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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국과 다른 전력의 고구려

monocrop 2007. 7. 5. 01:10

중국과 다른 전력의 고구려

 

 

사상 최강 고구려의 원동력은 과학(4)

 

▲ 제갈공명.  ⓒ
고구려가 중국과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가 갖고 있는 고구려 나름대로의 노하우 때문이다. 중국과 고구려가 동북아의 패권을 놓고 수많은 전투를 벌였지만 양국은 전투 방법부터 완전히 달랐다. 그것은 중국은 중국 나름대로의 전투 비법이 축적되어 있었고 고구려는 고구려대로 비장의 전투 기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전투 방법에 대해 김운회 박사의 글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한다.

중국은 기원전 1028년 주나라의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정벌하면서 전차 3백대, 용사 3천명, 갑사 4만5천명을 거느리고 위수를 따라 동쪽으로 출발하여 맹진(孟津)에서 여러 부락과 연합한 후 은나라 주왕(紂王)을 공격했다고 사마천은『사기』에서 적었다.

당시의 전쟁 현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지만『주례(周禮)』에 의하면 병사 5명을 오(伍)라고 하고 5오를 1량(兩), 4량을 1졸(卒), 5졸을 1려(旅)라고 하였고 5려를 1사(師)이라고 하며 5개의 사를 군(軍)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1량(兩) = 25명, 1졸(卒) = 100명, 1려(旅) = 500명, 1師 = 2천500명, 1군 = 1만2천500명이 된다. 근래 사용되는 여단(旅團)이나 사단(師團)도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고대 중국의 전투는 주로 전차전이었다. 통상적으로 전차 1대에 보병이 30명씩 호위하였다. 이 때 사용된 전차(戰車, 또는 兵車)는 크게 공격용 전차인 치차(馳車)와 수비용 전차인 혁차(革車 : 가죽전차)로 나눠진다. 치차는 공차(攻車) 또는 경차(輕車)라고 하는데 대개 경차 1대에서는 말이 4필, 갑사 3명, 병졸 72명이 따라다녔다. 혁차는 수차(守車), 또는 중차(重車)라고 하는데 혁차 1대에는 4마리의 소와 25인의 병졸이 따랐다.

▲ 화기 출현 이전에 유행된 팔진법.  ⓒ
이 당시의 전쟁들은 대부분 전차를 위주로 했기 때문에 주로 전차가 거동하기 편리한 지역을 전쟁터로 선택했다. 그러므로 주로 넓은 평원이 있는 곳에서 국경지대에서 전쟁이 벌어졌으므로 당시의 전쟁을 ‘강장지사'(疆場之事, 국경의 일)라고 불렀다.

그런데 전국시대(戰國時代, 기원전 403~221)에 들어서자 철기의 생산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면서 보병들에게도 질이 좋은 무기들이 지급되기 시작했다. 특히 질 좋은 철기는 무기에도 획기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당시에 주력 무기는 강한 쇠뇌(弩)였는데 사정거리가 비약적으로 늘어나 한(漢)나라의 경우 6백보까지 쏠 수 있는 노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산악 작전이나 경사지 등에서 전투를 할 수 없는 전차전보다는 보병전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보병들이 밀집대형으로 화살을 발사할 때 일렬로 늘어서서 공격하던 전차 진영(車陣)은 엄청난 손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기원전 405년, 단구(亶丘) 전쟁에서 ‘전차 2천대를 노획하고 3만 명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더구나 보병은 인원만 많다면 산악지나 구릉지, 평지 등 전쟁터에 제한을 받지 않으므로 전쟁터의 범위가 넓어지고 작전을 펼치기가 유리했다.

『순자(荀子)』 의병편(議兵篇)에 의하면 위나라(조조의 위나라가 아님)에서는 보병을 선택할 때 ① 세 가지 물건으로 만든 갑옷을 입어야 했고, ② 12석(石)의 힘을 가진 쇠뇌를 쏘는 것은 물론 쇠뇌살 50수를 등에 질 수 있고 ③ 무기를 휴대한 채 3일간의 식량을 짊어지고 하루 1백리 길을 달릴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적혀 있다. 즉 이 정도의 능력이 있어야 정규 무졸(武卒)에 합격할 수 있었다는 뜻으로 당시 보병이 상당한 전투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한나라 때 사용된 전차.  ⓒ
중국의 경우는 춘추전국 시대까지 기병(騎兵)이 단독 병종으로 편성되지 않고 전차병과 혼합작전을 주로 하였다. 그러나 차츰 전쟁의 양상이 복잡해지자 기병이 독립 병종으로 발전하지만 그래도 기병은 고작 5천 필~1만 필에 불과했다. 중국의 장점은 장병 수이다. 전국시대에 들어오면서는 각국의 영토가 확장되고 관료기구도 발전하였고, 초모제도(招募制度)를 실시하면서 경쟁적으로 국방을 강화했으므로 십만 명의 병력은 보통이었고 한 전쟁에 수십 만 명이 동원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형태는 예전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국경에 관문을 만들어 방어하기도 했으나 일반적으로 평소에 대병력을 가동하는 것이 아니라 적군이 침공해올 때에 한해 군대를 동원하여 전투를 벌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갈수록 격화되자 보병전 위주로의 전투만 벌어진 것은 아니다. 지형에 따라 성을 방어진지로 삼아 공격군으로 하여금 소모전을 펼치게 하므로 당연히 성(城)의 공격과 방어기술도 상당히 발달하였다. 전국시대에 들면서 군대가 상주하고 정(亭, 변경의 토담 위에 설립된 감시용 건축물)이나 장애물 등이 건축되고 봉화 설비도 갖추면서 성이나 요새를 서로 연결한다. 이것이 유명한 만리장성의 시원이다.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고 진나라를 세우자 전쟁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만 곧바로 멸망하고 한나라가 건국된다. 진나라의 전투 방법을 계승한 한나라는 전략 전술 면에서 상당한 발전을 나타낸다. 유명한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격돌한 초한전(楚漢戰)을 보면 조직과 지휘 면이나 보급 문제가 매우 진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한 번의 전투가 전체 국면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대치와 수비, 공격 등에 대한 다양한 전술이 구사된다. 이것은 전쟁터가 여러 개로 분산되어 있어서 여러 방향에서 하나의 전략적 목표를 중심으로 작전이 수행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 한국의 각궁(15세기), 한국의 전통 활은 그 휘는 정도가 만궁 중에서 가장 심하며 활줄을 풀었을 때 거의 완전한 원을 이룬다.  ⓒ
중국이 사용한 대규모 보병전은 가장 작은 단위 부대인 소대(小隊)의 경우에 앞줄에 궁병(弓兵) - 창병(槍兵) - 칼과 방패를 가진 보병(步兵) 등의 순서로 정렬했다. 이것은 일단 화살로 공격해오는 적을 공격하여 예봉을 꺾은 후 계속하여 적들이 공격해오면 창병들 간의 교전을 벌인다. 상황에 따라 밀집 보병이 투입되어 전쟁을 종결시키는 것이다.

이때 대규모 보병전을 보다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진법(陣法)이 사용되었다. 진법이란 전쟁시 병력 배치의 방식을 말하는데 진법 가운데는 팔진법(八陣法)이 대표적인 것이다. 64개의 소대를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고 적과 교전을 할 때는 정면과 측면을 지키는 부대로 나머지는 예비 병력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팔진법은 사령관이 군대의 정중앙에서 중군(中軍)으로 전체 병력을 지휘하는 것으로 이 중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네 개의 방향과 북동ㆍ북서ㆍ남동ㆍ남서의 사유(四維)에 여덟 개의 예하 부대를 두는 병력 배치법이다.
『삼국지』에는 촉나라의 제갈공명이 고안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 전부터 운영되던 진법이다. 그것은 제갈공명 이전에도 팔진법에 대한 용어가 나오기 때문이다. 여하튼 팔진법은 전투가 벌어졌을 경우 전투병과 지원팀이 매우 효율적으로 짜여 있어 최적의 공격 및 방위 진형이라고 알려져 있다.

고구려의 기본 전력

고구려가 사상 최강의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기본 전력이 타국에 비해 앞섰기 때문이다. 우리 한민족의 무기인 활, 화살 등 기본 장비가 중국보다 월등했다. 특히 안장 밑에 다는 발받침인 등자를 사용하여 화살을 전후좌우로 발사할 수 있는 파르티안 기사법을 구사했다. 또한 이들 기본 전력을 보다 극대화시킨 개마무사도 활용했다.

▲ 중국 계림 이강의 물소, 열대에 사는 동물인 물소는 과거에도 고구려 등 기마민족이 있는 북방지역에서는 살지 않으므로 물소 뿔은 베트남, 중국 남부에서 수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고구려 고분벽화인 무용총에서 말을 타고 동물들을 사냥하는 무사들의 활은 각궁으로 만궁 중에서도 예맥각궁(복각궁)과 형태가 매우 흡사하며 같은 시대에 중국이 사용하던 활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만궁을 누가 처음으로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지만 한국인의 조상인 예맥인으로 추정된다. 고대 중국인들이 예맥(濊貊)인을 부르는 호칭인 동이(東夷)의 ‘이(夷)’자는 ‘큰 대(大)’자에 ‘활 궁(弓)’자를 연결한 것으로 ‘사람이 활을 쏘는 모습’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각궁은 물소의 뿔로 만든다. 열대에 사는 동물인 물소는 과거에도 고구려 등 기마민족이 있는 북방지역에서는 살지 않으므로 물소 뿔은 결국 지금의 태국이나 베트남, 중국 남부에서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학자들은 이 사실을 들어 과거에도 우리 선조들이 이들 지역과 활발한 무역을 했음이 틀림없다고 설명한다.

고구려의 활은 기병용과 보병용이 다소 다르다. 기병용은 보통 80센티미터(다 폈을 때의 길이이므로 실제로 사용할 때의 길이는 60센티미터), 보병용은 120~127센티미터 정도이다. 위력은 사수의 힘에 따라 큰 차이가 나지만 가까운 거리에서는 갑옷도 뚫는다. 어떤 장수는 화살 한 발로 사람과 말과 안장을 함께 꿰뚫었다는 기록도 있다. 물론 고구려에서 만궁만 사용했던 것은 아니다. 고구려와 친연성을 갖고 있는 흉노(훈족)의 활동 무대에서 만궁과는 다른 한식궁도 발견된다. 한식궁은 뼈나 뿔로 만든 활고자를 부착한 한나라 고유의 중형 활이다. (계속)
/이종호 과학저술가  

출처 : 아이저아라
글쓴이 : 아이저아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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