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03 훈족·몽골...·수메르...

[스크랩]훈족이야기-한수선씨 연재

monocrop 2007. 3. 9. 00:33

훈족이야기-한수선씨 연재

 

 

 

http://blog.naver.com/samshin0/100015295957                                           2005/07/21 19:41

네이버 블로그 '개인 철학 연구소'에서 펌.

 

 

 

 

훈족이야기1

서기 370년 바람과 같이 유럽 다뉴강(현 헝가리) 초원에 진출한 훈족(흉노)에 대한 배경은 아직까지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정확하게 어느 민족이며 아시아 어느 지점에서 출발해서

유럽으로 이동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 대한 연구는 아시아 지역에서 거의 전무한 상태였고 훈족에 대한 연구는 유럽인들이 300 여 년 전 시작해 훈족이 흉노라는 베일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유럽에 진출한 훈족에 대한 기록은 로마인들이 많이 남겼으며 그 기록 중에서 훈족은 네모진 얼굴에

광대뼈가 툭 튀어나오고 납작한 코, 옆으로 가늘게 쭉 찢어진 눈, 이마에 편두를 한 작달막한 사람들로 로마인들에게 혐오감을 주었던 이들은 분명 아리안족인 백인과는 거리가 먼 중앙아시아와 몽골 초원에 살던 몽골계 유목민족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은 유럽과 중근동을 지배하던 대제국 로마와 싸워 그들을 괴롭히며 로마로 부터 조공을 받아내면서 활동영역을 서유럽까지 넓혀 갔다. 이들과 끝임 없는 전쟁을 치루며 조공으로 국력을 잃은 서로마는

끝내 침입해온 게르만족에게 힘없이 멸망했다.

로마의 어린이도 훈족이 온다면 울음을 그치게 할 정도로 전쟁터에 나가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사람과 동물을 죽이는 잔인하기가 이루 말 할 수 없는 그들이 유럽으로 출발한 근원지를 추적한 다큐가 독일과 미국에서 두 편 제작되었다.

독일 ZDF 방송에서 제작한 스핑크스, 역사의 비밀에서 독일 연출가인 옌스 페터 베렌트와 미국의 코넬 대학 교수인 아이케 슈미트 박사가 훈족을 집중적으로 추적하면서 한반도 남단인 목곽적석 신라고분군에서 발굴되는 많은 유물을 검토한 후 내린 결론은 훈족이 아시아 최동쪽인 한반도에서 출발 했을지도 모른다고 결론을 내렸다.

미국에서 제작된 훈족 다큐 Atilla, The king of Babarian 은 메모해둔 자료가 없어져 다큐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잊어버렸지만 기억에 남은 그들은 중국과 미국의 역사학자들이었다.

두 편의 다큐를 비교해 보면, 독일 ZDF 방송에서 제작한 다큐는 철저하게 유물 고증으로

훈족의 출발지가 한반도 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고증을 해가면서 밝힌 반면,

1997년 방영된 미국에서 제작한 훈족 다큐는 첫번째 화면에 한반도 지도가 나오면서

붉은 화살표가 한반도에서 만주 벌판으로 뻗어 올라가며 훈족의 출발지를 한반도 본토로 기정사실화 하면서

훈족은 한반도 깊숙한 본토에서 출발했다는 설명이 이어지는 TV 화면을 보면서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다큐는 나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어서 다큐를 본 후 나는 훈족의 자료를 찾아 오늘 이 시간까지 책과 인터넷에서 훈족의 자료를 수집하는 계기가 되였다.

신라와 한반도에 정착한 훈족(흉노)이 서유럽으로 진출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이해하려면 우선 우리가 알고 있는 피상적인 스키타이 민족에 대한 정보 보다는 이들에 대한 폭넓은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지 않고는 이해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해서 스키타이민족에 관한 역사자료를 시작으로 유럽으로 이주한 흉노의 발자취를 그들이 남긴 유물을 비교해 가면서 살펴보려고 한다.


1,스키타이 민족과 역사

스키타이 병사들은 죽은 적병의 두피를 벗겨 양손으로 비벼서 부드럽게 만들어서 필요할 때 마다

수건처럼 사용했다. 그들 사이에서 두피를 많이 가진자가 존경을 받고 두피조각을 여러 개 꿰매어서

큰 두피수건을 만들기도 했다. 적병의 머리를 잘라 두개골 안쪽을 금판으로 입히고 가죽으로 밖을 씌워 컵으로 사용했다. 집안에 수많은 두개골을 금장식품과 함께 진열해서 찾아오는 손님에게 집주인은 자신의 용맹을 과시했다.

스키타이민족의 신화는 제우스의(Zeus) 아들 타기타우스(Targitaus)가 그들의 조상이라고 전해져오지만, 문자가 없는 그들의 역사를 추정하기는 쉽지 않다.

기원전 6세기경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독특한 스키타이 양식의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알려졌다. 멜유코바(A.I.Melukiova) 는 스키타이 인들이 기원전 2천년부터 기원전 7세기 사이에 몇 차례에 걸쳐서 볼가강-우랄 초원을 거쳐서 흑해연안까지 진출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스키타이인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7세기에 앗씨리아와 키메르인(Cimerians)에 대항한 동맹국으로 알려져 있고, 그 결과 키메르인들은 살던 영토를 잃고 스키타이인들에게 남쪽으로 쫓겨갔다. 기원전 674년 스키타이 파타투아왕은(Partatua)앗씨리아 공주와 결혼으로 앗씨리아와 동맹관계를 굳히며 그들과 함께 카스피해의 메도스(Medos)지역을 정복했다. 메도스인들은 후에 스키타이인들을 서아시아지역에서

격퇴해 이들은 다시 폰티악(Pontiac) 초원으로 쫓겨났다.

스키타이민족이 어느 인종에 기원을 두고 있는지, 그들의 문화를 추적한 결과 그들의 문화는

인도북부[현북부 파키스탄 스르브나야(Srubnaya)]지방과 연계 되였다는 사실

헤르도토스가 남긴 스키타이인의언어 기록 중

'pata" 죽이다, 'spou' 눈,arima' 하나, 'oior' 남자 등이 남아있어 언어학자들은 스키타이인들이 사용한 언어를 인도-유럽어 어군 이전의 고대 언어로 분류하고 있어 이들의 출발지가 어디인지를 거의 정확하게 규명 할 수 있다.

말과 스키타이인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이들은 말을 타기 위해서 바지를 고안해 입은 최초의

인류라는 기록을 남겼으며(유럽인의 시각), 이들이 인류역사상 최초로 말을 길들여 타고 다닌 민족으로 추정되며, 말등에 안장 없이 천을 깔고 달리는 말위에서 등자도 없이 몸의 중심을 잡으며 전투를 벌이는 광경은 적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유럽과 중동에서 말을 전투에 사용할 수 있는 말타는 기술을 전파시킨 민족은 스키타인들이며 유럽과 중동제국에서 말탄 사람이 몸의 중심을 잡아주는 등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훈족이 유럽에서 몰락한 6세기 부터였다. 

6세기 이전을 그린 서양 영화에서 등자가 있는 말을 타고 유럽인들이 싸우는 장면은 역사를 무시하는 허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스키타이민족과 전쟁을 한 다리우스 대왕이 관찰한 일화는 스키타이인의 한 단면을 분수 있는 장면이다. 한창 전쟁을 하는 중, 스키타이 병사들은 전쟁터 근처에서 풀을 뜯고 있는 토끼를

가끔씩 훔쳐보기 시작하다가 스키타이 병사들은 잽싸게 전쟁터를 벗어나 토끼사냥을 했다.

다리우스대왕이 스키타이 전사들의 행위를 이해 할 수 없는 것처럼, 현대문명인인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눈에도 스키타이인들의 그런 행위는 이해하기가 힘들다.

이들이 남부 소련지방과 알타이 지역에 남긴 수많은 고분들이 발굴되면서 이들에 대한 많은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며 초원에서 활동적으로 살았든 이들이 남긴 짐승을 대상으로 한 예술과 말에 대한 사랑을 알 수 있게 되였다. 야만족으로 무시했든 특이한 이민족에게서 문명인인 우리는 바지와 승마기술을 전수

받았다.

BC 514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은 7십만의 대군으로 다뉴브강을 건너 소련의 초원으로 진격해 스키타이 정복길에 나섰다. 이를 맞은 스키타이인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작전을 사용하며 페르시아군과 직접적인 전투를 회피하면서 계속 후퇴하는 이들에게 다리우스대왕이 전투를 독촉하자 이들은 이렇게 회답했다,

우리가 후퇴를 하며 전투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평화시의 평상적인 생활 방식을 따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집과 재산이 있는 마을도 없고 또 경작할 농지도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전쟁으로 모두 잃을 것이라는 공포에 대왕의 군대와 대항해 싸울지도 모릅니다. 그래나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우리는 대왕의 군대와 전쟁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그렇지만, 대왕이 우리와 진정 한판의 전투를 즉시 하고 싶으시다면 우리조상들의 무덤을 한번 건드려 보십시오, 그때 대왕은 우리가 싸울지, 싸우지 않을지를 알게 되실 것입니다.

다리우스대왕에게는 이상한 전쟁이었다. 생각해보니 스키타이인과 전쟁으로 적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점령할 도시도, 건물도, 약탈할 아무것도 없었고 그곳에는 끝없이 넓은 지평선만

보이는 초원밖에 없었다. 다리우스대왕은 철군 외에 다른 선택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철군하는 대왕의 군대에 스키타이군대는 다뉴브강까지 따라 가면서 대왕을 괴롭혔다. 그 일이 있은 후 다리우스 대왕은 다시는 다뉴브강을 건너 북쪽 초원으로 스키타이 정벌을 포기해 결국 승리는 스키타이인들에게로 돌아갔다.

"성을 쌓고 도시를 건설하는 자는 망하고, 초원에서 끝없이 이동하는 자가 승리 한다는 몽골 초원의 유목민들의 믿음은 스키타이민족에서 유래한 말이 틀림없을 것이다"

기원전 7세기부터 3세기까지 스키타이민족은 흑해초원 북쪽부터 흑해, 돈강(Azov해로 흘러 들어가는

러시아 중부의 강)동쪽 부터 서쪽 다뉴브강까지 차지했다.

스키타이 부족 중 최고의 위치는 지배층에 속하는 부족이며, 다음이 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부족, 최하위층이 농경생활을 하는 부족으로 이들은 지배부족과 유목민의 지배를 받았다.

 

(사진 융성기의 스키타이 영역, 노란색)


스키타이민족의 융성기는 기원전 4세기~3세기 초에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발전에 최전성기였다.

수많은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인들이 정치 경제 상업의 중심지인 흑해연안 카맨스코 고로다스케 (Kamenskoe Gorodishche) 지역에 정책해 살기 시작했다.

또한 이시기인 기원 전 339년 스키타이왕 아테아스(Athesas)는 스키타이 제부족을 통합해서 영토를

확장해 트레시안(Tracian)국경인 다뉴브강까지 진출했다.

아태아스왕은 나이 90에 마케도니아의 필립공(Philip, 그리스의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과의 전투에서 전사했으나 스키타이 왕국은 그의 죽음에도 부강한 국가 형태를 유지하다가 기원전 3세기 말 서쪽으로 부터 처들어오는 켈트(Celt)족과 트레시안(Tracian)족, 동쪽에서 처들어오는 사마시안(Samathians)족에게 밀려 스키타이인들은 이들에게 흡수되며 역사의 장에서 사라졌다.

 

 

 

훈족이야기2

2. 스키타이 민족의 생활과 풍습

스키타이인의 가족구성은 1부 다처제로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그리스인들은 이들이 모계사회였다고 보고 있으나 고고학자들이 남부소련 지방에서 발굴한 그들의 묘는 그리스인들의 주장이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사람은 몇 명의 처를 거느리며 사후에는 그의 형제나 아들이 그의 처를 소유 할 수 있었다.

스키타이 여자들은 별다른 권한 없이 집에서 자녀들을 돌보며 사는 존재에 불과했다. 스키타이인의 이웃인 사마시안(Smartian) 여자들이 말을 타며, 남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전쟁에도 참여하는 활동적인 생활과 비교해 볼 때 스키타이인 여자들은 마차를 이용해서 자식들과 함께 이동을 하는 정도의 능동적인 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물고기와 야생의 짐승이 풍부한 이들에게 양식은 항상 풍부했다. 이들의 기본식품으로는 현재도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중요한 식품인 발효한 말우유, 치즈, 파 마늘 콩 등이 이들의 주식이었다.

헤르도토스 본 스키타이인들은 열정적인 모습으로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수염을 기른 얼굴에 깊숙하게 패인 눈에 검은 눈동자와 바림결치는 긴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사진출처-김성모님

필자주1. 위사진 설명에서 말탄 사람이 아랍인이라고 했으나 그는 헤르도토스 설명한 스키타이인이다. 앉아있는 사람은 여성이 아닌 남장한 무당(한국의 남자박수 무당)을 만나고 있는 장면이다.
말에 달려있는 곡옥은 신라의 곡옥과 같은 형태로 다산을 뜻하며 그리스에서 스키타이인들이 몽골초원에서 유목민에게 전해진 스키타이 문화가 신라경주 까지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이 스키타이인이라는 확증은 그가 입고 있는 하의가 바지여서 알타이지방까지 진출한 스키타인이라고 고증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다. 스키타이인들이 세계 최초로 말을 타기 위해서 바지를 고안해 입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필자주2. 왼쪽은 고구려 무용총 벽화의 무용수들이 입은 바지는 스키타이 문화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바른쪽 고구려 각저총 씨름도에 등장한 인물에서 보이는 수염 기른 인물은 이랍인이라고 설명되고 있으나 필자의 생각은 스키타이민족이 고구려까지 진출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1947년 2천 년 전의 스키타이인 묘지에서 발굴된 그들의 시신에서 굽이 달린 부드러운 장화와 함께 이들이 문신을 한 사실도 밝혀졌다. 그들의 신앙은 무속신앙으로 미신을 믿으며 귀신을 쫓는 부적을 사용하기도 했다. 귀신을 쫓아내고 길흉을 점치는 무당은 특별한 집안에서 배출되며 최고의 무속인은 에나리스(enarees) 라고 불린 남자 무당이다. 남자와 여자의 중간 즉 반남반녀로 불린 이 남자 무당은 여자의

목소리를 내며 항상 여자 옷을 입고 생활했다.

스키타이인들은 왕이 사망했을 때 시위적인 애도의 슬픈 행위는 장기긴 계속되었다. 모든 부족이 모여 40일 동안 장례의식은 거대하게 치러지며, 슬픔을 표시했다. 왕의 직계 가족들은 머리를 몽땅 자르거나, 귀와 앞이마나 코와 팔에 칼로 그어 상처를 내어 슬픔을 표시했다. 왕의 장례식 때 그가 생전에 애용하든 무기와 모든 집기를 함께 묻은 후 장례를 주관하는 집단은 왕의 처 중에서 한사람과, 술시중인, 하인과 전령을 목 졸라 죽이고 그가 생전에 애용하든 말을 죽여 왕의 주위에 함께 묻었다.

무덤은 적석목곽분으로 60 피트 높이로 봉분을 만들었다.

이것으로 왕의 장례식이 끝난 것이 아니다. 왕이 죽은 지 일 년 후에 왕을 가까이서 모시던 최고 50여명의 젊은 사람들을 목졸라 죽여 왕의 무덤 주위에 묻어 사후왕의 시중을 들게 했다.

헤르도토스가 기록에 남기지 않은 부분은 스키타이 전사들이 남긴 힘차고 생동감 넘치는 예술품들이 있다. 기원전 6세기경 스키타이 인들은 동물을 주제로 자연적인 모티프의 장신구를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스키타이인들이 선호하는 동물은 첫째 사슴을 시작으로 말, 야생염소, 산돼지, 곰, 늑대, 고양이과 짐승, 독수리 물고기 등이었다.

스키타이인의 문화는 기원전 1,000 년 전에 이미 중국의 북쪽 유목민에게까지 전파되었다. 지난 2백년간, 알타이 파직과 중앙아시아 남부시베리아에서 스키타이 고분의 발굴로 부장품이 출토되면서 스키타이민족의 예술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고분에서 출토된 부장품 중에서 세계인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수많은 금으로 제작된 장신구이다. 스키타이인들이 번성기에 알타이지방까지 진출해서 황금광이 많았든 그 지역에서 황금을 채굴해 사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이유는 알타이 지방에서 금의 산출이 많았기 때문이다.

금으로 만든 혁대와 장식품 및 수많은 금장신구, 금관 같은 장식품은 스키타이 문화가 한반도 남단까지 영향을 미처 스키타이 문화가 꽃을 피웠다는 사실은 신라의 문화가 이들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1세기경에 제작된 아프가니스탄
황금의 계곡에서 발굴된 금관




신라금관

신라금관과 아프가니스탄 금관은 스키타이문화의 산물이다.

지구상에서 면류관이 아닌 금관을 제작한 국가는 한국과 아프가니스탄 두 나라 외에 없다.

참고1. 헤르도토스( Herodotus )
헤르도토스(c.480-c.429).인류최초의 그리스 사가로 많은 사서를 남겼음.

참고2. 다리우스(Darius III) 페르시아 대왕
BC 331년, 그리스의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과 가구가멜라(Gaugamela) 대전에서 침패한 후 그의 일족에 의해서 피살됨. 그의 죽음으로 2세기 동안 고대세계에서 강국으로 군림했든 페르시아 왕국은 종말을 맞았다.

참고3. 디오도루스 (Diodorus)
이태리 반도 남단섬 시실리 출생의 그리스 사가,40여권의 저서를 남긴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거주 한 것으로 추정되며 카이사르(씨이저) 의 친구로 알려짐.

 

3. 훈(흉노)족이 서유럽으로 이동한 이유

훈족(흉노)이 서유럽으로 이동을 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중앙아시아와 극동지방에 있었던 천재지변이었다. 4 세기 초엽부터 5년간 기온이 1도가 내려가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에게 생명과도 같은 풀과 농작물이 냉해로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목민인 훈(흉노)족은 자연재해를 피하기 위해 만주를 거처 중앙아시아 초원을 따라 한반도 깊숙한

본토로 부터  대이동을 시작해 만주를 거처 초원을 따라 북상해서 서쪽으로 이동했다. 미국에서 제작한 Atilla, The King of the Babarian 에서 훈족(흉노)의 대이동이 한반도에서 출발했다고 주장하는 근거를 확인하기 위해서 방영한 케이불 방송인 The Learning Channel 방송국에 편지로 문의를 했으나 Discovery 방송과 통합 되였다는 사실을 통보받고 통합한Dicocery 방송에 편지로 문의 하자 두방송국이 통합된 후 수천 개의 다큐중 찾기기 힘들다는 통보를 받아 아직도 그 다큐 제작에 관여한 학자들에게 문의를 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에서 제작한 훈족(흉노) 다큐와 달리 독일방송에서 제작한 훈족추적 다큐 역사의 비밀 제작에 참여한  베린토슈미트 박사는 한민족과 훈족이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고증으로

한반도 남단 가야 지방에서 출토된 청동솥 유물과 훈족(흉노)가 서쪽으로 이동하며 거쳐 간

지역에서 발굴된 훈족(흉노)의 청동솥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1924년 경주 노동동 금령총에서 발굴된 국보인 기마인물상(국보 91호)에서 말잔등에 실려 있는 청동솥처럼 훈족(흉노)도 말잔등에 청동솥을 싣고 다녔다.

청동솥에서 발견되는 문양이 한국의 머리 장식에서도 많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들었다.

훈족의 이동로에서 동복은 30여개가 발견 되였고  높이가 50-60 cm 무게는 50kg 이 넘는 무게를 가지고 있다.

이들의 청동솥은 훈족의 이동경로 외에 동복은 발견되지 않는 다는 사실에 주목해야한다.



 
경주고분에서 출토된 기마인물상은 전형적인 유목민의
차림이다. 삼각모와 말잔등에 실려 있는 동복(청동솥)은
훈(흉노)의 동복과 같은 형태다.

기마인물은 편두를 했다고 보고 있으며 미스터리처럼
남아있는 금관의 직경이 작은 이유는 신라왕들이 편두를
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기마인물상의 발이 등자를 사용하고 있다. 훈족이 사용하던 등자와 같은 형태의 등자는 유럽인들에게는 신병기였다. 등자는 훈족이 유럽을 유린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동복은 유목민의 상징적인 유물로 스키타이식과 흉노식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흉노의 동복이 스키타이식과 구별되는 것은 몽골계 유목민이 스키타이민족의 문화를 계승하면서 독자적인 형태의 동복으로 발전시켜 장식이 거의 없는 스키타이식 동복과 달리 화려한 문양이 있고 손잡이의 형태가 다르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동복은 북한과 중국 길림지역에서 발견되었고 북부중국 초원과 내몽고 오르도스지방, 남부소련, 헝가리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남부 깊숙한 한국의 경주고분과 김해의 가야고분인 대성동에서 발견되는 흉노식 동복은 북방계인 흉노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유물이다. 

청동솥의 용도는  유목민 족장들이 사용하든 용기로 제례의식에 사용하는 고기를 삶을 때 쓰는 용기다. 국보인 말탄 기마인물이 말잔등에 동복을 싣고 있어 그 주인공은 족장의 지위에 있는 실제 피장자의 모습일 수도 있다. 기마인물상이 쓰고 있는 삼각모자와 복식은 전형적인 유목민이 사용하는 것이며 말안장과 등자는 훈족이 사용하던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훈족은 유럽에 알려지지 않은 등자를 사용했다. 등자는 말탄 사람이 마상에서 몸의 중심을 잡을 수 있게 가죽이나 신발주머니처럼 만들어 말안장에 연결시켰다. 훈족이 말을 타고 활을 쏘며 공격해오는 모습은 유럽인들에게 경이적이고 두려운 모습으로 보인 것은 훈족이 등자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훈족이야기4

훈족이 한반도로 이주한 이유

신라토우 기마인물상의 흉노인은 어떻게 생긴사람 들이며,왜 한반도로 이주했을까? 

사마천은 흉노를 이렇게 묘사했다.

머리는 큰편이고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얼굴은 넓고 콧수염은 많으나 얼굴에난 수염은 많지

않고 턱수염은없다. 눈썹은 짙으며 눈은 찢어지고 불타는듯 강렬한 눈동자를 가졌다.

사마천이 위에 묘사한 흉노의 모습은 그리스의 사학자 프리스커스(Priscus-Priskos)가 서기448년, 현헝가리 북쪽 다뉴브강가에 있는 아틸라의 궁정에 동로마 사절의 일원으로 방문해 남긴 아틸라의 모습에 대한기록과 거의 일치한다.

백년후,고트족 출신 사학자 졸다니스(Jordanes)는 프리스커스가 남긴글을 라틴어로 정리하면서 아틸라의 눈을 잿빛으로 기술했으나 유럽인들이 아틸라를 유럽인으로 보는 시각에서 보는 착시 현상에 불과 하다고 볼수있다.(프리스커스의 아틸라 궁정방문기는 차후에 연재)

한민족은 단일민족이라는 교육의 결과,  한국인 대다수는 한민족이 단일민족이 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흉노가 왜 한반도로 남하했으며, 어떤이유로 유럽으로 이동을 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먼저 한민족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는게 옳바른 순서일것이다.

                  아래 사진들은 바이칼호를 여행하신 이수한님이 제공한 사진과 설명입니다.

 몽골 북쪽 국경에서 불과 수십 km 북쪽에  완두 콩깍지 같이 생긴 세계에서 가장 큰 담수호가 있다. 

많은 역사학자들과 한수선씨가 주장하는  한민족의 발원지이다.




 

                                 B      a      i      k      a      l




바이칼 호반에서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곰과 우리마을 동구에 세워져 있는것과 똑같은 장승이 서 있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바이칼호에서 가장 큰 도시 <이르쿠츠크> 인근에 있는 아름다운 러시아 교회(한곳에 세가지의 돔 양식이 보인다)




 
                                                 통나무집 민속촌에 있는 전통 통나무집




 
여염집과 다를바 없는 <무당의 집> 봉당에는 제법 큰 나무가지가 구멍에 꽂혀 있다. 우리네 무당이 궂거리를 할때 흔히 "대를 내릴때" 에 흔드는 나무가지와 크기만 다를 뿐 너무나 닮아 있다는 것은 우연인가? 우리 샤마니즘의 기원인가?



 
통나무집은 스키타인이 적석목곽분 묘를 조성할때, 망자가 살든 집을 통채로 넣고 그위에 돌을 덥고 흙으로 덥어 봉분을 만든 예도 있다.

한민족의 선조는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에서 빙하기가 끝날 무렵 남하했다는 설은 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민족의 선조인 이들이 새로운 정착지에 도착한곳에는 우리 선조와는 이질적인 선주민족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선조들이 이민족과 함께 지내며 남겨놓은 일상생활의 지혜속에서 찾아볼수가 있다.

한민족은 순수한 단일민족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든 나는 많은 역사서와 역사다큐를 보면서 한민족의 단일민족설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서울을 갈때 마다 나는 청계천 고서점을 들려 필요한 고서와 중고역사서를 사가지지고 온다. 그중한권의 책이  "처세상식 관상보감" 이라는 관상보는 법에 대한 책이다. 이 낡은 고서는 휴전이 끝난지 2년후인 1955년에 발행한 이책은 지질이 좋지않아 이미 갈색으로 변해 책장끝을 손으로 비비면 부서져버릴 정도로 변했다. 이책을 읽으면서 한민족은 단일민족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관상보는 책의 내용은 한민족의 선조가 남하해서 정착하면서 이웃 이민족으로 부터 순수한 혈통을 지키려는 지혜로 가득했다. 많은 내용중 일부른 보면, 허리가 하체보다 길어야 길상이다. 눈이커서 좌우 상하에 흰자위가 보이는 눈을2백, 3백, 4백이라는 명칭을 붙여, 특히 여자의 눈이 아래위 상하 4군대 흰자위가 크게보이는  여자는 남편이 죽을 흉상이다, 여자들의 눈이크면 흉상이다. 머리칼이 갈색이거나 눈동자에 색상이 있어도 않좋다. 몸에 털이 많으면 천한 상이다(수염포함). 남자의 수염이 붉으면 사악해서 흉상중의 흉상이다. 머리가 곱슬머리인 사람은 지독한 사람이니 상대하지말라, 등등 관상보는 책에서 열거한 형태의 모습을 한 사람은 분명 유럽에 살고 있는 아리안족의 모습이며, 이들과는 상대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위사실을 뒷받침 이라도 하듯, 70년대 한탄강가에서 인류고고학을 전공하든 한미군 병사가 발견한 주먹도끼는 세계가 놀랄 많한 대 발견이었다.  이와 함꼐 한국의 A교수팀이 민족간의 당뇨병에 대한 차이를 연구하면서 한국인 60%가 유럽인의 유전자를 같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한민족이 단일 민족이라는 고정관념에서 깨어나날때가 되였다는 결정적인  단서들을 제공하고 있다.. 

 

- 이근호씨 보충글


경주 박물관에는 신라 귀족들이 쓰던 서구식 물건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당시 로마에서 만든 유리잔들이 있었습니다.

저를 놀라게 한 것은 서구인의 얼굴이 새겨진 유리 구슬이었습니다.

모두 신라 역사에서 "김씨" 왕들이 처음 집권한 시기의 무덤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역사가들은 신라 왕족들이 비단길을 통하여 서역의 유물들을 수입한 것이라 하지만,,, 저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신라에서까지 이런 유리구슬을 무역을 하였다면,,, 백제, 고구려는 그보다 더 서쪽이니까, 신라보다 더 많이 나와야 합니다..그러나 고구려, 백제에서 이런 유물을 많이 수입하였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즉, 이 유리 유물들은 신라가 무역으로 구한 것이 아니라, 모두 당시 신라 집권층들이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 부터 간직하고 있다가 후세에게 소중히 계승하여 무덤에 고이 묻었던 "가보"들이었을겁니다.

신라에 금제 유물이 많이 남긴 "김씨" 왕조가 성립될 당시의 신라는 2-3 세기로서 백제, 고구려도 아직 고대 국가로서의 체제가 정비되기 전입니다... 이러한 정세에서는 북방의 유목민들이 충분히 백제, 고구려의 국경을 돌파하여 경주 땅으로 말을 몰고 쳐들어올 수 있었을겁니다...

백제, 고구려에 비하여 2-3세기의 경주의 신라인들은 박혁거세 이후 아직도 후진적인 토착민들이었을거고, 무기도 션찮았을겁니다.   금 세공술을 가지고, 금속기술도 발달한 유목민들이 이들 신라 토착민들을 지배하고 새로운 "김"씨 왕조를 열게 되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겁니다...

유리구슬에 서구인의 초상이 그려져 있는 것은.... 내 추측으로는 당시 신라 집권층들이 유목민들 출신이었고, 당연히 투르크나 흉노와 같은 서구적인 용모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런 서구적인 초상에 대하여 아무 거부반응 없이 소중히 간직하고 무덤까지 가지고 갔다고 추측됩니다..

많은 한국 분들이 흉노족들을 야만족이고 못생긴 사람들로 생각하는데, 중국측의 사료들을 보면, 반드시 그런것만도 아니었다 합니다... 오히려 중국인들보다 아주 건장하고 잘 생긴 사람들이었다는 사료도 있습니다..  흉노, 훈족들 자체가 여러민족의 통합체였습니다...

중국이나, 유럽 게르만, 로마인들은 훈족들에게 죽다가 살아났으니까, 훈족, 흉노족들을 당연히 못생기고 흉측하게 묘사하였을겁니다...  그러나 훈족, 흉노들이 그처럼 열등 민족이었다면 동서의 넓은 지역에서 그처럼 많은 다른 민족들을 상대로 큰 승리를 무수히 거두었을 리가 없습니다...

중앙아시아에 있던 거대한 서구 계통의 흉노인 그룹들이 나눠져서 서쪽으로 이동하고 일부는 동쪽으로 가서 그 전초가 신라 경주에까지 돌파해갔을겁니다... 이처럼 서구인들의 특징을 가진 신라인, 신라 귀족들이었기에,,, 처용 같은 서구적 용모의 제관도 전혀 이질감이 없이 채용되었을겁니다..

처용이 아라비아에서 온 사람이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들은 멀 모르는 겁니다..워낙에 당시 신라귀족들에게 서구적 용모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심지어 금발의 신라 귀족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서구인들의 용모를 한 신라 귀족, 왕족에 비하여 그 아래 백성들은 전형적인 동양인들이었을겁니다... 당연히 골품제를 통하여 그 원래 서구적인 혈통을 보존할 필요를 신라 지배층들은 느꼈을겁니다..

백제, 고구려는 만주를 중심으로 한 뿌리였고,,,훈족등 북방 유목민들의 집권층에의 침투를 막았기 때문에 결국 동양적인 용모들뿐이었을겁니다... 당연히 유럽식의 유리구슬 유물 따위는 보존하고 있었을 리가 없지요...

신라 왕족들이 북방 유목민족 계통이니까, 나중에 여왕이 나와서 지배를 하여도 별 거부가 없었을겁니다...북방 유목민들은 여자 제관들을 섬기는 전통이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아무래도 일반 민중들의 숫자가 많다 보니,,, 원래의 서구적 용모를 한 신라 집권자들도 점차 동양화되어갔을겁니다...

이처럼 신라의 엘리트들은 그 조상이 먼 중앙아시아에서 경주까지 먼 길을 말을 타고 돌파해왔을 정도로 강건하고 모험심 많은 유전자를 가진 훈족들을 조상으로 가졌을겁니다.. 당연히 신라가 삼국통일할 실력이 있었던겁니다...

삼국통일한 후 백제의 지배게층은 대부분 일본으로 도망갔습니다... 고구려의 지베계층은 중국에 합병되었고 일부가 발해로 남았다가 그 멸망 이후 중국, 고려등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들이 떠나고 빈 호남 땅에 신라 평민들이 들어와 섞여 살게 되었을겁니다..장보고의 조상이 백제입니까? 신라입니까?

오늘날 한민족이라는 개념은 후삼국 이후에 생겨났습니다.. 한국인의 성씨의 대부분이 후삼국, 고려 초기에 생긴겁니다..

그 이전에는 한민족이라는 개념도, 단일민족이라는 개념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호남지방에 사시는 한국 사람도 그 조상들은 거의 신라인들이 틀림없습니다...즉 지금의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이 신라인들의 후손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어떤 호남분들이 신라에게 망한 백제의 복수를,해야된다, 즉 백제의 후손인것처럼 생각하시던데,,  따지고보면 그분도 조상이 신라인일텐데,, 웃기는 일입니다.. 그저 호남 땅에 과거에 백제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점 이외에 그 호남분과 백제 사이에 공통점은 하나도 없을겁니다..

 

결론적으로 신라인들중 엘리트들은 훈족의 후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기 보다, 여러 정황들을 살펴볼 때에 이보다 더 근거있는 추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신라 무덤에서 쏟아져 나오는 금관, 유리잔, 구슬들을 설명할 논리가 부족해지는겁니다... 

우리가 흉노의 후손이라고 해서 부끄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그만큼 강건하고 모험심많고, 용감한 사람들의 후손들이니 우리는 더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물론, 훈족들에게 혼이 나서 훈족들을 미워하고 있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기분좋은 이야기가 아닐겁니다..  그러나 다른 민족들의 나쁜 평판 이 두려워서 우리가 이러한 역사적 증명을 무시하고 우리 뿌리를 숨길 필요가 있을까요?

덧붙여,,, 만일 내 추측이 맞다면 왜 우리 역사서에는 훈족 전래 사실이 남아있지 않을까요?

내 나름대로의 추측은,,,삼국통일한 이후, 신라 집권층들은 한반도의 토착민들과의 통합을 더 중요시 여기게 되엇을겁니다.. 이미 중앙아시아의 동족들과는 연락도 끊어졌고, 중국으로 쳐들어간, 흉노, 선비등 동족들도 모두 중국화 되어버렸던 상황이었습니다..

심지어 중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데,,, 중국의 숙적인 흉노가 우리 한국인의 조상이라고 밝혔다간,,, 아주 난처한 일이었을겁니다...

결국 신라 왕조 이후 한국의 엘리트 역사가들은 자기들의 뿌리인 흉노의 흔적을 지워버리려고 혼신을 다했을겁니다.. 중국이 불쾌해할 사실이 기록된 과거의 역사서들은 전부 불태워버렷겠죠.

그리고 한민족의 뿌리를 오히려 중국 게통인 것처럼 조작하여 중국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려했을겁니다.. 기자 조선, 진나라 유민의 신라 도래설들이 전부 이처럼 중국의 원수인 흉노의 흔적을 한민족의 뿌리에서 지우다보니 그 빈 구석을 메꾸기 위해 동원된 역사 조작인 것입니다...

 

몽고반점이 아프리카 흑인에게도…백인도 있다



몽고반점에 대해 한국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상식은 불가사의할 정도다. 몽골리안 루트에서 미주대륙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이 우리와 같은 몽고반점이 있다는 점을 역설 하는 점과, 북방민족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들이 몽고반점을 몽골인들과 그 이웃의 몽골인과 비슷한 민족들의 특허인 것처럼 표현해서 일반 한국인들도 몽고반점을 잘못 알고 있다는 사실은 한심하다.

북방민족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들이 몽고반점에 대한 맹신과 몽고반점에 대한 억측은 인터넷 문서를 검색해보면 간단하게 해답을 얻을 수 있는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민족이 대거 유입되고 있는 미국에서도 몽고반점에 대해서 잘못알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유럽 이주민인 백인들이 주류사회를 형성한 미국에서 백인들이 유색인종의 어린 자녀들의 몽고반점을 부모가 자식을 때려서 생긴 멍자국으로 오인해서 어린자식을 아동학대로 잘못 판단해서 부모가 자식을 빼앗기는 심각한 사건이 미국에서 몇 번 있었다.

몽고반점은 피부가 백인과 같지 않은 유색인종 자녀가 태어나서 생기는 푸른 반점으로 아프리카 흑인도 이 몽고반점을 가지고 태어난다. 독자들은 피부가 까만 흑인이 몽고반점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구분 할 수 있느냐고 의문을 가질 것이다. 흑인들의 자녀는 태어날 때부터 까만 피부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태어나는 흑인 어린이의 피부색은 붉은색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보통 갓 태어난 후에 형성되는 몽고반점이 흑인들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붉은 색으로 태어난 흑인어린이는 짧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부모와 같은 흑색으로 변한다.

몽고반점이 몽골계 민족의 특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아프리카 흑인도 몽골계로 인정해야 하지 않을 수 없는 증거다. 몽고반점은 피부가 유럽 백인과 같지 않고 머리가 흑색이며 피부에 색상이 있는 사람들의 자녀들에게서 나타난다. 한국인 자녀들도 모두가 다 몽고반점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자녀 중에 장성해서 태양에 피부가 갈색으로 빨리 변하지 않고, 피부가 붉게 변한 상태가 오래 지속되는 사람들은 태어났을 때 몽고반점이 없이 태어났을 확률이 90% 정도다.

미국에 살고 있는 백인자녀도 10명중에 한명정도 몽고반점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보고가 있다.

프랑스의 살롱 지역과 샤토 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자녀들이 집중적으로 몽고반점을 가지고 태어나는 이유는 흉노가 유럽에 진출해 남긴 부정 할 수 없는 유산이며, 징기스칸이 동유럽을 정복해 몽골계 사람들을 비하하는 유럽인들에게 남긴 몽고반점은 정복자의 상패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아래 문서는 미국에서 자녀를 갖기 전 부모들이 알아야 될 일반적인 상식으로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많은 문서중의 하나다.

Causes, incidence, and risk factors: 
Mongolian blue spots are common among darker skinned races, such as Asian,
East Indian, and African. They are flat, pigmented lesions with nebulous
borders and irregular shape. They appear commonly at the base of the spine,
on the buttocks and back, and also can appear as high as the shoulders and
elsewhere. Mongolian spots are benign skin markings and are not associated
with any conditions or illnesses.

Occasionally, Mongolian blue spots are mistaken for bruises and questions
about child abuse arise. It is important to recognize that Mongolian blue
spots are birthmarks, NOT bruises.

주목할 만 한 점은 흉노와 동호에서 갈라진 선비, 오환 등 북방 기마민족들의 흥망이 가야 지역의 건립시기와 유사하다는 점이다. 흉노는 한 무제와 혈투를 벌인 후 기원 89년경의 3차 서천에 이르기까지 여러 갈래로 분지(分枝)되었다. 선비와 오환도 중국 동북지역에서 부침을 계속했는데 이 시기는 한반도에서 북방 기마민족의 유입으로 추정하고 있는 가야가 성립되는 시기와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여하튼 3세기 중엽 이후에 마한은 백제로, 진한은 신라로 통합되어가며 변한은 3세기 이후부터 가야라는 명칭으로 나온다. 이는 3세기 말 또는 4세기 초에 변한이 가야사회로 전환된 것을 의미하지만 가야사는 일국사가 아니라 다양한 여러 국들을 내부에 포괄하고 있다는 점이 신라나 백제와 다르다. 그러므로 가야라 함은 이들 속의 김해·동래 지역 등을 포함한 금관가야, 고령 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 등 맹주국을 포함하여 모든 가야국(任那加羅도 포함)을 의미한다.

 

이근호씨 보충글

터어키 역사를 공부하면, 그들 역사책에는 반드시 훈족의 기원부터 먼저 서술하고 있다,,, 즉 현대 터어키인들도 자기들의 조상은 훈족에게서 기원한다고 보는 것같다.

 

기원전 2세기경 흉노제국이 한무제에 의해 붕괴된 이후 흉노는 여러 부족으로 흩어지는데 ( 같은 시기에 우리의 고조선도 한무제에 의해 망하는 게 눈에 띈다... 고조선도 흉노와 밀접한 관계였을까?)

 

그중에 투르크, 즉 돌궐인들의 부족들이 오늘날 중앙 아시아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이들이 유연을 멸망시키고 돌궐제국을 만든 때를 현대 터어키인들도 자기 민족의 본격적인 출발로 믿고 있다.

 

실제로 중앙아시아의 돌궐제국의 수도 터에는 돌궐문자의 비와 유적들이 지금도 남아있어서 많은 터어키 학자들의 조상 캐기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한다.

 

이 돌궐 제국은 흉노제국이 없는 공백을 메꾸면서 중국과 대결하는데, 그 시기는 대략 6-7 세기, 즉 우리 고구려와 발해가 중국과 대결하던 때와 일치한다 한다...

 

돌궐의 중국 공격은 이전 흉노제국의 그것보다도 더 집요하고 강력하여 당나라조차도 그들에게 당하지 못하여 여러번 불평등조약을 맺고 있다.

 

특히 측천무후 이후 당나라에 의해 돌궐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그 유민들이 계속 남아서 끈질기게 저항하는데, 이 시기는 묘하게도 우리 고구려가 망하고 발해가 들어서고 통일신라가 당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는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

즉 돌궐의 당나라에 대한 끈질긴 견제 때문에 당나라는 한반도의 발해와 통일신라에 대하여 제대로 신경을 쓸 수 없었다는 것이다.

라당 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한 이유가 여기에서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조상들은 뜻하지 않은 도움을 돌궐 들에게서 얻었던 셈이다.

이들 돌궐을 막기 위해 당나라는 무지 곤욕을 치렀는데, 그 잔재가 남아 있는 것이 바로 디즈니 만화영화 "뮬란" 이다.  현대 터어키에서는 이 "뮬란" 만화영화가 상영금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믿거나 말거나

어쨌든 만화의 역사적 고증과 배경으로 보아 그 만화에 서술된 북방 이민족은 흉노가 아닌 돌궐족을 묘사한 것이 더 맞다고 본다.. 거기서 그려진 돌궐족의 이미지가 워낙 흉악하니까, 터어키인들이 불쾌하게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현대 터어키언어에서 물 "water"을 뜻하는 단어를 "수" 라고 발음하는 것을 보았다.  어쩌면 중국 한족들과 오랫동안 싸우고 교류하다보니, 물이라는 단어도 중국 "수"로 바뀌었고, 그 잔재가 지금껏 남아있는게 아닐까 (중앙아시아는 물이 귀했을 것이니 물은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선진국 중국의 단어 "수"를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물론 현대 터어키인들이 그 직꼐 조상이 이 역사상의 돌궐인들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기에는 현대 터어키인들이 워낙 많은 유럽인들하고 혼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터어키인들은 흉노가 망한후 그 유민들이 갈라져 서쪽으로 가서 돌궐인들이 되었고, 동쪽으로 간 지파는 한민족이 된 것으로 믿고 있다 한다.. 이말은 한국전 이후에 터어키파병군에게서 우리가 처음 듣게 된 이야기였는데,  처음에는 우리에게 매우 생소한 이야기였다..왠 지구 반대쪽 사람들에게서 "자다가 봉창두드리는 소리"일까 생각들었을것이다.

그러나 현대 터어키인들이 그런 믿음을 가지게 된 계기는 아마도 그들의 조상들이  후손들에게 자기 (흉노) 조상들중 동쪽으로 간 어느 지파 이야기를 대대로 전해 내려왔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추측하거니와 신라의 지배층이 바로 그들 터어키인들이 믿는 "동쪽으로 사라진 형제들" 이 아닌가 한다... 신라 경주의 무덤속의 황금 유물들이 그것을 증언한다.

같은 조상을 두고도 서쪽으로 간 지파는 아라비아를 복속하고 유럽을 벌벌 떨게 하는  "오스만 터어키 제국"을 만들었다.. 반면에 동쪽으로 간 지파는 중국이라는 큰 이웃 때문에 2천년간 제대로 숨도 못쉬고 제자신이 중국인들의 후손일 것이라고 멋대로 조작하면서 이리저리 채이고 살았다.

우리 한민족은 아직도 뿌리가 불확실하게 남아있는 민족이 아닌가 한다... 일본인들처럼,,,

일본인들이 한반도의 뿌리를 부정하다가 지금까지 뿌리없는 떠돌이 민족으로 남아 불행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중앙아시아 뿌리를 부정하다가 여지껏 사실상 뿌리가 불확실한채 남은 민족이 아닐까?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기들이 훈족, 돌궐족의 후예라고 자부하고 있는 현대 터어키인들이 오히려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씨는 흉노족의 후손?

흉노의 전성기는 묵특(기원전 209∼174)이 강성기에 초원의 제 유목민족을 정복하고 한반도 북부에서

시베리아 바이칼호, 티벳으로 영토를 확장한 시기이며 60여 년간 한나라로 부터 조공을 받았다. 한나라는 유럽에 진출한 흉노가 로마로부터 매년 조공을 받았듯이 주종의 관계를 유지하다가 북방민족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한 무제가 서기 69년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전술로 흉노족들을 서로 이간질시킨다. 북방민족은 서로 싸우며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으며 북방민족인 흉노의 서진과 동진, 남진이 시작되어 한반도 북부 만주지역에 정착했든 흉노가 한반도로 유입한 시기라고 할 수 있고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역에 남아있든 흉노가 4세기에 5년간 계속된 냉해로 한반도 북부에서 유럽으로 진출한 흉노집단의 일부라고 추측할 수 있다. 북한과 만주지방에서 출토된 흉노의 청동솥은 그 지역에 흉노가 정착해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장천 고구려 고분 벽화>

고조선이 멸망(BC 108)하고 고구려(BC 63)를 세운 예맥족은 고조선의 유민들이며 대표적인 고조선의 기층부족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기둥을 받치고 있는 역사는 말갈인으로 전형적인 아이누인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들 외에 고구려 경내에서 살고 있던 흉노와 선비족을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와 모습이 같기 때문일 것이며, 고구려가 다민족 사회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김내현 단국대 교수가 선비, 흉노, 말갈족들을 한민족에 포함시켜야 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mimesis


신라의 위치는 <삼국지위지동이전>의 진한 지방이며, 진나라 때 만리장성의 노역을 피해온 진나라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지방이다. 신라의 옛 국명은 사로국이다. 삼국사기의 신라(BC 57. 건국신화 생략) 탈해왕 9년(서기 65) 시림(후대에 계림으로 개칭)에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나타나 탈해왕이 길렀다는 고사는 북방 유목민족인 흉노가 이미 기원전에 신라에 진출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며, 신라에서 왕이라는 칭호가 아닌 이사금, 마립간과 같은 북방초원민족이 지배자를 호칭하는 용어를 사용한 기록은 초기 신라의 지배자들도 기원전에 남하한 북방유목민이라는 사실을 부인 할 수 없다.(자료 참고1)

김알지의 후손 미추왕이 262년에 왕위에 오르면서 석씨와 박씨계의 왕계는 끊어지며 김씨는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왕위를 이어갔다는 사실은 김씨와 그를 추종하는 세력이 신라의 통치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사의 미스터리로 대변되는 신라 고분 천마총 및 금관이 출토된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 황남대총 그리고 금령총 옆에 있는 식령총이 한결같이 모두가 다 5세기말-6세기 초로 편년되고 있다.

이 사실은 신라의 고분군이 갑자기 출현한 이유를 대변한다. 고구려 고국원왕 12년(서기 342) 선비족인 모용황이 환도성을 침공해 고국원왕의 부친인 미천왕의 묘를 파내 시신과 왕족 외 만여 명의 포로를 잡아간 사건이 발생했다. 고구려를 침공한 선비족의 반은 흉노로 구성되었고 이때 이탈한 흉노가 한반도 남단으로 내려와 신라왕권을 찬탈하고 신라고분을 건설하며 가야지방으로 내려가 가야를 세웠다는 설이 있다.

이 설을 뒷받침하는 삼국사기는 신라 김씨를 모용씨라고 기록한 것으로 봐서 4세기에 일단의 흉노가

대거 남하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가 없으나 그들이 단시일 내에 금관이 발굴된 고분군을 조성했다는

설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금관이 출토된 고분은 왕의 무덤이 확실하며, 4세기 중반에 도래한 흉노가 고분군을 건설했다면 그 집단에서 5명의 왕이 100여 년간 왕위에 등극하고 사망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왕의 능묘 한 개를 만들려면 출토된 유물로 봐서 막대한 재정과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미 발굴된 다섯 개의 능묘를 100여년에 걸쳐 일시에 조성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방금 도래한 흉노 집단으로서 자신들의 직계조상인 아닌 피장자들을 위해 막대한 노동력과 재정을 소비해 가면서 왕의 능묘를 건설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흉노가 한반도에 도래해서 고분군을 건설한 기간을 유추하는 방법으로 미주한인 이민의 예를 들어 보면 좋은 비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903년 증기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30여일 걸려서 하와이와 맥시코로 이주한 한인은 3천여 명에 불과 했으나 한국전쟁후 미국으로 이민한 동포들은  6,000 여마일 을 비행기를 타고 10여 시간 걸려서 미국에 도착했다.

동포사회에서 한국인 공동묘지가 따로 건설되고 봉분묘를 만들기 시작한 시간은 미주동포가 100만을 넘어서는 이민역사 백년전후다. 한국말과 문화를 가지고 있는 한국인 커뮤니티가 존재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한국식의 봉문묘를 만들 수 있었고 또 동포들이 두고 온 장례문화를 미국에서 재현할 수 있었다.

말을 타고 하루 100km를 여행할 수 있는 시기에 신라지역에 도착해 150여기의 고분군을 남긴 우리 선조인 흉노족 김알지가 서기 65년에 신라에 등장하고 그의 후손인 미추왕이 서기 262년에 왕위에 올라 5세기말과 6세기에 걸쳐 그들이 가지고온 스키타이식의 적석목곽분묘를 축조한 시기는 무려 4백여 년이나 걸렸다. 그들도 미국으로 이주한 미주동포들과 같이 그들이 가지고온 적석목곽묘를 축조할 때 토착민 인구의 20-30% 정도의 흉노 문화를 가진 공동체가 없었다면 신라 고분군은 탄생할 수가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신라 경주에 흉노족의 공동체가 있었다는 사실은 고분에서 출토된 금속공예품과 마구용품, 생활용품, 유리공예품들을 만들며 제작할 수 있는 장인들이 공동체내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신라 토착민이 중앙아시아까지 가서 북방문화를 들여왔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금관이 출토된 고분 중에 하나는 틀림없이 김알지의 후손으로 최초로 신라 왕위에 오른 미추왕의 묘라고 추측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내추측은 김알지의 후손의 위치에서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KBS 방송에서 제작한 역사스페셜에서 삼국 통일 후 일본에서 신라에 주문한 물품 품목에 비단 외에 양탄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신라에 유목민이 거주하며 양탄자의 재료가 되는 양이나 낙타를 길렀고, 또 양이나 낙타의 털을 이용해서 양탄자를 만들 수 있는 기능공이 있었다는 확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가 있다.

유리로 만든 공예품도 신라에서 제조했다는 사실은 80년대 초에 방송에서 유리공예품을 만들었던 지역을 찾아내고 발견된 유리파편과 고분에서 나온 유리제품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신라지역에서도 유리제품이 생산되었다는 사실도 이미 밝혀졌다.

 

발굴된 신라 고분군의 특징은 피장자가 누구인지를 밝혀줄 만한 기록을 묘에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5세기 말에 조성된 고분들은 신라에서 한문을 사용하면서 왜 피장자의 신분을 남기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은 흉노의 침공으로 그들의 장례문화 영향을 받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유럽의 장례 문화에서 관을 하관할 때, 따라온 문상객들은 자리를 피하며 친족 몇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파놓은 땅에 관을 하관하고 묻는다.

그 이유는 피장자가 묻히는 곳이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스키타이 매장문화를 계승한 흉노는 사망한 지도자나 왕을 매장한 후 후일에 있을지도 모를, 묘를 파헤치는 보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피장자의 신분을 밝힐 수 있는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고 추측 할 수가 있다. 신라 고분도 전통적인 흉노의 장례문화에 따라 묘를 조성했기 때문에 피장자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아틸라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추정만 할뿐)모르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한국인 성씨중 금이라는 뜻의 김씨가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는 흉노가 남긴 자취이며, 삼국을 통일한 신라 제30대 왕인 문무대왕이 자신을 흉노의 후손이라고 기록을 남긴 것은 고대 한반도에 흉노의 존재를 입증하는 결정적인 자료들이다.


[참고1] 김태식기자 정리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국립경주박물관 발굴 결과 신라 건국과 밀접한 기원전 1세기경 각종 화려한 유물을 출토한 경주 조양동 유적 발굴보고서가 늦어도 올 연말쯤에는 나올 전망이다.

최근 취임한 지건길 국립중앙박물관장은 16일 "무슨 일이 있어도 조양동 발굴보고서를 올해 안에 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조양동 유적은 지난 79년 6월 이곳에 거주하는 한 개인의 집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몇 점의 토기가 발굴된 것을 계기로 경주박물관이 82년까지 4차례에 걸친 발굴을 벌인 결과 그 중심연대가 삼국사기가 기록한 신라건국연대(BC 57년)와 대체로 일치하는 기원전 1세기경 각종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유물 중에는 무덤으로는 토광묘와 목곽묘가 섞인 특이한 무덤이 있는가 하면 옹관묘, 목관묘도 확인됐고 더구나 이곳에서는 말 재갈을 비롯한 다량의 철기와 중국 전한(前漢) 및 왕망(王莽)의 신(新)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명백한 구리거울 등이 다량으로 출토됐다.

이 중에서 특히 목곽묘와 목관묘는 기원후 4,5세기경 어느 날 갑자기 경주지역에 출현하는 것으로 보았던 대형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의 원류가 된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당시는 물론이려니와 지금도 한국고대사학계 및 고고학자 대다수는 한국고대사말살에 혈안이 됐던 일제식민사 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삼국사기가 기록한 신라건국연대를 조작이라 몰아붙이면서 신라의 실질적인 건국을 대형 적석목관분의 출현과 함께 하는 4세기 중, 후반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조양동 유적에서는 이 유적의 축조연대를 명확히 알려주는 전한의 구리거울을 비롯한 화려한 유물들이 다량으로 쏟아져 나오고 더구나 이들과 같이 출토된 유물들로 보아 이미 기원전 1세기경 경주지역 문화가 고도의 문명단계로 들어섰음을 입증해 줬다는 점에서 삼국사기가 BC 57년이라고 기록한 신라건국 연대가 마구잡이로 끌어올려진 것이 아님을 증명했다.

 

따라서 이 유적은 마치 풍납토성이 좀처럼 그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초기백제사를 새롭게 쓰게 하고 있듯이 일제식민사학자들과 이병도 이후 국내 고대사 학계가 그 존재를 말살했던 초기신라사를 재조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는 점에서 신라판 풍납토성으로 평가되고 있다

 

 

 

훈족과 독일인

 

제2차 세계대전중 연합국의 주측인 영국과 미국이 히틀러의 제삼제국인 나치독일을 훈이라고 부르며

비하한 이유는 독일의 옛 선조들이 훈족과 맺었던 역사적인 깊은 유대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기 376년 훈족의 침입으로 서고트족(Visigoths=western Goths)은 그들의 근거지인 오늘날 오스트리아 다뉴브강가에서 밀려나게 되였다. 서고트족이 로마황제 발렌스(Valens)에게 로마경내로 이주를 요청하자 황제는 서고트족의 로마 경내로의 이주를 허가했다.

로마제국은 경내로 이주한 서고트족을 차별하자 서고트족은 이에 항의했고 항의하는 서고트족에게 로마 황제는 로마경내를 떠나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격분한 서고트족은 봉기해 로마 황제의 군대를 격파하고 황제를 죽였다.


중국한족이 자신들의 영토 외에 사는 이민족을 각각의 명칭의 야만족으로 부르듯, 로마제국도 그들의 영외에서 살고 있는 제(諸)민족을 야만족으로 불렀다.

로마제국이 야만족으로 부른 종족은

현대 독일어계의 언어를 사용하는 독일계(Germanic tribes)제(諸)부족으로 서고트족,

동북유럽에 거주하던(현우크라이나)동고트(ostroghth)족,

반달(Vandals)족, 롬바드(Lombard)족, 알마니(Almani)족,

후랭크(Franks)족,

벌간디안(Burgundians)족으로 이들은 훈족과 같은 유목민족이 아닌 문맹의 농경민족이었다.

 

독일계 야만족은 기독교인이 되면서 이들이 건축한 건물을 통해 고트양식이라는 독특한 건축문화를 남겼다. 그들 중 유명한 고트족 출신의 알아릭(Alaric)고트족왕은 서고트족 출신으로 로마군대에 입대해 높은 계급까지 오른 사람으로 부친이 죽자 로마군대에서 이탈해 서고트족의 왕이 되었다.

서기 410년 그는 로마를 포위하고 금품을 요구하자 로마는 그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에 알라릭의 군대는 로마를 포위했다. 성내에 양식이 고갈되자 굶주림에 지친 로마 시민들이 성문을 열어 입성한 알라릭의 군대는 삼 일간 방화, 약탈을 지속하였다. 

알라릭은 부녀자 폭행금지, 교회 파괴금지령을 내려 800년간 지속되어온 영원한 도시 로마의 영화는 야만족에게 무릎을 꿇었으나 로마시가지가 완파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로마는 독일계 민족의 단순한 성격에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인 이들을 로마군대에 편입시켰고, 이들은 자신들을 지켜주는 보호세력으로 로마를 이용했다. 유럽을 침입한 훈족에 밀려 독일계 민족이 서쪽으로 이동해 오늘날의 독일영토인 현 위치로 쫓겨 가는 독일민족의 대이동이 있었지만 융성기의 훈족은 점령한 지역을 지배하는 제후에 자신들을 지지하는 수많은 독일계 종족을 임명했다.

 


융성기의 훈족의 영역


훈족과 로마는 이들 독일계 야만족을 함께 흡수해 가면서 군의 병력을 보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훈족에 편입된 독일계 종족들은 훈족의 풍습인 편두를 할 정도로 훈족에 복종하였다.

 

훈족에 편입된 독일계 종족중에 아틸라의 참모 장군의 지위에 까지 오른 사람도 있었다.

훈족의 왕인 아틸라가 독일계 공주와 결혼식을 올리고 잠자리에 들어 다음날 아침에 죽은 시체로 발견된 사실은 현대의 독일인 선조와 흉노의 깊은 관계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위 내용은 인터넷 문서중 Barbaian을 검색해서 얻은 내용 중 필요한 부분만 번역해서 이용했음을 알려드립니다)


훈족이 유럽에서 활동하던 기간 동안 이들을 추종하는 모든 종족들을 일컬어 훈족이라고 불렀다.

2차대전중 연합국이 나치 독일을 훈족으로 비하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2차대전중 나치독일 비밀경찰의 두목 히물러가 아리안족의 원류를 찾아서 티베트 인류학자를 보내서 티베트인들을 연구하고 간 사실은 역사방송을 본 독자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독일 방송에서 역사의 비밀이라는 다큐에서 훈족을 다룬 이유도 독일인들이 자신들의 선조와

훈족과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연구의 한 일부라고 할 수 있고, 이와 함께 미국에서 제작한 훈족다큐는 필자가 훈족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계기가 되었다.

 

 

4세기 세계 최강 <맥궁>

훈족이 한반도에서 유럽으로 서진했다는 고증의 하나로 들 수 있는 중요한 자료중 하나가 훈족이 사용한 활이다. 유럽으로 이동한 훈족의 활은 고구려의 맥궁과 같은 복합궁이고, 또한 만궁이며 화살의 종류도 몇 가지가 넘는다고 주장했다. 훈족이 사용한 활이 고구려의 맥궁과 같았다면 활의 역사도 같을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활의 역사는 중국기록에 고조선에서 사용한 활을  단궁(檀弓)이라고 기록했다.

단군조선에서 만들고 사용한 활이라고 표현하기 위해서 중국사서에 그렇게 기록했을 가능성도 배재 할 수 없다.

단궁(檀弓)의 실체는 합성궁인 각궁(角弓)인지 아니면 박달나무로 만들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이보다 앞선 활은 중앙아시아 유목민이 사용한 활중에 동물의 뼈로 만든 활이 발굴되었고, 또 고구려

고분에서 소갈비뼈의 세부분으로 나누어진 활이 출토된 적도 있다.

합성 만궁인 맥궁은 고구려의 소수맥(小水貊)에서 생산한 활이라는 기록이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있고, 중국에서  맥궁이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했다.

합성궁인 맥궁은 만궁으로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 한반도 남단까지 널리 사용했다.

활의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북쪽 유목민이 맨 처음 합성궁인 각궁을 개발을 했다는 설과 고조선 유민인 맥족이 먼저 개발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으나 합성궁이며 맥궁인 각궁을 처음 개발한 민족은 고조선 유민이 세운 고구려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그 이유는 한나라와 오나라 황제 등에게 고구려가 각궁인 맥궁을 선물로 보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 하고, 각궁인 맥궁의 기본 재료인 물소뿔을 얻기가 북방인 초원보다는 고구려가 훨씬 용이한 위치에 있었다는 점도 각궁인 맥궁을 고구려에서 발명할 수 있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문헌상의 기록으로 1세기에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만궁'과 관련한 기록이 등장한다. 모본왕은 포악한 군주로 악명이 높았는데, 신하 중에 간하는 자가 있으면 만궁으로 쏘아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본왕조 '臣有諫者,彎弓射之.') 모본왕이 사용한 만궁이 합성궁인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3세기의 고구려 활은 합성궁인 만궁을 사용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합성궁인 맥궁(貊弓)의 재료는 물소뿔, 산뽕나무, 소힘줄, 부례풀, 참나무, 대나무, 화피, 자작나무 껍질이다. 각궁인 맥궁은 만궁(彎弓)으로 그 위력은 대단했다.

유럽에 남은 기록에서 보면 훈족이 사용한 각궁의 사거리는 300m 이상으로 국궁의 사거리와 같고, 150m 사거리에서 적을 죽일 수 있었다는 기록은 훈족이 사용한 활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훈족의 활은 말 탄 궁기병이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아랫부분이 윗부분 보다 짧다.

달리는 말에서 화살을 화살통에서 빼내 활에 장전하고 활을 쏘기에 편리하도록 아래쪽이 위쪽보다 짧게 만든 활을 사용한 훈족과 대치한 적병이 훈족의 궁기병을 향해서 활을 쏘려고 준비하는 사이 훈족은 마상에서 재빠르게 적병을 향해서 활을 쏘아 적병을 죽일 수 있는 훈족활의 디자인이 훈족활의 장점이다. 훈족이 몇 종류의 활을 사용했는지는 정확하게 고증된 자료가 없어서 알 수 없다.

헝가리에서 제작해 판매하고 있는 훈족의 만궁

헝가리 인들은 훈족의 활을 개량해서 아래위 길이가 같은 활로 개량했다. 그러나 정확하게 훈족이 사용한 합성궁인 만궁을 재현하면서 물소뿔과 다른 각궁의 재료를 정확하게 사용해서 제작한 활인지는 알 수 없다.

고구려 안악3호 고분 벽화에 훈족의 활과 비슷한 그림이 있다.


고구려 안악3호 고분 벽화 행렬도

왼쪽 그림은 안악3호분 행렬도 중의 보병 궁노수의 모습이다. 수레를 호위하는 앞에 서 있는 두 명의 궁노수 활이 훈족의 활과 같이 활의 가운데 붉은 줌통에서 뒤쪽과 앞쪽이 길이가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활의 아래위가 차이가 나는 이유가 벽화를 그릴 때 원근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 차이가 있게 그렸다고 설명하기 보다는 활의 원래 형태가 그렇게 생겼기 때문일 것이라고 유추 할 수 있다.

고구려 벽화에서 보이는 합성궁인 맥궁의 다른 모양은 아래와 같다.
고구려의 맥궁은 북한남포 쌍용총 고분의 마상인물도와 무용총 사냥도에서 볼 수 있다.


무용총 사냥도

고구려 무용총 벽화 사냥도의 활은 네 곳의 마디로 인해 다섯 군데로 나누어져 있고, 형태상으로 만궁이고, 길이는 단궁(短弓)임을 알 수 있다.
활에 올려져있는 화살은 촉이 굵고 앞부분이 둥글게 묘사되어 있어 명적(울고도리)임을 아래 그림에서 쉽게 식별 할 수 있다.


고구려 무용총 기마인물도

활의 가운데 줌통 주변이 둥글게 굽어 있어서 무용총의 사냥장면에 등장하는 활과는 모양이 조금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만궁이고, 단궁이다. 줌통 부분에 검은색 선이 가운데에 보이므로 역시 합성궁임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무용총 기마 인물도

북한남포 쌍용총  기마인물도의 활통에 반쯤 나와 있는 활은 외관상으로 역시 만궁임을 알 수 있다. 무용총의 활들과 기본적으로 같은 활로 보인다. 검은 칠을 한 활을 특별히 노궁이라고 부르는데, 이 쌍영총의 활은 외관이 검은색이어서 검은 칠을 한 노궁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에서 사용한 각궁인 맥궁은 시대에 따라 모양이 변해 조선조까지 내려 왔으나 현재의 국궁과 원형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고종황제의 어궁인 각궁

고종황제의 어궁인 각궁의 전체 길이는 124㎝, 오금나비는 3㎝이다. 

 

훈족이 사용한 화살은 자료를 구할 수 없으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고구려의 맥궁과 같은 합성궁을 사용한 훈족의 화살도 명적을 사용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고구려의 화살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출토된 고구려 화살이다.


출토된 고구려 화살

제일 왼쪽의 사진은 북한 자강도 자성군 송암리에서 출토된 화살촉이다. 제일 오른쪽의 사진은 만주 집안에서 출토된 화살촉으로 청동에 도금을 했다. 제일 왼쪽에서부터 첫째 화살촉이 전형적인 도끼날형(부인형: 도끼 부斧, 날 인刃) 화살촉의 모습이다. 왼쪽에서 세번째가 이른바 끌형(착형: 끌 착鑿) 화살촉이다. 가운데 사진의 화살촉은 화살을 쉽게 빼낼 수 없게 거꾸로 된 비늘(역자)이 달려 있다. 오른쪽 사진의 도금 화살촉은 유엽형 화살촉이다.

실물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고구려의 화살촉은 일반적인 화살촉과는 모양이 다른 특이한 화살촉이 많고 화살촉의 자루가 아주 긴 것도 있다.


재현한 고구려 화살

재현한 고구려 화살로 위 사진의 화살 5개는 북한의 자강도 연풍리와 송암리에서 출토된 화살촉을

토대로 복원한 것이다. 위에서 두번째는 전형적인 도끼날형(부인형 화살촉) 화살촉이다. 나머지는 도끼날형 화살촉 혹은 끌형(착형) 화살촉이다. 위에서 세번째의 화살촉은 화살을 빼낼 수 없게 거꾸로 된

낚시처럼 생겼다.

아래사진 중  화살 3개는 각각 북한 장성리와 만주 집안에서 출토된 화살촉이다.

가운데에 있는 화살은 명적(울고도리)이며, 제일 아래의 화살은 만주 집안에서 출토된 화살로 청동에 금을 입혔다. 이 청동에 금을 입힌 화살은 의식용으로 사용한 화살이거나 국왕 내지 최고위급 귀족이 사용한 화살로 추정된다.

(위 두사진의 화살과 활의 설명은 신재호님의 디펜스 코리아에서 옮겨왔음을 독자님들께 알립니다)

훈족의 활인 각궁인 만궁이 위력을 발휘 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훈족이 사용한 철제 화살촉에 있다. 미국에서 제작한 다큐를 보면, 훈족이 정확하게 몇 종류의 화살을 사용했다는 설명 대신, 여러 종류의 화살을 사용했다고 설명 했다.

훈족의 철제 화살촉은 로마군이 사용하는 어떤 갑옷이라도 관통할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훈족이 사용한 활과 화살의 위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비교해볼 수 있는 자료는 KBS 역사 스페셜에서 2000년 1월22일에 방영했던 고구려철제 화살촉의 시험에서 유추할 수 있다. 시험에 사용된 고구려  화살촉은 출토된 고구려 화살촉을 만든 철의 강도와 같은 재료를 사용했으며 고구려 화살촉이 가야고분에서 출토된 무사의 철갑주를 모방해 만든 철판을 관통한 위력은 대단했다. 그러나 근거리에서만 행한 시험이라는 점은 아쉬움이 남는다. 

훈족이 사용한 화살 중에서 철화살촉 외에 로마군과 야만족인 고트족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화살이 명적이다. 훈족이 사용한 여러 가지 화살촉 중 명적이 정확하게 어떤 화살이었는지는 잘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날아가면서 소리를 내는 명적의 형태는 고구려벽화에 그려진 기마인물상의 활에

장전한 명적과 흡사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명적(鳴鏑: 울 명鳴, 우는살 적鏑,효시, 울고도리, 우는살, 소리 화살)은 우리말로 울고도리라고 부르며 원통에 구멍을 5-6개 뚫어 화살 앞에 달아 화살이 날아가면서 공기가 구멍을 통하여 나가면서 소리가 나는 원리를 적용해 만들었다. 명적은 만리장성 북쪽의 유목민과 고구려에서 사용했고, 위무용총 벽화 사냥도에 보이는 화살도 명적이다. 명적이 신라 백제 지역에서도 출토가 된 사실은 명적이 널리 사용 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적의 크로스업 사진

위 실물에서 보듯 화살앞쪽에 달려있는 구멍 뚫린 원통 앞에 있는 화살촉은 작살의 모양으로 화살이 날아갈 때 중심을 잡아주는 날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화살이 날아가며  쉬~익 우는 소리를 낸다. 고려가 여진족을 토벌할 때 여진족은 명적의 우는 소리를 귀신의 소리라고 표현했다.

명적은 "울고도리", 즉 날아가면서 운다는 이름과도 일치한다.

500여명의 경무장한 훈족의 궁기병이 적진을 향해 돌진하면서 일제히 명적을 사격했을 때 바람을 가르며 로마군 적진을 향해서 날아가며 내는 명적의 울음소리는 적군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도 남았다는 기록은 명적의 용도는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용과 적을 위협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중국에서도 합성궁인 각궁을 생산해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음과 동시에 고구려의 맥궁을 극찬한 기록이 있는 이유는 맥궁의 품질이 더 좋았었기 때문일 것이다.

훈족과 고구려가 사용한 맥궁은 4세기 세계최강의 활이었다.

 유럽을 굴복시킨 훈족 신무기


훈족의 한반도 기원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말의 안장이다. 천마총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말의 안장이 훈족이 사용한 말의 안장과 형체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나무로 만든 말의 안장은 가죽으로 만든 현대의 말안장 보다 말을 탄 사람에게 안정감을 주고 피로를 덜 느끼게 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황남대총과 천마총을 축조한 선조들은 말의 안장을 천마총과 황남대총 상층부에 매장했다.

그 이유는 죽은 왕이 말을 타고 저세상으로 갈 때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뒷받침 하는 증거로, 천마총에서 출토된 하늘을 날으는 천마도를 들 수 있다. 사후에 하늘을 날으는 천마를 타기 위해서 말의 안장을 고분의 정상부분에 묻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천마도

              

무술에서 말과 활과 사람이 일체가 되어 달리는 말위에서 활을 사격할 때, 이를 삼합(三合) 이라고 한다. 훈족이 말과 활과 사람이 일체가 되어 달리는 말에서 자유자재로 활을 쏘며 배사(달리는 말에서 뒤를 돌아보며 활을 쏘는 형태)를 하는 훈족의 궁기병들은 4세기에 미국이 개발한 M1A1 Abrams 탱크가 달리면서 포를 쏠 수 있는 최초의 전차와 같은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훈족이 유럽에서 제종족과 로마군을 제압할 수 있었다. 유럽을 침공한 훈족은 말과 활과 사람이 일체가 되어 로마군을 공격하는 삼합의 신병기였다.

훈족이 삼합의 신병기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신라고분에서 출토한 기마인물상에 보이는 등자와 고구려의 맥궁과 로마군의 어떤 갑옷도 관통할 수 있는 화살이 있었기 때문이다.

 



훈족의 배사장면 - 유럽인의 의상을 한 훈족의 배사 장면은 훈족이 활동할 당시가 아닌 후대에 그려진 그림으로 추측할 수 있다.

 

로마경외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야만족으로 무시한 로마인들이 훈족에 대해 남긴 기록에 따르면, 훈족은 말위에서 활동이 많아 땅위에서는 비틀거리며 잘 걷지 못한다.

훈족의 사내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전사를 만들기 위해 코를 납작하게 눌러 투구를 쓸 때 코가 장애가 되지 않게 기른다.

훈족의 남자 아이는 다섯 살이 되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혼자 말을 타고 달릴 수 있다.

 

로마의 수의사가 남긴 훈족의 말에 관한 기록을 보면 훈족은 피가 뚝뚝 흐르는 고기를 잘라 말안장 밑에 넣고 다니다 필요할 때마다 꺼내 칼로 잘라 생고기를 먹는다.

 

또한 훈족의 말은 몸체에 비해서 머리가 커 괴물과 같다는 기록을 남겼다. 로마인의 눈에 비친 훈족은 쭉 찢어진 눈에 납작한 코, 편두를 한 사람들이 생고기를 뜯어 먹는 모습은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닌 악귀로 보였고, 작달막한 체구에 머리가 큰 말도 괴물로 보였을 것이다.

 

훈족의 말은 유럽의 말에 비해 크기가 작았다. 그러나 훈족의 말은 온순해서 사람의 말을 잘 듣고, 잘 따르고, 무거운 짐을 싣거나 사람이 타고 하루에 100km를 달릴 수 있는 지구력을 가진 강인한 말로 추위에도 강했다. 쇠로 된 말발굽을 박아줄 필요도 없었고, 먹이를 사람이 따로 준비하는 노력도 필요치 않았다. 훈족의 말들은 겨울에도 앞발을 이용해 눈을 헤치고 먹이를 찾아 먹어 로마의 말들과는 달리 관리가 따로 필요 없는 말이었다.

 

훈족의 말에 대한 유럽인의 기록을 살펴보면 훈족의 말은 고구려의 과하마와 같은 종이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고구려에서 사용한 말은 과하마를 개종한 중형의 말과 과하마 두 종류의 말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고구려에서 주력으로 사용한 말은 과하마다. 과하마는 키가 작아 산악지대에서 전쟁이나 사냥에서 큰말 보다 유리한 조건을 갖춘 말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구려 무용총 사냥도 배사장면


훈족의 배사 장면과 같은 고구려벽화 무용총 사냥도중 배사 장면에서 보이는 기마인물의 배사 장면은 왼손잡이 무사라는 추축도 있으나, 바로 이 장면 밑에 그림에서 활쏘는 기마인물 장면과 그림의 구도를 맞추기 위해 왼손으로 활을 쏘는 장면을 그렸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말을 타고 배사 할 수 있는 기마술은 훈족이나 고구려만 가진 전유물이 아니다. 북방 유목민이면 다함께 공유한 기마술인 배사 장면이 벽화에 그려진 사실은 고구려에 북방 유목민이 살고 있었거나, 아니면 고구려가 북방 유목민족으로부터 전수 받았다고 가정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볼 수 있는 이민족들이 등장한 그림들은 고구려는 이미 다민족 국가였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어 북방민족인 흉노가 고구려 영내에 거주 했다는 사실은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고구려는 집집마다 병기를 갖추고 있다는 기록은 고구려가 전쟁에 대비한 방책으로 전국민이 국가 위기 시에 일시에 무장을 할 수 있었다는 증거이며, 북방 민족 못지않게 말을 잘 다루며, 또 이용했을 것이라고 쉽게 유추 할 수가 있다.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위에 세워진 신라의 지배층이 흉노였다는 근거중의 하나로 필자는

신라 8대왕인 아달라 이사금(阿達羅 泥師今)의 이름을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달라 신라8대왕의 이름은 유럽을 침공해 로마제국과 대항해 대제국을 건설한 훈족의 대왕 아틸라와 같은 이름이라고 추측 할 수 있는 이유는 아틸라라는 이름은 알타이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터키와 훈족의 본거지가 있었던 헝가리에서는 흔한 남자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신라의 지배층은 우랄 알타이어를 사용한 흉노족이며, 중국인들이 워싱톤을 화성돈(華盛頓)으로 표기한 것과 같이 한자에서 음을 차용해 아틸라를 아달라로 표기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한국어가 우랄 알타이어계나 아니냐에 대한 연구결과가 학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여러 학자들 중, 핀란드 태생의 람스테트에 이어서 한국어와 알타이제어의 친연관계를 한층 깊이 있게 연구한 학자는 포페(N.Poppe)이다.

포페(1960)의 [알타이제어 비교 문법]은 음운론에 한정된 것이지만,

한국어의 낱말 82개가 비교 대상인데, 이 작업은 람스테트에서 보다 훨씬 정밀화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그는 이 작업을 통해 "알타이제어와 한국어의 관계가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한국어에 적어도 알타이어 기층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Poppe 1960:6)."라고 신중하게 말했다.

그는 “한국어의 위치는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고 전제한 다음 한국어의 계통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1) 한국어는 알타이제어와 친연관계가 있을 수 있다.

(2) 원시 한국어는 알타이 통일체가 존재하기 전에 분열했을지 모른다.(즉 분열 연대가 대단히 이르다).

(3) 한국어에는 알타이어 기층밖에는 없다. 즉 한국어는 기원적으로 비알타이어인데 이것이 기층언어인 고대 알타이어를 흡수했던가 혹은 기층언어인 알타이어 위에 얹혔을지도 모른다.

 

이 진술은 한국어의 계통 추적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대변해 준다. 필자는 한국어에 대한 포페의 연구에서 보듯, 신라지배층과 함께 이주한 북방유목민이 사용한 알타이어가 고대 한국기층언어에 흡수되었을 가능성을 배재할 수 없다고 본다.


훈족, 고구려, 신라, 백제가 고대로부터 사용한 과하마는 한민족과 흥망성쇠를 함께 한 민족의 말이다. 제주도 찬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남아 있는 과하마는 온순하며 사람의 말을 잘 따른다. 아래 그림은 말을 그리는 화가가 많지 않은 한국에서 과하마와 말을 주제로 그리는 馬화가 류정실이 그린 [과하마 군무]다.

 



과하마의 군무도를 볼 때마다 용솟음처 오르는 힘을 느끼게 하는 8마리 과하마의 생동감 넘치는 그림에서, 유럽을 침공한 훈족의 용맹을, 우리의 선조인 고구려, 신라, 백제인들이 외침을 막기 위한 전쟁에서 보여준 불굴의 투혼 정신을 느낄 수 있다. 때때로 나는 과하마 군무도에 빠져 들어가 한 마리의 백마를 잡아타고 북쪽으로 달려 올라가 고구려의 옜영토인 만주벌을 지나 서쪽 유럽으로 훈족이 지나간 길을

달려가는 환상에 빠져든다.

 

 

 

훈족 최고 리더 아틸라칸

 

 

아틸라는 서기 406년에 태어났다. 그리스의 사가인 프리시우수가 남긴 기록에 아틸라는 눈이 쟃빛이었다는 기록은 그의 어머니가 유럽인이었다는 설을 뒷밭침하고 있다.

아틸라는 십대가 되면서 로마제국의 에이시우스(Aetius)와 인질로 교환되어 로마궁정에 거주하면서 아틸라는 아시아인 최초의 서구식 로마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틸라의 이름은 애트리, 아틸라(Atli, Attila,) 게르만족은 에젤(Etzel), 헝가리 인들은 에탤레(Ethele)로 불렀다. 그의 유년시절은 별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동로마 궁정에서 그가 받은 교육 즉, 로마인들의 생활방식 외에 광범위하게 얻은 로마의 지식을 습득한 그는 로마와 대항해서 로마군과 싸울 때 적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로마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고 사가들은 보고 있다.

 

서기 434년, 아틸라의 삼촌 루아가 제부족을 통일한 다음 죽으며, 왕위를 조카인 아틸라와 그의 형인

불레다(Bleda)에게 양위했다. 그의 삼촌 루아는 죽기 전 이미 로마로 부터 매년 많은 양의 조공을 받았으나 아틸라의 야망은 그에 만족하지 않았다.

 

아틸라는 11년간 그의 형인 블레다 밑에서 왕권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다가, 서기 445년 아틸라는 왕권을 독차지하기 위해 블레다와 함께 사냥을 나가 형을 죽였다. 블레다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야심 많은 아틸라가 왕권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형인 블레다를 살해 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며, 그럴만한 심증이 가는 이유는, 죽은 형을 장사 지낸지 3일후, 아틸라는 제부족을 초대해 거대한 연회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블레다의 죽음과 함께 아틸라의 삼촌이 왜 조카들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는지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유럽인들이 남긴 아틸라의 모습은 수많은 형태로 남아 있다. 위의 사진은 미국 역사 방송에서 정확한 고증을 거처 교육용으로 제작한 아틸라의 인형이다. 아틸라가 사진에서 입고 있는 의상이 전형적인 훈족의 복장이다.

전투에서 부상으로 죽은 훈족 병사들이 로마군과 비교해 적은 이유는 훈족이 코트 안에 명주로 만든 내복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사가들은 말하고 있다.

근거리가 아닌 원거리에서 날아온 로마군의 화살은 명주로 된 훈족 병사의 내복을 뚫고 들어가도 몸에 깊게 박히지 않기 때문에 화살을 맞은 훈족병사는 양손으로 명주 내의를 끌어 잡아 올려 박힌 화살이 뽑았다고 군사전문가들을 주장하고 있다.

 

 

유럽 백인종에 위기를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려낸 아틸라의 험악한 초상. 유럽의 주류국가들은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슬라브족이 훈족에 가담해 로마와 게르만 제부족과 싸웠으며, 크로아시아 인들이 훈족과 가장 많이 혼혈이 되었다고 주장하며 훈족이 독일민족과 혼혈이 된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 훈족에게 쫓겨난 동고트족의 병사. 영국에서 정확한 고증으로 제작된 인형]

 

[편지를 읽고 있는 에이시우스(Aetius) 서로마 장군]

 

훈족의 왕 아틸라와 살롱에서 대전투를 벌인 서로마 장군 에이시우스(Aetius)는 아틸라와 교환된 로마의 인질로 훈족에게 보내진 인물이다. 이 두 사람은 어린시절부처 상대를 잘 아는 사이로 성장했다. 에이시우스는 유럽역사에서 백인을 아시아의 야만족으로 부터 구했다는 유럽인들의 칭송을 받는 사람으로서 살롱대전투에서 아틸라에게 패배를 안겨준 서로마 장군이다.

 

에이시우스는 훈족의 인질이 되기 전 고트족의 왕인 알라릭에게 인질로 보내졌다가 다시 훈족의 인질로 보내졌다. 아틸라가 로마궁정에서 로마의 모든 것을 배운 것처럼, 에이시우는 고트족, 훈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두 야만족으로 부터 그들의 장점인 전투방식을 배운 결과,  에이시우스가 살롱대전에서 훈족의 왕인 아틸라를 격파 할 수 있었다고 사가들은 주장하고 있다.

 

에이시우스의 출생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에이시우스가 이탈리아인 어머니와 고트인 족인 아버지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또 하나는 이탈리아인 어머니와 스키타이인 아버지인 가우덴티우스(Gaudentius)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 그 당시 사가들은 훈족의 생활 방식이 기원전에 유럽을 석권한 스키타이인과 같아 훈족을 스키타이 인이라고 기록했다. 기원전에 유럽을 혼란에 빠트려 석권했던 야만족인 스키타인 인들이 4세기경에는 현지인들에 동화되어 역사에서 사라진 사실을 돌이켜보면 에이시우스의 부친이 훈족일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