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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비미호가 알현코자 한 것은 중원의 황제인가 조선의 천자인가

monocrop 2007. 3. 9. 05:00

비미호가 알현코자 한 것은 중원의 황제인가 조선의 천자인가

 

글 :신가화섭 (timecoree)                                                       2007/02/04 11:54

 

http://blog.naver.com/timecoree/90013936743

 

 

○서기 238 (경초2년) 6월에 왜의 여왕이 대부 난승미 등을 보내어 대방군에 찾아들어 천자를 예방하고 공물의 헌상을 원하니 태수 유하가 관리를 파견하여 경도에 이르렀다 그해 십이월 조서를 내려 왜 여왕에게 답하길 그대가 대부 난승미와 차사 도시우리를 보내와 남자 네 명과 여자 육 명 포 두필 이장을 바치니 이에 이르렀다.

그대가 있는 곳이 멀고 먼 곳에 있음에도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니 그대의 충효가 이와 같아 짐이 슬프기까지 하구나 이제 금인자수를 내려 그대를 친위왜왕으로 봉하여 대방태수에게 보내니 그대는 백성을 어루만지고 효성스럽게 순종하기에 힘쓰라 -삼국지 동이전-

 

서기 238년 어찌하여 왜 여왕 비미호는 사신을 보내어 천자를 알현하기 위해 대방군을 찾았는가를 살펴보자. 그러기에 앞서 한무제가 설치했다는 한사군과 낙랑군의 위치란 과연 어디인가? 삼국사기에 이에 대한 단서가 존재하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한사군 대동강설이라는 웃지 못 할 코미디가 천년의 시공으로 이 땅을 지배하고 있는 것인지 대략 난감하다

 

○태조 66년 왕이 예맥과 함께 漢의 현토군(玄兎郡)을 습격하여 화려성(華麗城)을 쳤다

○태조 69년 한 유주(幽州)자사 풍환 현토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등이 래침하여 군사 3천 명을 보내 현토 요동의 두 군을 공격하여 그 성곽을 불 지르고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태조 94년 왕이 장수를 보내 한 나라 요동 서안평을 습격하여 대방(帶方)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빼앗아 돌아왔다-(고본)

 

漢의 현토군이 한사군중 하나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태조왕 69년 삼천 명의 군사를 보내 두 군을 공격하는 기사에 유주(幽州)가 등장하고 태조왕 94년 요동을 습격하는 기사에서 대방(帶方)과 낙랑태수가 나타난다.

 

그 누구라도 대동강이 요동에 있다고 하지 못할 것이다 태조 53 66 69 94년의 기사에 연이어 등장하는 당시의 전장터는 평양의 대동강이 아니라 모두 중원의 요동 땅 그리고 한사군의 낙랑고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과 고구려간의 치열한 전쟁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태조 69년 기사에 나타나는 유주(幽州)란 과연 어디인가?

 

이미 천 년 전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유주와 조선 그리고 낙랑군과의 관계에 대해 한서를 빌어 자세히 논하였다 삼국사기 지리지 맨 첫머리에 낙랑군은 낙양 동북쪽으로 5천리에 있다. 주를 달아 유주(幽州)에 속하였으니 옛날 조선국이라고 하였다⦋樂浪郡距洛陽東北五千里 注曰: 屬幽州朝鮮國也⦌(漢志)

 

중국 한지에 기록된 유주(幽州)의 낙랑군 그리고 고구려 태조대왕의 기록은 모두 한사군이 대동강이 아닌 요동에 위치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병도와 그의 수하들은 여러 유적과 유물을 코에 들이대고 한사군이 대동강에 있었다는 엉터리 학설을 고수하고 있다 유주(幽州)란 어디 인가 유주는 현재 중국의 수도인 북경이며 한사군이 바로 유주 관하에 있었다 

 

한지란 중국인들이 쓴 글이 아닌가? 유주(북경)에 있던 고조선을 몰아내고 그곳에 한사군을 설치한 것을 한족 수천 년 역사 중에서 가장 커다란 긍지로 여기던 그들의 사관이 도대체 목숨이 몇 개이며 무엇이 답답해서 만 수 천리 멀리 떨어져 있는 대동강 조선의 경계를 그들의 영토인 북경까지 깊숙이 끌어들여 조선의 영토를 한껏 부풀리고 자신의 나라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소 왜곡한단 말인가?

 

제 정신이 아닌 자가 도대체 누구인가 한사군을 직접 설치하고 그들에게 명령을 하달하던 한의 황제인가 아니면 한의 사관인가 그도 저도 아니면 한줌의 학식으로 한의 황제나 그들의 사관보다도 한사군의 실체에 대해 더 잘 아는 것처럼 오판하며 조선 500년도 모자라 대를 이어 우리는 태고로 식민지의 백성이라는 바이러스를 온 나라의 국민들에게 학습시키고 있는 이 땅의 사학하는 괴물들인가?

 

일제 시 대동강 토성리 유역에서 발견된 봉니 인장 고분 토성등 중국식 유물들을 근거하여 발굴자들은 그것을 한사군의 유적으로 보고 하였다 이로 인해 아득한 고대부터 한반도에 한사군이 주둔하였다는 가공의 역사가 창조되었다 또한 이곳에서 발견된 유적과 유물들은 식민사학을 신봉하는 국내의 학자들에게 그들의 주장을 학문에 충실한 논거로 보이게 하는 소위 실증사학의 근간이 되는 비중 있는 유물이다 그러나 이들 유물은 매우 많은 문제를 갖고 있다 조두의 학설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니 간략하게 몇 가지만 지적코자 한다.

 

먼저 발굴된 고분군에는 중국식 고분과 토성이 있다 그중에서 그 위치와 묘제로 보아 제 1호분이 가장 오래된 것이라 발표하였으며 규모가 가장 크다 하였다 따라서 대동강 유역에서 발굴된 중국식 고분은 모두 제 1호분 보다는 늦은 시기에 조성된 것이다 가장 오래되었다는 제 1 호분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화천이 있다 화천은 왕망(新:AD8~22)시대에 발행된 화폐이다 따라서 무덤의 주인이 미래에 발행될 화폐를 미리 예견하여 위조하지 않았다면 이 고분은 왕망시대 이후의 후한代 조성된 분묘임을 말하고 있다

 

다음으로 봉니가 있다 대동강 유역에서는 200여개의 많은 봉니가 수집되었다 이중에서 낙랑대윤장(樂浪大尹章)이라는 봉니가 있다 대윤(大尹)은 왕망 시대의 관직명 이다 전한에서 군의 수령을 태수(太守)라 하였는데 왕망 때 이것을 대윤(大尹)으로 바꾸었다 따라서 이 유적과 유물 또한 왕망 이후에 조성된 것임을 거듭하여 증언하고 있다

 

다음 칠기의 명문이다 왕우묘에서는 영평 12년이라는 명문이 있는 칠기가 출토되었다 영평 12년은 서기 69년에 해당된다. 따라서 일제 시 한무제의 낙랑군 유적이라 발표한 대동강 유역의 중국식 묘제는 BC 108년 설치된 한사군과 무려 170년의 시차를 보이고 있다 또한 한사군의 주체였던 전한이 멸망한 AD 8년으로 부터도 대략 오육십 년이 지나서 조성된 무덤들이다 또한 이 시기란 고구려가 한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하던 모본왕(AD48~53)과 한을 자유자재로 농락하던 강력한 군주 태조왕(AD53~146) 사이에 조성된 묘역들이다

 

왕망이 한을 무너뜨리고 신(新)을 세우자 낙랑군은 낙선군으로 증지현을 증토현으로 개칭하고 낙랑군 총수를 태수에서 대윤으로 고쳤다 그러나 한무제에 의해 고조선지역에 설치되었다는 한사군은 토착민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여 왕망의 신(新)에 이르러서는 임둔 진번 현토 등이 진멸하고 낙랑군만이 잔존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한서와 삼국지동이전 등에 기록된 다음의 기록으로 중국 황제의 명령도 먹혀들지 않는 허약한 한사군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

 

한나라 왕망이 군사를 동원 호를 치고자 하였다 우리 군사들을 강제로 그곳에 보내려 하니 모두 변방으로 도망하여 법을 위반하고 약탈을 하였다 요서의 낙랑군 태수(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죽었다.

 

엄우가 왕망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낙랑의 조선인들(貊)이 법을 위반하고 있으니 마땅히 주군(州郡)으로 하여금 그들을 위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금 함부로 그들에게 큰 죄를 묻게 되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된다. 부여의 족속 가운데 반드시 그들을 추종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우리가 오랑캐를 부수지 못하고 있는 지금 다시 부여 예맥이 일어난다면 이는 큰 걱정거리이다.(고본-유리,31※한,중사료 일치)

 

한의 황제를 제거하고 중원을 한손에 움켜쥔 왕망이 요서에 주둔 중인 낙랑군 총사령관(大尹) 전담(田譚)에게 조선인들을 소집하여 호(胡)를 공격하라 명하자 조선인들이 명령에 불응하고 변방으로 도망하여 법을 위반하고 약탈을 하였으며 낙랑군 총사령관(大尹) 전담은 그들을 추격하다 오히려 살해당했다 낙랑군 총사가 살해될 정도라면 한사군의 주력인 낙랑군 또한 크게 훼손되거나 무력한 상태에 빠졌음을 의미한다.

 

천하를 움켜쥐고 하늘이 높은 줄 모르던 왕망이 기세 등등 야심차게 호를 정벌하려던 그의 계획은 첫 단추도 꿰기 전에 귀뺨이 얼얼할 지경으로 크게 한방 얻어터진 그들 조정에서 만약 이들을 제압할 막강한 한사군이 존재하였다면 황제의 위엄에 먹칠을 한 반란군을 즉각 응징하여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이때 엄우는 왕망에게 이상야릇한 조언을 했다 낙랑의 조선인들(貊)이 법을 위반하고 있으니 마땅히 주군들로 하여금 그들을 위무토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낙랑군 총사령관을 살해한 조선인 반란군들을 오히려 위무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조선을 몰아내고 그곳에 설치했다는 한사군 또는 낙랑군의 존재란 왕망의 신(新)에 이르러 황제의 명령도 집행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에 처해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새로운 황제의 명을 집행하던 한사군의 총사가 살해당하여 패닉 상태에 빠진 중원은 술렁이는 민심을 다독이고 이를 돌파할 명분이 필요했다 엄우는 꾀를 내어 평소 친분이 깊은 고구려 장수 연비(延丕)를 초대하여서는 술 취한 그의 목을 베어 왕망에게 보냈다 왕망이 뛸 듯이 기뻐하며 이후 그는 고구려를 하구려라 칭했다

 

그러나 이로부터 2년 후인 유리 33년 고구려는 오이와 마리에게 명하여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서쪽의 양맥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계속 진군하여 한의 고구려 현을 습격 탈취하였다

 

실체가 불명한 한사군이 설혹 막강한 위세를 누렸다 해도 그 시기란 한사군이 설치된 BC 108년부터 왕망의 新까지 대략 백여 년 정도였을 것이다. 왕망에 의해 漢이 멸망한 이후 남양의 호족과 손을 잡고 신제국 타도를 외치던 떠돌이 정객 유수(劉秀)에 의해  후한이 들어섰으나 서기 49년 고구려 모본왕은 북평·어양·상곡·태원을 습격하여 후한의 유수는 오금을 저려야 했다

 

전한이 중원의 막강한 패자였다면 후한은 동북아 에서 욱일승천하던 고구려로 인해 끊임없이 공격당했고 유수의 아들 명제가 반초를 서역에 파견한 것을 유일한 치적으로 이후로는 무능한 왕들과 끊임없는 외척들의 농간 그리고 내시들의 폭정으로 후한의 정세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중국의 역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왕망시 낙랑대윤 전담이 살해당한 이곳 낙랑군 에서는 또다시 조선인 토착민 왕조(王調)가 낙랑태수 유헌(劉憲)을 죽이고 자칭 대장군 낙랑태수라 칭하며 한사군을 장악하였고 새로 일어난 후한에 복종하지 않았다

 

서기 30년 후한은 한나라에서 가장 촉망받던 明威將軍(명위장군) 왕준(王遵)을 낙랑태수로 봉하였고 그가 군사를 이끌고 요동에 이르렀을 때 낙랑의 한인군리들이 왕조를 죽이고 반란은 겨우 수습되었으나 후한은 저항이 거센 영동 7현을 포기하고 동부도위를 철폐하기에 이르렀다(漢 建武 6년-魏書 東夷傳) 

 

아울러 유화책으로 그곳 조선인 거수(渠帥:우두머리)들을 현후(侯)로 삼아 자치토록 하였다. 이때 유력한 거수를 중심으로 낙랑군의 지배에서 벗어난 옥저와 화려 동예의 거수들은 모두 한의 작위를 배척하였고 스스로를 삼로라 칭하였으며 고구려에 신속(臣屬)하였다

 

또한 태조 69년 조에는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래침(來侵)하여 낙랑지역에 있던 예맥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병기와 마필과 재물을 모두 약탈하였다 하여 우리 땅에 남의 나라 한의 군대가 침입하였다 기술하였다

아울러 고구려는 한사군이 버티고 있다는 대동강을 아랑곳하지 않고 낙랑군의 유주(幽州:북경)를 무인지경으로 통과하여 중원의 요동을 수시 때때로 안방 드나들듯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약 대동강 유역의 중국식 묘제가 기존 학자들의 주장대로 한사군의 유적이라면 배후에 막강한 한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군대를 요동으로 출병하였단 말인가? 자신의 등 뒤에 칼을 꽂으라고 후방을 간과한 채 단순히 요동에 있는 영토에만 눈이 멀어 그곳을 침범한다? 이러한 무지한 전략을 선택할 나라 혹은 장수가 과연 몇이나 존재할 수 있는가?

 

또한 자신들의 본국이 고구려 모본왕에 의해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이 차례로 공파 당하여(한,중 사료일치) 나라가 멸망직전에 이르도록 또한 태조왕이 신라의 남쪽 해안가를 2개월 간이나 유유자적 순행하고 마한과 예맥의 기병들을 거느리고 요동을 수시로 침범할 때 그들은 과연 무엇을 하였는가?

 

이런 무용지물의 군대를 위해 후한은 이들에게 녹봉을 지급하고 무용지물의 군대를 먹여 살리기 위해 수백 년간 바다를 건너 군량미를 실어 날랐으며 고구려는 이를 수수방관했단 말인가? 

 

자 이제 결론으로 들어가자 기원 후 37년 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킨 이후 모본왕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 공격 이후 그리고 막강한 태조대왕까지 근 200여 년간에 걸쳐 대동강 유역은 물론 한사군과 낙랑군의 주둔지였던 북경(유주)은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어 있었다 -漢末更屬句麗-위서 동이전(예濊)

 

따라서 이후 중국의 사서에서 진번 임둔 현토의 3군이 궤멸되자 한사군이란 명칭은 슬며시 사라지고 낙랑이란 명칭으로만 남겨지며 낙랑군마저도 공손씨에 의해 중원과 격절 되자 이후 대방군 이란 명칭으로만 표기되는 것이다

 

예맥의 거수들에게 한나라는 제후의 작위를 내려 회유하려 했으나  여러 거수들이 한나라 제후의 관직을 버리고 스스로를 삼로라 칭했다 이때 한나라에 저항하여 독립을 추구하던 불내 화려 옥저의 우두머리들을 예맥거수라 하였고 이로인해 태조 69년의 기사에서 한의 군대가 낙랑고지 예맥의 경계에 들어선 것을 고구려는 (來侵)이라 표현한바 기록에서 보듯 이는 낙랑고지가 고구려와 예맥의 연합세력에 의해 이미 수복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동강 인근에서 발견되는 중국식 유물이란 유리 14년(서기 37년)고구려의 왕 無恤(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그것을 멸망시켰다. 5천여 명이 투항하여 오므로 신라의 여섯 부락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는 기록에서 오랜 기간의 치열한 접전으로 인해 피아를 반복하였던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한족의 냄새가 조금은 남겨있던 예맥고지의 백성들을 당시 고구려 변방의 속주였던 경주로 분산 거주 시키고 그 우두머리들은 예우적인 차원과 함께 한과 고구려의 영향권을 반복하던 이들의 정치적인 변수를 모두 고려하여 격전지 단단대령의 예맥고지로부터 대동강 토성리 유역으로 그들만의 독자적 공간을 마련 이주시켰던 것이다.

 

이 당시 한은 점점 사그러드는 그들의 지배력을 잃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고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온갖 물적 공세와 함께 제후의 작위를 내렸으나  예맥의 거수들은 이를 배척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의 직위 삼노와 한이 내린 제후의 경계에서 꽤나 번민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타 민족에 결코 굴복되지 않는 그들만의 민족자존과 백성들의 끝없는 저항으로 결국 낙랑대윤 전담과 낙랑태수 유헌 등 한사군 총사들을 차례로 살해하였고 한족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려 긴박하게 투쟁하던 예맥거수들의 편린이 바로 대동강변의 중국식 유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대방군의 실체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으므로 첫 번째 계승자인 아우 발기가 왕위에 올라야 했다 그러나 왕비 우씨의 계략으로 둘째 아우인 연우가 왕에 즉위하였고 이에 화가 난 첫째 발기는 처자들과 함께 요동으로 가 요동태수 공손도를 보고 말했다.

 

나는 고구려왕 남무의 동복아우이다 남무가 죽고 아들이 없는데 나의 아우 연우가 형수 우씨와 공모하여 왕위에 올라 천륜과 대의를 어겼다 원컨대 군사 3만을 빌려주어 연우를 치게 하면 응당의 대가를 치르겠다. 공손도가 그 말을 들어 주었다 이에 요동군사 3만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셋째 계수의 고구려 군에 대패하였고 계수의 질책에 부끄러워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한국의 기록-고본)

이러한 형제간의 내분으로 인해 낙랑군의 거점에서 회복되어 백 수년간 고구려 땅으로 유지되던 단단대령의 영토는 약속과 신의를 중시하던 고대의 관행으로 요동태수 공손도의 관할이 되었다(197년)

 

부여는 본래 현토군에 속하였는데 한말에 공손도가 바다 동쪽에서 크게 일어서자 바깥 오랑캐를 위엄으로 복속시켰다 환제와 영제 말에 한예가 강성해지자 군현들이 능히 제도 하질 못하고 백성들이 많이 한국으로 들어갔다 건안 중에 공손강이 둔유현의 남쪽 거친 땅을 나누어 대방군으로 삼고 공손모 장창 등을 보내어 유민을 모아 병사를 일으켜 한예를 쳤다 옛 백성들이 점점 나오니 이후로 왜와 한이 대방군에 속하게 되었다(중국기록-위서동이전)

 

고구려의 집요한 공격으로 AD 150년 이후 한나라의 황제이던 순제 충제 질제 환제 영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황제들이 제위에 오른 지 1~2년 사이에 주변의 부하나 환관들에 살해당하는 매우 불안정한 시기가 지속되었다 이후 삶에 지친 서토의 백성들이 산적으로 변해 곳곳에서 황건적이 되어 날뛰었다

 

189년 영제가 사망하고 소제가 즉위하였으나 동탁에 의해 폐위되었고 한나라의 마지막 황제 헌제가 위에 올랐다 그러나 국가의 권위란 존재하지 않았고 곳곳에 군웅이 활거하고 고구려의 지속적인 침공으로 인해 동탁은 급박하게 낙양에서 장안으로 수도를 옮겨야만 했다

 

조조는 동탁의 수중에 있던 꼭두각시 황제인 헌제를 허로 불러들여 실권을 장악하였고 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는 조조의 아들 조비에게 폐위 당하여 후한은 멸망하였다(220년) 이후 유비의 촉과 손권의 오가 각축하며 위촉오의 삼국시대가 열렸다

 

조조의 휘하였던 사마의는 대도독이 되어 238년 요동의 공손씨를 멸망시켰고 이후 손자인 사마염에 이르러 그가 섬기던 조조의 위를 멸망시키고 낙양에 도읍을 정해 진을 건국하였다(265년)

 

그러면 이와 같이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중원의 정세에 대해 바다에 멀리 떨어져있어 이에 대해 명확히 알지 못하던 서기 238년의 왜 여왕 비미(卑彌)는 어찌하여 사신을 보내 천자를 알현코자 대방군을 찾았는가? 이에 대해 중국과 일본은 물론 한국의 학자들도 공히 그녀가 중국의 황제를 만나고자 방문하였다는데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대방군 또한 매우 혼잡한 정세가 펼쳐져 3대의 공손연에 이르러 대방군은 위에게 멸망하였고(238년) 낙랑군은 위의 유주자사에 속하게 되었으며 그 뒤 위(魏)가 서진에 멸망하자 서진의 유주자사에 속하게 되었다. 이 당시 낙랑군의 규모를 설명한 진서 지리지에서는 통현 6에 호(戶) 3700이라 하여  매우 왜소한 형태로 낙랑군이 잔존하였음을 그들 스스로 증언하고 있다

 

후한서 공손도전에 의하면 요동의 중서부를 장악한 공손씨는 중원의 제국에게 "나는 요동의 왕이라" 칭했다 하였으니 이로 인해 중원과 요동은 정치적으로 격절되었다.

 

따라서 한무제에 의해 설치된 한사군의 마지막 흔적이던 낙랑군은 후한말 중국과 차단 분리되어 공손씨 개인의 수중에서 운영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공손씨가 스스로를 왕이라 칭했다 하나 이는 독백 같은 선언적 의미일 뿐 주변국에게 실효적으로 그의 힘이 미친 것이 아니며 그는 중원을 떠도는 일개 군벌에 불과한 신분이었다.

 

왜가 방문한 238년 바로 그해 공손씨의 대방군은 위의 사마의에게 멸망하였고 당시 魏의 황제는 명제(明帝:~239)였으나 그마저도 비미호의 사신이 방문했던 바로 그 다음해 제왕(齊王)에게 권좌가 넘어갔다(239년) 그러면 왜 여왕 비미호는 이런 혼잡한 정세를 열도에 앉아서 귀신의 힘을 빌려 혹은 CNN을 통해 알고 있었는가?

 

학자들의 견해대로 그녀가 보낸 사신은 魏나 漢의 황제를 만나려 한 것인가? 이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뱃길로 왜에서 출항하여 대방군에 이르려면 최소한 일 년 전인 237년에 출발해야 했다 또한 그녀가 만약 중원의 황제를 만나려 했다면 배의 기착지란 그들의 황제가 거처하는 낙양과 인접한 곳이어야 하며 그로부터 수개월을 더 허비하여야 하는 대방군이 기착지가 되는 일이란 결코 발생할 수 없다

 

○여왕국에서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천여 리에 다시 나라가 있는데 모두 왜의 종류이다 또한 나국과 흑치국이 그 나라 동남쪽에 있는데 배로 일 년을 가야 이른다!

 

2세기 중반의 왜를 기술한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왜의 남방인 나국과 흑치국을 가는데 배로 일 년을 가야한다고 기술하였다 따라서 왜의 남방보다 더욱 멀리 떨어져 있고 익숙하지도 않은 뱃길로 왜의 사신들이 대방군에 당도하려면 최소한 일 년 전에 출발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면 왜 조정에서 천자의 알현(天子朝獻)을 검토했던 237년 당시 대방군은 위(魏)가 아닌 요동태수 공손씨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다. 따라서 왜의 사신이 만나려 한 것은 여기저기를 떠돌며 걸식하던 후한의 황제가 아니라 요동태수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요동태수 또한 정답이 될 수 없다.

 

왜 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낸 것은 천자(天子)를 알현키 위함이지 일개 군벌의 요동태수를 만나려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공손씨 스스로 天子를 참칭 했다는 기록은 중국의 역사에서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국양왕의 이름은 남무이며 신대왕의 둘째 아들이다 백고가 죽었을 때 백성들은 발기가 어질지 못하다 하여 이이모를 왕을 삼았다 발기는 형임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가의 장수들과 하호 3만여 구(各將下戶三萬餘口)를 거느리고 요동 태수 <공손강>에게 가서 항복하고 비류수 가에 살았다-삼국사기-

○대방은 통현(統縣)7 호(戶)4900-진서-

286년 고구려가 대방을 치자 대방왕은 그의 딸 보과를 아내로 맞은 백제 책계왕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삼국사기

 

대방군에 대한 魏대의 여러 기록들과 오래도록 대방현이 고조선의 속현 이었던 점을 참고 하면 대방군의 백성들 절대 다수가 고구려 고국천왕의 아우인 발기의 소노가 3만여 구와 함께 <조선의 유민들>로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비미호가 알현하려한 천자란 결코 중원의 황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방군은 낙랑의 속현으로서 그곳에선 전한의 왕망 시 요서대윤 전담(田譚)과 후한의 낙랑태수 유헌(劉憲)등이 조선인 토착민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하여 漢으로선 뼈아픈 경험을 가지 있던 매우 위험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중원정권이 수도 낙양에서 가까운 그들의 바다를 외면하고 여러 차례 낙랑군의 우두머리가 살해당하여 그 어떠한 변괴가 발생할지도 모를 불온한 민족의 집거지이며 더구나 그들의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대방군을 통해 황제의 사신을 영접하는 일은 결단코 발생할 수 없는 것이다

 

한나라가 멸망한 220년 이후 요동태수는 물론이며 위 촉 오 삼국의 그 어떤 자라도 왕이나 황제의 칭호라면 몰라도 부풀려지고 가필되어진 중화사에 의존하지 않는 한 천자(天帝의子)에 해당하는 정권은 없다. 무수한 중원의 역사이래. 매우 막강했던 한을 멸망시키고 이후 청천 벽력같은 혁신적인 정책을 펼쳐 중원천지를 벌벌 떨게 한 신제국의 왕망은 스스로를 지황(地皇)이라 호칭하였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매우 긴 글이 될 것이기에 여기서 간략하고 사면이 바다여서 비교적 물의 사정에 밝은 왜의 사신이 수백 년간 한족 정권의 황제들이 거처하던 낙양을 지나쳐 수개월을 더 허비하여 굳이 대방군에 배를 기착 시킨 이유란 극명하다 후한의 학자 채옹은 독단에서 천자라 호칭하여 부름은 동이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풍속이 하늘을 아비라 하고 땅을 어미라 한다. 그러므로 천자라 하였다 라고 기록하였다 ○倭는 스스로 태백의 후예라 한다<梁書>

 

왜 사신 난승미가 천자를 알현하기 위해 대방군에 배를 기착한 이후 왜는 그들 스스로의 눈으로 조선국 천자의 몰락과 새로운 중원의 질서를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에도 외부의 영향력을 등에 업고 열도 내에 존재하는 백여 개의 여러 다른 부족들 보다 우위를 차지하려던 그들의 정략으로 인해 중원과 왜의 관계는 얼마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애초에 왜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낸 목적인 천자조헌(天子朝獻)의 대상이란 다름 아닌 그곳에 수천 년간 존재하여 천하의 피조물이라면 누구나 의 머릿속에 태백의 천제가 거처하는 그곳, 한의 조정에서조차도 천자만이 사용하는 수의인 옥갑을 지어 바쳐 범접할 수 없는 그의 지위를 인정하고 공경을 표하던 밝한의 천제가 거처하는 그곳의 바닷가에 우연히 공손도의 대방군과 신생국 위(魏)라는 나라가 존재하였을 뿐

왜 방문단 원래의 목적은 조선의 천제를 알현코자 하였다는 사실이다. 발해 만에는 지금도 천제의 나루터 天津이라는 항구가 있고 왜의 사신이 배를 대었던 그곳과 멀지 않은 곳에 조선의 수도 아사달이 존재하였음은 결코 우연이 될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