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세기 로마 호령한‘훈족’은 한민족”
“5세기 로마 호령한‘훈족’은 한민족”
몽골리안 반점·편두형 골상 등 인체 특징 유사 … 마상 무예·동복 문양도 선조들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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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북방사를 주로 다루는 ‘백산학회’ 회보(제66호, 8월30일 발매)에 유럽에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에게 같은 시기 한반도에 있었던 신라 가야 고구려의 지배계층과 비슷한 풍습이 있었다는 이종호씨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프랑스에서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나 과학사 쪽에 관심이 더 많은 이종호씨로부터 훈족과 신라 가야 고구려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설명을 들었다.(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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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이 고구려에 대해 강한 매력을 느끼는 것은 중국의 광대한 영토를 한민족의 강한 군대가 마음껏 달렸다는 데 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375∼413)은 즉위 초부터 정력적으로 정복사업을 벌여 서로는 요하, 남으로는 한강 유역에까지 세력을 미쳤으며 북으로는 개원, 동으로는 옥저와 예(濊)까지 차지했다.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394∼491) 시대에 고구려가 고조선이 차지했던 영토를 거의 되찾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동양에서 치열한 정복사업을 펼칠 때 서양에서도 한민족의 일족인 훈족이 서양문명사를 새로 쓰게 하는 정복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서기 375년, 기마민족인 훈족이 볼가강을 건너 게르만족인 동고트를 공격하자 동고트는 서고트를 공격했고, 서고트는 로마제국 영토로 들어가 보호를 요청했다. 당시 동양에선 광개토대왕 전성기 이로써 로마제국 안에 게르만족이 들어와 살게 됐는데 이로부터 100여년 뒤인 476년, 로마제국은 게르만인 오토아케르에 의해 멸망했다. 이후 게르만족은 서유럽과 아프리카 북부로 흩어져, 새로운 정착지를 기준으로 새로운 국경을 만들었다. 이는 훈족에 의해 유럽에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최근 세계 각지에서 발굴된 유물과 사료에 따르면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은 한민족의 일파인 것으로 보인다. 훈족은 흉노(匈奴·북방 기마민족을 통칭한다)가 원류인데, 흉노는 진시황 시대인 기원전 3세기 중원 지역을 놓고 중국 민족과 혈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흉노는 심한 부침을 겪었는데 이때 흉노에 속해 있던 한민족의 원류 중 한 부류가 서천(西遷)하여 훈족으로 성장하고 또 한 부류가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동천(東遷)하여 가야 등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서유럽에 살고 있는 훈족의 후예에게서 몽골리안 반점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둘째, 훈족이 그들 특유의 예맥각궁(濊貊角弓)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탈리아의 아퀼레이아에 있는 크리프타 아프레시아 교회의 프레스코화(畵)에는 말을 탄 훈족이 추격해오는 로마 기병을 향해 몸을 돌려 활을 쏘는 장면이 있다. 이 그림은 고구려 고분인 무용총에서 나온, 말을 탄 채 활로 동물들을 사냥하는 고구려 무사들의 모습과 똑같다. 셋째, 훈족의 머리 골상이 편두(偏頭·cranial deformation·일명 납작머리로 불리는 인공적으로 변형시킨 두개골)라는 사실이다. 학자들은 몽골에서 프랑스의 칼바도스 지방에까지 이르는 훈족의 이동경로 곳곳에 있는 분묘에서 머리의 관자놀이와 이마가 특이하게 눌려 있고, 머리에 고랑 같은 주름이 있으며 머리통이 긴 두개골을 발견하고 이를 ‘편두’로 명명했다.
아틸라는 살롱 대전투 후 곧바로 근거지인 판노니아(현재의 헝가리)로 철수했다가 이듬해인 452년 또다시 서로마를 침공했다. 이탈리아반도로 공격해 들어간 아틸라 군은 아퀼레이아를 점령한 후 파두, 베로나, 피비 등 북이탈리아 전역을 휩쓸었다. 이러한 훈족의 공격을 피해 해안지역으로 도망친 사람들은 “베니에티암(Veni etiam, 나도 여기에 왔다)”이라고 외쳤는데, 이 말이 변해 지금의 베네치아라는 지명이 되었다. 그러나 아틸라와 훈족의 종말은 너무나 어이없었다. 453년 아틸라는 일디코 또는 힐디코로 불리는, 유명한 게르만민족의 대서사시인 ‘니벨룽겐의 노래’에서는 크림힐트로 나오는 게르만 제후의 딸과 결혼했는데, 결혼식 다음날 아침 시체로 발견됐다. 일디코가 자신의 가족들이 훈족에게 살해된 것에 앙심을 품고 그가 잠들자 살해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학자들은 결혼식 날 과음해 질식사한 것으로 보거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암투로 인해 살해됐다고 추정한다. 아틸라왕 사망 후 훈제국 곧 분열 강력한 지도자인 아틸라가 죽자 아들인 덴기지크가 훈족의 지도자가 됐으나 많은 부족으로 구성된 훈제국은 곧바로 분열돼, 469년 훈제국은 동로마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동로마에 패한 후 대다수의 훈족은 동쪽의 카스피해 북부로 귀향했지만, 일부는 유목생활을 포기하고 러시아 남쪽과 크림반도 지역에 정착했다. 그리고 몇몇 종족은 프랑스와 스위스 등지에 정주했다. 이때 훈족의 일부가 발라니아에 잔류했다가 후일 마자르인과 합쳐져 헝가리 민족을 구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트란실바니아(지금의 루마니아)에 있는 세켈리족은 자신들의 선조가 훈족이고, 자신들이 아틸라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다. 루마니아는 드라큘라 백작 이야기가 나온 곳이기도 한데,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는 드라큘라의 원조는 아틸라인 것으로 보인다. 드라큘라의 모델로 알려진 드라큘라 백작(1431∼1476)은 1000년 정도 후대의 사람이다. 서양인들은 아틸라에게 ‘잔인한 약탈자이자 파괴자’라는 수식어를 붙여 놓았다. 이러한 비난이 따르은 것은 동양인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서유럽의 심장부까지 점령해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4세기에서 5세기 사이 서양에서는 훈족이 로마제국을 호령했고 동양에서는 고구려가 아시아의 동북방을 호령했다. 훈족은 고구려보다는 가야(변한), 신라(진한)와 보다 친연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같은 한민족이다. 아틸라와 광개토대왕이 비슷한 시기에 동·서양을 호령한 것은 한민족이 세계 문명사에 크게 기여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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