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북위(北魏)를 세운 선비족(鮮卑族) 탁발씨(拓拔氏)의 발상지인 흥안령 산맥 동북쪽 아리하(阿里河)에 다녀왔다. 고구려와 북위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위서(魏書) 고구려전’은 북위의 문명태후(文明太后)가 헌문제(獻文帝: 재위 466~471)의 후궁으로 장수왕(長壽王: 재위 413~491)의 공주를 보내라고 요구했다고 전한다. 장수왕이 공주는 이미 출가했다며 조카딸을 대신 보내겠다고 하자 북위는 안락왕(安樂王) 진(眞)을 국경까지 보내 예물을 전한다.
그러나 장수왕은 조카딸도 보내지 말자는 신하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조카가 죽었다고 거절했다. 북위는 포기하지 않고, “그렇다면 종친의 딸을 가려 뽑아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 이것은 북위가 고구려의 후원이 반드시 필요했던 상황의 표현인데, ‘위서’는 이때 마침 헌문제가 죽어 중지됐다고 전한다. ‘위서’를 보고 쓴 ‘삼국사기’ 장수왕조도 비슷한 내용을 적고 있다.
그런데 헌문제의 뒤를 이은 효문제(孝文帝: 471~499)의 부인 문소황후(文昭皇后) 고(高)씨가 고구려 출신이란 점에서 ‘헌문제가 죽어 중지됐다’는 내용은 사료 은폐의 혐의가 짙다. ‘위서’ 문소황후 열전은 그를 ‘사도공(司徒公) 고조(高肇)의 동생’이라고 전하면서, 다른 대목에서는 고조를 ‘발해(渤海) 수인( 人)’이라고 적고 있다. 중국의 고대 사료는 고구려라고 써야 할 대목을 발해(渤海)라고 쓰는 것이 일종의 법칙이다.
문소황후 소생이 선무제(宣武帝: 500~515)가 되는데, ‘위서’는 선무제가 “즉위 직후 (고구려의) 삼촌들을 그리워해서 불렀다”고 전한다. 위나라는 493년 낙양으로 천도해 중원을 모두 석권한 상태였으니 고구려 여인의 아들이 낙양 황궁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중국 사료들이 중화사관으로 감춰 놓은 수수께끼들을 풀면 이렇게 감춰졌던 민족사의 전혀 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선비족과 고구려는 한족(漢族)들이 볼 때 같은 동호(東胡) 계열이다. 열린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바라보면 광활한 대륙이 보인다.
출처 : 미래역사
글쓴이 : 재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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