “이주(夷州)에서 전염병과 토착민들의 반발로 병력 대부분을 잃고, 또 단주(亶州)는 멀어서 못갔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신라(新羅)의 경주(慶州)가 오늘날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라고 할때 자주 나타나는 왜(倭)가 이주(夷州)에 그 본거지를 두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손권(孫權)은 “이주(夷州)에 왜(倭)들이 일본열도를 이동하였다.”는 어떤 정보와 또 왜(倭)에 대한 과소평가로 무모한 정벌(征伐)을 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이주(夷州)와 단주(亶州)를 혼동한 것에 대해서 사과(赦過)드립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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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계님 정말 감사합니다. 또 많이 가르쳐 주시네요. 원문 해석 능력이 없어 한계를 여실히 느낍니다만, 그렇다고 전혀 언급을 않하면 작은 것이라도 '배우고 깨우칠' 기회조차 없어지는 것 같아서 눈여겨 봐두었던 사이트의 글 참고로 올려본 것입니다. VPHIL님이 질의하신 내용 관련하여서는 댓글이 아닌 하나의 항목으로 정리할 만한 내용이 아닌가 생각만 해봅니다. 사실, 저는...아직도 좌계님이 올리신 글들 다 못좇아간 상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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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任那)는 담로(擔魯)의 이형표기였을 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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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로의 발음에 대한 추적은 간략하고 짧게 언급하셨습니다만, 충격적이네요. 저 개인적으로는 백잔과 임나에 대한 솔본님의 추측이 옳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시기에 따른 위치 비정은 아직 정리되어 받아들이진 못하고 있지만, '임나신론'(김문배.김인배 저)에서 지적한 백잔과 임나에 대한 해석이 솔본님의 추측 내용과 일치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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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Jo_Nation_Land_Map___7C_End.jpg (400.2 KB), Download : 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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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7C말 열도는 하이(蝦夷)와 백제담로의 분할통치시대 : 삼국시대 왜는 열도와 전혀 무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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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열도북부는 9세기에도 여전히 대부분 하이(蝦夷)의 강역이었고 도호쿠지방의 대부분은 조선조 전기에도 왜가 아닌 하이(蝦夷)의 땅이었습니다. |
반대로 왜곡된 2세기말 신라의 왜국 정복- 신라세력 '비미호'의 반정과 왜국평정(完)
글 : 솟대 / (2008-07-03 02:10:26, Hit : 1019, Vote : 8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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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사료를 비교해볼때 '비미호' 재위기간은 상당히 길었으며 신라왕대에 관해서는 남당의 신라사초보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의 기년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참고로 '비미호'의 등극과 사망년도를 비교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신라사초기년에 따르면 '비미호'의 왜왕 등극시기인 아달라왕 재위 26년은 서기 238년이고 삼국사기기년에 따르면 '비미호'의 왜왕 등극시기인 아달라왕 재위 26년은 서기 179년입니다. 왜여왕 '비미호'의 사망시기는 정시연간인 서기 240~249년의 일입니다. '비미호'가 사망한 것은 최대한 길게 잡으면 249년이지만 유력한 사망년도로 추정되는 서기 247년으로 가정할때 신라사초의 기년을 따르면 '비미호'는 재위 10년만에 일찍 사망한 것이 됩니다. 삼국사기기년을 따르면 역시 동일한 247년 사망으로 볼때는 재위 69년에 사망한 것이 됩니다. '히미꼬'를 모티브로 만들어낸 일본서기상의 '신공'이라는 가상인물에 대해 일본측은 재위 70년만인 248년 사망으로 최종적으로 주장하고있습니다 卑弥呼(ひみこ、175年頃? - 248年頃)[일본 위키피디아사전 발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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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료의 기년을 따르는 것이 맞는지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사료가 있었네요. 이제 찾았습니다. 양서梁書의 기록입니다. " 光和中(178年-184年)卑弥呼が共立され倭を治め始める。"『梁書』 광화光和(178年三月-184年)은 찾아보니 동한東漢-후한- 멸망기의 통치자인 영제靈帝 유굉劉宏의 연호라 합니다. 아들인 한소제 유변(漢少帝 劉辯)은 동탁에게 죽음을 당하는 인물이고 다른 아들인 진류왕이 동탁에 의해 유변변을 대신하는 왕으로 옹립됩니다. 최소한 서기 184년에 '비미호'가 왜왕으로 등극하였으므로 '비미호'의 재위를 서기 238년으로 본 신라사초기년은 잘못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삼국사기기년에 따르는 것이 맞고 남당사서내의 '신라사초'와 '고구려-백제사초'의 관계는 '신라사초'의 기년설정이 잘못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이라 사료됩니다. 이로볼때 '신라사초'의 진위여부를 떠나 남당선생이 일본측 사고를 열람할때 신라사료는 '일본서기'의 신공관련부분에 유리한 텍스트만을 일본측이 열람하게 하였다 생각됩니다. 거기서 서술한 기년이 틀렸다는 것이지 '신라사초'가 무조건 위서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신라사초는 일본측에 의해 선택되어진 텍스트라 할 수 있으므로 그 해석이나 적용에 매우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다른 사료의 보완정도로 보아야 하지 대립되는 내용일 경우 '신라사초'만으로 단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 될 수 있습니다. 남당사료에서는 '고구려사초'등에 더 무게 방점을 두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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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대님 저도 처음엔 비미호과 여왕이므로 일본서기에 유일한 여왕인 신공황후와 연관이 있지 않을 까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 제가 내린 결론은 신공과 비미호는 절대 같은 인물이 될 수 없습니다. 신공과 비미호는 동시대의 인물이 아니며, 비미호는 일본서기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느왕의 비였거나, 태후였을 것입니다. 신공황후는 백제 근초고왕과 같은 시대의 인물로 나타나면서도 기년은 전혀 엉뚱합니다. 기년이 약 120년 차이가 납니다. 신공황후가 죽였다는 신라왕은 거짓이라고 들 하는데 과장됨도 있고,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 기년과도 맞지가 않지요. 대부분은 우로태자가 죽은 사건과 연관시키는데 도무지 기년이 맞지를 않지요. 지금의 삼국사기 신라본기로는 절대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1. 신공황후를 비미호와 동일한 인물로 설정하게 한다면(일본서기의 기년을 인정) a.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과 비교하면 신공황후는 2-3세기의 인물이 되고, b. 남당유고 신라사초 아달라이사금과 비교하면 신공황후는 3세기의 인물이 되고, 2. 신공황후를 칠지도와 연관하여 근초고왕과 동시대의 인물로 판단한다면(일본서기의 기년을 부정하고 백제의 기년으로 정리) a.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근초고왕은 4세기의 인물이므로, 신공황후 또한 4세기의 인물이고, b. 남당유고 신라사초에는 우로태자는 미추이사금 시기에 죽었으므로 역시 4세기의 인물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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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 유고중에 고구려사초에 중점을 두어야 하지 않느냐는 말씀 무슨 뜻인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고구려사초와 신라사초 둘 중의 하나는 위서입니다. 신라사초에 중점을 두면 삼국사기 또한 위서가 되지요. 저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으며, 지금이라도 백기를 들고 항복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어쩌면 이병도 처럼 고구려는 태조왕 이전을, 백제는 고이왕 이전을, 신라는 내물왕 이전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면 마음 편하겠지요. 제가 현재 부딪혀야 할 사람들은 강단, 재야, 고구려사관을 가진 일반네티즌, 심지어 일본 사학자들과도 싸워야 합니다. 김부식도 포기하고, 일연도 포기하고, 이병도도 포기하고, 남당 박창화도 포기하고, 세연님도 포기했습니다. 고대사에 책을 펴낸 교수님들의 얼굴어 똥칠하고, 말 그대로 고대사의 핵폭탄인데, 정말이지 맞아 죽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입니다. 저 또한 이병도 만큼의 명성(악명)을 이룰지도 모르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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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다 잡아지지 않아서 그렇지 남당 유고의 해석은 마무리 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후대에게 빚을 지우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공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고 그저 악명만 이루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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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극단적으로 판정하셔서 너무 심각하게 보시는 것 같아요. 신공은 역사상으로 존재한 적이 없는 허구의 인물입니다. 신공이 실존인물이라고 증명해준 근거가 없으므로 비미호와 동시대의 인물인지 검토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신공은 일본 서기에서만 등장하는 70년을 재위하고서도 2세기에서 4세기까지 400여년을 통치했다는 황당무게한 허구일 뿐이니 고민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실존인물인 비미호에 대해서만 검토하면 되지요. 제가 보기에는 신라사초의 기년설정은 잘못되었지만 기년이 틀렸다고 모든 것이 위서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시각이죠. 삼국사기등의 태조왕 이전이나 고이왕 이전이나 내물왕 이전을 믿을 수 없다면 70년 재위에 400년을 통치했다는 SF소설인 일본서기는 아궁이에 던져 다 태워버려야죠. 그것은 아닌지 않은지요. 일본서기가 왜곡된 사서이지만 거기에서 변형이전의 원래의 실사의 줄거리를 캐낼 수 있으니까요. 제가 보기에는 정성일 선생님이 너무 극단적으로 판단하시는 것 같습니다. 고민할 거리는 되지만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리 심각한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위서라는 단어에 얽매이면 SF소설을 써버린 일본서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량폐기해야 되고 그리 따지면 지나의 사서나 한국의 사서나 조금이라도 잘못이 없는 사서는 하나 없으니 다 위서가 되버리니 남당의 사료인 고구려사초와 신라사초중 하나는 위서다 생각하고 대립적으로 보지 말고 공통되는 부분에서부터 출발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외람되지만, 제가 보기에는 남당사료에 대한 이해는 이제 기어다니다 걸음마 배울단계인데 너무 극단적인 대립구도의 견지로 보시는 것 같습니다. 저희가 장님 코끼리 더듬는 모양이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중요한 것은 일본서기의 허구적 인물인 신공은 심지어는 신라사나 백제사의 기년추정에 필요한 아무런 기초자료 하나조차도 제공을 하지 못하는 스토리이므로 지워버리고 얽힌 신라와 백제 초기사에 관련해 실사를 밝혀낸 단초가 무엇인지를 먼저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것은 바로 지나사서와 한국사서에서 공통적으로 입증된 실존인물인 비미호에서 출발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비미호는 수많은 지나사서에 관련자료와 기년추정을 할 만한 자료가 충분히 있고 한국측 사서에도 관련자료가 있는데다가 사서에서 인정되는 실존인물이며 또한 신라초기사와 백제초기사 기년추정에도 중요한 단서 아니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신공이라는 황당무계한 스토리나 남당사서의 신라사초와 고구려사초를 대립관계로만 보는 틀에 구속되어 얽매이지 않고 앞으로 기존 지나와 한국측 사료와 남당사료들사이의 공통된 분모를 찾으려고 노력한다면 얽힌 실타래가 분명히 풀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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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혁거세 재위 전체 번역문이 있으신가요? 필요해서 찾아볼려는데 찾기가 쉽지 않네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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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대님 역사광복운동본부라는 가면 삼국사기, 삼국유사, 중국25사 등의 해석본이 있습니다. 이 해석본은 제가 해석한 글이 아닌 그곳에서 퍼온 것입니다. 始祖<朴赫居世>居西干 (시조 박혁거세) ○始祖, 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 <五鳳>元年, 甲子, 四月丙辰[一曰正月十五日], 卽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國號<徐那伐>. 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 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高墟村>, 三曰< 山><珍支村>[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村{加里村}> , 六曰<明活山><高耶村>, 是爲<辰韓>六部. <高墟村>長<蘇伐公>望<楊山>麓, <蘿井>傍林間, 有馬 而嘶, 則往觀之, 忽不見馬, 只有大卵. 剖之, 有 兒出焉, 則收而養之. 及年十餘{三} 歲, 岐 然夙成. 六部人以其生神異, 推尊之, 至是立爲君焉. <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 故以朴爲姓. 居西干, <辰>言王.[或云呼貴人之稱.] 시조의 성은 박씨이며,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 4월 병진[정월 15일 이라고도 한다.]에 왕위에 올랐다. 왕호는 거서간이다. 이 때 나이는 열 세 살이었으며 나라 이름은 서라벌이었다. 이보다 앞서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에 분산되어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의 양산촌이라 하고, 둘째는 돌산의 고허촌이라 하고, 셋째는 취산의 진지촌[혹은 간진촌이라고도 한다.]이라 하고, 넷째는 무산의 대수촌이라 하고, 다섯째는 금산의 가리촌이라 하고, 여섯째는 명활산의 고야촌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옆의 숲 사이에 말이 꿇어 앉아 울고 있었다. 그가 즉시 가서 보니 말은 갑자기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이 있었다. 이것을 쪼개자 그 속에서 어린아이가 나왔다. 그는 이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아이의 나이 10여 세가 되자 지각이 들고 영리하며 행동이 조신하였다. 6부 사람들이 그의 출생을 기이하게 여겨 높이 받들다가, 이 때에 이르러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진한 사람들은 호(匏)를 "박"이라고 하였는데, 처음의 큰 알이 박의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그의 성을 박이라고 하였다. 거서간을 진한에서는 왕이라고 하였다.[혹은 귀인을 칭하는 말이라고도 한다.] ○四年, 夏四月辛丑朔, 日有食之. 4년 여름 4월 초하루 신축일에 일식이 있었다. ○五年, 春正月, 龍見於<閼英井>, 右脇誕生女兒. 老 見而異之, 收養之, 以井名, 名之. 及長有德容. 始祖聞之, 納以爲妃, 有賢行, 能內輔, 時人謂之二聖. 5년 봄 정월, 용이 알영 우물에 나타나서 오른 쪽 옆구리로 여자아이를 낳았다. 한 노파가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데려다 길렀다. 우물 이름으로 그녀의 이름을 지었다. 그녀는 자라면서 덕스러운 용모를 갖추었다. 시조가 이를 듣고 그녀를 왕비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행실이 어질고 내조가 훌륭하여 당시 사람들이 두 사람의 성인이라고 불렀다. ○八年, <倭>人行兵, 欲犯邊, 聞始祖有神德, 乃還. 8년, 왜인이 군사를 동원하여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시조에게 하늘에서 내려준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갔다. ○九年, 春三月, 有星 于王良. 9년 봄 3월, 왕량 성좌에 혜성이 나타났다. ○十四年, 夏四月, 有星 于參. 14년 여름 4월, 삼성 성좌에 혜성이 나타났다. ○十七年, 王巡撫六部, 妃<閼英>從焉. 勸督農桑, 以盡地利. 17년, 왕이 6부를 순행하며 위문하는 길에, 왕비 알영도 수행하였다. 백성들에게 농사와 양잠을 권하고, 농토를 충분히 이용하도록 하였다. ○十九年, 春正月, <卞韓>以國來降. 19년 봄 정월, 변한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해왔다. ○二十一年, 築京城, 號曰<金城>. 是歲, <高句麗>始祖<東明>立. 21년, 서울에 성을 쌓고 금성이라고 불렀다. 이 해에 고구려 시조 동명이 왕위에 올랐다. ○二十四年, 夏六月壬申晦, 日有食之. 24년 여름 6월 그믐 임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二十六年, 春正月, 營宮室於<金城>. 26년 봄 정월,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三十年, 夏四月己亥晦, 日有食之. <樂浪>人, 將兵來侵, 見邊人夜戶不 , 露積被野, 相謂曰: "此方民, 不相盜, 可謂有道之國. 吾 潛師而襲之, 無異於盜, 得不愧乎?" 乃引還. 30년 여름 4월 그믐 기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낙랑 사람들이 군사를 동원하여 침범하려다가, 국경 부근 사람들이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으며, 노적가리가 들에 가득 쌓인 것을 보고 서로 말했다. "이 지방 사람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도덕이 있는 나라라고 할만하다. 우리가 이러한 사람들을 군대로 몰래 기습한다는 것은 도적과 다름없으니 이는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그들은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三十二年, 秋八月乙卯晦, 日有食之. 32년 가을 8월 그믐 을묘일에 일식이 있었다. ○三十八年, 春二月, 遣<瓠公>聘於<馬韓>. <馬韓>王讓<瓠公>曰: "<辰>·<卞>二<韓>爲我屬國, 比年不輸職貢, 事大之禮, 其若是乎?" 對曰: "我國自二聖肇興, 人事修, 天時和, 倉庾充, 人民敬讓.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而吾王謙虛, 遣下臣, 修聘, 可謂過於禮矣, 而大王赫怒, 劫之以兵, 是何意耶?" 王憤欲殺之, 左右諫止, 乃許歸. 前此, <中國>之人, 苦<秦>亂, 東來者衆, 多處<馬韓>東, 與<辰韓>雜居, 至是 {寢} 盛. 故<馬韓>忌之, 有責焉. <瓠公>者, 未詳其族姓. 本<倭>人, 初以瓠繫腰, 渡海而來, 故稱<瓠公>. 38년 봄 2월에 호공을 보내 마한을 예방하였다.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으며 말했다. "진한과 변한은 우리 나라의 속국인데, 근년에는 공물을 보내오지 않았소. 대국을 섬기는 예절이 이와 같은가요?" 호공이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에 두 분의 성인이 출현하면서, 사회가 안정되고 천시가 조화를 이루어, 창고가 가득 차고, 백성들은 공경과 겸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진한의 유민들로부터 변한,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두려워하고 심복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임금이 겸손하여 저를 보내 귀국을 예방하게 하였으니, 이는 오히려 지나친 예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왕께서 크게 성을 내고 무력으로 위협하시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측근들이 간하여 이를 말리자 그의 귀국을 허락하였다. 이보다 앞서 중국 사람들 중에 진(秦)나라가 일으킨 난리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다가, 동쪽으로 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 가운데의 대부분은 마한 동쪽에서 진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었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 점점 번성하자 마한이 이를 싫어하여 이와 같이 책망했던 것이다. 호공이란 사람은 그 집안과 성씨가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본래 왜인이었는데, 처음에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 왔기 때문에 호공(匏公)이라고 불렀다. ○三十九年, <馬韓>王薨. 或說上曰: "<西韓>王前辱我使, 今當其喪, 征之其國, 不足平也?" 上曰: "幸人之災, 不仁也." 不從, 乃遣使弔慰. 39년, 마한왕이 별세하였다. 어떤 사람이 왕에게 말했다. "서한왕이 이전에 우리 사신을 모욕했습니다. 이제 그 국왕이 죽은 기회를 이용하여 공격하면, 그 나라를 충분히 평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다른 사람의 재난을 우리의 행복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행위이다." 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곧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四十年, <百濟>始祖<溫祚>立. 40년, 백제 시조 온조가 왕위에 올랐다. ○四十三年, 春二月乙酉晦, 日有食之. 43년, 봄 2월 그믐 을유일에 일식이 있었다. ○五十三年, <東沃沮>使者來, 獻良馬二十{百} 匹, 曰: "寡君問{聞} <南韓>有聖人出, 故遣臣來享." 53년, 동옥저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며 "우리 임금이 남한에 성인이 났다는 말을 들었기에 저를 보내 이를 바칩니다"라고 말했다. ○五十四年, 春二月己酉, 星 于河鼓. 54년, 봄 2월 기유에 혜성이 하고 성좌에 나타났다. ○五十六年, 春正月辛丑朔, 日有食之. 56년, 봄 정월 초하루 신축일에 일식이 있었다. ○五十九年, 秋九月戊申晦, 日有食之. 59년, 가을 9월 그믐 무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六十年, 秋九月, 二龍見於<金城>井中, 暴雷雨, 震城南門. 60년, 가을 9월, 두 마리의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났다. 우레와 비가 심하고 성의 남문에 벼락이 쳤다. ○六十一年, 春三月, 居西干升遐, 葬<蛇陵>, 在<□巖寺{曇巖寺}> 北. 61년, 봄 3월, 거서간이 별세하였다. 사릉에 장사지냈다. 사릉은 담암사 북쪽에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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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감사합니다. 박혁거세 재위기간의 기록이 필요했는데 정말 감사드립니다. 수고스럽게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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