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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선덕여왕과 바다의 신, 그리고 그 바다의 주인공

monocrop 2009. 6. 26. 19:01

 

백제, 고구려만이 우리의 역사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라 역시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신라와 조개들의 신화

 

글 : 오두방정

 

 

     ...

         일본인들이 신라를 오가고 당나라를 왕래하면서도

       신라의 바다의 신인 '명신(明神)'에게 빌었다는 것은

       남해와 황해 동해의 그 바다 이름이 

       '新羅海'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해와 일본해 싸움은 여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                                                          (아래 내용중에서)

 

 

 

- 신라최초 여왕이었던 선덕여왕의 '여신적' 위치 -

- 나전칠기 자개문양이 불교 유교적이지 않는 이유 -

- 흰색의 옷을 입은 백의관음상은 신라 선도성모 여신의 후예 -

 

 

서양에 비하여 우리나라 전통 종교에서 산신(山神)은 많은데 왜 해신(海神)은 적을까?

우리민족에게서 산신신화 전설은 많았던 반면에 바다의 신에 대한 신화는 상대적으로 적게 표현되어 왔다.

그 원인은 바다의 여신을 숭배한 신라의 멸망과 산신을 강조한 고려왕조의 신라 문화와 종교를 배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관음보살은 해신 즉 '바다의 여신'의 윤색인 경우가 많다.

해수관음보살은 아예 바다까지 그려넣고 있으면서 그것을 불교 자체의 유래처럼 보이기 쉽게 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 남아 있는 관음보살의 많은 경우 바다의 여신의 잔재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불교적으로 융화되기 이전의 모습은 그대로 조개와 관련한 바다의 여신의 모습이었다. 

 

임금이 붕어했을 때 소라고둥을 분다는 것이나 신라인들의 포석정이 전복을 닮아 있다는 포(鮑)의 의미만큼 우리민족은

조개와 관련된 신화가 적지 않다.

 

유교전통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나전칠기(螺鈿漆器)와 같은 해신숭배의 바다 조개 문화가 이어져 온것에

대하여 그 본래의 해신적 신화의 연원을 잊어버리고 단지 예술적인 작품으로 생각하기 쉽다.

나전칠기(螺鈿漆器)의 나(螺)는 소라의 뜻이지만, 모든 자개조개를 의미하고 있다.

 

나전칠기는 흥미롭게도 불교나 유교적인 작품은 별로 없고 그 이전의 신선도가적인 산천과 바다를 표현하는 자개 예술작품이

많은 이유를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바다의 여신 숭배의 흔적이기 때문이며 고려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불교와 유교문화는 그러한 삼국시대 토속 신앙인 태양숭배

및 해신문화를 기피했다고 생각한다.

 

*나전칠기 자개 문양은 불가적인 것보다

신선도가적인 고대 해신신앙 산신신앙을 표현해 왔다.

 

우리민족의 안방 규수문화의 정수는 자개문양 가구이다.

자개문화의 특징은 안방과 '어머니'의 이미지이며 자개문양 예술에서 불교적이거나 유교적인 전통은 없고 화조 또는 십장생

바다 태양 등의 표현을 하는 것은 고대 신선도가적인 산신과 해신 숭배의 잔재이다. 

사실상 안방은 신선도가적이며 사랑채는 유교적인 풍치로 꾸몄던 것이 조선시대 사대부 가문의 '실내 종교'의 실상이었다.

 

전통 규수들의 안방에서 자개함이나 자개장농 안에서 옷을 꺼내 입는다는 것은 비너스 여신이 자개조개인 가리비조개 또는 

전복조개 안에서 옷을 입고 나오는 것과 신화적인 배경을 같이 하고 있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자개와 진주를 만들어내는 조개 가운데는 전복이 가장 많은 진주와 자개를 만들어내는 조개에 속한다.

*우리민족의 안방 규수문화의 정수 자개함

자개문화의 특징은 안방과 어머니의 이미지이며

자개문양 예술에서 불교적이거나 유교적인 전통은 없고

화조 또는 십장생 바다 태양 등의 표현을 하는 것은

고대 신선도가적인 산신과 해신 숭배의 잔재이다. 

 

 

다시 말하여 조선시대 5백년 동안에도 자개문화는 빛을 발했던 것은 그 아름다운 자개의 예술적 의미도 있었겠지만,

여성과 바다에 대한 원시 토속적 신앙에서 유래한 자개의 이미지가 '어머니'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자개를 영어로 'mother of pearl(진주의 어머니)'이라고 하는 것은 자개가구가 안방에 있을 때 '진주' 즉 '옥동자'를 낳는다는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진주자개는 전복조개 또는 가리비조개를 의미하였으며 그것은 그대로 '진주의 어머니'의 의미를 지녔다는 그 '어머니(mother)'의

표현을 서양인들이 쓴데는 신화적인 바다의 여신 비너스를 의식한 때문이다. 

 

이러한 진주의 어머니 해신(海神)을 표현하여 해수관음보살로 표현한 것이다.

진주자개 해신(海神)을 표현하면서 그 진주까지 표현한 것이 옥동자이다.

그래서 해수관음보살상(海水觀音普薩像) 또는 수월관음상(水月觀音像)을 그릴 때에는 흔히 그 앞에 따로 진주자개의

진주처럼 따로 옥동자상을 그려넣었는데 그것이 선재동자(善財童子)이다.

 

*수월관음도. 고려후기. 일본 대덕사 소장

선재동자가 앞에 있다.

 

고대 바다의 여신 숭배의 흔적인 자개문화는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의 과정을 밟았다.

기독교 문화에서는 자개문화가 별로 없는 반면에 가리비조개로 세례를 행한 전통은 오늘날까지 기독교 전통으로 남아 있으며,

자개문양은 서양 기독교 변방에서 세속적(pagan) 또는 보다 고대 신화적인 전통이 있는 곳에는 자개문화가 존재했다.

 

예를 들어 서양 전통 악기에 우리의 나전칠기처럼 자개를 입히는 것은 오늘날까지 존재하고 있으며, 비전(秘傳)이나 신화적인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는 서양의 '밀교'와 같은 프리메이손(Freemason) 전통 등에는 자개로 바이블 표지까지 만들기도 한다.  

 

 

*프리메이손 바이블 표지에 사용된 자개 장식http://www.phoenixmasonry.org/masonicmuseum/masonic_bible_with_abalone_shell.htm

 

 

*서양의 악기들에 사용되고 있는 자개 장식

더 많은 사진: http://www.skeezo.com/gallery

 

고대 종교적 제의에서 신의 소리로 불던 소라고등 나팔에서 악기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바다 조개류는 악기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자개문양을 서양인들이 악기에 새겨넣는다는 것은 흥미롭다.

요즈음도 서양의 악기에는 색소폰, 트럼펫 등의 내부의 민감한 곳은 자개로 만들어넣고 있다.

 

우리의 전통 자개문양예술인 나전칠기(螺鈿漆器)는 신라인들이 특히 발전시켰다는 특징이 있다.

본래 나전칠기(螺鈿漆器)는 중국의 상나라(BC 16C ? BC 11C)에서 시작되어, 당나라(618 ? 907) 때에 성행했으며, 

우리나라 삼국시대에는 특히 신라(BC 57 - AD 935) 때에 크게 번창했던 것이 동아시아 나전칠기(螺鈿漆器)의 역사이다.

그러한 신라의 나전문화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흥미롭게도 신라에는 나전칠기의 나전(螺鈿) 즉 자개문양의 의미가 강하게 발달한 반면에 중국과 일본에서는 칠기기법에 보다

치중하고 나전기법과 자개문화는 쇠퇴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만큼 신라에서 조개문화 즉 신화적인 바다의 여신에 대한 나전의 의미를 크게 새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언급한대로 바다와 자개는 여성적이며 '어머니'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다의 여신(나중에 불교에서 수월관음으로 표현되었지만) 앞에 옥동자를 그려넣은 것은 그 옥동자가 현 세상의 지배자인

왕(王)을 의미한다. 선도성모 여신이 낳은 '옥동자' 지배자가 시조로 된 경우가 신라의 박혁거세 신화이다.

 

그런데 그 옥동자가 여성일 수도 있었던 신라의 여신숭배는 선덕여왕(善德女王) 때에 크게 꽃을 피운다.

요즈음 사극으로 나오고 있는 선덕여왕(善德女王,본명은 金德曼)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특이한 그리고

가장 의미있는 신화시대의 사극이라고 생각한다.

 

생각컨대 수월관음상 앞의 옥동자 즉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왕이 되었다는 의미가 '선덕여왕(善德女王)'이라는 칭호 속에

스며져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善財'와 '善德'은 어딘가 통해 있으며 신화적으로 의미가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라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632∼647)의 '선덕'은 한편으로는 선도성모(仙桃聖母)의 '선도'와 유사한 발음을 가진다.

선덕(善德)이라는 칭호는 왕이 죽고나서 붙이는 묘호이다.

따라서 최초의 신라 여왕이 죽자 신라인들은 그들의 시조인 '선도성모'의 '선도'를 의식하여 '선덕'이라 칭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선덕여왕은 그 왕호가 특이하고 여신적이다. '성조황고(聖祖皇姑)'라고 했으니 특히 살아 있는 왕을

'祖'와 '姑'를 썼다는 것은 여신적이다.

그것도 최고의 지위인 '皇'을 썼다.

선덕여왕 때에 분황사와 황룡사를 지은 것은 그 황제의 '황(皇)'의 의미가 '성조황고(聖祖皇姑)' 자신에게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우리민족 최대의 자존심은 이러한 선덕여왕 즉 '성조황고(聖祖皇姑)' 시대의 신화적인 배경

에서 또 다른 배경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여황님'은 마고 할머니와 같은 황제 마고 할머니의 의미를 가진 '皇姑(황고)'라는

그 칭호 자체가 대단히 신화적인 여신적 칭호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선덕여왕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여자로서 왕위에 올랐던 여왕에만 촛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선덕여왕이 세운 첨성대를 비롯한 선덕여왕이 여신과 관련한 이미지를 많이 남겼다는 사실에 보다 깊은 천착이 필요하다.


선덕여왕은 신라의 신화적인 분위기 속에서 태어났다.

선덕여왕은 치세 내내 여신 숭배적 분위기를 볼 수 있다. 여기에 선덕여왕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하여 여신숭배적 문화로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그녀는 신라의 삼보가 된 해중능의 신룡에게 옥대를 받았다는 진평대왕의 장녀로 태어났다.

진평대왕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선덕여왕 아니 성조황고(聖祖皇姑)는 특히 '지혜'가 많았던 신라의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

단지 명석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신적인 그 위상을 그 '지혜'라는 말 속에서 볼 수 있다.

 

여신숭배는 중근동의 소피아(Sophia) 신화나 구약성서에서도 나타나듯이 여신숭배에지혜(wise)는 여신의 상징으로 표현된다.

선덕여왕은 지혜를 보여주는 내용이 사료에 자주 등장한 것은 그러한 지혜를 상징으로 하는 여신숭배의 잔재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 진평대왕 때에 당나라로부터 모란꽃 그림과 그 종자를 얻어왔을 때 그때는 선덕여왕이 덕만공주(德曼公主)였을 때이다.

그녀가 보고는 '꽃은 아름다우나 향기가 없다'고 하여 벌나비가 그려져 있지 않음을 지적하여 그녀의 지혜의 경지가 높았다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사실적인 내용 이상 신화적으로 여신숭배의 이미지를 선덕여왕에게 부여해놓고자 하는 기록으로 보인다.

 

선덕여왕 2년(633) 정월 나을신궁(奈乙神宮)에 나아가 왕이 친히 제사를 지냈다. 

선덕여왕은 김씨인데 박혁거세 신궁인 나을신궁(奈乙神宮)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나을신궁(奈乙神宮)에 모신 신이 박혁거세신을 모셨다기 보다 오히려 박혁거세의 어머니이자 모든 신라인들의 시조라고 볼 수 있는 선도성모 여신을 모셨기 때문에 김씨인 선덕여왕도 그 나을신궁(奈乙神宮)에서 제사를 지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나을신궁(奈乙神宮)은 조선시대 이씨 왕족의 씨족 종묘로 보아서는 안되며,

산천과 바다의 여신을 숭배하는 신궁으로 보면서 신라의 모든 성씨를 초월한 왕족들의 신궁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선덕여왕 5년(636년) 5월에 두꺼비와 개구리가 떼를지어 궁성의 서쪽 옥문지(玉門池)로 모여 들었다.

선덕여왕의 지혜로 그것이 백제군의 기습을 알리는 징조로 보아 사전에 막게 하였다.

개구리떼가 백제군사로 상징되는 내용이 흥미롭다.

 

<삼국유사>에서 이 부분에 대한 설명에서 그 어떤 이유도 없으며 단지 '개구리가 우는 모습은 병사의 얼굴을 닮아 있다'라고만

했는데 그것이 왜 '백제군'이 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신라는 스스로 신룡의 나라 즉 나중에 고려왕조에서 박혁거세 신화를 쓰면서 '큰뱀'이라고 표현했던 그 '큰 뱀의 나라' 신라에

대하여 다른 나라를 깔보는 의미로 '개구리'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뱀은 개구리만 먹는 것이 아니다. 왜 백제군사를 '개구리'라고 했을까?

이렇게 선덕여왕이 간단하게 '개구리' 이야기를 한 것으로만 사료에 나오지만, 그 역사적인 의미를 추적해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동부여의 해부루가 커다란 바위 밑에서 발견한 것이 금개구리였다.

그 금개구리가 해부루의 뒤를 이어 동부여의 왕이 되었으니 그가 금와왕(金蛙王)이다.

금와왕이 유화부인을 만나 낳은 아들 일곱 중에 둘째아들이 백제시조 온조였다.

 

말하자면 백제는 '개구리 후예'라는 것이다.

고구려 시조인 주몽은 사실은 해모수가 유화부인을 강간하여 낳은 유기된 아들이 었는데 그 유화부인과 금와왕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 온조라는 면에서 고구려 시조와 백제시조는 서로 엄격히 다른 면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신라인들은 백제군사를 '개구리'로 그 신화적인 배경을 언급하면서 은근히 자신들이 '뱀'이라고 여겼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바탕한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는 사실상 '뱀'이라고 할 '용'에게서 태어난 신화를 가지고 있다.

 

신라시조는 특히 여신적 배경을 가진다. 박혁거세를 낳은 주체는 생략되고 결과적으로 '알'로 표현되어 있는 반면에 

원시 모계 신화시대를 바탕한 박혁거세 부인 알영부인이 계룡에게서 났다고 그 계보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은

모 - 녀 계승의 모계신화의 구조를 보다 명확히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알영이 태어난 계룡(鷄龍)이란 알영 자신도 입에 부리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했을 정도로 박혁거세의 용모보다 더 신이며 

용이다.

 

그래서 신라인들은 용녀의 자식들임을 의미하며 '신룡'이라는 표현이 신라의 왕들의 기록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화적 배경에서 삼국이 각축을 벌일 때 금와(금개구리)가 신라인들에게 단순히 '개구리'로 표현되었다면

백제나 고구려인들은 신라를 '뱀'으로 비웃었을 것이다.

 

그러한 계룡(鷄龍)의 위상을 고려왕조가 '큰 뱀'으로 비하시켜 박혁거세와는 분시켜 왜곡하여 신라의 계룡신화를 약화시키고

분열시키려 했다.

그 사료적 근거는

신라가 멸망하자 고려시대에 쓰인 <삼국유사>에서 박혁거세 무덤을 쓰는 데 '큰 뱀이 나타나서 방해를 했다'고 기록했다. 

이렇게 고려시대에 신라를 비하하기 위한 표현으로 '큰 뱀'을 등장시킨 것은 사실상 '계룡'이었던 것이다.

 

계룡과 금와 이러한 용어를 선덕여왕에 대한 역사를 쓰면서 고려인들은 그저 생략했던 것인데 내가 이렇게 숨은 그림을 찾아내

보이게 되었다.  

 

이때 미리 선덕여왕이 이러한 '개구리' 징조를 알아차리는 설명을 하는 내용에서

"음(陰)이 흰 색이며 흰색이 서(西)를 의미한다"고 표현한 것은 

음(陰)인 여신의 색과 서왕모의 색이 희다는 것을 강조한 것에서 선덕여왕은 그 시대의 여신신화에 대하여

정통한 지식과 여신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선덕여왕 7년(638년)3월에 칠중성(七重城: 현재의 경기도 積城)의 남쪽에 있는 큰돌이 저절로 35 보(步)나 옮겨갔다고 한다.

(이러한 돌의 움직임은 오늘날 네바다주의 사막에서도 일어나는 현상으로 토픽이 되기도 한다.)

 

분황사에 이어 645년 선덕여왕 때에 황룡사 구층목탑(黃龍寺九層搭)이 완성되었다는 것 또한 그 탑이 의미하는

역사적 상징에서 특별한 대업이라 할 수 있다.

정확히 연대를 알 수는 없으나 첨성대(瞻星臺)도 선덕여왕 때에 세워진 신비한 건축물이다.

그 첨성대는 서라벌의 주산격인 옥녀봉(玉女峰)에서 동짓날 해돋는 곳을

향하는 일직선상에 감은사 앞바다의 해중능을 향해 있다.

 

그 일직선 사이에 있는 신라의 주성인 반월성이 있다는 것은 신라는 옥녀봉에서 동짓날 해돋는 방향의 한복판에서

그 궁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그 향동지일출(向冬至日出) 선상에 첨성대가 놓여 있게 했던 인물이 선덕여왕이다.

 

선덕여왕은 재위 16년 되던 해인 641년 8월에 명을 다하니 그 묘호를 선덕(善德)이라  했다.

그녀 자신이 살아 생전 미리 음택을 정해 두었던 경주 낭산(狼山)에 묻혔다.

그녀가 묻힌 선덕여왕릉은 향동지일출(向冬至日出) 선상에서 반월성 다음에 놓이게 하였다.

이 얼마나 선덕여왕이 여신적이며 태양숭배시대의 신화적이었던 인물이었던가. 

 

그 시대에의 종교는 자연이 신(神)이며 지배자 자신도 자연에서 잉태된 신(神)으로 추앙된 신화시대였다.

 

선덕여왕은 그래서 옥녀봉- 첨성대 - 반월성 - 선덕여왕릉 - 해중능으로 연결되는 향동지일출(向冬至日出)의

일출선상에 묻힌 여왕이었으며, 나중에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일출선상 끝인 바다의 해중능에 묻혔다.

문무왕의 대왕암은 이러한 선덕여왕의 라인 선상에 추가된 것이다.

향동지일출(向冬至日出) 선상에 신라의 두 남녀 왕들이 묻힌 것은 선덕여왕에 대한 의미를 다시한번 깊이 생각케 하는 부분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전통 가요에서

"옥녀야 잊을소냐 헤어진 운명 차거운밤 하늘에.." 라는 노래가사가 있었다.

'옥녀'는 대단히 오래된 우리민족의 여성적 이름이며 신화적이다.

 

마고할머니가 산신할머니라면, 서라벌의 옥녀봉에서 바다의 여신을 향한 옥여봉의 옥녀(玉女)가 선덕여왕의 살아생전 왕명인 

성조황고(聖祖皇姑)의 의미가 있고 바다를 향하여 해돋는 곳을 지향한 그녀의 첨성대와 무덤은 스스로가 바다의 여신이라는 의미가 있다.

 

선덕여왕 5년(636년)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나라 오대산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

그곳의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이르기를

너의 국왕은 천립찰리종왕(天笠刹利種王)이니 미리 불법을 받았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만큼 선덕여왕의 신화적인 위상을 국제적으로도 드러냈던 대목이다.

 

자장법사가 당나라 태화지변(太和地변)을 지나갈 때 홀연히 신인(神人)이 나타나 자장법사에게 본국에 돌아가 그 절에

구층탑(九層搭)을 이룩하고 팔관회(八關會)를 베풀면 이웃나라가 침범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구이(九夷: 아홉 주변 나라)가 와서 조공(朝貢)을 바쳐올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백제의 아비지(阿非知)라는 대목수가 특별히 초빙되고 나무와 돌을 다듬고 이찬 김용춘(金龍春)의 지휘하에 소장(小匠)

200명을 거느리고 구층탑 건립을 추진하였다.

 

처음 탑의 기둥을 세우던 날에 대목수 아비지의 꿈에 본국 백제가 망하는 꿈이 꾸여지는지라 아비지가 이를 의심하여 하던 일을

중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홀연히 땅이 진동하고 캄캄하여 칠야(칠흑같은 밤)가 되더니 이미 지어놓은 황룡사의 금문당(金門堂)에서 한 노승(老僧)과 장사(壯士)가 나와 아비지가 세우다 중단한 기둥(황룡사구층목탑의 중앙 기둥을 의미)을 세운 후 어디로 사라져 보이지

아니하였다. 이에 아비지가 후회하며 탑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황룡사 구층탑이 세워진 뒤에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고 후고구려는 심라의 삼보(三寶) 즉 황룡사 장육상(丈六像)과 황룡사 구층탑(九層搭) 및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대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가 있어 감히 침략을 못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신라삼보라는 이들 세 가지 정신적인 유적 유물들은 모두 선덕여왕과 그 부녀의 신화적인 성물들이다.

 

사실 고려왕조가 시작되고도 신라의 황룡사 구층목탑은 파괴되지 않았으며

몽고병란에서 몽고군들이 황룡사를 불태우기까지 우리 민족의 국보로 존재하고 있었다.

고려시대 조정에서도 황룡사구층목탑은 아꼈다는 것이다.   

 

사실상 삼국통일 대업의 기초는 선덕여왕대에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김춘추가 외교적으로 고구려의 지원을 받으러 고구려에 갔다가 포로로 잡히자 김유신 장군이 구해낸 것도

선덕여왕 때였다.

외교에서 적극성을 띄었고 능동적으로 군사를 움직이는 민첩함도 보였다. 

선덕여왕 때에 김유신은 백제의 성을 일곱개나 점령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이때에 김유신 장군이 물만 마시고

그의 집에도 들르지도 않고 전장으로 향하는 신라군사들의 사기를 보여주는 재매정 우물 이야기도 등장한다.

재매정은 첨성대를 닮아 있는 우물이다.

 

흔히 뛰어난 도인들에게서 전해지는 이야기처럼 선덕여왕은 자신이 죽을 날짜를 알아맞추었다고 전해지는 것 또한 사실 여부를

떠나 그녀를 '여신'으로 숭상한 흔적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선덕여왕이 스스로 정한 묘지인 낭산(狼山)에 모셔진 선덕여왕능이 '도리천(桃利天 또는 ?利天) 여신'의 의미로 숭상

되었다는 사실이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대왕이 선덕여왕능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워 주었다.

이 사실은 도리천(?利天) 앞에 사천왕상을 세운 것을 의미한다.

사천왕상은 지존의 대문울 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문무왕 자신도 선덕여왕을 '여신'의 의미로 새겨 그녀의 왕릉 앞에 그렇게 사천왕사를 세운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선덕여왕능을 도리천(?利天) 여신의 자리로 보고 그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운 것이다.

 

이것은 포석사(포석정) 사당에 모셔진 법흥왕상과 그의 후실 옥진(玉珍)상 가운데서 신라인들이 옥진상을 더 높은 위상에 놓고 

법흥왕상에게보다 먼저 절을 한 것과 같은 의미이며, 법흥왕 자신도 그의 후실이었지만 옥진(玉珍)부인을

'신'으로 여겼다고 <화랑세기>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신라의 여신 숭배는 남자 왕들이 몸소 실천한 종교였던 것을 볼 수 있다. 

 

신라에서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 신라에서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 그들이 신(神)으로 받든 인물들은 모두 옥진(玉珍)과 선덕(善德) 여성들이었다는 것은 지금까지 조명을 받지 못해온 신라의 여신신화의 역사적 배경들이다.

포석사(포석정) 사당의 신주로서 법흥신상보다 더 상위에 있었던 옥진과 '도리천' 선덕여왕릉의 주인공으로서 선덕여왕, 이들 두 '여신들'은 신라의 여신숭배의 극치를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신라시대에 왕은 신과 같은 위치에서 숭상하여 왕의 행차가 지나갈때까지 엎드려 국궁(鞠躬)했다.

경상도에서는 지금도 뻐꾸기를 '국꿍새'라고 하는데 그 우는 모습이 지나가며 바라보는 사람들이 마치 신(神)이 된 것처럼 국궁(鞠躬)하는 모습으로 보였기 때문일까?

 

사료들에서 신라 시조 박혁거세 신궁이 국궁(國宮)으로도 불렸기 때문에 나는 '박혁거세'가 '뻐꾹새' 음운과 같은 의미의 '국꿍'이 되기 때문에 뻐꾹새를 영남지방에서만 지금까지 '국꿍새'라고 부로고 있다는 글을 쓴 바 있다.

 

신라가 망하면서 신라인들의 국궁에 대한 숭배는 제어를 당했겠지만 신라인들의 후예들은 그들의 어린 아기들에게 '국궁'에 대한 오랜 숭배와 전통을 새겨주려 어릴 때부터 '까꿍!'이라고 가르쳤다고 생각한다.

'까꿍'의 어원은 '국궁' 즉 '뻐꾹새 - 박혁거세' 신궁(국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선덕여왕을 여신으로 숭배한 내용은 지귀(志鬼)라는 걸인 이야기에서도 나온다.

얼굴이 추한 지귀는 선덕여왕을 숭배하여 밥을 얻어먹을 때마다 먹기 전에 밥그릇을 앞에 두고 두손모아 선덕여왕을 위하여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런 지귀가 분황사(芬皇寺)가 완공되던 날, 선덕여왕이 행차를 하는데도 국궁하지도 않고 남들과 달리 고개를 들고 혼자 왕을 바라보며 미소로 흠모했다.

그날 분황사에 당도한 선덕여왕이 불상 앞 중앙에 앉고 금로(金爐)에 백단향(白丹香)을 꽂고 국태민안을 기도하는 엄숙한 분위기였다.

그때에 갑자기 지귀(志鬼)가 앞으로 나오며 '선덕여왕 만세'를 외쳤다.

호위병에 밀려 그 자리에서 귀지가 죽었다.

 

자초지종의 이야기를 들은 선덕여왕은 향목수(香木水)를 가져오게 하여 친히 그 지귀 시신의 얼굴을 씻어주었다. 더불어 옥교(玉轎) 가마 안으로 들어가서 속옷을 벗어 지귀의 가슴에 덮어주게 하고 자신의 옥가락지를 빼서 지귀의 가슴 위에 얹어준 다음 후한 장례를 치뤄주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이 황진이 설화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있는 것은 '여신'이 세상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우리 민족의 숨어 있는 여신 신화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고 하겠다.

 

황진이 이야기에는 그녀를 사모하다 상사병으로 죽은 시신에 향목수(香木水) 뿌리는 이야기는 없다. 그

러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드라마 <선덕여왕>에는 물 장면이 많이 나와야 한다.

드라마 속에 나오는 제사하는 장면에서는 특히 포석정 모양의 원형이며 바다의 여신 상징인 전복조개도 등장해야 보다

신라인들의 신화의식에 접근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화랑의 우두머리 문노가 제사를 하는 장면의 사진을 언론을 통해서 보았다. 문노는 유상곡수가 흐르는 포석사(포석정)에 모셔진 신주의 하나였는데도 물과는 관계없는 농경시대의 곡식 제물들만이 등장하고 있어

너무나 '드라이한' 드라마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적어도 전복조개 껍질로 술을 따르는 장면이 들어간다면 더욱 신화적인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moono.jpg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문노가 제사하는 장면.

곡식만 있고 전복조개 등의 바다의 여신에 제사하는 이미지가 없다.

문노는 화랑의 지도자로서 죽어서는 포석정에 모셔진 신주 하나이기도 했다. 

 

비너스(아프로디테) 여신이 태어난 가리비조개 또는 신라의 포석정을 닮은 전복조개는 바다를 상징한다. 신라에도 분명 바다 조개의 신화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의 무속 의식에서 전복(Sea-ear, ear shell, abalone)은 앞선 글에서 논한대로 바다의 색갈을 두루 가진 '바다의 상징'으로 된 신비한 조개로 받아들이고 있다. 조개는 고대 로마 그리이스 문명에서 화폐에도 새겨졌다.

기독교의 세례 물그릇으로 사용되어 온 가리비조개의 양 껍질은 그리이스의 아프로디테(비너스) 신상에서 천사의 양 날개처럼 표현되기도 했다.

  

*가리비 조개 모델의 서양의 은제 접시. 세례 물그릇을 의미한다.

SILVER PLATED SHELL SHAPED SERVING DISH

 

 

 

*고대 그리이스 가리비조개 문양 은화.

 Greek scallop shell coin.

바다의 신화적인 여러 문양들이 가리비 조개를 바탕하고 있다.

 

Second-century BC Greek terracotta from South Italy of Aphrodite flanked by cockle-shells

*가리비 조개를 천사의 날개처럼 단 그리이스 신화의 아프로디테. 2세기 BC 

2nd-century BC Greek terracotta from South Italy of Aphrodite.

   

조개 숭배 가운데서 개오지조개는 특히 여성 심볼을 닮은 생김새 때문에 신화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고대 화폐는 종교적인 숭배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날도 사회적으로 숭앙되는 인물들이 화폐에 새겨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여신의 성적 심볼을 닮은 개오지조개(caurie shell)는 고대 중국, 인도, 태평양제도, 아라비아, 아프리카 등지에서 화폐로 사용되었다. 아프리카의 어떤 지역은 20세기 중반까지도 개오지조개가 화폐로 사용되었다. 

사극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만두만한 중국의 전통 돈인 은전은 개오지조개를 닮게 만들었다. 

 

 

 *개오지조개 자패(紫貝). Cowrie Shell Cypraea moneta

중국 고대 사회에서 오랫동안 화폐로 사용되었다. 

 

*상(商) 시대의 고분에서 나온 개오지조개

http://www.calgarycoin.com/reference/china/china1.htm

 

carved shell cowry

 

bone cowry imitation

 

*조개 또는 뼈로 만든 개오지조개 모방 화폐가 주(周)나라 때에 사용되었다.

http://www.calgarycoin.com/reference/china/china1.htm

 

 

조개 대한 신화적인 의식은 신라인들만의 신화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당나라 원종에게 바쳐진 대합조개 안에서 관음상이 나왔다는 중국측 기록이 있다. 이러한 동아시아 같은 시기의 신화적 기록은 신라의 포석정이 전복을 닮아 있는 것이 신라의 여신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개연성을 높여주고 있다는 주장은 이제 포석정을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하게 해줄 것이다.

 

조개에 대한 신화적인 숭배는 세계 각 지역의 원시 문명사회에서 나타난다. 

페루에서 발굴된 1천 5백년 또는 2천년 된 페루 원주민들의 은과 구리 합성 가면의 눈과 입 부분에는 자개를 사용했다. 그것은 인간의 얼굴에서 하얀 눈과 하얀 이빨을 전복처럼 '신체 내부의 자개'로 인식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 1-3세기 AD 페루 원주민들의 은 구리 합성 가면의 눈과 입에 쓰인 자개.

Ornamental mask, 1st?3rd century. Peru; Moche. Silvered copper, shell

 "Half-eyes" and the fanged mouth, with its original shell inlay,

 

*페루에서 발굴된 1500년 된 구리 가면

Tomb of the Moche culture in Peru.

 조개껍질로 눈과 얼굴 부분을 조성하고 있다는 것은 조개껍질 숭배의

결과라 할 수 있다.  

 

 

*2천년 전의 메소 아메리카 조개 가면. 멕시코 서부 콜리마 지역에서 출토
Colima Shell Mask. Western Mexico. 00 BC to 300 AD

http://www.artfromancientlands.com/index.html

 

조개에는 흰 조개가 최고의 의미를 부여받았다. 그것은 신라인들의 여신이 흰 색으로 칠한 것과도 연계성을 지닌다.

 

힌두교 의식에서 소라고둥을 불 때 특히 흰 색의 소라고둥 나팔로 최고의 브라민 신을 위하여 불었다. 십우도에서 나오는대로 흰 소 즉 백우(白牛)를 신으로 받들었던 고대 인도인들의 그 색은 바로 태양의 흰 빛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신라의 선도성모상은 흰 색으로 칠하는 전통은 불교사찰 또는 마애보살상으로 남아 있는 여러 곳의 흰 색의 '관음보살상'에 남아 있다. 

예를 들어 내소사(來蘇寺)의 백의관음(白衣觀音) 보살상은 흔히 신라의 선도성모 즉 '사소성모상(娑蘇聖母像)'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래서

'사소성모(娑蘇聖母)'가 왕림하였다 하여 내소사(來蘇寺)라고 이름지었다는 것이다.   

 

*변산반도 내소사(來蘇寺) 백의관음(白衣觀音) 보살상

신라의 선도성모 즉 사소성모상(娑蘇聖母像)이라고 전한다.   

 

내소사 대웅보전에는 좌우로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보좌하고 있는 석가불좌상 뒷벽에 '백의관음(白衣觀音) 보살상'이라는 벽화가 숨어 있다. 백의관음 그림이 불상의 뒤에 밀려난 채 있는 모습은 본래 이 신상이 신라의 선도성모 여신상이었을 개연성을 높여준다.

 

흰 가운을 가슴에 맨 모습은 마치 비너스 여신이 가리비 조개 두 쪽을 연결한 것으로 보이며, 그 안에 '비너스 여신'이 있는 모습처럼 보이기에 알맞다.

힌두교나 신라의 선도성모상이 흰 색으로 자주 묘사되는 것은 조개의 안쪽 자개부분을 의미한 것이라 생각된다.

 

서울 홍은동 보도각에도 신라 때로부터 내려오는 흰색을 칠한 마애관음상있다. 그 모습은 여신상으로 보이기에 족하다. 월출산 무위사의 흰색 관음상도 마찬가지로 백의의 여신상이다. 이러한 후대의 불교적 칭호를 붙인 '백의관음보살상'은 사실은 '흰색의 여신상'이라고 해야 바른 표현일 것이라는 것은 그 흰 색이 신라인들의 태양숭배에서 일광을 '흰 빛'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muwisabosa.jpg

*월출산 무위사 백의관세음보살벽화 (보물 1314호
관음상들 가운데서도 특히 흰색 옷을 입은 '관음상'은 선녀처럼 옷을 많이 입었다는 것은
신라인들의 여신 선도성모(신선도가적 복숭아 선녀) 여신의 의상으로 볼 수 있다. 

*석조관음보살좌상(石造觀音菩薩坐像). 경북 고령 개포동.

유형문화재 제118호

흰 색을 칠한 흔적으로 보아 신라의 백의의 선도성모상(또는 서왕모)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 홍은동 옥천암 보도각의 '백의관음상'
고령 개포동의 흰색을 칠한 관음석상과 그 모자도 닮아 있다.
 
서울 홍은동 옥천암 보도각의 '백의관음상'의 일광관(日光冠)을 보면 그 자체가 팔작지붕이면서 가리비조개를 닮아 있다. 
전통 팔작기와 지붕의 옆면의 삼각형 합각부 및 기와 아래 벽면에는 주로 흰 색의 회칠을 한다. 몸체에 그렇게 흰색을 칠한 것은 
기와지붕이 자개조개의 겉이라면 그들 흰 회벽들은 자개조개 안쪽에 있는 흰 색을 주로하는 자개 모양을 상징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주로 커다랗고 둥글게만 표현하는 '관음상'의 광배는 가리비조개 또는 전복조개이며, 그 의상의 흰색은 선녀 여신의 옷이면서 동시에 바다의 전복조개 또는 가리비조개의 화려한 자개 문양을 대표하는 색갈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배경이 자개 문양처럼 보이는 백의의 여신상
엘리자베스 키이스(Elijabeth Keith)가 1920년대에 그렸던 흰색 여신상(White Buddha).
홍은동 백의관음상일지 그 시기에 더욱 남아 있었던 지리산 선도성모상이었을지는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우리민족이 '백의민족'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태백산의 흰 눈 덮힌 산신의 의미를 부여한 고려왕조시대의 영향에만 멈출 것이 

아니다. 신라시대의 바다의 조개껍질과 관련하여 선도성모상의 흰 색에서도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특히 바다의 여신 숭배에서

햇빛은 흰 색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해'라는 말은 '희다'는 말로서 우리 고어에서 같은 뿌리에서 비롯하고 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흰 색이 여신과 관련되어 있다는 내용은 앞서 언급했지만, 선덕여왕이 옥문지(玉門池)에서 개구리가 3-4일간을 우는 현상을

보고 백제군의 기습을으로 알아차리고 미리 물리친 이야기에서도 나온다.

 

선덕여왕 자신이 그 예견에 대하여 설명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옥문(玉門)이란 여성의 치부인 여근(女根)을 말하고 여자는 음(陰)이니 그색이 희며 흰색은 서쪽을

의미한다" 그래서 서쪽에 있는 백제군이 여근곡(女根谷)에 숨어 있음을 알고 수색하여 물리치게 했다는 것이다. 

서쪽이 흰색 백제라는 것은 앞서 언급했지만,

아마도 신라인들은 좌청룡 '큰 뱀' 신라에 우백호 백제 '개구리'로 보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음(陰)이 흰 색이라는 것은 태양의 신 즉 해의 빛이 희다는 것을 말한다.

태고의 신화시대의 태양은 오히려 여신이며 음이었다. 우리의 전래 동화인 해순이 달순이에서도 해는 여성적이다.

선덕여왕이 '흰색은 서(西)를 의미한다'고 말한 것은 오방색에서 좌청룡 우백호의 서쪽 색이 흰색이기 때문이며, 

여신인 서왕모(西王母)도 그래서 흰 색으로 칠하는 것이다.

선도성모상을 흰색으로 칠하는 것은 이러한 신화적인 배경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나는 신라인들의 흰색의 선도성모 여신 숭배와 관련하여 포석정의 '전복조개'가 신라 왕들(당시에 그들은 신으로 숭배되었다)의

하얀 이(치아)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민족의 한 갈래가 고대에 아메리카로 건너가 인디안들의 조상이 되었다.

까마귀를 태양새로 숭배하는 카나다 밴쿠버의 인디안들의 까마귀 토템 신상의 마스크에는 그 이빨에 삭개(?蓋) 자개 장식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신라 역사에서 또 하나의 단초를 찾아낼 수 있다. 석탈해의 흰 이빨이다.

 

석탈해 니사금은 이빨 비교로 왕이 되었다. 이빨을 단지 현대문명의 감각으로 '나이 수 헤아리기'로만 볼 수 없는 것은 아메리카

인디안들이 이빨과 눈알을 자개로 표시하고 있는 중요한 신의 '내부 살'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개 신화에서 조개의 흰 색은 자개조개의 안쪽 자개를 의미하며 대단히 신성한 신의 뼈를 말하기 때문이다.

신라에서 '골품제도'라는 것은 뼈의 품격을 의미하는 말이란데서도 뼈와 이빨 등은 왕권에 직결되어 있었다는 신성한 상징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하얀 이빨은 석탈해 왕의 등극에서도 중요한 신화적 이미지로 작용했다고 보여진다.

 

*카나다 밴쿠버의 인디안 까마귀 토템 신상 마스크.
이빨에 흰 삭개(?蓋) 자개 장식을 했다.
Tlinkit Indian Raven Mask with teeth made from Astraea gibberosa opercula.
(Campbell River Art Museum gift shop, Vancouver Island, British Columbia,
Canada)

 

북미 인디안들의 문화에는 우리민족의 고대 풍습과 유사한 내용들이 수없이 산재해 있다. 필자는 오랜 세월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인디안들의 축제에도 참여하고 그들을 코리안 커뮤니티에 초청하여 비교문화 이벤트를 서로 나누어 오고 있다.

 

북미에서 팔레오 인디안(Paleo-Indians)들은 12,000년 전부터 거주해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거주한 종족들의 각 시대에 따라 그 뒤에 아르카익 시대(Archaic 8000?1000 B.C.), 우드랜드 시대(Woodland 1000 B.C.?1000 A.D.),

그리고 미시시피 인디안 시대(Mississippian 1000?1600 A.D.)로 구분되고 있다.

 

1천년 전 미시시피강 인디안들이 조개껍질에 삼태극을 새긴 것은 우리민족의 자개 문화와 유사한 '자개 삼태극 문양'이다.

인디안들도 대자연을 '어머니 신'으로 숭배해왔다. 그들은 아직도 깃털절풍 복식으로 제의적 축제를 한다.  

 

조개 껍질로 미시시피 인디안들이 만든 삼태극 판은 거의 1천년 전의 것이라는데서 통일신라시대와 같은 시기의 머스코기인들(Muscogee people)의 것이다.

그들은 현재 남아 있는 체로키 인디안들보다 먼저 와 있던 테네시강 인근에 살던 인디안들이다. 

 

아래의 '자개 삼태극 문양'은 팔괘와 같은 원 안(內行八花紋)에 그려져 있다는 면에서 그 시대의 '천문도'를 자개에 새겼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양은 동아시아의 청동 거울에서 많이 나타나는 문양이다.

나는 신라인들의 조개신화의 유물들의 부족을 북미 인디안들의 유물들에서 보완 감상하고 수집하고 있다.  

 

체로키 인디안들이 가슴에 걸고 다니는 조개 방패목걸이 문양에서 포석정의 물돌이 '유상곡수'를 느낀다면 어떤 판단을 해야 할까. 

 

File:Castallianshell.png

*1천년 전 미시시피 인디안들의 내행팔화문(內行八花紋) '자개 팔괘 삼태극' 문양

Mississippian art, carved from seashell, unearthed in Middle Tennessee.

http://www.answers.com/topic/tennessee

 

*장의자손 (長宜子孫) 내행팔화문경(內行八花紋鏡). 낙랑지역

용산 국립박물관 소장.

 

*미국 테네시주 체로키 인디안들이 조개 자개로 만든 '만다라' 가슴방패 목걸이.

내행팔화문(內行八花紋)둘레는 태양소라고둥(sunburst star turban) 문양에

돌아가는 물길 모양의 문양은 '포석정'의 유상곡수 이미지와 유사하다고 생각된다.

http://www.statemaster.com/encyclopedia/Mound-builder-(people)

 

*포석정은 신라의 국가적 '조개방패 목걸이'의 상징이었을까?

 

체로키 인디안들의 조개 방패목걸이는 포석정의 물돌이처럼 돌아가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 조개방패 목걸이를 가슴에 달고 다니면 재앙을 막는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이것은 신라인들에게 '전복조개' 포석정이 신라의 국가 재앙을 막아내준다고 믿었을 개연성을 높여줄 방증이 된다.

포석정은 전복조개 모양이며 그 이름도 전복 포(鮑)가 들어가는 포사(鮑祠)로 칭하기도 했다. 포석정은 그 모양에서도

두 물줄기 끝은 어쩌면 '전복조개 방패'를 목에 거는 '목걸이 끈 부분'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본다.  

 

이러한 팔각 문양의 인디안 조개 '만다라'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발굴되는 내행화문경(內行花紋鏡)의 동경에서 볼 수 있다.

인디안들의 '삼태극' 문양은 태양을 상징하는 원 안에 '삼족오'의 이미지로 새겨 둔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삼태극 둘레 밖에 팔괘와 같은 둥근 여덞개의 점들은 8행성들을 의미하고 그 사이마다 10개 내지 12개의 작은 점들은 밤하늘의

무수한별들(28숙과 같은)을 그린 것으로 해석한다.

 

동시에 이러한 우주의 형상은 조개의 겉모양과 바닷물에 닳은 조개 내부의 문양 모양을 닮아 있다는데서 바다와 하늘을 하나의

짝으로 보았던 신화시대의 종교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조개는 하늘의 별과 같이 보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바다와 태양신화에서 새는 한 세트의 신화적 구조이다.

'까마귀(현조)'가 주로 등장하는 우리민족의 태양새는 북미 인디안들에게도 까마귀가 등장하고 독수리도 등장한다.

그런데 우리민족은 왜 독수리 신화가 없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 지 모르나 우린 신화에서의 독수리는 '솔개'가 있었다. 

 

우리민족의 신화에서 하늘의 태양을 잡아먹는 세 가지 개(안개, 번개, 무지개) 에

두 가지의 개를 더 보탤 수도 있는데, 그것은 연개(연기의 옛말)와 솔개(독수리 또는 매종류)이다.

 

연개가 안개, 번개, 무지개처럼 수분현상과 관련된 것으로 태양빛을 가린다.

솔개는 까마귀처럼 흰 햇빛에 대하여 검은 메신저 역할을 한다.

'솔개'는 고대 투르크(현재 터어키) 말에서도 같은 음운의 '솔개'라는 것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인디안들에게 우리도 태양새(sunderbird)로서 독수리가 있다고 '솔개'를 소개할 수 있다.

 

이러한 아메리카 인디안들의 '자개 마스크', '자개 천문도판' 등을 볼 때, 조개와 그 관련 문양들은 고대 우리민족의 원시사회에서 우주의 심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조개와 우주에 대한 옛날 인류 문화의 우주관을 이해하기 위하여 조개들이

가지는 형상들과 하늘의 태양 그리고 별들의 모양을 비교하면 대단히 신비하게 일치성을 가진다. 

 

*자개 빛이 비치는 태극 문양을 닮은 '태양 뿔 소라조개'(sunburst star turban)

astraea  heliotropium

http://museumfs.ccbb.re.kr/natural_bakmul/shell/search/atoz/html/a043-d.html 

  

*태양을 닮은 태양 뿔 소라 고둥 (Sunburst Star Turban)

Astraea heliotropium (Martyn, 1784)

 청동거울의 내행화문(內行花紋) 또는 파형동기(巴形銅器)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파형동기(巴形銅器)(왼편). 가야시대. 국립김해박물관

 

*파형동기(巴形銅器) 거푸집(?型)

사가현(佐賀?) 요시노게리(吉野ヶ里) 발굴. 야요이시대(?生時代) 후기. 

거미조개(水字貝 spider conch) 소라를 모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위쪽 사진의 태양뿔소라고둥(Sunburst Star Turban)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거미조개(水字貝, spider conch)

 

2008년 KBS에서 방영한 바도 있지만, 태양을 닮은 파형동기(巴形銅器) 문양은 거미소라 (水字貝, spider conch. Lambis chiragra)

고둥을 본뜬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태양소라고둥(Sunburst Star Turban)) 모양과 더 닮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조개는 동아시아 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고대 인류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문화인류학적 신화종교학적 상징이었다.

  

*고대수메르인들이 화폐로 사용한 조개
고대 화페들은 금을 비롯하여 종교적 의미를 겸하고 있었다.
현대 화폐에도 최고 숭앙받는 인물들이 그려져 있다.

 

'조개'는 요즈음 단지 여성의 심볼로 속화된 속어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내용에서는 분명 신화적인 전통이 숨어 있다.

 

바다와 여신과의 관계는 달의 인력과 관련하여 썰물 밀물이 생기며 여성들의 월경에 영향을 직접 주는 것에서 바다의 여신 숭배의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바다 여신의 '심볼' 모양을 하고 있는 전복조개의 성적인 형상은 다른 조개들과는 달리 그 자개의 화려함에서 하늘의

채운(彩雲) 또는 무지개와 오로라 등의 화려한 오색찬란한 신비한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속에서 아름다운 진주까지 생기니 신화의 주인공이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그들의 종교적 제의에서 소라고둥을 불었던 것은 우리 민족이 조선시대까지 왕의 부음을 소라고둥으로 불어 알렸던 것과 같은 역사종교문화적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조개는 선사시대 종교에 중심 역할을 해왔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곳에서 사랑이나 득남 장수 등의 행운의 심볼로 여기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조개껍질에 대한 주물(呪物 Shells fetishes) 숭배의 전통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북아메리카 인디안들 가운데서 찾아진 오대호 인근의 오지브웨(Ojibwa) 인디안들 사회에서는 전통 치유사들의 거룩한 엠블렘이

조개로 되어 있기도 하다. 

 

인도의 힌두교에서는 비쉬뉴 신이 들고 있는 지팡이 봉이 투르비넬라 조개(Turbinella, "Chank")로 되어 있다. 

뉴기니아섬의 원주민 사회에서 개오지조개 껍질을 중심한 조개 장신구들은 그 기능적인 면에서나 모양에서 불교나 캐토릭의 염주 목걸이를 연상하게 한다. 

 

Shells have played a central role in religion from prehistoric times on. 

Dominating early religious practices, cowry shells (Cypraea) had powerful symbolism

(basically sexual, for they were first and foremost a female symbol) and this

was renewed in the religions of the great civilizations that followed. The presence of

shells in prehistoric burial places indicate that their symbolic power was believed to

continue beyond life. Shells in some cultures even today are used as amulets,

good luck charms, and as symbols for love, fertility and life eternal. http://www.manandmollusc.net/advanced_uses/religion.html

 

*뉴기니아의 원주민들에게 개오지조개는 신성한 종교적 상징이 되어 있다.
(사진생략) 
 
*'조개만다라'라고 할만한 개오지조개를 등에도 걸치고 있다. 뉴기니아 원주민
(사진생략)
 
조개에 대한 신화적인 숭배는 고대 그리이스의 정치에서도 반영되고 있었다.
이른바 오스트라시즘(Ostracism)이라는 것은 깨진 토기 파편이나 조개껍질(ostracon)에다가 제외시켜 추방해야 할 인물들의 이름들을 써서 항아리(urn) 안에 넣어 투표하는 것이었다. 조개껍질을 항아리에 넣는다는 것은 따개비 조개가 인어신화에서처럼 암초에 모여드는 이미지이다.
 
오스트라콘(ostracon 복수는 ostraca)이라는 말은 조개(shell) 또는 깨진 토기의 사금파리 파편을 뜻하는
그리이스어의 오스트라콘(ostrakon)에서 나온 말로 그 제도를 오스트라시즘이라고 한다.
이러한 고대 그리이스의 사회 신화적인 문화는 조개껍질에 대한 종교적인 믿음을 바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Trust in Shell'의 사회적인 믿음이 형성되어 있었을만큼 그들이 태어나게 한 바다의 여신이 태어난 
가리비 조개에 대한 신화적인 컨소시엄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조개껍질에 사회에서 정치적으로 격리시켜야 할 인물들을 적어서 항아리에 '비밀투표' 했던 오스트라시즘은 아마도
'네가 태어난 신의 이름으로 비켜나 있어라'고 하는 의미가 그러한 조개껍질 투표 의식의 배경이었지 않았을까?
 
*오스트라시즘에 사용된 오스트라카
 
기원전 510년 참주(僭主)정권이 무너진 뒤에 다시는 그러한 독재적인 참주가 나타나지 않도록 그리이스의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의 방법으로 이러한 오스트라시즘을 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매년 1회씩 참주(Tyrant)를 욕심내는 사람들의 이름을 도편(陶片)이나 조개껍질(오스트라콘)에 새겨 투표해서 10년간 국외로 추방하되 재산은 몰수하지 않았다고 한다. 6,000표를 넘어서면 추방이 되도록 했다.
 
이러한 오스트라시즘 투표는 기원전 487-485년에 처음으로 실시되었으며 그 장소는 아고라(Agora)에서 행해졌다.
그 시행에서 데미스토클레스, 키몬 등이 추방당했다.
그러나 결국 정쟁의 방편으로 남용되어 5세기말부터 더 이상 이러한 제도는 유지되지는 않았다.
 
오늘날 인터넷 다음카페의 그 이름까지 같은 '아고라'등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낙선운동'은 과연 코리안 스타일의 오스트라시즘의 현대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 결과 한 두해씩 해외에서 지내다 돌아오는 정치인들이 있는 것을 보면 고대 민주정치나 오늘날의 정치와 오십보 백보라는 면이 있다고 하겠다.
 
조개신화도 그렇게 신라인들의 신화에서부터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자개문양만큼이나 화려하게 남아 있다.
포석정의 전복여신은 우리들에게 지금 속삭인다.
여신 신화 전통과 조개 신화의 전통문화에는 추방하는 오케스트라시즘을 사용하지 말라고.
 
자연 사물 이미지가 인류문화에 적용된 유사 형상들을 살펴 보면 고대 인류의 많은 암각화의 그래픽들은 조개 형상에서 비롯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팔작지붕 기와지붕이 가리비 진주조개 껍질 형상의 신화적인 연계성이 있다.

별(☆), 태극마크, 소라고둥 나팔, 卍자(스바스티카)자 바벨탑과 같이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탑이나 여러 층의 옥개석을 가진 탑(塔), 구멍 뚫린 방울 등은 조개껍질 모양은 물론 그 조개껍질이 닳았을 때 그 조개 구조의 내부 모양과 관련이 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신화시대의 원시 고대인류는 바다와 하늘을 조개의 양쪽 껍질이 합해진 상하 양면으로 보았다.

"저별은 나의 별"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젊은이들에겐 '저별은 나의 별, 저 조개도 나의 조개"라고 노래했을 것이다.

 

 

*소라고둥(tun shell)
세계 전역에 걸쳐 종교제의에 쓰인 조개 나팔

*장독대 또는 부도 등의 옹기 이미지를 주는 고둥

*앵무조개(nautilus shell) 단면도

 

卍자를 닮아 있다. 

파도에 닳을 경우 원시 인류들도 이와같은 조개 문양을 보았을 것이다.

북두칠성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도는 '가마' 모습이 된다.

 

*갤럭시를 닮은 조개 '야카 별 터번' 조개.

Yoka Star Turban

Guildfordia yoka (Josseaume, 1888)

  

*종교적인 건축물의 돔 또는 인디안 티피(tipee)의 유래는 조개의 나선형에서

유래했을 수 있다.

마이산의 돌탑 등은 이러한 고대 원시 신화의 소라조개 형상의 신화적 배경에

이어져 있을까. 

 

 

*소라고둥(snail shell)

세계의 모든 암각화에 나타나는 나선형 마크가 그래픽화된

태극마크, 삼태극, 卍자 등의 유래는 소라 조개의 나선형이 그 원형이었을

것이다.

 

가리비조개에서 태어난 비너스 여신은 금성(Venus)이기도 하다.

전복 모양의 사당인 포석사(포석정)에 신라의 성골 왕족들이 드나들며 길례를 행했던 것은 신라인들의 '전복조개 여신 숭배'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신라인들이 금성(金星)을 숭배한 것도 가리비조개의 여신 비너스 여신숭배와 같은

'바다와 하늘'의 짝신화를 보여주는 일치성이 있다.

 

신라의 골품제도(骨品制度)의 골(骨)은 바다의 여신의 골(骨)의 의미를 가진 조개의 뼈 특히 전복조개 껍질과 관련이 있었다면?

전복조개 안의 자개와 진주(眞珠)는 골품에서 진골(眞骨)의 의미가 있었다면?

최고의 계층인 왕족인 성골(聖骨)은 하늘(星)과 바다(海)의 두 거대한 전복조개의 천지의 거룩한 갑각(骨)을 의미했다면? 

 

역사적 문헌이 해결하지 못할 때 신화는 그 시대의 신화적 상상력을 타고 그 사실에 접근을 시도할 수 밖에 없다. 그러한 접근이 다른 많은 방증들에 의하여 증명된다면 그것은 과학적 논증으로 타당성을 받는 것이 학문세계이다.

 

태양이 해중능 위로 뜨는 것은 왕들이 호국신룡이 되어 신라를 지키기 위하여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의미한다. 그것을 지켜보는 석굴암 그로토 안의 여신은 바다의 신(神)임을 의미했다고 할 수 있다. 동짓날 해돋는 방향을 바라보는 석굴암 본존불은 본래는 선도성모상이 모셔졌던 곳이 아니었을까?

 

서라벌의 옥녀봉(玉女峰)에서 첨성대를 지나 반월성을 이어 해중능(대왕암)을 잇는 동짓날 해돋는 향동지일출(向冬至日出) 방향은 신라인들의 새해가 다시 솟아오르는 또다른 황도(黃道) 즉 '성모일광도(聖母日光道)'였다고 추정된다. 

 

비너스 여신이 태어났다는 가리비조개(scallop shell)는 바다 자체를 말하며 동시에 비너스 여신 자신이 바다임을 말한다.

선덕여왕이 '성모일광도(聖母日光道)' 선상에 묻히고 이어서 문무대왕이 신라를 지키는 호국신룡이 되겠다고 하여 바다의 무덤인

해중능에 묻힌 것은 그 자신이 태양의 신이 되는 것을 말하며 바다의 여신 성모의 품 안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waves.jpg

*가리비조개처럼 밀려오는 백사장의 파도모양

비너스 여신이 태어났다는 가리비조개(scallop shell)는

바다 그 자체의 운행을 말하며 비너스 여신 자신이 바다임을 말한다.

 

이 글의 모두에서 우리의 역사에서 '해신(海神'에 대한 내용이 별로 없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우리의 해신(海神) 이름 하나는 확실히 알고 있는 것도 좋을 것이라 생각되어 신라의 해신(海神)의 이름을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도 좋을 동아시아 해신이었던 신라의 해신

그 이름은 '신라명신(新羅明神)'이다.

그 성별은 여성이며 여신이었다. 

일본인들은 지금까지 '신라대명신(新羅大明神)'이라 불러오고있다.

 

이 유명한 동아시아 최대의 '인기 바다의 여신'인 '신라대명신(新羅大明神)'은

당나라와 송나라 즉 중국에서는 무엇이라고 불렀을까?

당시에는 민간에서

'신라대동신(新羅大東神)'이라고 불렀을 법한 '東神聖母'이다.

 

그 기록이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이 송(宋)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 송나라 관헌이 안내하여 가본 사당에서 본

동신성모상(東神聖母像)이다.

이들 송나라의 동신성모상(東神聖母像)과 일본의 '신라대명신(新羅大明神)'은

같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신라의 바다의 신이며 해신 성모여신이다.

사실상 그 시대의 '동아시아 해신'이었다.   

 

일본승려 엔닌(圓仁 794∼864)과 엔친(圓珍 814∼891)이 각각 당나라를 다녀올 때 바다에서 기원했던 신이

'신라대명신(新羅大明神)'이었으며,

1995년 아사히 텔리비젼 사극에서도 '新羅大明神' 깃발이 방영되었을 정도로

일본의 역사 속에 숨을 쉬는 신라의 해신이 '신라대명신(新羅大明神)'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

<삼국사기>에서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부식이

그곳에서 보았던 동신성모상(東神聖母像)이 신라의 여신이라고 하지만,

그렇게만 설명해서는 송나라 신으로 보이기에 알맞다.

 

왜 동신성모(東神聖母)가 송나라에 있었을까?

 

그리고 나중에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도 보았다고 기록했다. 

사대주의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그 동신성모상(東神聖母像)이 송나라 신인데 고려에 강제 신앙하게 한 것일까 의혹을 가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명확히 신라의 해신이었다. 

 

신라 때에 많은 신라인들 일본인들이 당나라 유학을 다녀오면서 또는 당나라 상인들과 사신들이 신라와 일본을 오가면서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 그들은 기원을 바다의 여신에게 기원을 했다.

엔닌과 엔친의 기원은 그 역사성을 그대로 일본에 남겨놓고 있다.

그들이 빌었던 바다의 신이었으며 신라의 해신이었다. 

모든 신은 '이름'이 중요하다. 기도를 하려면 신의 이름이 없이는 기도가 되지 않는 법이다.

 

신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신통력이 있는 신이 크게 유행하게 된다. 신라인들이 가졌던 남다른 바다의 여신 숭배는 신라가 바다의 태양신을 국가적으로 왕실에서 믿었던 것에서 비롯한다. 특히 바다라면 태양신을 믿는 신라신이 유명했다고 할 수 있다.

 

태양은 풍랑을 헤쳐가야 하는 바다 항해에서 최고의 지존이다.

바다의 기도란 태양이 '쨍!' 떠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태양은 그 자체가 신이 되는 곳이 바다이다.

그러니까 태양신을 남다르게 숭배한 신라의 신은 바다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큰 기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의 바다를 논할 때 '해상왕' 장보고만 들먹일 것이 아니라 그 같은 시대, 같은 바다에

신라의 '해신'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말자.

송나라와 왜나라에서

그토록 숭상하던 바로 그 동아시아의 해신, 신라 해신 말이다.

 

그 신라 해신의 이름이 일본인들에게는 '명신(明神)'이었고 중국인들에게는 '동신(東神)'이었다.

 

당나라 상인들에게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송나라 사람들에게는 신라가 동쪽에 있으니 '동신(東神)'이라 불렀다.

'동신(東神)'이란 '동쪽 신' 즉 아침에 뜨는 햇님신이다.

바다에서 아침의 맑은 하늘 뜨는 태양은 하루의 항해를 약속하는 분명한 신의 가호가 약속된다.  

 

신라(新羅)의 신인 당(唐)나라 상인들의 '동신(東神)'이 당나라 이후

송(宋)나라에까지 남아져 '동신성모상(東神聖母像)'이 모셔지고 숭상되었으며, 그래서 고려사신 김부식에게까지 그곳 현장에서

눈에 띄인 것이 <삼국사기>에 소개되어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의 이 애매한 부분에 대하여 이제 시원한 배경 설명이 되었다고 자부한다.

 

당나라 사람들 송나라 사람들 그리고 일본사람들이 동아시아 바다를 오갈 때에 그들은 각각 바다에서 '어머니! 살려줘요!'를 외치듯 신라의 태양신이자 바다의 신인 '명신(明神)'과 '동신(東神)'은 성모해신이었다.

그 칭호는 존대하고 거룩하게 성모를 붙여 '동신성모(東神聖母)'라고 했던 것이며,

일본에서도 아마테라스 여신을 말하지 않더라도 신라명신이 바다에서 기도할 때는 '명신성모(明神聖母)' 였을 것은 물론이다.

 

일본인들이 신라를 오가고 당나라를 왕래하면서도

신라의 바다의 신인 '명신(明神)'에게 빌었다는 것은

남해와 황해 동해의 그 바다 이름이 

'新羅海'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해와 일본해 싸움은 여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신라의 배를 빌어 신라의 해신에게 기원을 하면서 바다를 왕래한 일본승려 엔닌(圓仁)은 그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

'신라명신(新羅明神)'을 찬양하고 돌아가서도 그의 사찰에서 봉안하고 모셨다.

그의 여행기는 오늘날까지 한일 양국 국민들에게 동아시아 최고의 여행기의 하나로 읽히고 있는 것이다. 

 

엔닌(圓仁)이 신라명신에게 빌어 당나라를 다녀온 그 몇 십년 뒤에 엔친圓珍)이라는 일본 승려도 당나라 유학을 다녀왔다. 엔친圓珍) 또한

'신라명신(新羅明神)'에게 빌어서 무사히 바다를 건너갔다 일본으로 돌아온 것에 감사하여 '신라명신상(新羅明神像)'을 그의 절간에 모시기까지 하였는데 그 '신라명신상(新羅明神像)은 오늘날까지 전해져 왔다.

일본은 작년에 거의 반세기만에 그 엔친의 '신라명신상(新羅明神像)'을 공개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우리의 문화유산이지만, 돌아오지 않아도 될 자랑스러운 국보1호가 일본에 현재 남아 있는 엔친의

'신라명신상(新羅明神像)'이다.   

 

여기에서 신라의 해신이라서 일본의 역사에서는 나라 이름까지 넣어서 '신라대명신(新羅大明神)'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그만큼 바다의 해신으로서 신라의 명신(明神)이 바다를 오가고 바다와 깊이 관계를 맺어온

일본인들에게는 대대로 잊을 수 없는 신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신라대명신(新羅大明神)'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볼 때 신라인들은 '명신대성모(明神大聖母)'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할 수 있다. 

 

선도성모(仙桃聖母)라는 칭호가 '신선의 복숭아밭'이라는 의미이기에 육지에서 산신 칭호로 불리었던 칭호라면, 바다에서는 바다 풍랑에 필요한 직설적인 명칭 즉 '쨍!하고 해뜰' 바로 그 '밝을 明'자 '명신(明神)'이 더욱 친근하고 시급한 이름이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왜 '明'자를 쓰게 되었을까 짚고 넘어가자. <삼국유사>에서 박혁거세를 '혁거세(赫居世)' 또는  '불거내(弗矩內)'라고도 

했다는 그 '불거내'는 '붉은 해'이며 '밝은 해'를 의미한다.

그래서 '밝은 해'를 다시 그대로 의역하여 한자로 '명신(明神)'이라고 쓴 것이다.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일본 전역에 박혁거세 신사가 2천 7백여 곳이나 되었다는 기록을 보면,

바다를 오가야 할 여러 개 큰 섬으로 나누어진 섬나라 일본인들에겐 '신라명신(新羅明神)'에 대한 숭배의 역사가 남의 나라 이름까지 쓰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그렇게 오랫동안 기원의 해신으로 받아들여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바다를 오갈 때마다 언제나 '명신성모(明神聖母)님'에게 풍랑이 잠들기를 바라고 잠을 잘 때마다 다음날 아침에 태양의 신, '명신(明神)'이 임하기를 빌었을 것이다.

 

고려와 몽골이 쳐들어갔을 때 불었다는 그 '카미카제'의 '카미(神)'는 바로 신라의 바다의 신 '신라명신(新羅明神)'이었다는 것을 이제부터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태양을 뜨게 하는 바다의 신은 바람도 풍랑도 손에 쥐고 있던 바로 신라명신 아니었느냐 말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카미카제의 바람 이름보다 더욱 '신라명신(新羅明神')이 신사와 사찰 곳곳마다 모셔져 왔던 것이다. 

 

그러한 '신라명신(新羅明神)'이 신라의 명신임을 드러내되 '大'자까지 넣어 일본인들은 '신라대명신(新羅大明神)'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오늘날 수많은 일본의 신사와 사찰에서 '신라대명신(新羅大明神)'을 모시고

또 그 신사들의 이름까지 '신라신사(新羅神社)'라는 곳만 수많은 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선도성모는 신라의 '비너스 여신'이었으며, '전복조개의 바다의 신'이었다.

동아시아의 해신이었던 신라명신, 동신성모의 상징은 조개였고 그것도 전복을 최고로 보았다.

신라인들은 그것을 포석정의 모양에도 넣었고, 그 포석정의 사당에도 포석사(鮑石祠) 또는 포사(鮑祠)라고 하여 전복이라는 뜻의 포(鮑)를 모신다는 의미로 사당 이름을 지은 것이다. 

 

지동설 시대의 대지 중심 신화시대에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왕들은 그러한 바다의 신에게서 태어나는 '옥동자'였다.

가야와 신라의 왕들이 아기로 '발견되는' 것은 주몽과는 달리 유기된 아기라기보다 이러한 신화적으로

'조개에서 나온 진주'와 같은 '옥동자 태양'으로 여겼다.

  

한 해가 지나면 긴 밤 동짓날 다음 다시 새해가 솟아오르는 것은 신라인들에게는 국가적 숭상의 날이 되었을 것이다. 

신라인들의 '황도(黃道)'인 해중능 위에 뜨는 새해의 햇빛은 신라를 향하여 뜨고 있었으며 바다를 향하여 신라가 바라보는 해였다. 

 

신라의 왕들은 옥녀봉으로부터 첨성대와 반월성을 지나 해중능 바다에까지 일직선으로 연결된

'명신성모일광도(明神聖母日光道)' 또는

'선도성모일광도(仙桃聖母日光道)'로 다시 솟아오를 때까지의 

한 새의 '임신 기간'을 거쳐 태어나는 옥동자 태양을 기원했을 것이다.

진평대왕이 해중능에서 만난 신룡(神龍)은 그의 장녀의 상징이며 선덕여왕이

되어 살아생전 왕호를 '성조황고(聖祖皇姑)'로 칭했다.

 

선도성모가 '태양신'의 의미가 아니라 선도성모는

'태양의 신(태양들을 잉태한 신)'이며 왕족들의 성모(聖母)였던 것이며.

대지지모이며, 명신이었으며, 동신이었으며, 해신이었던 것이다.

태양의 빛을 발하게 하는 신은 태양의 어머니

즉 바다의 해신 명신성모(明神聖母)이며 동신성모(東神聖母)였다.

육지 한반도의 중심 신국(神國)의 수도 서라벌에서의 태양 그 자체에게는

'옥녀성모(玉女聖母)'이자 선도성모(仙桃聖母)였던 것이다.

 

옥녀(玉女)의 '옥(玉)'은 가리비조개와 전복자개조개의 '진주'이다. 왕(王)이 조개 안에서 진주처럼 구슬이 생긴 것이 '구슬' 점이 

생긴 '玉'자이다. 그 옥을 만드는 어머니 성모가 옥녀(玉女)이다.

 

서라벌의 옥녀봉(玉女峰)은 그래서 동지(신라때의 새해) 때에 해돋는 방향을 바라보며 바다의 해중능을 향하여 있는 것이다.

첨성대와 신라의 성, 반월성이 그 사이의 일직선 상에 놓여 있는 것이다.

 

포석정 신라 사당이 전복을 닮아 있어 포사(鮑祠 :전복 사당)라고 <화랑세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전복조개 여신에서 나오는 진주가 신라의 왕들이자 태양이었기 때문이다. 그 전복조개 여신으로부터 발하는 채운(彩雲)과도 같은 아름다운 빛이 전복 자개이다.

 

혹시 집안에 자개 가구가 단 하나라도 있는가 살펴보라.

거기에는 신라 때부터 내려오는 신선도가적인 바다와 산수를 그려놓은 문양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옛 어머니들이 좋아하던 '어머니의 신화'의 전통이 담겨 있는 것이다.

 

 

 

[출처 : 조선닷컴 카페/오두방정의 꿈꾸는 풍경 / '신라와 조개들의 신화' ]

 

 

관련 참고

 

    신라명신에 대해서   http://blog.daum.net/innomy/168456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