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광개토태왕은 후연을 멸망시킨 후 재위 18(또는 19)년 4월에 왕자 거련(巨連)을 태자로 책립하였으며 그해 7월에 국동(國東)에 독산성(禿山城) 등 6성을 쌓고 평양의 민호를 이주시켰다고 나와 있다.
국동의 독산성에 대해서는 그 위치를 비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북한 사학자 손영종은 독산성을 경기도 포천 부군의 독현 또는 포천 성산산성을 주목하고 있다. 아무튼 광개토태왕이 국동 6성을 쌓은 것은 남쪽의 백제를 막기 위한 방어정책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성을 쌓은 다음 달인 8월에 왕이 남방을 순수했다는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한편 광개토태왕 능비의 기록에 의하면, 영락 20년(410)년에 왕이 친히 병력을 이끌고 동부여를 공략하였다고 한다. 원래 동부여는 고구려의 속민(屬民)이었는데, 이때 재차 토벌하게 된 것이다.
광개토태왕은 먼저 다른 나라의 외침이 있을지도 모르는 곳을 철저히 방비하고 나서 계획했던 나라를 공략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먼저 남방정책으로 백제를 굴복시키고 나서 북방으로 진출한 것도 그와 같은 전략이었던 것이다. 409년에 백제를 방비하기 위해 국동에 6성을 쌓고 나서 그 다음 해에 왕이 동북쪽에 위치한 동부여를 공략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전략의 일환이었다.
원래 부여는 286년 선비족 모용외의 기습으로 나라가 망했는데, 그 왕족의 일부가 북옥저로 피난을 가서 동부여를 세웠다. 당시 동부여는 고구려에 대하여 사대공조를 하는 관계였다. 그러나 그 세력이 점차 강화되면서 고구려 속국에서 벗어나려고 국력을 키워나갔다. 고구려가 여러 차례 연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사이에 동부여는 호시탐탐 고구려 국경의 일부 당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고구려로서는 그러한 동부여가 크게 두려워할 대상은 아니었으나 껄끄러운 것만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손이 잘 닿지 않는 곳에 난 등창처럼 성가신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천관우는 동부여의 위치를 두만강 하류로 비정하고 있는데, 두만강 그 위쪽일 가능성이 높다. 동부여의 정벌이 쉽지 않은 것은 그곳이 험준한 산악지대로 둘러싸여 있어서 대군을 이끌고 접근하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고구려를 둘러싼 서북방, 북방, 남방의 나라들을 공략하여 굴복시킨 광개토태왕은 마지막으로 동북방의 공략에 나섰다. 동부여까지 정벌하여 동북방의 안정을 되찾으면 일단 고구려를 둘러싼 발호세력을 완전히 잠재우게 되어 평화를 유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당시 광개토태왕이 원정군을 이끌고 동부여로 가기 위해서는 유일한 통로가 개마고원을 경유해서 두만강을 건너는 길밖에 없었다. 압록강과 두만강 상류의 험준한 산악지대는 빽빽한 밀림지대여서 대군이 진군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뒤따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광개토태왕은 원정군을 이끌고 동부여의 수도 여성(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음)으로 가는 길에 여러 성을 함락하였다. 고구려 원정군이 수도인 여성까지 쳐들어가자 동부여의 왕은 사절을 보내 항복하였다. 이때 고구려는 동부여의 64개 성, 1,400촌을 함락하였다.
동부여를 제압하고 회군할 때 광개토태왕은 동부여의 높은 관직인 압로들을 볼모로 데려갔다. 미구루압로, 비사마압로, 단사루압로, 숙사사압로,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압로 등 5명의 압로가 그들이었다.
이로써 광개토태왕은 고구려 국경의 남쪽, 서북쪽, 북쪽, 동북쪽에서 각각 수백 리 또는 1,000여 리의 국토를 확장하여 재위 기간 동안 무려 그 이전 시기에 비하여 200배 이상의 영토를 넓혔다. 과연 능비에 나오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이름을 얻기에 충분한 공로라 아니할 수 없다.
광개토태왕은 동부여 정벌 후 재위 22년 10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어떤 이유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아직까지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
국동의 독산성에 대해서는 그 위치를 비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북한 사학자 손영종은 독산성을 경기도 포천 부군의 독현 또는 포천 성산산성을 주목하고 있다. 아무튼 광개토태왕이 국동 6성을 쌓은 것은 남쪽의 백제를 막기 위한 방어정책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성을 쌓은 다음 달인 8월에 왕이 남방을 순수했다는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한편 광개토태왕 능비의 기록에 의하면, 영락 20년(410)년에 왕이 친히 병력을 이끌고 동부여를 공략하였다고 한다. 원래 동부여는 고구려의 속민(屬民)이었는데, 이때 재차 토벌하게 된 것이다.
광개토태왕은 먼저 다른 나라의 외침이 있을지도 모르는 곳을 철저히 방비하고 나서 계획했던 나라를 공략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먼저 남방정책으로 백제를 굴복시키고 나서 북방으로 진출한 것도 그와 같은 전략이었던 것이다. 409년에 백제를 방비하기 위해 국동에 6성을 쌓고 나서 그 다음 해에 왕이 동북쪽에 위치한 동부여를 공략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전략의 일환이었다.
원래 부여는 286년 선비족 모용외의 기습으로 나라가 망했는데, 그 왕족의 일부가 북옥저로 피난을 가서 동부여를 세웠다. 당시 동부여는 고구려에 대하여 사대공조를 하는 관계였다. 그러나 그 세력이 점차 강화되면서 고구려 속국에서 벗어나려고 국력을 키워나갔다. 고구려가 여러 차례 연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사이에 동부여는 호시탐탐 고구려 국경의 일부 당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고구려로서는 그러한 동부여가 크게 두려워할 대상은 아니었으나 껄끄러운 것만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손이 잘 닿지 않는 곳에 난 등창처럼 성가신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천관우는 동부여의 위치를 두만강 하류로 비정하고 있는데, 두만강 그 위쪽일 가능성이 높다. 동부여의 정벌이 쉽지 않은 것은 그곳이 험준한 산악지대로 둘러싸여 있어서 대군을 이끌고 접근하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고구려를 둘러싼 서북방, 북방, 남방의 나라들을 공략하여 굴복시킨 광개토태왕은 마지막으로 동북방의 공략에 나섰다. 동부여까지 정벌하여 동북방의 안정을 되찾으면 일단 고구려를 둘러싼 발호세력을 완전히 잠재우게 되어 평화를 유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당시 광개토태왕이 원정군을 이끌고 동부여로 가기 위해서는 유일한 통로가 개마고원을 경유해서 두만강을 건너는 길밖에 없었다. 압록강과 두만강 상류의 험준한 산악지대는 빽빽한 밀림지대여서 대군이 진군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뒤따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광개토태왕은 원정군을 이끌고 동부여의 수도 여성(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음)으로 가는 길에 여러 성을 함락하였다. 고구려 원정군이 수도인 여성까지 쳐들어가자 동부여의 왕은 사절을 보내 항복하였다. 이때 고구려는 동부여의 64개 성, 1,400촌을 함락하였다.
동부여를 제압하고 회군할 때 광개토태왕은 동부여의 높은 관직인 압로들을 볼모로 데려갔다. 미구루압로, 비사마압로, 단사루압로, 숙사사압로,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압로 등 5명의 압로가 그들이었다.
이로써 광개토태왕은 고구려 국경의 남쪽, 서북쪽, 북쪽, 동북쪽에서 각각 수백 리 또는 1,000여 리의 국토를 확장하여 재위 기간 동안 무려 그 이전 시기에 비하여 200배 이상의 영토를 넓혔다. 과연 능비에 나오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이름을 얻기에 충분한 공로라 아니할 수 없다.
광개토태왕은 동부여 정벌 후 재위 22년 10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어떤 이유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아직까지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
출처 : 미래역사
글쓴이 : 재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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