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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민족 옛 제국 9고구려의 역사

monocrop 2007. 2. 25. 16:25
한민족 옛 제국 9고구려의 역사

1. 구려九黎

배달국 13세 사와라 환웅 초년(BCE277?)에 웅녀군熊女君의 후예를 일러‘려黎’라 하니,‘려黎’는 비로소 단허檀墟에 봉함을 받아 왕검王儉이 되었다. 삼한관경본기>

삼한관경본기에 의하면 왕검 려黎의 나라 대읍국大邑國은 크게 발전하였으니, 그 뒤 460년 뒤 단국 단웅의 아들 신인 왕검이 백성의 신망을 얻어 이 나라의 비왕이 된다. 그 후 웅씨왕이 전쟁에서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왕검으로서 9환을 통일하니 이 분이 바로 단군 왕검이다.

삼신오제본기“소도의 제천은 곧 구려九黎를 교화하는 근원이 되었다.”의 구려九黎는 천하를 뜻하니, 이것은 단군 왕검이 려국黎國을 중심으로 하여 천하를 통일하였기 나온 말이다. 구환九桓, 구한九韓, 구이九夷의 구九는 그 기원이 천상의 가장 높은 하늘인 9천 하늘에서 삼계를 통치하는 구천상제에서 비롯한 것으로, 전하여 지상에서 삼한을 통치하며 천하의 아홉 지역을 아우르는 구황九皇을 뜻한다. 때문에 구환일통九桓一統, 혼일구한混一九韓이란 말은 천하를 통일한 환국, 배달, 조선, 북부여, 고구려, 대진국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 때의 려국은 정식 국호가 아니었음으로, 강 이름인 옛날의 서압록하의 하류이며 현재의 요수인 구려하九黎河가 등장하는 외에는, 환단고기 한 두 곳을 제외한 대다수의 기록에서 려국黎國을 본토에서는 찾아 볼 수 없고, 오직 서토에서만 찾아 볼 수 있다. 소도경전본훈의“단군의 신전 등은 널리 백산, 흑수, 청구, 구려九黎에 쓰여졌다”는 기록을 보면 구려는 명백히 백산, 흑수, 청구를 제외한 번한, 빈기나 오월 등지의 영토에 국한된다.

서토에 구려가 첫 등장하는 것은 단군 왕검 때의 일로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상에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정사년 9년 홍수 일명 노아의 홍수 때 단군 왕검은 부루 태자에게 명하여 우虞임금의 신하 사공 우禹에게 오행치수지법을 전하게 하여 공을 크게 이루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우임금을 감독하는 일을 맡은 감우소를 낭야성에 설치하여 구려의 분조를 결정하였고[우임금을 감독하는 감우소를 낭야성에 설치하여 구려九黎의 분조를 결정하였다.(번한세가 상)], 연이어 번한을 세워[이에 단군 왕검이 치우의 후손 가운데 지모와 용력을 겸비한 자를 택하여 번한으로 삼아, 그 관부를 험독에 세우고 또한 왕검성이라 일컬었다.(번한세가 상)],  그 임금을 치우천황의 후손인 치두남으로 삼고, 대하여 감우소를 겸하게 함으로[치두남을 번한으로 삼고 우임금을 감독하는 정사를 겸하게 했다.(번한세가 상)], 이 때부터 구려九黎는 번한의 소속이 된다.

이제 서토에 있는 구려九黎의 역사를 약설하면, 부루태자가 지금의 회계산인 도산에서 회의를 할 때 소집한 구려九黎는 오월吳越 지방에 도읍하였고, 그 후예가 산월山越, 좌월左越로 옮겨간 이래(고구려국본기), 산월로 옮겨간 구려족은 점차로 베트남 방향으로 밀렸으니, 이것이 바로 남만南蠻(대진국본기)이다.

려黎는 이 외에도 22세 색불루 단군 때 산융과 은나라의 사이에 있는 빈기 지방의 공략으로 려파달黎巴達이 건국한 려국黎國(단군세기)이 있다. 그리고 이 때 이 려국 건국의 일등 공신은 람국藍國이니, 이 람국은 규원사화에서는 단군 왕검께서 치우씨의 후손을 들이 넓고 바다가 푸른 남서쪽의 땅을 주어 만든  나라라고 하고, 단군세기에서는 제4세 오사구 단군의 때에 하나라를 공략한‘람, 진, 변’의 삼부가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이 람국은 단군 왕검 때 감우소의 정사를 맡아 한 분조를 이룬 구려九黎의 나라가 된다.

2. 구려句麗

23세 단군 아홀 2년 을유(BCE 1236년)에 남국의 임금 금달今達이 청구의 임금, 구려句麗의 임금과 더불어 주개에서 회합하고 몽고리蒙古里의 군사들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나라 성책을 쳐부수고 오지로 깊숙이 들어가 회대를 평정했다. 단군세기>

규원사화 단군기를 보면 제후국 구려의 역사가 단군 조선 초기에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부소, 부우, 부여는 모두 서쪽 땅을 주었는데 이것이 곧 구려句麗, 진번眞蕃, 부여夫餘 등 여러 나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려의 첫 임금은 둘째 아들 부소가 된다.

그리고 규원사화 단군기 제11세 단군 도해의 기록을 보면 “부여후가 알유의 난을 만났다. 웅가가 구려, 진번후와 힘을 합쳐 평정했다.”고 했으니 구려국이 제11세 단군까지 계속 존재한 증거가 된다.

반면에 환단고기 단군세기 23세 아홀 단군 때의 기록은 구려국이 단군 왕검이래 계속해서 힘 있는 제후국의 반열에 있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위 단군세기의 기록은 규원사화 제 43세 단군 물리의 기록에도 보이는데, 이것은 명백한 규원사화의 오기로 아홀 단군 때에 벌어진 일이다. 이 때의 중원은 은나라가 멸망한지 700년이 넘은 동주시대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규원사화의“고려의 묘청이 서경의 임원궁 안에 팔성당을 모셨는데, 다섯 번째 신은 구려句麗의 ‘목멱선인’으로 인간의 수명을 맡았다”는 기록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구려를 뜻한다. 또한 넷째 신은 구려駒麗의 평양선인이라 하였는데, 이 또한 같은 구려句麗일 가능성이 많다.

3. 고리高離

임술 57년(BCE 239년) 4월 8일 해모수가 웅심산에 내려와 군사를 일으켰으니 그 선조는 고리국槀離國인이다. 단군세기>

고두막한이 더불어 싸울 때마다 한나라의 적들이 풍문만 들어도 지레 놀라 궤멸되니, 병사들을 이끌고 마침내 구려하九黎河를 건너 추격하여 요동 서안평에 이르렀는데, 여기가 바로 옛 고리국槀離國의 땅이다. 북부여기 하편>

그 서경인 압록부는 본래 고리국槀離國이요, 지금의 임황이다. 지금의 서요하는 곧 옛날의 서압록하였다. 고로 옛 책에서 언급한 안민현은 동쪽에 있으며, 그 서는 임황현이다. 임황은 뒤에 요나라의 상경 임황부가 된다. 곧 옛날의 서안평이다. 대진국본기>

이달 3월 16일에 삼신일체상제를 서압록의 강변에서 제사지냈으니, 서압록은 고리槀離의 옛 나라 땅이다. 대진국본기>

왕검이 처음 나라를 일컬어 조선이라 했는데, 삼한, 고리高離, 시라, 고례,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와 맥이 모두 그 관할하는 경내였다. 신시본기>

단군세기에 고리국槀離國은 말미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해모수의 선조가 고리국槀離國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단 한군데 신시본기의 고리高離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고리槀離로 사용된다. 이것은 고리의 정식 한자 표기가 고리高離가 아니요 고리槀離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삼신오제본기의 삼신 혹설에 “신神은 고高가 되고, 고高는 두頭가 된다.”라 하였으니 고高는“삼신, 두목, 태양, 새, 광명”의 뜻을 갖는다. 반면에 고槀는 고高와 목木이 결합한 글자이니,‘신목神木’,‘두목頭木’의 뜻을 갖는다. 동방을 뜻하는 목木 위에 신神과 두頭가 있는 것은 “동방에 떠오르는 일출, 삼국의 왕관에 보이는 신수神樹에 내려 앉은 새, 까마귀 깃털을 머리에 꽂은 국선 화랑, 솟대, 천하대장군”등이다.

4. 고진의 고구려高句麗

4세 단군 고우루 원년 신유(BCE 120년)에 고신을 발탁하여 서압록을 지키게 했는데 그가 병력을 증강하고 성책을 많이 설치해서 우거를 막아 공을 세우니 승진시켜 고구려후高句麗侯로 삼았다. 북부여기 상편>

고리군왕槀離郡王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고, 옥저후 불리지는 고진의 손자인데, 모두 위만을 토벌한 공적으로 제후에 봉해졌다. 고구려국본기>

위의 고진의 기록을 보면 북부여기 상편에서는 고구려후가 되었다고 하고, 고구려국본기에서는 고리군왕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고구려와 고리국은 같은 나라가 된다. 실제로‘고구려’의 이칭은 그 줄임말인 고려이며,‘려麗’는 ‘밝을 려’와 ‘나라이름 리’가 있으니, ‘고려’의 본래 이름은‘고리’가 된다.

더 나아가 구려句麗는 어느 순간 '고씨高氏'의 나라‘구려句麗’가 되었음으로 고구려高句麗라 한 것이니, 고리槀離와 구려句麗는 같은 나라가 된다.

여기에 덧붙여 단군세기 제4세 단군 오사구의 기록에“원년 갑신에 황제의 아우 오사달을 몽고리한蒙古里汗으로 임명했다. 혹 설에는 지금의 몽고蒙古족이 그 후예라고 한다.”라는 글이 있다. 이 때 몽고리는 ‘몽’과‘고리’가 더해진 말로서,‘고리’와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할 것이나, 23세 홀달 단군의 기록에 이미 ‘몽고리’와 ‘고리’의 전신인‘구려’의 구분이 있으므로 이 둘은 동시에 존재했던 별개의 나라가 된다.

5. 고주몽의 고구려高句麗

그 때(BCE 58년) 부여왕에게는 후사가 없었는데 마침내 고주몽이 왕의 사위로서 대통을 계승하였으니 이를 일러 고구려高句麗의 시조라 한다. 고구려국본기>

대저 북부여의 흥성함이 이에서 시작하니 고구려는 이에 해모수가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역시 고구려高句麗라 칭하는 바라. 단군세기>

원래 고주몽 성조는 북부여의 7세 단군이었으나 나라를 고구려로 고쳐 1세 황제가 되신 분이다. 고주몽이 국명을 바꾼 대의명분은 그의 연호인 다물에서 알 수 있으니, 국정을 일대 혁신하여 주변 열국을 통일하고 잃어버린 고토를 회복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 외에도 중요한 또 다른 노림수가 있었으니 그것은 구세력의 척결과 황권 강화였다. 그 의도를 처음 눈치 챈 것은 자신의 황후인 북부여 6세 고무서 단군의 딸 소서노였으니, 소서노는 남편과의 권력 투쟁을 포기하고 자신의 아들 비류와 온조를 위해 옛 진한과 번한 사이에 있는 패수와 대방지역 500리를 개척한다.

경인년 3월에 패대를 개척한지 10년 만에 고구려에 귀부하여, 고주몽으로부터 여왕인‘어하라’로 책봉받고, 그 삼년 뒤인 임인년에 고주몽 성제와 같이 돌아가시니, 드디어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를 떠나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온조가 세운 백제는 하남 위지성에 도읍하여 발전을 거듭하니, 훗날 비류가 죽자 그의 신하들이 모두 온조에게 귀부하게 된다.

반면에 고주몽은 동부여계로 친구 사이인‘오이, 마리, 협부’를 중용시켰으니, 그 의도는 친위 세력을 부식시켜 황권을 강화시킴이었고, 더 나아가 동부여에 두고 온 유리가 찾아 오면 장차 태자로 앉혀 이들로 하여금 유리를 보호하고자 함이었다. 그 사전 정지 작업은 성공적이었으니, 고구려국본기의 “태자 비류가 즉위하니 사방 관경이 이에 내부하지 않았다.”는 기록처럼 정권은 별 탈 없이 유리에게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권력에서 소외된 동명계 옛 가문들이 온조를 따라 백제 건국 운동에 참여 하였으니, 그 함축적인 정황은 원래 치두남이 쌓은 요중遼中 12성인 험독險瀆, 영지令支, 탕지湯池, 통도桶道, 거용渠鄘, 한성汗城, 개평蓋平, 대방帶方, 백제百濟, 장령長嶺, 갈산碣山, 려성黎城 중의 하나였으나, 백제의 뜻이 된‘백가제해百家濟海(일백 개의 가문이 바다를 건너왔다)’에서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돌이켜보면 고주몽의 증조할아버지 고진은 고구려후였고, 고조할아버지인 해모수는 역시 그 태어난 고향이 고구려였으니, 고구려의 건국은 명실상부한 해모수 고구려의 부활이란 의미가 다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해모수와 고주몽은 각기‘북부여’와 ‘고구려’를 건국하였으니 두 분은 모두가 대제국의 건국자가 된다.

6. 대중상의 후고구려後高句麗

(AD 668년) 대중상이 이에 동쪽으로 함께 돌아가 동모산에 이르러 웅거하고, 견고한 성벽으로 스스로 보위하고 나라를 일컬어 후고구려後高句麗라 하고 연호를 세워 중광이라 하였다. 대진국본기>

대중상은 그 나라를 세워 후고구려라 하였으니 이것은 고구려의 후예라는 뜻이다. 혹 대조영의 조상이 대련[2세 부루 단군의 신하 대련은 소련과 한 형제]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실상은 해모수일 가능성이 더 많다. 해모수의 성씨는 원래 고씨로 해씨를 같이 썼는데, 단군세기에는 해모수를 대해모수[북부여 제6대 단군 고무서는 소해모수]라 기록한 것이 그 증거가 된다. 고대 신교의 수의 세계에 있어서는 고高는 최고분열수 7을 대大는 최대분열수 9를 상징한다. 또한 7은 칠성을 뜻하고 9는 구천 하늘을 뜻하는데, 고대 한민족은 상제님께서 계시는 구천 하늘의 도솔천이 북두칠성에 있다고 믿었다.

대중상의 후고구려는 아들 대조영의 즉위에 이르러 ‘대씨의 진국’이란 의미의 대진국大震國으로 국명이 바뀌니, 훗날 당나라에서 칭송하여 부른 해동성국海東盛國이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발해渤海다.

7. 안승의 후고구려後高句麗

이보다 먼저(AD 668년) 고구려 수림성 사람 모잠대형이 잔민을 거두어 합하고 안승을 후고구려後高句麗 왕으로 받들었다. 고려국본기>

검모장이 보장제의 서자 고안승을 받들어 건국한 후고구려는 내분에 의하여 안승이 검모장을 죽이고 신라에 투항함으로서 망하게 된다. 신라는 안승을 보덕국왕으로 세우니 그 근거지는 익산의 금마저다.

8. 궁예의 후고구려後高句麗

궁예 역시 명년(AD 901년)에 이르러 왕을 칭하고 “신라가 당에 병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하였으니 이것은 가히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반드시 고구려高句麗의 복수를 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나라를 세워 후고구려後高句麗라 하고 연호를 정하여 무태라 하였다. 고려국본기>

태봉국 황제 궁예는 제47대 신라 헌안왕, 또는 제48대 경문왕의 서자가 아니다. 이것은 삼국사기가 왜곡한 새빨간 거짓이다. 어머니의 성씨인 궁씨를 딴 궁예는 신라 왕실인 김씨의 핏줄이 아니라 원래 고씨로 보덕국왕 안승의 먼 후예다. 신문왕이 보덕왕 안승의 백성을 빼앗고 자신의 누이를 처로 준 후 소판으로 삼았으므로 왕실의 일원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뿌리를 잘 알고 있던 궁예는 자신이 세운 나라를 처음에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여 후고구려라고 했던 것이다.

9. 왕건의 고려高麗

(AD 993년) 서희가 말하였다. 아니다.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옛 정통을 이었으므로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으니 땅의 경계를 논한다면 귀국의 동경이 모두 우리 관경이거늘 어찌하여 침식했다 말할 수 있겠는가? 고려국본기>

(AD 918년) 달려온 무리들이 먼저 궁문에 이르러 북 치며 환호하는 사람들이 1만여 명 이었다. 드디어 왕건이 포정전에서 즉위하고 연호를 정하여 천수라 하였다. 고려국본기>

역사적으로 고구려高句麗는 스스로 고려高麗라 부르기도 했으며, 고려高麗 또한 스스로 고구려高句麗라 칭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고려 태조 왕건은 고구려의 약칭인 고려로 국명을 정함으로서 고구려의 법통을 계승하였음을 명백히 하였다. 하지만 내용에 있어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지 못했으니, 그 까닭은 고구려의 국교인 신교를 버리고 불교를 국교로 정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한민족 고유의 신앙인 신교는 정치적 박해 속에 급격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니, 그 빈자리는‘불교, 유교,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 남녀호랑겟교’등 외래 종교의 차지가 되고 만다. 그런 까닭으로 현재 우리의 주변에는 우상 숭배 단군상 목자르기가 널리 유행하고 있다.

참고자료 : 환단고기, 규원사화 , 삼국사기, 조선상고사
출처 : 미래역사
글쓴이 : 재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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