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03 훈족·몽골...·수메르...

[스크랩] 사상 최강의 훈족

monocrop 2006. 12. 15. 23:14
사상 최강의 훈족
속전속결 위주 기마군단의 발빠른 이동이 위력
문명세계 강대국 로마 초토화 시켜 '공포의 대상'
375년, 훈족은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하면서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시켰고, 찬란한 로마 문명이 476년 게르만족인 오토아케르에게 멸망케 하는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을 「고대 유럽 휩쓴 '훈족'은 한민족」(2004.3.2)으로 설명했다. 흉노(匈奴) 중 서천(西遷)한 훈족과 동천(東遷)한 한민족(가야신라)이 같은 민족의 일파임도 밝혔는데 이는 근래 많은 언론에서 신라는 기마민족 흉노의 일파라고 발표되는 논지와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훈족이 갑자기 유럽 땅에 나타났고 100년도 안되어 사라졌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더구나 지난 1500년 동안 서구 사람들은 편견으로 가득 찬 매우 적대적인 관점에서 훈족을 다루었다. 유럽인들은 야만인 훈족을 경멸 어린 시각으로 바라보았고 기독교인들은 훈족을 이교도 무리로, 그들의 지도자인 아틸라(395∼453)를 하느님이 죄를 지은 사람들을 징벌하기 위해 지상에 내려 보낸 도구로 보았다.

훈족의 기병을 묘사한 부조.


흉노, 훈, 한민족이 친연성(親緣性)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퍼즐을 하나하나 맞추는 것과 다름없다. 375년, 서유럽을 공격하여 새로운 유럽 질서를 만들게 한 훈족의 지배집단이 한민족이라는 것은 한민족으로서 매우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까지 조그마한 한반도 내에서 외침만 받고, 세계사에서 미미한 역할만 했다고 알려져 있는 한민족이 세계사의 가장 중요한 장면을 장식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추위가 만든 서유럽과의 조우>

아시아 대륙에서 활약하던 흉노가 4차에 걸쳐 서천한 후 훈족이라는 이름으로 서쪽에 있는 고트족의 영지로 침공하게 된 것은 그야말로 만화 같은 사건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훈족과 고트족은 크리미아 반도를 두고 오랜 세월을 가까운 데서 거주하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훈족이 기르던 어린 암소 한 마리가 쇠파리에 쏘이자 놀라서 늪지대를 가로질러 먼 해변으로 달려갔다. 한 목동이 암소를 쫓아갔다 돌아와서 자기가 목격한 일을 부족민들에게 이야기했다. 6세기 고트족의 역사가로 게르만족에 대한 『게피다이 족의 기원과 관습』을 쓴 요르다네스(Jordanes)는 그 일화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훈제국 강역도.


‘목동의 이야기를 듣고 훈족이 바다로 생각하여 건널 수 없다고 여겼던 메오티아 늪지대를 걸어갔다. 그러자 이제까지 미지의 땅으로 남아 있었던 스키타이 땅이 눈앞에 펼쳐졌다. 메오티아 늪지대 너머에 다른 땅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던 훈족은 스키타이 땅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내가 보건데 훈족의 조상신인 악령들이 스키타이인들을 시샘하는 마음에서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훈족이 생각지도 못한 광대한 땅을 발견하였지만 곧바로 서방으로 이동한 것은 아니었다. 훈족들의 서방 이주를 부채질한 것은 기후 탓으로 보인다. 훈족이 서방에 넓은 초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지 얼마 안되어 공교롭게도 혹독한 겨울이 닥쳐왔고 모든 강들이 얼자 새로운 땅으로 이동을 단행했던 것이다.

물론 훈족의 서방 진출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우선 강을 건너자마자 광대한 초원지대에 이미 정착하고 있던 여러 민족과 부딪쳤다. 훈족과 부딪힌 민족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알란족(Alans)이다. 알란인들은 훈족과 370년대에 큰 전투를 벌여 패배하자 훈족의 군대에 편입된다. 학자들은 이 알란족들을 이란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훈족이 서진하는 과정에서 맞부닥친 또 다른 민족은 유명한 사르마타이족(Sarmatians)으로 이들은 역사상 가장 용맹한 민족 중에 하나였다는 스키타이를 격파한 민족이었다. 이들은 인도유럽어 계통의 민족으로 알란족과 비슷한 언어를 사용했다. 훈족이 서방으로 진격하는 동안에 많은 민족들이 훈족의 영향 하에 들어갔는데 그 중 스키리족은 한때 남부 러시아에 살던 민족으로 훈족의 주력 세력 중 하나였다.

훈족의 머리빗.
훈족이 단일 민족이 아니라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유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최근에 발견된 훈족의 유골들을 보면 훈족의 4분의 1 가량만이 순수한 아시아 계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훈족’이란 용어는 원래의 훈족으로 불린 지배집단에 의해 지휘된 모든 부족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훈족과 한민족의 친연성을 거론할 때도 훈족 전체가 한민족과 같은 민족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아틸라 등 핵심 지배집단이 한민족과 친연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훈족은 ‘신의 징벌’을 위한 도구>

현재도 유럽인들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세계에서 가장 광대한 제국을 정복했던 칭기스칸의 몽골족을 역사상 가장 야만스러운 민족이라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대다수의 유럽인들이 유목민이라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화를 기피하는데 그 중에서도 훈족에 대한 경멸감은 극심하다.

유럽인들이 훈족에 대해 특별히 심한 편견을 갖는 것은 야만인의 대명사인 훈족이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 세계이자 초강대국인 로마, 이란 등으로 침입해 들어간 지 얼마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초토화시켰기 때문이다. 더구나 유럽인들은 아직도 훈족의 출현, 동기, 퇴각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 혼란스러워 한다.

그렇다면 야만인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고대세계는 자신들의 생활이 어떠하든 자신과는 다른 풍습을 갖고 있는 민족을 야만인으로 불렀다. 켈트족은 오랫동안 로마인들로부터 야만인이었고, 게르만족은 갈리아인에게, 슬라브족은 게르만인들에게 야만인이었다. 중국은 아예 자신들의 변방에 살고 있는 민족 전체를 이적융만(夷狄戎蠻)이라 불렀다.

훈족 버클.
유목민들의 생활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가뭄이 들면 말라버린 우물을 찾아 황폐한 초원지대를 떠나 농경지대 부근, 즉 정주문명이 이룩한 도시들을 호시탐탐 노린다. 일반적으로 초원지대는 대략 10년∼12년마다(흔히 몽골에서는 원숭이띠 해에 가뭄이 든다고 한다) 가뭄을 비롯한 천연재해가 닥치므로 그들이 살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정주문명을 노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런 점에서 소위 농경지역에 대한 유목민들의 주기적인 침투는 자연법칙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들은 혹독한 환경에 항시 단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농경민족에 대해서는 비교적 군사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던 서로마제국은 60만 명이나 되는 제국군이 상비군으로 있었음에도 단 몇 만이 되지 않는 야만족 즉 훈족에 쫓긴 게르만족에게 멸망당하였다. 유럽인들이 자존심 상해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으로 바로 야만족 게르만족을 몰아낸 장본인이 게르만족보다 더 야만족인 훈족이 아시아인이라는 점이다.

훈족은 울긋불긋하게 물들인 변발이거나 한쪽을 빡빡 밀어낸 머리를 뒤흔들고 유목민 특유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면서 적진으로 달려들었다. 평소에 보지 못하던 기마군단에 의해 자신들의 재산과 생명이 위협 당하자 훈족은 인간이 아니라 마치 동물과 같다고 적은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

<백전백승의 훈족>

훈족이 사상 최강의 전력을 보유하고 유럽의 패자가 된 배경으로는 당시의 유럽 세계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신기술과 전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훈족이 사용한 말이다.
오늘날 사냥용 말보다 어깨 폭이 20센티미터 가량 더 좁은 훈족의 말들은 스피드와 지구력을 갖추고 있었고 여러가지 면에서 당대 서구의 말들보다 질적으로 우수했다. 그들은 험준한 산악지형을 제외하고는 매일 100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었다. 또한 말들이 눈밭에서도 풀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으므로 사육하는데도 큰 힘이 들지 않았다.

훈족의 마상 전투. 달리는 말 위에서 뒤돌아 쏘는 훈족의 전투법(파르티아 기사법)은 유럽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술이었다.
훈족의 아이들은 걷는 법을 배우자마자 이내 말 타는 법을 배웠다. 훈족은 말을 탄 채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용변을 보고, 심지어는 중요한 국사도 처리했다. 로마인들은 기마병과 말이 그렇게 혼연일체가 된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으므로 반인반마(켄타우로스)의 괴물이라도 훈족만큼 말을 잘 탈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훈족의 전사는 한 명 당 말 6∼7마리를 가지고 다녔으므로 언제든지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어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둘째 나무 안장이다. 유럽인들의 눈에 말과 기수가 한 몸으로 보이는 것은 안장 때문이었다. 훈족의 안장은 로마인의 안장처럼 말의 몸통에 가죽끈으로 잡아매는 평범한 것이 아니라 나무 버팀목이 있었다. 앞뒤로 높이 올려진 우뚝한 기둥과 안장머리는 말이 달릴 때에도 기수에게 안정감을 준다. 이에 반해 로마의 기병은 전투 도중 균형을 잃고 낙마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셋째 등자이다. 훈족은 아시아에서 안장 외에도 유럽에 알려지지 않았던 등자를 도입했다. 훈족은 장시간 말을 탔을 때 생기는 다리의 피로감을 예방하기 위해 발을 받쳐 주는 가죽 밴드나 발주머니를 안장에 부착했다. 기수는 안장에 단단하게 앉아 등자에 다리를 고정시킴으로서 달리는 중에도 사방으로 화살을 쏠 수 있었다.

등자의 발명은 오랫동안 유목민들이 정주민의 기마대를 능가하는데 공헌했으며, 일반적으로 등자는 사르마타이가 발명했다는 설도 있지만 훈족의 발명설이 더 신빙성있다고 추정한다(중국의 한(漢)대 부조에서는 등자가 보이지 않음).

넷째 복합궁(Composite Bow)과 특수하게 제작된 화살을 사용했다. 훈족과 한민족의 친연성을 연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활과 화살에 대해서는 「고대 유럽 휩쓴 '훈족'은 한민족」(2004.3.2)에서 이미 설명했다
.

5세기경 훈족이 사용한 투구(『터키사』).
다섯째 훈족의 기동력이다. 훈족은 속전속결을 위주로 하는 기마민족인데다가 말 위에서 허리를 세우고 타면서도 자유자재로 위력적인 활을 사용했다. 그들은 멀리에서 적을 쏘아 맞추고 후퇴하면서 말 뒤로 몸을 돌려 활을 쏘기도 하는데 이를 ‘파르티아식 활쏘기(Parthian shaft)’라고 부른다. 이 기사법(騎射法)은 초원을 무대로 한 경장기병부대의 전법으로 기동력이 둔한 적을 만날 경우 여러 방면에서 적을 향해 돌진하다가 가까운 거리에 이르면 갑자기 일제히 말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려 분산하면서 뒤돌아보듯이 좌후방으로 화살을 일제히 발사한 뒤 멀리 이탈해가기를 반복하여 적을 교란시킨 후 격멸하는 전투법이다. 고구려의 기마수렵도에 보이는 활쏘는 장면도 이런 기사법이다.

훈족의 공격군은 대략 500∼1000명 정도의 인원으로 우선 300미터 거리에서 불화살을 날리면서 공격을 개시했다. 그런 다음에 물러나는 척하다가 다시 지그재그식으로 달려들었다. 훈족은 등자에 두 발을 딛고 서서 활을 전후좌우로 자유롭게 쏘았으므로 유럽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처음에는 멀리서 일고 있는 먼지구름을 통해, 다음에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에 의해 잔뜩 공포심을 느끼다가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면 정규육박전에 익숙한 유럽인들은 혼란에 빠지면서 훈족의 공격에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화살을 피한 적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훈족 기병의 양날이 달린 긴 검이었다. 당시 훈족이 사용한 칼 역시 유럽의 칼을 능가했다. 훈족의 장검은 칼자루를 가로지르는 십자형 금속 칼 콧등이 있었는데 그것은 순간적으로 적의 몸을 깊숙이 찌를 때, 훈족 전사의 손을 보호했다.

훈족의 병사들이 사용하는 전술은 칼과 창으로 싸우는 육박전을 피하면서 적에게 큰 타격을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소규모 인원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물론 훈족의 공격에 로마를 비롯한 유럽인들도 방어수단을 강구했다. 로마 군사들이 화살 공격에 다소간 대비할 수 있는 쇠사슬로 만든 갑옷을 입기 시작했지만 매우 거추장스러워 오히려 전력을 떨어뜨렸다. 유럽에 번개와 같이 나타난 천하무적인 훈족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었으므로 훈족이 백전백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대의 이동속도이다. 예상할 수 없는 지점에 예상할 수 없는 시기에 군대가 나타나면 기습이 된다. 예상할 수 없는 수의 병력이 순간적으로 모이면 대항할 엄두도 못내고 지리멸렬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승전의 3대 요인을 집중·기동·기습으로 표현한다.

훈족 기마군단이 전투에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전투병과 보급병의 구별을 두지 않고 모두 전투병으로 운영되었다는 점이다. 한 병사가 6∼7 마리의 말을 몰고 다녔으므로 훈족 기마군단의 진격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농경민족의 군대는 전투병력과 보급병으로 나뉘어진다. 이런 군대의 전체 평균 이동속도는 가장 느림보인 보급병에 맞춰져야 한다. 전투병이 홀로 적진 속에 들어갔다가 보급선이 차단된다면 장기전을 유지하지 못하고 섬멸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조갑제는 이런 상황을 물리학 공식으로 F(힘)= M(질량) V2(속도) 즉 군대의 파괴력은 규모(M)에 정비례하지만 이동속도에는 제곱에 비례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전투의 원리를 극대화한 것이 훈족의 기마군단이므로 이들에 의해 세계의 역사가 바뀌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는 일이다.


이종호(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출처 : 韓民族! 옛 제국을 찾아서...
글쓴이 : 주인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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