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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구려의 압록강이 현재의 요하인 23가지 증거

monocrop 2007. 5. 30. 10:28

고구려의 압록강이 현재의 요하인 23가지 증거 

 

 

 

 

출   처 : 단군문화지도(daangoon.pe.kr)

글쓴이 : 구자일

 

 

 

 

 

여기서 한사군의 현도군과 요동군을 지나는 압록강이 현재의 압록강이라는 주장이 잘못된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증거 23가지를 밝힌다.

 

1. 첫 번째 증거 [신당서-고구려전]

고구려의 강역을 기록한 [신당서新唐書-고구려전高麗傳]의 앞머리는 다음과 같다.

고려는 부여별종으로서 동쪽으로는 바다 건너 신라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바다 건너 백제에 이르고

서북으로는 요수 건너 영주에 이르고, 북으로는 말갈에 접했다.

그 왕은 평양성에 사는데 장안성이라고도 하며 한나라 낙랑군지다. 당나라 장안에서 오천리다.
평양성은 산을 따라 굴곡하고 남쪽으로는 패수에 임하고 왕은 패수 북쪽에 산다.
별도로서 국내성國內城과 한성漢城도 있다. 강물은 대요수, 소요수가 있는데 대요수는 말갈 서쪽 남산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안시성을 지난다.

소요수는 요산 서쪽에서 나와서 역시 남쪽으로 흐른다. 양수가 새외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요수와 합친다.

마자수가 말갈 백산에서 나오는데 오리머리처럼 희어서 압록수라고 부르며 국내성 서쪽을 지나서 염난수와 합치고 서남쪽으로 안시를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평양은 압록수 동남쪽에 있으며 강을 큰 배巨로 건너니 압록강은 믿을만한 방어선이다.

高麗,本扶餘別種也。地東跨海距新羅,南亦跨海距百濟,西北度遼水與營州接,北靺鞨。其君居平壤城,亦謂長安城,漢樂浪郡也,去京師五千里而贏,隨山

屈繚爲郛,南涯浿水,王築宮其左。又有國內城、漢城,號別都。水有大遼、少遼:大遼出靺鞨西南山,南歷安市城;少遼出遼山西,亦南流,有梁水出塞外,西行與之合。有馬訾水出靺鞨之白山,色若鴨頭,號鴨淥水,歷國內城西,與鹽難水合,又西南至安市,入於海。而平壤在鴨淥東南,以巨艫濟人,因恃以爲塹。

 

고구려 강역을 확정하기 위해 먼저 대요수大遼水를 찾는다.

[수경水徑]에서 백랑수白浪水와 요수遼水는 요동군 방현房縣 동남쪽에서 서로 합쳐서
안시
安市를 지나서 바다로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도9
압록강은 구려하였고 대요수와 함께 안시 서쪽에서 바다로 나갔고 대요수는 백랑수와 하류에서 합쳤다.

 

백랑수白浪水는 현재의 대릉하大凌河이고, 과거 대릉하와 대요수가 만나던 물길은 현재 고릉하古凌河라고 부른다.

그러면 고릉하와 대요수가 만나는 곳을 고대의 요동군 방현房縣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구방자진溝幇子鎭이 그 흔적이다.

요동군 안시현安市縣은 그 하류 해안이므로 지금의 반산현盤山縣 위치다.

그런데 이 안시현, 오늘날의 반산을 통해서 고구려 압록강鴨綠江이 바다로 나갔다.
즉 신의주에서 바다로 나가는 조선의 압록강은 한사군의 요동군 압록강도, 고구려 압록강도 아니었던 것이다.
대신에 지금의 대요하遼河가 고구려 압록강이었다.

[전한서]의 마자수압록강馬訾水鴨綠江은 “현도군玄菟郡-서개마현”을 지나 국내성을 지나 염난수와 합치고 “요동군 서안평현”으로 바다에 나왔는데 [신당서]에서는 더 남쪽의 “요동군 안시현(반산)”으로 나왔다. 바다가 육지로 파고들어온 열구裂口가 수백년의 퇴적작용으로 점점 메워진 것이다.

 

2. 두 번째 증거 [호종동순일록]

그런데 앞의 [신당서]를 다시 보니까  마자수압록강이 말갈백산 “馬訾水 出靺鞨之白山”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백산은 당연히 우리 민족의 성산 백두산白頭山이 아니냐 싶고,또 대요수는 말갈 서남산 “大遼 出靺鞨西南山”에서 나왔는데 이 대요수의 발원지 말갈도 상식적으로 위치가 이상하다고 질문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오해다.

청나라 강희제가 동쪽으로 순행했을 때 지금의 대요하遼河 설명을 본다. 당시 기록인 [호종동순일록扈從東巡日錄]이라는 책에 나온다.

강희제가 북경北京을 떠나와 요하遼河에 머물렀는데, 요하는 구려하라고도 부르고 요하의 서쪽은 요서遼西, 요하의 동쪽은 요동遼東이며, 원래 말갈 북쪽의 여러 산에서 나오고 도산을 지나 홍주의 애두 우가장에서 양방구梁房口(지금의 태자하와 합치는 곳)를 통해 바다로 들어간다.

駐蹕, 又名 句麗河 西爲 遼西 東爲 遼東 -句麗河-源出 靺鞨 北 諸山中 經 塗山 止洪州 崖頭 牛家莊 出梁房口 入海

즉 여기서 요즘의 대요하도 말갈靺鞨 북쪽의 여러 산에서 흘러나온다고 했던 것이다.

다만 바다로 들어가는 곳은 안시가 아니라 양방구로 바뀌었다. 한나라로부터 2000년이 지나니, 대릉하와 만나 삼각주 서쪽에서 바다로 들어가던 요하가 슬며시? 짝을 바꾸어서 태자하와 만나 동쪽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다. 강 하구 삼각주의 서편에서 동편으로 옮겨간 것이다.

 

강희제때는 요하가 고구려의 구려하句麗河라고 했다. 고구려는 지금 대요하에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현도군 고구려현 옆인 서개마현에서 출발한 마자수압록강이 이렇게 구려하가 되어 흐르는데 마자수압록강이 지금의 대요하 가지가 아닐 수 없다.  대요수도 압록강도 똑같이 말갈에서 나오고

대요하가 구려하였고 마자수압록강을 포함한다.

마자수 압록강이 발원하는 말갈 백산은 위에 실린 지도에서 현도군 북쪽의 산(현재 이름, 우란무두산烏蘭木頭山)이고 대요수가 발원하는 말갈 서남산은 현도군 동남의 산(현재 이름, 차할산察哈爾山)이다.

 

3. 세 번째 증거 [삼국유사]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구려가 도읍한 안시는 요수 북쪽이며, 다른말로 압록이라고도 불렀다.

麗時都 安市城 在 遼水之北 遼水一名 鴨淥

요나라 요수가 고구려 압록강이고 본래 구려하다....

고려승 일연이 고구려 압록강이 요나라 요하遼河라고 알고 있었는데 아마 김부식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김부식이 고구려 발생지를 지금의 요하 서쪽 의무려산 부근이라 한 것이다.


4. 네 번째 증거 [원사-지리지]

[원사元史-지리지地理志] 동녕로東寧路의 설명은 아래와 같다.

"고구려 평양성이자, 장안성은 한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운 낙랑 땅이다. 장수왕이 처음으로 평양에 도읍하여 살았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쳐서 평양을 뽑아버리니 고구려가 동쪽으로 이주하여

압록수 동남 천여리로 옮겨가니, 대동강의 평양은 옛 평양이 아니다."

唐征高麗拔平壤 其國東徒 在鴨淥水之東南千餘里 非平壤之舊

따라서 장수왕의 평양성과 압록강은 현재 대동강 평양의 서북 천리에 있다.

668년 고구려가 망하고, 700년에 당나라가 다시 보낸 고구려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高德武가 후고구려를 다시 세워서 동남쪽으로 옮겨가서 120년간 도읍한 곳이 지금 대동강 평양이다.

 

5. 다섯 번째 증거 [자치통감]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의하면 당태종의 침공 때에 개전 초반에 장량張亮이 해군으로 비사성卑沙城을 습격했다.

비사성은 사면이 절벽이나 오직 서문으로 오를 수 있었는데 其城 四面懸絶...唯西門可上

정명진이 밤에 군사를 이끌고 가고, 왕대도가 먼저 올라서 5월 기사일에 함락시켰다.

程名振引兵夜至,副總管 王大度 先登, 5月己巳 拔之

총관 구효충에게 군사를 따로 주어서 압록수에 불을 환하게 밝히도록 했다.分遣 總管丘孝忠 等 燿兵 於鴨淥水

비사성卑沙城이 대련大連의 대흑산산성大黑山山城이라고 1537년 [요동지遼東志]에서부터 주장해왔다.

그러면 비사성을 함락한 날 그 밤에 압록강에 불 밝힐 수 있겠는가? 아니다.

비사성은 대련반도가 절대 아니다.  그러면 지금의 압록강인가? 군신들이 안시성에서 당태종에게 말하기를 장량張亮의 수군 군대는 사성沙城에 있으니, 부르면 이틀밤信宿(兩夜)에 올 것이라고 했다. 지금의 대요하 하구의 안시성에서부터 사성의 장량을 부르러 가고 응답하여서 군대가 정비하여 배타고 오는데 단 이틀이면 되는 압록강은 결코 지금의 압록강이 될 수 없으니 응당 지금의 요하遼河다.


6. 여섯 번째 증거  "비사목장비"

청나라는 요양시遼陽市에 팔기목장八旗牧場을 두었다. 그 팔기목장 중 하나인 요양시 태자하구太子河區 소기가공사小祁家公社 방쌍수자芳雙樹子 하리하목장蛤蜊河牧場에서 3쾌석비三快石碑가 나왔고, 그중 제1쾌 목장비弟1快 牧場碑에서는

“비사목장 세세거민 영위자뢰 ; 俾斯牧場 世世居民 永爲資賴”라고 했는데

이는 1775년에 기록된 것으로서 “비사목장은 백성들이 세세히 살아온 곳이지만...이제 팔기목장 설치하니까 출입하지 마라”는 팔기목장 설치 포고문이었다. 요양시 서쪽 태자하 강안에 대대로 비사목장이 내려왔던 것이다.

비사성과 달리 고구려 사비성沙卑城은 옥저성이 있던 발해 남해부성이었다. 요나라는 해주海州라고 했고 심양시 동쪽 무순撫順市에 있었고,

해주가 관할하는 요주耀州가 해주 서남 200리에 있었는데, 이 사령 삼한고성의 남쪽에 요주성耀州城이 남아있다.

따라서 장량의 붉 밝히는 비사성의 요병燿兵에서 요나라 요주耀州가 비롯되는 것이다.

비사성의 비사가 빛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빛성이다.

사비성은 새비사성, 새빛성일 것이다. 사비성은 발해 옥주였고 요나라 해주가 되었다. 비사성은 발해 초주椒州였고 요나라 요주耀州가 되었고 지금의 요하遼河에 있었는데 그 요하를 당나라는 압록강이라고 불렀다.


7. 일곱 번째 증거 [전요지]

요양시遼陽市 수산手山 남쪽 7리에 경관京觀이 있었다.[전요지全遼志]의 4권 고적편에 이 경관京觀에 대하여 요동국을 토벌한 진나라 황제인 사마의司馬懿가 만들고 당나라가 훼손했다고 적었다. 위나라 장수 사마의가 도망치던 요동국왕 공손연을 목 베고 나서 요동성 안에 들어가서 성민 7천명을 학살하고 만든 시체탑인 경관京觀을 당나라 사람이 훼손할 이유는 없고 그 시체탑을 당나라가 훼손했다는 기록도 없다.

수나라가 살수 대첩을 당하기 직전에, 내호아來護兒의 수군이 바다로 들어와서 평양의 나곽羅廓 즉 외성外城 안까지 들어와 약탈하다가 결국 대오가 흩어져서 고구려 복병을 만나서 떼로 죽었다. 그들의 시체를 한데 모아, 고구려 전승비를 세웠던 것이 바로 요양시 수산首山의 경관京觀이고,

당나라 초에 고구려와 서로 화해하면서, 당나라 사자 장손사長孫師가 평양에 들어와 직접 경관을 허물고 수나라 전사자들을 제사 지내주고 돌아갔다.

역사 기록에 238년 위나라 장수 사마의가 요동성에 경관을 세웠고, 612년 이후에 고구려가 평양성에 경관을 세웠고, 그리고 당나라 장손사가 경관을 허문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 요양시 수산 경관의 기록을 3세기 위나라 경관으로 보는 것은 절대로 틀린 것이고 7세기 고구려 경관으로 보아야 옳다.

 

8. 여덟 번째 증거 [대원일통지]

[대원일통지大元一統志]에 의하면 요양시遼陽市 동쪽 30리에 명왕산明王山이 있고 거기에는 동명왕릉東明王陵이 있었다.

[대원일통지]는 [거란지契丹志]를 인용하여 부여왕 동명의 묘가 있어서 명왕산이라고 했다. 그리고 고구려왕 동명이라고도 부기했다.

30리 동쪽은 기반산棋盤山(=270m) 위치다.

지금 대동강大同江에 있는 동명왕릉만 오로지 동명왕릉인 줄 알고 있지만 요양시 동쪽 30리에도 동명왕릉이 있었다. 거기 요양시에 고구려 수도도 있었던 것이다. 평원왕의 장안평양성이다.


9. 아홉 번째 증거 "강이식 장군 원수림"

심양시 동쪽 무순시撫順市 살수수薩爾滸水 부근에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姜以式 장군의 묘인 원수림元帥林이 남아있다.

 

강이식 원수림에 남아있던 고구려 석물

 

강이식장군은 수문제의 오만한 국서에 답하여 고구려 군대를 이끌고 산동을 침공하여 수나라를 징벌했고,

수문제가 30만으로 쳐들어오니 이를 요서遼西에서 막아냈고, 그후 수양제가 다시 100만 대군으로 쳐들어왔을 때는 참모총장인 병마도원수를 맡아서 살수대첩을 치러냈으니 그의 휘하에 을지문덕 장군이 있었다.

원수림 역전驛前에 있던 강장군의 원수묘비 비석은 단재 신채호가 기록하였는데 문화혁명 때에 파괴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지금도 원수림에 가면 약간의 석물石物이 남아 있다. 신채호 선생이 보았던 대부분의 유물은 무순의 대형 댐으로 수몰되었을 수도 있지만 일부 남아 있었다.  병마도원수 강장군의 묘가 바로 살수薩水 즉, 혼하渾河를 굽어보는데 당시 고구려 평양성은 살수로부터 멀지 않으니 요양성인 것이다.

고구려 압록수는 살수 서북쪽에 있었다. 그래서 혼하 서북의 대요하遼河가 압록수였던 것이다.

 

10. 열 번째 증거 [발해국기]

[발해국기渤海國記] 상편 국통 중 발해무황제 대무예 기록에서는 “시무왕 장서경謚武王 葬西京”이라하여 놀라게 한다.

해석하면 시호를 무왕이라 하고 서경에 장사를 치렀다는 기록이다. 이제까지 어떤 역사 기록에도 없었는데 어찌 대무예황제가 압록강 유역인 발해 서경압록부에 묻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까?

발해 2대 황제 대무예大武藝 묘비가 1900년 무렵에 흥경興京에서 발굴되어 사람들이 모여 그의 묘비문을 탁본하여 읽어보니 그를 발해 서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었었다고 전한다.

흥경興京이었던 무순시撫順市 신빈현新濱縣은 발해 압록부鴨淥府 소속이었고 이는 압록강의 가지변이 되어야 맞는데, 지금의 대요하遼河로 들어가는 물이고 대요하가 발해 압록강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묘는 신빈현 노성老城 안쪽 홀한정忽罕井 옆 사당 부근일 수도 있다.

 

11. 열한 번째 증거 [신당서-도리기] 1

다음은 [신당서-도리기道里記] 발해 기록이다.

“압록강구에서 배를 타고 백여리를 올라서 다시 배를 갈아타고 삼십리를 가면 박작구이고, 발해 국경이며, 여기서 오백리를 올라가면 구도현성이고 고려 때 왕도였다. 구도현성에서 다시 이백리를 가면 신주다.

신주에서 육로로 사백리를 가면 현주이고 천보때 발해 수도다. 여기서 정북여동으로 600리를 가면 발해 왕성이다.”

道里記/ 自鴨淥江口 舟行百餘里 乃小舫 泝流 東北三十里 至泊汋口  得渤海之境, 又 泝流 五百里 至 九都縣城, 故高麗王都 又 東北泝流 二百里 至神州 又 陸行 四百里 至顯州 天寶中王所都  又 正北如東 六百里 至 渤海王城.  

그동안 이 압록강을 지금의 압록강으로 해석해 왔고, 압록강 집안集安에서 육로로 400리를 가면 대충 길림吉林 화전현樺甸縣 소밀성蘇密城인데, 이 소밀성을 발해 초기 왕도인 현주顯州라고 왜곡해왔다.

지도10 [신당서-도리기]에 의한 발해 여행로, 개원 동북 현주, 요하투 북 현주 참조

신주神州는 [요사-지리지]에서 녹주淥州로 바뀌었고, 고려고국故國이며 발해 압록부 서경성西京城인데 성둘레가 이십리라고 하였다.
淥州,鸭淥軍,節度。本高麗故国,渤海號 西京鸭淥府。
城高三丈,廣輪二十里 石城 都督 神、桓、丰、正 四州

그런데 집안 근처에는 고작 7000m인 산성이 남아있는데 그나마 환도성이란다.
아무튼 여기서부터 200리 물길 위에 임강臨江이라는 곳에 압록부 서경성, 광륜 20리 대성은 흔적도 없다.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는데 존재한다는 가정에서 고구려가 그 안에 마구 꾸겨져 넣어졌다.

그런 광륜 20리의 거대 석성이 지금 압록강 임강에 흔적도 없다는 사실이 바로 고구려, 발해 압록수가 지금 압록강이 아니라는 증거다. 그 벽촌에 세워졌던 20리 거대 석성이 도시 개발도 없었는데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없다.

 


구자일 12. 열두 번째 증거 [호종동순일록] 2


강희제 때의 [호종동순일록扈從東巡日錄]에 의하면

“금나라 태조 아골타가 영강주寧江州에서 파자간산婆刺赶山을 지나 달로고성達魯古城을 지나 요나라 황룡부黃龍府(즉 장춘시長春市 농안현성農安縣城)에 이른다. 그리하여 마침내 현주를 차지했다遂克 顯州“라고 기록하였다.


금나라 장수가 황룡부黃龍府성을 함락하고서 요나라 현주顯州를 함락시킨 것은 2년 뒤의 일이다.
따라서 위 문장의 현주는 요나라 현주가 아니라 발해 현주다.


현주顯州는 당나라 천보 때의 발해 왕도다. 열한 번째 증거 [신당서-도리기]에 의하면 압록강 상류의 신주에서 육로로 400리다.

이제까지는 현재의 압록강을 기준으로 보이지 않는 성, 임강의 신주에서 북으로 400리의 화전현 소밀성으로 주장되어 왔다.

그러나 [호종동순일록]에서는 금나라 태조 아골타의 행적을 인용하여서 발해 현주가 장춘시長春市 농안현성農安縣城 부근으로 기록된 것이다.

발해 현주성의 실상은 장춘시 장춘역 북쪽 관성구에 있는 관성자寬城子다.




13. 열세 번째 증거 [유변기략]


청나라 양빈楊賓이 지은 [유변기략柳邊紀略 卷1]에서

“요하투는 개원의 서북에 있고 구현주의 남쪽에 있다. 遼河套 在開原西北 舊顯州城下”라고 하였다.


요하투遼河套는 요하의 만곡부彎曲部를 의미한다. (투套: 河流 或山脈 轉折 彎曲的地方。하투河套; 황하의 만곡부, 음산산맥 아래..).


요하투는 지금 동요하가 이수현梨水縣을 통과하는 만곡부다.

이 부위를 개원開原의 서북이라 한 것이 맞는데, 동시에 또 구현주舊顯州의 남쪽이라 한 것이다.


구현주는 발해 신주에서 400리 육로 거리로서 천보 때 발해 초기 왕도이기도 하다. 훗날의 발해 중경성은 장춘시 관성자로서 노주(盧州)로 고려되고 그 이전의 발해 중경성 현주는 별도일 것이다. 왜냐하면 장춘시는 송화강 아래에 있고 요하투 북쪽이라고 보기 어렵다.





14. 열네 번째 증거 [요기]

명나라 때 전여성田汝成이 지은 [요기遼紀]에서 서기 1448년, 정통正統13년조에 개원開原에서 동북쪽으로 평정산平頂山 안中에 현주폐성顯州廢城, 요나라 때 중경中京이 있다고 하였다.

開原 東北 平頂山中 有 顯州廢城者 遼時中京也..肥饒之地 不下萬頃...遼河套


개원의 동북방에 발해 현주성이 있었다. 노주 중경성이 세워지기 중경이기도 했다. 개원 동남방의 길림시 화전현 소밀성은 발해 중경이 절대 아니다.

요나라 중경은 적봉시赤峯市 녕성寗城이고, 또 현주顯州도 아니므로 여기서 말한 중경은 발해 중경 현덕부 현주가 옳다.




15. 열다섯 번째 증거 [전요비고]


역시 청나라 때의 [전요비고全遼備考]에도 요하투에 관하여 같은 글이 있다.


요하투는 개원 서북에 있고 구 현주성 아래에 있으며 물은 달고 흙은 후덕하고 평야가 바다보다 작지 않다.

套 在開原西北 舊顯州城下 水甘土厚 平地 不下萬頃...


앞에 12, 13, 14를 종합하면

발해 중경 현덕부 현주는 영강주혼동군이었던 대파고성의 남쪽에 있고, 요하투의 북쪽에 있고, 그리고 개원의 동북방에 있다.

발해 첫 번째 중경성, 옛 현주성은 동요하 요하투 유역이면서 평정산平頂山 안에 있다. 동요하 유역의 평정산을 고려하면 이는 공주령시 쌍성자진과 연화산진 사이에 있는 구릉산으로 고려된다. 여기서 송화강의 가지와 동요하의 가지가 각각 발원한다.

쌍성자진 가까이에 대조양보大朝陽堡가 남아 있는데 이는 평정산중에 세워진 현주 홀한성에 연결된 마을로 고려된다.


대조영의 사후에 새로 지은 발해 중경성은 발해중경현덕부의 첫 번째 수주首州인 노주盧州로서 장춘시長春市 관성자寬城子다.

지금 장춘시 관성자역 북쪽에 있던 관성자성은 성둘레가 남북 4리, 동서 7리로 기록되었다. 성둘레가 무려 22리다.

요나라 상경임황부가 27리, 금나라 상경이 21.5리, 그리고 영안현 동경성의 성둘레가 28리다.





16. 열여섯 번째 증거 [금사-태조기]


[금사/태조기太祖紀]의 건국기를 보면,

금나라 태조 아골타가 처음 거병을 하였을 때, 영강주寧江州는 발해 대씨大氏 소유였는데, 영강주 사람 발해대가노渤海大家奴가 달로고부로부터 아골타를 찾아와서 보고 말하기를 “요나라를 치려고 아골타가 거병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왔는데, 우리는 누구를 따라야 할까?”물으니

태조가 대답하기를 “내 군사가 비록 적지만 (발해) 구국 땅에서 우리 여진과 너희 발해족은 이웃이었다. 마땅히 나를 따르라. 만일 요나라를 따르면 내가 가서 영강주를 치겠다.”고 말했다.

寧江州渤海大家奴 於是達魯古部實裡館來告曰 聞舉兵伐遼,我部誰從?

太祖曰 吾兵雖少 舊國也. 與汝鄰境 固當從我. 若畏遼人 自往就之.

이 직후에 발해 대가노는 아골타의 신하가 되었다. 그러나 영강주 성주 발해인 대약사노大藥師奴는 항복하지 않았다. 아골타는 한달만에 영강주를 쳐서 영강성주인 방어사防禦使 발해인 대약사노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대약사노를 용서하고 풀어주면서 금나라 태조 아골타는 발해와 여진족은 본동일가本同一家라 회유하고 여타의 발해인들도 회유하고 우대하였다. 금나라 4대 황제인 해릉왕의 모후가 발해인이었다.

[신당서-도리기]에서 발해 현주, 즉 공주령시 회덕진으로부터 600리 동북에 발해 상경이 있었고, [신당서-발해전]에서는 발해 상경으로부터 300리 남쪽에 발해 구국이 있었다.


이때, 금나라 태조 아골타의 입으로 영강주寧江州가 발해 구국舊國이라고 말하고 기록된 것이다.

영강주는 [호종동순일록]에서 길림시吉林市 오라고성烏拉古城에서 80리 물길인데 장춘시長春市 유수현楡樹縣 대파진大坡鎭 대파고성大坡古城이다.

발해 중경 노주와 발해 구국이 모두 장춘시에 있다. 숙신고지肅愼故地가 장춘시라고 장춘시는 주장한다.

발해 현주는 공주령시 연화산진 동북 산성이다. 고구려, 발해 압록수는 바로 그 남쪽에 있다.




발해 구국 터인 대파고성 부근에서는 돈화현의 육정산 고분보다 100년 빠른 발해 초기 고분이 대량 발굴되었다. 물론 전한시대 숙신肅愼 고분도 발견되었다. 발해고지가 숙신고지였으니 당연하다.

발해 중경을 길림 남쪽 소밀성으로 보고, 발해 구국을 길림 동남쪽 돈화현 오동성으로 규정한 발해사는 다 헛것이다.





17. 열일곱 번째 증거 [신당서-도리기] 2



지도11 당나라 해로도 및 압록강변 발해 주군현

고구려 압록강이 지금 압록강이 아니라 요하遼河였으면 현재 압록강은 발해 때 무엇이었는가? 오골강烏骨江이라고 했다.


[신당서]에 실린 고탐賈耽의 <도리기>를 본다.

“산동반도 등주登州에서 배를 타고 북으로 오백리를 가면 도리진都里鎭이고, 다시 동쪽으로 연안을 따라 800리를 가면 오골강이 나온다.”

登州, 東北海行 過 大謝島,龜歆島,淤島,烏湖島三百里 北渡烏湖海 至馬石山東之都里鎭二百里. 東方海壖 過靑泥浦,桃花浦,杏花浦,石人汪,橐駝灣,烏骨江 八百里


도리진은 대련大蓮이고 지금 압록강은 고구려 오골강烏骨江이었다. 그러나 오골강도 나중에 역시 압록강이라고도 했다.

서요하西遼河 압록수와 구별하여 동압록東鴨淥이라고도 칭했다.


지금 중국에서 고구려 졸본성이라고 지정한 환인桓仁의 오녀산성烏女山城은 본래 오리고산烏爾古山이라고 했는데, 고구려 오골강烏骨江의 오골성烏骨城이었던 것이다. 고려말에 이성계가 이 오고성을 정벌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있다.




18. 열여덟 번째 증거 [요사/지리지]


고구려 압록강이 지금 압록강이 아니라 요하였으면 현재 압록강 주변은 발해 때 무엇이었는가?

[요사/지리지]에 의하면 요나라는 지금 압록강 북쪽에는 개주開州, 남쪽에는 염주鹽州를 두었다.


지금 단동丹東의 봉황성鳳凰城에 요나라는 개주開州와 개원현開遠縣을 두었는데, 발해의 동경용원부 경주慶州의 이름을 차용하려다가 개주로 고쳐 부른 것이며 경주 부속현이 용원현을 개주 개원현으로 고치기도 했는데 아무튼 이름만 빌린 것이다.


개주開州의 속주 3주를 보면 이름만 빌린 것이 확실하다.개주의 속주는 염주鹽州와 목주穆州, 하주賀州 셋이다.

[요사-지리지] 염주鹽州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염주는 본래 발해 용하군이고 해양, 접해, 격천, 용하 4현이 있었는데 다 폐지하였고 개주와 140리다.

鹽州 本 渤海龍河郡, 故縣四 海洋, 接海, 格川, 龍河 皆廢 隸開州 相去 一百四十里


두만강가의 발해 염주에는 해양, 접해, 격천, 용하 등 4현이 있었는데, 요나라가 발해 염주 이름을 가져다가 압록강의 발해 용하군에 설치했는데, 발해 용하군에는 해양, 접해, 격천, 용하현이 있었지만 다 없앴다.

즉, 요나라 염주는 본래 발해 용하군龍河郡이었으며 해양海洋, 접해接海, 격천格川, 용하龍河 등 4현을 두었었는데 폐지하였고, 개주와는 140리이다.

용하군은 지금 북한의 용천군龍川郡이 되었는데 용천역에서 대폭발 사고가 일어났었다. 이 용천군 동남방에 염주鹽州가 남아있다.


다음 목주穆州의 설명을 본다.요나라 목주穆州는 본래 발해 회농군會農郡이며 회농會農, 수기水岐, 순화順化, 미현美縣등 발해 4현이 있었으나

모두 폐지하였다. 동북으로 개주까지 120리이며 회농현 하나로 통일하였다.

穆州,保和軍,刺史。本渤海會農郡,故縣四:會農、水歧、順化、美縣,皆廢。户三百。隸開州。東北至開州一百二十里。統縣一:會農縣。

발해 회농군의 위치는 개주 서남 120리로서 단동시丹東市 동구현東溝縣 고산진孤山鎭으로 추정된다.




다음 하주賀州의 설명을 본다.

요나라 하주賀州는 본래 발해 길리군吉理郡이며 홍하洪賀, 송성送城, 길리吉理, 석산石山 등 4현인데 모두 폐지하였다.

賀州,刺史。本渤海 吉理郡,故縣四:洪賀、送城、吉理、石山,皆廢。户三百。隸開州。

단, [거란지리도契丹地理圖]에서는 하주가 아니라 길주吉州라고 표시하였고 압록강 남쪽이다. 평안북도 초산군 동남에 송성고성이 있었다.




단동시가 현재 사학계의 주장대로 한나라 요동군 서안평현西安平縣이었다는 왜곡 역사 소설을 뒷받침할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한편 발해는 62주와 천정군泉井郡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여기저기서 더 많은 주와 군이 발견된다.
이는 발해 12대 대인수황제 때의 공적이다.


발해 남해부가 요양시遼陽市 북쪽까지 있었고, 요양시 동남쪽, 본계시 부근은 발해 삼로군杉盧郡이 있었다.

요나라 노주盧州는 발해 중경 노주의 이름만 빌려서, 발해 삼로군杉盧郡 위치에 두었고 삼로군에 발해는 5현을 두었는데, 산양현山陽縣, 삼로현杉盧縣, 한양현漢陽縣, 백암현白巖縣, 상암현霜巖縣 등이다.

요나라 노주는 재경 동쪽 130리에 있다. 이 발해 삼로군의 흔적이 본계시本溪市 삼송산성杉松山城이다.

본本을 한으로 읽는 것이 부여식 혹은 일본식이다. (日本 ; 니혼!!! 본 → 한 汗, 고구려 홀본 忽本 → 발해 홀한성 忽汗城)

그래서 본계本溪에 흐르는 강이 역시 한수여서 거기 삼로군에는 한양현이 있었다.



지금의 압록강 유역에는 발해 용하군, 길리군, 회농군 등이 있었다.

이는 818년 당나라에 조공한 고덕무의 [후고구려]가 본계시부터 대동강까지 자리했던 것을 짐작하게 한다.

819년경에 대인수 황제가 이 고덕무 후고구려를 병탄하여 임진강까지 확보하고서, 그때 새로 발해 군현이 설치되는 것이다.


특히 단동 봉황성은 성둘레가 10000m에 달하는데, 만주에서 제일 큰 산성山城이다. 평지성까지 치면 5위 정도다. 그러나 그렇게 성이 큰 데도 불구하고, 고구려 수도가 여기 있었던 적이 없다. 그렇다면 당나라 안동도호부 도독으로 임명받아 자립하였던 고덕무의 후고구려(699~820년) 때에 도성으로서 건설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713년 당나라가 고려대수령高麗大首領으로 인정한 고정전高定傳은 그 고덕무의 후예다. 당나라 사자 최흔은 대련 땅을 가졌던 고정전의 후고구려를 거쳐서 발해에 들어가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하고 돌아간 것이 된다.




19. 열아홉 번째 증거 “관구검기공비”



지도12 매구곡과 회발성, 관구검 기공비와 환도성

길림성吉林省 집안集安 판석령 板石嶺에서 발견된 관구검기공비毌丘儉紀功碑는 유주자사 관구검의 비장들이 환도성에서 동천왕을 쫓아 천리를 더 추격하여 옥저를 지나 숙신지계肅愼之界에 세운 것이었다.


[삼국지-위지-관구검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245년 양구대전大戰梁口(新民市)에서 승리하여 동천왕 위궁이 패주하자 위나라 장수 관구검은 환도산성에 올랐다. 수천명의 목을 쳤다.

동천왕 위궁은 홀로 도망쳤다. 관구검은 군사를 돌렸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동천왕이 압록원鴨淥原으로 도주하였고 관구검이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도륙하였고,현도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가 동천왕을 추격하니 동천왕은 남옥저로 피했다.

246년 관구검은 다시 고구려를 쳤다. 동천왕은 북옥저인 매구買溝(吉林 梅河口市)로 도망쳤다.

관구검은 현도태수 왕기를 시켜 추격시켜서 옥저 천여리를 지나 숙신지계肅愼之界에 달하여 각석기공刻石記功하였다.

또한 환도산에 돌아와 又到丸都山 불내성名不耐之城이라고 새기고 돌아왔다.


<儉>使將軍<王頎>追之, 絶<沃沮>千餘里, 到<肅愼>南界, 刻石紀功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還. 其後, 復通<中夏>


<동옥저전>에서는 숙신지계가 아니라 옥저동계라고 하였다.

<毌丘儉>遣<王頎>追<句驪王><宮>, 窮<沃沮>東界


양구에서 패한 동천왕은 압록원을 거쳐 옥저로 도망갔고, 양구에서 이긴 관구검은 환도산에 오르고 또 부하를 옥저로 보내 천리나 추격하게 하였고

부하들은 압록강 환도성 천리밖 숙신지계에 관구검기공비를 세웠고 환도에 돌아와 불내성이라고 새겼다.


그런데 중국인들이 저들의 옛말인 중국말을 바로 읽지 못해서 압록강 “환도성”에서 무려 천리나 추격하여 “숙신지계肅愼之界”에 세워진 “관구검기공비”가 발견되자 이를 천연덕스럽게 고구려 “환도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나라 사학자들도 그대로 앵무새처럼 따라하고 있다.

분명히 네 글자로 숙신지계肅愼之界 혹은 옥저지계沃沮之界 라고 적었는데 이것을 “환 도 성” 이렇게 세 글자로만 읽어대니 한심하다.




20. 스무 번째 증거 [요사-아고지전]

[요사/아고지전阿古只傳]은 다음과 같다.


요나라 장수 아고지阿古只는 북부재상이었고, 여태조를 따라서 발해 함락전쟁에 참여하여서 발해 부여성을 함락하고, 발해 노상의 삼만 군대를 기병 오백으로 앞장서서 무찔렀고, 발해를 멸망시켜 동단국으로 바꾸고서 발해의 도적들이 일어나니, 아고지는 강묵기康黙記와 토벌에 나서서 발해 압록부에서 온 유민 기병대 칠천과 만나서 한번 대전에 무찌르고 이천의 수급을 벤 후에 추격하고 진군하여 회발성回跋城을 깨트렸다.


阿古只,以功拜北府宰相,攻渤海,破扶余城,独將騎兵五百,敗老相軍三万。渤海既平,改東丹国。頃之,已降郡縣復叛,盗賊蜂起。阿古只与

康默記討之,所向披靡。会賊游騎七千自鸭淥府來援,勢張甚。阿古只師 魔下精銳,直犯其鋒,一戰克之,斬馘二千余,遂進軍破回跋城。




회발성은 매하구시梅河口市 동쪽 휘남현輝南縣의 휘발성輝發城이 확증되어있다. 압록부 압록강에서 나와서 쫓긴 발해 기병대가 휘발성에 피신했다가 그나마 파해된 것이다. 압록부가 만일 집안이라면 휘남에서 거기 집안의 제 집까지 물러가 내려가서 숨고 방어할 일이다. 그러나 압록부가 요하였기 때문에 거기서 밀려서 동쪽으로 피신한 발해 기병은 더 갈 곳이 없어서 휘발성에서 싸우다 옥쇄한 것이다. 그래서 발해 압록부는 휘발성의 서쪽 지금의 요하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요사/영위지營衛志]에서 휘발성이 있던 회발부回跋府와 오고부烏古府(=환인현桓仁縣 오녀산성烏女山城)와 장백산長白山府는 회홀부回鶻府와 같이 “외십부外十府”로서 요나라 직할이 아닌 토착 수령들의 독립적인 부府가 되었다. 그런데 압록부 환주, 신주 성들은 요나라 직할이다.
즉 압록부가 환인현의 오고성이나 매하구시의 회홀성보다 요나라 내지에 가까운 서북쪽이었던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동천왕이 도망친 매구여, 즉 매하구시는 대무신왕 때 복속했는데, 주몽에게 이미 망한 북옥저가 동쪽으로 이주한 것이다. 이 동천왕이 압록원을 넘어 피신한 매구여와 발해 압록부 기병이 피신한 휘발성은 같은 경로다. 동천왕 때 압록원이 발해 압록부 신주성이 되었었다.

요나라가 고구려를 칠 때에 거란군은 신의주가 아니라 집안 가까운 곳에서 청천강을 타고 쳐내려온 기록이 있었다. 지금 압록강 북쪽의 진강진振江鎭이 금나라 파사부로서 고대로부터 도강의 거점이다. 625 때도 중국인민군이 집안에서 압록강을 넘어 남진해왔다. 역사는 그렇게 자꾸 반복되니 미리 제대로 역사를 알고 올바로 대처해서 침공 길목을 정확하게 막아서 우리 미래를 굳게 지켜야 한다.





21. 스물한 번째 증거 “평양성벽각서”


고구려 압록강이 대요하였고 고구려 평양성이 요양에 있었다면 대동강의 평양은 고구려 때 과연 무엇이었는가?


대동강 평양에서는 6세기경에 고구려인에 의해서 현재의 평양성이 세워질 당시에 만들어진 “평양성벽 각서刻書”가 발견되었는데, 그 성벽에 평양이라는 말은 전혀 없고 대신에 오로지 “한성漢城”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고구려가 당나라에 항복했던 대동강 평양성은 본래 고구려 한성漢城이었다.

“漢城下 後部小兄...”


여기서 “한성하漢城下”는 고구려 한성이 고구려인에 의해 건설 도중에 잠시 백제에게 함락되었던 사실을 의미한다.

506년 백제 무녕왕武寧王 때다.

아니 본래는 백제 북한산성北漢山城이었는데 고구려 광개토왕이 빼앗았다.

이 지역에 살던 백제인들이, 일본에 가서 백제촌을 짓고, 그들의 고분 속에 평양의 밤하늘, 평양의 별자리를 그려 넣었으니, 그것이 일본 나라현奈浪(樂浪의 차자다)의 기토라 고분에서 발굴되었다. 지금 대동강 평양 땅에 한수라고 하고 한성을 짓고 백제인들이 살았던 사실을 모르는 역사학자들이, 일본 백제촌에 고구려 간첩이 스며들어 감히 고분을 만들고 게다가 고구려 하늘 별자리를 그려넣었다고 해석한다.


광개토왕이 뺏은 고구려 한성이 본래는 백제 온조왕이 마한馬韓에게서 뺏은 마한의 평양 한성이었고, 그래서 고구려 남평양, 혹은 하평양下平壤(/광개토왕비문)이라고도 했다. 그 남쪽에 근초고왕의 수도 한산성漢山城이 있었다.

[삼국사기-거칠부전居柒夫傳]에서 나제동맹군의 백제가 앞서 나가서 평양성을 쳤다고 했는데 대동강 평양, 즉 하평양이다.


장수왕의 침공으로 개로왕이 죽고나니, 공주로 천도한 백제는 지금의 황해도 예성강禮成江에 위례성慰禮城을 다시 만든다. 위례성의 물이 위례성강이고 다시 간단히 줄여서 예성강이다.

예성강 상류는 부여면의 위라천位羅川이다. 부여면 위라천과 예성강을 합치면 위례성慰禮城이 나온다. 현재 남아있는 평산의 태백산성太白山城이 그 위례성인데 충남 부여의 백제 왕궁인 부소산성夫蘇山城과 닮은 꼴로서 매우 유사하다.

또한 백제 대방태수帶方太守 장무이묘張撫夷墓가 황해도 봉산鳳山에서 발굴되었다.

이 대방태수묘는 무녕왕릉武寧王陵과 똑같은 벽돌묘로서 무녕왕릉의 모델이다.

따라서 백제는 서울 한성에 도읍한 사실史實이 없다. 그래서 서울에서는 대규모 백제 고분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벽돌로 지은 고분이 하나도 없다. 물론 사신도 같은 벽화 고분도 없다.

무녕왕武寧王 때에 공주의 백제가 고구려에 반격하여 평양과 백제 한성을 수복한다. 평양성벽각서에 의하면 한성을 쌓던 고구려가 놀라 도망간다.

백제는 이때 평양과 한성을 수복하는데, 평양은 백제의 북한산성이었고 고구려의 한성이었다.

백제 한성은 성천의 홀골산성 즉 첫 번째 위례성慰禮城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평양은 백제고지百濟故地라고 나온다.

지금의 대동강, 즉 백제 한산성의 하늘도 물론 백제 고향 하늘이었다.


고구려 광개토왕 이전에는, 백제가 고구려보다 인구가 더 많고 사회가 훨씬 발전되었을 것으로 본다. 특히 요양시, 평양시 벽화 고분을 보면 그렇다.


백제 무녕왕 사후에 안장왕의 고구려 대군이 황해도 오곡五谷, 즉 황해도 복판 서흥瑞興으로 쳐들어온 것은 황해도가 백제 땅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백제 성왕 때에 고구려 도살성道薩城(=황해도 연산군燕山郡 도소면道所面)을 함락시키니, 고구려가 백제 금현성金峴城(=황해도 평산군平山郡 태백산성太白山城, 즉 2차 위례성慰禮城)을 빼앗는 전투가 있었는데 느닷없이 신라 이사부異史夫가 둘 다 빼앗는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는 두 성을 우두방牛頭方(=금천군金川郡)과 니미방尼彌方이라면서 주석했는데 바로 그 위치다. 그리하여 진흥왕의 신라가 예성강禮成江 하구에서 중국과 교통하게 된다.


이후 백제 여창餘昌 왕자(=위덕왕)가 552년에 평양을 한번 더 침공하여 고구려군을 동성산으로 쫓는다. 일본에서는 동성산을 대동강 평양의 대성산성으로 풀이하고 있다. 백제 위덕왕 여창은 북제北齊에서 동청주자사東淸州刺史라고 하였다. 동청주는 중국 산동성의 청도시淸島市를 가리키는데 백제의 교두보였다. 백제가 진晉나라 이래로 송나라, 남제국, 양나라 시대까지 백제 해군력으로 양자강 북쪽, 산동성 일대를 장악했었다. 북위北魏는 이 백제 땅을 뺏으려고 489년에 전쟁을 일으켰지만, 백제 동성왕 때에 이를 막아냈다.


고구려 고분이 압록강鴨綠江 집안에 수만 개가 있다. 신라 고분도 수만 개가 경주에 있다. 백제만 그 수만 개의 고분이 없다.

서울 송파에 몇 개...공주에 몇 개...이건 절대로 사실이 아니다...역사가 왜곡 조작된 것이다. 그 잃어버린 수만 개의 백제 고분이 대부분 대동강 평양과 황해도에 있었다. 지금까지 낙랑樂浪 고분으로 알려진 수만개의 고분들이 실상은 백제 고분이었다.

한사군은 한반도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평양성은 언제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졌을까? 지금 평양의 넓은 부분을 차지하는 외성은 기자정箕子井 제도로서 성안 거리가 세워졌고,

이는 당나라 장안성長安城을 모방한 것이다. 따라서 이 평양성은 당나라 장안성이 만들어진 다음에야 만들어졌고 고구려 평원왕 때 만들어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고구려 보장왕이 당나라 장안성에 끌려갔다가, 다시 안동도호부 도독, 조선군왕으로 요동, 즉 고구려 텃밭에 복귀했었다.

그러나 곧 말갈과 내통한다는 반역의 의심을 받고 소환되어서 죽고 그 다음에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가 다시 안동도호부 도독으로 요동에 오는데, 그는 소환당하지 않고 확실하게 독립해버렸다.그가 당나라 장안에서 이 대동강 한성에 돌아와서 평양이라고 고쳐 부르면서 당나라 장안을 본 따서 평양성을 완성한 것이라고 보면 매우 타당하다. 고덕무의 후고구려는 699년에서 819년까지 무려 120년을 존속했다.

산동반도의 평로치청절도사 이정기의 제국齊國(761~818년)보다 오래다.


지금의 단동 봉황산성과 대동강 평양성은 이 “고덕무 후고구려” 시대의 작품이다. 평양 남쪽 정릉사 동명왕묘도 역시 고덕무의 후고구려 때에 지어졌을 것으로 고려된다. 반면에 백제 시조 온조왕이 세운 백제 한수의 동명왕묘는 대동강 동북쪽 온조의 위례성이 있던 성천 홀골산성 부근에 세워졌다.





22. 스물두 번째 증거 “천남산 묘지”


천남산泉男産은 연개소문 차자로서, 형 천남생泉男生을 배반하여 대막리지가 되었다가 당나라에 항복했는데 낙양에서 발견된 “천남산 묘지문”에서는

"한성漢城을 지키지 못해 왕의 신물을 가지고 항복해 왔다." 라고 적었다. 漢城不守 貊弓入獻 楛矢來王

즉, 고구려가 패망한 대동강의 마지막 평양성은 본래 고구려 한성이었다.


역사 연구는 그 시대에 가장 가까운 시대의 기록과 바로 그 지역의 기록을 우선한다.

고구려의 땅, 그 중에서도 수도를 잃었기 때문에 우리는 고구려 지역의 기록을 거의 갖고 있지 못하다. 500년이나 지난 뒤에 고구려의 귀퉁이 끝에서 쓰여진 고려시대 김부식의 기록, 삼국사기 고구려, 삼국사기 백제는 그래서 신빙성이 적은 것이다. 천남생, 천남산, 천헌성 묘지 등은 고구려 멸망 직후에 쓰여졌고, [삼국사기]보다 무려 500년 전에 쓰여진 것이다.




23. 스물세 번째 증거 “천남생 묘지”


“천남생 묘지泉男生墓誌”에서

천남생의 출생지를 요동군-평양성遼東郡平壤城이라 기록하였다.

이는 대동강의 임시 평양이 된 고구려 한성, 임시 평양과 확실하게 구별한 것이다.

게다가 장수왕이 도읍했던 낙랑군 평양성(=요양시遼陽市)과도 구별이 모호하다. 당시 중국 기록에 요동군을 가진 고구려왕에 대하여 요동왕이라고도 했으니 낙랑군 평양성 고구려왕성이 요동군 평양성이라고 잘못 기록될 수도 있다.


본래 하평양성下平壤(/廣開土王碑文)이나 남평양성南平壤城(桓檀古記-高句麗)이라고도 부르던 고구려 한성漢城인 대동강 평양성과 다른 것이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서 김유신金庾信은 황해도 수안을 거쳐 평양으로 공격해 가는데 그 평양은 장새현獐塞縣이었던 수안遂安으로부터 거리 36000보步로서 그 기록은 분명 지금의 대동강 평양이다.


고구려가 대동강 평양성에서 망했지만, 그 평양성은 본래 고구려 한성이었다면, 언제부터 고구려왕이 대동강 한성에 피난하여 살게 되었을까?

당나라 태종의 645년 침입 이후, 소정방의 고구려 침략이 있던 660년 사이로 추정된다.
 X  2007
출처 : 아이저아라
글쓴이 : 아이저아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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