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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당 태종의 기동축선-군사적 측면에서 바라본 고구려당시 제위치검

monocrop 2007. 3. 6. 04:18

작성자 : 김진용

출처: 유용원의 군사세계 > 토론방 > 이슈토론방

 

기본적으로 재야사학쪽에서 제시하는 지명을 바탕으로 당태종의 기동축선을 파악해보는게 저의 주목적입니다. 우선 환단고기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 상고사 중 관련된 부분을 원문대로 올리고, 관련 지도를 하나 첨부해놓겠습니다. 그림을 포함해서 모든 자료는 전부 재야사학쪽의 자료들입니다. (인터넷 자료검색하면 나오는 재야사학의 의견 80% 이상이 coo2.net에서 나온 것이더군요.)
지도는 coo2.net에서 다른 용도로 지명과 화살표시들를 해놓은 것에 제가 필요한 지명을 coo2.net에서 주장하는 대로 추가로 표시해놓았습니다.

원문이 길어서, 기동 축선 연구는 다른 글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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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환단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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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 4년 당나라 이세민이 군신에게 말하기를, '요동은 본래 제하의 땅이다. 수나라가 네번 출사하였어도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이제 출병하여 제하를 위해 자제의 원수를 갚고자 한다.' 고 하다.

세민은 친히 활과 화살을 차고 이세적 정명진 동 수십만 명을 이끌고 요택에 이르다 진흙길 200여리 사람과 말이 다닐 수 없었다.

도위 마문거가 말에 채찍질하며 달려가 공격했지만 이미 싸움을 벌였던 행군총관 장군차는 대패했다.

이도종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였고 세민은 몸소 수백기를 이끌고 세적과 합쳐 백암성의 서남쪽을 공격했다.

성주인 손대음은 속여서 항복을 청하게 하고 실은 틈을 엿보아 반격하고자 하였다. 세민은 안시성에 이르러 먼저 당산으로부터 병사들을 진격시켜 이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북부의 욕살 고연수와 남부의 욕살 고혜진은 관병 및 말갈병 15만 이끌고 똑바로 전진하여 안시에 연결되는 진지를 쌓고,높은 산의 험악한 곳에 의거하여 진지를 쌓고 성의 곡식을 식량으로 삼고, 병력을 종휭무진으로 풀어 놓아 당나라군마를 약탈했다.

당나라군을 감히 접근하지도 못하고 돌아가려고 해도 지흙길이 가로 막았으니 가만히 앉아서 패하는 길밖에 없었다. 고연수는 군대를 이끌고 똑바로 나아가서 안시성에서 약 40리 떨어진 곳에 나아가더니, 사람을 보내 대로 고정의에게 물었으니 그는 나이가 많아서 모든 일에 익숙했다.

정의노인은 대답하기를, '이세민은 안으로 군웅들을 제거하고 집을 바꿔 나라를 이루었으니 역시 범상하진 않다. 지금 모든 당나라의 병력이 떨치어 나왔으니 업신여길 수가 없다.

우리들로서 바람직한 것은 군대를 움직이지 말고싸우지 않으며,여러날을 두고 지구전을 펴며,날랜 병사들을 보내 그 식량 보급의 길을 끊는 것보다 좋은 계책은 없다.

식량이 이미 끊겨 싸우고자 하나 싸워주지도 않고, 돌아가려해도 길이 없으니 결국 이기기 마련이라' 고 하였다. 고연수는 그 계략에 좇아 적이 오면 막고, 적이 도망가면 곧 추격을 멈추고, 또 날랜 병사들을 파견하여 식량의 길을 끊고, 불태우거나 빼앗게 하자 이세민은 백가지 계략으로 유혹하여 뇌물도 썼으나 겉으로는 따르는 체하고는 속으로는 거슬렸다.

수시로 습격을 감행하여 마구 무너뜨리니 적군의 사상자는 쌓여만 갔다.

고연수등은 말갈과 병력을 합쳐 진지를 펴고 지구전을 벌이다가 어느날 저녁 표변하여 작전을 개시하여 급히 습격하여 번개처럼 치니, 이세민은 거의 포위될 �하게 되자 비로소 두려운 빛을 보였다.

이세민은 또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재물과 보화를 보내면서 연수에게 말하기를, '나는 귀국의 힘있는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였으므로 그 죄를 물으려온 것이다.

그대의 나라에 들어와서 싸움을 하게 됨에 말 먹이와 식량을 공급할 수가 없어서 얼마간 노략질을 몇 곳에서 했었을 뿐이니, 그대의 나라가 예를 갖추어 수교를 기다리면 반드시 회복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연수는 말했다.
'좋다, 그대의 군사가 30리를 후퇴하면 곧 나는 우리 황제를 알현코자한다. 그렇지만 막리지는 국가의 기둥이다. 군법을 스스로 갖고 있으니 많은 말도 팔요가 없다. 그대의 임금 세민은 아비를 폐하고 형을 죽이고 동생의 아내를 음란하게도 받아들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죄를 물을 만하다. 으 뜻을 이세민에게 전하여라.' 이에 사방으로 감시관을 보내 더욱 더 방비를 굳혔다.

산에 의지하여 전지를 굳히고 허를 틈타 기습하니, 세민은 백가지 계략을 다 써도 어쩔수가 없어 요동 출병의 불리를 통한히 여길 뿐 후회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유공권의 소설에서,
'육군은 고구려의 조롱거리가 되고 거의 떨쳐 일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척후병이 영공의 군기는 흑색 깃발(고구려의 군기 색갈)로 에워 싸였다고 보고 하니 세민은 크게 놀랐다. 종내 저 혼자 탈출했다해도 위험을 이와 같있다.' 라고 하였으니,

<신구당서>와 사마공의 <통감>이 이를 적지 않음은 어찌 나라를 위해 치욕스러운 일을 숨기려 함에서가 아닐까보냐?

이세적은 세민에게 말한다.
'건안은 남쪽에 있고 안시는 북에 있습니다.
우리 군대의 양곡은 벌써 요동으로 수송할 길을 잃었습니다.
지금 안시성을 넘어 건안을 습격하는데 만일 고구려가 수송로를 끊으면 군세는 궁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안시를 공격함만 같지 않을 안시가 함락되면 곧 북치고 행진하여 건안을 취할 뿐입니다.' 안시성의 사람들은 세민의 깃발이 덮어오는 것을 멀리 바라보며 성위에 올라 ㅜ치고 떠들며 침을 뱉으며 세민을 조롱했다.

그의 죄목을 열거하면서 무리에게 떠들어 댔다. 세민은 몹시 화를 내면서 성을 함락시키는 날 성중의 남여를 가릴 것 없이 모조리 흙구덩이에 생매장하겠다고 했다.

안시성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더욱 더 굳게 성을 지키니 성을 공격해도 함락되지 않았다. 때에 장량은 사비성에 있었는데 그를 불러오게 하였으나 채 이르지 못하였고. 이리저리 망설이는 사이 기회를 잃고 말았다.

이도종도 역시 험악한 곳에 떨어져 떨치지 못하니 당군의 여러장수들은 의논한 끝에 갈라졌다. 세적만이 홀로 생각하기를 '천자의 친정은 제장의 정벌과는 달라 요행을 바라고 행동한다는 건 안될 일이다. 지금 건인 신성의 적은 무리가 수십만이요. 고연수가 이끄는 말갈의 군대도 역시 수십만이다. 국내성의 병력도 오골성을 돌아 낙랑의 여려길을 차단할 것 같다. 그리 된다면 저들의 세력은 날로 성해지고 포위당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적을 우롱하다가는 후회막급이 될 것이니,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고 다음에 건안을 취하고 그런 후에 천천히 진격하느니만 못하다. 이것이 만전책이다.'라고 했다.


이 문제가 채 결론도 나기전에 안시성주 양만춘은 이를 듣고 밤 깊음을 틈타 수백의 정예를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내려오니 적진은 스스로 서로 밟고 찔러 살상된 자가 수없이 많았다.

세민은 이도종을 시켜 흙산을 성의 동남쪽에 쌓게 하였다.
관병(고구려 병사)은 성의 틈 사이로 출격하여 마침내 토산을 뺏고 참호를 파고 이를 지키니 군세는 더욱더 떨치더라.

당군의 여러 진은 거의 싸울 힘을 잃으니, 부복애는 패전으로 목잘려 죽고 도종이하 모두가 맨발로 나와 죄를 청하였다.

막리지는 수백기를 이끌고 난파를 순시하며 상세하게 정세를 듣더니 사람을 보내 총공격하여 사방을 칠 것을 명하였다.
연수등도 말갈병과 합쳐 협공하고 양만춘은 성위에 올라가 싸움을 격려하니 사기는 더욱 떨쳐저서 일당백의 용맹이 없는 자가 없었다.
세민은 이기지 못함을 분하게 여겨서 감연히 나서서 싸우려 했다. 양만춘은 이에 한마드 소리지르며 화살을 당겨 반공에 날렸다.

세민은 진에서 나섰다가 왼쪽 눈에 화살을 맞아 떨어져버렸다.
세민은 어쩔 줄을 모르고 군사들 틈에 끼어서 도망쳤다.
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볍 기병 수만을 이끌고 후군이 되도록 하였으나 요택의 진흙길은 군마의 행군을 어렵게 했다. 무기에게 명하여 모든 병사들에게 풀을 베게하여 길에 깔고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니.
세민도 몸소 장작을 말고삐에 연결하여 매고 역사를 도왔다.

겨울 10월 포오거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길이 메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모든 군사가 발착수를 건너는데 심한 바람과 눈이 몰아쳐서 사졸들을 적시니 죽는 자가 많이 많이 나왔다.

이에 불을 길에 지피고 기다렸다. 때에 막리지 연개소문은 승승장구 이들을 심히 급하게 이들을 추격했다.

추정국은 적봉 (주: coo2.newt에 의하면 요령성에 있음)에서부터 하간현으로 이르고, 양만춘은 곧바로 신성으로 나아가니, 군세는 크게 떨쳐졌다. 당나라 군사는 갑옷과 병기를 마구 버리면서 도망가, 드디어 역수를 건넜다.

때의 막리지는 연수에게 명하여 용도성을 개축케 하니 지금의 고려진이다.
또 제군을 나누어서 일군을 요동성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창려이다.
일군을 세민의 뒤를 바짝 쫓게 하고 또 일군을 상곡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대동부이다.

이에 세민은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침내 사람을 보내 항복을 구걸케 되니 막리지는 정국 만춘 등의 수만 기를 이끌고 성대하게 의용을 갖추어 진열한 뒤 선도하게 하여 장안에 입성하여 세민과 약속하였으니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좌가 모조리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와 더불어 백제와 경쟁하는 사이가 되어 함께 요서의 땅에 있게 되었으니, 백제가 영유하던 곳은 요서의 진평이라 했다.

강남에는 월주가 있었다.
그 속현은 산음 산월 좌월이있었다.

문자제의 명치 1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군현을 고쳐 송강 회계 오월 좌월 산월 천주라 했다 12년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를 삼았다.

이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하여 요서의 진평 등의 군을 취하고 백제군을 폐했다.

고려진은 북경의 안정문 밖 60리 되는 곳에 있고 안시성은 개평부의 동북 70리 되는 곳에 있다.
지금의 탕지보이다.
고려성은 하간현의 서북 12리에 있다.
모두 태조무열제가 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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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조선 상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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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淵蓋蘇文)이 요동의 싸움을 양만춘(陽萬春), 추정국(秋正局) 두 사람에게 맡기고 정병 3만으로 적봉진(赤峰鎭:지금의 열하부근)으로 나가 다시 남으로 나아가 장성을 넘어 상곡(上谷:지금의 하간) 등지를 습격하니 당의 태자 치(治)가 어양(漁陽)에 머물러 있다가 크게 놀라 급함을 알리는 봉화를 들어 횃불이 하룻밤에 안시성까지 연락되었다. 태종은 임유관 안에 변란이 일어났음을 알고 곧 군사를 돌이키려고 하였다. 오골성주 추정국과 안시정주 양만춘은 그 봉화로 연개소문이 이미 목적지에 이르렀음과 태종이 장차 도망할 것을 짐작하고 추정국은 전군을 거느리고 안시성 동남쪽 좁은 골짜기로 몰려나와서 당의 군사를 돌격하고, 양만춘은 성문을 열고 급히 내달아 공격하였다. 당의 군사가 서로 짓밟으며 도망했다."

(중략)

"연개소문이 지나(支那)에 침입한 것도 기록에는 보이지 아니하였으나, 오늘 북경 조양문(朝陽門) 외 7리지(里地)의 황량대로 비롯하여, 산해관까지 이르는 동안에 황량대라 이름하는 지명이 10여 처인데, 전설에 '황량대'는 당의 태종이 모래를 쌓아 양저(糧儲:양식 쌓은 곳)라고 속이여, 고구려인이 내습하면 복병으로 요격하였다 한 곳이라 하니, 이는 연개소문이 태종을 북경까지 추격한 유적이며, 산동•직예 등지에 띄엄띄엄 '고려' 2자로 관한 지명이 있고, 전설에는 이것이 다 연개소문이 점령하였던 고지라 하며 가장 최저(最著)한 자는 북경 정안문(定安門)외 60리 허의 고려진(高麗鎭)과 하간현(河間縣) 서북 12리 허(許)의 고려성(高麗城)인 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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