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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위략>의 진개침략기록을 둿받침하는 사서는 한단고기뿐

monocrop 2009. 5. 9. 02:01

<위략>의 진개침략기록을 둿받침하는 사서는 한단고기뿐. 2천여리는 조작

 

글 : 솟대 / www.coo2.net / 네티즌자유게시판 15884 / 2009-05-08

 

 

<위략>은 북위서에 대한 반발로 만들어진 사서로 그 사료의 아전인수식 기록이나 허황된 부분으로 신채호선생님은 아예 사료로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문제의 <위략>은 그 사서 자체가 전해지지지 않아 유실되어서 다른 사서의 인용이나 주석으로 편린만 전할 뿐으로 그 내용이 정확한지는 사서도 말실되어 원문자체가 없어 확인할 길이 전혀 없습니다.

전해지는 사서자체가 없는데도 그 기록을 신주모시듯이 받아들여 연이 고조선땅을 차지했다고 말하는 강단이  현재 사료원문이 그대로 남아있는 단기고사나 태백일사나 규원사화들을 외면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위사라고 비웃음을 받으며 사서로서 평가도 받지 못하는 <위략>을 인용 삽인한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 나온 진개관련 기록을 그나마 둿받침해주는  유일한 사서라 보이는 환단고기를 부정하면서도  <위략>의 동호침략기사는  신주단지 모시듯 받아들이는  우스운 작태가 한심할 뿐입니다.

그나마, <위략>의 진개의 동호침략기사를 둿받침해주는 <한단고기>기록도 무시하면 <위략>의 기록을 둿받침할 기록이 있기나 한 것인가?


<주본기>는 물론이고 천여리, 2천여리를 떠나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해야 할 사기史記의  <연소공세가>에도 동호東胡정벌기사는 물론이고  연나라 역사상 가장 전무후무한 업적을 남겼다는 진개의 이름조차도 나오지 않는다.

솔직히, 천여리도 엄청난 과장이라고 본다.  아마, 그 기록이 맞다고 해도 당시의 전후정세로 보아 기꺼해야 수백리정도 들어왔을 것이다.


자신들의 가장 큰 업적인데 작은 동이부족을 병합한 것도 부풀려 업적을 자랑하던 이들이 왜  <연소공세가>의  천여리나 밀어냇다는 전무후무한  동이정벌기사와 그 주인공을 빼버렸는가?

그런, 강단의 학자들의 대다수는 그런 의구심을 가져 보지도 못했지 않나 의심이 될 지경입니다.
냉철한 사서분석과 비판력, 검증  그런 것은  지나역사를 미화하는데는 걸림돌이 되므로 그네들도 잠시 제껴두어야 겠지요.


차라리 그들이 차이나인이라면 내가하면 연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식의 논리라 쳐서 넘어간다지만...
도대체, 사료평가의 공정성이나 객관성조차도 잃어버린 강단의 주먹구구식 대치에 웃음이 나올 뿐입니다.


각론하고, [위략]은 대략 세 문헌에서 인용하였는데 가장 오래된 문헌인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입니다.
공히, 1,000여리를 동호가 물러섰다고 나와 있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후대의 기록인 삼국지에 실린 위서魏書인데 2,000여리 운운은 바로 이 기록에서 나온 것입니다.



한대의 기록들에는 분명 1,000여리라 하였는데 갑자기 삼국지三國志는 무엇을 근거로 뜬금없이 2,000여리란 기록으로 바꿔버렸을 까요?

당연히, 더 오래된 문헌들이 있고 세문헌중 두 문헌이 1,000여리라 전하였는데  이를 옮겨적은 후대의 기록만을 인정하여 2,000여리 운운하는 강단의 작태는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두 문헌이 같은 내용이면 후대의 기록은 오기로 보는 것이 당연지사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마땅히  후대의 기록을 맞다고 주장하는 사학적 근거를 그대들이 좋아하는 논리대로 실증적으로  제시하기 바란다.


중국이 이긴 기록은 부풀리고 부풀린 것은 정사로 채택한다.

이것은 지나사가들의  대표적인 <화하사관>에 따른 사서기록방법중 하나일뿐 아니라 동시에 한국 사학계의 <지나숭배사관>에 따른 자민족 비하기록방법이기도 한가 봅니다.
없는 일도 만들어서  스스로를 비하하는데  정말 애 많이 쓴다.


객관성도 사료에 대한 비교평가능력이나 냉철한 비판력도 없고 주체성도 없고  저것들이 학자나부랑이인지 의심이 가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지....

더불어 그들이, 지나인인지 한민족인지 정체성조차도 알 수없는 자들임을 한번에 드러내는 사안이 바로 <위략>에 대한 저들의  어처구니없는 평가와  단군조선비하 망언이 아닌가 합니다.


차라리, 학자이기를 포기한 그들에 대해서 그 조상을 의심하는 편이  이해가 쉬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 관련 차이나 사료 원문

신교본사기삼가주新校本史記三家注/ 신교본사기新校本史記 / 열전列傳 / 권卷 一百十 / 흉노열전匈奴列傳 제第 五十
[원문]
其後燕有賢將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走東胡,東胡卻千餘里.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
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신교본한서新校本漢書 / 열전列傳 / 권卷 九十四 上상 / 흉노전匈奴傳 제第 六十四 상上 /

그후, 연(燕)에 현명한 장수(賢將) 진개(秦開)가 있어, 호(胡)에 인질로 잡혀있었는데 호(胡)는 그를 깊이 신임하자 연(燕)으로 돌아와서 불의에 엄습하여 동호(東胡)를 격파해 천여리를 물러서게 하였다.
형가荊軻가 더불어 진왕秦王을 죽이고자 한 진무양秦舞陽이란 자가 개開의 후손이다.
연燕은 조양造陽으로부터 양평襄平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쌓았고 상곡上谷,어양漁陽,우북평右北平,요서遼西,요동군遼東郡을 세워 이로서 호胡를 막았다.

[원문]
其後燕有賢將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東胡,卻千餘里.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 開之孫也.
燕亦築長城,自造陽[五]至襄平,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距胡.

[四] 師古曰:「卻,退也,音丘略反.」 사고師古가 이르길, 각卻은 물러나다라는 뜻이다.
[五] 師古曰:「造陽,地名,在上谷界.襄平即遼東所治也.」 조양造陽은 지명으로 상곡上谷경계에 있다. 양평襄平은 즉, 요동遼東의 치소이다.




신교본삼국지新校本三國志 / 위서魏書/ 권卷 三十 위서魏書 三十 / 동이東夷 / 한韓

위략에 이르길 :  ...(중략), 연(燕)이 이에 장군 진개秦開를 보내어 그 서방西方을 공취하여서 2천여리땅을 취하여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경계를 하였으니 조선朝鮮이 약해지기에 이르렀다.

[원문]
魏略曰:昔箕子之後朝鮮侯,見周衰,燕自尊為王,欲東略地,朝鮮侯亦自稱為王,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其大夫禮諫之,乃止.使禮西說燕,燕止之,不攻.後子孫稍驕虐,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取地二千餘里,至滿番汗為界,朝鮮遂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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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동현) 진개는 연나라 장군인가 ?
글: 우리역사의 비밀 관리자 / www.coo2.net / 2009-05-07

아래 지도중 연나라가 쌓은 장성이 표시되어 있는데 바로 은산 아래 "창평"이 있다

이 장성이 조양에서 창평까지 그리고 백석산 인근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연나라 장성과 그 후대에 이어서 쌓은 장성으로 보인다

이 장성이 요령성 조양에서 난하유역으로 쌓은 성이 아니냐고 이메일 질의하신 분이 있는데
이는 중국 군사지도 및 지형도를 보지 못한 이유로 잘못알고 있는 것이다

중국 군사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산해관에서 동북쪽으로 올라가는 고구려 장성은 있지만
조양에서 서남쪽으로 내려오는 장성은 없다

북경 서쪽 태행산맥을 연하여 쌓은 성이 연나라 장성이며
연나라가 산서성 쪽으로 진출하여 북경유역을 잠시 공격하였다가 이를지키기 위해 쌓은 장성인 것이다

그래서 정사의 기록과 중국군사지도 등은 같이 보아야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