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김진용
쓰다보니 스크롤의 압박이 되어버렸군요.
1. 앞서.
아람님이 제시하시는 주장의 주된 근거는 사서에 나온 지명 고증입니다. 지명 고증은 매우 유용한 연구방법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단, 그 한계도 명확히 해두어야 합니다. 같은 지명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시대에 따라서 같은 지역의 이름이 바뀌기도 하기 때문에, 어떤 지명을 지도상에서 찾는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다른 객관적인 증거나 주변 정황 고증이 맞아야 더 높은 신빙성을 얻어나갈 수가 있겠죠.
실례로, 중국 땅에서 국경의 위치를 파악하는데 갈석산이라는 지명이 주요한 단서가 되는데, 갈석산이 중국 본토에 여러 곳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안시성이 개평 북동에 있다고 하는데, 개평이 하북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요령성에도 있습니다. 환단고기에는 하북성 개평이라고 못박혀있지 않고 그냥 개평이라고만 되어있지요. (하북성 개평이라고 하는 자료는 현대의 환단고기 연구가가 하북성이라고 자신의 생각을 추가한 것입니다.) 다른 자료에서는 안시성이 안시현에 있다고 하는데, 여러 자료들을 보면 안시현(골프선수 아님^^;) 역시 여러 곳입니다. 사서에 나오는 요하나 압록수도 모두 한곳이라고 보기 힘들고요. 그렇다고 이것을 전부 다 중국측이 역사를 조작하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명동이 서울에도 춘천에도 있고, 신촌이라는 동네는 아예 도시마다 있듯이, 그냥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다른 근거와의 교차검증을 통해 고증해야 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죠.
1. 기동 축선
두 사서의 기록을 정리해보고, 아람님께서 언급하셨던 다른 동선을 포함해보면, 양군의 동선은 아래와 같이 됩니다. 정확한 동선은 아니지만 중간 경유지를 알 수 있으므로 개략적인 동선은 파악할 수 있습니다. (명확한 원문 소스를 이용하려니 생각보다 빈약하네요…)
-당태종
공격시: 정주->요택-> 안시성
퇴각시: 안시성-> 요택-> 포오거-> 발착수 (환단고기)
산해관->북경(조선상고사) (주: 산해관에서 북경에 이르는 지역에는 설인귀가 당태종을 구하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함)
-고구려군 추격로
환단고기-
추정국: 적봉-> 하간현
양만춘: 안시성 -> 신성
고려진 개축, 창려 방비, 상곡(대동부) 방비
조선상고사-
적봉진 -> 남하 -> 장성 넘음 -> 상곡(하간)
아래 올려드린 지도를 참조하시고요…
당태종은 내륙인 정주에서 출발을 했는데, 공격과 퇴각시에 모두 요택을 지났습니다. 지형이 불리함에도 갈 때 올 때 모두 건넜다는 것은 그곳이 최단축로상에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수나라도 고구려와 싸울 때 여기를 지났습니다) 우회로상에 있다면 굳이 이동이 힘든 길을 택하지 않고 다른 적당한 우회로를 찾겠죠. 그런데, 지도에 보시다시피, 요택이 황하 하구에 있다면 내륙에서 출발한 당군이 안시성으로 가는 기동축선에서 옆으로 벗어나는 위치가 됩니다. 따라서, 요택, 안시성, 혹은 둘 모두 지도에 표시된 지역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퇴각로를 보더라도, 장안은 안시성에서 남동쪽 내륙에 있는데 요택을 가려면 안시성에서 해안을 따라 남하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퇴로 축선상에 놓고 보기에도 역시 이상합니다.
조선 상고사에서는 또다른 퇴각방향을 언급하고 있는데, 산해관에서 북경에 이르는 황량대들이 당태종의 퇴로에 연해있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황량대는 실증적으로 밝혀진 유적입니다.) 이 축선 역시 안시성-> 요택->장안의 기동축선과 맞지 않습니다. 이걸 다 합해서 그림을 그리면 아예 전 국토 순례가 됩니다.
2. 추격로
고구려군의 추격로는 당연히 당태종의 퇴로와 축선이 같아야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분산해서 우회를 하더라도 적어도 한 개 부대는 적을 곧바로 추격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환단고기에 따르면 추정국은 적봉(coo2.net에 의하면 요령성에 그런 곳이 있다 함)에서 출발해서 하간현으로 이동하였고, 양만춘은 안시성에서 신성으로 서남진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상고사에서는 연개소문이 열하부근의 적봉진으로 나아갔다가 거기서 남하를 하여 장성을 넘어 상곡(하간)을 공격하고, 당태종은 이 때문에 퇴로인 임유관에 위협을 느껴 퇴각을 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장성을 북에서 남으로 넘었다면 지도에 있는 상곡은 맞지 않고 하간은 장성에서 너무 멀어서 당태종이 퇴로에 위협을 느꼈다고 하기에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그런데, 환단고기에 나오는 추정국과 양만춘의 추격로, 조선 상고사의 연개소문의 동선, 황량대의 위치 모두 안시성->요택->장안의 기동축선과 맞지 않습니다. 추격로가 맞다고 한다면, 역시 안시성이나 요택의 위치가 잘못되었다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3. 임유관
Coo2.net에서는 지도상에서 태곡 서쪽의 유림관이 임유관이라 합니다. (지도에 나왔는데 깜빡 잊고 표시를 안해놨네요. 태곡에서 정서쪽 굵은 선 근처 Liulim입니다) 이 유림관은 장안 북동쪽으로, 장안으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만약 임유관이 장안 근처에 있다면, 당태종은 야전에서 몇 달의 행군 거리에 있는 임유관의 상황을 걱정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태종의 태자는 북경과 안시성의 중간쯤인 어양에 있다가 임유관이 위태로워지자 봉화를 올렸고(조선 상고사), 그 봉화를 보고 후퇴한 당태종을 임유관에서 맞이했습니다. 임유관이 장안 근처의 지명이라면 이럴 수가 없지요. 따라서, 임유관은 안시성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당태종의 기동축선상의 요지이고, 당태종의 태자는 병참선 수호 임무를 맡았으며, 연개소문은 병참선을 우회공격하여 위협했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만약 당태종이 내륙에 있는 안시성에서 싸웠다면, 그 이전에 몇 개의 고구려 성을 빼앗기도 했었던 당태종은 사면에서 포위가 되지 않는 한 퇴로에 위협을 느낄 이유가 없습니다.
덧붙이자면, 임유관은 수나라 시절 강이식 장군의 승전지이기도 합니다. 강이식 장군이 30만의 수나라 군대에 대하여 5만의 군사로 장안까지 쳐들어갔다고 보기 힘들므로, 임유관은 고구려와 수,당의 경계 부근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참고로 강이식 장군이 대승을 거둔 수나라의 1차 침공은 다수의 수군이 동원되었고, 수나라는 태풍으로 패인을 돌렸습니다. 다수의 수군의 존재와 대륙 내륙에는 태풍이 불지 않으므로 태풍 피해가 적절한 핑계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임유관은 해안 지역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4. 방어진 보수
고구려군은 당군을 추격한 후, 북경 근처에 고려진을 개축하고 발해만에 있는 창려에 병력을 주둔시켜 방비를 합니다. 안시성이 북진을 해온 당군의 최대 진출지점이었다면, 창려는 산해관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쪽으로 더 깊숙한 동쪽 지점이며, 고려진 역시 안시성에서 정동쪽으로, 이미 두 곳 모두 처음부터 고구려군의 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안시성에서 당태종이 퇴각하고 나서 이미 처음부터 고구려 땅이었으며 빼앗기지도 않았던 두 후방지역에 성을 개축하고 부대를 배치했다는게 되는데, 그러면 얘기가 좀 이상하죠.
고려진이나 창려 모두 장성의 남쪽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주 전투가 장성 이북에서 벌어졌고 고구려군이 장성 이남으로 추격해온 것이라고 보는게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이 두 지점은 황량대가 발견되는 지역들과도 일치하기 때문에 고구려군이 당군을 추격하면서 방어 부대를 주요 지점에 주둔시켰다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얘기가 타당해지지요. 특히, 창려는 고구려의 영토가 장성 이남이라면 하등의 쓸모없는 배치가 되지만, 고구려군이 산해관을 지나서 북경으로 당태종을 추격했다면 고구려군의 병참선을 방비할 수 있는 주요한 길목을 지킨 것이 됩니다.
5. 안시성과 건안성의 위치
건안성은 안시성의 남쪽에 있습니다. 만약 지도에 표시된 대로라면, 북진을 해온 당태종은 당연히 건안성을 먼저 쳐야 하고 안시성은 그 후방이 됩니다. 그런데, 이세적은 “안시성을 넘어” 건안성을 먼저 치면 병력이 고구려군에게 포위될 것이라고 말하고 건안성보다 안시성을 먼저 칠 것을 주장합니다. 안시성이 후방이고 건안성이 전방이라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죠. 즉, 건안성이 안시성 남쪽에 있으면서 안시성보다 후방이라야 합니다. 이점은 조금 후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6. 고구려 기존 영토는 어디까지?
Coo2.net에서는 환단고기의 지명 설명과 연개소문이 산동성에 출몰하였다는 기록을 근거로 해서 하북성과 산동성 일대까지가 고구려의 영역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본다면 약간 문제가 생깁니다. 이 전쟁의 결과로 당태종은 고구려에 산동성, 산서성, 하북성을 넘겨주었다고 합니다. 산동성과 하북성이 원래 고구려의 영토였다면서 전쟁의 결과로 산동성과 하북성을 넘겨주었다는 것은 자체 모순이 됩니다. 더욱이, 재야쪽에서는 산동성 지역이 신라 영역이었다는 설도 있는데, 그러면 신라의 땅을 당태종이 마음대로 고구려에게 가지라고 주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6. 대안 제시
보시다시피, 지도에 표시된 위치들로는 여러가지 이슈들이 충분히 설명되기 힘듭니다. 개별적으로 억지로 이유를 만든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겠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안시성이 장성 이북에 있다고 하고 몇군데 지명의 위치를 수정하면 안풀리던 얘기가 다 쉽게 풀어집니다.
1)위치 수정 가설
* 안시성은 현 요하 부근, 최소한 장성 이북으로 본다. (보수적인 견해는 대체로 현 요하 동안으로 보지만, 현 요하 서안으로 보는 견해도 있음)
* 요택은 현 요하 하구 또는 난하 하구로 본다.
* 임유관은 현 산해관으로 본다.
2) 기동 축선
요택은 반드시 지나야 하는 곳이 되어서, 요택-> 안시성의 당군 기동 축선이 명확해집니다.
3) 추격로
환단고기에 따름년 추정국의 추격로는 적봉-하간현이고, coo2.net에서는 적봉을 요령성 적봉으로 보았습니다. 안시성이 하북성에 있다면 추격군이 요령성에서 출발할 이유가 없으나, 안시성이 요령성에 있다면 말이 됩니다. 그리고 양만춘의 추격축선인 안시성->신성도 장안까지의 직선축이 되기 때문에, 당태종의 퇴각로(안시성->와 대략 맞게 됩니다.
그리고 산해관-북경에 이르는 황량대와 그지역 일대의 설인귀 설화가 당군 철군로를 입증하는 근거로 더 명확해집니다.
또한 연개소문의 우회 기동은 대략 어양-산해관 사이의 어디쯤에서 장성을 넘어서 당태종의 퇴로를 전술적으로 위협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4) 임유관
안시성이 장성 북쪽 해안가(조선상고사에 해안이라고 되어있음)에 있다면, 임유관을 현 산해관으로 보면 당군으로서는 요동 진격시에 매우 중요한 길목이 됩니다. 그리고 수-고구려 전쟁시의 강이식 장군의 임유관 전투도 함께 설명이 될 수 있습니다.
5) 방어진 보수
주 전장이 장성 이북이었다면, 고구려군이 당군을 산해관-북경 축선으로 추격을 하면서 창려에 방어병력을 두고 북경 인근에 고려진을 둔 것이 충분히 설명이 됩니다. 진격로상의 요충에 경계 병력을 남기는 것이 되니까요.
6) 안시성과 건안성의 위치
안시성이 요하 동안에 있다면 안시성의 남쪽에 있는 건안성을 먼저 치면 안된다는 논리가 성립이 됩니다.
7) 비사성
제가 인용한 환단고기와 조선상고사 본문에서는 내용이 안나와 있었지만, 당군은 안시성 전투와 비슷한 시기에 수군으로 해안 기지인 비사성을 점령했었습니다. 안시성이 하북성 개평이라면 수군으로 해안기지를 점령하는 것이 내륙의 전투에 영향을 미치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안시성이 요하 부근에 있었고 비사성이 요동반도에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비사성은 안시성의 병참선을 당군의 수군으로부터 방비하는 중요한 요충이 됩니다. 참고로, 비사성 점령 이후 당군의 수군의 기록이 없는 것은 고구려 수군에게 전멸당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요동반도에 다수의 고구려 수군 기지가 실제로 있습니다.)
8) 고구려의 영역은?
일단, 당면한 문제에 답을 하기 전에 영토는 언제든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있다는 것을 먼저 지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북경이 어느 시점에 누구 영토라고 해서 반영구적으로 계속 그랬다고 단정할 일은 아니라는거죠. 더욱이 고구려는 900년 가량 존속한 국가이기 때문에, 국경선을 더 융통성 있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사서들도 춘추필법을 안했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우리 사서들도 전쟁에 패하고 영토를 잃고 한 사건들은 대부분 감추었다고 보아야지요.) 그리고 또 한가지를 지적하자면, 문제가 되고 있는 북경 유역은 넓게 볼 때 중국과 고구려 세력이 직접 충돌하는 것을 막는 일종의 경계지대 역할을 상당부분 했다는 것입니다. 북위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겠죠. 따라서, 시대에 따라서 북경 일대의 국경선의 변화의 폭이 크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봅니다. 때로 고구려가 하북성 쪽으로 많이 진출했었을 수도 있고, 또 때로는 장성 동쪽으로 밀려났을 수도 있다고 봐야죠. 이렇게 오차범위가 클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보수적으로 본다면 현 요하부근을 고구려 영역으로 보더라도 그럴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듭니다. 꼭 그래서는 안될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현 요하 부근에 대한 반론의 주된 근거는 하북성 일대에서 여러 지명들이 발견된다는 것인데, 말씀드린바와 같이 단지 지명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다가 아니라, 주변 정황들과 맞아야 합니다. 유물 유적으로 현장의 근거가 확인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죠. 그런 점에서 하북성 설은 물론 그게 맞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아직 현재의 정설을 완전히 대체하기에는 구체적으로 풀어야 할 난제를 많이 안고 있는 가설이라고 봅니다.
물론 고구려 영역이 현 요하부근 이상을 넘어가면 절대로 안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좀더 진보적인 견해를 따라가보자면… 당태종의 침입 당시 하북성 북부 장성의 경계 지역이 고구려의 주 방어선이었다고 하는 정도는 신빙성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고구려군의 추격의 와중의 병력 주둔에서 볼 수 있다시피, 그렇더라도 장성에 가까운 상대적으로 좁은 영역이거나 장성이 대략적인 당과 고구려의 경계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타당할 것 같습니다.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하북성 일대를 모두 고구려 영토로 보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이 되고요. (유주 자사 무덤은 해당 시대를 기준으로 하면 신빙성 높은 증거이기는 하겠으나… 당태종이 침입하기 무여 250여넌 전의 일이라서, 당태종 침입시의 경계의 직접적인 증거로 쓰이긴 힘들어보입니다.) 하북성 일대가 다 고구려 영토였다면 주 교전이 만리장성 가까운 지역에서 일어나지 않고 처음부터 하간이나 북평, 신성 같은 곳이 주요한 전장이 되었어야 했을겁니다. 산동이 고구려 영토였다고 한다면 당태종이 앙쯔강에서 군량미를 모았다는 것이 설명이 안되고요. 하간이나 신성 진격에 대한 묘사를 보더라도, 아군 지역 수복이라기보다 당나라로의 진격 차원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9) 사족
당태종의 침입은 서기 645년에 있었습니다. 이 침입 전의 국경선 문제와 상관 없이, 반격의 와중에 당나라 깊숙히까지 진격하고 전쟁이 끝난 후 상당한 영토를 점령하게 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고구려는 결국 그 후 20여년을 갓 버티고 나서 멸망했습니다. 발해가 뒤를 이었다고 하지만, 수나라가 당나라로 왕조가 바뀐 것과는 차원이 다른, 멸망 후의 부흥운동이었고 고구려의 세력을 온전히 다 이어받지는 못했다고 봐야죠. (왕조의 존속 기간은 국력의 주된 잣대가 될 수 없습니다. 단지 정치적 안정성을 나타내는 척도가 될 수 있을 뿐이죠. 알렉산더 제국이나 몽골 제국도 존속 기간은 모두 한 세대에도 못 미칩니다.)
고구려는 요동지역을 벗어나지 못했고 북경을 한 번도 접수하지 못했다고 단정하면 안될 것입니다. 또한, 반대로 고구려는 북경 유역을 한 번도 잃은 적이 없었다고 단정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국경선은 수시로 바뀌고, 북경 지역은 넓게 볼 때 고구려 초기부터 멸망때까지 중국측 세력과 고구려 세력간의 각축 지역이고 잦은 분쟁지역이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때 당시의 북경은 지금처럼 중국 수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북경을 점령했다는 것에 그렇게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세력간의 경계 지대의 영토 문제를 지나치게 민감하게 받아들여서 국경선 연구 문제를 역사 이데올로기화하는 것은 피해야 하겠습니다. 역사에서 영토의 넓이란 것은 전체 역사를 이루는 아주 많은 부분들 중에서 한가지 요소에 지나지 않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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