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01 동이문명관련·동북공정

용산과 웅산은 건국신화발원지-요동반도

monocrop 2007. 3. 3. 21:05

: 구산

출처: http://www.history21.org

2007-02-26 16:22:49

 

현 요동반도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이 기록을 검토하면 요나라가 발해를 밀어내고 요동의 심장부라고 할수있는 요양을 점령하여 동경의 요양부를 설치하고 요양에 대한 내력을 설명하고 있네요. 그 내용의 대강의 뜻은 요양은 본래 조선의 땅인데 주나라 무왕때 기자를 석방시켜 조선에 봉한 땅이라고 하였습니다. 기자가 들어온 뒤 8조의 법을 제정하여 질서를 바로잡고 예의와 농상을 진작시켜 백성들이 잘살도록 하니, 도둑이 없어져서 밤에도 문을 닫지 않는 태평성대를 이룩하였다는 칭찬이 기록되어 있는것입니다.

기자 이후 40여세가 지나서  진번조선이 연나라에 점령 되자 연나라는 장새를 쌓고 관리를 두었고,(연장성을 양평까지 쌓았다는 뜻)  진나라때는 요동 외요를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한나라 초에 위만이 고공지에 살았고, 한나라 무제 원봉 3년에 조선을 정벌하고 진번. 임둔.낙랑. 현도등 4군을 두었었는데, 후한에 이르러 청주와 유주를 출입하면서 요동군과 현도군등 2군을 다스렸으나 연혁을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한 말에 공손도가 점령한 뒤로 그의 아들 강과 손자 연까지 자칭 연왕이라 부르고  건원 소한때 위나라에게 망했다고 하였습니다. 하략
.

이같은 기록을 되풀이하는 이유는 근간에 변하고 있는 만주에 대한 고대사의 시각 때문입니다.  

새학기부터 시작되는 교과서에 단군조선의 건국을 간접 표현에서 직접 표현으로 바꾸고 청동기 사용연대를 만주지방에서 1000년을 앞당겼습니다. 그렇다면 만주지방에서는 청동기의 사용역사가 2천여년이 되는것입니다. 이렇듯 천년의 역사를 수복하였으니 그 천년동안의 역사의 실체를 어떻게 메울것인지 학술적인 연구와 발표가 뒤따라야 하는 것은 상식일 것입니다. 당국에서는 그 동안 준비도 없이 이러한 발표가 있었다고 보지는 않지만 마침 필자도 요동반도의 역사를 검토하고 있던 중이었으므로 단군조선의 건국신화와 예맥조선의 근원이 어디서부터 일어난 것인지를 밝혀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두장의 사진을 올립니다. 앞에 사진은 역시 웅악산이 있는 지도이고, 뒤에 올리는 사진은 용산과 취리산 그리고 암연현이 있는 지도입니다. 두번째 사진에는 글씨를 넣지 않고 빈칸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독자님들께서 어떠한 답이 옳다고 생각하시는지 재미삼아 알아 보시기 바랍니다. 최초로 시도하는 만큼 비약이 심할수도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가설이니 혹시 좋으신 의견이 있으시면 참가하시기 바랍니다
.

***
두번째 사진은 크릭하여 판독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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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


東京道

東京遼陽府, 本朝鮮之地. 周武王釋箕子囚, 去之朝鮮, 因以封之. 作八條之
, 禮義, 富農桑, 外戶不閉, 人不. 傳四十餘世. 燕屬番、朝鮮, 始置吏、築障. 秦屬遼東外徼. 漢初, 燕人滿王故空地. 武帝元封三年, 定朝鮮為真番、臨屯、樂浪、玄菟四郡. 後漢出入、幽二州, 遼東、玄菟二郡, 沿革不常. 漢末公孫度所據, 傳子康;孫淵, 自稱燕王, 建元紹漢, 魏滅之. 하략.

 

 

구산 (2007-02-26 17:26:18)

다음은 건국신화의 진원지를 찾기 위하여 고조선의 구도인 왕검성이 있었다는 한나라때 요동군의 속현인 험독현을 찾아 보기로 합니다. 많은 연구자들이 요동군의 험독현을 낙랑군의 왕험성과 같은 곳으로 착각하고 있으나 낙랑군의 왕험성은 위만조선의 왕도이고, 요동군 험독현의 왕검성은 준왕(準王)의 구도(舊都)입니다. 신화의 진원지는 구도인 왕검성(王儉城)에서 찾는것이 순서라고 생각됨으로 험독현(險瀆縣)을 먼저 찾기로 합니다.

<<
요사>> <지리지
>

顯德府縣二十六

山陽 漢陽 白巖 霜巖 古卑離郡地 漢屬險瀆縣 幷隸盧州

현덕부현
26
산양 한양 백암 상암 은 옛 비리군 땅이다. 한나라때 험독현에 속했고, 노주에 병합되었다
.

***
그러니까 노주를 찾아야 합니다. 요나라때 노주가 어디였을까요


역시 같은 요사 지리지에서...
[
盧州, 玄德軍, 刺史. 本渤海杉盧郡, 故縣五 : 山陽、杉盧、漢陽、白巖、霜巖, 皆廢. 戶三百. 吊京一百三十裏. 兵事屬南女直湯河司. 統縣一 : 熊嶽縣. 西至海一十五裏, 傍海有熊嶽山. 來運城. 本熟女直地
.]

노주: 현덕군, 자사. 본 발해 삼노부이고, 현이 다섯이다. 산양. 삼노. 한양. 백암. 상암,등 인데 모두 폐하였다. 가구가 300이고, 동경에서 130리 떨어져 있다. 병사관계는 남여직의 탕하사이고 하나의 현으로 통일하였는데 웅악현이다. 서쪽으로 15리에 바다가 있고, 바닷가에 웅악산이 있는데 내운성이다. 이곳은 본래 숙여직땅이다
.

***
그러니까 험독현땅이 5개로 나뉘었다가 다시 웅악현으로 통일하였다는 대목까지 나왔습니다. 그리고 동경에서 130리 떨어져 5개현이 있었는데 모두 폐하고 새로 웅악현으로 통일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웅악현의 변화를 찾어봅니다.

 

이정도 만으로도 웅악성과 고조선의 왕검성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필자는 요동군의 험독현은 요하와 대능하가 합수되는 지점에 있었을 것이라는 가설과 지도를 제시한바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험독현이 요동만의 윤몰과 함께 바다로 사라졌다는 주장과 광령과 양평 그리고 험독현이 같이 윤몰되는 운명을 거쳤을 것이라는 주장을 한 바도 있습니다. 그 주장은 아직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음은 험독현이 광령현의 속현이었다는 <<대청일통지>> <지리지> 를 보시겠습니다.

[
險瀆舊城在廣寧縣東南
]

험독의 구성은 광령현의 동남쪽에 있다
.

***
그런데 지금의 광령은 대능하의 입해구에서 의무려산 쪽으로 조금 들어간 의무려산 서쪽 위치에 있습니다. 요동만 위치에 있던 평야가 윤몰된 후 지명이 이동된 것입니다. 윤몰전의 광령의 동남쪽이란 거의 개주와 마주 보이는 위치이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후에 험독현의 위치는 개주 남쪽으로 옮겨져서 웅악현으로 돌아 왔네요. 건국신화의 발원지인 웅악산 근처로 말입니다.

다음은 웅악현 주변으로 어떠한 지명들이 있었는지를 알아 보겠습니다.
<<
요사>> <지리지>에서 개주=봉황성의 내력을 소개드립니다
.

[
開州,
國軍, 節度. 本濊貌(濊貊, 필자), 高麗慶州, 渤海東京龍原府. 有宮殿. 都督慶、鹽、穆、賀因州事. 故縣六:曰龍原、永安、烏山、壁穀、熊山、白楊, 皆廢. 疊石, 周圍二十裏. 唐薛仁貴征高麗, 與其大將溫沙門戰熊山, 擒善射者於石城, 即此. 太祖平渤海, 徙其民於大部落, 城遂廢. 聖宗代高麗還, 周覽城基, 復加完葺.] 하략.

개주(開州)는 진국군과 절도가 있던곳이다. 본래는 예맥의 땅이었다. 고구려때 경주였고, 발해때는 동경 용원부였다. 궁전이 있었다. 경주. 염주. 목주. 하주를 관장하는 도독이 있었다. 옛날에 현이 여섯개로, 용원. 영안. 오산. 벽곡. 웅산. 백양등이 있었는데 모두 폐하고 이곳에 돌을 쌓아 성을 만들었는데 둘래가 20리였다
.
당나라 설인규가 고구려를 정벌할때 온사문장군과 웅산(熊山)에서 싸웠고, 많은 포로를 사로 잡은 곳이 바로 이 석성이다. 요나라 태조(907~925)가 발해를 평정하자, 성안에 살던 대부락민들이 떠나가고 성은 폐쇄되었다. 요나라 성종聖宗(982~1020)때 고려가 다시 수복하고 성채를 수리하여 기능을 회복시켰다.

 

***이 기록에서 우리들이 주시를 해야 될 부분이 있습니다. 본래 이곳이 예맥의 땅이었다는 기록입니다. 그 동안 고조선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수없이 갈등을 느꼈던 "예맥"에 대한 용어입니다. 왜 이곳에 예맥의 땅을 강조 한 것인지 우선 옥편을 찾아보기로 하였습니다. 강희 대옥편에는 濊=예로 읽을 때는 "물많을 예", =오랑캐 맥, 또는 맥이 맥(貊夷貊)자로 읽는데 여기서 맥이란 쇠를 먹는 곰 닮은 오랑캐[食鐵似熊夷]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맥이'는 곧 '웅이'라는 것입니다. 종합하여 풀이하면 물이 풍부한 바닷가에서 곰바위를 의지하여 살던 부족(민족)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주변이 개주(개평)와 근접함으로 국경을 이루던 마자수 즉 압록을 중심으로 퍼져 살던 말갈족과도 관계가 있을 것으로 짐작이 갑니다
.

또 하나의 관심은 이곳에 궁전이 있었다는 기록입니다. 그리고 발해인들이 살다가 요나라의 침략을 받아 대이동을 한 뒤 성은 폐쇄되었다가 다시 고려가 수복시키고 기능을 회복시켰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궁전에는 누가 살았을까요. 만약 이곳을 고려가 최초의 왕도로 삼았었다고 한다면 틀린 추정이 아닙니다. 이곳이 바로 고려의 최초의 왕도인 개주(開州)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대련을 남경으로 불렀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이러한 기록들이 보이지 않을까요.

 

다음은 고려사를 통하여 개경에 대해서 연구하신 명지대 신안식 교수의 논문 중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소개드립니다. 그러나 신안식 교수는 당시의 개경을 현재의 개성으로 알고 쓴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 논문을 쓰면서 신교수 자신도 분명치 못한 사료들에 대하여 의구심을 갖는 부분이 더러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위에서 요사를 빌어 소개 드린 대로 거란과의 충돌 사건이 연계되므로 당시 개주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독자들께서 심사 숙고하시는 판단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
개경의 성곽정비-황성을 중심으로 >
-
신 안 식 (명지대
)

머 리 말

동아시아에 위치한 우리 나라는 중국 또는 북방민족과 오랜 동안의 투쟁을 벌이면서 살아왔다. 때문에 이들과의 투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효과적인 방어수단을 강구하게 되었고, 그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 築城이었다. 특히 수도는 정치·교통·군사·상공업 등 국가 운영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규모 역시 都城으로서의 권위와 실제적인 기능성이 아울러 고려되었을 것이다
.

고려시대의 開京은 宮城皇城羅城의 성곽체제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이것에 관계된 자료는 매우 적어서 그 추정조차 어렵고, 따라서 연구성과 역시 적은 편이다. 이는 물론 성문의 명칭 정도만 소개된 자료의 한계성과 직접 발굴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경과 관련된 古地圖, 일제시기의 개경관련 지도와 고유섭의 답사기, 그리고 1980년대 북한의 연구성과 등이 그나마 개경의 윤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

이를 토대로 최근에 朴龍雲은 개경의 시설·구조·행정·기능 등 종합적인 이해를 시도했고, 細野涉은 나성 성문의 명칭과 위치 등을 연구하는 가운데 그 윤곽을 복원해 보려고 하였다. 또한 건축사 분야에서도 개경 성곽에 대한 언급은 있었지만 위의 성과를 뛰어넘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 연구 성과는 개경 성곽의 윤곽과 성문의 명칭에 대한 차별 혹은 그 위치에 대한 관심을 주로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개경 성곽에 대한 도식적인 이해를 시도한 것이고, 그 기능적이고 국가 중심의 상징적 측면에 대한 이해는 미진하다고 생각한다
.

이 글에서는 개경의 성곽 중에서 황성을 중심으로 그 구조적인 일면을 이해하고자 한다. 내용에서 주로 언급되는 시기가 태조대로부터 현종대에 집중된 것은 개경의 도성으로서의 권위와 기능성이 현종 20년 나성의 완성으로 재정비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       고려전기의 축성

고려 건국을 전후한 시기의 대내외적인 상황은 새로운 사회의 성립을 위한 커다란 혼란이었다. 즉 대내적으로는 나말려초의 격심한 사회혼란을 겪고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당송교체기 중국사회의 변화와 발해 멸망이후 거란 등 북방세력의 새로운 위협 등이 태동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고려사회는 나말려초의 혼란을 점차 극복하면서 국가의 기틀을 갖추어갔다. 그러나 대외적인 위협은 동아시아에서 살아왔던 우리 역사의 커다란 과제였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평화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이는 강력한 방어수단을 바탕으로 할 때 가능한 것이었다.

태조 왕건의 아버지 세조(王隆)가 궁예에게 송악의 勃禦塹城을 쌓게 했던 이유는 朝鮮·肅愼·卞韓 지역을 평정하려는 목적이었다. 이것은 비록 圖讖을 근거로 하였지만, 이후 고려 도성의 모태가 되었다. 그리고 태조대로부터 평양을 西京이라 하여 중요하게 다루었던 것과 북방 지역에 많은 성곽이 쌓여지는 것도 도성의 방어가 주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많은 외침 가운데 도성이 점령당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중요 지역의 성곽을 통한 방어력의 집중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고려의 성곽에 대해, "朝廷에서 간간이 사신을 보내어 그 나라를 무마하기 위하여 그 地境에 들어가면, 성곽들이 우뚝우뚝하여 실로 쉽사리 업신여길 수 없다."라는 기록을 통해서 그 실상을 짐작할 수 있다
.

그런데 개경은 현종 20년 나성이 완성되기 이전에는 군사적으로 불리했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현종 즉위년에 나성 축조를 논의하였지만, 나성 축조가 거란의 개경 점령을 경험한 이후 현종 11년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궁성과 황성으로 이루어진 고려초기의 개경은 북방 지역의 방어력에 의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성곽은 유사시에 수도·촌락·주민·경작지 등을 보호할 수 있는 시설이었다. 그 위치와 구조는 도시·군사적 기능이 고려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려전기에는 동아시아 정세의 변동 및 거란과의 긴장관계를 전후해서 대대적인 축성사업이 이루어졌다. 기록상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성곽 사례로는 태조대 30, 정종대 7, 광종대 13, 경종대 1, 성종대 9, 목종대 13, 현종대 20건 등이 새롭게 축조 혹은 수축되었다.

특히 개경 이북 지역의 성곽은 북방세력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들의 침략 예상경로는 이 시기의 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고려전기의 거란은 성종대로부터 현종대까지 대대적인 고려 침략을 감행하였다. 이들은 압록강을 넘어 '西北界 南路·北路'를 이용하여 고려 지역으로 들어왔다
.

서북계 남로는 保州(義州) ― 興化鎭靜州龍州鐵州通州定州嘉州博州로 통하는 길이고, 서북계 북로는 保州(義州) ― 天摩龜州蓬山泰州博州로 통하는 길이었다. 이 두 경로를 통하여 安北府(安州) ― 肅州順安西京黃州鳳州金川開京으로 내려오거나, 安北府順川慈州江東遂安新溪開京으로 내려오는 방법이 있었다. 이들 경로는 이후 무인집권기의 蒙古軍과 고려후기 紅巾賊의 침략에서도 이용되었다
.

따라서 태조대로부터 현종대까지 축조된 대부분의 성들이 북계·동계 지역에 위치하였던 것이다. 그 성곽은 단일 성곽 혹은 重城을 쌓아 二重城 구조로 이루어졌고, 城門·水口·城頭의 시설을 갖추었으며, 그 외곽에 遮城 혹은 堡子 등을 두어 主城을 보호하였다. 이러한 성곽구조는 도성과 기타 지역의 성곽 구조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開京은 宮城皇城羅城, 西京은 宮城皇城羅城, 그리고 江都는 宮城中城外城의 三重城으로 이루어졌다. 靑州는 內城羅城, 그리고 和州·龜州·麟州·靜州鎭은 重城外城의 二重城으로 이루어졌다. 그 밖의 州縣의 성곽은 단일 성곽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2. 개경의 황성

고려전기 대대적인 북방 지역의 축성사업이 벌어졌던 반면 정작 도성을 정비하는 데에는 소홀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고려사} 兵志의 城堡條를 보면, 고려초기에 도성을 쌓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태봉의 성곽을 그대로 이용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낳게 한다. 개경 성곽의 역사적 유래는 신라 효소왕 3(694)에 축성된 이래로 성덕왕 12(713)의 축성, 896년 궁예의 명령으로 왕건이 쌓은 勃禦塹城, 고려 현종 20(1029)의 나성 등의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개경의 지형은 북쪽에 天摩山(782m)·國師峰(764m)·帝釋山(744m), 동북쪽에 華藏山(563m), 동남쪽에 進鳳山(310m), 서북쪽에 萬壽山(228m) 등이 외곽지대를 둘러싸고, 북쪽의 松嶽山(489m)에서부터 남쪽의 龍岫山(177m)으로 연결되는 구릉들이 서로 연이어져 있다. 따라서 개경의 성곽은 이러한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궁성황성나성으로 이루어졌다. 나성이 수도의 군사적·기능적인 면을 보완한 성곽이었다면, 궁성과 황성은 초기 도성의 방어적·상징적·기능적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       황성의 존재

개경의 궁성은 正宮인 本闕(本大闕·滿月臺 등으로도 불림)과 기타 국왕과 관련된 여러 시설들을 둘러싼 것이었다. 궁궐은 태조 2년 철원에서 개경으로 천도했을 때 태봉국 궁예의 궁궐을 이용하여 창건한 것으로 파악되지만, 그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궁성의 성문으로는 昇平門華門(麗景門西華門(向成門玄武門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승평문은 3문 형식으로 이루어진 궁성의 정남문이었다. 서화문은 궁성의 서쪽 문이었음은 분명하고, '숙종 10 10월에 왕이 서경에서 돌아오던 도중 丙寅에 長平門 밖에 이르러 병으로 輦 안에서 죽었으므로, 西華門에 와서 發喪하고'라는 기록을 통해서는 황성의 長平門으로 이어지는 곳에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곳에는 洪灌의 碑가 세워져 있어 그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동화문과 현무문은 각기 동쪽·북쪽의 성문이었지만 그 위치는 확실하지 않다
.

이러한 궁성을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 황성이었다. 황성은 그 축성 시기와 유래가 불명확하지만, 태봉의 勃禦塹城을 이용했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高麗史} 56 10 地理 1, 王京開城府條(이하 '{고려사} 지리지'로 약칭) {高麗史} 83 37 3, 圍宿軍條(이하 '{고려사} 병지'로 약칭)에서는 그 규모와 20개의 성문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도경}에서는 이를 王府 혹은 內城이라고 했고, 13개의 성문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동쪽 성문인 廣化門 이외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

㉠ 冬 築松岳·牛岑二城 ({三國史記} 8 新羅本紀 8, 효소왕 3
)
㉡ 松岳郡 本高句麗扶蘇岬 (新羅改松嶽郡) 孝昭王三年築城景德王因之 我太祖 開國爲王畿 領縣二 ({三國史記} 35 雜志 4 地理 2, 松嶽郡
)
㉢ 築開城 ({三國史記} 8 新羅本紀 8, 성덕왕 12 12
)
㉣ 開城郡 本高句麗冬比忽 景德王改名 今開城府 領縣二 ({三國史記} 35 雜志 4 地理 2, 開城郡
)
㉤ 世祖說之曰 大王 若欲王朝鮮·肅愼·卞韓之地莫如先城松嶽 以吾長子爲其主 裔從之 使太祖築勃禦塹城 仍爲城主 時太祖年二十 ({高麗史} 1, 태조
)
㉥ 光化元年戊午春二月 葺松岳城 以我太祖爲精騎大監 伐楊州 見州 ({三國史記} 50 列傳 10, 弓裔傳
)
㉦ 弓裔 取浿潟及漢山州管內三十餘城 遂都於松岳郡({三國史記} 11 新羅本紀 12, 효공왕 2 7
)
㉧ 弓裔 移都於鐵圓 ({三國史記} 12 新羅本紀 12, 효공왕 9 7
)
㉨ 我太祖 移都松岳郡 ({三國史記} 12 新羅本紀 12, 경명왕 3
)
㉩ 定都于松嶽陽 創宮闕 置三省 六尙書官 九寺 立市廛 辨坊里 分五部 置六衛 ({高麗史} 1, 태조 2년 정월
)
㉪ 創法王·王輪等十寺于都內 ({高麗史} 1, 태조 2 3)

 

 

이 자료들은 고려 건국을 전후한 시기의 개경 지역과 관련된 것이다. ㉠과 ㉡은 같은 것으로 이해되고, 자료상으로 찾아지는 개경 지역의 최초 축성사례이다. ㉢과 ㉣도 같은 것으로 이해되지만, ㉠과 ㉡의 송악성과는 다른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경우를 염두에 둘 때, ㉤의 발어참성, ㉥의 송악성, ㉦의 松岳郡, ㉨과 ㉩에서 태조 왕건이 수도로 삼았던 松岳郡·松嶽陽 및 ㉪의 都內 등은 송악산 남쪽, 즉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있는 개경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의 송악성과 ㉤의 발어참성은 송악산을 근거로 했을 것이라는 추정은 가능하지만, 또 한편으로 그 위치선정에서 차이가 있었거나 혹은 발어참성이 ㉠의 송악성을 수축·확대한 것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태조 2년으로부터 400여 년간 고려 수도로서의 개경은 ㉤의 발어참성을 이용하여 수축을 거듭해 왔을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에서의 궁예가 송악군으로 천도하기 5개월 전에 수리한 송악성은 발어참성이었을 것이다. 또한 태조 왕건이 ㉧ ㉨의 철원에서 송악군으로 천도하고, ㉩의 궁궐과 행정관서의 정비도 발어참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 ㉥ ㉦ ㉨ ㉩ ㉪은 고려초기 도성의 내용을 보여주는 점에서 같은 의미로 파악된다.

 

고려초기 개경의 성곽체제가 언제 정비되었을 것인가는 보는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광종 11 3월에 개경을 皇都라고 하였고, 그 이듬해 4월에 '修營宮闕都監'을 설치하여 14 6월까지 약 2년 동안 궁궐을 수리하였다는 자료가 주목된다. 이 때 개경 성곽의 정비도 이루어졌을 것으로 발어참성 역시 궁성을 에워싼 황성으로 개칭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현종 20년 나성이 완성되기 이전의 개경 성곽은 궁성(내성)과 황성(외성)의 二重城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개경에 비해 서경에서는 內城¬城·王城·皇城이라는 용어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서경의 성곽체제로 미루어 보아, 개경의 성곽체제는 초기에 궁성황성으로 이루어졌다가 현종 20년 나성의 축조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고려전기에는 성종대로부터 현종대까지 거란의 침략 혹은 국내의 변란 등으로 인해 개경 시설의 피해도 막대하였는데, 그 복구과정에서 황성에 대한 묘사가 나타나지 않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더위가 심하여 羅城 수리를 정지하였다.' '崔瑀가 羅城의 隍塹을 수리하는데, 家兵으로 役徒를 삼고 銀甁 300여 개와 쌀 2000여 석을 내어 그 비용으로 지불하였다.' '京都의 外城을 수리할 것을 명령하였다.' 등의 나성의 수축공사와 비교된다. 이런 점에서 현종 20년 나성이 완성된 이후에는 황성 용어의 위상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이해되는데, 다음의 자료들을 참고할 수 있다.

 

이상으로서 살펴본 바로는 요동반도의 허리에 해당되는 개주의 근역인 웅악성과 봉황성을 중심으로 예맥이라고 부르던 부족이 일어났다고 추정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예맥조선이라는 나라는 요동반도의 서부측 중심에서 발흥한 흔적이 남겨진 것입니다. 자연의 상징물은 인공으로 조작된것이 아니기에 홍산문화등에서 나타난 곰. .등의 상징물들은 그 기원이 웅악성 보다는 앞선다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거리상으로 보더라도 발해의 요동만지역이 평야로 유지되던 시대를 감안하면 더욱 그 거리는 가까워집니다. 더구나 현재 봉황성이 있는 주변의 산 이름이 용봉산이 있고 웅악성에서 지척의 거리에 용산이 있다는 것은 신화의 발원지와 우연히 일치한다고 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숭배의 대상물들이 모두가 자연의 산과 바위에서 모사 된 것이라면 더욱이 그렇습니다. 관심이 집중되는 홍산문화의 핵심은 제사터 유적과 묘장에서 출토된 부산물 들입니다. 대략 특징들을 요약하면,

***‘
홍산문화는 곰 토템족으로 단군신화의 웅녀족이다


***
우하량 여신묘 주실(主室) 중앙에는 곰 형상의 웅룡(熊龍)이 있었다


***
홍산문화의 옥룡은 대부분곰 형상의 옥웅용(玉熊龍)이다
.

***‘
()’()’도 요하유역에서 기원하여 전파된 것이다
.

이와 같은 홍산문화의 특징에 대해서는 많은 보고서와 연구 논문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이것이 분명 고조선문화의 초기 단계라는 강력한 주장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항이지요. 그렇다면 왜 곰이나 용이 숭배의 대상이 되었는가? 라는 의문에 대해서도 좀더 구체적인 해석이 있어야 된다고 봅니다. 이것은 곧 전통문화와도 연관이 되는 문제이니까요.

 

다음은 홍산문화유적에서 발굴된 웅상에 관계되는 얘기들을 몇가지 더 올려보겠습니다. 단군문화지도 싸이트에서 빌려왔습니다.

***
홍산 유적지

1)
나리사대 유적지

가록산(소한산)의 서쪽 한산罕山(=1936m) 또는 새한산賽罕山은 흑산이라고도 했는데, 소한산의 서쪽 골은 흑수黑水라고 했으며 이 흑수가 서요하로 들어가는 길목에 나리사대那日斯臺 유적지가 있다. 나리사대 문화 유적지에서는 옥도끼와 더불어서 마노瑪瑙로 만든 석도石刀도 등장한다. 옥기 조각이 매우 다양화 되며 각종의 옥패식이 등장한다. 구름형옥대, 옥구, 물고기형 옥패식, 용형 옥결, 부엉이형 옥패식, 옥관 등이다. (그림 15 참조)

 

도기는 빗살무늬 토기가 여러 첨가 기법으로 다양해지면서 뱀무늬의 채도문도 등장한다.

나리사대 문화의 가장 주요한 발굴로서 남자와 여자의 돌조각이 각각 하나씩 있는데 남자는 35cm 높이에 미간까지 보호하는 투구(투구 재료가 청동인지 코뿔소 가죽인지 알 수 없다.)를 쓰고 의자에 걸터앉아 있다. 여자는 높이 19cm에 안면을 머리칼로 팔자 형태로 가리고 머리 위에는 3층의 족두리 장식을 얹었으며 두 손을 합장하고 무릎을 꿇었다. 여자상과 함께 발굴된 석수상石獸像은 높이 9cm, 남은 길이 14cm의 작은 곰의 형상이다. ( 그림생략
)

환웅, 웅녀의 만남은 이미 반만년전에 실재로 존재했던 사실이 이 나리사대 돌조각품으로 증거된다. 이 석조물들처럼 곰 부족의 여자가 소원하여 환웅의 씨를 얻어서 득세를 하고 호랑이족 예穢의 영역을 획득해나간다. 그리고 그 서쪽의 임서현林西縣 쌍정雙井 백음장한白音長汗 유적지에서는 35cm 높이의 임신한 여신상生育女神像이 나왔다. 고구려까지 모시던 부여신扶餘神일 수도 있다.

 

웅녀족이 환웅과 함께 예맥의 땅을 빼앗아 옮겨간 곳으로 신석기 홍산문화의 정수격인 요녕성 능원시凌源市 우하량牛河梁 유적지가 있다. 유적지 최상단의 여신묘를 중심으로 반경 5km 안에 6개 지점에 걸쳐서 약 20개의 대형 적석총과 제단 등이 있다. (그림 16 참조)

남쪽에 금자탑金字塔이라는 제사 건축지는 3단 원형 제단으로서 아랫단의 직경이 60m, 윗단의 직경이 40m에 이르고 그 위에 봉토를 하였다
.

그리고 북쪽에는 200m X 200m 규모의 신석기 석성 터가 남아있다
.

2)
우하량유적지

우하량 적석총에서 발굴된 유물은 거의 홍산문화 유물이며 청동기는 일체 없지만 제단의 규모, 왕릉의 규모가 개세적이라서 중국 역사학계에 역사적 쇼크를 주었다. 우하량 적석총 홍산문화는 시기적으로는 약 5500년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 왕릉들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중국에서는 이 우하량 지역을 웅산熊山이라고 고려하면서 유웅씨有熊氏와 그 후예인 황제黃帝 헌원公孫軒轅, 그리고 황제의 손자 고양왕 전욱顓頊등의 조상으로 고려한다.

그리고 최상부의 여신묘는 복희와 부부였던 여와신女媧神이라고도 해석한다. 그러나 여와신은 복희와 함께 뱀으로 형상화되기는 했어도 곰은 아니었다. 이곳 여신묘에는 특별하게도 곰의 턱뼈가 부장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홍산문화 적석총의 주인은 환웅과 웅녀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홍산문화 특유의 적석총 묘제는 요동반도와 압록강의 적석총, 서울 송파의 적석총, 경주의 적석총으로 이어진다.

 

우하량유적지는 유적지의 분포가 넓고 많다. 우하량 유적지는 20여개 지점이며 그중에 5개 지점의 적석총군이 대표적이다. 적석총 2지점은 150 x 80m 규모다. 2지점의 제단은 3층 원형의 돌제단이며, 4기의 춘추시대 적석총과 여러개의 석곽묘가 있다. 적석총 3지점은 2지점의 북쪽 200m 거리에 있는데 적석총 1기와 8개의 석곽묘가 있다.

적석총 5지점은 3지점으로부터 서쪽 882m 지점이고 2기의 적석총과 발굴하지 않은 석곽묘가 있다. 4지점은 3지점으로부터 577m이다. 미발굴이다. 또한 3지점 1000m 북쪽에는 여신묘(女神墓) 건축유적이 있고 여신묘 북쪽에 규모가 작은 적석총 6지점, 7지점, 8지점, 9지점이 있다. 5지점 남쪽에는 금자탑(金子塔)으로 불리는 직경 100m 3층 원형 토단(土壇)이 있다
.

우하량은 홍산문화의 보통 석곽묘(石槨墓)제에 더하여 최초로 적석총(積石塚)으로서 산릉(山陵)을 쌓았다
.

여신묘 건축지로서 진흙으로 만든 여신상과 더불어 곰의 머리뼈가 출토되어 곰 토템과 여제사장으로서의 웅녀를 강력하게 시사한다. 여신의 두상에는 옥으로 눈을 만들었고 그외 작은 여신상, 생육여신 (生肉女神)상도 있다.

 

다음글은 준왕의 구도였던 왕검성을 찾기 위하여 위치를 추적하던중에 요동군의 험독현 위치가 요동만의 윤몰로 이동되었다는 주장을 한바가 있습니다. 당시 양평벌 500리가 바다로 변하였다는 주장이었고, 따라서 진나라가 설치한 요동군의 치도였던 양평도 후에 요양으로 이치되었다는 주장이었지요. 그런데 당시 요동군의 양평위치를 거론 하면서도 바다를 건넜다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요동군의 위치를 현재의 요서 내륙으로 주장하신 역사탐정님의 글을 발견하였습니다. 당시 대능하와 요하가 합류되는 지점에 험독이 있었다면 그곳이 바다일수는 없는것이지요. 그러한 험독이 유지될 당시는 양평벌 500여리가 평원이었기에 역사탐정님의 주장은 한편 일이가 있다고 봅니다. 내용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역사탐정
Y (2004-03-20 21:34:38, Hit : 82, Vote : 1)

공손氏 시대 이전의 요동에 관한 기사의 분석


[pp. 187-189
에서 퍼온 글
]
한국 고대사에서 아직까지 매듭지어지지 않은 논쟁거리가 많이 있으나, 그 중의 하나가 한무제(漢武帝)가 기원전 108년에 설치하였다는 낙랑군의 위치가 어디냐 하는 것이다
.

사실 이 문제는 한무제가 멸망시킨 위만조선(衛滿朝鮮)과 한()의 국경선이 어디냐를 알면 저절로 판명될 성격의 것이나, 그것이 모호한 관계로 낙랑군의 위치를 먼저 규명하여 거꾸로 위만조선과 한()의 국경선, 나아가 이른바 기자조선(箕子朝鮮)과 연(()의 국경선을 추적하는 한국 고대사의 영역을 추정하는 문제로 바뀌어져 있는 실정이다
.

그러나 필자는 이 문제의 실마리를 공손氏 시대 이전의 요동에 관한 기사의 분석을 통하여 찾는 것이 더 실제적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요동이라는 개념은 한4군이 설치되기 전에 이미 존재하였으므로 요동에 관한 기사가 더 풍부할 뿐 아니라, 요동의 개념 내지 범위를 추적하면 한무제가 설치한 당초의 낙랑군의 위치도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
.

『한서』지리지에는 요동군을 진()이 설치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으나("遼東郡, 秦置"), 『사기(史記)』진시황(秦始皇)본기의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면 선진(先秦) 시대에 이미 '요동'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 "
진시황 21(기원전 226), 왕분(王賁)이 계성(계城)을 공격하였다. 이어 병졸을 더욱 징발하여 왕전([前 밑에 羽자]軍과 합류하여 마침내 연나라의 태자군(太子軍)을 격파하였다. 연의 계성을 빼앗고 태자 단(=丹又)의 머리를 얻었다. 연왕이 동쪽으로 요동을 거두어 왕노릇을 계속하였다(燕王東收遼東, 而王之
)."

☆ "
진시황 25(기원전 222), 크게 병사를 일으켜 왕분(王賁)으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고, 연의 요동을 공격하여 연왕 희를 사로잡았다(攻燕遼東, 得燕王喜
)."

위 기사에는 연의 요동을 공격할 때 바다를 건넌다는 뉘앙스가 전혀 없으므로, 당시의 요동이라는 개념에 지금의 요동반도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데, 그러한 느낌은 『사기』한고조(漢高祖)본기의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더라도 마찬가지이다
.

☆ "
한고조 원년(기원전 206), 연의 장수이던 장도(藏도)를 연왕으로 하여 계성에 도읍하게 하였다. 옛연왕인 한광은 요동의 왕으로 옮기게 하였으나(故燕王韓廣, 徙王遼東), 한광이 듣지 않자 장도가 그를 공격하여 무종(無終)에서 살해하였다
."

옛 연왕인 한광이 도읍하고 있던 무종(無終)은 『한서』지리지에 우북평군(右北平郡)의 속현으로 열거되어 있는데, 지금의 하북성 계현 부근에 비정되고 있으므로, 결국 한광을 옮겨가도록 하였다는 요동이란 지금의 요하(遼河)의 동쪽이 아니라 대능하(大凌河)의 동쪽을 가리킨 것으로 추측된다
.

왜냐하면 『한서』지리지에는 요하보다 더 서쪽에 있는 능양하(綾陽河) 인근의 무려현(無慮縣)이 요동군에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이와 함께 포함되어 있는 험독현(險瀆縣)에 대해서도 "이는 요동의 서쪽 경계로(此遼東之西境) 옛성은 지금의 광녕현 동남에 있다[一統志]"라는 주석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

그리고 『후한서』군국지에는 무려현과 험독현이 요동군에서 분리되어 대능하 인근에 있는 창료(昌遼=昌黎; 지금의 요녕성 朝陽市 서남도하(徒河; 지금의 요녕성 義縣 경내)와 함께 요동속국(屬國)으로 분류되어 있는 것도 필자의 추측을 뒷받침한다.

『한서』지리지에는 무려현이 서부도위(都尉)의 치소로 표시되어 있으나, 이는 선진(先秦)시대의 개념이 아니라 한무제가 한4군을 설치한 이후에 생긴 변화를 반영한 것임이 분명하다
.

왜냐하면 『한서』지리지의 낙랑군조에 표시되어 있는 남부도위·동부도위의 치소는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기원전 82년에 진번·임둔군이 폐지된 이후, 더 정확히는 이맥(夷貊)들의 침략을 받아 현도군의 위치가 옮겨진 이후에 비로소 결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

----------------- (
이하는 각주의 내용 일부
)
학자들은 『한서』소제(昭帝)기 원봉(元鳳) 6(기원전 75) 정월조에 "군국(郡國)의 무리를 모집하여 요동현도성을 축조하였다(築遼東玄[-+])"라는 기사가 있으므로, 현도군의 치소가 제1의 위치에서 제2의 위치로 옮겨진 것은 기원전 75년경으로 보고 있지요.(이병도 저, 한국고대사연구, p. 159 참조
)]

당시의 요동이라는 개념에는 지금의 요동반도까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후한서』권90 선비(鮮卑)전에 기록된 이른바 요동선비의 활동범위를 분석해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서』지리지에는 요하보다 더 서쪽에 있는 능양하(綾陽河) 인근의 무려현(無慮縣)이 요동군에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이와 함께 포함되어 있는 험독현(險瀆縣)에 대해서도 "이는 요동의 서쪽 경계로(此遼東之西境) 옛성은 지금의 광녕현 동남에 있다[一統志]"라는 주석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한서』군국지에는 무려현과 험독현이 요동군에서 분리되어 대능하 인근에 있는 창료(昌遼=昌黎; 지금의 요녕성 朝陽市 서남도하(徒河; 지금의 요녕성 義縣 경내)와 함께 요동속국(屬國)으로 분류되어 있는 것도 필자의 추측을 뒷받침한다
.

『한서』지리지에는 무려현이 서부도위(都尉)의 치소로 표시되어 있으나, 이는 선진(先秦)시대의 개념이 아니라 한무제가 한4군을 설치한 이후에 생긴 변화를 반영한 것임이 분명하다
.

왜냐하면 『한서』지리지의 낙랑군조에 표시되어 있는 남부도위·동부도위의 치소는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기원전 82년에 진번·임둔군이 폐지된 이후, 더 정확히는 이맥(夷貊)들의 침략을 받아 현도군의 위치가 옮겨진 이후에 비로소 결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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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각주의 내용 일부
)
학자들은 『한서』소제(昭帝)기 원봉(元鳳) 6(기원전 75) 정월조에 "군국(郡國)의 무리를 모집하여 요동현도성을 축조하였다(築遼東玄[-+])"라는 기사가 있으므로, 현도군의 치소가 제1의 위치에서 제2의 위치로 옮겨진 것은 기원전 75년경으로 보고 있지요.(이병도 저, 한국고대사연구, p. 159 참조
)]

당시의 요동이라는 개념에는 지금의 요동반도까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후한서』권90 선비(鮮卑)전에 기록된 이른바 요동선비의 활동범위를 분석해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의 글로서 요동만 일대의 평원설이 존재할 수 있었다면 한나라가 최초로 남옥저성의 고구려현에 세웠던 현도군이 이맥의 습격을 받아 북쪽으로 옮겨간 상항을 이해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유는 평야가 윤몰되기 이전에는 웅진의 서쪽으로는 총괄 소요수로 불리우는 비류수가 흘렀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현도군을 몰아낸 후 그곳에 (대수를 건너서)송양국 (졸본부여)이 있었다고 보는것이지요.

기록으로만 존재하며 실체를 보여주지 않는 서안평이 이쯤에서 나타나야 하는데 찾을 수 없는 것은 사비성과 함께 바다로 사라졌기 때문으로 봅니다. 비류수를 건너서는 웅악의 주변으로 맥이(貊夷) 즉 웅이(熊夷)가 있으면서 찔기게 기습을 하여 현도군을 몰아낸 것이라고 추정을 해봅니다. 만주의 소식통에 의하면 근래까지도 어느 오지에는 1만여명의 예맥인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