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전성시대인 광개토호태왕과 장수왕 때 당시 중원 국가는 북쪽의 북위, 남쪽의 남조입니다. 그런데 당시 남북조 중 강력했던 중원 국가 북위는 고구려보다 국력이 약한 국가였습니다.
백제의 개로왕이 북위에 국서를 보낼 때 같이 고구려를 차자고 했으나 북위는 그것을 거절하고 오히려 백제의 국서를 고구려에 바치기도 했습니다.
이는 북위가 적어도 고구려보다 국력이 약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당시 국제정세가 북위에게 불리(북위는 동쪽으로는 고구려, 남쪽은 남조, 북쪽은 유연, 서쪽은 토욕혼에 의해 포위된 상황)했기 때문에 백제의 국서를 고구려에 보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국제상황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국서를 고구려에 바쳤을까요?
이는 고구려가 북위보다 국력이 강했다는 것과 더불어 북위가 고구려의 속국이었음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고구려의 정복 군주인 광개토호태왕은 일전에 북위를 정벌했습니다.
먼저 고구려의 북위정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지요
지나의 역사책이자 북위의 역사를 기록한 『위서』「태조기」를 보면 영락(광개토대제 연호) 8년인 서기 398년 북위의 한 때 수도였던 업(하북성 남부지방, 지금의 태원 일대)에 고구려인 46만과 기술자 10만이 가득차서 수도를 업에서 평성으로 옮긴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기록을 북위가 고구려를 침공하여 포로로 잡아갔다고 해석을 하는데 한마디로 어불성설입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북위가 56만에 이르는 고구려 포로를 잡았다는 것은 고구려를 멸망시키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고구려가 북위를 정벌했다는 증거는 위서에서 "북위가 업에 고구려인이 가득차자 수도를 평성으로 옮긴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수도라는 것은 그 나라의 중심지라 마음대로 옮길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북위가 수도를 업에 둔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를 평성으로 옮겼다는 것은 고구려가 북위의 수도였던 업을 공략해 그 곳을 차지했고 고구려에 밀린 북위가 업을 버리고 평성으로 도망갔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광개토호태왕는 하북성 이남지역인 넓은 지역을 영구히 고구려의 영역으로 확보하기 위해 고구려인 56만(기술자 10만 포함)을 이 곳으로 이주했다는 것을 위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북위가 고구려의 속국이었다는 증거
1.북위의 북연침공
서기 436년 북위와 고구려의 완충지대에 놓인 북연이 북위의 침입을 받아 멸망 지경에 이르자 북연이 자신들의 상국인 고구려(북연을 건국한 고운이 고구려인이었다는 점과 고구려 광개토호태왕가 그를 북연의 왕으로 인정한 점을 볼 때 북연이 고구려의 신국(臣國)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북연의 요청을 받은 장수왕은 갈로와 맹광을 보내 북연을 접수하게 했습니다. 이 때 고구려는 북연왕과 북연의 종묘사직을 고구려로 옮기는데 북위가 그것을 개입하지 않앗다고 합니다.
북위가 고구려의 북연 접수과정을 가만히 지켜보았다는 것은 북위가 고구려의 상대가 되지 않는 것과 북위 또한 고구려의 한낱 신후(臣侯)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2.북위에 북위 역사서 바치라고 요구
고구려 장수왕 23년인 서기 435년 장수왕는 북위에 사신을 보내 북위 역대 왕의 계보를 바치라고 요구를 하였습니다. 이 때 북위 조정은 논란이 많았지만 결국 고구려의 요구대로 자신들의 역대 왕의 계보와 이름 적은 것을 사신을 통해 고구려에 바쳤습니다.
역대 왕의 계보와 이름을 적은 것은 그 나라의 역사인데 고구려에서 이것을 바치라고 한 것은 북위의 역사를 바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한 나라의 역사를 바치는 것은 신하의 나라가 천자(임금)의 나라에게만 하는 행위였습니다.
즉 고구려에서 북위의 역사를 바치라고 한 것은 고구려가 북위의 상국이었음을 알 수있고 북위가 고구려의 속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장수황제와 문자명왕의 죽음
서기 491년 한민족의 대영웅인 장수왕이 붕어하자 당시 북위의 왕 고조(471~499)가 소위모라는 흰색 모자와 포심의라는 상복을 입고 동쪽 교외에 나가 애도를 표하는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21대 황제 문자명왕이 붕어하자 북위에서는 전왕 세종의 부인이며 숙종의 어머니인 영태후가 슬퍼하며 동쪽 사당에 애도를 표시했고 조문사절을 고구려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508년 당시 북위의 왕 세종이 고구려의 시조를 제사지내는 고려묘라는 사당을 세운 바 있습니다.
신라 무열왕이 죽었을 때 당 고종이 애도식을 거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당을 세우고 임금이 직접 애도하지는 않았습니다. 지나의 어떤 나라도 다른 나라 왕이 죽었을 때 상복을 입고 왕이 친히 애도식을 주관하며 그 나라 시조를 제사를 지어준 예는 없습니다.(이는 고구려에서도 마찬가지)
그런데 북위가 이런 행위를 했다는 것은 북위가 고구려보다 힘이 약한 국가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백제의 개로왕이 북위에 국서를 보낼 때 같이 고구려를 차자고 했으나 북위는 그것을 거절하고 오히려 백제의 국서를 고구려에 바치기도 했습니다.
이는 북위가 적어도 고구려보다 국력이 약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당시 국제정세가 북위에게 불리(북위는 동쪽으로는 고구려, 남쪽은 남조, 북쪽은 유연, 서쪽은 토욕혼에 의해 포위된 상황)했기 때문에 백제의 국서를 고구려에 보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국제상황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국서를 고구려에 바쳤을까요?
이는 고구려가 북위보다 국력이 강했다는 것과 더불어 북위가 고구려의 속국이었음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고구려의 정복 군주인 광개토호태왕은 일전에 북위를 정벌했습니다.
먼저 고구려의 북위정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지요
지나의 역사책이자 북위의 역사를 기록한 『위서』「태조기」를 보면 영락(광개토대제 연호) 8년인 서기 398년 북위의 한 때 수도였던 업(하북성 남부지방, 지금의 태원 일대)에 고구려인 46만과 기술자 10만이 가득차서 수도를 업에서 평성으로 옮긴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기록을 북위가 고구려를 침공하여 포로로 잡아갔다고 해석을 하는데 한마디로 어불성설입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북위가 56만에 이르는 고구려 포로를 잡았다는 것은 고구려를 멸망시키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고구려가 북위를 정벌했다는 증거는 위서에서 "북위가 업에 고구려인이 가득차자 수도를 평성으로 옮긴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수도라는 것은 그 나라의 중심지라 마음대로 옮길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북위가 수도를 업에 둔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를 평성으로 옮겼다는 것은 고구려가 북위의 수도였던 업을 공략해 그 곳을 차지했고 고구려에 밀린 북위가 업을 버리고 평성으로 도망갔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광개토호태왕는 하북성 이남지역인 넓은 지역을 영구히 고구려의 영역으로 확보하기 위해 고구려인 56만(기술자 10만 포함)을 이 곳으로 이주했다는 것을 위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북위가 고구려의 속국이었다는 증거
1.북위의 북연침공
서기 436년 북위와 고구려의 완충지대에 놓인 북연이 북위의 침입을 받아 멸망 지경에 이르자 북연이 자신들의 상국인 고구려(북연을 건국한 고운이 고구려인이었다는 점과 고구려 광개토호태왕가 그를 북연의 왕으로 인정한 점을 볼 때 북연이 고구려의 신국(臣國)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북연의 요청을 받은 장수왕은 갈로와 맹광을 보내 북연을 접수하게 했습니다. 이 때 고구려는 북연왕과 북연의 종묘사직을 고구려로 옮기는데 북위가 그것을 개입하지 않앗다고 합니다.
북위가 고구려의 북연 접수과정을 가만히 지켜보았다는 것은 북위가 고구려의 상대가 되지 않는 것과 북위 또한 고구려의 한낱 신후(臣侯)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2.북위에 북위 역사서 바치라고 요구
고구려 장수왕 23년인 서기 435년 장수왕는 북위에 사신을 보내 북위 역대 왕의 계보를 바치라고 요구를 하였습니다. 이 때 북위 조정은 논란이 많았지만 결국 고구려의 요구대로 자신들의 역대 왕의 계보와 이름 적은 것을 사신을 통해 고구려에 바쳤습니다.
역대 왕의 계보와 이름을 적은 것은 그 나라의 역사인데 고구려에서 이것을 바치라고 한 것은 북위의 역사를 바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한 나라의 역사를 바치는 것은 신하의 나라가 천자(임금)의 나라에게만 하는 행위였습니다.
즉 고구려에서 북위의 역사를 바치라고 한 것은 고구려가 북위의 상국이었음을 알 수있고 북위가 고구려의 속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장수황제와 문자명왕의 죽음
서기 491년 한민족의 대영웅인 장수왕이 붕어하자 당시 북위의 왕 고조(471~499)가 소위모라는 흰색 모자와 포심의라는 상복을 입고 동쪽 교외에 나가 애도를 표하는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21대 황제 문자명왕이 붕어하자 북위에서는 전왕 세종의 부인이며 숙종의 어머니인 영태후가 슬퍼하며 동쪽 사당에 애도를 표시했고 조문사절을 고구려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508년 당시 북위의 왕 세종이 고구려의 시조를 제사지내는 고려묘라는 사당을 세운 바 있습니다.
신라 무열왕이 죽었을 때 당 고종이 애도식을 거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당을 세우고 임금이 직접 애도하지는 않았습니다. 지나의 어떤 나라도 다른 나라 왕이 죽었을 때 상복을 입고 왕이 친히 애도식을 주관하며 그 나라 시조를 제사를 지어준 예는 없습니다.(이는 고구려에서도 마찬가지)
그런데 북위가 이런 행위를 했다는 것은 북위가 고구려보다 힘이 약한 국가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출처 : 파랑새는 오늘도 비상을 꿈꾼다
글쓴이 : 다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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