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01 동이문명관련·동북공정

마한금마군의 실체 추적-백제,신라의 강역은 도대체 어디였는가

monocrop 2007. 3. 3. 21:30

: 구 산

http://www.history21.org

2007-01-25 11:43:04

 

▲ 요동반도 금주와 대련지방 위성지도

 

 



 

 

사진설명:

요동반도의 남쪽에 펼쳐진 금주와 대련지방을 신금(新金)으로 표시한 위성지도입니다.

그런데 이곳이 백제시대의 금주 금마군 이었다고 하는 기록이 만주원류고에서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만주원류고는 그 출전을 송나라때 기록인 통고(通考)에서 참고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유명한 관광지로 변한 대련과 장산군도 사이에 금석탄(金石灘)이란 해변 관광지가 있고 이곳의 바다를 김해(金海)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지도에서 신금의 좌측으로 보이는 풍산산성은 과거의 외패산성으로  후한의 광무제가 서기 44년 낙랑군의 동부도위 산하에 있던 영동7현을 수복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와 빼앗은 성이라는 기록도 <<금사>>열전의 주석을 통해서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주석에는 벽류하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현재의 풍산산성은 벽류하의 원류에서 분수되어 서남쪽으로 흐르는 지류가 있습니다
.



다음글은 단군님이 배달국 싸이트에 올린 글입니다. 장산군도가 살수의 남쪽에 위치한 삼한의 발흥지었다는 근거가 될것으로 확신하고 빌려왔습니다. 검토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도 전라북도의 익산 땅이 금마 마한 땅 이라고 믿고 연구 서적들을 양산하고 계시는 학자님들께 묻습니다. 언제까지 거짓허구를 울거 잡수시렵니까
?


<
요동반도에 마한의 이름이 있었는데 그 증거가 하나 나왔다
.
[
금사]에서 요동반도 서남부의 반란을 토평하는데 반란군이 도망간 곳이 동남부로서 지금 장해현의 [마한도]였다. 그 옆에 왕가도로서 추적이 되었으니 현재 마한도의 이름은 석성도라고 한다
.

/
新校本金史/列傳/卷八十 列傳第十八/斜卯阿里

- 1799 -
.契丹、奚人聚舟千艘,將入于海.阿里以二十七舟邀之,中流矢,臥舟中,中夜始蘇.敵船已入王家島,
夜取海路追及之,敵走險以拒,阿里以騎兵邀擊,再中流矢,力戰不退,竟破之,盡獲其舟.於是,蘇、復州、婆速路皆平.#於闢离密罕水上,勦殺幾盡,水之不流.蒲离古胡什吉水、馬韓島凡十餘戰,破數十萬#尾,人易子而食.夜,縋二人出,告急於阿里.阿里赴之,內外合擊之,破其至十萬.旁近女直皆保於太尉胡沙家,築壘固.敵圍之數重,守者糧芻俱盡,牛馬相食其#  蘇、復州叛,

,복주蘇、復州 소주와 복주(현재 같은 지명
),
蒲离古胡什吉水(벽류하, 고대 비류하. 온조 형 비류태자가 있던 곳. 벽류하에 있는 [위패산성]은 후한 광무제의 군대가 쳐들어온 곳이고, 비류는 쫓겨나서 온조가 먼저 있던 평양 서북 미추성으로 옮겨갔다
.
마한도馬韓島; 현재 이름은 석성도石城島

왕가도王家島; 현재 이름도 왕가도

그래서 최치원은 고구려가 마한이라고 한 것이다
.
대동강의 마한은 기자의 금마마한이었고 삼국사기백제전에서는 진마라고 하였다.>  

 

 

위의 기록에서 송나라의 통고에, 고려는 백제의 금주 금마군을 남경으로 불렀다고 하고, 주를 달았는데, <그 땅 백제의 동남 변경의 전부를 신라가 점유하였다가 후에 발해와 거란으로 귀속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백제의 동남 변경이 익산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이고 백제의 영토는 대련의 서북쪽으로도 있었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카오스 (2007-01-25 19:25:08)

"그 땅(백제의 금주 금마군, 즉 고려의 남경?) 백제의 동남 변경의 전부를 신라가 점유하였다가 후에 발해와 거란으로 귀속되었다"라고 송나라 통고에 있다면,....익산까지 발해의 강역이었을 리가 없을 것이므로 '백제의 동남 변경이 익산이 될 수 없다"는 구산님의 결론은 거의 결판이 난 것 같군요... 결국, [마한(금마)]을 전북 익산으로 가지고 온 것은 거의 만화가 되어버린 셈이겠네요..... 좀 이를지는 모르겠지만,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대련과 장산군도 사이에 금석탄(金石灘)이란 해변 관광지가 있고 이곳의 바다를 김해(金海)라고 부르고 있다."고 하시니 참으로 놀랍네요...어쩌면,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김수로왕 설화의 구지봉도 그곳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네요...지금의 경남 김해에 왜 김()자와 바다 해()자가 들어가는지 궁금했었는데... 뭔가 풀려나가는 듯 합니다. 개연성이 있음직하군요...

[ 그런데 혹시, (金海=김수로의金+ 지명海) 또는 (金海=제철집단金+지명海)일 뿐인데 또 엉뚱한 망상을 한다고 지적하시는 분이 있을지 몰라서 하는 말인데... 글쎄요. 고대 역사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답이 나오는 경우가 있으니...좀 두고 보아야 할 듯.]

 

구산 (2007-01-25 23:48:44)

카오스님 반갑습니다. 대련지방에는 금()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의외로 많은 편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한번도 금마군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었습니다. 이 곳 말고도 김해라는 지명은 다른 곳에도 있습니다. 차근 차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서기 668년 안동도호부가 평양에 설치된 이후 당나라는 신라와 맞붙으면서 만주땅에서 쫓겨났습니다. 밀려나면서도 그들은 신라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웅악성 지역에 백제의 부흥군을 밀어넣기도 하였고, 대련지역에 고구려의 부흥군을 투입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래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중간참고]

안동도호부 [安東都護府]

668
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당이 그 옛 땅을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
.

중국 당나라는 초기의 영토 확장에 따라 변경지역에 도호부를 설치하고 이민족 지배를 관장했는데, 안동(安東안북(安北선우(單于안서(安西안남(安南북정(北庭) 6개가 있었다. 안동도호부는 고구려 멸망 후 평양에 설치되었고 설인귀(薛仁貴)를 안동도호로 임명하여 2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지키며 이들 지역을 총괄하게 했다. 또한 고구려 유민의 저항을 방지하기 위해 반당적인 호민(豪民) 2 8,000여 호()를 당으로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
.

그러나 검모잠(劍牟岑)이 이끄는 고구려의 부흥군이 평양 부근에서 크게 활동하자 669년 당은 그 주둔군을 요동성(遼東城:지금의 랴오양[遼陽])으로 옮겼다. 그후 675년 매초성(買肖城) 싸움, 이듬해의 기벌포(伎伐浦) 해전에서 당군이 신라군에게 대패하자, 당은 안동도호부를 요동성으로 옮겼다. 677년에 당은 보장왕을 요동도독조선왕(遼東都督朝鮮王)으로 봉하여, 앞서 당으로 데려갔던 주민들과 함께 고구려 유민을 요동에 안집하게 했다.

 

이때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男生)도 안동도호부의 관리로 파견되었다. 이해에 안동도호부는 다시 신성(新城:지금의 푸순[撫順] 근처)으로 옮겨져 요동지역에 대한 지배보다는 보장왕을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한 듯하다. 그러나 보장왕은 말갈(靺鞨)과 통하여 반당운동을 꾀해 다시 당으로 소환되어갔고, 이에 가담한 고구려인들도 함께 많이 끌려갔다. 그뒤 698년 발해의 건국과 함께 안동도호부는 폐지되었고, 699년에는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高德武)가 요동도독으로 파견되어 고구려 유민을 통치했다.

704~705년경에 도호부는 복구되었는데 714년 평주(平州), 743년에는 요동으로 옮겼다.

당시의 임무는 말갈국을 견제하는 것으로 바뀌었으며 점차 그 실권도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가 차지하게 되었다. 도호부는 안사()의 난을 거치면서 758년경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출전 엠파시스)

 

………………………………………………………………………………………………………….

풍산산성과 관련하여,

윗글 <<금사>>열전의 주석중에 벽류하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
蒲离古胡什吉水(벽류하, 고대 비류하. 온조 형 비류태자가 있던 곳
.]

***
비류백제는 벽류하의 입해구에 있는 광록도(廣鹿島)에서 건국하였다는 구산의 주장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입니다.

이 벽류하를 청나라때는 필류하(畢流河)라고 쓰고 '삐루허'로 읽고 있습니다.

글자가 어떻게 변하였던 부르는 이름은 비류입니다.

청나라는 옛날의 역사적인 흔적들을 지우기 위해서 무척이나 애를 쓴 흔적들이 보이기는 하지만 엉뚱한 곳에서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입니다. . 청 그들이 만주땅의 진실을 감추기 위해서 어떻게 기록을 조작하였는지 다음에 글을 소개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어서 <<금사>> 열전에 소개된 원문의 내용을 대충 소개드립니다
.

.契丹、奚人聚舟千艘,將入于海.阿里以二十七舟邀之,中流矢,臥舟中,中夜始蘇.敵船已入王家島,
夜取海路追及之,敵走險以拒,阿里以騎兵邀擊,再中流矢,力戰不退,竟破之,盡獲其舟.於是,蘇、復州、婆速路皆平.#於闢离密罕水上,勦殺幾盡,水之不流.蒲离古胡什吉水、馬韓島凡十餘戰,破數十萬#尾,人易子而食.夜,縋二人出,告急於阿里.阿里赴之,內外合擊之,破其至十萬.旁近女直皆保於太尉胡沙家,築壘固.敵圍之數重,守者糧芻俱盡,牛馬相食其#蘇、復州叛,

소주, 복주에서 반란이 일어나 그 수가 10여 만명에 이르렀다. 근방에 있던 여직의 보어태위 호사가는 돌로 공고한 축을 쌓아 지켰는데 난민들이 겹겹이 둘러쌓고 지키자 성내의 지키는 자들은 식량이 떨어져 소와 말의 꼬리를 잘라먹고 사람들은 서로 자식을 바꿔 인육을 먹었다. 밤에 두사람이 탈출하여 아리에 급히 고하자 아리가 달려와 성의 안팍에서 공격하여 포위를 풀었다.

벽금밀한수상에서 접전하여 많은 인명을 죽이자 물이 막혀 흐르지 않았다.

또 벽류하와 마한도에서 십여전을 치뤄 수십만을 격파하였다. 거란과 해인들이 천척의 배를 모아 장수가 인솔하여 바다로 들어와 아리는 27척의 배를 요격하고 가운대로 쏜살같이 빠져 배위에 누어있다가 밤이 되자 다시 일어나 적선이 있는 왕가도로 들어갔다. 밤을 택하여 해로로 추격하자 적들은 험한 곳으로 달려가 막았다. 이에 아리는 기병을 풀어 요격하고 다시 쏜살같이 적진을 통과하여 싸움에 물러섬이 없었다. 이로서 결국 적들을 격파하고 적선들을 모두 노획하였다. 이후 소주, 복주,파속로가 모두 평정을 되찾았다. (번역에 애로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완벽하지가 못합니다. "벽금밀한수"란 물이 어디를 말하는지는 알수 없습니다.)

 

소주와 복주의 위치는 위의 지도상에서 좌측에 있는 와방점시(瓦房店市)주변입니다.

 

다음은 남당 박창화 선생이 저술한 <<우리나라 강역고>>에서 주장하는 만주 요동지역을 설명한 기록입니다. 편집및 교열, 번역에 참가한 인원만도 박사급만 10여명에 이르고 발행 된 지가 이미 2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여론화 되지 못하고 외면당한체 묻혀 있습니다.

내용 자체가 전부가 옳은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배일에 쌓였던 많은 것을 밝혀 놓았습니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대형 연구소들이 분발할 차례입니다. 아까운 예산만 축내고, 진실은폐와 호도하는데 급급한다면 지켜보고 있는 밝은 눈들이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
명대(明代) 요동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우리나라 강역고


1.
명대의 요동지역은 옛날 마한의 땅이며, 백제의 땅이며, 신라의 패강진(浿江鎭)과 한산주(漢山州)이며, 고려의 패서도(浿潟)와 서북면(西北面)이었다.

2.
북쪽에 있는 압록강을 남쪽으로 옮기었다
.

3.
고려의 해양도(海陽道). 삭방도(朔方道). 패서도(浿潟)를 빼앗고 이씨조선을 백두산 이남으로 축출하였다
.

4.
만주에 있던 전 지역을 백두산 이남으로 옮기게 하고, 흑룡강 주위의 여진족을 불러들여 만주에 있던 고구려 지역에서 자유로이 번식케 하였다
.

5.
여진족은 광개토왕 비를 묻었으며, 윤관의 구성비(九城碑)를 파괴하여 고구려와 고려의 옛 유적을 없애고 지명을 변경하여 옛날의 영토를 알 수 없게 하였다
.

6.
요동을 요하의 동쪽이라 정의하였다.


7.
이씨조선의 만주 통행 길은 안동현을 경유하여 요양과 영평을 거쳐 북경에 이르는 한가지 길만 열어놓고 그 외에는 전부 봉쇄하여, 만주의 사정을 알지 못하게 하고, 고구려 지역을 상실하게 하는 동시에 고구려의 옛 영역을 영원히 버리도록 노력하였다.

 

금마저(金馬渚)는 고구려가 망한 뒤 부흥운동을 일으킨 안승과 검모잠 일당이 안치되었던 곳입니다. 애시당초 금마저는 육지에 있는 전북의 익산땅이 될 수 없었습니다.

지명만 금마라면 모를까 '()'자가 붙는 까닭을 무시하고 왜곡에만 급급하였기 때문입니다

''자는 '물가저'자 이지만 그 뜻은 강물의 유사지역에 생긴 델타지역(삼각주)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섬과 같은 뜻입니다. 지금의 낙동강 하류에 펼쳐진 김해 비행장부근의 지명을 대저면(大渚面)이라고 하는 것도 그러한 까닭입니다.

그러니까 육지의 금마저란 있을 수 없는 지명이었습니다

하였튼 금마저란 대련 인근에 있는 장산군도의 부속섬은 틀림이 없는데 어느 섬 인지는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중간참고]

안승(安勝)에 대하여 (기존 자료)

안승(安勝
)
생몰년 미상. 고구려 왕족. 보덕국왕(報德國王안순(安舜)이라고도 한다. 연정토(淵淨土)의 아들, 또는 보장왕의 서자, 혹은 외손자라고도 하며 고구려 멸망 후 서해의 사야도(史冶島)에 피신하여 있었는데, 670년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킨 검모잠(劒牟岑)에 의하여 추대되어 한성(漢城:지금의 황해도 재령 부근-재검토필요)에서 왕으로 즉위하였다
.

소형(小兄) 다식(多式)을 신라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여 문무왕은 그를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이어 당군의 압박을 받게 되자, 이에 대처하는 방안을 둘러싸고 검모잠과 대립하게 되어 그를 죽인 뒤 무리를 이끌고 신라로 투항하였다
.

신라는 안승 집단을 금마저(金馬渚:지금의 익산-재검토필요)에 안치하였다
.
674
(문무왕 14)보덕국왕에 봉해졌으며 680년에는 문무왕의 질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 683년 경주로 초청되어 소판(蘇判)의 관등과 김씨(金氏)성을 부여받고, 수도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의 근거지인 보덕국과 격리된 채 신라 중앙귀족이 되었다
.

보덕국은 684년 그 주민이 반란을 기도하다가 진압되어 소멸하였다.

 

중간참고]

검모잠(劍牟岑)에 대하여 (기존자료)

검모잠(劍牟岑
)
생몰년 미상. 고구려 부흥운동의 지도자
.
고구려 수림성(水臨城)출신으로 관등은 대형(大兄)이다
.
고구려가 멸망하자 670년 유민 등을 규합해서 당나라의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이고 궁모성(窮牟城)에서 패수(浿水:대동강)남쪽으로 옮겨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한성(漢城:지금의 황해도 재령)에 자리를 잡고 서해 사야도(史冶島)에 가 있던 귀족 안승(安勝)을 맞아 왕으로 추대하는 한편, 소형(小兄) 다식(多式) 등을 신라로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였다
.
(
출전:네이버
)

분석>
***
검모잠의 출신지는 역시 물가에 임해 있던 수림성(水臨城)인데 부흥군들을 모아 당나라의 관속과 승려들을 죽이고 궁모성(窮牟城)에서 패수가 있는 대동강의 남쪽으로 옮겨 부흥 운동을 이르켰다고 하였습니다. 이곳의 '궁모성'이란 개모성(蓋牟성)으로 보이고 패수와 대동강은 개주의 니하를 왜곡 한것으로 보입니다. 안승이 자리를 잡았다고 하는 한성(漢城)은 황해도의 재령이 아니라 지금의 평양으로 추정이 됩니다
.

또한 안승은 683년 경주로 초청되어 소판(蘇判)의 관등과 김씨(金氏)성을 부여받고, 수도에 거주하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때의 경주는 현재의 경주가 아니고 압록강 북쪽에 있던 봉황성 이라야 맞습니다. 이유는 앞장에서 많은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그의 근거지인 보덕국과 격리 된것이 아닙니다. 한성(평양)이나 금마저는 봉황성(경주)에서 수 백리에 불과 하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三國史記>> <新羅本紀> 文武王) 10년조

「안승(安勝)을 고구려왕(高句麗王)으로 봉()하였다. 그 책문은 다음과 같다. 함형 원년(咸亨 元年) 경오 가을 8 1일 신축에 신라왕(新羅王)은 고구려(高句麗) 사자(使者) 안승(安勝)에게 책명(冊名)을 전달하노라. ()의 태조(太祖) 중모왕(中牟王)은 일찍이 북산(北山)에서 덕을 쌓고 남해(南海)에서 공()을 세워 위풍(威風)이 청구(靑丘)에 떨치고 인교(仁敎)는 현도(玄菟)에 덮이었다. 그 뒤 대대 자손이 서로 계승(繼承)하여 본손,지손(本孫, 支孫)이 끊이지 아니하여 개척(開拓)한 땅은 천리(千里)나 되고 역사는 8백년이 가까웠다
.

封安勝爲高句麗王 其冊曰 "維咸亨元年 歲次 庚午 秋 八月 一日 辛丑 新羅王致命高句麗嗣子安勝公太祖中牟王 積德北山 立功南海 威風振於靑丘 仁敎被於玄菟 子孫相繼 本支不絶 開地千里 年將八百」

 

***문무왕이 내린 책서의 내용중에 [()의 태조(太祖) 중모왕(中牟王)은 일찍이 북산(北山)에서 덕을 쌓고 남해(南海)에서 공()을 세워 위풍(威風)이 청구(靑丘)에 떨치고...]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남해는 어디를 지칭한 말일까요.

그의 의붓아들 비류와 온조가 졸본을 떠나서 진번에서 가까운 근해의 벽지섬에 백제국을 건국한 기록을 보시겠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三國史記 百濟本紀)

[
一云 始祖沸流王 其父優台 北扶餘王解扶婁庶孫 母召西奴 卒本人延陀勃之女 始歸于優台 生子二人 長曰沸流 次曰溫祚 優台死 寡居于卒本 後 朱蒙不容於扶餘以前漢建昭二年 春 二月 南奔至卒本 立都號高句麗 娶召西奴爲妃 其於開基創業 頗有內助 故朱蒙寵接之特厚 待沸流等如己子 及朱蒙在扶餘所生禮氏子孺留來 立之爲太子以至嗣位焉 於是 沸流謂弟溫祚曰 始大王避扶餘之難 逃歸至此 我母氏傾家財 助成邦業 其勸勞多矣 及大王厭世 國家屬於孺留 吾等徒在此 鬱鬱如0贅 不如奉母氏 南遊卜地 別立國都 遂與弟率黨類 渡浿帶二水 至彌鄒忽以居之」
]

「일설에는 백제의 시조는 비류왕(沸流王)이다. 그 아버지 우태(優台)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庶孫)이요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니 졸본(卒本) 연타발( 延陀勃)의 딸이다. 처음 우태(優台)에게 시집 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沸流)요 다음은 온조(溫祚). 우태가 죽으매 졸본에서 홀로 살았다. 그 뒤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 건소(建昭) 2년 봄 2월에 남으로 달아나 졸본에 도착하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를 데려다가 왕비로 삼았다
.

소서노가 주몽의 기업을 창건함에 대하여 자못 내조가 있었기 때문에 주몽의 사랑함과 대접이 특히 후하여 비류등을 대하는 것도 자기의 소생자나 같았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적에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리(孺留)가 찾아오자 태자로 삼아 왕위를 계승하게 하니 비류는 아우 온조에게 이르기를 처음 대왕이 부여의 난리를 피하여 도망해서 이곳에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재를 기울여 나라의 창업을 도왔으니, 그 공로는 이만 저만이 아니다

지금 대왕이 세상을 싫어하여 국가가 유리에게 돌아가게 되었으니 우리가 부질없이 이곳에 있어 무사마귀 모양으로 답답하게 지낼진대 어머니를 모시고 南으로 가서 터를 잡고 따로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드디어 아우와 더불어 도당을 거느리고 패,(浿, ) 두 물을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다 한다.

***여기에서 소서노 일행은 졸본을 떠나 남쪽으로 패수(浿水)를 건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개주의 남쪽으로 니하를 건넌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남쪽으로 통하는 가장 가까운 벽류하를 따라 내려오다 바닷가에 이른것입니다. 그런데 우태는 여기서 다시 바다를 건너지 않고 해변에 떨어져 살아습니다.

다음은 <<한단고기>> <고구려국본기>의 좀더 상세한 기록입니다. 온조가 형님인 비류와 작별하고 10인의 따르는 종자들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와 대방 고지인 광록도에 온조 백제인 십제를 건국하는 장면입니다.

[
연타발은 졸본 사람이다. 남북의 갈사를 오가면서 재물을 모아 부를 이루어 거만금에 이르렀다. 은밀하게 주몽을 도와 창업입도의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로 옮겨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를 하게 되더니 고주몽성제가 북옥저를 칠 때에 양곡 5,000석을 바쳤다. 서울을 눌현으로 옮길 때는 앞질러 자납을 원하여 유망민을 초무하고 왕사를 권하여 공을 세웠으니 좌원에 봉작을 받았다. 나이 80에 죽으니 바로 다물 34년 병인 3월이다.

 

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찌기 말하기를 '만약 적자인 유리가 오거든 마땅히 봉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다.'라고 했다. 소서노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는데 기묘년 3월에 패 대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 번의 사이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 만에 밭을 사고 장원을 두고 부를 쌓아 몇 만금이라하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북쪽은 대수에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에 임했다. 반 천리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몽제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제는 몹시 기뻐하시며 이를 장려하여 소서노를 어하라라고 책봉했다. 13년 임인에 주몽제가 돌아가셨다. 태자 비류가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

이에 마여등은 온조에게 말하기를 '신등이 듣기는 마한의 쇠퇴는 이미 드러난 일이요 가서 도읍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라고 했다. 온 조가 '좋다'고 승낙하니 곧 배를 짜서 바다를 건너 처음 마한의 미 추골에 이르렀다. 앞으로 나아가 사방을 살펴보았지만 텅 비어서 사람 사는 곳이 없었다. 한참 만에 한산에 이르러서 부아 악에 올라 살만한 땅을 살펴보고는 마여 오간 등 열 명의 신하들이 말했다. '생각 컨데 이 하남의 땅은 북쪽이 한수를 끼고 동쪽은 크고 높은 산이요 남쪽은 기름진 평야가 열려 있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으니 이곳은 천험의 지리를 갖추고 있어 얻기 어려운 지세이옵니다
.

 

마땅히 도읍을 정 할 만한 곳입니다. 여기보다 나은 곳을 찾지 마시옵소서.' 온조는 열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하남의 위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라고 칭하니 백제라는 이름은 백사람이 건너 왔다는 뜻의 이름이다. 뒤에 비류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그의 땅을 가지고 귀순해 왔다. (위지성: 위례성)]

 

***그런데 이곳의 위치 기록을 놓고 일본의 한단고기 번역자인 가지마 노부루는 원문을 그대로 기록하지 않고 '서빈대해' '동빈대해'로 바꾸어 기록을 왜곡하였다는 강력한 항의문을 읽은바 있습니다. 이분은 현재 열심히 청소년들을 지도하시는 교육자이기 때문에 파급효과가 클 것으로 생각되어 몇 말씀 적습니다.

좀 더 온조백제의 초기 도읍지인 광록도를 알았다면 '서빈대해'(西濱大海) '동빈대해'(東濱大海)는 사실을 왜곡한것이 아니라 문장만 교치 한것이 됩니다. 예를 들어 동옥저의 위치를 말할때는 역시 '동빈대해'라는 말이 쓰이듯이 말입니다. 역시 이곳도 동옥저의 땅이었습니다. 혹자들은 이 '동빈대해'를 함경도의 동쪽바다로 착각하여 한국의 고대사에 막대한 누를 끼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삼국유사>><<三國遺事>> <마한조>에는 백제의 건국지를 아에 금마산(金馬山)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통설을 따른다면 도저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지요. 광록도는 산도 많습니다. 또 동쪽으로 한산(漢山)이 있으니까요. 이 설을 해석하기 위해서 평양성에 있는 마읍산까지 등장하고 최치원은 고구려를 마한이라고 부른 증거를 마읍산을 근거로 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장을 몰랐던 변명들에 불과하였습니다.

 

[昔馬韓先起 赫世勃興 於是 百濟開國於金馬山」]
옛날에 마한(馬韓)이 먼저 일어나고 혁거세(赫居世)가 발흥(勃興)하고 이에 백제(百濟)가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세웠다.

위에 기록된 한단고기 번역자 가지마노부루의 잘못된 기록중에 원문인 '동빈대해' '서빈대해로' 잘못기록하였다로 수정합니다. 그러니까 한단고기의 원문에는 '동빈대해'로 되어 있는데 노부루가 '서빈대해'로 잘못 기록 하였다는 뜻입니다.
벽류하를 살수로 불렀던 후한 광무제의 세력들이 금주만의 외패산성(지도에는 풍산산성)으로 침입한 사실을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살수 이남의 땅을 간접 지배하는 형식으로 다스렸다는것도 말씀드렸습니다. 이전 삼한의 세력들은 만주지역에 분포되어 있다가 전한의 침략에 의해서 밀려나 장산군도로 흩어져 살면서 실지를 회복할 기회를 노리다가 한나라의 세력이 약해지는 기회가 생기면 여차없이 치고 올라섰습니다. 그리고 한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는 드디어 고구려와 백제의 상륙이 시작되었지요. 근래에는 대련지역에서 한나라의 묘제형식을 갗춘 고분을 발굴 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그 사람들의 말을 전적으로 믿어야 할 것인지는 아직 확신을 할 수 는 없으나 일단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作 者: 李时间2006.04
  近日,在即
将开工的大土羊公路(大连湾土城子———洼)路基上,考古发现了大新的代古墓群,出土一座大迄今止保存最完整的代古墓。 47日考古人员开对这掘。目前,工作人经挖掘了5东汉时期的古墓,距今大1700~1800年,其中室墓、三座室墓。

令考古人
员惊喜的是,在5座墓中,他们发现了一座迄今止大保存最完好的穹墓。 墓面50平方米,室,拱形墓朝向南,墓底青砖,墓的四周典型的三造。墓的穹保存完好,据考古家王宇介出土座墓的穹顶丝坏。
  
们经过测量,砖长约40厘米,宽约20厘米,这么不上累却不陷落,古人究竟用什方法搭成了穹呢?也不得而知。
  工作人
员说,在座墓的后室里,他们发现两个头盖骨和几齿,另外有陶罐、陶等多件灰陶制品。

  据王宇估
里可能存在着更大的墓群。
文章出
-商晨

[
대련만토성자와 여순양두를 잇는 토양공로지역에서 고고학자들이 한대의 고무덤군을 발견했다고 함.
한개의 출토된 무덤은 아주 잘 보존된 한대의 무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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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7일 고고연구원들은 이곳에서 발굴을 시도하고있고 지금으로부터 1800년전의 동한시대의

무덤5좌를 발굴하였다.그중 하나는 쌍실묘이고 3좌는 단실형태이다.

대련에서 발굴된 고묘중에서는 아주 보존이 잘 된 것들이어서 연구인원들은 희색이 만연하다. 한대무덤은 큰 것이 약 50평방미터, 쌍실로서 문은 남쪽으로 나있고 묘의 바닥에는 푸른색의 바닥 벽돌로 장식되어 있고 벽묘의 4주위는 31견의 한의 구조이다. 발굴전문가 왕우가 소개하길 출토시 손상된 것이 없었다고 이야기하며 벽돌은 길이 40센티,폭은20센티로 벽돌로 둥그렇게 쌓은 천장이 어찌 무너지지 않도록 옛 사람들은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 전문가도 알지 못한다. 두개골과 몇개의 ? 치아 가 발굴되었으며 기타 자기병,자기물통등 다수의 회도제품이 발견되었다.왕우의 말에 의하면 여기서 많은 한대의 무덤이 발굴될 수 있을거라 한다.(출전 배달국싸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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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4 11월조에는 금마저 얘기가 하나 더있습니다.

[11
월에 안승의 족자(族子) 장군 대문(大文)이 금마저(金馬渚)에서 모반하다가 사실이 발각되어 복주(伏誅)하였다. 그 여당은 대문의 주사함을 보고 신라의 관리를 살해하고 읍을 차지하여 배반하므로, 왕이 장사를 명하여 그들을 치니 마주 싸워 당주(幢主) 핍실(逼實)이 전사하였다. 마침내 그 성을 함락하고 그 곳 사람들을 국남(國南)의 주군(州郡)으로 옮기고 그 곳을 금마군(金馬郡)이라 하였다. (그러니까 이때 금마저에서 금마군으로 바꾸었다는 뜻인듯. 필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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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mesis   2007. 03.03

 

우리가 배워왔고 알고 있는 우리의 역사가 도대체 실체와 근간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만, 이렇게 지낼 시간조차 주어진 것인지도 의문이 갑니다.

주변국서 이미 다 변조시키고 망실시킨 후에 또 뒷 북이나 치고 말로만 떠드는 잔치로 그치지는 않을 지,

조그만 댓구 하나가지고 정리하는데 허송세월 할 때 큰 틀은 이미 다 물건너 가고 난 뒤

그들이 세운 틀 가지고 그 위에서 왈가왈부하지나 않을 런지...

정말 일제의 잔재의 부리 깊음을 느끼게 합니다. 조선상고사가 나온지가 벌써 언제인데

더 크게 나아진 바가 없건만 단재사관을 극복해야 하네 뭐네 하는 얘기가 앞 뒤가 맞는 얘기인지...

나라 꼴같지 않은 구석들 참 많습니다만, 역사학계도 더 들여다 볼 필요도 없을 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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