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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국으로부터 조공 받은 흉노

monocrop 2007. 6. 22. 09:44

중국으로부터 조공 받은 흉노

 

 

이종호의 과학이 만드는 세상-사상 최강 고구려의 원동력은 과학

 

▲ 평양의 동명성왕릉.  ⓒ
한국사는 부여에서 동부여가 나오고 동부여에서 고구려의 지배층이 된 주몽집단(계루부)이 나왔다고 추정한다. 고구려의 기원과 성립과정에 대한 기록은 문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주몽(동명)의 건국내용(남하 및 정착)에 있어서는 대동소이하다.

우선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37년 주몽이 ‘동부여에서 도망 나와 졸본에 이르러 비류수(지금의 혼강) 위에다 나라를 세웠다’고 했으며 '삼국유사'도 대동소이한 내용으로 소개되고 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북부여’로부터 남하해 비류곡의 흘승골성(紇升骨城)에 도읍을 정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참고적으로 북한측은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기원전 277년으로 설정해 기존보다 240년 올려 잡고 있다.

동명이라고 기록한 문헌은 『후한서(後漢書)』, 『논형(論衡)』, 『양서(梁書』, 『위략(魏略)』이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동명과 주몽이 동일인으로 실려 있다. 〈광개토태왕비〉에는 추모(鄒牟)로 돼 있다. 주몽과 동명이 동일인물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 명칭들은 인명이 아닌 지도자를 뜻하기 때문에 동일인설, 이인설(異人設)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는 견해가 많다.

신형식 교수는 주몽집단이 압록강 일대에 진출해 졸본부여(卒本夫餘) 즉 고구려를 세우자 압록강 유역에 먼저 와 살고 있던 주민의 일부가 다시 한강유역으로 남하해 백제 건국의 주도세력이 됐다고 설명한다.

노태돈 박사는 고구려라는 명칭은 구려(句麗)에서 유래된 것으로 고(高)라는 미칭(美稱)을 덧붙인 것이며 몽고고원의 유목민들은 고구려를 ‘매크리 또는 모크리’라고 하는데 이것은 원고구려인이 맥족(貊族)이었음을 의미하며 고(高) 대신 맥고려라고도 했다고 적었다.

또한 지병목 박사는 고구려의 5부 중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貫那部), 소노부(消奴部, 涓奴部)를 제외하고 왕족인 계루부(桂婁部)만 ‘노(奴)’자가 없는 것을 볼 때 계루부만 주몽의 유이민집단(流移民集團)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백제의 시조 온조는 주몽의 아들임을 자처했던 만큼 고구려와 백제의 왕족은 한 집안인 부여계(夫餘系)이다. 그러므로 백제는 그 왕실의 성씨를 부여(夫餘氏)라 했고 부여의 건국 시조인 동명왕을 제사지내는 사당인 동명묘를 설치했다. 백제는 6세기 중반 자신들이 세운 국가의 이름을 남부여(南夫餘)라고도 했다.

▲ 송화강, 한민족의 두 번째 나라인 부여는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건국했다고 추정한다.  ⓒ
우리의 역사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부여는 기원전 2세기경부터 494년 고구려에 투항할 때까지 북만주 지역에 존속했던 예맥족계(濊貊族系)의 국가로 인정한다. 부여는 일찍부터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서단단산문화(西端團山文化)라는 선진적인 문화를 영위하면서 우리 역사상 고조선에 이어 두 번째로 국가체제를 마련한 국가이다.

부여족의 기원에 관해서는 동이족이 동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그 일부가 발해만(渤海灣) 일대에서 장춘 지방으로 이동해서 부여를 건국했다고 추정한다. 송호정 교수는 부여는 초기부터 길림시를 중심으로 한 송연평원에 중심을 두었다고 추정한다. 고등학교 『국사』에도 ‘부여는 만주 길림시 일대를 중심으로 송화강 유역의 평야 지대를 중심으로 성장했다’라고 적혀 있다. 반면에 건국전설(동명성왕의 전설)을 근거로 북쪽에서부터 송화강 유역으로 남하한 세력에 의해 부여가 건국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한편 부여가 활동하기 이전에 중국은 흉노(匈奴)라는 거대제국과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에서 흉노라는 이름이 나타나기 전까지 주로 동이(東夷)들이 살고 있던 중국의 동북방지역은 한민족의 원류들이 정착한 지역이며 부여, 고구려 등의 근거지이다. 그러므로 이들 흉노가 부여, 고구려와 어떤 관계였는지 이해한다는 것은 기마민족 고구려의 정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되므로 보다 상세하게 적는다.

<흉노는 중국보다 3배나 큰 거대제국>

흉노는 중국 북방에서 첫 유목민국가를 건설한 국가의 명칭으로 결코 단일한 민족이나 부족의 명칭이 아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흉노는 몽골-투르크족의 혼합으로 추정하며 기원전 600년경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철기를 받아들인 후 점점 강성해졌다. 스기야마 마사아끼는 기원전 4세기부터 여러 유목민족과 부족들을 망라해 하나의 포괄적인 유목민집합체로 부상했다고 적었다. 특히 정벌한 지역이나 투항한 지역의 왕들을 그대로 수장으로 인정하면서 통치하는 것이 통례였으므로 흉노가 강성할 때는 수많은 다민족 국가로 구성됐다.

그러므로 기원전 3세기 묵특선우의 흉노가 동호를 격파하고 유목기마민족의 패자가 돼 아시아 초원의 연변에 있는 거의 모든 민족을 복속시켰을 때 그 영토는 중국의 거의 3배에 달하는 대제국이라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의 영토는 동으로는 한반도 북부(예맥조선),1) 북으로는 바이칼호와 이르티시 강변, 서로는 아랄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渭水)와 티베트 고원까지 이르렀다.2)

그러나 많은 한국 사람들이 흉노라는 말에서부터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사실이다. 흉(匈)은 오랑캐를 뜻하며 ‘노(奴)’자는 대체로 한자에서 비어(卑語)인 ‘종’이나 ‘노예’의 뜻으로 그들을 멸시하는 의도에서 ‘노’자를 첨가해 ‘흉노’로 불렀다고 알려지기 때문에 더욱 연상되는 이미지가 좋지 않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흉(匈)’자는 ‘훈(Hun 혹은 Qun)’의 음사이며, ‘훈’은 퉁구스어에서 ‘사람’이란 뜻으로 흉노인 스스로가 자신들을 ‘훈(Hun, 匈)’으로 불렀음을 볼 때 ‘오랑캐’를 뜻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상식적으로 흉노라는 말이 자신을 비하해 부르는 ‘노예와 같은 오랑캐’라는 말이라면 중국보다 3배나 더 큰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던 흉노가 이를 용납했을 리는 없다.

흉노에 대한 보다 설득력 있는 해석은 고구려 초기에 ‘나(那)’나 ‘국(國)’으로 표기되는 집단들이 상당수 나타나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이때의 ‘나(那)’는 ‘노(奴)’, ‘내(內)’, ‘양(壤)’ 등과 동의어로 ‘토지(土地)’ 혹은 ‘수변(水邊)의 토지(土地)’를 의미한다고 지병목 박사는 적었다. 고구려에서의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貫那部), 소노부(消奴部, 涓奴部)에 흉노(匈奴)와 마찬가지로 노(奴)자가 들어있는데, 이들은 고구려 성립 이전에 압록강 중류지역 부근의 토착세력으로 고구려의 성장과 더불어 정복 융합된 것으로 추정한다.

<한(漢)으로부터 조공 받은 흉노>

흉노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면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는 시대인 기원전 3세기경으로 내려오지 않을 수 없다. 진시황제가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한 후 흉노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기록부터 중국과 흉노의 역사는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한 지 10여 년 만인 기원전 210년에 사망한다. 후임자인 호해가 등극했지만 곧바로 항우에게 패하고 진나라는 멸망한다.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놓고 싸운 결과 결국 유방이 승리하고 통일중국인 한나라를 세운다.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북쪽에 있는 흉노는 중국을 견제하고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강대국이었다. 사실상 한나라 역사는 북쪽에 있는 흉노와의 관계라고 할 정도로 때로는 가깝게 때로는 원수와 같이 으르렁거리면서 지냈다고 볼 수 있다.

▲ 유방은 백등산에서 흉노의 선우 묵특에게 포위돼 조공을 바친다는 협정을 맺고 풀려났다.  ⓒ
유방은 기원전 202년 재위 5년에 비로소 황제로 칭하고 노관을 연(燕)왕으로 봉하는데 노관이 201년, 흉노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유방은 흉노가 갓 태어난 한나라에 큰 골칫거리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흉노를 치기 위해 3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해 흉노의 묵특선우(冒頓單于 기원전 209~174)를 공격한다. 선우는 ‘탱리고도선우(撑?孤塗單于)’의 약어이다. ‘탱리(撑?)’는 터키-몽골어에서 ‘하늘’을 뜻하는 ‘텡그리(Tengri)’의 음역이며 ‘고도(孤塗)’는 ‘아들’이란 뜻으로 흉노의 왕을 뜻한다. 선우의 공식 명칭은 “천지가 낳으시고 일월이 정해주신 흉노 대선우”이다.

그러나 기원전 200년, 유방은 백등산에서 일주일간이나 포위된 상태에서 극적으로 구출되는 등 수모를 당하면서 철저하게 패배하고 흉노와 화친을 맺는다. 이 때 흉노와 한이 맺은 화친의 골자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의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 이 관례는 문제(文帝, 기원전 179~157) 때까지 계속됐다.
둘째, 한이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조공을 바친다.
셋째, 한과 흉노가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어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
넷째,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이를 보면 한은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합의는 기원전 198년 가을 한나라 종실의 공주가 흉노에 도착함으로써 실현됐다. 특기할 사항은 양 조정(朝廷)에 왕위 변동이 있을 때는 새로운 혼인으로 동맹을 갱신해 갔다는 점이다. 또 중국이 흉노에 내는 조공의 액수도 한과 흉노 간의 역학 관계에 따라 수시로 변동됐는데 일반적으로 한의 조공 액은 매년 증가됐다. 기원전 192년부터 135년까지 적어도 아홉 차례에 걸쳐 한이 흉노에 대한 조공액을 인상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음을 볼 때 한이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여하튼 한(漢)은 유방 이후 무제가 집권하기 전까지 60여 년 간 공물과 공주(본래는 황녀를 가리키지만 종실 일족의 딸이나 후궁을 황녀라 속였다)를 보내고 평화를 유지했다. 중국학자들이야 이런 표현에 반대하겠지만 객관적인 상황으로 보아 맞는 말이다.

묵특선우는 흉노의 전성시대를 연 사람으로 당시에 동호(東胡, 동호는 어떤 원어를 한자음으로 쓴 것이 아니라 ‘동쪽 오랑캐’를 의미하는 한자어로 추정)가 매우 강성했는데 동호가 흉노를 경멸하고 묵특의 천리마와 연지(흉노의 후비(后妃)의 칭호, 원음은 ‘알저’)를 요구했다.

부하들이 동호의 무례함을 나무라며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라고 하자 묵특은 ‘나라와 인접하면서 어떻게 말 한 마리와 여자를 아끼겠는가’하며 순순히 주었다. 그후 두 나라 사이에는 황무지로 1천여 리의 땅이 있는데 황무지이므로 동호가 갖겠다고 말했다. 신하들 중에 버린 땅이므로 주어도 좋다고 했지만 묵특은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라며 동호를 습격해 왕을 살해하고 백성, 가축 등을 노획했다.

▲ 북부여의 근거지 중의 하나로 추정하는 아성, 사진의 토성은 금나라 때 세웠다.  ⓒ
사마천은 동호(東胡)를 예맥조선이라고 적었다. 예맥조선족이 기원전 700~기원전 500년에 있었던 지역은 중국의 고원지대인 오르도스 지역으로 추정한다. 동호를 이민족 국가로 보지만 동일 문화권 내에서도 고조선 외에 부여, 예맥, 진번, 임둔, 진국 등 다양한 국가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여하튼 패전한 동호를 대신해 흉노가 유목기마민족의 패자가 됐는데 묵특은 자신의 치세 동안에 대대적인 정복활동을 벌여 아시아 초원의 연변에 있는 거의 모든 민족을 복속시켰다. 그의 영토는 동으로 한반도 북부(예맥조선, 사마천은 동호를 예맥조선이라 적었다), 북으로 바이칼호와 이르티시 강변, 서로는 아랄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渭水)와 티베트 고원까지였다. 이는 그 영토가 중국의 거의 3배에 가까울 정도의 대제국이라는 것을 앞에서 설명했다.

흉노가 예맥조선이 근거한 한반도 북부를 정복했다는 것은 흉노의 지배 영역에 한민족이 속했다는 것을 뜻한다. 주법종 교수는 고조선은 중국과는 춘추ㆍ전국시대 및 진ㆍ한(秦ㆍ漢) 교체기에 조선이란 존재의 다양한 정치세력과 조우하며 특히 위만조선 시대를 전후해 흉노로 대표되는 기마유목세력과 교류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스기야마 마사아끼는 조선 방면이 흉노의 관장 하에 있었던 시기가 먼저 있고 이어 그 연장선상에서 한(漢)이 한반도로 진출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는데 이것도 흉노에 격파된 동호가 예맥조선임을 근거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김상천 박사는 위에서 설명한 동호는 북부여를 뜻한다고 주장했고 서영수 박사는 동호를 이민족 국가로 보지만 동일 문화권 내에서도 고조선 외에 부여, 예맥, 진번, 임둔, 진국 등 다양한 국가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계속)


참고문헌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역사와 민속』, 박원길, 민속원, 2001
『터키사』, 이희수,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99
『유목민이 본 세계사』, 스기야마 마사아키, 학민사, 2000
『고조선과 고구려 역사를 다시 본다』, 김상천, 도서출판 주류성, 2003
「고조선과 우리민족의 정체성」, 서영수, 백산학보 제65호, 2003
「게르만 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한민족의 친연성(親緣性)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66호, 2003
「고구려와 흉노의 친연성(親緣性)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67호, 2003
「고조선의 영역과 그 변천」, 주법종, 한국사론 34, 2002

/이종호 과학저술가  
출처 : 아이저아라
글쓴이 : 아이저아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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