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8-06 16:29:32 http://ecnms21.cafe24.com 에서 펌.
94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고구려의 터전을 닦았던 태조대왕
한국사를 통틀어 왕위에 가장 오랫동안 있었던 왕은 고구려의 태조대왕이다. 김수로왕은 158년을 재위했다고 하나 신화적인 성격이 강하여 믿기 어렵다. 태조대왕은 고구려의 6대 왕으로 2대 왕인 유리왕의 3자 재사(再思)의 아들로, 아명은 어수(於漱)다. 7세인 서기 53년에 등극하여 94년간 재위에 있다가 서기 146년인 그의 나이 100살 때 왕위를 동생인 수성(遂成)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은거하여 별궁에서 20년을 더 살다가 120세의 나이로 죽었다. 차대왕(次大王) 수성은 서기 146년에 즉위하여 165년 국상(國相) 명림답부(明臨答夫)에 의해 주도된 구데타에 의해 살해 될 때까지 21년간 재위에 있었다. 차대왕이 선양받을 때의 나이는 76세였고 그가 명림답부의 구데타로 살해될 때의 나이는 100살에 가까운 97세였다. 그러나 일설에는 태조 대왕이 죽어 그 왕위를 물려받기를 고대했던 수성이 그의 나이가 80이 가까워지자 참다 못하여 구데타를 일으키고 태조대왕을 유폐시켰다는 설도 있다. 태조대왕은 90여 년간의 통치기간 중 전반 50여년 간은 외침에 대비하기 위한 국방력 강화와 주변국 정리에 전력하여 국력을 충실히 양성했고 후반 40년 동안 그 동안 배양한 실력을 기반으로 대외경략에 나서 고구려가 북방의 강국으로 등장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
그림1. 태조대왕 때의 고구려 강역과 유주자사부 예하의 각 군의 경계
1. 태조대왕의 전반기 활동
1) 요서지방에 10개의 성을 축조하여 거란족과 한나라의 군현인 현도군의 침략에 대비했다.
2) 지금의 함경도 지방에 있었던 동옥저를 완전 병합하여 고구려에 복속시켜 한나라 군현인 낙랑군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고, 동부여가 망하자 여러 나라로 분열된 동족의 소국들을 병합했다.
2. 태조대왕의 후반기 활동
1) 을사전역(乙巳戰役)
서기 105년 태조대왕 53년 을사년에 한나라가 설치한 요동군을 공격하여 그 관하 16현 중 6현을 점령하여 고구려의 영토로 삼았다. 3월 봄에 공세를 시작하여 9월이 되어 동절기가 닥쳐오자 공세를 중지했다.
2) 요동반도 지방을 경락하기 위한 순시 감행
요동군의 1/3에 해당하는 6개의 현을 점령한 태조대왕은 요동반도를 경략할 계획을 품고 압록강 강안을 따라 그 하류로 나아가 요동반도의 동남부를 순행하였다.
3) 요동전역(遼東戰役)
태조대왕 66년 서기 118년 그 동안 줄기찬 고구려의 통상 요청을 거절한 한나라에 대해 고구려가 불만을 품은 결과 태조대왕은 이웃의 현도군을 공격했다.
4) 한나라 침략군의 퇴치
태조대왕의 고구려가 요동군 관하의 6개의 현을 빼앗아 가고, 다시 현도군을 여러 차례에 걸쳐 공격하자 이에 한나라는 위협을 느껴 고구려의 서진(西進)에 거국적으로 대처해야 함을 느꼈다. 이에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 현도태수(玄 太守) 요광(姚光), 요동태수(遼東太守) 채풍(蔡諷) 등이 한 자리에 모여 고구려를 정벌하기로 했다. 태조대왕은 한나라 군사들이 공격에 대비하여 그 동생 수성(遂成)을 대장으로 삼아 정면으로는 대항하면서 한편으로는 한나라의 장수 세 사람간을 이간시키는 작전을 펼쳤다. 한나라 선봉대 요광의 공격을 2천의 군사로 막으면서 작은 수의 군사로는 정면공격으로는 한나라 대군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여 거짓 항복을 청해 한군의 진격속도를 늦추고 고구려군의 지원병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번 다음 3천의 별동대로 하여금 현도군의 후방에서 급습하게 하였다. 이에 허를 찔린 현도태수 요광이 퇴각을 하자 그 뒤를 추격하여 태자하와 요하 사이에 있던 전략적 요지인 요대(遼隊)를 점령했다. 승세를 타고 계속진격하던 3천 명의 고구려군사들은 요대(遼隊)를 탈환하기 위해 지금의 요녕성 요양시(遼陽市)인 양평(襄平)의 치소에서 요동군의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던 요동태수 채풍과 조우하여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숫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용맹무쌍한 고구려군은 한나라 군사들을 대파하고 요동태수 채풍을 죽이는 대전과를 올렸다. 한편 태조대왕 자신은 선비족의 군대 8천 명과 1만 여명의 예맥 기병을 이끌고 현도군을 공격했다. 이에 한나라 조정의 회유를 받은 북쪽의 부여가 왕자 위구이(尉仇台)에게 1만의 기병을 주어 한나라를 돕게했다. 이에 형세가 불리하다고 느낀 고구려군은 군사를 거두어 본국으로 퇴각했다. 한편 한나라 조정도 유주자사부에 명하여 그 예하의 광양(廣陽), 어양(魚陽), 우북평(右北平), 탁군( 郡) 등의 군에서 3천 여기의 기병을 차출하여 지원하려고 하였으나 그 때는 이미 고구려군이 퇴각한 다음이었다. 부여의 참전으로 고구려는 한나라에서 빼앗은 땅을 모두 돌려주고 강화조약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림2. 태조대왕과 차대왕 수성의 현도군과 요동군 공략도
5) 현도군과 서안평의 점령
이어서 태조대왕은 현도군과 서안평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땅으로 삼았다. 서안평은 지금의 신의주 압록강 북안에 있는 단동시의 고대 때의 이름이다. 고구려가 서안평과 현도군을 차지했다는 말은 요동반도를 차지하기 위한 전진기지를 마련한 것을 의미한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제6대 태조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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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태조대왕<太祖大王 53~146 재위기간 93년> 남으로는 살수에 이르렀다.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가을 7월, 메뚜기 떼가 생기고 우박이 내려 곡식이 상하였다. 8월, 해당 관청에 명령하여 선량한 사람, 효성스런 사람, 온순한 사람들을 천거하게 하고,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노인과 늙어서 자기 힘으로 살 수 없는 자들을 조사하여,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주게 하였다. 예맥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병기와 마필과 재물을 모두 약탈하였다. 왕이 아우 수성에게 군사 2천여 명을 주어서, 풍 환·요 광 등과 싸우게 하였다. 수성이 한 나라 군영에 사자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겠다고 말했다. 풍 환 등은 이 말을 믿었다. 수성이 곧 험한 곳에 의지하여 대군을 막는 한편 비밀리에 군사 3천 명을 보내 현토·요동의 두 군을 공격하여, 그 성곽을 불지르고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 잡았다. 신창에 나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공조연 용 단과 병마연 공손 포는 자신의 몸으로 채 풍을 엄호하다가, 채 풍과 함께 진영에서 죽었다. 이 때 사망자가 백여 명이었다. 베풀어 노고를 위로하여 보냈다. 11월, 왕이 부여에서 돌아왔다. 왕이 아우 수성으로 하여금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총괄적으로 맡아보게 하였다. 하였다 하니, 멸망하였다가 다시 일어난 것인가?] 하였다. 미유와 환나부 우태 어지류와 비류나조의 양신 등이 남모르게 수성에게 말했다. "초기에 모본왕이 죽었을 때, 태자가 불초하여 여러 신하들이 왕자 재사를 왕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재사가 늙었다 하여 아들에게 양보하였다. 이는 형이 늙으면 아우에게 계승케하자는 것이었다. 이제 왕이 이미 늙었으나 양위할 뜻이 없으니, 그대는 대책을 세우라." 수성이 말했다. "맏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천하의 상도이다. 왕이 지금 비록 연로하다고 하지만 맏아들이 있는데 어찌 감히 왕위를 넘볼 수 있겠는가?" 미유가 말했다. "아우가 현명하면 형의 뒤를 잇는 일이 옛날에도 있었다. 그대는 이를 의심치말라." 이 때 좌보 패자 목도루는 수성이 왕이 되고자 하는 생각이 있음을 알고, 병을 구실로 벼슬을 하지 않았다. 없었다.가을 7월, 수성이 또 기구에 사냥가서 5일 만에 돌아왔다. 그의 아우 백고가 간했다. "화복은 들어오는 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이 불러 들이는 것이다. 지금 형은 왕의 아우라는 친족으로서 백관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지위는 이미 지극히 높고, 공로도 또한 훌륭하다. 따라서 마땅히 충성과 의리를 마음에 간직하고, 예절과 겸양으로 욕망을 억제하여, 위로는 왕의 덕과 같도록 노력하고, 아래로는 민심을 얻어야 한다. 이렇게 한 뒤에야 부귀가 형을 떠나지 않고 화란이 일어 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렇게 행동하지 않고, 향락에 빠져 걱정을 모르고 있으니, 형이 위태롭게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수성이 대답했다. "사람의 감정으로 누구인들 부귀와 환락을 원하지 않으랴만 이것을 얻는 자는 만 명에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제 내가 향락을 즐길 수 있는 처지에 있으니,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면 장차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는 끝내 백고의 말을 듣지 않았다. 사람들을 데리고, 현명한 임금을 폐위시키려고 하니, 이것이 한 오라기의 실로 1만 균의 물건을 매어놓고 거꾸로 끌어당겨 보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만일 당신이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충효와 공손함으로 대왕을 섬기면, 대왕께서는 당신의 어진 마음을 깊이 헤아려, 반드시 당신에게 양위할 마음을 가질 것이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화가 미칠 것이다." 수성은 이 말을 듣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좌우의 근신들이 그의 정직함을 질투하여 수성에게 참소하였다. "대왕이 나이 많아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울까를 염려하여, 후일에 대한 계책을 도모하려는 것인데, 이 사람이 이와 같이 망녕된 말을 하니, 우리는 이러한 사실이 누설되어 후환을 초래할까 염려된다. 따라서 이 사람을 죽여 입을 닫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수성이 그 말을 따랐다. 처자를 빼앗아 돌아왔다. 신하와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였으니, 내가 의지하고 일을 맡길 적임자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왕위에 올라 길이 경사를 누릴지어다!" 왕은 곧 왕위를 내어주고 별궁으로 물러났다. 이를 태조대왕이라 하였다.[[후한서]에는 "안제 건광 원년에 고구려왕 궁이 죽고 아들 수성이 왕위에 올랐다. 이 때 현토 태수 요광이 왕이 죽은 것을 기회로 삼아 군사를 출동하여 치고 싶다고 안제에게 말하니 모두가 찬성하였다. 상서 진충이 말하기를 '전에는 궁이 훌륭하고 영명하여 요광이 칠 수 없었는데, 그가 죽었다 하여 치는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니다. 마땅히 사자를 보내 조문하고, 예전의 죄과를 묻되, 용서하여 죽이지 말고 두었다가, 후일을 도모함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니, 안제가 이 말대로 하였다. 이듬해에 수성이 한나라 포로를 돌려 보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해동고기]에는 "고구려 국조왕 고궁은 후한 건무 29년 계사에 즉위하니, 이 때 나이가 7세였기 때문에 그 어머니가 섭정하였다. 효환제 본초 원년 병술에 이르러, 동복 아우 수성에게 왕위를 내어주니 이 때 궁의 나이가 1백세로서, 재위 94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건광 원년은 곧 궁의 재위 69년에 해당한다. [한서]의 기록과 고기의 기록이 서로 다르니, 혹시 [한서]의 기록이 틀린 것이 아닌가?]
태조대왕[국조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궁이고, 아명은 어수이다. 그는 유리왕의 아들 고추가 재사의 아들이고, 어머니 태후는 부여 사람이다. 모본왕이 죽었으나, 태자가 불초하여 나라를 맡을 수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궁을 맞이하여 모본왕에 이어 왕으로 삼았다. 왕은 태어 나면서 눈을 뜨고 볼 수 있었으며, 어린 나이에도 출중한 면모가 보였다. 그러나 이 때 나이 7세였기 때문에 태후가 수렴청정 하였다.
3년 봄 2월, 요서에 10개 성을 쌓아서 한 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가을 8월, 남쪽 지방에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4년 가을 7월, 동옥저를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을 만들어 국경을 개척하였으니, 동으로는 동해,
7년 여름 4월, 왕이 고안연에 가서 낚시를 하다가 날개가 붉은 백어를 낚았다.
가을 7월, 서울에 홍수가 나서 가옥이 물에 잠기거나 떠내려 갔다.
10년 가을 8월, 동쪽 지방에서 사냥을 하여 흰 사슴을 잡았다.
남쪽 지방에 날아다니는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16년 가을 8월, 갈사왕의 손자 도두가 항복해왔다. 도두를 우태로 삼았다.
겨울 10월, 우레가 있었다.
20년 봄 2월, 관나부 패자 달가를 보내 조나를 치고, 그 왕을 사로 잡았다.
여름 4월, 서울에 가뭄이 들었다.
22년 겨울 10월, 왕이 환나부 패자 설유를 보내 주나를 치고, 그 왕자 을음을 사로잡아 고추가를 삼았다.
25년 겨울 10월, 부여의 사신이 와서 뿔이 셋 달린 사슴과 꼬리가 긴 토끼를 바쳤다. 왕이 이를 상서로운 것이라 하여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11월, 서울에 눈이 3자 내렸다.
46년 봄 3월, 왕이 동쪽 책성으로 가는 도중에, 책성 서쪽 계산에 이르러 흰 사슴을 잡았다. 책성에 도착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술을 마시면서, 책성 관리들에게 물품을 정도에 따라 하사하였다. 그들의 공적을 바위에 새기고 돌아왔다. 겨울 10월, 왕이 책성에서 돌아왔다.
50년 가을 8월, 사신을 보내 책성의 백성들을 위무하였다.
53년 봄 정월, 부여 사신이 와서 호랑이를 바쳤는데, 길이가 1장 2척이며, 털 빛깔은 환하고, 꼬리가 없었다. 왕이 한 나라 요동에 장수를 보내 여섯 개 현을 약탈하게 하였다. 요동 태수 경 기가 군사를 동원하여 대항하였다. 왕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가을 9월, 경 기가 맥인을 격파하였다.
55년 가을 9월, 왕이 질산 남쪽에서 사냥하다가 자줏빛 노루를 잡았다.
겨울 10월, 동해곡 수령이 붉은 표범을 바쳤다. 그 표범의 꼬리가 아홉 자였다.
56년 봄에 가뭄이 들었다. 여름이 되자 땅이 붉게 변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57년 봄 정월, 한 나라에 사신을 보내 안제의 성년식을 축하하였다.
59년,왕이 예맥과 함께 현토를 침범하였다
62년 봄 3월, 일식이 있었다.가을 8월, 왕이 남해를 순행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남해에서 돌아왔다.
64년 봄 3월, 일식이 있었다. 겨울 12월, 눈이 다섯 자 내렸다.
66년 봄 2월, 지진이 있었다. 여름 6월, 왕이 예맥과 함께 한 나라 현토를 습격하여 화려성을 쳤다.
69년 봄, 한 나라 유주 자사 풍 환·현토 태수 요 광·요동 태수 채 풍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여름 4월, 왕이 선비의 군사 8천 명과 함께 요대현을 공격하였다. 요동 태수 채 풍이 군사를 거느리고
겨울 10월, 왕이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묘에 제사를 지내고, 곤궁한 처지에 있는 백성들을 위문하고, 정도에 따라 물품을 주었다. 숙신의 사신이 와서 자줏빛 여우 갖옷과 흰 매와 흰 말을 바쳤다. 왕이 연회를
12월, 왕이 마한과 예맥의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현토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를 시켜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한 나라 군사와 힘을 합쳐 대항케 하였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70년, 왕이 마한·예맥과 함께 요동을 공격하였다. 부여왕이 군사를 파견하여 한 나라를 구원하고,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였다.[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에 멸망하였는데, 지금 고구려왕과 함께 군사 행동을
71년 겨울 10월, 패자 목도루를 좌보로 삼고, 고복장을 우보로 삼아, 수성과 함께 정사에 참여하게
72년 가을 9월 그믐 경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 한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11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80년 가을 7월, 수성이 왜산에서 사냥을 하며 좌우의 근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이 때 관나부 우태
86년 봄 3월, 수성이 질산 남쪽에서 사냥하며 7일 동안 돌아오지 않고, 즐기기만 할 뿐 행동에 절도가
90년 가을 9월, 환도에 지진이 있었다. 왕이 밤에 꿈을 꾸었는데, 표범이 호랑이의 꼬리를 물어 끊었다. 왕이 잠을 깨어 좋은 꿈인지 나쁜 꿈인지를 물으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호랑이는 모든 짐승의 어른이며, 표범은 호랑이의 한 종류로서 작은 짐승이다. 아마도 왕의 친족 가운데 대왕의 후대를 끊으려고 획책하는 자가 있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왕이 기분이 좋치않아 우보 고 복장에게 "내가 어제 밤 꿈에 본 것에 대하여, 점치는 자의 말이 이러하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라고 물었다. 고 복장이 대답하였다. "안좋은 일을 하면, 좋은 것도 변하여 나쁜 것이 되고, 좋은 일을 하면, 재앙도 도리어 복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제 대왕께서 나라 일을 집안 일과 같이 걱정하며, 백성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시니, 비록 사소한 이변이 있다한들 무슨 걱정거리가 되겠습니까?"
94년 가을 7월, 수성이 왜산 아래서 사냥하면서 좌우의 근신들에게 말했다.
"대왕이 늙었으나 죽지 않고, 나도 나이가 많으니 기다릴 수 없다. 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계책을 꾸미기 바란다." 근신들이 모두 "삼가 명령에 따르겠다"라고 말하였다. 이 때 누군가가 혼자 나서서 "조금 전에 당신은 자신에게 결코 상서롭지 않은 말을 하였는데, 근신들이 올바른 말로 말리지 않고, 모두 삼가 명령에 따르겠다고 하였으니, 이는 간사하고 아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직언을 하려 하는데, 당신의 뜻이 어떠한지 모르겠다"라고 말하였다. 수성이 "그대가 직언을 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약이 될 터인데, 무엇을 의심하는가?"라고 대답하였다.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우리 대왕이 현명하여, 안팎으로 반역할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없는데, 당신이 비록 국가에 공로가 있다고 하지만, 간사스럽고 아첨하는 아랫
가을 8월, 왕이 장수를 보내 한 나라 요동 서쪽 안평현을 습격하여 대방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겨울 10월, 우보 고 복장이 왕에게 말하였다. "수성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니, 청컨대 먼저 그를 처형하소서." 왕이 말했다. "내가 이미 늙었고, 수성은 나라에 공이 있으니, 내가 그에게 왕위를 주려 한다. 그대는 염려하지 말라!" 복장이 말했다. "수성은 사람됨이 잔인하고 어질지 못합니다. 아마도 오늘 대왕의 왕위를 물려 받는다면, 내일은 대왕의 자손을 해칠 것입니다. 대왕은 다만 어질지 못한 아우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만 알고, 죄없는 자손들에게 후환이 미칠 것을 알지 못하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살피소서."
12월, 왕이 수성에게 말했다. "내가 이미 늙어서 모든 일이 힘들구나. 하늘의 운수가 너에게 있으며, 또한 네가 안으로는 국정에 참여하고 밖으로는 군사에 대한 일을 총괄하여, 오랫 동안 나라에 공로를 쌓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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