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태종과의 전투 당시엔 고구려 최전방 접적요새요,
많은 성(城)들 중 가장 전략적으로 중요했던 요동성은 어디인가,
여러 설,설..설들만 있고 "여기가 바로 과거 우리 선조땅의 접적지역 요새였다"라고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역사책 하나 없으니,참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는 노릇이다.
어쩌다 나 같은 비전공 무지랭이까지 나서서 이런 글을 쓰게 된건지.....
어디서 어느방향으로 몇리 하는 식의 사서를 인용한 추적은 많은 사람들이 신물나게 해 왔으니,
간략하게 만 들춰 보면,
"태종은 요수를 건너자 가교를 철거토록 명하여 병사들이 승전의 결의를 굳게 하도록...이적(이세적)은
군사를 이끌고 요동성을 공격중이었으며....태종은 친히 기병 1만을 이끌고 이적과 합세하여
성을 포위...성내의 가옥이 모두 불타고,죽은 자가 1만, 병사 1만을 포로로 잡았다.
그 성에 요주(遼州)를 설치 하였다."-----구당서 고구려전.
요사지리지(遼史地理志) 에서도 당태종이 함락한 고구려 요동성이 요주(遼州)라고 했는데,
그 를 증빙하는것이 1270년에 석판에 새긴 "거란지리도(契丹地理圖)"이다.
그러나 이 거란지리도상의 요주는 다른 옛 지도들과 마찬가지로 대략적인 위치 추정만 할 수
있을 뿐, 서지보다도 더 신뢰할 만한 판각유물임에도 불구하고 제 가치를 못하고 있는듯하다.
요지리지도(遼地理志圖)
거란지리도(契丹地理圖) 출처-http://www.coo2.net/
첫 번째 지도는 와세다 대학에서 명치44년에 출판한 통속21사(通俗二十一史)의 부록인
역대연혁지도(歷代沿革地圖)일부 중 요지리지도(遼地理志圖)이고,
아래 탁본은 앞서 언급한 거란지리도(契丹地理圖)이다.
앞의 요지리지도는 근시대에 많은 자료들을 접할 수 있는 대학에서 제작된 것이지만.
당시 측지술의 한계였던듯 밑바탕으로 사용된 지적도가 정밀하지가 않아 촛점이 맞지
않는듯이 만들어 졌고, 거란지리도 역시 위치 추적용으로선 한계가 있다.
이 두 지도에 표기된 요주(遼州)의 위치 차이점을 보면 거란지리도에는 요주가 금주(錦州) 서쪽에 있고,
의주(宜州).건주(乾州)가 요주의 북쪽에 위치한 반면,
요지리지도에는 요주가 금주는 물론,의주 건주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음이 다르다.
--(위 두 지도상의 요주를 요동,요서를 가르는 분기점으로 본다거나, 분기점일 가능성은 없으며,
요동,요서를 지칭할 때의 기준이 되는 요(遼)는 어떤 특정지역을 일켣는 고유명사가 아니라고 본다.
여기서의 요주의 역활은 요주 내의 동부지역에 있는성, 즉 요동성에 한해 관련한다.
요동,요서 할 때의 요동에 있는 성(城)이 아니라, 요주라는 개체내의 동부지역에 있는 성(城)이다. )
거란지리도만 가지고는 금주서쪽,해안,강가를 아무리 정밀지도에서 뒤져봐야 딱히 예측되는 곳이
없는데, 요지리지도에는 다행스럽게도 제작당시의 지명을 바탕에 표기하여(검은 글씨)
그를 토대로 추적이 가능할 것도 같다.
요지리지도의 제작당시 지명중 현재지도에도 그대로 쓰이고 있는 요주 근처의 지명중,
북쪽의 나만(奈曼),동쪽의 봉천(奉天):심양,그리고 남쪽의 금주(錦州)를 택해봤다.
이 트라이 앵글안에 요주,아니 군사적 요충지로서 성(城)이 있을 만한 곳을 일단 찾는 것이다.
현지답사등은 그 다음 문제다.
군시절 독도법 훈련을 받아 본 사람은 등고선등이 표시된 지형도를 보노라면
새소리,물소리,바람소리를 듣는다. 어디쯤에 집을 지으면 좋을지, 어디에 무덤을 쓰면 좋을지도 안다.
거기에 기초 병법 즉, 수만이상의 대군이 공격로로 사용할 수 있는 루트, 방어적 개념으로
적이 오는 길목을 노리고 버티고 있는 성(城)...
이정도만 알아도 충분하다.
북경이나 승덕,또는 비숫한 방향에서 동으로 진격할 수만이상의 대군이 움직일 수 있는
길은 현재 요녕성 서쪽엔 많지 않다.
우마와 수레에 무기와 주둔장비등을 싣고 산을 넘기도,수없이 나타나는 물길을 건너기도
어려운일이다.
정주(定州)를 떠나 온 당태종도 결국은 위의 지형도에 그러진 것처럼 조양을 거쳐 북표 남쪽을
지나는 길을 택할 수 밖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북표남쪽을 지나고 나면 거대한 천연 장애물이 나타나는데,바로 남북으로 길게
가로막고 있는 의무려산(醫巫閭山 )이다.
북쪽으로 돌아가느냐, 남쪽으로 돌아 가느냐의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습지 진흙밭과 물길이 끝없이 펼쳐지는 남쪽 루트(지도상의 '나'방향)가 아니라,
북쪽 루트(지도상의 '가'방향),부신(阜新)을 거쳐 가는 길이 거의 유일하다.
수없는 산성을 쌓은 경험을 가진 고구려가 위의 지도와 같은 지형,지세를 간과할리 없었을 터이고
최전방 전초요새인 요동성을 연개소문이 쌓았 든, 양만춘이 쌓았 든 부신(阜新)을 지나
의무려산(醫巫閭山)북쪽 끝자락과 그 북쪽 맞은 편에 있는 나즈막한 낙타산의 사이를 통과하는
이 유일한 동서(東西)통로에 성을 쌓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었을 것이다.
요동성은 낙타산의 봉우리를 등지고 남서쪽을 바라보며 그곳에서 제일의 요충지 역활을
다했을 것으로 추정을 넘는 믿음이 간다.
맨 앞의 요지리지도상의 삼각점 안에 있는 요주와 맨 아래 지형도상의 나만,심양.금주를
잇는 안쪽의 부신(阜新)를 비교해 보면, 부신은 요주이고, 요주는 요동성 이라면,
삼각점 안에서는 부신외곽 요충길목인 낙타산 남쪽자락이나 마주보이는 의무려산의 북쪽자락
밖에는 성(城)을 세울 곳이 없기 때문이다.
지도의 '나'지점 쯤, 대능하 오른쪽이 의주(義州)이고, 의주에서 부신의 중간 쯤인 '가'지점이
부신시 청하문구 로서 대능하 상류가 지나고 있다.
요동성을 통과한 당태종이 양만춘이 있는 안시성에서 대패하고 간신히 목숨건져 돌아 가는데,
말 그대로 엉망진창 진흙밭.
요동성에서 하룻만에 요수를 건넜다는 말을 상기하면 청하문옆을 흐르는 상류물길을 요수,
그리고 의주의 서북에서 흘러와 요수와 만나 남으로 흐르는 큰물길을 요하(대능하)로 보는 견해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봉천성(奉天省)도1926년판
끝으로 요사-지리지에서는 부여국을 불열국(拂涅國)이라고 하였고, 지금의 요녕성 부신(阜新)시 서북 지역에 있었는데 선비족의 침략으로 망하여 당시 왕이었던 의려(依慮)왕이 일본으로 건너가
왜왕(효령천황)이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는데 아직 원문확인은 못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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