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03 훈족·몽골...·수메르...

[스크랩] <게르만 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한민족의 연관성 연구>

monocrop 2006. 12. 15. 22:42
<게르만 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한민족의 친연성(親緣性) 관한 연구>


-원문출처는 월간조선
-이종호 과학 국가박사(mystery123@korea.com)

Ⅰ. 머리말
Ⅱ.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Ⅲ. 흉노의 西遷
Ⅳ. 훈족과 한민족의 친연성
1. 유물로 보는 훈족
2. 훈족의 특성
Ⅴ. 북방계 집단의 한반도 유입
Ⅵ. 흉노(훈)와 투르크인의 비교
Ⅶ. 맺음말

원문 화일:

Ⅰ. 머리말

이 논문은 375년에 서유럽을 강타하여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의 원류가 한민족일지 모른다는 가설로부터 출발한다. 1945년에 태어나 자유베를린 방송사 편집자인 동시에 TV 다큐멘터리와 방송국의 작가이자 연출가인 옌스 페터 베렌트와 1944년 생으로 미국 코넬 대학과 베를린 공과대학 교수였던 아이케 슈미트 박사는 독일 ZDF 방송이 추적한 다큐멘터리 시리즈 <스핑크스, 역사의 비밀>의 '잃어버린 고리' 찾기에서 375년 유럽을 강타하여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촉발케 한 훈족을 집중적으로 취재했다.

다큐멘터리의 결론은 훈족의 원래 고향이 아시아 대륙의 최동단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들이 거론한 아시아 대륙의 최동단은 한반도를 지칭하는데 그 중에서도 한반도 남쪽 지방인 신라와 가야를 지목했다. 한민족으로 추정되는 훈족이 서유럽을 강타했기 때문에 게르만 민족 대이동이 일어났으며 그들이 정착한 지역이 현재의 서유럽 국경으로 거의 전부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독일의 유력 방송사인 ZDF에서 특집방송을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반적으로 현대과학문명은 서유럽에서부터 출발했다고 인정한다. 원래 세계 4대문명 모두가 서유럽 지역에서 출발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부침을 거쳐 기원전 500년경부터 그리스를 거쳐 로마가 세계를 주름잡았다. 이들의 세계 제패 기간 동안 몇몇 아시아 강국들이 서유럽을 넘나들기도 했으나 서유럽 전체를 완전히 정복하는데는 실패한다. 그러나 찬란했던 그리스 로마 문명도 375년에 훈족의 침입으로 인해 395년에 동 서 로마로 분리되더니 서로마는 기원 476년에 훈족에 의해 쫓겨 내려온 게르만 인 오토아케르에게 멸망하면서 서유럽은 암흑시대로 들어간다.

그 후 서유럽의 기독교 세계는 아랍 세계와 200여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과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후 산업혁명을 거쳐 현재와 같은 과학시대를 열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세계의 4대 문명지는 현대 문명이 태어나는데 커다란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결정적인 기여는 하지 못한 채 보조 문명으로 일익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유럽인들은 세계 4대 문명이 번창했을 때 자신들의 선조들이 야만인 생활을 했지만 현재와 같은 문명 세계를 만든 것은 결론적으로 자신들의 선조이므로 자긍심을 갖고 다른 민족들에 대해 우월감과 자존심을 감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국인 서로마를 멸망케 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으며,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훈족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것은 역으로 훈족이 현대과학 문명 발달에 있어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만든다. 훈족이 아시아의 동방에서 유래되었으며 그것도 한민족일지 모른다는 가설에 흥미를 느끼지 않을 한국인이 없다고 생각되는 이유이다.


Ⅱ.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학자들은 로마의 멸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기원 375년, 내륙 아시아에서 강력한 유목민인 훈족이 발라미르(Balamir, Balamber)의 인솔하에 서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볼가강을 건넜다. 야만적인 기마 집단 훈이 동고트인들이 거주하던 동쪽 국경을 유린하자 동고트 왕 헤르만리크(Hermanrik)는 자살하고 아들 후니문드(Hunimund)는 훈족에게 투항한다.

반면에 훈족에 투항하지 않은 알라세우스(Alatheus)와 사플락스(Saflax)는 동고트인들을 이끌고 드네스터 강 서쪽의 서고트족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들에게 쫓긴 서고트족의 왕 아타나리크(?∼381)는 6만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도나우 강 남쪽의 로마 영토로 무작정 들어와서 동쪽 로마 황제 발렌스(재위 364∼378)에게 트라키아로 이주하여 살 수 있도록 청원했다. 서고트족의 이동이 종전에 제국의 변경 지방에서 일어났던 부분적이고 우발적인 이주와는 크게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발렌스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그들의 청을 승낙했다.

사실 발렌스 황제는 서고트족의 이주를 처음에는 반겼다. 속주민들이 징집을 면제받기 위해 매년 납부하는 거액의 황금으로 황실 재정을 튼튼히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단 다뉴브 강을 건너기 전에 무장을 해제하고 부모들의 충성을 담보할 인질로 어린이들을 따로 떼어 아시아의 여러 속주에 분산시킨다는 조건이었다.

이 당시 다뉴브 강을 넘은 서고트족의 이주민 총 숫자는 남녀노소를 합쳐 100만 명(당시 서고트족 무사의 수를 20만 명으로 추정)에 이른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거주지를 잃고 쫓겨 내려 온 서고트족들을 진정한 피난민으로 대우하지 않고 마치 전쟁의 포로처럼 하대한 것이 문제였다. 그들은 토지도 할당받지 못하고 생활필수품에 무거운 세금을 매겼고 로마인들은 보잘 것 없는 식품도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팔았다. 서고트족은 빵 한 조각을 얻으려 해도 일 잘하고 값비싼 노예를 넘겨주어야만 했다.

마침내 화가 난 서고트족은 378년 아드리아노플에서 발렌스 황제가 직접 지휘한 로마 군을 공격하여 격퇴한 후 여세를 몰아 가는 곳마다 초토화 시키면서 발칸 반도를 마음대로 유린했다. 이 전투에서 발렌스 황제가 전사한다. 아드리아노플 전투는 로마에 칸네의 전투보다 더 치명적인 결과를 미쳤으며 전쟁사에 있어 보병에 대한 중장기병의 첫 승리라는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로마를 상대로 전투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서고트 인들은 계속 로마 영토 안으로 남하했다.

결국 로마는 382년 도나우 강 남쪽에 정착한 서고트 인들에게 자치를 허용했고 전투원들은 명목상으로 로마군단의 번병(황제에게 봉사하는 군대, confederates)이 되었다. 그러나 서고트 인들이 새로운 땅에 정착했지만 자신들이 샌드위치 신세임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로마 제국의 압력이 사라지지 않은 데다가 북방의 훈족에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들 번병은 로마군단에 속해있었음에도 자신들의 우두머리로부터 직접 지휘를 받고 있었으므로 강력한 로마 제국과 훈족의 위협을 벗어나기 위해 정공법을 택했다. 발칸 반도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자신들의 상전인 로마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로마의 국토가 유린되는데도 불구하고 테오도시우스 황제(재위 379∼395)는 종교 정책에만 매달렸다. 그는 그리스도 교 이외의 다른 종교는 모두 이교로 취급하면서 신전을 파괴하고 이교를 믿는 자들은 모든 도시에서 추방했으며 그들이 갖고 있는 영지는 몰수했다. 또한 테오도시우스는 죽으면서 제국을 동과 서로 분리하여 동로마제국은 17살의 아르카디우스(재위 395∼408), 서로마제국은 10살의 호노리우스(재위 395∼423)에게 주었다.

훈족이 서유럽을 처음으로 공격한 지 25년이 지난 401년 12월, 현재의 독일 땅에 한파가 몰아닥쳐 라인 강이 얼었다. 라인 강이 얼어붙자 알라리크 왕 휘하의 약 1만 5000명의 반달족이 로마의 속주인 갈리아로 들어가 프리울리 지방을 지나 이탈리아의 포 강 유역의 평야로 진격했다.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로마제국의 상비군으로 4만 명에 달하는 반달족이 포에데라티(동맹군)란 이름으로 봉직하면서 급료 등 보조금을 받았는데 이것이 중단되거나 삭감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서로마 제국의 제국군을 지휘하고 있는 장군도 같은 반달족인 스틸리코였다. 그는 테오도시우스의 임종시에 두 아들과 로마제국을 돌보도록 부탁받은 터였다. 스틸리코 장군은 402년초, 알라리크의 군대를 피에몬테 지방에서 격파한 후 402년 말에 베네토 지방에서 결정적으로 패배시킨다.

그러나 스틸리코는 자신의 동족인 반달족에게 일단 승리했지만 그들을 회유하여 예전처럼 동맹군으로 묶어두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알라리크에게 많은 공물을 주어서 변방의 우려를 씻어야 한다고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을 설득했다. 이당시 로마에서 알라리크에게 제시한 보조금은 황금 4000파운드였다.

알라리크가 잠잠하자 호노리우스 황제는 서로마 수도를 로마에서 라벤나로 옮기는데 이 결정은 로마가 야만족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대항하기 위한 조처였다. 호노리우스는 수도를 옮긴 후 야만족들에 대항하여 이제까지 취했던 보조금 정책을 취하하고 공격적으로 나선다. 그의 강경노선은 처음에 성공을 거두어 406년 야만족 혼성군(반달, 알란, 동고트족 등)이 토스카나 지방에 침입했을 때 스틸리코가 이들을 격퇴한다. 그러나 스틸리코의 위세에 겁을 먹고 있던 호노리우스 황제는 원로원 의원들의 사주에 따라 스틸리코가 황제직을 찬탈할 수 있다고 의심한 후 그를 살해했다.

스틸리코의 사망으로 상황이 바뀌자 알라리크는 408년 로마를 직접 공격한다. 명분은 로마제국에서 그들에게 지급해야 할 황금을 제때에 지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알라리크는 곧바로 로마로 진격하여 마침내 로마 성벽 아래에 진을 쳤다. 이 당시 로마의 성벽의 둘레는 원형으로 거의 21마일에 달한다고 알려졌고 가옥 수는 5만여 동이었으며 로마의 주민수를 120만 명으로 추정한다.

알라리크는 대군을 교묘하게 배치해 놓고 로마 성벽을 둘러싸고 있는 중요한 12개의 문을 장악한 후 인근 지방과의 모든 교통을 차단했다. 로마의 생필수품 공급로인 티베리스 강의 항해가 봉쇄 당하자 로마는 로마 시를 점령하지 않겠다는 알라리크의 화의조건을 수락하고 410년에는 3일간 알라리크에게 약탈을 허락한다. 당시의 여건을 볼 때 알라리크가 로마를 점령한 후 로마를 직접 통치할 수도 있었다고 학자들은 믿는다. 알라리크가 이런 절호의 기회를 왜 회피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여하튼 알라리크는 로마에서 마음껏 약탈한 후 자진 철수했다.

알라리크는 로마에서 철수하자마자 사망했고 의형제 아타울프가 반달족을 이끌었다. 그들은 수비에 족과 합류하여 오랫동안 평화롭게 살고 있던 이베리아 반도(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역에 정착했다. 한편 훈족에 의해 쫓겨났던 알란족은 피레네산맥으로부터 바다 쪽에 걸쳐 에브르 강의 계곡을 따라 정착하고, 다시 루시타니아(현재의 포르투갈)의 각지로 흩어졌고 강력한 함대를 이용하여 탕헤르에도 상륙했다. 반달족은 439년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점령하고 트리폴리까지 진격했으며 지중해의 코르시카, 시칠리아, 사르데니아 섬도 점령했다.

브리타니아도 게르만 민족인 주트와 색슨에 의해 점령당했고 그 후에 또 다른 게르만 민족인 앵글 족이 브리타니아를 침공했다(이 당시 게르만 민족의 침입에 대응한 브리타니아 인들의 저항도 완강하여 유명한 아아더 왕의 영웅적인 전설이 나오게 된다). 여하튼 브리타니아를 포함하여 서유럽은 이후 각 지역에 정착한 민족들에 의해 새로운 국경이 세워지며 현재까지 커다란 변동 없이 이어지고 있다.

훈족은 걸출한 영웅인 아틸라(395∼453)가 통치한 450년경에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다. 아틸라가 지배한 지역은 남쪽으로는 도나우 강 남쪽의 발칸 반도, 북쪽으로는 발트 해안, 동쪽으로는 우랄산맥, 서쪽으로는 알프스에 이르는 실로 광활한 영토에 걸쳐 있었다. 훈 제국은 세계 역사상 칭기스칸, 알렉산더 대왕에 이어 세 번째로 광대한 영토를 점령했다고 추정하며 치하의 종족 수만도 45여 족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틸라가 453년 결혼식 첫날 밤 갑자기 사망하면서 훈 제국은 붕괴되기 시작하며 469년 아틸라의 아들인 덴기지크가 동로마와의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역사에서 사라진다.
훈족이 유럽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단 100여 년에 지나지 않지만 훈족이 유럽 대륙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훈족의 침입으로 민족대이동이 이루어졌고 이후 이들 민족들의 새로운 정착지를 기준으로 새로운 국경이 만들어 졌다. 서유럽의 국경이 새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사실상 훈족에 의해 새로운 질서가 도입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유럽'이라고 지칭할 때는 서유럽을 뜻하는데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 인인 오토아케르 정복된 후(476년) 봉건 제도가 출현하기까지 약 600년 간, 학자들의 분류에 의하면, 비생산적인 시대 또는 암흑시대로 빠져든다. 훈족에 의한 게르만 민족의 이동이 그만큼 큰 파장을 갖고 왔다는 뜻이다.


Ⅲ. 흉노의 서천(西遷)

훈(Hun, Hunni, Huna)이 흉노(Hsiung-nu)에서 연유했다는 것은 1750년대에 프랑스의 드 기네(Joseph de Guignes, 1721∼1800)가 처음으로 제시했지만 곧바로 정설로 받아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금세기에 들어와서 언어학과 고고학 및 문화인류학 등 다양한 연구가 추진되면서 훈의 출현과 흉노의 서천(西遷) 사이에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다는 것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그러므로 훈족과 한민족과의 친연성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훈족이 서유럽을 침공하기 시작한 375년까지 어떻게 서유럽을 침공할 수 있는 지역에 도달해 있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이 논문에서 훈과 흉노를 분리하여 설명하기도 하지만 원칙적으로 훈과 흉노를 같은 범주에서 설명).
흉노는 중국 북방에서 첫 유목민족국가를 건립한 민족으로 기원전 4세기경부터 중국의 역사에 등장하지만 흉노의 어원부터 학자들간에 이견을 보인다.

일반적으로 '흉(匈)'자는 '훈(Hun 혹은 Qun)'의 음사이며, '훈'은 퉁구스어에서 '사람'이란 뜻으로 흉노인 스스로가 자신들을 '훈(Hun, 匈)'으로 불렀다고 추정한다. 문제는 '노(奴)'자인데 대체로 이 글자는 한자에서 비어(卑語)인 '종'이나 '노예'의 뜻으로 그들을 멸시하는 의도에서 '노'자를 첨가해 '흉노'로 불렀다고 알려진다. 그러나 원대(元代)의 극 <공작담(孔雀膽)>의 대사 중에 나오는 '노(奴)'나 '아노(阿奴)'의 어의를 볼 때 남편을 지칭하는 '낭(郎)'이나 '낭자(郎子: 그대, 그이, 낭군)'의 뜻이거나 '노'자를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흉노의 종족적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중국 학자들은 상대(商代)의 귀방(鬼方)이나 서주(西周)시대의 훈육이나 험윤의 후예로 보는가 하면 서구나 일본학자들은 주로 언어계통 측면에서 착안하여 몽골계통이나 투르크 계통, 몽골-투르크 혼합계통, 슬라브 계통, 이란 계통 등에 속한다고 주장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제 Ⅵ장에서 다시 다룬다.

흉노는 진시황제부터 중국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진시황제는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한 후 흉노의 위험을 예상하고 몽염(蒙恬)으로 하여금 전국시대에 여러 나라들이 각기 축조한 장성을 보수 연결하여(서쪽의 감숙성 임조(臨 )로부터 동쪽의 요동까지) 만리장성을 쌓게 했다. 또한 몽염은 기원전 214년 현재 오르도스 지역과 황하의 만곡으로 둘러싸인 지역에서 10만 명의 대군으로 흉노를 몰아낸다.

진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한지 10여년 만인 기원전 210년에 사망하며 후계자인 호해가 등극하지만 곧바로 항우에게 패하고 진나라는 멸망한다.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놓고 싸운 결과 결국 유방이 승리하고 통일중국인 한나라를 세운다.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때 북쪽에 있는 흉노는 중국을 견제하고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강대국이었다. 사실상 한나라 역사는 북쪽에 있는 흉노와의 관계가 대부분이라 할 정도로 때로는 가깝게 때로는 원수와 같이 으르렁거리면서 지냈다.

묵특선우((冒頓單于, 기원전 209∼174)는 흉노의 전성시대를 연 사람이다. 흉노는 묵특의 아버지 두만선우(頭曼單于, 기원전 210∼209)가 감숙 서부 지역에 존재하고 있던 월지를 공격하면서 팽창하기 시작했는데 묵특은 아버지를 살해하고 單于(선우는 '탱리고도선우(撑 孤塗單于)'의 약어다. '탱리(撑 )'는 터키-몽골어에서 '하늘'을 뜻하는 '텡그리(Tengri)'의 음역이며 '고도(孤塗)'는 '아들'이란 뜻)에 오른 후 자신의 치세동안에 대대적인 정복활동을 벌여 아시아 초원의 주변에 있는 거의 모든 민족을 복속시켰다.

이때에 동호(東胡, 현 중국 동북지방으로 사마천은 동호를 예맥조선이라고 기록했고 흉노에게 패배한 후 선비(鮮卑)와 오환(烏丸)으로 분리됨)가 매우 강성하였는데 동호는 흉노를 경멸하고 묵특의 천리마와 연지(흉노의 后妃의 칭호, 원음은 '알저')를 요구했다. 부하들이 동호의 무례함을 나무라며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라고 하자 묵특은 '나라와 인접하면서 어떻게 말 한 마리와 여자를 아끼겠는가'하며 순순히 주었다. 그 후 두 나라 사이에는 황무지로 1000여 리의 땅이 있는데 황무지이므로 동호가 갖겠다고 말했다. 신하들 중에 버린 땅이므로 주어도 좋다고 했지만 묵특은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라며 동호를 습격하여 왕을 살해하고 백성, 가축 등을 노획했다.
패전한 동호를 대신하여 흉노가 강성하게 되었는데 이때 흉노의 땅은 동으로 한반도 북부, 북으로 바이칼호와 이르티시 강변, 서로는 아랄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渭水)와 티베트 고원까지였다.

흉노란 어떤 단일한 씨족이나 부족에게 그 연원을 둔 것이 아니라 여러 유목 민족과 부족들을 망라하고 계승한 하나의 포괄적인 유목민 집합체이다. 흉노 자체도 휴도(休屠 혹은 屠各) 우문(宇文) 독호(獨狐) 하뢰(賀賴) 강거(羌渠) 등 여러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한 부족이 또 몇 개의 씨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흉노의 형성과정에서 '흉노'라는 주력 종족집단이 주도적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그 이름 아래 여타 종족과 씨족들을 망라시켰다고도 추정한다.

더구나 고대 중국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진시황제 이후부터는 동호와 흉노를 분리하여 서술하기는 하지만 漢대에도 이들을 특정한 민족이나 부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동쪽의 오랑캐'를 의미하는 한자어로도 사용했다.

묵특은 중국의 두 번째 통일 제국인 漢나라의 유방을 패배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기원전 202년 재위 5년에 비로소 황제로 칭하고 노관을 연(燕)왕으로 봉하는데 노관이 201년, 흉노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유방은 흉노가 갓 태어났지만 후일 한나라에 큰 골칫거리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흉노를 치기 위해 4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흉노의 묵특을 공격한다.

그러나 기원전 200년, 유방은 백등산에서 일주일간이나 포위된 상태에서 극적으로 구출되는 등 수모를 당하면서 철저하게 패배하고 흉노와 화친을 맺는다. 한이 형이 되고 흉노가 동생이 된다는 소위 형제국이 되어 유방의 체면은 그런대로 유지했지만 실제로 한은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 한에서 유방 이후 무제가 집권하기 전까지 50여년 간 공물과 공주(본래는 황녀를 가리키지만 종실 일족의 딸이나 후궁을 황녀라 속였다)를 보내고 평화를 유지했다(중국학자들이야 이런 표현에 반대하겠지만 객관적인 상황으로 보면 그렇다).

여하튼 한과 흉노 두 제국은 한무제(기원전 141∼87) 때 혈투를 벌인 후 큰 틀에서 평화 공존을 유지하면서 해체의 길로 나가는데 우선 기원전 57년에 흉노는 동·서로 나뉘어 진다. 분리된 흉노간에도 전쟁이 일어나 서흉노의 선우인 질지( 支)는 동흉노의 호한야에게 패배하자 일족을 이끌고 우랄산맥 너머 씨르다리아 강 중류에 이르렀다. 이 서방 이동 중에 정령, 호게, 견곤, 강거, 대완(大宛, 페르가나), 대하(大夏) 등 서역제국을 공략하고 병합하여 견곤(추강과 탈라스강 사이)을 수도로 하는 '아정(牙庭)'이란 나라를 세운다. 이때에 벌써 흉노가 서방 세계에 근접한 아랄 지역에 도착하는데 이를 서유럽에서는 흉노 제국이 출현한 기원으로 삼으며 흉노의 제1차 서천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한은 질지가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할 만한 시간을 주지 않았다. 원제(元帝) 건소(建昭) 3년(기원전 36)에 한의 서역도호 감연수로 하여금 질지를 끝까지 추적케 하여 탈라스 강변에서 질지를 포함한 요인 1,518명의 목을 베는데 성공한다. 이후 서흉노에 대한 기록은 없다. 중국의 역사에서 더 이상 거론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서흉노가 중국세계와 접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호얀하는 한에 투항한 동흉노와 합쳐 흉노제국을 재건한다. 호얀하가 기원전 31년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치하에서 흉노는 소강상태에서 벗어나 한을 위협할 정도로 국력이 상승하는 반면 漢은 기원 8년 외척 왕망(王莽)에게 제위를 찬탈 당한다. 그러나 왕망의 신(新)도 단 15년을 버티지 못한다. 왕망은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혁신적인 개혁조치를 추진하면서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은 없고 땅에 왕이 둘이 없다'라는 기치 아래 과거 한나라가 각 국 왕에게 보낸 인수(印綬)를 회수하고 천하 사표(四表)를 각 국의 왕에게 보냈다. {漢書}<王莽傳>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동쪽으로 나간 자는 현도, 낙랑 고구려 부여에 가고, 남쪽으로 나간 자는 국경 너머 익주(益州)를 거쳐서 구정왕(句町王)을 후(候)로 낮추고, 서쪽으로 나간 자는 서역으로 가서 그 곳 나라 왕을 모두 후라고 고치고, 북쪽으로 나간 자는 흉노의 조정에 가서 선우에게 도장을 주되, 한나라 때 도장의 글을 고쳐서 새(璽)자 대신 장(章)이라 했다. 선우가 종래의 도장을 다시 요구하자 그것을 진요(陣饒)가 방망이로 깨어버렸다. 선우가 대노하였으며 구정 서역이 뒤따라 모두 전란을 일으켰다.'

왕망이 선우에게 새 도장에 흉노선우새(匈奴禪于璽) 대신에 신흉노선우장(新匈奴禪于章)으로 고친 것인데 선우가 대노하고 운중(雲中)에 침입한다. 이어서 안문, 삭방 등 북변에 침입하여 태수를 비롯한 관민과 가축을 셀 수 없이 살해하고 약탈했다. 흉노가 강성하고 부여 예맥이 일어날 염려가 있으니 출병을 중지하라는 엄우의 충언을 듣지 않고 왕망은 출병을 강행했지만 결국 흉노를 응징하지도 못한 채 후한 광무제 유수(劉秀)에 패망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서기 1세기 초에 현도 낙랑은 중국의 제후국이나 군현이 아니라 고구려 부여와 같은 왕국이며 고구려가 왕망이 세운 신(新)의 북동변에 있었으며 부여 현도 낙랑이 흉노와 근연 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망의 新에 이어 후한이 들어서자 세불리를 느낀 흉노의 서역왕(西域王) 일축왕비(日逐王比)가 고비 사막 이남의 8개 집단을 이끌고 48년 浦奴선우에 반기를 든 후 광무제를 찾아가 투항했다. 후한을 속 썩일 것으로 예상한 흉노가 갑자기 투항하자 광무제는 그들에게 아예 내몽골 지역을 주었다. 이들이 남흉노로 이 당시 후한 체제에 동화된 사람들은 대부분 투르크 계열로 추정한다.

남흉노가 한에 투항하자 한에 투항하지 않은 북흉노의 입지도 약화되었으며 후한은 명제(明帝, 58∼75) 때부터 약 30년 간 북흉노에 대한 정벌전을 계속하며 73년 남흉노와 연합하여 북횽노를 결정적으로 패배시킨다. 패배한 북흉노는 막북(漠北)으로 이동하여 서역제국을 통제하고 규합하면서 한과 대결한다. 이를 흉노의 제2차 서천이라고 한다.

화제(和帝, 89∼105) 원년(89)에도 한은 남흉노를 규합하여 북흉노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치명상을 입은 북흉노는 사분오열되어 대부분 동호에서 분리된 선비(鮮卑)에게 예속되었으나 일부는 천산산맥 북쪽으로 이동하여 일리강 상류와 타커스강 및 나린강 유역에 도착했다가 계속 서진하여 페르가나 분지를 지나 발하시호와 아랄해 사이의 강거(康居) 땅에 도착했다. 이것을 흉노의 제3차 서천이라 부른다. 2세기 후반에는 시르다리아 강 하류 지역에 도달하며 더 이상 중국 사서에 흉노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흉노와 훈족을 연결시키는 또 다른 연결 고리는 漢 왕조가 붕괴할 무렵에 등장하는 남흉노이다. 그들은 삼국시대인 위나라(220∼265)때에 오르도스 초원과 알라샨의 인접 지역에서 부족들을 규합하여 위(220∼265)와 진(265∼316)왕조 황제들과 계약을 맺고 4세기경 로마 제국의 외곽에 존재했던 많은 게르만 민족의 역할과 유사하게 중국의 번병으로 활약한다.

흉노가 중국의 번병으로 활약하면서 장안과 낙양에 드나들고 점점 더 중국의 남쪽 지역에서 정착하게되자 호주천선우가 자신의 먼 할머니가 한나라의 공주였다는 점을 들어 제국 황제의 姓인 劉氏(흉노어로는 攣 氏)로 칭했다. 한나라와 흉노 두 제국의 정통성이 흉노의 가계에서 태어난 것이다.

304년에는, 당시 산서의 태원에서 자리잡고 있던 劉淵이 晉나라 혜제로부터 오부선우로 책봉되자 308년에 한나라의 후예라는 명분을 내세워 태원에서 황제를 칭한다. 이를 北漢(前趙)이라 부르는데 그가 굳이 漢이라고 한 것은 한의 정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유연이 세운 한(北漢)은 엄밀한 의미에서 중국인이 아니라 흉노에 의해 세워진 한왕조이다.
유연이 310년에 사망하고 왕위를 계승한 아들 유총(劉聰)은 중국을 철저히 유린한다. 311년 중국의 수도인 낙양을 점령해 황궁을 불태우고 황제 懷帝를 사로잡았고 312년에는 장안으로 들어가 그곳 인구의 절반을 학살했다. 포로가 된 회제를 평양으로 이송하여 313년 처형될 때까지 시종복장을 입혀 모욕을 주었으며 316년 다시 장안으로 쳐들어가 愍帝를 사로잡더니 자신이 주최하는 연회에서 술잔을 씻게 하는 등 철저하게 모욕을 준 후 318년 처형했다.

유총은 산서에 있는 평양에 중심부를 두고 산서의 중남부, 섬서 북부, 하남 북부, 하북 남부, 산동 북부 등 대제국을 지배했다. 그러나 유총만해도 말이 야만족인 흉노이지 이미 문화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중국의 풍습에 큰 영향을 받아 반 중국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총이 318년 사망하자 그의 부관인 석륵(石勒)이 유총의 前趙를 폐하고 後趙로 알려진 새로운 흉노국가를 세운다. 석륵이 333년에 죽자 아들 홍이 계승하고 악명 높은 석호(334∼349)를 재상으로 임명한다. 홍은 수도를 업( )으로 천도했으나 337년 석호가 제위를 찬탈한다. 그의 지배 영역은 섬서(중국 남조의 영역인 한중을 제외)와 산서(탁발이 있는 대동을 제외), 호북, 호남, 산동, 심지어 회수가 흘러드는 강서의 북부와 안휘까지로 확대되었다.

349년, 석호가 사망하자 그의 양자인 장군 석민(石閔)이 후조의 정권을 잡는다. 그의 성은 원래 염( )이었으나 석호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石으로 성을 바꾸었는데 정권을 장악한 후 다시  씨 성을 찾았다. 그는 한인들이 흉노를 포함한 유목민들에게 원한이 많다는 것을 알고 한인들을 부추켜 흉노(  족 포함)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이 일어났을 때 무려 20여만 명이나 살해되는 것을 방관한다. 석호의 아들인 기(祇)가 漢人들에게 학살당한 원한을 갚고자 흉노들을 규합하여 염민( 閔)에 대항했으나 石祇는 劉顯에게 살해되고 石氏 세력은 전멸한다. 한때 절대적인 지배자였던 흉노로서 이 패배는 결정적이었다.

중국에 동화된 흉노와 유목생활을 견지하던 정통적인 흉노가 연합했음에도 패배하자 살아 남은 흉노들이 새 길을 찾아 서쪽으로 도망치며 4차로 서천하는데 이들이 서방에 이미 정착했던 1∼3차에 걸쳐 서천했던 흉노와 합류(또는 압박)한다. 베렌트와 슈미트 박사는 설상가상으로 370년경부터 혹독한 한파가 흉노들이 서천한 지역에 업습하자, 보다 서쪽으로 대이동을 단행하면서 375년에 서유럽을 공격했다고 추정했다.


Ⅳ. 훈족과 한민족의 친연성

독일인들이 제작한 다큐멘터리에서 훈족과의 친연성을 가장 강조한 곳이 신라와 가야지방이라는 것은 한민족으로 볼 때 매우 충격적이라고 볼 수 있다. 서유럽과 극동의 지리적인 여건 특히 교통이 현대와 같이 발달되지 않은 고대에 한반도의 남부 지역에 살고 있는 한민족이 직접 육로나 해상으로 서유럽을 침공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유목민들의 근간은 양과 말 등 가축을 주축으로 하는 목축 경제이며 부분적으로 농업이나 수렵도 병행했다. 그러나 농경 사회와는 달리 신분 계층에 따른 계급 분화가 명확하지 않은 반면에 사회 구성원들의 혈연과 지연 의식은 강하다. 흉노(훈)는 보드(Bod)라 불리는 혈연 공동체가 보둔(Bodun)이란 부족공동체로 확대되고 이것이 정치적 종합체인 흉노 사회를 구성함으로써 부족연합체인 유목 국가로 성장한다.

흉노 사회의 지배 구조는 크게 세 집단으로 구성되었다. 첫째는 핵심 지배집단으로 왕족인 허련제가(虛攣 家)와 왕비를 배출하는 외척들인 호연(呼衍)·란(蘭)·수복(須卜)·구림가(丘林家) 등이다. 둘째는 주도 집단으로 흉노제국에 건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투르크 등을 포함한 초기 부족들이며 셋째는 전쟁포로나 복속민들로 구성된 집단이다. 흉노 사회의 본체는 다섯 부족의 핵심 지배집단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들에게는 여러 가지 특권이 부여되어 제국의 확장 과정에서 흡수된 여타 부족들과는 정치 참여 폭이나 특권 부여 면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흉노는 유목민이므로 광대한 목초지에 분산되어 살다가 족장의 계승이나 전쟁 등 중요한 일이 있을 때 각지의 수령들이 한 곳에 집합하여 회의한 후 중요한 의사를 결정했다. 특히 이들의 이동은 신속한 것이 장점이므로 지도력을 갖춘 지도자가 나서서 유목민들을 단결시키고 전투력만 증강시키면 주민 전체가 하나의 이동식 군대로 돌변하면서 어느 군대도 대항할 수 없는 무적의 군대가 된다. 그러나 지배구조상 핵심 지배집단이 전체 부족들을 이끌어 나가므로 지배집단의 풍습과 전통이 전체 흉노(훈)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제Ⅲ장에서 3차에 걸친 서천으로 많은 수의 흉노가 서방 세계 쪽으로 진출해 있었으며 서기 350년의 격변기에 또 다시 많은 흉노족이 서방 쪽으로 몰려갔다는 사실(4차 서천)을 설명했다. 그러므로 훈족과 한민족이 친연성이 있다는 뜻은 서천한 흉노(훈)와 한민족이 연관이 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시대로 들어와 한나라와 혈투를 벌일 때인 기원전 3세기 경부터 흉노로 불리던 민족은 고조선과 위만조선(기원전 198∼108), 한나라의 한사군 등과는 구분되어 나타난다. 375년 훈족이 서유럽을 강타할 때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있었다. 바로 이들과 훈과의 친연성이라는 고리를 풀어야 하는 것이다.

흉노, 훈, 한민족간의 친연성에 대해서는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첫째는 독일인들의 다큐멘터리가 틀렸다는 것이다. 그들이 나름대로 훈족과 한민족의 친연성을 보여주기 위해 훈족의 이동경로에서 발견된 유물과 풍습들을 증거로 내세웠지만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하여 문명적인 연관성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두 번째의 가능성은 그들의 가정이 옳다는 것으로 훈족에 가야(신라)와 친연성을 갖는 지배집단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흉노의 등장과 훈의 서방 공격까지는 거의 600년의 기간이 되므로 흉노 속에 포함되어 있던 지배집단의 일부가 어떤 경로를 통하든 한반도로 동천했다는 것이다.


1. 유물로 보는 훈족

베렌트와 슈미트 박사가 한민족과 훈족의 직접적인 연계 증거로 제시한 것은 훈족의 이동 경로에서 발견된 유물이다.

① 훈족의 이동 경로에서 발견되는 청동솥이 가야지방에서 발견된다.
② 훈족은 청동솥을 말의 잔등에 싣고 다녔는데 신라에서도 말에 청동솥을 싣고 있는 기마인물상(국보 91호)이 발견되었다.
③ 청동솥에서 발견되는 문양이 한국의 머리 장식에서도 많이 보인다.

훈족이 서방으로 진출할 때 알타이 지역을 지나 아랄 해와 카르파티아 산맥 분지의 초원지대를 지났는데 이들 경로에서 유명한 대 소형 청동솥(동복(銅 , cup cauldron))들이 30여 개나 발견됐다. 대형 동복은 높이가 50 ∼60센티미터이고 무게는 50킬로그램이나 넘는다. 원래 동복은 유목 부족장들에게 바쳐진 것으로 그들이 정화의식(Purification rite)을 행할 때 고기를 삼는데 쓰는 대형 화분 형태의 동제용기이다.

동복은 유목민들의 상징적인 유물로도 간주되는데 스키타이식과 흉노식(훈식) 두 가지가 있다. 스키타이식 동복은 반구형 기체에 둥근 손잡이가 한 쌍 달려있고 손잡이에 작은 돌기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 흉노식 동복은 심발형(深鉢形) 기체에 곧은 직사각형의 손잡이가 한 쌍 달려 있고 손잡이에는 작은 돌기가 있는 것과 복잡하고 화려한 장식이 있는 것으로 구분된다.

흉노식 동복은 내몽골의 오르도스 지방에서 다수 발굴되었고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로 추정되는 몽골의 노인 울라(Noin Ula) 고분군을 비롯한 북몽골 지대, 알타이 산맥의 데레츠고에, 볼가 강 유역의 오도가와 그 지류인 가마 강 유역의 페룸, 서우랄의 보로쿠타 지방, 남러시아 돈 강 유역의 노보체르카스크, 헝가리 등에서 발견되었고 중국의 북부초원지대에서도 보이며 길림지역의 老河深(일부 학자들은 부여의 문화라고 추정) 유적과 한반도에서는 북한에서도 발견된 예가 있다.

베렌트와 슈미트는 흉노식 동복이 경주 김해의 가야시대 고분인 대성동유적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에 주목했다. 우리 나라의 남부지역에서 발견된 동복은 이들 지역이 북방계 유목문화의 요소가 상당히 흡수되어 있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해준다는 증거로서 자주 거론되던 유물이다.

두 번째로 지적된 것은 훈족들이 동복을 말 엉덩이 위에 싣고 다녔는데 신라의 경주 근교(경상북도 경주시 노동동 금령총에서 1924년에 출토된 기마인물형 토기(높이 23.5센티미터, 길이 21.5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국보 91호))에서 발견된 2개의 점토상에도 기마상 주인공이 동복을 말 뒤에 싣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서 금관과 함께 대표적 상징품으로 가장 잘 알려진 기마인물상 토기는 일반적으로 술이나 물 등 액체를 담는 용도로 설명되고 있다. 가야지방의 무덤에서 술잔 등 수많은 일상용 토기가 발견되므로 기마인물형 토기도 같은 용도라는 것이다. 반면에 김원룡은 말 궁둥이에 있는 것은 솥이 아니라 '등잔형 주입구'라고 설명했고 김태식은 신라 지증왕 3년(502) 순장제도를 금지하자 사람과 말을 순장하는 대신에 명기(名器)를 부장한 증거라고 적었다.

반면에 존 카터 코벨은 기마인물상 토기에 대해 매우 주목할 만한 의견을 제시했다. 그녀는 상류층 사람들의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들로 술잔과 함께 말 모양 토기들이 많이 발견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기마인물형 토기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말 앞가슴에 나 있는 주둥이의 위치이다. 말 잔등에 있는 배구로 액체를 부어 넣은 후 말 앞가슴의 주둥이로 액체가 흘러나오게 된다. 말의 꼬리가 부자연스런 각도로 뻗쳐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부분이 손잡이로 조정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코벨은 시베리아의 무속에서 말을 제물로 바쳐 죽인 뒤 의례의 하나로 그 피를 받아 마시는 과정이 있다고 적었다.

코벨은 가야지방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동부여에서 내려온 민족이며 이들이 신라와 합류되었다고 추정했다. 말 모양의 토기가 가야와 신라 두 지역에서 함께 발견되는 이유를 기마민족의 유입으로 설명하면서 토기 내부를 화학적으로 분석한다면 피의 흔적이 발견될지 모른다고도 추측했다. 특이한 형태의 기마인물상 토기의 용도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술병 등의 역할이 아니라 고대의 무속 의례에서 희생된 말의 피를 담는 그릇이라는 뜻은 여하튼 가야 지역에 살고 있던 한민족이 훈족과 친연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암시한다.

베렌트와 슈미트 박사는 더불어 이들 솥이 말 탄 사람의 등에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기마상 주인공의 복장과 삼각모가 전형적인 유목민이 사용하는 형식이며 안장과 등자는 훈족이 사용하던 유물과 똑같다고 주장했다.

훈족은 당시에 유럽에 알려지지 않았던 등자를 도입했다. 등자는 장시간 말을 탔을 때 생기는 다리의 피로감을 예방하는 발을 받쳐 주는 가죽 밴드나 발주머니로 안장에 부착했다. 기수는 안장에 단단하게 앉아 다리를 고정시키는 등자를 이용하여 달리면서 사방으로 화살을 쏠 수 있는 등 오랫동안 정주민의 기마대를 능가하는 잇점을 유목민들에게 주었다.

일반적으로 등자는 훈족이 발명했다고 여겨지나(漢代 중국의 부조에서는 등자가 보이지 않음) 사르마타이 인이 발명했다는 설도 있다.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는 등자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6세기 아바르 족이 처음으로 사용했다. 한국에서는 고구려의 유적으로 중국 길림성 집안시의 칠성산 96호, 만보정 78호 무덤의 등자가 가장 빠른 시기인데 이들의 시기를 2∼3세기 경으로 추정한다.

독일인들이 세 번 째로 제시한 증거도 동복에 있는 문양이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문양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동복의 아구리에는 도형화된 나뭇잎들이 섬세하게 세공되어 있다. 훈족의 귀족부인의 장식 머리띠와 관에도 비슷한 장식이 있으며 한국에서 발견되는 금관에서 나무 형상(出字形 장식)과 녹각 형상(鹿角形 장식)이 주요 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북방의 유목민들은 우주 개념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존재로 순록사슴과 우주수목을 차용했다. 고대 신화에 의하면 우주 순록의 황금뿔 때문에 해가 빛난다고 하며 순록사슴은 그 존재와 함께 햇빛의 운행과정을 나타낸다. 경주에서 발견되는 금관에 해신의 금빛 비상을 사슴뿔 형상으로 정교하게 옮겨 놓았다. 이러한 방식은 527년 새로운 불교신화가 그 자리를 대체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또한 금관에 나타나는 나무는 평범한 자연의 나무가 아니라 영험한 힘을 가진 나무로 우주수목이라고 불린다. 지표에서 제일 높은 우주의 한 중심에 버티고 선 구조물로서 고대인들이 상상했던 하늘 즉 天를 향해 상징적으로 뻗어 오른 나무를 말한다. 코벨은 이들 나무가 북방지역에서 많이 자라는 흰자작나무라고 설명한다. 남한 지역은 북방지역과는 기후가 달라 흰자작나무가 잘 자라지 않는데도 흰자작나무를 금관의 중요요소로 장식했다는 것은 제조자들이 북방지역에 살았던 흔적이라고 인식했다.


2. 훈족의 특성

독일인이 훈족의 원류로 한민족을 직접 거론하면서 제시한 증거들은 훈족의 원류가 한민족일 가능성을 약간이나마 열어주기는 했지만 이들의 설명만 갖고 훈족과 한민족의 친연성을 거론하기에는 미흡한 감이 있다. 더구나 어떤 지역에서 특정 유물이 많이 발견되므로 그 지역의 특성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다른 지역에서도 발견된다고 하여 두 민족이 동일한 문화권에 있었다고 말한다면 대단한 속단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인들의 가설이 매우 매력적으로 들리는데 그들은 부연하여 훈족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① 훈족의 후예들이 몽골리안 반점을 갖고 있다.
② 훈족은 특이한 활과 화살을 사용했다.
③ 훈족은 편두(偏頭)를 갖고 있다.

독일인들이 이들 세 가지 특성을 거론하면서 한민족과의 친연성을 연계해서 거론한 것은 아니지만 훈족의 원류가 누구인지를 비교적 분명하게 추정할 수 있게 한다.

1) 몽골리안 반점

베렌트와 슈미트 박사는 프랑스의 샹파뉴의 인근에 있는 쿠르티솔 마을의 주민들이 잘 알려진 몽골리안 반점을 갖고 있다는데 주목했다. 이 마을은 훈족이 갈리아 지역(프랑스)을 공격한 후 그들의 근거지인 헝가리의 판노니아로 돌아가지 못한 채 정착한 훈족에 의해 세워진 마을로 알려져 있으며 이들 주민들도 자신들의 조상이 훈족이라고 믿는다.

프랑스의 랑스 지역도 동양인의 모습을 갖고 있는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이들도 자신들의 선조가 훈족이라고 말한다. 몽골리안 반점은 꼬리뼈 높이 엉덩이에 나타나는 색소 변색으로 유전학적으로 몽골계통의 민족 특히 한국 사람의 경우 거의 전부 나타난다. 몽골리안 반점이 한국인들에게만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훈족의 후예들에게도 몽골리안 반점이 나타나는 것을 볼 때 큰 틀에서 한국인과 훈족간에 인종적으로 친연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2) 훈족이 사용한 복각궁

훈족의 활이 얼마나 유럽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는지는 로마인 시도니우스 아폴리나스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훈의 화살은 빗나가는 법이 없으니, 훈이 활을 겨냥하는 자를 애도하노라. 그의 활은 죽음을 가져온다."

활은 모양에 따라 직궁(直弓)과 만궁(彎弓)으로 구분한다. 직궁은 탄력이 좋은 나무를 적당한 길이로 잘라 양쪽에 줄을 걸어 약간 휘게 만든 단순한 형태의 활이다. 이에 비해 만궁은 활줄을 걸치지 않을 경우 보통 활이 휘는 방향과는 반대로 뒤집어져 휘게 된다. 활줄을 풀었을 때 만궁이 뒤집어져 휘는 각도가 활에 따라 다른데 한국의 전통 활인 '국궁'은 그 휘는 정도가 만궁 중에서도 가장 심하며 활줄을 풀렀을 때 거의 완전한 원을 이룬다.

이탈리아의 아퀼레이아에 있는 크리프타 아프레시 교회의 프레스코화는 훈족이 추격하는 로마 기병을 안장에 앉은 채 몸을 돌려 화살을 쏘는 장면이 있다. 이 활의 그림을 보면 고구려 고분벽화인 무용총에서 말을 타고 동물들을 사냥하는 무사들의 활과 똑같다. 이 활은 만궁 중에서도 예맥각궁(복합궁)과 형태가 매우 흡사하며 동 시대의 漢족이나 키타이 족 등이 사용하던 활과는 분명하게 구분된다.

이런 만궁을 누가 처음으로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지 않지만 한국인의 조상인 예맥인으로 추정한다. 고대 중국인들이 濊貊 인을 부르는 호칭인 동이(東夷)의 '夷'자는 '큰 대(大)'자에 '활 궁(弓)'자를 연결한 것으로 '사람이 활을 쏘는 모습'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활에 관한 한 고대 한국인들의 기술은 대단하여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나오는 활과 화살에 대한 기록만 해도 다음과 같다.

① 夫餘 : 활·화살·칼·창을 병기로 삼고 집집마다 갑옷과 휴대 가능한 무기를 갖추고 있다.
② 高句麗 : 고구려의 다른 성이 작은 물에 의지하여 나라를 세우고 그 이름을 소수맥이라 하였다. 소수맥은 좋은 활을 생산했는데, 이른바 '맥궁(貊弓)'이란 것이 그것이다.
③  婁 : 그곳 사람들은 활쏘기에 뛰어나 사람을 쏠 때에는 모두 눈을 적중시킨다. 화살에는 독이 칠해져 있기 때문에 적중되면 모두 죽는다.
④ 濊 : 낙랑의 檀弓이라 불리는 활은 이 땅에서 생산 된다.
⑤ 辰韓 : 진한은 국명을 방(邦)이라 하고 궁(弓)을 호(狐)라 부른다.

{秦書}에 의하면 '고구려는 부견이 즉위하자 사신을 파견하여 낙랑단궁을 보냈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낙랑단궁은 맥궁과 같은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중국인들이 낙랑이라고 할 때의 낙랑은 한사군 중의 낙랑군이 있던 곳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를 가리킨다.
유럽인들도 복합궁을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실패했다는 기록도 있다. R. P. 엘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내가 아는 한 백인 중에서 복합궁을 만드는데 성공한 사람은 없다. 모두들 '황인종이 만드는데 백인종이 만들지 못할리 없다'라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고대 동양인들이 만든 활과 겨룰 만한 것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화살도 훈족과 한민족과의 친연성을 맺어주는데 기여한다. 전쟁에서 화살은 소모품으로 대량으로 발사할 경우 적군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화살 100개 중에서 99개를 피한다고 해도 한 개가 몸에 맞으면 전투력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고대인들은 화살의 궤도를 정확하게 유지하면서도 파괴력을 높이도록 화살의 용도와 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길이와 무게의 화살을 제작했다. 고구려의 무용총 고분벽화에 그려진 화살촉은 도끼날 화살촉이다.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나 신라, 가야의 화살촉 역시 끝이 넓적하거나 둘 혹은 셋으로 나누어진 화살촉을 사용했다. 이 화살촉은 화살이 날아가면서 회전하기 때문에 꽂히는 순간의 충격이 매우 크다. 현대의 총은 총열에 강선을 넣어 총알이 회전하는 것과 같은데 훈족도 동일한 개념의 화살을 사용했다.

3) 편두를 갖고 있는 신라의 지배자

김해 예안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4세기대의 목곽묘에서 모두 10例의 변형두개골이 보고되었고 KBS-TV가 2001년에 기획한 '몽골리안 루트'에서는 예안리 85호와 99호 고분에서 발견된 전형적인 변형두개골을 소개했다. 이들 두개골은 前頭部의 後方傾斜와 扁平性, 頭頂結節部의 현저한 側方突出에 의한 短頭性, 頭高의 낮음, 下顎枝의 後方傾斜를 갖고 있었다. 이들 두개골의 머리둘레는 50센티미터 정도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한국인의 정상적인 머리둘레인 57.5센티미터보다 매우 작다.

이렇게 인공변형된 두개골을 '편두(扁頭, cranial deformation)'라고 부르며 외압에 의해서 두개골이 변형된 것으로 추정한다. 편두에 관한 기록은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도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긴 돌로 머리를 눌러두어 평평한 머리를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진한(辰韓) 사람들의 머리는 모두 편두이다.'

편두 습속은 진한(辰韓) 사람만이 아니라 변한(弁韓) 사람에게도 해당된다고 추정한다. 편두 풍습에 대해 坪井九馬三은 고대 인도에서 행해진 구습으로 설명했지만 일반적으로 유목민(코카서스 북부, 터키 등)에게 많이 나타나는 풍습으로 인정한다. 고조선 지역에서도 일찍부터 편두 풍속이 있었다. {滿洲源流考} 제2권에는 만주지방에는 옛날부터 편두하는 관습이 있어 어린 아이 때부터 기구(臥具)를 통하여 머리통 모양을 인위적으로 편두형으로 만들었다고 적었다. 특히 동이족으로 알려진 大汶口文化유적의 인골을 분석한 결과 후두부를 인공적으로 변형시킨 편두형 모습도 발견됐다. 이것은 동이족 들이 편두 습속을 중국인과는 달리 매우 오래 전부터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훈족과의 전투를 체험한 클레르몽의 주교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는 '그들의 갓난아이의 얼굴은 전율을 느끼게 했다. 두 콧구멍이 얼굴의 평면 위로 자라서는 안 되었다. 부드러운 콧구멍은 투구의 면갑에 맞추기 위해 끈 하나로 휘감겨 있었다(투구가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코를 납작하게 눌렀다는 뜻). 엄마는 전쟁을 위해 이런 방법으로 아들을 기형으로 만들었다.'고 적었다.

그런데 학자들은 몽고에서부터 프랑스까지 훈족의 이동경로에서 발견된 묘를 발굴하면서 훈족의 머리가 정상적인 형태가 아니라는 특별한 사실을 발견했다. 훈족은 관자놀이와 이마가 특이하게 눌려있고 고랑 같은 주름이 머리에 죽 둘러 있었고 머리통이 길게 늘어나 있었다. 소위 두개골이 변형되어 있는 편두였다.

마르칙 박사는 뼈가 부드럽고 형태를 갖추지 않은 어린 시절에 아이의 이마 부분에 넓적한 물건을 놓고 두개골 주위를 둘러서 묶으면 이마는 완전하게 납작하게 변형되며 머리는 위쪽으로 뾰죽한 형태로 변형된다고 설명했다.

편두는 훈족들이 하층계급과 상류 계급의 신분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사용했다고 추정한다. 프랑스의 칼바도스 지방의 셍-마텡-드-훤트네이에서 발견된 5세기 중반(아틸라 치세)의 두 명의 귀족 여자의 무덤에서 수많은 장신구들과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두 여자 모두 편두였다.

훈족은 점령한 지역의 귀족 자식들의 머리를 강제적으로 변형시켰는데 이들 여자들은 훈족에 복속했던 알란족으로 추정된다. 게르만 지역의 튀링겐과 오덴발트에서도 훈족의 편두가 발견되는 것을 볼 때 아틸라 제국에서 편두는 보편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훈족에게는 편두가 발견되지만 흉노에서는 편두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기록도 있는 것을 볼 때 흉노가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흉노에서 갈라져 서유럽을 공격한 훈족의 지배 집단은 편두 습속을 갖고 있었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놀라운 것은 신라의 금령총에서 발견된 기마인물형 토기의 주인공도 편두임을 확연히 보여준다. 기마인물상의 주인공이 세계적으로 특이한 변형인골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한반도 남쪽과 유라시아 대륙의 끝에서 편두가 발견된다는 것은 이들 민족 간에 강력한 유관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이와 같이 머리가 작은 편두인골은 우리 나라에서 출토되는 금관의 크기에 대한 의문점도 해결해 주었다. 국내에서 출토된 금관 중 천마총 금관이 직경 20센티미터, 금관총 금관이 19센티미터, 서봉총 금관 18.4, 황남대총 금관 17, 금령총 금관 16.4, 호암미술관 소장 금동관 16.1, 복천동 금관 15.9센티미터로 중간 값은 황남대총 금관의 17센티미터로 둘레는 53.4센티미터이다. 이 크기는 12살짜리 남자 어린아이의 머리둘레에 해당한다.

우리나라에서 유난히 금관이 많이 발견되는 이유로 존 카터 코벨은 금관이 샤머니즘의 흔적, 즉 무속 예술품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시베리아와 신라 문화에는 유사성이 많은데 신라 금관(신라는 금이 많아 보물의 나라라고 일본이 흠모했으며 콜럼버스가 금이 많은 지팡구(일본)를 발견하려고 출발한 지팡구는 한국의 의미한다는 설도 있음)을 그 중요한 증거로 제시했다.

코벨이 금관을 무속신앙의 흔적으로 보는 이유는 금관에서 나는 경이로운 소리가 악을 물리치는 힘의 상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금관은 작은 움직임에도 떨리며 음을 내는데 그것이 음악적 기능을 지녀야 했던 무속인들의 무악을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금환과 곡옥이 달려 있는 경우 금관을 쓴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옥과 금판으로 된 수백 개의 장식이 미세한 움직임과 반짝이는 빛을 내면서 떨리는 소리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사실은 또 한편으로 무속의 의미뿐만 아니라 의례를 행할 때 왕권을 과시하거나 왕으로서의 영험함을 드러내는 상징물로 금관을 사용했다는 뜻도 된다. 금관을 쓰고 있는 왕을 보는 백성들은 외경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코벨의 가설을 비롯한 금관에 대한 기존의 학설은 금관의 크기가 너무 작다는데 문제점이 제기됐다. 우선 왕이 어린 나이에 사망했을 경우를 추측할 수 있는데 5∼6세기의 신라왕 가운데 10세 전후의 어린 나이로 사망한 왕은 없다. 그러므로 이들 작은 금관은 요절한 왕족이 사용한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했다(신라에서 금관은 왕과 왕비뿐만 아니라 왕의 일족이면 어린아이도 착용했다는 뜻).

여하튼 금관이 너무 작기 때문에 실제 머리에 쓰고 활동하기에는 부적합한데다가 구조도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어른이 사용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므로 금관은 생존시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 아니라 사망자의 무덤에 넣기 위한 부장품으로 특별히 제작한 것이라는 해석도 제기되었다. 물론 특수한 걸이나 끈을 사용할 경우 머리에 쓰고 활동하거나 무속의 한 형태로 춤을 출 수도 있다는 반론이 있지만 금관의 크기가 작다는 것은 고고학자들이 풀 수 없는 큰 숙제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최치원이 진성여왕 7년(893) 신라의 불교전통을 정리한 봉암사 지증대사비문(智證大師碑文)에 '편두거매금지존'이라는 글로 신라왕의 두상에 관해 적었다. 이는 신라의 법흥왕이 만년에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나온 말이다. 거매금, 거서간, 마립간, 이사금은 통칭으로 신라의 지배자를 의미하므로 최치원이 적은 글은 편두란 신라 임금의 존귀함을 뜻한다. 금관을 사용하던 사람들이 편두라면 즉 신라의 임금을 비롯한 지배자들이 편두였다면 금관이 작은 이유가 충분히 설명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김해 예안리에서 발견된 편두 유골만 놓고 본다면 새로운 문제점이 제기된다. 김해 예안리에서 발견된 편두는 남자는 없으며 여성의 30퍼센트에서만 발견되기 때문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진·변한의 특징적인 습속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으나 주민 전체가 편두를 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가야 지역에서 편두는 4세기 전엽의 일정한 시기에 한해서 시행되었다고 추정하는데 부산대학교 정징원 교수는 하층민에게서 편두가 보이는 것은 당시 미인의 기준이거나 특별한 습속일지 모른다고 추정했으며 언론인 안태용은 신분을 구별하기 위한 방편일지도 모른다고 추정했다. 반면에 신라 법흥왕이 편두였고 금관의 크기를 참조하면 편두는 신라 지배자 계급의 풍속으로 추정할 수도 있으나 진·변한에서 일정기간동안 적용된 습속이 신라의 지배자 급에 어떤 과정을 거쳐서 도입되었는지는 앞으로 보다 연구할 과제로 보인다.


Ⅴ. 북방계 집단의 한반도 유입

가야와 신라 지역에서 훈족과의 친연성을 증빙할 수 있는 유물들이 발견되었다고는 하지만 한민족과 훈족이 정황적으로 친연성을 가질 수 있게 된 요인이 무엇인가도 풀어야 할 관건 중에 하나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 의하면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는 늦어도 1세기에서 3세기 후반까지 마한·진한·변한이라는 삼한이 존재하고 있었다. 마한은 50여국으로,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국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 마한은 그 구성원의 하나인 백제국에 의해 통합되어 백제왕국이 되었고, 진한도 그 구성원의 하나인 사로국(斯盧國)에 의해 통합되어 신라로 발전했다. 그러나 변한은 어느 세력에 의해서도 통일왕국을 이루지 못한 채 가야(伽倻)사회로 전환되어 개별적으로 존재하다가 신라에 의해 각개 격파된다.

{삼국지}<위지동이전>과 {양서}, {삼국사기} 에서 삼한에 관련되는 자료 중 주목을 끄는 부분이 있다.

{삼국지}<위지동이전> : 진한은 옛날의 진국(辰國)으로 마한의 동쪽에 있다. 그 나라 노인들이 대대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자신들은 옛날에 도망쳐 온 사람들의 자손으로 진나라의 부역을 피하여 한나라로 왔을 때 마한이 그 동쪽 국경지방의 땅을 떼어 주었다고 한다.

{양서} : 신라는 선조가 진한종족이어서 진한은 진한(秦韓)이라고 부른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진(秦)의 유망인이 전쟁을 피해서 마한에 살자, 마한에서는 동쪽 국경 지방을 떼어서 살게 하였다. 그들이 진인이기 때문에 이름을 진한이라 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들의 언어와 물건 이름이 중국과 비슷하였다.

{삼국사기} : (혁거세왕이) 호공을 마한에 보내 방문했다.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하기를 진한과 변한 두 한은 나의 속국인데 근래에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사대의 예가 이와 같을 수가 있는가. 이보다 앞서 중국인이 진나라에서 일어난 난리로 동쪽으로 온 자가 많았는데 대다수가 마한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진한과 잡거했다. 이에 이르러 진한은 점차 강성하게 되었기 때문에 마한이 이를 꺼려 책망했다.

위 자료에 의하면 중국 지역에서 한반도로 이동한 유망민 집단은 두 번에 걸쳤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진시황제가 요동을 점령하고 장성을 쌓게되자 이에 동원된 사람들이 노역을 피하여 한반도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둘째 유망민 집단은 '연, 제, 조'의 망명자를 포함한 백성들로 요동지역이나 산동 지역의 주민들이 중심을 이루었다고 본다. 이들이 어떤 민족이었는가는 연인(燕人) 衛滿이 상투를 틀고 오랑캐 옷(夷服)을 입고 망명했다는 것을 볼 때 연·제·조의 지배 하에 있었던 동이족이 주류를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반면에 기원전 109년 한 무제가 한반도 북방 지역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을 때 패배한 일단의 부여족(夫餘族)이 남하하여 김해에서 가야를 건설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이들 유망민들 중에서 먼저 이동해 온 집단은 마한의 동쪽에 정착하여 진한을 성립시켰고, 그 뒤에 이동해온 집단도 마한의 동쪽에 자리하여 진한과 병존하다가 변한이 성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삼국지}<위지동이전>에 의할 경우 진한과 마한의 언어가 서로 달랐다는 점이다. 이것은 진한과 마한의 구성 요인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암시한다.

신라인이 진(秦)의 유망인이라는 설은 {삼국지}(진한)이후 {수서(隨書)}로 연결되고 {삼국사기}의 고조선 유민설로 이어진다. 특히 고조선 유민설은 진한(秦漢)교체기의 민족이동 방향이나 고조선계의 청동검, 동과(銅戈), 동모(銅牟) 등이 경주 일대에서 출토됨으로 고조선계통의 청동·철기문화와 漢문화의 혼입 상태를 확인할 수 있으며 조양동·황성동 등지에서 발굴된 토광목곽분(土壙木槨墳)의 예로 보아 위만조선시기 북방문화의 이주를 인정하고 있다.

한편 가야의 경우 건국 시기에 많은 (설)들이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김해 駕洛國의 건국을 변한(가야) 성립의 중요 기점으로 잡는 점에서는 견해가 일치하지만 시기에 대해서는 기원전 2세기 이전부터 기원 후 3세기 중엽까지 무려 5세기의 차이를 보인다. 김태식은 가야의 개국을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 거론한 서기 42년을 상한으로 삼고, {魏志}<漢傳>의 景初年間 즉 3세기 전반을 하한으로 삼을 수 있다고 적었다. 고고학적 발굴을 근거로 한 경우 단위소국으로서의 가야의 개국기년은 대체로 2세기 전반 무렵으로 추정한다.

주목할 만한 점은 흉노와 동호에서 갈라진, 선비 오환 등 북방 기마민족들의 흥망이 가야 지역의 건립시기와 유사하다는 점이다. 흉노는 한무제와 혈투를 벌인 후 기원 89년경의 3차 서천에 이르기까지 여러 갈래로 분지(分枝)되었다. 선비와 오환도 중국 동북지역에서 부침을 계속했는데 이 시기는 한반도에서 북방 기마민족의 유입으로 추정하고 있는 가야가 성립되는 시기와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여하튼 3세기 중엽 이후에 마한은 백제로, 진한은 신라로 통합되어 가며 변한은 3세기 이후부터 가야라는 명칭으로 나온다. 이는 3세기 말 또는 4세기 초에 변한이 가야사회로 전환된 것을 의미하지만 가야사는 일국사가 아니라 다양한 여러 국들을 내부에 포괄하고 있다는 점이 신라나 백제와 다르다. 그러므로 가야라 함은 이들 속의 김해·동래 지역 등을 포함한 금관가야, 고령 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 등 맹주국을 포함하여 모든 가야국(任那加羅도 포함)을 의미한다. 대체로 가야영역은 오늘날 경상북도 상주군, 성주군, 밀양군을 포괄한다.

변한 사회가 가야사회로 전환되었다는 것은 변한이 마한의 종속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사회를 성립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변한이 마한과의 관계를 청산할 수 있던 것은 역사적인 전통이 마한과 달랐고 둘째로는 낙동강과 황강 등을 매개로 하는 자연 지리적 환경 차이로 서로의 간격이 벌어졌기 때문으로 본다.

한편 영남지역에서 출토된 금관가야의 유물들도 주목거리다. 영남지역에서 만곡종장판복발주·찰갑·종장판판갑으로 구성된 갑주는 북방유목민족의 승마용 갑주로서 전형적인 북방문화를 대표하는데 중국 동북지역과 고구려에도 실물 또는 벽화의 묘사로 남아있다. 종장판판갑은 원래 영남지역에서만 발견되는 것으로 원형은 재지의 피갑 또는 목갑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철재로 전환하게 된 것은 중국 동북지역과 고구려 지역에서 유행하던 찰갑의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들 유적은 4세기 중반기 이후의 것으로 후대로 갈수록 갑주를 부장하는 계층이 많아진다. 특히 경상도 지역 가야고분에서는 순장된 사람의 흔적이 있으며 무덤 전실에 말들도 묻혀 있는 것을 볼 때 기마 유목민들의 매장풍습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4세기 이후의 분묘에서 출토된 비( )는 대부분 승마용으로 보는데 이 승마용 마구류는 북방 유목민족에 그 계통이 있다. 대성동·복천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4세기대의 표비는 중국 동북지방과 관련있는 대표적인 북방문물이고 등자도 이 표비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북방문물로 이해한다.

반면에 가락국기에 의하면 9干이 있으며 경상도 출토 유물 중에는 기마부족이 사용하는 마구가 고구려벽화의 실물과 유사하므로 이를 高句麗干의 유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삼국사기}에 의하면 금관가야의 경우 이질금=이사금(爾叱今=尼師今)이란 칭호가 왕의 동생과 왕비의 아버지에게 주어지고 있었는데 고구려에서도 왕족과 전 왕족의 유력자에게 대가(大加)라는 칭호를 주었다. 가야 지방에 고구려의 영향이 생각보다 높았다는 증거로도 예시되며 고구려가 정주했다는 주장도 있다.

반면에 신라의 김씨 왕실이 시베리아의 기마민족에서 유래했다는 견해도 제기된다. 시베리아의 유목민족이 급속하게 남부로 이동하여 4세기 전반에 경주지역에 출현하여 먼저 정착해 있던 세력을 정복했다는 것이다. 특히 선비의 한 부족인 모용황이 고구려의 고국원왕 12년(342)에 고구려를 침공하여 환도성이 함락되는등 혈투를 벌일 때 모용황의 군대 중에서 일부가 한반도 동해안을 통해 신라로 들어가 왕위를 창탈했고 이들이 가야 지역을 점령했다는 설도 있다.

백제의 부여씨 왕실도 기마의 풍습을 지닌 부여족이 4세기 중반에 한반도 중부로 이동하여 한강 유역의 토착세력을 정복하여 성립했다는 견해도 있다. 한편 금관가야 건국에 관한 여러 학설 중에는 흉노가 도래했다는 설도 있다.

'흉노족의 휴도왕(休屠王)은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의 후예로서 김인(金人)을 만들어 제천하니 한의 무제가 퇴후의 영작과 금부처로 제사지냈다고 김씨를 賜姓했다. 그의 아들 일일제의 증손이 후한 말에 새로운 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이다. 왕망이 유수에게 25년에 패망하고 그의 족당이 유랑하여 다니다가 17년만에 김해에 도착하여 가락국을 세우니 42년이다.'

일반적으로 북방아시아 기원설 또는 북방 기마민족에 의한 가야 정복설이 여러 가지 유물과 문헌을 근거로 제기되고 있으나 고고학적 측면에서 신중론을 펼치는 견해도 적지 않다.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은 북방기마민족의 전형적인 무덤으로 인정되는데 현재까지 가장 오래된 적석목곽분이 황남동 109호분이고 그것의 내부구조가 재래의 토광목곽묘와 본격적인 대형 적석목곽분인 황남대총의 과도기적인 형태를 보이므로 적어도 이보다 앞서는 완전한 북방외래계 대형 적석목곽분의 존재가 입증되어야만 북방 기마민족의 도래설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북방 유이민이 신라지역에 이주하자 이들과의 친교를 배경으로 하여 세력을 급성장시킨 토착 신라 왕족들이 적석목곽분을 채택했을 가능성도 제시된다.

훈족과 한민족이 친연성이 있다는 것은 흉노의 흥망성쇠에 따라 한민족과 연관성이 있는 흉노의 지배집단이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들 중 한 집단은 4차례에 걸쳐 서천한 흉노 중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때마침 닥친 한파의 영향으로 이들이 훈이라는 이름으로 서유럽을 공격하는데 참가한다. 반면에 또 다른 한 갈래는 한반도 남쪽에 동천하여 정착했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한반도 남쪽인 가야와 신라에서 발견된 유물만을 근거로 훈족과의 친연성을 제기한 베렌트와 슈미트 박사의 주장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Ⅵ. 흉노(훈)와 투르크인의 비교

훈(흉노)과 한민족과의 친연성을 유추할 수 있는 증거가 여러 면에서 발견되지만 훈족의 지배집단이 한민족이라는 설명에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서유럽을 공략한 훈족이 흉노라고 하더라도 이 당시의 흉노 지배집단은 동양계(몽골계)가 아닌 서양계의 투르크 민족이라는 추정도 많기 때문이다.

과거의 많은 학자들이 흉노가 몽골과 퉁구스 및 기타 북방 민족들의 혼합체이기는 하지만 흉노가 사용한 일부 언어를 복원할 경우 대다수가 투르크적이고 특히 그들의 정치적인 지배집단이 투르크에 속한다고 추정했다. 반면에 시라토리 쿠라키치를 비롯한 학자들은 흉노의 언어적인 연구에 의하면 흉노가 투르크 계열이 아니라 몽골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흉노가 투르크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는데는 동조했다.

몽골의 노인 울라(Noin Ula) 고분군 제25호에서 출토된 흉노의 인물 자수화도 투르크 계열로 추정하는 증거로 제시된다. 이 인물 자수화에서는 주인공이 검고 숱이 많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빗고 있는데 이마가 넓으며 눈이 크고 짙은 콧수염을 갖고 있다. 특이한 것은 안구는 검은색 실로, 동공은 남색 실로 수놓았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몽골 족은 동공이 검고 턱수염이 없으며 눈이 작은 반면에 투르크 족은 동공이 남색이고 턱수염이 많으며 눈이 큰 것이 특징이므로 자수화의 인물은 투르크 계열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1955∼1957년에 섬서성 장안현 예서향 객성장(客省庄) 양주고분군에서 발견된 흉노 고분의 동제 부조(浮彫)에는 콧대가 높고 가랑이가 긴 바지를 입은 장발의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의 허리를 잡고 씨름을 하는 장면이 있다. 투르크인들은 눈이 깊고 코가 높으며 장발인데 반해 몽골인들은 코가 낮고 단발이므로 외형적인 특징으로 보아 무덤의 주인공인 흉노인이 투르크 족에 속한다고 발표되기도 했다.

동양인(몽골 등)과 서양인 계열의 투르크 족과는 곧바로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다르다. 그러므로 훈족과 한민족이 여러 면에서 친연성이 있다고 인정되더라도 인종적인 면에서 다르다고 분류된다면(최근 유전학자들은 인종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지만) 두 민족 간에 친연성이 있다는 주장은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서유럽을 침공한 훈족이 수많은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훈족의 주력부대는 훈족을 포함하여 훈족에 의해 정복당한 알란족과 동고트족을 비롯한 게르만 민족 등 무려 45개 민족에 달하므로 훈족에 유럽 계통으로 볼 수 있는 민족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충분히 수긍가는 일이다.

훈족에 많은 민족들이 복속되어 있었다는 것은 훈족이 서유럽을 공격할 때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던 의문도 해소시켜준다. 451년, 훈족의 영웅 아틸라가 서로마의 장군 아에티우스와 살롱에서 대제국의 운명을 걸고 혈투를 벌렸을 때 헝가리의 본거지에서 발진한 장병의 수는 20여만 명이었다. 서로마의 아에티우스도 20여만 대군으로 응전하여 쌍방 모두 15∼16만 명의 전사자를 낸 후 무승부로 끝냈는데 이 당시의 훈족만으로 구성된 군대는 8000∼10,000명으로 추정한다.

이는 훈족이 훈족 자체의 병력보다 수십 배가 많은 병력을 수시로 동원했다는 것을 뜻하는데 학자들은 훈족이 다른 민족들을 원활히 동원할 수 있었던 비결은 자신에게 복속하는 민족을 적어도 '준 훈족'으로 우대하여 차별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훈족은 투르크 계열의 제족은 물론 서아시아 각지의 무슬림 세력과 게르만 민족도 훈족에 귀부(귀화)하면 거의 대부분을 '준 훈족'으로 우대하면서 이들 민족들을 '친구' 또는 '동반자'로 불렀다.

실제로 서로마의 아에티우스 장군과 격전을 치룰 때 아틸라에 복속한 민족들은 한 부족도 탈주하지 않았지만 아에티우스 장군 휘하에 들어있던 많은 민족들은 아에티우스의 진영에서 이탈했다.

그런데 그리스의 사가 조시모스는 훈족이 '피부색이 어둡고, 눈 대신 어두운 구멍이 두 개 있고, 코는 납작하고 뺨에 상처가 난 얼굴은 형태 없는 돌덩이였다'고 썼다. 여기에서 눈 대신 어두운 구멍이 두 개 있다는 것(눈이 작다는 뜻)과 코가 납작하다는 것은 동양인의 얼굴임이 틀림없다.

클레르몽의 주교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도 이교도인 훈족에 대해 특히 심한 거부감을 보이면서 그들의 특징을 적었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들은 혐오감을 준다. 이들은 낮은(모양이 없고 평평하게 자란) 코, 튀어나온 광대뼈, 얼굴에 있는 두 개의 눈은 눈꺼풀이 조그맣게 열려있어 광선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이지만 그들의 꿰뚫어보는 눈은 훨씬 더 먼 곳을 볼 수 있다."

아폴리나리스가 설명한 훈족도 서양인의 얼굴이 아니라 동양인의 얼굴이 틀림없다.
가장 주목할만한 자료로 449년 동로마 사절단의 일원으로 아틸라의 궁정에 머물었던 그리스인 프리스코스가(현재는 일부만 전수되고 있는 {비잔티움사} 7권을 저술) 아틸라가 전형적인 훈의 모습인 '몸집이 작은 남자, 가슴은 넓고 머리는 컸으며 눈은 가늘게 찢어졌고 코는 납작했으며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숱이 적은 턱수염을 갖고 있다.'고 적었다. 아틸라가 투르크 계가 아니라 몽골 계임을 확연히 보여준다. 또한 프리스코스는 보충적으로 아틸가가 몽골로이드 타입의 여러 특징들을 두루 갖추었다고 적었다.

사마천은 흉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신체는 작지만 땅땅한 편이고, 머리는 아주 크고 둥글며, 안면은 넓고 광대뼈가 튀어 나왔고, 콧구멍이 넓으며 콧수염이 아주 텁수룩하고 아울러 콧수염은 많지만 뺨에 난 뻣뻣한 털로 된 수염을 제외하고는 턱수염이 없다. 긴 귀에 구멍을 뚫어 둥근 모양의 귀고리를 달고 있다. 그들의 머리 모양은 머리카락을 자르고 겨우 정수리에 있는 머리털만 남긴다. 눈썹은 짙고 눈동자는 불타듯이 강렬하며 눈은 찢어진 모양이다.'

여기에서 광대뼈가 튀어 나왔고, 눈동자가 불타듯이 강렬하고 눈이 찢어진 모양이라는 것은 동양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後越의 太子 孫珍(흉노)이 漢人의 侍中인 崔約에게 眼疾의 치료법을 질문했는데 평소에 손진을 경멸하던 최약이 溺中則愈라 답했다. 손진이 "눈을 어떻게 물에다 잠기게 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자 최약은 "당신의 눈은 움푹 들어가서 바로 물에 잠길 수 있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듣고 손진이 화가 나서 최약 父子를 주살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흉노로 불린 손진은 눈이 들어가고 코가 높았다는 것을 뜻하므로 중국인과도 구별되고 몽골인과도 외모가 구별된다. 흉노를 묘사하면서 사마천은 동양인, 최약은 서양인의 모습으로 적었는데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흉노가 수많은 부족들로 구성되었다고 추정한다면 흉노의 모습이 완연히 다른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광대한 영토를 영유하고 있는 흉노 제국 안에서 사마천이 설명한 동양인과 최약이 설명한 서방계 모습의 민족이 함께 공존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원래 훈족을 투르크 족으로 예단한 것은 동로마 황제가 훈의 지도자들에게 '투르크 왕자들'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는 투르크가 특정 민족의 이름으로 굳어졌지만 고대 알타이어에서 '투르크'는 '강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투르크인들이 하나의 종족으로 부상하는 시기는 훈의 유럽 진출로부터 200∼300년 후인 6세기부터의 일이며 그 장소도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출발한다. 또한 투르크인들이 건설한 오스만 터키의 후손인 터키인들과 한국인은 명백하게 구분된다. 터키 인들의 체격은 유럽 인, 특히 고대 로마인에 비해 결코 작은 편이 아니며, 코 역시 유럽 인들만큼이나 높고 눈도 작지 않다. 이탈리아 아퀼레이아에 그려진 벽화의 경우 훈족이 투르크 계열이라면 활이 달라야 한다는 것도 훈족이 동방계라는 것을 암시한다. 투르크 계열의 활은 벽화 그림과는 달리 활의 끝이 바깥쪽으로 휘어져 있기 때문이다.


Ⅶ. 맺음말

세계 역사상 가장 크게 중상 당해왔고 오해받은 민족 가운데 하나로 게르만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을 든다. 그들은 도나우 강 동쪽을 나란히 흐르면서 헝가리를 북에서 남으로 관통하는 티소 강 중류 근방에 근거지를 차리고 있었다. 이곳에 정착했던 훈족이 375년에 볼가강을 건너 서쪽에 있는 동고트족을 공격하자 동고트족은 서고트족을 공격했고 서고트족은 다뉴브 강을 건너 로마제국의 국경을 넘는다. 이 이동이 결국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촉발시켜 서유럽에 살고 있던 여러 민족들이 연쇄적으로 이동했고 현재의 유럽인들이 지키고 있는 국경선들이 거의 확정된다.

훈족의 여파로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던 서로마 제국은 60만 명이나 되는 제국군이 상비군으로 있었음에도 병사 수에서 훨씬 열세한 야만 게르만 민족에게 멸망한다. 유럽인들이 자존심 상해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으로 야만족 게르만 인을 몰아낸 장본인이 게르만족보다 더 야만족으로 여겨지는 훈족인데 그들은 아시아인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유럽 인들은 아시아의 야만족인 훈족의 공격을 혐오하지만 유럽의 역사가 훈족에 의해 다시 써졌다는 것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으므로 대부분의 학자들이 다소 어정쩡한 태도를 보인다. 훈족이 유럽을 침공하여 제국을 세우기는 했지만 그들의 유럽 지배는 겨우 100년(375∼469년)에 지나지 않았다고 자위하는 것이다.

필자는 훈족의 이동로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유물과 역사적 사실들을 분석하여 훈족의 지배집단의 일부가 한민족일 가능성을 알아보았다.

375년에 서유럽을 강타했던 훈과 한민족의 친연성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우선 역사시대로 들어 온 이후(기원전 3세기)의 흉노에 대해 검토했다. 동호를 격파하여 강성해진 흉노는 중국과 혈투를 벌이며 한나라 초기에 한의 조공도 받기까지 했으나 결국 중국에 패하고 기원전 57년경부터 90년경까지 3차에 걸친 서천을 단행한다. 이후 몽골 중앙 지역은 부침이 심하여 계속 주인들이 바뀌어 가다가 350년경에 일어난 유목민의 대학살 와중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북흉노의 일파가 4차로 서천하며 이들이 이미 서천한 흉노들과 서방에서 합류(또는 압박)한다.

흉노가 3차 서천으로 유럽 동부까지 진출한 후 약 200년 간 주변국들과 커다란 마찰 없이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유지하다가 375년에 훈이라는 이름으로 서유럽을 공격한 이유로는 대체로 4차 흉노의 서천에 의한 인구 증가와 설상가상으로 닥친 기후의 변화로 거주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추정한다. 또한 흉노를 포함한 북방계 민족이 중국과의 혈투를 벌이는 장기간(약 600년)의 와중에서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이동했다는 동천(설)을 중점적으로 거론했다.

훈, 흉노, 한민족의 친연성을 찾는다는 것은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퍼즐을 하나하나 맞추는 것과 다름없다. 고대사를 다루는 퍼즐을 완벽하게 맞춘다는 것은 원래 불가능한 일이지만 375년, 서유럽을 공격하여 새로운 유럽의 질서를 만들게 한 훈족의 지배민족이 한민족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한민족으로서 매우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까지 한민족은 조그마한 한반도 내에서 외침만 받았고 세계사에서 미미한 역할만 했다고 알려졌는데 한민족이 세계사의 가장 중요한 한 장면을 장식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과거사 규명에 도전한다면 보다 많은 새로운 정보가 축적될 것으로 기대된다.
출처 : 韓民族! 옛 제국을 찾아서...
글쓴이 : 주인장~~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