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일식기록이 중국사서로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에 대한 논쟁 -01
글 : 바비 / http://www.history21.org/ 백가쟁명 / 2008-04-23
박/라(1994) 논문 184 페이지를 부분 인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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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위 1994년 논문에 의하여도 바비님 주장처럼 "삼국사기 일식기록이 후한서를 비롯한 중국 역사기록에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은 대단히 높습니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한 사실은 없습니다. 단지 ~하다는 식으로 추측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추측의 근거가 된 "遼東以聞"은 뒤에 해석을 잘못한 것이라는 반론에 부딛치자 이 부분은 입을 닫아버린 것입니다. 후한서에 나오는 일관이 직접 관측하지 않고 들었다는 문구에는 거의 대부분 그 들었다는 지방이 나오고 때로는 누가 보고했는지도 나옵니다. 위 "遼東以聞"도 다른 문구와 비교해 볼 때 이 문구는 요동군 지역에서 관측되어 보고 되었다는 내용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반론을 맞고 후퇴해 버린 것입니다. 박창범 교수는 라대일 박사님과 같이 1994년도에 논문을 발표한 후 2002년도에 지은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책을 보면 그간 상당한 인식의 변화가 있었고 결론을 내는 것도 상당히 조심스러워 졌습니다. 심지어 삼국의 최적관측지가 왜 중국대륙으로 나오는지 그것은 역사학자들의 몫이라고 한발짝 후퇴해 버렸습니다. 또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에서 박창범교수는 "특히 삼국시대 초기부분이 조작된 것이라는 일본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이 시기 전체의 역사 기록을 불신하게 만들었으며, 나아가 삼국사기가 지닌 사서로서의 신빙성을 크게 떨어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근거가 되어 있었다. 일본 학자들이 왜 그러한 결론을 내렸는가에 대해선 그들의 관련논문 등을 읽어보면 엇뜻 납득할만한 논리적 근거가 있다. 거의 모든 학자들이 이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된 것도 그 같은 이유 때문이다. 나 또한 그들의 논문을 접한뒤 내가 확인한 삼국의 최적관측지가 왜 중국대륙으로 나타났는지 그 까닭을 이해하게 되었다. 일본학자들의 말대로 삼국사기의 일식기록이 중국의 기록을 뻬낀 것이라면 당연히 그 최적관측지도 중국대륙으로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상 삼국사기는 삼국이 직법 남긴 1차사서가 아니라 고려 시대에 남아 있던 여러 국내외 사서를 근거로 고대 기록을 취사.편집해 만든 것이다. 따라서 그 내용이 당대의 원래 기록처럼 아주 자연스러울 수 없는 것이다.취사. 편집가정에서의 사료의 부족, 사료의 선택적인 취입, 착오 윤색 등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여러 참고 문헌을 가져다 놓고 이야기를 엮다 보니 내용의 일관성이 떨어지거나 공백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바탕위에서 이 사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지는 읽는자의 몫이다" "삼국사기와 중국사서에 공동으로 나오는 이유를 단지 베꼍기 때문이라고만 해석 할 수 없다. 어려운 대학수학 묹를 똑같이 틀리게 푼 두 초등학생의 답안이 서로 비슷하다는 이유로 무작정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베꼍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박.라 두분은 처음에 천문학자로서 역사 영역을 건드렸다가 뒤에 가서는 천문학자로서 자신이 연구한 결과에 대하여 설명하고 역사적 평가는 역사학자의 몫이라고 발을 빼버렸습니다. 법도 신법과 구법이 충돌하면 신법이 우선하고, 학설도 같은 사람이 전에 학설과 다른 것이 나오면 전에 학설은 변경한다는 말이 없어도 견해가 바뀐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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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에 있는 글을 있는 그대로 읽어야지 자기 입맛에 맞추어 해석하는 것 역시 남의 논문을 제대로 인용 못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봐요. 위에 인용한 박/라(1994) 논문 구절에서 '가능성'을 뒷받침해주는 핵심은 후한서 일식기록에서 사관이 직접관측하지 못하고 외부에서 들어온 기록이 무려 40%로 다른 시대에 비교해서 지나치게 높다는 것이예요. "遼東以聞"은 부차적인 논거예요. 이 핵심되는 내용인 40%에 이르는 외부에서 유입된 일식기록만을 보더라도 삼국의 일식기록이 후한서로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은 대단히 높은 것이예요. 후한시대에 도대체 삼국일식 기록이 아니라면 어느 국가들 일식 기록이 40%나 차지할 수 있는지 한번 후보 국가를 나열해보세요. 님이 저번에 평한 것 그대로 인용해보죠. "삼국의 일식관측기록을 중국왕조가 뻬겼다는 소리는 지나가는 가 웃을 일이다." 이 가능성의 핵심인 40%에 이르는 외부에서 유입된 일식기록과 관련된 내용을 몇 번이나 읽어보라고 권했는데 엉뚱한 책을 인용하고 곁가지 문제를 가지고 동문서답하고 나가서는 박/라가 말하지도 않은 것까지 멋대로 결론내리고 있군요. 그래서 사상누각이라고 하는 겁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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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에서 들어온 기록이 무려 40%로 다른 시대에 비교해서 지나치게 높다는 것이예요." 길게 이야기 할 것 없이 이 40% 기록 내용이 무엇인지 후한서 오행지를 한번 읽어보세요. 일관이 직접 관측한 것이 아닌 군현에서 일어난 것을 들었다는 기록 중에서 유일하게 "遼東以聞"을 가지고 삼국에서 관측한 기록인듯이 헛소리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사상누각이 아닌가 해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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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정확하지 못한 표현으로 인용하네요. 후한서 일식기록에서 군현에서 일어난 것을 들었다는 기록은 없어요. 어떤 군이름이나 '군국'이라는 공간적인 위치이거나 누구로부터 들었다는 내용들이예요. 요동이문만 가지고 삼국에서 관측한 기록인 듯 헛소리하는 사람은 제가 알기로는 아무도 없어요. 남의 글을 멋대로 읽는 분이야 그런 사람들이 많아보이겠지만. 1. 六 年 九 月 丙 寅 晦 , 日 有 蝕 之 。 史 官 不 見 ,郡 以 聞 。 本 紀 「 都 尉 詡 以 聞 」 。 2. 和 元 年 八 月 乙 未 晦 , 日 有 蝕 之 。 史官 不 見 , 佗 官 以 聞 。 日 在 氐 四 度 。 3. 和 帝 永 元 二 年 二 月 壬 午 , 日 有 蝕 之 。 〔史 官不 見 , 涿 郡 以 聞 。 日 在 奎 八 度 。 4. 三 年 三 月 二 日 辛 亥 , 日 有 蝕 之 , 在 婁 五 度 。 史 官不 見 , 遼 東 以 聞 。 5. 四 年 二 月 乙 ( 亥 ) 〔 巳 〕 朔 , 日 有 蝕 之 , 在 奎 九 度 。 史 官 不 見 , 七 郡 以 聞 。 6. 五 年 八 月 丙 申 朔 , 日 有 蝕 之 , 在 翼 十 八 度 。 史 官不 見 , 張 掖 以 聞 。 7. 永 寧 元 年 七 月 乙 酉 朔 , 日 有 蝕 之 , 在 張 十五 度 。 史 官 不 見 , 酒 泉 以 聞 。 8. 陽 嘉 四 年 閏 月 丁 亥 朔 , 日 有 蝕 之 , 〔 一 〕 在 角 五度 。 史 官 不 見 , 零 陵 以 聞 。 9. 永 和 三 年 十 二 月 戊 戌 朔 , 日 有 蝕 之 , 在 須 女 十 一度 。 史 官 不 見 , 會 稽 以 聞 。 10. 桓 帝 建 和 元 年 正 月 辛 亥 朔 , 日 有 蝕 之 , 在 營 室 三度 。 史 官 不 見 , 郡 國 以 聞 。 11. 元 嘉 二 年 七 月 二 日 庚 辰 , 日 有 蝕 之 , 在 翼 四 度 。史 官 不 見 , 廣 陵 以 聞 。 12. 永 壽 三 年 閏 月 庚 辰 晦 , 日 有 蝕 之 , 在 七 星 二 度 。史 官 不 見 , 郡 國 以 聞 。 13. 九 年 正 月 辛 卯 朔 , 日 有 蝕 之 , 〔 一 〕 在 營 室 三 度。 史 官 不 見 , 郡 國 以 聞 。 14. 二 年 十 月 戊 戌 晦 , 日 有 蝕 之 。 右 扶 風 以 聞 。 15. 三 年 三 月 丙 寅 晦 , 日 有 蝕 之 。 梁 相 以 聞 。 16. 六 年 十 月 癸 丑 朔 , 日 有 蝕 之 , 趙 相 以 聞 。 17. 三 三 五 八 頁 一 三 行 本 紀 都 尉 詡 以 聞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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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 일식기록에서 군현에서 일어난 것을 들었다는 기록은 없어요." 바비님 다운 글이네요. 말을 비트는 센스가 뛰어난 분이군요. 일식이 군현에서 일어납니까? 일식이 군현 등지에서 관측 되었다는 뜻으로 적은 것이지요. 그리고 위 오행지 문구에는 일식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어디서 전해 들었고, 각도가 몇도에서 일어났다는 등이 적혀 있네요. 이것이 삼국에서 일어난 것이 후한서로 흘러들어온 것이란 말인가요? "趙" "梁" "右扶風" "廣陵" "會稽" "零陵" "酒泉" "張掖" "遼東" "涿郡"등이 삼국에 있었나요? 그리고 위 글에 나오는 "七郡"이나 "郡國"이 삼국의 군국을 가리키는 것인가요? "都尉詡" "佗官"이 삼국의 관원인가요? 일식기록도 삼국사기보다 훨씬 정밀하게 적혀 있네요, 중국왕조의 일관이 직접 관찰한 것이 아니고 일관이 들어서 적은 것이라는 단지 그 문구 때문에 삼국의 일식기록이 중국왕조 특히 후한으로 흘러들어갔다고 본 것인가요? 그렇지 않다면 단지 일관이 들어서 적었다는 일식기록 문구만 가지고 삼국의 것이 후한으로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이 대단히 놓다고 단정하였나요? 점을 친 것인가요? 처음 이 논쟁이 왜 시작되었나요? 삼국의 기록이 후한서로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주장한데서 일어났고, 중국 일관이 직접 관찰한 것이 아닌 외부에서 들어 적었다는 40%가 마치 삼국의 기록이 중국으로 흘러들어온 것처럼 궤변을 늘어놓는 바람에 생긴 것 아닌가요? 그런데 외부에서 들어 적었다는 그 40%에 해당된다는 일식기록 때마침 위에 잘 인용해 놓았네요. 이왕 인용했으니 열심히 읽어보세요. 그것이 과연 삼국에서 후한서로 흘러들어온 것인지? 아니면 중국 군현에서 관측된 것을 들어서 적은 것인지? 읽어보고도 모르면 눈 뜬 봉사 밖에 안되지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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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설이라는 것은 검정할 수 있어야 되요. 역사학이 과학으로 자리잡지 못하는 이유는 검정할 수 있는 가설을 제대로 설정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님과 같은 분이 제시하는 기준은 新羅以聞, 百濟以聞, 高句麗以聞 정도는 후한서에 나와야 그 가능성을 인정해보겠다는 태도죠. 어떤 기준을 가지고 과연 "삼국의 일식기록이 후한서로 흘러들었다"라는 가설을 검정할 수 있겠어요? 그것에 대한 기준제시 없이 무조건 아니다라고 하는 주장은 다람쥐 쳇바퀴도는 소리보다 못한 것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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