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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왕이 건넜다는 엄리대수는 어디였을까? 추모왕이 북부여에서 길을 떠나 남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부여의 엄리대수라는 물가에 다다라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따님이 어머니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라'고 말하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 떼가 물위로 떠올라,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광개토대왕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사진 좌측으로 보이는 현재의 혼강을 엄리대수로 보기도 한다. <삼국사기>에는 추모왕이 강가에 이르러 물을 건너가려 할 때 뒤따라오는 군사에게 붙들릴까 염려되는 상황에서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쓰여 있다. 북부여의 군사가 추모왕을 뒤쫓아 왔다면 북부여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렇다면 엄리대수는 북부여 인근을 흐르는 북류 송화강 부근이거나, 아니면 환인 서북쪽에 위치한 통화를 흐르는 혼강 상류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추모왕이 졸본부여에 이르렀더니 졸본부여왕이 아들은 없고 다만 딸 삼형제가 있었다면서, 부여왕은 추모왕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고 돼 있다. 그 뒤 얼마 되지 않아서 졸본부여왕이 죽고 추모왕이 왕위를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는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 소서노가 처음 우태와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았는데 우태가 죽은 뒤 북부여에서 도망온 추모왕과 결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추모왕이 환인에 도착하여 나라를 세우기까지 환인 토착세력의 협조가 절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류국에 도착한 추모왕은 비류국의 송양을 제압한 후 그 지방을 '다물도'로 칭하고 송양에게 비류지역의 자치권을 부여하는 방법으로 송양 세력을 고구려에 편입시킨다.
그 때문인지 중국의 <후한서 고구려조>는 고구려 사람들은 성질이 흉악하고 급하며, 기력이 있고 전투를 잘하고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고 비난하고 있다.
추모왕은 기원전 37년 나이 22세에 나라를 세운 후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건국을 기원전 37년으로 확정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건국하여 기원후 668년에 당나라에 멸망하였으므로 705년간 지속된 것이 된다.
<한서 지리지>에는 기원전 37년 이전에 이미 압록강 유역에 고구려라는 이름을 가진 세력이 존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군을 설치할 때 현도군 내에 세 곳의 현(행정기구)을 설치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고구려였다고 한다. 위만조선이 멸망한 시기가 기원전 108년이므로 적어도 기원전 108년 무렵 고구려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중국의 일부 학자와 북한 학자들은 고구려의 건국 시기를 기원전 277년으로 주장한다.
추모왕이 환인에 도착하여 나라를 건국하면서 이미 환인 비류수 부근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연타발, 소서노의 졸본부여나 비류지역 송양의 나라 이름이었던 고구려를 계속 사용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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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미래역사
글쓴이 : 재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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