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guage & ... Writing/문자·언어

삼국시대의 언어

monocrop 2006. 12. 20. 21:37
언어와 문자는 민족 문화 형성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이다. 고대 우리 민족에게는 고유한 언어는 있었으나 문자는 없었던 것 같다.

현재 삼국의 언어를 동일한 언어의 방언으로 보든, 계통이 같은 별개의 언어로 보든 간에 삼국의 언어들은 서로 달랐다 라는 주장이 있다. 또 하나의 팽팽히 대립되는 주장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내용을 근거로 해서 삼국은 거의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전자의 주장은 현재 한반도에서 단일 언어가 사용되고 있고 또 중세이래 그래 왔다고 하더라도, 고대에도 반드시 그랬으리라는 법은 없다고 한다. 고대에는 단일 언어 국가가 드물었는데, 국가들 사이의 언어가 같았다고 까지 주장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고대 한반도의 남부와 북부의 언어 차이를 특수한 방언적 차이라고 말하는 학자들은, 이 언어들이 계통을 달리하는 언어는 아니라거나, 본래 한 갈래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점은 삼국의 언어가 달랐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계통이 같다고 해서 단일 언어인 것은 아니다. 예로 현대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는 한 갈래에서 나온 동일 계통의 언어이지만, 엄연히 다르다.

삼국의 언어가 달랐다고 주장하는 학자인 이기문은 고구려어로 대표되는 부여계외 여러 언어들과 신라어로 대표되는 한계(韓系)의 여러 언어가 가까운 친족 관계에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고구려어가 신라어나 백제어에 못지 않게 고대 일본어와도 가까운 친족 관계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고구려어와 백제, 신라어가 달랐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 가운데는, 고구려어를 비롯한 부여계의 여러 언어들을 한반도 언어와 분리해 퉁구스어파-오늘날 시베리아 동부, 사할린, 만주, 신장 등에 분포해 있는 알타이어족의 일파-에 소속시키는 견해가 있다. 이것은 일본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견해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언어가 의사 소통이 전혀 되지 않을 정도로 달랐다거나, 전라도, 경상도 방언 정도의 차이에 불과했다. 라고 하는 끊임없는 논쟁은 일제시대의 일인 학자들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들의 주장은 한반도 중남부 언어는 남방계이고, 그 북쪽인 고구려나 부여의 언어는 북방계 언어라고 주장해 온 것이다. 즉 한반도는 두 개의 별개의 언어를 사용한 민족이라는 것이다.

삼국의 언어가 같았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고구려와 백제의 지배층 언어가 같았다고 본다. 이들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그 근거로 들고 있는데, 삼국사기 고구려 장수왕 편에 보면 고구려의 첩자인 승려 도림이 백제로 잠입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도림은 죄를 짓고 도망쳐 온 것으로 위장하고 백제로 잠입했다.'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만일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사용하는 언어가 달랐다면 도림이 백제로 잠입하기 전에 백제어를 익혀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기록에는 그런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백제 장군 고이만년과 재증걸루가 고구려로 망명했다가 나중에 개로왕을 공격하여 생포하는 것을 보아도 백제 장군이 고구려 사람들과 의사 소통에 전혀 지장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으로 보아 고구려와 백제의 지배층이 사용하는 언어가 같았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백제 하층민의 언어와 신라의 언어가 같았다고 본다. 백제의 가난한 청년 서동이 신라의 선화 공주를 데려올 때, 신라 어린애들에게 노래를 가르쳐서 부르게 했다는 데에서도 두 나라의 언어가 같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이외에도 통역 없이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왜 등이 서로 의사 소통을 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곳곳에 보인다. 그 예로 계백장군과 관창의 대화, 연개소문과 김춘추의 담판, 백제인 건축가 아비지가 신라에 와서 건축 공사를 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북한 학계의 공식 입장은 삼국의 언어가 같았던 것은 물론이고 이미 부족국가 시기부터 한반도에서는 동일한 언어가 사용됐다는 것이다. 삼국지나 후한서 등 중국 사서에서 지적하는 한반도 부족국가들 사이의 언어의 다른 점이나,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유명사들의 어원적 해석이 드러내는 삼국 언어의 차이는 모두 방언적 차이에 불과하다는 것이 북한 학자들의 견해이며, 이것은 우리 학자들도 대개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말 뿌리 연구에 독보적인 업적을 남긴 북한의 대표적 국어학자인 유열씨는 <세나라 시기 리두에 대한 연구>와 <조선말의 역사>로 유명하다. 세나라 시기란 삼국 시대를 말하며, 그는 삼국 시대의 이두(吏讀)를 통해 우리말의 뿌리를 확인했다. 그는 각종 역사서에 남아 있는 삼국 시대 이두 자료, 즉 사람 이름, 땅이름, 벼슬 이름 등 모두 8백여 가지 표기를 하나씩 풀어 비교하는 실증적 방식으로 1500여년 전 우리말의 모습을 찾아냈다.

그의 연구 성과가 남쪽에 알려 지면서 상대적으로 우리말의 뿌리 찾기 연구 성과가 적었던 학계로부터 "거의 완벽한 연구 결과"라는 평가를 받았다.

삼국 각국간에 사용하는 단어에도 약간씩의 차이가 발견된다. 산을 말할 때 신라와 백제에서는 무리라고 말하고, 고구려에서는 달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바다의 경우 신라에서는 바랄이 바다의 옛말이지만 고구려에서는 전혀 다른 나미라고 불렀다고 한다. 신라에서 소나무를 지칭하는 솔은 고구려어로 붓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는 현재 우리나라 안에서 사용되는 사투리나, 또는 남한과 북한에서 쓰고 있는 단어의 차이 정도였다고 본다.

중국 쪽에서 기록한 역사서에도 마한, 진한, 변한의 말에 차이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부여, 고구려, 백제는 부여 계통이란 기록이 있는 점등은 의사 소통이 원활했으리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해 준다.

또한 삼국 시대에는 많은 인구를 서로 확보하기 위해 다투었고 변경의 주민들이 삼국을 서로 가리지 않고 왔다 갔다 했던 점과 수백년 간 전쟁을 통해 영토적으로 서로 겹친 경우가 많았던 점등을 고려해 볼 때 삼국이 서로 상대방의 언어에 대해 의사 소통에 어려움을 겪을 정도였다고 보기는 어렵고, 일상적인 의사 소통에서는 문제될 바가 없었다고 생각된다
 
 

국어사의 시대 구분에서 중세에 앞서는 가장 이른 시대의 국어. 국어의 문헌자료는 옛날로 올라갈수록 적어서 내외의 사적(史籍)에 기록된 고유명사들에 국한되어 있다. 고조선을 비롯하여 부여·옥저·예·마한·진한·변한 등의 언어에 대해서는 몇 개의 인명·지명·관직명을 한자로 적은 것이 전할 뿐이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자료도 지금까지 전하는 것이 많지 않아서 그 언어들의 참모습을 밝히기 어렵다. 자료는 적지만 기간이 너무 길어서 한마디로 고대국어라고 하기에는 무리한 점이 없지 않다. 여기에는 다음의 세 관점이 있을 수 있다.

첫째, 가장 넓게 보아 고대국어는 위에 든 여러 나라의 언어를 포괄하는 것으로 본다. 둘째,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언어를 포괄하는 것으로 본다. 셋째, 좁게 보아 신라의 언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셋째 관점에 선다면 고대 이전에 상고(上古)를 설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위에 말한 이른 시기의 언어들은 본래는 한 조어(祖語)에서 나온 갈래들로, 북쪽의 부여계(扶餘系)와 남쪽의 한계(韓系)로 크게 나뉘어 있었다.

고구려의 언어는 부여계에 속하고 백제·신라·가야의 언어는 한계에 속한다. 6세기에 가야가 신라에 병합되고 7세기 후반에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뒤, 신라의 언어로 국어 단일화의 길이 열리게 되었고, 신라어를 근간으로 중세국어가 고려초에 개성에서 형성되었다.

그런데 이 지방은 고구려의 고지(故地)였으므로 그 방언에는 고구려어의 요소가 적지 않게 남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백제어는 서남방언에 그 흔적을 남겼다
 
고대 삼국의 정립 때부터 고려 건국 이전까지의 국어.

고대의 한반도와 만주의 일부에는 고구려어·백제어·가야어·신라어가 각각 존재했는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는 한반도에서 신라어가 통용되었다. 국내외 사서(史書)의 기록을 통해 이들 언어의 성격을 단편적으로 엿볼 수 있는데, 공통되는 면도 있으나 서로 다른 면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어와 백제어는 서로 매우 비슷했지만 고구려어는 그들과 아주 많이 달랐으리라고 짐작된다. 이 언어들의 구체적인 모습은 매우 제약된 것이기는 하지만 국내외의 사서에 나타나는 인명·지명 등의 표기나 이두문의 표기, 〈삼국사기〉 지리지의 지명 표기 등을 통해 살필 수 있다.

그러나 그 대상으로 할 수 있는 어휘수는 그리 많지 않다. 신라어는 이들 자료 외에도 향가 25수의 차자표기(借字表記), 고대 일본어에 반영된 차용어 등으로 그 성격을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서술할 수 있다.

고구려어

고구려는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중국의 한자 문화와 접촉했을 것이니 고구려에서도 한자를 이용하여 국어를 표기하는 방법이 발달되었을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으나 그 자료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차자표기 자료로서 금석문에 이두로 기록된 '中', '節', '之'의 세 글자가 고구려어를 표기한 것인데, 이들은 신라 이두문에도 나타난다.

이두문뿐 아니라 국내외의 사서에서도 고구려의 어휘를 일부 찾을 수 있으나, 고구려어는 주로 〈삼국사기〉 지리지의 권 35, 37의 지명 표기를 통해 그 모습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은 고려시대에 김부식이 기록한 것이고, 특히 지명이라는 특수한 고유명사를 기록한 것이라서 자료의 성격이 매우 제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현재로서는 이 이상의 자료를 찾아낼 수 없다.

이 자료들을 통해 파악되는 고구려어 어휘수는 70개 안팎이나 이것만 가지고도 고구려어의 위치를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이 어휘들 가운데에는 다른 언어에서 찾을 수 없는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이 신라어, 알타이 제어(특히 퉁구스제어), 고대 일본어 등 다른 언어의 어휘와 대응된다. 특히 알타이 제어 사이에는 수사(數詞)가 일치되는 일이 드문데 고구려어와 고대 일본어 사이에는 뚜렷한 일치를 보인다. 이것은 두 언어가 같은 계통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고구려어는 고대 일본어·만주어·몽골어 등에 비하여 어말모음(語末母音)이 탈락한 모습을 보이며, 고대 일본어, 몽골어와의 대응에서 볼 때 제2음절 이하에서 t구개음화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난다.

백제어

백제의 지배층이 고구려에서 기원했기 때문에 초기의 지배층은 고구려어를 사용했지만 피지배층은 마한어(馬韓語)를 사용하는 저층(底層)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상층의 고구려어가 저층의 마한어를 동화시키지 못해서 백제어는 마한어의 연속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백제어의 자료는 고대 삼국의 언어 가운데 가장 적어 〈삼국사기〉 지리지를 통해 그 모습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백제어 지명은 '夫里'로 된 것이 많다. 이것은 신라어 지명의 '火'와 같은 계통의 것이지만 고구려어 지명의 '忽'과는 대조된다. 그러나 어말의 모음을 더 유지하고 있는 점은 신라어와 다르다.

백제어에서만 발견되는 어휘도 없지 않다. 성(城)을 뜻하는 '己'나 '只'는 신라어나 고구려어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인데, 고대 일본어에도 차용되어 쓰였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런 몇 가지 점을 제외하면 백제어의 어휘는 신라어와 대체로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백제어는 고구려어와 신라어의 완충적 성격을 띠기도 한다. 특히 t구개음화가 고구려어는 제2음절 이하에서만 실현된 데 비해 신라어에서는 어두에까지 일부 파급되어 있는데, 백제어는 그 중간적인 모습을 보인다. 백제어에는 어중(語中)의 'k'가 탈락되는 현상도 보인다. 이것은 중세국어 단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신라어

신라어 자료도 모두 한자를 이용한 차자표기로 되어 있다. 이 한자는 음으로 읽는 표기[音讀表記]뿐만 아니라 국어로 새겨 읽는 표기[釋讀表記]로도 되어 있다. 이 방식은 지명·인명·관직명 등의 고유명사 표기, 이두문, 향가 등에 다 나타난다. 신라어 자료는 백제어나 고구려어의 자료보다 많이 전하고 있는 편이지만 〈삼국사기〉 지리지 권3의 몇 예와 신라 이두문에 사용된 이두 글자 30자 내외, 향가 25수의 자료 정도밖에 없어 그 성격을 정확히 밝혀내기에는 미흡한 면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신라어가 위로는 한계제어(韓系諸語)의 진한어(辰韓語)를 잇고 아래로는 중세국어에 이어짐을 알 수 있다. 다음에 서술되는 고대국어의 특성은 거의 신라어 자료에 의한 것이다.

음운

자음체계에 있어서는 평음 계열과 유기음 계열이 있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경음 계열은 아직 발달되지 않았던 듯하다. 유기음 계열도 알타이 공통조어에서 분기된 시점에서는 존재하지 않다가 뒤에 발달되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지금으로서는 고대국어에 유성마찰음(ㅸ, ㅿ)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음절말 위치에서의 자음은 후기 중세국어나 현대국어에서와는 달리 내파음으로 발음되지 않아서 'ㅊ,ㅌ' 등의 받침이 제소리대로 발음되었다. 모음체계는 전기 중세국어에서와 마찬가지로 7단모음체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ㅣ'와 'ㅏ'에 해당하는 모음을 제외하고는 모두 지금과 달리 발음되었다. 모음조화는 중세국어에서 보다 더 강력하게 지켜졌던 것으로 보인다.

한자음[東音]은 대체로 중국의 중고음(中古音)을 바탕으로 국어화하여 받아들여졌다. 중국 한자음의 입성운미(入聲韻尾)는 동음에서 중고음이 반영되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상고음(上古音)이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중국 상고음의 입성운미 '*t'(*표시는 再構音을 나타냄)는 신라음에 'ㄹ'로 반영되었으며 '*k'는 'ㄱ'으로 반영되었다. 중국 한자의 유성음인 전탁(全濁) 계열은 무성음으로, 복잡한 운두(韻頭)와 운복(韻腹)은 간략화되어 단모음이나 이중모음으로 받아들여졌다.

어휘

신라어의 어휘는 중세국어와 많이 일치한다. 그러나 중세국어에서 확인되지 않는 어휘도 많이 있다. '福, 卜, 巴, 伏' 등으로 표기되어 '아이'[童]를 뜻했던 어휘는 퉁구스제어의 어형들과 고대 일본어의 어휘에 대응되지만 중세국어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고유어로 불리던 인명·지명·관직명을 신라 경덕왕(757) 때 중국식을 본떠 두 글자의 한자로 고친 일은 고유어가 한자어로 대폭 교체되었음을 보여준다. 한자어는 중국의 문어인 한문을 통하여 우리말에 받아들여졌다. 그밖에 '붇'·'먹'과 같은 어휘는 중국의 구어 '筆'·'墨'에서 차용되었다.

문법

조사는 주격(主格)·속격(屬格)·처격(處格)·대격(對格)·조격(造格)의 격조사와 주제의 보조사 등이 확인된다. 다른 것들은 중세국어에 거의 다 나타나는 것들이지만, 처격조사는 '良', '良中', '衣', '矣', '惡中', '中' 등으로 그 종류가 많았다. 이중 '衣', '矣'는 속격조사와 형태가 같았다. 주어가 나타나야 할 곳에 쓰이는 속격조사의 용법도 있었다.

활용어미도 중세국어에서 확인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隱', '乙'로 표기되는 어미는 동명사적 용법과 관형사적 용법 모두를 보이는데 원래 동명사적 용법만 보이던 것이 뒤에 관형사적 용법을 더 갖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세국어에서 확인되지 않는 독특한 용법을 보이는 것도 없지 않았다. 종결어미 '齊'도 그렇지만, 지속태의 '音'과 추량·미래의 '古' 등 선어말어미는 중세국어나 현대국어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현대의 일부 방언에만 화석처럼 남아 있는 어미이다. 경어법 요소는 존경법, 겸양법이 각각 '賜', '白' 등으로 표기되었으나 공손법 요소는 적극적으로 표기되어 나타나지 않았다.

의도법 요소도 확인되며, 시제 요소도 거의 다 확인된다. 특히 '內'로 표기되는 선어말어미는 현재시제 외에 관형사적 용법도 보인 듯하고 출현분포가 중세국어에서와는 아주 다른 모습을 나타냈다. 그외 접미사 '-i,-o'계의 것은 파생과 굴절의 2가지 성격을 다 갖고 있었고 동사 어간이 다른 어간과 직접 통합하여 복합어를 이루는 현상도 있었다.

의문사가 있을 때 그에 호응하는 의문어미가 '古'로 나타나는 점은 중세국어와 같다. 아직 향가 자료가 매우 빈약하고 그 해독이 완벽한 수준에 이르지 않을 뿐 아니라 이두문에서 확인되는 문법 요소도 30가지를 넘지 못하기 때문에, 신라어의 문법이나 고대국어의 문법을 전반적으로 서술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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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역사이야기★ 카페의 지식 게시판"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 원문보기
 
작성자: (ㅡ▽ㅡ*)v (레벨3)
추천: 0 조회: 120 등록일: 06.04.19  다음신지식에서 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