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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관구검의 고구려 침략과 각석기공비의 진실

monocrop 2009. 5. 11. 23:32

관구검의 고구려 침략과 각석기공비의 진실

글 : 신완순 / www.coo2.net 네티즌자유게시판 15907 / 2009-05-11


사에는 항상 흥망성쇠와 영욕이 교차한다.
900년간 동북아와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하였던 고구려 또한 마찬가지다.

찬란한 문화와 영토를 자랑했던 강성제국 고구려였지만 치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구려 동천왕 때 위(魏)나라 변방의 장수인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의 수도인 환도성(丸都城)을 도륙을 낸 것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고구려의 수치로 여길 것이다.

고구려는 정말로 일개 위나라의 변방의 장수인 관구검에게
씻을 수 없는 패배를 당하였을까?

그리고 과연 지금의 압록강 주변에 있는 길림성 집안현(輯安縣)에
각석기공비를 세웠는가?

고구려, 위 변방 장수에게 씻을 수 없는 패배?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할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을 보면
중국은 후한이 멸망하고 위․촉․오 의 삼국이 쟁패를 하고 있었으며
요동지역에는 공손(公孫)씨가 자리를 잡고
고구려와 위나라 그리고 오나라와 외교적 줄다리기를 하는 등
국제관계가 매우 복잡한 시기였다.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를 보면
위나라와 고구려 전쟁에 관한 본말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요동지역은 본래 고구려의 땅이었지만
역적 발기(發歧)가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탁(公孫度)에게 항복한 뒤
공손씨의 소유가 되었으며 공손탁은 스스로 요동왕(遼東王)이라 칭하였다.

공손씨는 요동지역을 요동(遼東)과 요중(遼中), 요서(遼西)의 세 지역으로 나누고
한때 산동성 일부지역까지 차지하는 등 강력한 세력을 넓히고 있었기 때문에
위나라에게는 눈엣가시였고 고구려와는 적국이었다.

공손연(公孫淵, 공손탁의 손자) 때에 이르러
공손연은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칭하고
간사한 꾀로 위와 오 두 나라 사이에서 이익을 취하려고
오의 임금 손권에게 사신을 보내 신하라 칭하고 위나라를 함께 치기로 하였다.

이에 손권이 군사를 공손연에게 보냈는데
공손연이 위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미끼로 삼기 위해 오나라 장군 등을 죽이려 하자
이들은 고구려로 도망가서 고구려와 연합으로 공손씨를 치자고 하여 동맹을 맺었다.

오나라의 이런 계략이
고구려를 속여 자국의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안 고구려 동천왕은
손권이 보낸 사신 호위(胡衛)를 억류하다가
결국 목을 베어 위나라에 보내고 위나라와 동맹을 체결하였다.

즉 고구려가 공손연을 치면 위나라가 돕고
위나라가 오나라를 치면 고구려가 돕기로 하고

이 두 나라를 멸망시키면 오나라는 위나라에,
공손연의 요동은 고구려가 차지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동맹으로 위나라의 사마의(司馬懿)가 공손연을 치자
동천왕은 주부(主簿) 대가(大加)에게
수천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보내어 협조를 하여
결국 요동의 공손씨는 3세 50년 만에 멸망을 하였다.

공손씨가 멸망을 하자
여위동맹(麗魏同盟)에 의하여
당연히 요동지역을 고구려에 땅을 돌려주었어야 함에도
위나라가 배신하자 동천왕이 노하여
위나라가 점령하고 있던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는 등
여러 차례 위나라를 공격을 하였다.

위기를 느낀 위나라는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 고구려를 침략한 것이
바로 본말이 생략된 채 우리가 알고 있는 전쟁 기록이다.

여위동맹(麗魏同盟)으로 공손연 멸망

관구검의 고구려 침략 기사는
진수(陳壽)의 <삼국지> 위지 권30 ‘동이열전 고구려 조’와
권28 ‘관구검 열전’에 기록되어 있으며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도 여러 기록이 혼용이 된 채 기록을 하고 있다.

<삼국지> 위지 권28 ‘관구검 열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정시(正始) 중(240~249년)에
관구검이 위나라가 고구려에게 여러 번 침략을 당하여
이에 여러 군사들을 지휘하여 보기 1만 명을 이끌고
현도(玄菟)를 출발하여 여러 길을 따라 고구려를 토벌하였다.

고구려의 왕  궁(동천왕)은 보기 2만 명을 거느리고 진군하여
비류수(沸流水) 상으로 가서 양구(梁口)에서 대전을 벌였다.

궁이 연달아 쳐부수고 달아나자
관구검은 마침내 말과 수레를 묶어 환도성에 올라
고구려의 수도를 도륙을 내고 1천 명을 목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중략)

궁이 처자를 거느리고 달아나 숨자
관구검이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정시 6년(245년)에 다시 고구려를 정벌을 하였다.
궁이 매구(買溝)로 달아나자
관구검이 현도태수 왕기(王頎)에게 추격하도록 하였다.

옥저 땅 1천 리를 지나서 숙신씨(肅愼氏)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각석기공(刻石紀功)하였으며 환도산에 ‘불내성(不耐城)’이라 새겼다.

8천 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논공을 하여
상을 받은 자가 백여 명이었다.”라고 하여

위나라의 관구검이 고구려 전체를 도륙을 내고
고구려의 왕은 도망을 가서 겨우 목숨을 건진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한 1차 전쟁은 고구려의 완벽한 승리였다.

2만 명의 군사로 관구검의 1만의 군사를
비류수에서 대파를 한 것이다.

박창화 선생의 유고집인
<고구려 사초․사략>의 ‘동양대제기(東襄大帝記)’를 보면
비류수에서의 전투를 ‘비수대전(沸水大戰)’이라 기록하고
‘위나라 군사 3천여 급의 목을 베었다’라고 되어 있다.

<삼국사기>에서도
“비류수에서 전투를 벌여 그들을 쳐부수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다시 군사를 이끌어 양맥(梁貊) 골짜기에서 전투를 벌여
역시 적군을 쳐부수고 3천여 명을 죽이거나 생포하였다.”라고 되어 있어
이 전투에서 승리하였음을 보여준다.

결국 위나라 관구검과의 1차 전쟁은
<삼국지>에서 말한 ‘비류수’와 ‘양구’에서 대승리를 하였다.

고구려 동천왕. 위와의 1차 전쟁 대승...2차엔 허찔려

동천왕이 허를 찔린 것은 2차 전쟁이었다.

1차 전쟁의 승리에 대한 자만과
전쟁의 계책을 간하는 신하의 말을 듣지 않아
결국 고구려의 수도 환도성을 내어주고
작전상 후퇴를 할 수 밖에 없는 비극적인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결과적으로는 패배한 전투가 아니었다.

비록 환도성이 불타는 쓰라린 패배를 당하였지만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밀우(密友)와 유유(紐由)라는 두 장수가 있었기 때문에
대역전승을 거둘 수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밀우와 유유의 활약상이 잘 나타나 있다.

밀우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위나라의 군사에 맞서 싸우며
장렬한 최후를 맞이함으로써 후퇴하는 임금의 퇴로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유유는 적진으로 들어가 거짓으로 항복을 하려 하니
위나라 장수 즉 왕기(王頎)가 이 말을 듣고 그의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이 때 유유가 식기에 칼을 감추어 가지고 나아가서 칼을 뽑아
왕기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었다.

왕기가 죽자 위나라 군사는 곧 혼란에 빠졌으며
동천왕이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급습하자
위나라 군사들은 혼란 속에서 전열을 가다듬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에서 퇴각하게 된 것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중국 측의 사서인 <삼국지>에는 이러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고
상내약외(詳內略外, 중국 측의 사서 기술 방법. 다시 말해 자기들이 유리한 것은 자세하게 기술하고
외국의 일은 간략하게 하거나 생략하는 것)하여 진실을 호도하고 있다.

위, A4 정도 크기에 40자를 새겨 승리를 기념?

2차 전쟁에서 위나라가 일시적으로 환도성을 점거를 하였지만
결국 위나라 현도태수 왕기가 유유에게 피살되고 겨우 도망을 갔음에도
저들은 숙신의 남쪽 경계에 전쟁에 승리한 기념비를 돌에 새겼다고 하고 있다.

1906년 현 중국의 길림성 집안현 판석령(板石嶺)에서 발견되었다는
관구검기공비(毌丘儉紀功碑)는 길이 약 25.8㎝, 너비 약 26.4㎝이며
비문의 서체는 예서체이고 각 글자의 간격은 약 2.7㎝로서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해 전쟁에 이긴 기념으로 세운 것이라고 중국 측은 말하고 있다.

따라서 관구검의 고구려 정벌은
역사적인 사실로서 고구려는 중국의 지배를 받아온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열을 올리고 있다.

위나라가 승리를 하였고 각석기공을 하였다면 겨우 A4 크기 정도의 돌에 새겼겠는가?

또한 돌에 새겨졌다는 내용 또한 떨어져 나간 부분이 있긴 하지만
겨우 40여 자 남짓한 글자로 환도성을 불태운 엄청난 일을 다 기록을 할 수 있겠는가?

환도산에 ‘불내지성’이라고 새겼으며
숙신의 남쪽에 각석기공을 했다고 하였는데
현 길림성 집안은 옥저 땅 1천 리를 거쳐 지나간 지역도 아니며
숙신의 남쪽은 더더욱 아닌데도 각석기공비가 출토되었다고 하는 것은 말도 되질 않는다.


<1906년 길림성 집안현에서 발견되었다는 관구검의 각석기공비 -
A4 용지 정도의 크기에 불과한 돌에 과연 공적을 새겼겠는가?
이는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만든 가짜 각석기공비이다.>




더욱이 동천왕이 공격을 한 요동의 서안평과
고구려의 수도인 환도성이 압록강 유역이 아닌 이유는
1차 전쟁 때에 승리한 비류수와 양구가 이 지역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수(梁水)는
<대청일통지>에 현 산서성 장자현(長子縣) 동쪽에 있다고 하였으며
<태평환우기>에는 고구려와 관구검이 전투를 벌인 곳을 비류수와 문수(汶水)라 하였는데
문수는 산동성 태안부 서남쪽으로 흐르는 강이라 하고 있다.

또한 <요사지리지>에 서안평은 요(遼)나라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라고 하였는데
현 압록강 주변이 요나라 상경이었던 적이 없으며
많은 학자들은 현 북경 북쪽에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근래에는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하여 만든 영제거가 있던
송나라의 북경지역 대명부(大名府) 인근 유역이
요나라 상경임황부였다고 하는 설이 주목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요 상경임황부 주위에 흐르던 강인 어하(御河)가 바로 영제거였던 까닭이다.
“안평은 제나라의 읍이며 지리지에 탁군에 안평현이 있다(安平齊邑按地理志涿郡有安平縣也)”라고
당나라 사마정(司馬貞)이 <사기(史記)>에 주석을 달고 있으며

탁군(涿郡)은 지난 4월호 칼럼에서 위 대명부 지역이라고 밝힌 바 있다.

따라서 안평의 서쪽에 있었던 서안평은
현 하북성 찬황(贊皇)지역으로 보기도 하고
양수(梁水)가 있는 산서성 장자현 서쪽의 안읍(安邑)을 서안평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사마의가 요동 공손연을 공격한 곳은
지금의 산동 내양현(萊陽縣)지역인데
지금도 그곳을 고려산(高麗山)으로 부르고 있다.
이는 <태평환우기>와 <명일통지> 등에 기록되어 있고 <산동통지>도 마찬가지다.

이로 미루어보면 고구려와 위나라가 싸운 서안평과 비류수와 양구 등은
지금의 압록강 주변이 될 수 없고
현 하북성과 산서성 그리고 하남성 접경 유역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송나라 때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자치통감> 권83에
“관구검이 고구려를 토벌하고 그 남은 무리들을
영양(滎陽, 하남성 낙양 근처)으로 옮겼다.”라고 한 대목이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발기의 반란으로 비록 국력이 약해져 한때 요동을 내어준 적은 있지만
동천왕 당시에 고구려가 위나라와 오나라 그리고 공손씨와의 국제관계에서
오나라 사신의 목을 치고, 위나라와 함께 공손씨를 멸망시키고,
배신한 위나라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하고,
관구검과 싸웠던 지리적인 위치는 현 압록강 주변이 될 수 없다.


<일본이 그린 4세기 말 경의 역사지도 - 그들은 서안평을 지금의 압록강 하구 인근으로 비정하고
고구려와 삼국시대의 강역을 축소 왜곡하고 있다.>




고구려는
능동적으로 국제관계를 주도할 수 있는 힘과 외교력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정과 백성이 국가재난에 대응할 수 있는 일치된 국가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환도성을 불태운 후 위나라는 20년 만에 나라가 망하였지만
고구려는 그 후로도 4백여 년 이상을 패자로 군림하였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우리는 환도성이 불탔던 쓰라린 교훈을 깊이 새겨야 하며
또한 그러한 위기의 국난에도 대역전에 성공한 고구려의 저력을 이어받아
한낱 자그마한 돌덩이에 글을 새겨 역사를 왜곡하려는 중국의 저의를 분쇄하여야 할 것이다.

(완)


김성겸 (2009-05-11 15:02:46)  
신완순 선생님,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신 글 잘 읽었습니다.
윗글에 나타난 현토태수지역은 추모경과 고구리사략/사초에 근거하여 정리해보면
현금 산서성 대동기 이북인 북부에 해당합니다.
또한 "不耐城"이라는 것은 어쩌면 현토지역에 있었을 不而城의 와기이었을 것이고
숙신의 남쪽이라는 얘기는 소위 위만조선의 남쪽지경이라고 이해가 됩니다.
동천왕이 도피한 옹구 역시 산서성 태행산맥 중의 어느 심산유곡이었거나
설사 동쪽으로 도피하였다하여도 대흥안령산맥을 벗어날 수 있음일 것입니다.
옛 옥저는 우리가 알고있는 눈강지역이 아니고 하북성해안지역이었고 후에 북쪽으로
북갈들과 자리바꿈을 하게 된 것으로 읽혀집니다.
또한 관구검침략 관련하여 나오는 죽령은 동쪽으로 도피하였다면 현금 칠로도산맥일 것으로 읽히고
남쪽으로 후퇴하였다면 현금 태행산맥 남변 죽림정도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의 환도성은 북부여 후국인 산서동단과 하북성 서부에 걸쳐서 있었던 환나국의 도성지경으로 읽혀집니다.
따라서 하북성 서북단의 상산지경 또는 그 인근의 산중에 있었던
현금 북경지역보다 외적들이 침략하기 어려운 산간오지로 잠시 피하였던
밀도에 지나지 않았었고 동도 서도 북도 평양대성과는 격을 달리하는 임시도읍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위에 올려진 비문이란 것도 최소한 십중 팔구는 위작이거나 자리를 옮겨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김성겸 (2009-05-11 15:11:48)  
첨언하면,
숙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방말갈과의 관계를 이해하여야 하며,
숙신은 결국 현금 바이칼호 남변에서 동쪽으로는 동부여의 동북방인 흑룡강 하류 직북방인근까지
널리 펼쳐져 있었으며,
제가 이해하기는 옛조선의 북쪽 변방에서 계속하여 유목과 정착목축을 겸한면서 살던 사람들로 이해가 됩니다.
그리하여 하란산맥 서편에 남에는 고구려 북에는 부여라는 기록이 남게 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고구리창세기 시절{BC18년이전}에 이미 하란산맥 이동지역 그리고 긍특산맥이남지역 현금 송화강 이서지역
태행산맥을 접한 황하하류 이북지역 하투장성이북지역이 고주몽의 직간접통치강역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후대의 말많은 상군이 아닌 상곡은
현금의 하북 산서 하남 하투 등의 지역에 있었을 수 없고 필경 긍특산맥 또는 인근의 어느 계곡에 해당할 것으로 보며, 대무신제 등의 강역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음을 확신합니다....//
신완순 (2009-05-11 15:17:51)  
김성겸 선생님

말씀하신 지리비정이나 상황인식은
사서(史書)의 뒷부분까지 꿰뚫는 예지(眼光撤紙背)에
경의와 감사말씀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정성일 (2009-05-11 20:24:40)  
관구검과 동천왕이 치루었던 전쟁에서 위나라의 병사가 1만, 동천왕의 병사가 2만으로, 동천왕은 도합 2번의 전투에서 위나라 6천의 병사를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습니다.

남은 위나라의 병사는 도합 4천에 불과하고 3차에서는 크게 깨졌다고 나오는데, 실제 동천왕이 처음 만난 병사는 1만의 별동대이고 3차에서는 관구검의 본대를 만난 것입니다.

본대와 만난 관구검의 군대가 환도성을 함락하고 군대를 나누어 왕기로 하여금 동천왕을 뒤쫓게 하는 것입니다. 동천왕이 유유의 희생으로 왕기의 추격에서 간신히 풀려나는데, 정작 왕기의 군대를 증원해 줄 관구검의 본대가 환도성을 떠나 자신들의 본거지로 돌아간 것은 염두해 두지 않는지요?

고구려의 도성도 점령하고 동천왕만 죽이면 고구려는 위나라의 꺼나 마찬가지인데 뭐가 급해 그리 빨리 돌아갔을까요?

환도성을 점령한 관구검이 돌아간 이유를 알아야 당시 상황을 이해하게 되는 초석이 됩니다.
그런 연후에 고구려와 백제와 위나라의 강역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