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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신라명신에 대해서

monocrop 2009. 6. 26. 22:46

 

 - 오두의 역사산책 -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3199&logId=4013994

 

 

포석정(祠) 그 길례(吉禮)의 사당에 모셔진 신라명신(新羅明神)

 - 일본의 '서라벌(園原)' 나가노현 아치무라(阿智村)에는 선도(仙桃) 마츠리가 있다 - 

 

 

 

 

1995년 9월 18일 일본의 아사히 텔리비젼(テレビ朝日)의 한 사극에서 그들이 신의 깃발(神旗)이라고 하는 "新羅大明神" 깃발이 방영되었다. <相馬野馬追>이라는 드라마의 '神旗争奪戦' 장면에서 수백기의 기마무사들이 들고 있던 신기(神旗) 깃발들 가운데 누런 바탕에 검은 색으로 "新羅大明神"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방영된 것이다.

 

이것은 그만큼 신라의 태양신 '新羅明神'은 현재의 일본 사회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 되고 있다. '明神'이란 글자 그대로 태양신이며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동신(東神) 즉 동신성모(東神聖母)이며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의미한다.

 

신라에 여신 선도성모는 포석정(포석사)에도 모셔졌을 것이라는 필자의 앞선 글 <포석정(鮑石亭)의 '전복 모양'은 신라인들의 바다여신 숭배 흔적>에 이어 이 글은 포석정 즉 포석사( 鮑石祠)와 관련하여 신라인들은 왜 그곳에서 길례(吉禮)를 행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추적을 하는 글이 될 것이다.

 

포석정이 포석사( 鮑石祠) 또는 포사(鮑祠)로서 신라의 신사였다는 것은 이미 역사학계에서 밝혀져 온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포사(鮑祠) 안에는 어떤 신상들이 모셔져 있었을까? 왜 그 안에서 신라의 왕족들은 혼례의식인 길례(吉禮)를 행했을까? 신라인들의 길례(吉禮)는 과연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포석정과 같은 유상곡수의 석조로 만든 특별한 장소에서 치뤄졌을까?

 

오늘날 혼인식을 하면 교회당이나 사찰에서 행하는 것처럼 신라인들은 신궁이 아닌 자연의 구곡유수의 축소판이라 할 유상곡수(流觴曲水)의 포석정의 포사(鮑祠)에서 길례를 신 앞에 치른 것은 그 당시의 신라인들의 신에 대한 산천과 바다에 지내던 제사의식의 장소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선 글에서 논한대로 동진의 왕희지와 그 무리들도 산천의 신 앞에 좋은 일을 알려 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신라인들의 신선도가적 풍류의 신은 산천과 바다의 신이었다. 그 사당은 마땅히 건물이 아닌 대자연의 거룩한 성소에서 치뤘을 것이기에 포석정과 같은 특별한 자연 산수를 닮은 제단에서 길례를 치루었다고 생각한다. 

 

 

*연대 미상의 오래된 포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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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의 포석정

 

포석정 유상곡수와 함께 사당이 있었을 것이다. 그 사당에는 살아 있을 때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또는 강한 인상을 준 영웅적인 남녀 신상들이 모셔져 있었고 그 앞에 나아가면 신상 앞에 순서대로 절을 먼저 시작했다.

 

신라인들의 길례에 대한 내용은 실제로 어떠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전해지는 것은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길례(吉禮)는 주로 혼인예식을 의미했던 것으로 남녀가 함께 포석사에서 행했던 것으로 <화랑세기>에는 여러 케이스들을 기록하고 있다.

 

<화랑세기>에서 8대 풍월주 문노(文弩, 537 - 606) 기록에서 진평대왕과 세종전군이 친히 포석사(鮑石祠)에 나아가 크게 그리고 기뻐하며 '결혼을 서약'하는 내용이 나온다. 풍월주 문노가 죽은 후 그 신상의 화상을 포석사에 모셨다는 것은 삼국통일과 관련이 되어 있는 것 같다.

 

삼국통일 대업을 이룬 문무대왕이 석굴암 앞바다 해중능에서 '호국룡(또는 신룡)'이 되어 묻힌 것은 그 해중능이 일종의 사당의 의미를 지닌다. 그처럼 포석사에는 삼국통일에서 화랑들의 정신적 지주가 된 문노(文弩) 풍월주 신상이 모셔진 것이다. 문노 풍월주는 삼국통일 당시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지만 화랑들의 활약에 힘이 되고 숭앙의 대상이 된 풍월주였다.

 

<화랑세기>의 기록을 따르면 "김유신 장군이 삼국을 통일하고 풍월주 문노(文弩)의 공을 가장 높이 평가하여 각간으로 추증하고 신궁(神宮)의 선단(仙壇)에서 대제를 행하였다"고 하였다. 문노 풍월주의 신상은 포사(鮑祠)에 모셔두고, 신궁의 선단에서 대제를 치루었다는 것은 포석정 즉 포석사 사당과는 다른 신궁이 있었는지 아니면 포석사도 광의적인 신궁의 일부였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신궁(神宮)의 '선단(仙壇)'이란 포석정과 같은 곳이 아닐까 하는 추정을 할 수 있다.    

 

*포석정

 

<화랑세기>에서 12대 풍월주 보리공(菩利公)이 모시고 간 하종공(夏宗公)이 신궁에 들어가는 장면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신궁 안에는 법흥왕과 옥진(玉珍: 법흥왕의 후실)의 교신산(交神像)이 안치되어 있었다. 하종공이 그곳의 두 신상에게 절을 하는데 이때 하종공은 법흥왕 신상이 아닌 옥진의 신상에 먼저 절을 하고 법흥왕 신상에 그 다음에 절을 했다.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신라인들은 왕보다도 여성 왕후를 더 앞세우는 풍속이 가능하다는 것과 살아 있는 여성이 죽어서 신으로서 절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신라의 신이란 실제의 인물이면서 죽어 신상으로 모셔진 신이라는 것은 일본의 신사 신궁에 모셔진 신들이 살아 있었을 때 인간 영웅들이었다는 것에서도 볼 수 있다.

 

풍월주 보리공이 하종공에게 왜 법흥 제신(帝神)에게 먼저 절을 하지 않았는지 질문을 받자, "선제(법흥) 또한 말하기를 '억조창생이 나를 신으로 여기는데, 나는 옥진(그의 후실)을 신으로 여긴다'고 하였으며, 영실공(옥진이 법흥의 후실이 되기 전 첫 남편) 또한 옥진궁주에게 먼저 절하고 나서 제(법흥)에 절했다. 이것이 그 상(像)이다. 미실(美室, 549-606)이 가르친 바이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법흥왕이 그의 후실인 옥진(玉珍)을 '神'으로 여겼다는 것과 옥진(玉珍)의 첫남편 또한 신궁에 있는 그녀의 신상 앞에 절을 먼저 했다는 것이며 그것을 따라 당대의 유명한 미실 부인도 그렇게 했다는 것이며, 하종공도 그래서 옥진 여신상 앞에 먼저 절을 했던 것이다. 결국 하종공을 따라 그를 모시고 갔던 보리공도 따라서 옥진 여신상 앞에 먼저 절을 하고 법흥왕에게 절을 했다.

 

나는 이 장면에서 신라의 깊은 여신 숭배 사상이 뒷받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법흥왕(514~540 재위)은 살아 생전에 이차돈과 함께 불교를 공인했던 왕으로서 불교적으로도 크게 숭앙되었을 수 있었던 인물이지만, 신라의 신궁에서 그는 그의 부인 즉 옥진(玉珍) 신상보다 하위 개념으로 참배되었다는 것은 후대인들의 가치 판단이 아닌 것이다.

 

그 이유는 법흥왕 자신이 생전에 옥진(玉珍)을 신으로 생각했다고 말한 내용에서도 알 수 있지만, 옥진(玉珍)을 여신으로 여긴 것은 신라의 여신 숭배의 의미가 불교를 공인화시킨 왕보다도 더 앞서 있는 신라의 오랜 신화적 그리고 여신적 숭배의 전통이 그 배경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옥진(玉珍) 여신상의 칭호에 대하여서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포석정의 포(鮑)가 전복이라면 그 전복조개 안에서 나오는 진주는 '옥진(玉珍)'이라 할만하지 않는가? 법흥왕의 후실인 옥진(玉珍) 부인이 죽어서 여신으로 숭배되어 그 신상의 칭호로 '옥진(玉珍)'이라 칭해졌는지 본래 살아 있을 때부터 그렇게 불려졌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옥진(玉珍)'이란 '보배 구슬' 즉 전복 안에서 나올 수 있는 진주(眞珠)의 의미가 그 속에 있다는 것은 옥진(玉珍)과 포석정의 포'(鮑)'에는 그 어떤 연관성이 있을 개연성이 없지 않게 보이는 것이다.  

 

보리공 풍월주에 관한 기록에서 미실부인(5대 풍월주 세종의 부인)이 아시공(阿時公: 미생랑의 할아버지)과 옥진(玉珍) 궁주를 호신(護神)으로 삼았다는 내용은 문무대왕만 '호국신'이 된 것이 아니라 여성인 옥진(玉珍)도 호신(護神으로 받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라인들이 신궁에서 법흥 신상보다 옥진(玉珍)의 여신상에게 먼저 절을 하고 법흥신상에 절을 했던 것은 옥진(玉珍) 여신의 위상이 포석사에서 최고의 참배 대상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옥진(玉珍)신상에 절을 한 뒤에 때로 아시공(阿時公) 신상에 절을 하고 그 다음에 법흥왕 신상에 절을 한 것은 산천의 제사와 화랑들의 무속적 배경이 이러한 순서로 참배를 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법흥왕 자신도 '神'이라고 칭했던 옥진(玉珍) 여신이 법흥보다 먼저 죽어 '神'으로 칭해졌을지는 알 수는 없으나 포석사에서 최고의 참배 신위가 옥진(玉珍) 여신상이이었다는 사실이다.    

 

제1대 풍월주인 위화랑(魏花郞) 편의 기록에 따르면 옥진(玉珍) 궁주는 본래 영실공(英失公)에게 시집간 기혼자였으나 법흥이 태자일 때 사랑을 받아 사실상 법흥태자의 첫부인이었던 보도(保道) 부인이 비구니가 되게 하고 그 뒤를 이어 법흥의 후실(총첩)의 위치에 올랐다.

 

6대 풍월주인 세종 편에서 기록하고 있는대로 <화랑세기>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미실부인도 옥진의 교태와 미모를 이었다고 했으며, 미실부인도 포석사에서 가장 먼저 참배하는 신상이 옥진신상이었다.

 

12대 풍월주 보리공 편에도 포석사에서 길례를 행한 내용이 나온다. 거기에는 신궁의 예와 포석사의 예가 각기 다르게 나온다.

 

만호태후가 보리공의 씨 다른 형인 정숙태자(진흥왕과 숙명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와의 사이에서 난 어린 딸 만룡을 보리공에게 시집보내기 위하여 13살 보기공과 그때나이 7살인 만룡을 함께 신궁에 보내 공주례를 고한다. 그 다음에 포사(鮑祠) 즉 포석사(鮑石祠)에서 두 어린 남녀를 길례(吉禮)를 시켰다.

 

여기에서 "신궁에 가서 공주례를 행하고 포사(鮑祠)에서 길례를 행했다"는 내용을 보면 신궁에서는 지위의 공식획득을 알리고, 포석사는 신궁과는 다른 혼인 관계를 신상 앞에 아뢰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신궁의식과 포사의식의 두 가지 구분에 대하여 필자의 생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왕의 통치를 받드는 왕통과 관련된 내용은 신궁에서 고하고, 남녀 혼례의 문제는 포사에서 행했다는 것이다. 즉 신궁은 보다 통치적인 의미가 있는 신사라면, 포사(鮑祠)는 산천과 바다에 관련한 신 특히 여신 앞에 혼례를 고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신 앞에 고하는 에의적 혼례의식이 길례(吉禮)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남성적 지배 의미가 강한 신궁이 아닌 포사(鮑祠)에서 왜 혼례의식인 길례(吉禮)를 행했을까? 그 이유는 신라인들의 모계혈통의 신화적 배경이 이유라고 생각된다. 신라시조 박혁거세가 선도성모 여신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바탕으로 신라의 여신 숭배는 이미 포석사에 옥진 여신상이 최고 참배 대상이 되고 있는 장면에서 보듯이 혈통을 만드는 혼인은 '어머니 대자연의 신'에게 고하는 제의적인 의식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궁과 포사는 각기 다른 기능 또는 신궁 안에 길례(吉禮)의 의식을 행하는 포사(鮑祠)가 따로 설치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겠다.

 

전복조개를 닮은, 그리고 그 명칭 자체에도 전복 글자가 들어가는 포사(鮑祠)에서 길례(吉禮를 행한다는 것은 전복이 여신의 생산의 심볼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궁(전복의 회도리)에서 생명이 잘 잉태하기를 기원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포사(鮑祠)에서 길례(吉禮) 의식을 신 앞에 올리는 것은 임신을 전제로 한 혼인을 고하는 것이었다.  

 

18대 풍월주이기고 했던 김춘추(장차 무열왕)가 정궁부인인 보량궁주가 있음에도 김유신 장군의 누이인 문희를 임신시킨 것이 드러나자 김춘추는 문희와 함께 포사(鮑祠)에 가서 길례(吉禮)를 올렸다고 <화랑세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앞서 언급했지만, 법흥태자가 옥진의 아름다움을 보고 친히 포석사에 나아가 길례(吉禮)를 행했다. 이 사실이 유추하게 하는 사실은 본래 포석사에는 다른 근본적인 여신이 모셔져 있었다는 것이다. 즉 포사(鮑祠)는 법흥왕 신상과 옥진(玉珍) 신상 등이 모셔지기 전에 포석사에는 이미 이들 두 신상들 자신들이 살아 있을 때 길례(吉禮)를 행했던 곳이기에 그떼 그들이 길례를 행했던 그곳에도 길례를 받는 다른 신상 특히 여신상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신라 선도성모 여신상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옥진 여신상, 법흥왕 신상, 아시공 신상이 포사(鮑祠)에 모셔져 있는 대목을 보여주고 있는 <화랑세기>를 보면 포사(鮑祠)에는 선도성모상 외에도 여러 신상이 모셔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당나라로 가면서 일본 승려 엔닌이 기원했던 바다의 신인 '전복의 여신' 신라명신(新羅明神)은 동신성모(東神聖母)이다. 명신(明神)도 태양신이며 동쪽에서 뜨는 해 즉 동신(東神)도 태양신을 의미하는데 <삼국사기>에서 그 동신(東神)을 '동신성모(東神聖母)'라 표현한 것을 보면 신라명신(新羅明神)은 성모 즉 여신인 것이다.

 

일본에서 국보로까지 지정되어 있는 신라명신(新羅明神) 좌상이 50년동안 숨겨오다가 지난해 2008년에 오사카 시립미술관에서 공개되었다. 헤이안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신상으로 신라인들이 숭상했던 신이 일본에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정자관(또는 닭 벼슬관)과 같은 태양신 모자를 쓰고 있는데 여신상을 남성화시키기 위하여 나중에 수염은 길게 만들어 넣고 콧수염은 없는 모호한 모습이다.

 

*신라명신좌상(新羅明神坐像) 일본 국보,

닭벼슬을 닮은 관을 쓰고 있다.

AD 806년. 미이데라(三井寺) 소장

http://kamnavi.jp/it/kinki/onjou.htm

 

園城寺開祖の智証大師円珍が唐から帰朝の時、船中にあらわれた新羅の国神を祀ったと言う。後に源頼義の新羅明神への祈願から、源氏と園城寺の深い関係ができた。頼義が東北の安倍頼時を攻めるに当たって、新羅明神に詣でて戦勝を祈ったとの記録がある。 その子義光も新羅明神の前で元服し、新羅三郎義光と名乗った。 新羅三郎義光は後に関東に下り、甲斐源氏の祖となり、武田につながる。五十猛命は東北征伐の時、坂上田村麻呂によって祀られている。頼義もこれに習ったのであろう。 なお宮中に祀られていた園神韓神の園神の一字がこの園城寺の名のゆわれとの説がある。通説では園神は大物主神とされているが。 神仏図絵には「素盞嗚尊皇子なり母は稲田姫尊、五十猛尊紀州名草の社、近江国新羅大明神是なり。」と記されている。

 

*신라명신(新羅明神)을 모신 신실

신라의 포사의 신상들을 모신 모양도 이러한 모습이었을까.

*신라명신(新羅明神)이 모셔진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

1345-50년 건축

 

일본인들은 그들의 국보 신라명신좌상(新羅明神坐像)이 한반도의 신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新羅明神坐像」(国宝)は朝鮮半島の神の姿を刻んだ異形の神像だ).

 

이 신라명신(新羅明神)은 지쇼타이시(智証大師) 즉 헤이안(平安·794~1185)시대 당나라에 유학했던 천태종 승려인 엔친(圓珍·814∼891)이 당나라로부터 귀국하던 도중에 선상에서 호법신(護法神)으로 모셨던 신이었음을 밝히고 지금도 제사를 올리는 신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지쇼타이시(智證大師) 엔친(圓珍)은 지카쿠타이시(慈覺大師) 엔닌(圓仁 794∼864)과는 다른 인물이지만, 두 일본인 승려 모두 당나라로 왕래하는 바다에서 신라명신(新羅明神)의 가호를 받았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러한 신라명신상은 이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13세기 카마쿠라시대 때로부터 내려오는 신라명신상도 있다. 같은 신라명신인데도 그 모양이 차이가 나는 것을 보면 본래 신라명신의 모습이 바다의 여신의 모습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13세기 또 다르게 그린 新羅明神像(しんらみょうじんぞう)
重要文化財 鎌倉時代 十三世紀

新羅明神は、智証大師が唐から帰国する途中、その船中にあらわれた護法神で、

三井寺の重要な神として北院に祀られています。

http://www.shiga-miidera.or.jp/treasure/picture/01.htm

 

신라의 태양신은 이렇게 지금도 일본에 남아 있다. 신라 시조신 선도성모 또는 동신성모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 거서간의 어머니 여신이라는 것은 단지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포석사에 모셔졌던 신상들에서도 찾아내야 할 것이이다. 

 

일본의 신사들에는 신라명신(新羅明神)을 모신 신사들이 아주 많다. 메이지유신 이전까지 거의 3천 곳에 해당하는 신사들이 신라의 박혁거세를 모신 신사들이 있었고 오늘날도 신라신사의 이름으로 수많은 신사들이 존재한다. 이에 대하여서는 일본인들이 탐방한 아래 사이트를 참고할 수 있다.

http://www.shiga-miidera.or.jp/serialization/shinra/104.htm

 

나가노현(長野県) 아지촌(阿智村 아치무라)는 신라인들이 도래하여 세운 마을로 잘 알려져 있다. 아지(阿知/阿智)라는 지명은 <旧事本紀>에서 "天思兼命信濃国阿智祝部等祖(あちのはふりべがとおつおや)"라고 언급되어 있기도 하다. <安布知神社略史>에서 '阿知'의 칭호를 가진 지명을 살펴보면 일본 전역에 걸처 허다하게 나오는 이름이다. 그 이유를 일본인들은 한반도에서 도래한 사람들의 집성촌을 이룬 결과로 보고 있다.

 

『安布知神社略史』によれば「”阿知”と称する地名は全国的に少なくとも数か所を数えることができるが、そのことごとくが大陸半島よりの帰化人の集落居住によるものであり、いずれも我が国応神天皇の朝より秦氏および阿知使主(あちのおみ)の一族が帰化在住していたところといわれている」と述べている。

 

특히 그곳 아지촌(阿智村)에 소노하라 동네(園原の里)의 '소노하라' 이름은 <信濃国風土記>에도 나타나 있어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잇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소노하라'의 '소'가 신라의 서라벌(徐耶伐)의 일본발음 'そやぼる'의 'そ'에서 유래되었다고 일본인들은 믿고 있다.

 

この地名が新羅国の王都徐耶伐(そやぼる)のソからきている、という解釈が可能であるとすれば、「ソの原」であり、この地方には新羅系渡来人の集落があったことになる。

 

특히 아치무라(阿智村)에는 연간 축제로 '복숭아꽃 마츠리(花桃祭りに)로 유명하다. 해마다 4월 22일부터 5월 5일까지 열리는 이 복숭아꽃 축제는 신라의 선도성모(仙桃聖母)의 선도(仙桃)에서 비롯했을 것이라는 것은 그들의 동네 이름이나 그 역사에서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다. 아치무라(阿智村)의 '복숭아꽃 마츠리(花桃祭りに)'는 신라로 말하잠녀 '선도(仙桃) 축제'가 되는 것이다.  

 

*일본 나가노현(長野県).

아치무라(阿智村)의 '園原の里' 동네는 

신라인들의 도래지로 알려져 있으며 복숭아 축제로 유명하다.

신라의 선도성모(仙桃聖母)의 복숭아 여신과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곳 <阿智村誌>에도 그 내력이 기록되어 있는 안포지신사(安布知神社)에는 신라명신(新羅明神)을 모시고 있다. 니이가타현(新潟県)의 관산신시(関山神社)에는 성관세음보살상(聖観世音菩薩像)이 있는데 600년대의 신라불상이며 여신상의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関山大権現(地主)は殿内中央の厨子に安置されている聖観世音菩薩像である。身の丈は二〇・三cmの小像である。この像は朝鮮三国時代(600年代)の新羅仏であるといわれ、女性的な感じがする。

 

  

이러한 사실들은 일본에 남아 있는 신라명신(新羅明神)은 여신적이며 복숭아 신화의 배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경주의 서술산에 성모사(聖母祠)는 선도성모를 모신 사당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데서도 포석사에는 선도성모상이 모셔졌다는 것은 충분히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길례(吉禮)는 결국 신라인들의 대자연과 관련한 조상신 사당에서 올리는 왕실 가문의 혼례의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라인들에게 특히 <화랑세기>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던 포석사 신상 앞에서 혼례의식으로 치루어졌던 길례(吉禮)는 신라시대 이후에 변화되어 나타난다.  

 

조선시대 유교사회에서는 길례(吉禮)·흉례(凶禮)·군례(軍禮)·빈례(賓禮)·가례(家禮)의 다섯 의례(五禮)가 나오며, 그중 길례를 으뜸 제사로 여겼다. 특히 이러한 오례를 '효' 실천의 근본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효의 근본'이라 함은 고대 신라인들이 그들이 포석사에서 받들던 여신에 대한 참배 의식과 순서를 조선시대 유교적인 부모에 대한 '효'로 전환시킨 것을 볼 수 있다. 동시에 이러한 후대의 오례의식은 길례에 대한 반대 개념인 흉례도 포함시키고 있으나 장례 또는 상례를 신 앞에 알리는 것은 생략한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길례에는 도포, 중치막,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썼으며, 가례에는 흉배를 단 단령복에 각대를 띠고 사모를 썼다. 제례에는 흰 도포나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썼으며, 상례에는 이에 따른 상복(喪服)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시대 길례(吉禮) 때의 의상은 어떠했는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신라시대의 길례(吉禮)가 조선시대에서 가례(嘉禮)와 길례(吉禮)로 구분되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례(嘉禮는 왕의 혼례를 비롯하여 왕통과 직접 관계있는 세자, 세손의 혼례 의식을 뜻했으며, 길례(吉禮)는 세자 세손이 아닌 일반 왕자녀의 혼례로 왕자군, 왕손, 공주(왕의 적녀), 옹주(왕의 서녀), 군주(왕세자의 적녀), 현주(왕세자의 서녀) 등의 혼례를 의미하여 가례(嘉禮)보다 하위에 두었다. 이것은 '신라의 신 앞에 올리던 길례(吉禮)'를 유교시대의 주자가례 등의 영향을 받아 왕실의 가례(嘉禮) 뒤로 길례(吉禮)를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말에는 '길례(吉禮)'라는 말이 모든 혼례의 대표적인 용어로 살아남는 것을 볼 수 있다. 1870년대 흥선 대원군이 편찬한 <길례요람 吉禮要覽>은 대군·왕자·왕손·공주·옹주·군주(郡主)·현주(縣主) 등의 관례(冠禮)와 가례(嘉禮)에 대한 기록이다.

 

그 서문에서 대원군은 "우리나라의 문헌에는 궐루(闕漏)가 많아 관혼(冠昏)과 출합(出閤) 등에 예절이 없어 거의 상고(想考)할 길이 없다. 나는 이에 옛 것과 지금 것에서 긴요한 것만을 뽑아서 융쇄(隆殺)의 예를 변정하여 2권을 만들어 본부(本府)에 둔다. 후일에 준행(遵行)하기 바란다"라고 쓰고 있다. 대원군이 옛 혼례의식들을 참고하다보니 오랜 용어인 '길례(吉禮)'가 중요한 대표적인 왕실 혼례의식이었다는 것을 알고 그 어휘를 부각시킨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지난 번 아이오와주 북부에 있는 디코라시의 로타리 인터내셔날 클럽에서 강연을 다녀왔다. 그 때 인근 미네소타주 경계선 바로 너머에 위치한 아름답고 신비한 동굴을 다녀왔다. 그 동굴은 나이애가라 동굴(Niagara Cave)인데 그 안에 높고 큰 폭포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이 붙여져 있다.

 

그 동굴 안에는 따로 신비한 자연 지형 그 자체의 홀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서 4백여쌍이 혼인식을 치루어왔다는 것이다. 인위적인 현대문명 사회의 교회나 성당 아니면 호텔이 아니라 자연 명승 그것도 신화적으로는 여신의 암호(巖戶)의 의미를 가지는 동굴 안에서 혼인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름다운 자연 명승의 신 앞에 혼인을 약속하는 의미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라인들의 구곡유수를 축소시킨 유상곡수를 만들어 놓은 포석사에서 길례 혼인의식을 올리는 것과 그 배경이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미국의 이름있는 동굴들을 둘러보면서 유명한 명승 동굴 안에 따로 자연 동굴의 아주 경관이 좋은 굴 안쪽에 '웨딩 룸'이라 칭한 곳이 따로 있는 곳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주례단 앞에 스무 여개의 의자들이 놓여 있고, 특별히 그곳만 보기좋은 조명을 해놓은 그곳들 현장에서 수백 쌍의 혼인을 해왔다는 안내문 기록을 볼 때마다 나는 신라인들의 포석사 길례(吉禮)가 떠오르곤 한다.

 

포석사에서 남산신이 나와서 춤을 추었다는 기록을 보면 포석사의 길례(吉禮)는 신 앞에 드리는 무속적 제사 형태를 가졌을 수 있다. 해중능에서 신룡이 나와서 만파식적을 바쳤다는 것에서도 같은 맥락이 이어진다. 신라는 불교 이전에 신의 나라 '神國의 ' 있다고 <화랑세기>에서 말하고 있듯이 신룡에 대한 믿음 불교적인 것으로  없는 오랜 '神國'의 신화적인 전통에서 이어져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국립사적 제1호인 포석정은 이제 포석사(鮑石祠)의 그 신사적 의미에서 그 역사성과 더불어 신라의 '비너스가리비조개의 여신'으로서 '전복조개의 여신'에 대한 재평가를 해야 할 것이다.  특히 그곳에는 나가노현(長野県) 아치무라(阿智村)의 '園原(서라벌)' 동네처럼 복숭아 나무를 심어야 할 것이며  복숭아 축제가 열려야 할 것이다.

 

(06/14/09 오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