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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신라로 간 고구려 유민의 궤적

monocrop 2007. 3. 9. 05:04

신라로 간 고구려 유민의 궤적

 

글 : 신가화섭 (timecoree)                                                 2007/02/04 11:54

 

http://blog.naver.com/timecoree/90013478020

 


 

 

신라로 간 고구려 유민의 궤적

 

 



고구려 패망 그 후



고구려 패망 후 신당 연합군은 평양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여 고구려 전 지역을 통치하였다. 당의 이적이 황제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당군에게 투항한 성은 11개 점령한 성은 3개 그 외에 투항하지 않고 교전 중인 성 11개 당군을 피해 백성들이 이동한 성은 7개라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유민들은 당에 항거하며 고구려 복원을 위한 치열한 수복전쟁을 펼쳤다 671년의 안시성전투를 시작으로 하여 백빙산과 호로하 전투 등 유민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온몸을 던져가며 끝까지 당의 귀속에 저항하였다

 

당은 고구려 영토를 9도독부로 나누고 당나라 장수 설인귀를 도호부사로 삼아 통치하였다 그러나 이들 당나라 군대를 몰아낸 것은 신라가 아닌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이다 몸에 폭탄을 두르고 달겨드는 이라크의 민병대처럼 고구려 유민들은 맨주먹으로 당나라 병사와 맞섰다 밤을 새고 나면 당나라 군영에는 목이 잘려 나간 병사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당나라 군대는 고구려 정규군과의 전쟁에서도 느끼지 못한 두려움으로 그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670년 평양 인근에서는 당의 주둔 병력과 관인들이 몰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수림성 대형 검모잠이 주동되어 궁모성(황해도)에서 시작된 고구려 부흥운동은 대동강 남쪽까지 휩쓸면서 당의 군사와 관리들을 차례로 살해해 나갔다


부흥군은 고구려 멸망 삼년 만에 당군을 거의 궤멸지경으로 몰아넣었고 평양의 안동 도호부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직면하기에 이르렀고 당군은 본국에 급박하게 추가 지원병을 요청하였다. 이 당시 당나라 군대의 긴박함을 잘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당군 총사이던 설인귀가 신라 문무왕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 편지의 전문은 삼국사기에 실려 있다


고구려가 당에 의해 멸망한지도 거의 삼년이 다 되어가는 문무 십일 년 어느 초가을 날  웬 중 하나가 신라의 병영에서 장군을 만나겠다며 수라병과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눈에 보기에도 꾀죄죄한 거지 행색의 중놈이 최고 책임자를 만나겠다며 별 희한한 소리를 하는데 이런 정신병자를 그대로 통과 시켜줄 위인이 어디 있겠는가?

서너 시각은 족히 두들겨 맞으며 소란을 피우다 이 광경이 부장의 눈에 띄었고 중놈은 그제서야 대뜸 품에서 금인이 박힌 두툼한 파발 한 통을 디밀었다

편지를 받아든 부장은 그 자리에서 당장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의 이름만 들어도 산천초목이 부들부들 떨며 신라 임금마저도 그 앞에서는 숨도 크게 못 쉬던 바로 그자 당총관 설인귀의 편지였기 때문이다


고구려 멸망 후 당군의 위세는 하늘을 찔러 일개 군졸마저도 안중무인으로 위세가 등등하던 시기였다 하물며 당의 총사 설인귀 라니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그런데 산천초목이 숨죽이던 고귀한 점령군 총사의 편지가 보무당당한 기병의 호위도 없이 어찌 거지행색의 중의 손에 쥐어져 은밀하게 전해졌단 말인가


호위병은커녕 당시 당은 고구려 부흥군에 사면을 포위당해 행군총관 설인귀 그 마저도 곡기를 입에대본 게 언제인지 가물거리는 판국이었다. 악에 바친 설인귀는 신라왕에게 장문의 편지를 써 첩자 임륜을 중으로 위장시켜 낮에는 토굴에 숨어있다 어둠이 내려서야 산을 타고 오르내리길 달포 만에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그렇게 하여 역사에 남은 장문의 편지가 신라에 전해졌던 것이다

점령군 총사로서의 건방지기 짝이 없는 문장이지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배고파 죽을 지경입니다 쌀 좀 보내주시오 플리즈..


사면초가에 몰린 설인귀는 긴급의 전통을 당나라와 신라에 연이어 보냈고 이에 문무12년 당의 측천무후는 장수 고간의 일만과 이근행의 군사 삼만 등 4만의 지원병을 긴급히 평양에 증파하였다


굶주림에 지친 설인귀의 군대는 황해도 임진강을 통해 들어오는 당의 병참선을 맞이하기 위해 평양을 버리고 사력을 다해 백수성(白水城)에 모여들었다 이것은 향후 한반도가 당의 영토가 되느냐 아니면 그들이 이 땅에서 쫓겨나느냐를 판가름하는 중대한 기로였다


이때 고구려 유민들은 당의 병참선 사십여 척을 빼앗고 1400의 군졸을 목 베었으며 군마 일천 필을 빼앗았다. 식량도 확보하지 못한 채  굶주림에 지친 설인귀의 부대는 연천의 매초성으로 도주하였고 포위되었다 이제 당나라 군사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이란 신라의 병참지원뿐이었다

 

만약 신라에서 양곡을 지원하지 않는다면 당군은 매초성에서 싸우기도 전에 모두 굶어죽을 지경이었다.

한편 이렇게 고구려 유민들이 목숨을 던져가며 수년간 끈질기게 싸워 당나라 군대를 궁지로 몰아넣을 즈음에 백제에서도 82개성에서 반격이 감행되었고(670년) 백제가 망하고 십년이 지난 671년에는 백제 전 지역을 탈환하고 웅진도독부 또한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에 고립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웅진도독부의 곤경은 문무왕의 답서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당은 백제 고구려를 멸망 시켰지만 정규군 보다 더 치열한 유민들의 공격에 지쳐가고 있었다. 육상과 해상을 통해 식량과 전투물자를 공급받던 당의 보급로가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에 의해 봉쇄당하자 당군은 오로지 신라의 보급에 의존하여 하루하루를 지탱해가고 있었다. 고립된 웅진도독부는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예전 백제의 영토를 모두 부흥군에게 되돌려 주겠다는 굴욕적인 협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백제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생각했던 신라는 이러한 협정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이때까지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과 당나라 사이를 줄타기하며 이율배반적인 행각을 취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황은 문무왕이 고구려 후계자 안승에게 보낸 편지와 이와는 전혀 다른  당나라에 보낸 사죄문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함형 원년 신라왕은 고구려의 후계자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명 하노니 공은 마땅히 유민들을 위로하여 안정시키고 옛 전통을 일으킬 것이며 길이 선린이 되어 형제와 같이 지내기를 원하여 ~중략~ 이에 멥쌀 이천 석 무장마 한 필 능직 비단 다섯 필 견직과 베 각 열 필 면화 열다섯 칭을 보내니 왕은 이를 받으라.


○-문무 12년 저는 죽을죄를 짓고 삼가 말씀 드립니다 예전에 제가 위급하여 어려운 지경에 처하였을 때 먼 곳에서 와서 구원해주어 제가 멸망을 면했습니다. 그러니 몸을 부수고 뼈를 갈아도 그 크나큰 은혜에 보답하기란 부족할 것이며 머리를 부수어 재와 먼지가 되더라도 어찌 그 자비의 덕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중략 ~남산의 대나무도 저의 죄를 적기에 부족할 것이요 포야산의 나무도 저의 착고를 만드는데 부족할 것이니 ~중략~

 

만일 용서를 내려 머리와 허리를 베지 않는 은혜를 베푸신다면 제가 죽어야 하는 날이 오히려 태어나는 날로 변할 것입니다~중략~

 

편지와 함께 웅주도독부 사마 법총과 군사 1백 70명을 당 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은 3만 3천 5백 푼 구리 3만 3천 푼 <바늘 4백 개>(針四百枚:나침반) 우황 1백 20푼 금 1백 2십 푼 40승 포 6필 30승 포 60필을 진상하였다 이 해에 곡식이 귀하여 신라 백성이 굶주렸다


굶주림에 지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당군을 본 신라는 드디어 그들의 태도를 바꿨다. 신라는 이제 거꾸로 고구려 부흥군과 연합하여 당나라 군대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675년 고신연합군은 이근행의 이십만 대군을 총공격하여 매초성(연천)에서 격파하였다 오랫동안 굶주린 당군과의 싸움은 전투가 아닌 일방적인 학살에 불과했고 매초성 계곡은 당나라 군대의 피로 내를 이루었다


고신 연합군은 승리하여 고구려가 멸망한지 8년만인 676년 당의 야욕은 꺾이고 결국 요동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당의 불운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 새롭게 건국된 발해의 장문휴는 제나라 이정기와의 은밀한 협공에 의해 당은 요동에서의 지배권마저 상실 당하고 말았다 여세를 몰아 이정기의 군대는 당의 내륙 깊숙이 15개 주를 빼앗았고 781년에는 낙양과 장안으로 이어지는 대운하를 장악하여 당의 모든 보급로를 한손에 쥐게 된 이정기는 20만의 군사를 몰아 당의 수도 장안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때 이정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당의 정복에는 실패하였으나 그의 공격으로 인해 당은 쇄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수나라에 이어 고구려를 넘보지 말라던 당태종의 유언을 무시한 채 정복전을 감행한 당은 907년 드디어 멸망하였다

 

이처럼 당나라 군대를 한반도에서 몰아낼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죽음을 무릅쓴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의 집요하고도 끈질긴 민중항쟁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중국이 고구려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이유로 고구려 포로를 당나라로 끌고 갔다는 것을 들고 있다 이러한 중국의 주장은 과연 타당한 견해인지 당나라에 끌려간 고구려 유민들에 대해 살펴보자 고구려 유민에 관한 삼국사기 보장왕 편을 보면


의봉 2년 당고종은 포로와 함께 끌고 간 고구려 보장왕을 요동 도독으로 봉했다 그러나 보장왕이 은밀하게 백성을 모으며 말갈과(고구려 원주민) 빈번히 내통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러한 움직임이 고구려 부흥운동이라 파악한 당은 보장왕을 소환하였고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보장왕은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유민들의 수상한 동태에 불안을 느낀 당나라는 681년 유민들을 하남 농우로 분산시키는 조치를 취한바 이중에서 가난한자는 안동성 부근의 옛 성으로 옮겼다고 하였으니 안동성은 집안현(국내성부근)으로서 그곳에 소개된 고구려 유민들이 천 수백 리의 머나먼 길을 도망쳐 신라로 가고 나머지는 말갈과 돌궐로 갔다고 기록하였다


영주에서 일어난 이진충의 난을 기회로 고구려 유민들은 696년 대조영 부자가 주동되어 만주 동부지역으로 탈출하였다 유민들의 탈출 소식을 듣고 뒤늦게 달려온 추격대를 대조영이 이끄는 고구려 유민들은 천문령에서 당군을 몰살 시키고 698년 돈화현의 동모산 기슭에 독립국을 세웠으니 발해다


발해는 국호를 후高麗라 명하고 고구려가 독립을 쟁취하였음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발해의 무왕은 인완(仁安)이란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며 고구려의 독립을 대내외에 선포하였고 732년 장군 장문휴(張文休)를 보내 당의 등주(산동성)를 침공하여 唐 자사 위준을 목 베었으며 3대 문왕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 고려(高麗)국왕임을 천명하였다


첩첩산중 오지의 농우에 끌려간 고구려 유민들은 요동과는 지리적으로 먼 곳이어서  대조영의 탈출 대열에 합류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도 결국 740년경 농우(감숙성)에서 태국의 국경 인근까지 상상할 수도 없는 먼 길을 걸어 당나라를 탈출하였다

유민들이 탈출했다는 소식을 접한 당나라는 군사를 보내 그들을 추격하였으나 현 라후족의 거주지인 운남성 대리(大理)부근에서 몰살당했다 이에 화가 난 당의 현종은 육만의 정예병을 추가로 파병하였으나 이들도 서이하 강변에서  모조리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

 

이렇듯 고구려 유민 대부분 대조영의 인솔 하에 목숨 걸고 당에 항거하며 고구려 영토로 탈출 귀환하여 後高麗를 세웠고 대조영의 탈출 소식을 접한 나머지 유민들마저 당나라의 울타리를 결단코 거부하며 죽음의 먼 길을 걸어 태국 인근의 운남성으로 탈출하였다 이러한 고구려 유민들의 끈질긴 당에 대한 저항의 궤적으로 미루어 당에 남겨진 고구려 유민 때문에 고구려의 역사가 그들의 것이라 주장하는 중국은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파렴치한 것인가를 인식해야 할 것이다


아래 소개하는 기록은 당총관 설인귀가 승려 임륜을 통해 신라왕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 중 일부이다 매우 격한 감정 속에 오고 간 설인귀와 신라왕의 편지에는 매우 적나라하게 당시의 실상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가 쓴 장문의 편지에는 고구려 유민의 행방에 대한 설인귀의 솔직한 견해가 거론되고 있다

앞에서 이미 거론하였지만 이런 격앙된 장문의 편지가 오고 간 내막을 살펴보면 고구려가 망한지도 이미 삼년이 지난 즈음 고구려 전 지역에서 백성들의 저항이 매우 거세게 일어 오히려 점령자 이던 당군은 고구려의 눈을 피해 이곳저곳으로 숨어 다니기에 바쁜 나날이었다.  전 지역에서 승기를 장악한 부흥군은 안승을 왕으로 추대하며 고구려를 재건하기에 이르렀고 설인귀의 안동 도호부는 고립된 상태였다

 

이러한 정황은 설인귀가 보낸  편지 말미에<삼엄한 군진 사이로 사절이 내왕하니 이제 중 임윤에게 편지를 맡겨 의견을 말합니다-<嚴鋒之間 行人來往 今遣王所部僧琳潤齎書>-라는 글귀로 미루어 당시 점령군 총사이던 설인귀가 얼마나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한 당나라 총사령관이라면 당연히 여러 호위대를 거느린 전령을 통해 위엄과 격식을 갖춰 편지를  전달해야 함에도 도대체 무엇이 무서워 <삼엄한 군진 사이로 눈치를 보아가며> 자신의 군사를 제쳐놓고 타국의 일개 승려에게 부탁하여 어느 세월에 편지가 닿을지 혹은 적군에게 발각되어 전달 여부조차 불분명한 기약  없는 편지를 보낸단  말인가 또한 그의 본심이란  

 

<신라왕은 본인이 온 사정을 묻지도 않았고 술과 고기를 보내 우리 군사를 먹이지도 않았다>가 설인귀가 전하고자 했던 내용의 핵심이다 설인귀의 누추한 사정을 잘 아는 신라왕의 답장 또한 걸작이다 ~신라 백성들은 풀뿌리도 모자랐는데 웅진에 있는 당 나라 군사들에게는 식량이 남아돌았다

 

또한 당 나라 군사들은 옷이 헤어져 몸에 걸칠 성한 의복조차 없었다. 이에 신라는 백성들을 독려하여 의복을 지어 보냈다 웅진도호 유인원은 사면이 모두 적이어서 항상 백제의 포위를 당하였으나 언제나 신라의 구원을 받았다 당 나라 군사가 사년 동안 신라의 식량을 먹고 신라의 의복을 입었으니 당군의 가죽과 뼈는 비록 중국에서 났으나 피와 살은 모두 신라의 것이다 ~)

 

역사를 살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사서 뒷면의 감춰진 진실을 찾는 것이다 더구나 중국의 사서를 접할 땐 더욱 유념해야 한다. 중국의 당서 후당서 모두 고구려 패망 수백 년이 지나서 조망된 기록들이다 따라서 당 시대를 가장 정확하게 살필 수 있는 것은 수백 년 후 책상머리에 쭈그려 앉아 정치적으로 재단된 사서가 아니며 그 당대를 산 인물들의 증언에 더욱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얼마 전 중국의 학자는 고구려 인구가 69만7000호라는 구당서에 기초하여 고구려 인구를 70만이라 추산하였고 그중 삼분지일의 약 이십만의 포로가 중국에 갔으므로 고구려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라는 주장을 하였다 

 

69만호를 1호당 5人로 계산하면 약 350만으로 고구려 인구를 집계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압록강 이북의 항복하지 않은 11개 성과 압록강 이북의 도망한 7개성의 인구는 통계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당의 침입으로 이리저리 흩어진 고구려 유민들의 행방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고 삼국사기에 여러 차례 거론되는 신라로 간 고구려 유민의 기사를 보면서 도대체 얼마의 고구려인이 신라로 갔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 文武王  十一年 秋七月二十六日 大唐摠管薛仁貴 使遣僧琳潤法師寄書曰: 行軍摠管薛仁貴致書新羅王 淸風萬里 大海三千~중략~ 巖葛因依 聲塵共擧 洗兵刷馬 咸遵先志 數十年外 中國疲勞 帑藏時開 飛 日給 以蒼島之地 起黃圖之兵 貴於有益 貪於無用 豈不知止 恐失先君之信也 今强寇已淸 讐人喪國 士馬玉帛 王亦有之 當應心 不移 中外相輔 銷鏑而化 虛室爲情 ~~○ 又高麗安勝 年尙幼沖 遺壑殘  生人減半 自懷去就之疑 匪堪襟帶之重


설인귀의 편지 중에는 패망한 고구려의 마을과 성읍에는 주민이 반이나 줄고 도읍은 황폐화되어 패전국 왕으로 있는 안승이 시름에 젖어 있다는 대목이 있다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로 유입되는 처음의 기사는 문무 6년 12월 고구려의 대신 연 정토가 12성 7백 63호 3천 5백 43명을 데리고 와서 투항하였다는 기사를 시작으로 개요 원년 보장왕이 양주로 소환되었다가 영순 초에 사망하였다 그 백성은 하남 농우의 여러 주에 분산 거주케 하였다 그 가운데 일부는 신라로 도주하고 남은 사람들은 흩어져 말갈과 돌궐로 갔다는 기사를 마지막으로 장장 십오 년간에 걸쳐 지속적인 신라로의 피난기사가 나타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전쟁 중 고구려 유민들이 당나라로 피난 갔다는 기록은 중국의 사료에서조차 찾기 어렵다 오히려 당군에 끌려간 포로들도 안동성의 (집안)에서 이천 리를 걸어 죽음을 무릅쓰고 신라로 갔다는 개요 원년의 기사를 보면서 당시 고구려 유민들의 심리 상태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식량도 변변치 않은 상태에서 몇 달을 걸어서 접전이 치열한 평양의 전장터를 지나 당군의 눈을 피해가며 신라까지 가는 피난 자가 되어 보라 이는 죽음을 무릅쓰며 안전한 땅으로 가려는 본능적이며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이다

 

그 당시 국경은 성을 기준으로 하였다 성과 성의 길이는 가까이는 수 Km 멀리는 수십 Km 떨어져 있다 따라서 철조망이 쳐진 지금의 국경선과 달리 주민의 이동은 조금만 주의하면 아무도 모르게 비교적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할 기사는 (보장4년) 당총관 이근행이 호로하 에서 우리 군사를 격파하고 수천 명을 사로잡았다 남은 군사들 모두 신라로 도주하였다 란 기사를 살펴보자 고구려의 핵심은 군인이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는 규율이 엄격하다 전시의 탈영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탈영이 적발되면 이에 대한 엄중한 책임이 뒤 따랐을 것이다 이를 감수하고 군사들이 무기를 놓고 신라로 갔다


기나 긴 전쟁기간 국내성의 포로들이 수 천리 떨어진 머나먼 신라로 탈출하고 고구려 군사마저 무기를 내던지고 신라로 가는데 지리상 신라와 근접한 평양 인근의 민간인들 역시 수없이 신라로 탈출하였다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기사들은 상징적 의미일 뿐 당시 피난자가 모두 집계되었다고 생각할 수 없다


다시 당 행군총관 설인귀의 기록으로 가서<高麗安勝 年尙幼沖 遺壑殘 生人減半 自懷去就之疑,匪堪襟帶之重> 기사에서 번화하던 평양성에 사람들이 빠져나가 절반만 남았다 표현하고 있으며 이에 고안승이 낙담하는 광경이 묘사되고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 인구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도대체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다음 설인귀의 편지를 보자


今强寇已淸<讐人喪國士馬玉帛 王亦有之>이 기사는 고구려 군과 살을 맞대고 싸우며 고구려 전역을 누빈 당나라 총사령관의 글임을 기억하자 수백 년 후 책상머리에 앉아 사료를 근거로 추측하여 작성한 기록이 아닌 그 시대 당군 최고 책임자의 글이기에 어느 기사 보다 더욱 신뢰할 것이다

 

설인귀는 말한다. 현재 중국의 견해와 달리 고구려 백성의 절반이 당나라가 아닌 신라로 갔다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개요원년)기사를 살피면 <673년 이근행이 호로하에서 아군을 격파 후 수천 명 사로잡았으나 남은 군사들은 모두 신라로 도주하였다><당 나라에 반기를 든 고구려 백성들을 신라왕이 받아 들였다 ><보장왕 이 사망하고 그 백성은 하남 농우에 분산 거주시키고 가난한 자들은 안동성의 옛 성에 머무르게 하였다 그러나 일부는 신라로 도주하고 남은 사람들은 흩어져 말갈과 돌궐로 갔다>는 기사 등


설인귀의 편지 이후에도 고구려 유민의 필사적인 신라로의 남행을 살필 수 있다 그러면 앞에서 살펴본 350만 고구려 인구 중 신라로 유입된 고구려 난민의 숫자는 얼마인가 당행군총관 설인귀의 편지에 근거하면 전쟁 중의 전사자를 감안하여도 대략 일백만 이상의 고구려인이 신라로 유입되었다 판단할 것이다


신라로 유입된 고구려인은 평양 인근의 사람들로서 고급 관리를 포함한 핵심 엘리트들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정수는 신라로 갔다고 살펴진다. 이러한 증거는 신라 말기 유사 이래 이 땅에서 최초로 나타나는 민중 항쟁을 통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사벌주에서 일어난 원종과 애노의 반란을 비롯하여 죽주의 기훤 북원의 양길 염주의 유긍순 괴양의 청길을 들 수 있으며 초적과 적고적 이라 하여 붉은 바지를 입은 농민군이 봉기하여 신라의 수도 경주를 위협하기 까지 하였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왜 도둑이 남의 눈에 잘 띄는 빨간 바지를 입고 설치는가? 불행하게도 이들이 무엇 때문에 붉은 바지를 입었으며 무엇을 주장했는지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이 남의 눈에 잘 띄는 옷을 입은 것이 결코 패션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이들의 사상이 어떠했으며 무엇을 주장하기 위해 붉은 바지를 입었는지 이들 반란 세력이 얼마나 폭넓은 민중의 지지를 받았는지 이들의 활동 지역이 주로 유민들의 집거 구역이라는 것 이들이 단순한 도적이 아니고 고구려 혹은 백제의 광복이었음은 재탄생한 후백제 견훤과 후고구려 왕건의 정치 슬로건으로 그들의 주장이 무엇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 헌안왕의 아들로 알려진 궁예는 권력투쟁의 희생자가 되어 전국을 떠돌다 양길의 수하로 들어가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았고 그가 전국을 돌며 신라의 학정에 반발하고 망국의 한을 품고 살아가며 그래서 그들을 하나로 엮을 만한 영웅의 출현을 간절히 희구하는 유민들의 절절한 기원을 오래전 간파하였고 신라 왕족 출신이던 그가 내건 정치적 구호는 어처구니없게도 고구려다


그가 도읍을 정한 곳 역시 고구려 유민들 집거구인 철원 이다 그 뿐인가 견훤 역시 신라 장군 출신이다 그런 그가 내세운 구호도 백제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것은 경주의 울타리 만 벗어나면 만나느니 고구려 유민이었고 백제 유민이었다는 말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서도 패망에 이르는 주요 원인은 신라정권의 실정과 더불어 신라 인구 보다 훨씬 많이 유입된 유민들의 숫자가 최대 불안요소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또 다른 증거는 후삼국 시기 신라의 백성들이 궁예와 견훤의 진영으로 모여들어 국가 존립의 위기에 직면하였으나 그들의 숫자가 워낙 방대하여 중과부족을 인식한 신라는 아예 이들을 토벌할 의욕마저 상실함에서 알 수 있고

결국은 후백제의 견훤에 의해 근품성이 공격당하고 이어서 단숨에 신라의 수도 경주가 반란군 견훤의 말발굽에 유린당하기 까지 그리고 경애왕이 피살당하기 까지 신라는 제대로 된 반격조차 못하고 단지 후고려에 구원을 요청하는 것에서도 허울뿐인 통일신라의 국력을 실감할 수 있으며 고구려와 백제 유민의 급격한 이탈이 얼마나 방대하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증빙하는 것으로 신라를 승계한 고려의 두발 양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고려는 대개 머리에 상투를 틀었는데 이러한 관습은 조선으로 이어져 한일합방 이전까지 조선의 양민들은 흰 바지저고리를 입고 모두 머리에 상투를 틀고 있었다. 그러나 신라의 보편적인 두발양식은 상투가 아니었음을 기록들은 전하고 있다.


무릇 인간의 생활양식은 연개소문이나 신라의 김유신의 정치색깔과 무관하게 자신이 예전에 하던 생활양식을 답습하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신라사회에서 고구려 백제의 유민이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했다면 거추장 스런 상투 따위의 관행은 절대로 지속될 수 없는 것이다 상투뿐만 아니라 김치나 젓갈 간장 된장 두부의 식생활과 온돌 등 서민생활의 밑바닥까지 멸망한 고구려의 풍속이 신라로 파급된 것은 만만치 않은 그들 유민의 광대한 범위를 방증하고도 남는 것이다

일제의 명령에 의해 고종의 김홍집 내각은 1월 1일을 기하여 전국에 단발령을 내렸다 이에 분개한 백성들이 들고일어나 봉기하였고 김홍집은 결국 그들에 의해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정치적 이유만으로 고구려의 민심을 이용했던 궁예는 막강한 권세가 쌓이자 후고려의 국호를 버리고 마진 태봉으로 개칭하였다 이에 고구려 광복을 꿈꾸던 민심은 궁예를 외면했고 송악 출신의 왕건과 신숭겸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이 주동이 되어 궁예를 몰아내고 나라를 세우니 고려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 당시 통일신라 인구 대다수가 고구려 백제의 유민들이었고 결국 절대다수이던 고구려 유민들의 염원이 고려란 나라가 태동된 동기이며 결과란 의미이다.  


고구려 해주몽은 칠세의 나이에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안시성 전투에서 양만춘 장군은 사활을 걸고 고구려를 공격하던 당나라 군대를 당태종의 한쪽 눈알을 뽑아 집으로 돌려보냈다 고구려 벽화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활 쏘는 고구려 무사들이다 이처럼 고구려인들은 활을 다루는데 있어 천부적 재능을 가진 민족이다

한국여자 양궁은 수십 년간 전 세계를 석권하고 있으며 남자양궁 또한 그 실력이 만만치 않다 활쏘기는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모두 명궁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 아니며 노력 이외의 그 무엇을 필요로 하는 스포츠이다 그것은 풍향과 기후변화에 따라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판단력과 함께 오랫동안 피를 타고 이어져 내려오는 내면의 감각이다 고구려의 혈통을 함께 이어받은 북한도 한국의 양궁을 넘보지는 못하고 있다 이는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고구려의 정수가 남한에 이어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또 다른 정황이다


이 글을 쓰면서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는데 그것은 현재 한국 최대 성씨를 이루는 金씨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런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 삼국사기에 나타나는데 신라는 갑자기 넘쳐 나는 유민들에게 정치적 불안감을 느끼고 유화책으로 유민들에게 김 씨의 성을 하사하고 집과 토지를 나누어 주며 금마저(金馬渚)에 살 게 했다 란 기록이 있다 신문왕 삼년의 일이다




※참고자료

666년12월

문무

고구려 연정토가 12성, 7백 63호, 3천 5백 43명과 함께 투항. 정토와 종관 24명 경주와 부주에 안주

668년 6월

문무

고구려의 대곡성·한성 등 2군 12성이 항복하여 신라로 귀순

668년11월

문무

문무왕이 고구려 포로 7천명을 이끌고 신라로

669년 2월

문무

왕의 서자 안승이 4천여 호를 인솔하고, 신라에 투항

670년  6

문무

고구려 수림성 대형 모잠이 고구려 유민을 모았다. 궁모성 으로부터 패강남쪽 신라로 오는 중 서해의 사야도에 이르러 안승을 만났다. 안승을 한성으로 맞아 임금으로 삼았다.

670함형 원년

문무

고구려가 모반하여 당 나라 관리를 모두 죽였다

670 함형 원년

보장

검모잠이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왕의 외손 안순을 임금으로 세웠다. 안순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도주하였다.

673년 5월

보장

함형4년 연산총관 이근행 호로하에서 아군격파 후 수천 명 사로잡음. 남은 군사들은 모두 신라로 도주

675년1월

문무

당 나라에 반기를 든 고구려 백성들을 신라왕이 받아 들였다

681개요 원년

보장

보장왕 사망 그 백성은 하남·농우의 여러 주에 분산 거주. 가난한 자들은 안동성 부근의 옛 성에 머무르게 .그러나 일부는 신라로 도주하고, 남은 사람들은 흩어져 말갈과 돌궐로

 

 

☆ 고구려 패망 전후 신라로 유입된 난민기사 (출처-삼국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