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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구려는 흉노의 수장 (사상 최강 고구려의 원동력은 과학)

monocrop 2007. 6. 22. 09:45

고구려는 흉노의 수장

 

 

 

사상 최강 고구려의 원동력은 과학

 

 

한족(漢族)이 '흉노 공포증'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41년 한나라 무제(武帝)가 즉위하면서부터였다. 괄괄한 성미의 무제는 고조 유방(劉邦) 이후 60년간 지속된 굴욕적인 대(對)흉노 유화정책을 버리고 강경 대응으로 나섰다. 사실 무제가 즉위했을 즈음, 한나라는 흉노가 소유한 우수한 철제무기를 자체 제작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한 상태였고 북방 유목민족의 전통적인 기병 전술과 군대 편제도 상당히 습득한 상태였다. 게다가 군사의 숫자가 월등히 많으니 흉노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무제는 기원전 129년부터 기원전 119년까지 10년 동안 여섯 차례에 걸쳐 위청과 곽거병 등으로 하여금 기병대를 이끌고 흉노를 공격했다. 10년간의 한(漢)-흉(匈) 전쟁으로 한나라도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흉노의 피해는 더욱 컸다.

장한식 박사는 당시 흉노의 전체 인구는 1백만에서 1백5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10년 전쟁 동안 전체 인구의 15~20%에 이르는 20만 명 이상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고 적었다.

흉노가 다시 일어선 것은 무제 말기였다. 위청과 곽거병이 이미 사망했으므로 무제는 기원전 99년, 이광리로 하여금 3만 명의 기병으로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 이광리의 손자인 이릉(李陵)에게 보급품 수송을 맡겼으나 전투에 나서기를 원했으므로 무제는 이릉에게 별도로 5천명의 군사를 주어 이광리를 돕게 했다. 처음에 이릉은 몽골 초원 깊숙이 들어가 10만명의 흉노군과 싸워 승리를 했지만 지원군이 도착하지 않아 흉노에게 포위되자 이릉은 항복했다. 이 전투에서 한군은 400여 명의 군사들만이 탈출해 살아 돌아올 수 있을 정도로 대패한다.

▲ 사마의(사마중달). 서진(西晉)왕조의 시조인 사마의가 동천왕과 연합하여 공손연을 멸망시켰으나 위나라가 약속을 어기고 고구려를 배신하자 동천왕이 응징한다.  ⓒ
당시 사마천은 기록을 관장하는 태사관이었는데 포로가 된 이릉의 용감성을 변호했다. 무제는 항복한 이릉(흉노에 의해 왕으로 봉해짐)을 변호하는 것에 분을 참지 못하고 사마천에게 궁형(거세)과 함께 삭탈관직한 후 투옥했다. 사마천은 이 고통을 디디고 중국 사서로 위대한 '사기'를 편찬한다.

이 전투 후 무제가 죽자 흉노와 한 양측 모두 다시 전쟁을 하지 않은 것을 보아 한나라의 피해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흉노와 한의 휴전은 큰 틀로 보면 대략 300년(전한-후한 시대)에 걸쳐 중국과 흉노가 공존하면서 평화롭게 지낸다.

한과 흉노 두 제국의 평화 공존 중에 흉노와 한은 해체의 길로 나가는데 우선 기원전 57년에 흉노는 동서로 나뉘어진다. 분리된 흉노 간에도 전쟁이 일어나 서흉노의 선우인 질지는 동흉노의 호한야에게 패배하자 일족을 이끌고 우랄 산맥 너머 씨르다리아 강 중류에 이르렀다. 이 서방이동 중에 정령, 호게, 견곤, 강거, 대완(大宛, 페르가나), 대하(大夏) 등 서역제국을 공략하고 병합해 견곤(추강과 탈라스강 사이)을 수도로 하는 ‘아정(牙庭)’이란 나라를 세운다. 이때에 벌써 흉노가 서방 세계에 근접한 아랄 지역에 도착하는데 이를 서양에서 흉노 제국이 출현한 기원으로 인식하며 흉노의 제1차 서천이라고 부른다.

349년, 후조의 석민(石閔)이 정권을 잡자 한인(漢人)들이 흉노를 포함한 유목민들에게 원한이 많다는 것을 알고 한인들을 부추켜 흉노(갈족 포함)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이 일어났을 때 무려 20여만 명이나 살해되는 것을 방관한다. 350년, 기(祇)가 한인(漢人)들에게 학살당한 원한을 갚고자 흉노들을 규합해 후조에 대항했으나 또 다시 패배하면서 흉노는 중국의 역사에서 사라진다.

흉노는 큰 틀에서 350년까지 4차에 걸친 서천이 이루어지며 375년에 훈족이라는 이름으로 게르만족인 동고트를 공격해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시켜 사실상 현대문명의 기초를 닦게 만든다. 한편 훈족의 지배집단과 동일한 또 다른 부류가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동천(東遷)해 가야, 신라 등의 지배자가 됐다는 것이 새로운 자료들에 의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설명한다.

<고구려왕은 선우>

▲ 오나라의 손권.  ⓒ
중국인들이 고구려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는 고구려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관건이다. 그런데 중국이 고구려를 흉노계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중요한 자료가 있다.

그것은 중국 중원이 오, 촉, 위의 삼각 관계로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을 때 오나라의 손권이 고구려의 동천왕을 흉노의 수장을 의미하는 ‘선우’로 호칭한 것이다.

중국은 후한이 망하고 나관중의 『삼국지』로 유명한 위나라(220-265), 촉나라(촉한 221-263), 오나라(222-280)의 대립시기였다. 서기 237년 공손연은 위나라와 오나라 간의 대립을 이용해 자립해 국호를 연이라 하고 나라를 세웠다. 이때 위나라의 왕은 조조의 아들 조비였다.

조비는 관구검을 유주자사로 임명해 공손연을 공격케 했으나 쉽게 승부가 나지 않자 고구려의 동천왕에게 도움을 청한다. 동천왕의 협력을 약속받은 위나라는 238년 제갈량의 숙적이자 위나라 최고의 전략가인 태부 사마의를 파견해 동천왕이 파병한 고구려군과 합동으로 공손씨 세력을 멸망시켰다.

『삼국지』의 주역 중에 한 명으로 볼 수 있는 사마의의 자는 중달(仲達)로 진왕조 건국 뒤에 고조선제(高祖宣帝)라고 추존됐으므로, 사마선왕(司馬宣王) 또는 진나라의 고조선제라고도 부른다. 처음에 조조(曹操)의 측근으로 들어가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 文帝)가 위나라를 세운 뒤에는 명제(明帝)·제왕(齊王) 등 3대 황제를 섬겼다. 그동안 대도독(大都督)이 돼, 위나라의 군사를 통솔하고 그의 손자 사마염(司馬炎) 때 제위를 빼앗아 진나라를 일으키는 터전을 닦았다.

그의 주요한 업적은 조비의 유언을 받아 명제 및 제왕을 보좌했을 뿐만 아니라, 삼국 정립의 위기에 처해 외적을 물리친 일이다. 특히 촉한(蜀漢)의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오장원(五丈原)에서 막아, 그의 의도를 꺾었으며 요동(遼東)을 정벌해 공손연(公孫淵)을 멸망시키고, 요동을 위나라의 영토로 삼았다. 바로 이때 동천왕의 개마무사가 큰 공헌을 한 것이다.

그런데 동천왕이 위나라와 손을 잡기 전에 먼저 고구려에 손길을 보낸 것은 오나라의 황제 손권이었다. 손권은 오나라의 북부에서 공손씨가 요동반도를 장악하면서 강력한 위세를 떨치자 연의 동쪽에 있는 고구려의 동천왕(234)에게 사굉(謝宏)과 진순(陳恂)을 사신으로 보내면서 양국에 적대적인 공손연을 협공하자고 한다. 공손연은 237년 위로부터 이탈해 스스로 연왕(燕王)을 칭하고 연호를 소한(紹漢, 한나라 왕조를 계승한다는 의미)이라 했다.

▲ 동천왕의 벽비. 광개토대왕비보다 160여년 앞서며 위(魏)나라 관구검의 고구려 침입을 물리친 뒤 천부궁(天府宮)을 재건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
공손연이 오나라의 북방에 위치하므로 원래 오(吳)의 손권은 이들을 달래려고 233년 사신 진단, 장위, 두덕 등을 공손연에게 보냈다. 그러나 공손연이 이들을 죽이려 하자 진단과 황강 등이 달아나 고구려의 동천왕에게 자기들은 원래 손권의 밀명을 받아 고구려로 오던 중에 풍랑으로 요동해안에 표류돼 공손연의 관헌들에게 문서와 방물을 모두 빼앗기고 간신히 살아서 고구려로 들어왔다고 했다.

동천왕은 이들의 간계를 모르고 그들을 오로 돌려보내면서 예물을 보냈다. 이에 오의 손권이 234년 사자 사굉, 중서 진구를 고구려에 보내면서 놀랍게도 고구려의 동천왕을 흉노의 수장을 의미하는 선우로 책봉(冊封)하고 의복과 보물 등 예물을 보냈다.

중국의 천자를 자임하는 손권이 고구려왕에게 흉노의 수장을 칭하는 선우로 책봉하면서 협력하자고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고구려가 북방 기마민족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 즉 주력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서 책봉이란 뜻은 정식 수교(修交)의 관례적인 형식일 뿐 반드시 주종 상하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시 사신들이 도착한 항구를 압록강 하구에 있는 안평구(安坪口)라고 적었는데, 안평구의 인근에 천혜의 요충지 박작성(현 호산(虎山) 장성으로 중국은 명나라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이라고 주장함) 등이 있으므로 고구려와 오나라가 연합하면 요동의 공손연을 공략하는 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그런데 손권의 정략은 실패한다. 동천왕은 손권의 의도에 휘말리지 않고 236년 오나라가 보낸 사신의 목을 베어 위(魏)로 보냈다. 또한 238년 위의 태위 사마의가 요동지역의 공손연을 공격할 때 구원병 수천 명을 보내 지원까지 했다.

그러나 동천왕이 손권의 제휴를 뿌리치고 조조의 손을 들어 사마의와 함께 연나라를 멸망시켰지만 사건은 동천왕의 기대처럼 진전되지 않았다.

고구려의 협조로 연나라를 멸망시켰음에도 위나라는 약속을 어기고 고구려가 차지한 지역까지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동천왕은 이들의 배신을 응징하기 위해 239년부터 240년 사이에 요동군의 북부와 남부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242년에는 요동군 서안평현에 다시 진격해 현성을 함락시켰다.

서안평은 현재의 신의주 바로 건너편인 요녕성 단동현 구련성공사 첨고성(尖古城)으로 추정되는데 이곳은 북한과 요동을 이어주는 길목으로 지금도 이곳을 따라 심양과 장춘으로 연결되는 철도가 놓여 있을 정도로 중국에게는 중요한 요충지이다.

중국의 길목을 점령당한 위나라는 곧바로 관구검으로 하여금 즉시 반격해 고구려 정벌에 나서도록 했다. 이 당시에 현도태수 왕기와 선비족 계통으로 유명한 흉노계열의 오환의 병력도 합세했다. 이들에 대항해 동천왕은 철기군(개마무사) 5천명을 포함해 2만명의 대군을 동원해 이들을 격파했다. 고구려가 막강한 개마무사로 당대의 패자 중에 하나인 위나라를 격파한 것이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설명한다.

▲ 서안평구. 고구려와 중국의 격전지인 서안평으로 추정된다.  ⓒ
일반적으로 고구려의 1차 저지선은 양맥 지방이었는데 관구검의 군대는 이곳을 쉽게 통과한 후 비류수(혼강 상류)에서 고구려군과 대치했다. 그러나 지형지물을 적절하게 이용하는 고구려군에게 대패해 3천여 명의 사망자를 내고 오던 길로 후퇴했다. 고구려군은 위군을 추격해 양맥 골짜기에서 다시 위군 3천여 명을 섬멸하면서 계속 추격했다.

이때 고구려로서는 천추의 한이 될 대악수를 두었다. 동천왕이 위군의 추격에만 급급해 철기군 5천명만 데리고 쫓아가다가 위군의 역습을 당해 대패한 것이다. 원래 대오를 잃고 마구잡이로 도망치는 군대를 섬멸하는 것은 기병의 몫이지만 기병이 단독으로 보병진지에 정면 돌격한다면 상황이 어떻든 항상 위험해진다는 것이 전투의 기본 상식이다. 그런데 동천왕은 위군이 궤멸 직전이라 판단하고 기병만으로 추격에 앞장섰다가 위군의 역습을 받아 대패한 것이다.

고구려의 철기병은 구성 요원 자체가 고구려의 상층부 인원으로 고구려의 주력부대라고 볼 수 있으므로 이 패배는 고구려로서는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다행한 것은 관구검도 고구려를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철수했다는 점이다.

하나 관구검은 다음해 10월 군사를 재정비한 후 또 다시 공격해 왔다. 이때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이 점령되고 동천왕은 국가 지도부만 데리고 곧바로 함경도 산맥지역인 옥저로 피신해 고구려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몰렸다.

승세를 잡은 관구검은 고구려를 완전히 멸망시킬 기회라고 판단하고 현도태수 왕기를 시켜 동천왕을 추격케 했다. 왕기의 추적은 집요해 드디어 동천왕은 황초령 부근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왕기의 한 부대에게 포착됐다. 공격을 받은 고구려군은 산산이 흩어졌다.

이때 고구려의 유유가 거짓 항복한 후 적장을 찔러 죽이겠다고 동천왕에게 허락을 요청했다. 동천왕이 허락하자 유유는 위나라 군중(軍中)에 들어가서 거짓 항복을 했다. 적장은 유유의 항복을 진심으로 믿고 그를 맞이하자 유유는 음식을 꺼내면서 그릇 속에 감추었던 단검을 꺼내 적장을 찔러 죽이고 자신도 그 자리에서 자결했다. 지휘관을 잃은 현도군은 후퇴했고 동천왕은 포위를 벗어날 수 있었다.

유유의 계교에 의해 적장이 살해되는 등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왕기는 그 뒤에도 동천왕을 계속 추격했다. 그러나 험준한 고구려 땅에서 동천왕을 추격했지만 숙신 땅의 경계(간도 지방으로 추정됨)에서 회군했다.

왕기가 철수하자 동천왕은 수도로 귀환했으나 고구려의 근거지인 국내성과 그 일대는 크게 파손된 상태였다. 새 근거지를 위해 동천왕은 평양을 개발ㆍ확대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평양이 고구려의 수도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는 설명이다.

위나라는 259년에도 울지해로 하여금 고구려를 치게 했지만 양맥골짜기에서 고구려 5천 기병의 공격을 받아 8천여 명이 살해되는 등 대패한다. 이와 같이 고구려가 위나라와 쫓고 쫓기는 혈투를 계속했다는 것은 고구려가 동북 지역에서 중국과 대등한 제국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속)

참고문헌
『쟁점으로 푸는 역사이야기』, 윤여덕, 심학당, 2006
「북방 기마민족의 가야, 신라로 동천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70호, 2004
/이종호 과학저술가  
출처 : 아이저아라
글쓴이 : 아이저아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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