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明聖帝의 王칭은 왜? 불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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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明王 이라 칭하는 근거는 지금 북한 평양의 동명제묘 현판에 東明王이라 돼있다. 동명제묘는 고구려 때 장수대왕이 대동강 남평양을 건설하면서(원래 평양성은 지금의 요하{비류수} 서안에 평양성이 있고 그 서남쪽 60리 거리의 대능하 동안에 안시성이 있다) 동명제묘도 세웠을 것이며 그간 재건되기도 하였으나 고구려 때 조성되었음으로 그대로 전해왔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고려 때 유학이 본격화되면서 김부식의 삼국사기 등 우리 역사의 황제를 격하시키는 등 역사가 크게 비하 조작되었다. 유학자 김부식 일파는 묘청 등의 평양성 천도 지지와 맞서 유약한 인종의 근신들부터 선참후계 명목으로 도륙을 하고 평양 지역의 묘청 등 일파를 무력으로서 기습 섬멸하고 이김으로서 김부식은 참주주의자가 되어 인종을 능가하는 권좌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유학자들을 동원하여 중국을 종주로 하는 삼국사기를 짓고 이전의 고려의 삼국사는 남김없이 없애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고 신라의 명장 김유신의 묘비문도 저들의 중국 중심적 사대사상에 걸맞은 비문으로 개조하였다. 마땅히 이 무렵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물들 즉 삼국사와 고려사도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다시쓰 황제를 왕으로 격하시키고 동명제묘의 현판도 동명왕이라 격하시켰다. 이는 여진족 금나라를 중국으로 보고 금나라의 힘을 배경으로 하여 김부식 일당이 정권을 잡고 중국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왕조의 영명한 세종대왕은 정삼봉의 고려사 저술에 대하여 불경을 범한 졸작이라고 평가하고 다시 근거를 찾아서 “동명성제東明聖帝”이시다 라고 복원하였다[세종실록 참조]. 그렇다면 어디에 근거하여 동명성제 라고 복원했는가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고려말 조선초기 규보 이상국집李相國集에 의하면 동명제의 죽음에 대하여 고려국사 삼국사의 승천升天을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승하昇遐 라고 하여 격하시켰다 라고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비난한 글이 있다. 승하昇遐는 중국의 제후 왕의 죽음에 칭하는 것이며 승천升天[광개토태황의 죽음에 기록},은 우리역사의 황제의 붕어를 칭한 것이다. 동명제의 죽음을 용비승천龍飛升天[광개토태황제비문], 이라 기술하였다.
또 삼국유사에 의하면 《國史‧高(句)麗本記》云: 「始祖<東明聖帝>, 姓<高>氏, 諱<朱蒙>. 일연은 말하기를 고려국사(高麗三國史) 고구려본기에 말하기를 시조 동명성제 성 고씨 이름은 주몽이시다. 라고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김부식 일당은 동명성제의 위호를 삼국사기에서 동명성왕東明聖王 라고 격하시켰다는 사실은 확인 되는 것이다. 또 東明聖帝의 東明의 明이란 과연 어떻한 의미인가? 고구려시대 모두루牟頭婁塚(모두루는 광개토태황의 신하), 묘지문에 의하면 “동명제와 광개토태황은 日月之子 河泊之孫 달과 해의 아들이시며 하박의 자손이시다 라고 하였다. 달月은 무엇이며 해日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달은 단군檀君의 단檀은 박달 즉 하박달月의 달月을 말하며 해日는 북부여 천제 해모解慕수의 解 음차 해(태양) 단군의 존칭 “달月” 북부여천제의 존칭 해(태양)을 말한 것이다. 고구려 시조 동명성제의 明, 유리명황儒리[竹里]明皇의 明은 모두 단군검(하박달검)의 해와 달을 모두 달月 이라 칭하던 태고시대 단군검을 지칭한 것이며 북부여 천제 해모수의 해解(音借) 즉 태양을 지칭한 것이다.
3세기塚(고구려 무덤), 版刻塼(고구려인들의 풍속 고인의 머릿 맡에 4각 판을 세우고 글자를 새겨 구은 것)에 의하면
始祖立 [서瑞]日月之子 承古(北)夫余古邑(遂)成王(國), 十年東西南北(殉)殊繼 (東)明帝逐多(推戴) 护(年號)寧東, 百殊司吏, 玄菟定邑(東沃沮) 都沸流安 久泰長 薉[穢]禮 樂(浪)以 百濟 高句麗 殊伐天府繼 祖鄒牟王意 民泰國安 百殊心意 始年功建國 都玄菟郡紛繼[고구려연구학회소장] 시조가 나라를 세웠다. 그는 상서러운 달과 해의 아들이시며 옛 북부여를 이어 옛 읍에 왕국(고구려)를 세우시다. 10년에 동서남북 4방에서 동명제에 추대되어 년호를 녕동寧東이라 하다. 현토(동옥저 今天津 남)를 평정하여 읍을 건설하고 도성은 비류수 안(今遼河서안 坪穰城)에 두었다. 예맥과 낙랑을 아우러고 백제와 고구려를 통합함으로서 하늘의 소명을 이룩하다. 처음에 추모왕으로서 공을 드려 건국할 때 백성과 나라의 안위를 위하여 성심을 다하여 처음에 나라를 세우고 도성은 현토 경계선 가까이에 두었다.
동명제는 추모왕으로 건국을 개시 10년에 동명제에 오르고 도성은 현토 경계선 가까이(忽本城)에 두었다가 동명제에 올라 비류수 안 평양성坪穰城으로 천도하였다.(진시황이 秦王政에서 시황제에 오른 것과 같은 맥락이다).
十年東西南北(殉)殊繼 (東)明帝逐多(推戴) 창업개시 10년에 동명제에 추대 황제에 올랐다고 하였는데 삼국유사에 유사 기록이 있다. 十年<東明帝>立 滅<北沃沮>[靺鞨(一作勿吉) 渤海] 창업개시 10년에 동명제에 올라 북옥저(동옥저 玄菟)멸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도 같은 내용이 있는데 十年.冬十一月, 王命<扶尉猒>, 伐<北沃沮>, 滅之, 以其地爲城邑.[三國史記 13卷-高句麗本紀1-東明聖王-10年] 10년 동11월 부위염에 명하여 북옥저(동옥저 현토),를 멸하고 성읍을 삼았다. 호로 김부식 놈이 동명제에 오른 사실만 삭제하였음이 확인된다.
而建都焉 句余(高句麗)帝位隹臺(推戴) 亟都平穰 迎王王[광개토태황비] 홀본성 건설 완료 즈음(10년) 구여(려,고구려) 황제에 추대 평양성을 도성으로 삼고 등극하여 속속 왕국(비류왕 등 압록나, 위나, 환나, 행인국, 발해서안 낙랑 예맥 왕국)의 왕들을 복속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