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에 있는 것으로 해석해봅시다.
[번역문]
중앙조정의 사신 도찰원 첨도어사(都察院僉都御史) 유사길(兪士吉)·홍려시 소경(鴻臚寺少卿) 왕태(汪泰), 내사(內史) 온전(溫全)·양녕(楊寧)이 조서(詔書)를 받들고 오므로, 산붕(山棚)을 맺고, 나례(儺禮)와 군위(軍威)를 갖추고, 임금이 면복(冕服) 차림으로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서교(西郊)에서 맞이하여 대궐에 이르러 조서를 선포하였다.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는 조(詔)하노라. 옛날 우리 부황(父皇)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천하에 림어(臨御)하신 지 40년에 온 세상이 모두 신첩(臣妾)이 되었는데, 고황제께서는 군신(群臣)을 버리시고, 건문(建文)이 위(位)를 이으매, 권세가 간특한 자에게 돌아가 헌장(憲章)을 변란(變亂)시키고 골육을 살해하여, 화기(禍幾)가 거의 짐(朕)에게 미치게 되었다. 이에 조훈(祖訓)을 이어받아 부득이 군사를 일으켜서 대악(憝惡)을 없애었다. 천지 조종(天地祖宗)의 신령과 장사(將士)의 힘을 입어서, 싸우면 이기고 치면 이기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장구대진(長驅大進)하려는 것이 아니어서, 처음에는 제남(濟南)에서 군사를 사열하였고, 다시 하북(河北)에 오랫동안 머무르다가 가까이 회주․사주[淮泗]에 머물렀고, 이어서 경기(京畿)에 이르렀으니, 저 간사한 사람을 물리치고 죄를 뉘우쳐 허물을 고치기를 바란 것이었다. 생각지 않게도, 건문(建文)이 권간(權奸)의 핍박을 받아 궁문(宮門)을 닫고 스스로 불에 타 죽었다. 제왕(諸王)·대신(大臣)·백관(百官)·만성(萬姓)이 짐에게 ‘고황제의 정적(正嫡)이라’고 하여, 합사(合辭)하여 권해서 대통(大統)을 잇게 하였다. 짐이 종묘·사직이 중하여 이미 홍무(洪武) 35년 6월 17일에 황제의 위에 올라 천하에 대사(大赦)를 내리고, 명년(明年)을 영락(永樂) 원년(元年)이라 고쳐서 아름답게 만방(萬方)과 더불어 함께 지극한 다스림[至治]에 이르련다. 생각건대 너희 조선은 고황제 때에 항상 직공(職貢)을 다하였기 때문에, 사신을 보내어 조유(詔諭)하노니, 마땅히 이를 알지어다.”
선독(宣讀)이 끝나니, 사신이 태평관(太平館)으로 갔다
이것이 출처가 어떻게 되며 제대로 번역이 되었는지를 비교해봅시다. 다음은 그 원문입니다.
『太宗實錄』卷4 太宗2年 10月 壬戌(12日). “朝廷使臣都察院僉都御史兪士吉·鴻臚寺少卿汪泰, 內史溫全·楊寧, 奉詔書至, 結山棚備儺禮軍威, 上具冕服, 率羣臣迎于西郊, 至闕宣詔. 奉天承運皇帝詔曰, 昔我父皇太祖高皇帝, 臨御天下, 垂四十年, 薄海內外, 皆爲臣妾. 高皇帝棄羣臣, 建文嗣位, 權歸奸慝, 變亂憲章, 牋害骨肉, 禍幾及朕. 於是, 欽承祖訓, 不得已而起兵, 以淸憝惡. 賴天地祖宗之靈, 將士之力, 戰勝攻克. 然初不欲長驅. 始觀兵于濟南, 再逗遛于河北, 近駐淮泗, 遁至京畿, 冀其去彼奸回, 悔罪改過. 不期建文, 爲奸權逼脅, 闔宮自焚. 諸王·大臣·百官·萬姓, 以朕爲高皇帝正嫡, 合辭勸進, 纘承大統. 朕以宗廟·社稷之重, 已於洪武三十五年六月十七日, 卽皇帝位, 大赦天下, 改明年爲永樂元年, 嘉與萬方, 同臻至治. 念爾朝鮮, 高皇帝時, 常效職貢, 故遣使詔諭, 想宜知悉. 宣訖, 使臣適太平館.”
이 내용을 살펴보면, 상당히 재미있는 것이 있다. 아니 매우 꼬여진 력사이다. 반도사학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의 력사에 명사(明史)라는 것이 끼어있다는 말이다.
첫째, 번역문에서는 “중국 사신”이라고 되어있지만, 원문『태종실록』에는 “朝廷”뿐이다. 이 “조정”이란 바로 “중앙조정”이요, “中朝”라거나, “中國”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조정은 조선의 중앙조정이요, 조선의 중국이라는 뜻일 따름이다. 明나라와는 상관이 없는 문장이다.
둘째, “奉天承運皇帝”는 누구이겠는가?
이 말은 나라를 연 “태조(太祖)”를 말하며, “고황제(高皇帝)”를 말한다.
명나라 태조(1368.1〜1398. 윤5) 주원장(朱元璋)은 영락원년(1403)에 “聖神文武欽明啓運俊德成功高皇帝”의 시호를 받았는데, 가정17년(1538)에 “開天行道肇紀立極大聖至神仁文義武俊德成功高皇帝”의 증시를 받았다.
조선의 태조(1392. 7〜1398. 9) 리성계(李成桂: 1335〜1408)는 정종2년(1400)에 존호(尊號)로 “啓運神武”라 했고, 태종8년(1408)에 “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라 하고 황조(皇朝)에서는 “康獻”으로, 숙종9년(1683)에 “正義光德”으로, 고종9년(1872)에 “應天肇統廣勳永命”으로, 광무3년(1899)에 “高皇帝”라 하여, 康獻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이다.
이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봉천승운황제”인지는 다음의 글로써 확인해야 한다.
셋째, “우리 부황[我父皇]”이란 그 뒷말에서 “高皇帝”인데, 그런 호칭을 불러준 사람은 “태종(太宗)”이다.
명나라의 3대 임금 주체(朱棣)는 영락22년(1424)에 존호를 “體天弘道高明廣運聖武神功純仁至孝文皇帝”, 묘호를 “太宗”이라 했고, 가정17년(1538)에 존호를 고쳐 “啓天弘道高明肇運聖武神功純仁至孝文皇帝”, 묘호를 “成祖”라 하여 “成祖啓天弘道高明肇運聖武神功純仁至孝文皇帝”가 되었다.
이것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증시(贈諡)와 함께 같은 시기[1538년 가정17]에 주체 묘호를 태종에서 성조로 바꾼 것이 정상은 아닌 것이다. 지금은 모두 “성조”로 알고 있지만, 옛날엔 모두 “태종”이다.
태종이란 묘호는 조선의 3대 임금 리방원(李芳遠)의 묘호와 동일하다. 리방원은 “太宗恭定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된 “우리 부황”이란 말의 성립조건은 그 아버지가 임금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주체는 주원장의 아들[4남]이고, 리방원은 리성계의 아들[5남]이다. 그런데 그 전임 임금은 건문(建文) 혜제(惠帝)는『조선왕조실록』에서는 불에 타 죽었다고 했지만,『명사』에서는 “궁중이 불에 탔는데, 황제의 행방은 알지 못했다”[『明史』卷4 本紀4 恭閔帝 建文3年 6月 乙丑.]고 했고, 건륭(乾隆)원년(1736)에 공민혜황제(恭閔惠皇帝)라고 했는데, 이는 주원장의 손자요, 의문태자(懿文太子)의 아들[2남] 주윤문(朱允炆)이다. 이에 비하여, 정종(定宗: 1399〜1400) 리방과(李芳果: 1357〜1419)는 리성계의 아들[2남]이요, 그 아우 리방원에게 양위하여 상왕(上王)이 되었으며, 천수를 다하였던 형제들이다.
넷째, 그 고황제가 통치한 기간이 40년이 되었다고 했다. 주원장이 건국한 1368년부터 그가 죽은 1398년까지 30년이니, 40년이란 말은 맞지 않으며, 이 글이 쓰여진 1402년까지로 보더라도 34년이다.
그런데 리성계(李成桂)는 1398년에 리방과(李芳果: 정종)에게 물려주고 1408년에 죽었으니, 40년이란 말이 어울리게 된다. 그렇다면 “洪武” 년호가 태조 리성계의 정권 시기였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이 글이 쓰여져야 할 시기는 1402년보다 6년이 지나서 1408년에 적혔어야 맞게 된다. 어쨌거나, 이 사료는 소급해 적힌 짜깁기한 흔적의 증거이다.
다섯째, “고황제의 건문사위(建文嗣位)”는 식민사학에서 보면, 혜종[惠宗: 주윤문(朱允炆)]을 말하며, 이를 력사학에서는 “태조가 죽고(1398), 손자 혜제가 즉위하여 봉건제왕의 세력을 누르고 혁신정책을 추진하자, 지방의 제왕은 중앙정부에 대항하였다. 이 가운데, 北京의 연왕이 황제 측근의 난신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靖難(정난)의 변을 일으켜 4년간의 싸움끝에 南京을 정복하고 황제위에 오르니, 이가 3대 永樂帝(1403〜1424)이다.”[申採湜,『東洋史槪論』(서울: 三英社, 2003. 14刷), p. 544.]고 설명하고 있다.
이 靖難의 變 4년간이 조선 력사에서는 王子의 亂 3년간과 그 맥을 같이 한다. 1398년에 제1차 왕자의 난[=방원(芳遠)의 난, 방석(芳碩)의 난, 정도전(鄭道傳)의 난, 무인정사(戊寅靖社)]으로 이복형제간의 왕위쟁탈전이 있었는데, 방원의 힘으로 리방과(李芳果)가 임금[정종]이 되었고, 1400년에 제2차 왕자의 난[=방간(芳幹)의 난, 박포(朴苞)의 난]으로 동복형제간의 왕위쟁탈전이었는데, 이것으로 방원이 임금이 되었으니, 이가 바로 태종이다.
이 내용은 분명 식민사학에서 서로 닮은꼴이며, 빈틈없는『明史』로 꾸며진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다.
여섯째, “홍무 35년”에 태종이 황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년호 홍무(洪武: 1368〜1398)는 그 기간이 30년간이니, 35년은 옳지 못하며, 건문(建文: 1399〜1402)을 중앙의 년호로 인정하지 않고, 줄곧 홍무 년호를 써왔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홍무/건문/영락이란 년호는 황제들의 일관된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사용된 관호(官號)로 보이며, 중앙조정(황제)의 년호와 지방조정(제후)의 년호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곱째, “너희 조선[爾朝鮮]”이란 말은 중앙조정의 황제가 지방[朝鮮全國]에 대하여 한 말이 된다. 이에 따라 맨 앞의 조정에서 온 사람들이 명나라 사신이 아니라, 조선의 중앙조정의 벼슬을 한 사람이 된다.
이러한 력사의 추적에서 보면, 년호의 사용은 중앙에서는 천자로서 홍무(리성계), 영락(리방원), 지방에서 제후로서 하나의 관호로 건문(주윤문)의 시기를 말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1402년 10월 13일에 다시 홍무 년호를 쓰기로 하고 년수를 35년이라 했던 것이며,[『太宗實錄』卷4 太宗2年 10月 癸亥(13日)] 그 이듬해에는 년호를 영락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글을 제대로 읽어보자. 그리고 제대로 인식하자. 무엇이 무엇인지를!
[번역문]
중앙조정의 사신 도찰원 첨도어사(都察院僉都御史) 유사길(兪士吉)·홍려시 소경(鴻臚寺少卿) 왕태(汪泰), 내사(內史) 온전(溫全)·양녕(楊寧)이 조서(詔書)를 받들고 오므로, 산붕(山棚)을 맺고, 나례(儺禮)와 군위(軍威)를 갖추고, 임금이 면복(冕服) 차림으로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서교(西郊)에서 맞이하여 대궐에 이르러 조서를 선포하였다.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는 조(詔)하노라. 옛날 우리 부황(父皇)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천하에 림어(臨御)하신 지 40년에 온 세상이 모두 신첩(臣妾)이 되었는데, 고황제께서는 군신(群臣)을 버리시고, 건문(建文)이 위(位)를 이으매, 권세가 간특한 자에게 돌아가 헌장(憲章)을 변란(變亂)시키고 골육을 살해하여, 화기(禍幾)가 거의 짐(朕)에게 미치게 되었다. 이에 조훈(祖訓)을 이어받아 부득이 군사를 일으켜서 대악(憝惡)을 없애었다. 천지 조종(天地祖宗)의 신령과 장사(將士)의 힘을 입어서, 싸우면 이기고 치면 이기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장구대진(長驅大進)하려는 것이 아니어서, 처음에는 제남(濟南)에서 군사를 사열하였고, 다시 하북(河北)에 오랫동안 머무르다가 가까이 회주․사주[淮泗]에 머물렀고, 이어서 경기(京畿)에 이르렀으니, 저 간사한 사람을 물리치고 죄를 뉘우쳐 허물을 고치기를 바란 것이었다. 생각지 않게도, 건문(建文)이 권간(權奸)의 핍박을 받아 궁문(宮門)을 닫고 스스로 불에 타 죽었다. 제왕(諸王)·대신(大臣)·백관(百官)·만성(萬姓)이 짐에게 ‘고황제의 정적(正嫡)이라’고 하여, 합사(合辭)하여 권해서 대통(大統)을 잇게 하였다. 짐이 종묘·사직이 중하여 이미 홍무(洪武) 35년 6월 17일에 황제의 위에 올라 천하에 대사(大赦)를 내리고, 명년(明年)을 영락(永樂) 원년(元年)이라 고쳐서 아름답게 만방(萬方)과 더불어 함께 지극한 다스림[至治]에 이르련다. 생각건대 너희 조선은 고황제 때에 항상 직공(職貢)을 다하였기 때문에, 사신을 보내어 조유(詔諭)하노니, 마땅히 이를 알지어다.”
선독(宣讀)이 끝나니, 사신이 태평관(太平館)으로 갔다
이것이 출처가 어떻게 되며 제대로 번역이 되었는지를 비교해봅시다. 다음은 그 원문입니다.
『太宗實錄』卷4 太宗2年 10月 壬戌(12日). “朝廷使臣都察院僉都御史兪士吉·鴻臚寺少卿汪泰, 內史溫全·楊寧, 奉詔書至, 結山棚備儺禮軍威, 上具冕服, 率羣臣迎于西郊, 至闕宣詔. 奉天承運皇帝詔曰, 昔我父皇太祖高皇帝, 臨御天下, 垂四十年, 薄海內外, 皆爲臣妾. 高皇帝棄羣臣, 建文嗣位, 權歸奸慝, 變亂憲章, 牋害骨肉, 禍幾及朕. 於是, 欽承祖訓, 不得已而起兵, 以淸憝惡. 賴天地祖宗之靈, 將士之力, 戰勝攻克. 然初不欲長驅. 始觀兵于濟南, 再逗遛于河北, 近駐淮泗, 遁至京畿, 冀其去彼奸回, 悔罪改過. 不期建文, 爲奸權逼脅, 闔宮自焚. 諸王·大臣·百官·萬姓, 以朕爲高皇帝正嫡, 合辭勸進, 纘承大統. 朕以宗廟·社稷之重, 已於洪武三十五年六月十七日, 卽皇帝位, 大赦天下, 改明年爲永樂元年, 嘉與萬方, 同臻至治. 念爾朝鮮, 高皇帝時, 常效職貢, 故遣使詔諭, 想宜知悉. 宣訖, 使臣適太平館.”
이 내용을 살펴보면, 상당히 재미있는 것이 있다. 아니 매우 꼬여진 력사이다. 반도사학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의 력사에 명사(明史)라는 것이 끼어있다는 말이다.
첫째, 번역문에서는 “중국 사신”이라고 되어있지만, 원문『태종실록』에는 “朝廷”뿐이다. 이 “조정”이란 바로 “중앙조정”이요, “中朝”라거나, “中國”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조정은 조선의 중앙조정이요, 조선의 중국이라는 뜻일 따름이다. 明나라와는 상관이 없는 문장이다.
둘째, “奉天承運皇帝”는 누구이겠는가?
이 말은 나라를 연 “태조(太祖)”를 말하며, “고황제(高皇帝)”를 말한다.
명나라 태조(1368.1〜1398. 윤5) 주원장(朱元璋)은 영락원년(1403)에 “聖神文武欽明啓運俊德成功高皇帝”의 시호를 받았는데, 가정17년(1538)에 “開天行道肇紀立極大聖至神仁文義武俊德成功高皇帝”의 증시를 받았다.
조선의 태조(1392. 7〜1398. 9) 리성계(李成桂: 1335〜1408)는 정종2년(1400)에 존호(尊號)로 “啓運神武”라 했고, 태종8년(1408)에 “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라 하고 황조(皇朝)에서는 “康獻”으로, 숙종9년(1683)에 “正義光德”으로, 고종9년(1872)에 “應天肇統廣勳永命”으로, 광무3년(1899)에 “高皇帝”라 하여, 康獻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이다.
이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봉천승운황제”인지는 다음의 글로써 확인해야 한다.
셋째, “우리 부황[我父皇]”이란 그 뒷말에서 “高皇帝”인데, 그런 호칭을 불러준 사람은 “태종(太宗)”이다.
명나라의 3대 임금 주체(朱棣)는 영락22년(1424)에 존호를 “體天弘道高明廣運聖武神功純仁至孝文皇帝”, 묘호를 “太宗”이라 했고, 가정17년(1538)에 존호를 고쳐 “啓天弘道高明肇運聖武神功純仁至孝文皇帝”, 묘호를 “成祖”라 하여 “成祖啓天弘道高明肇運聖武神功純仁至孝文皇帝”가 되었다.
이것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증시(贈諡)와 함께 같은 시기[1538년 가정17]에 주체 묘호를 태종에서 성조로 바꾼 것이 정상은 아닌 것이다. 지금은 모두 “성조”로 알고 있지만, 옛날엔 모두 “태종”이다.
태종이란 묘호는 조선의 3대 임금 리방원(李芳遠)의 묘호와 동일하다. 리방원은 “太宗恭定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된 “우리 부황”이란 말의 성립조건은 그 아버지가 임금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주체는 주원장의 아들[4남]이고, 리방원은 리성계의 아들[5남]이다. 그런데 그 전임 임금은 건문(建文) 혜제(惠帝)는『조선왕조실록』에서는 불에 타 죽었다고 했지만,『명사』에서는 “궁중이 불에 탔는데, 황제의 행방은 알지 못했다”[『明史』卷4 本紀4 恭閔帝 建文3年 6月 乙丑.]고 했고, 건륭(乾隆)원년(1736)에 공민혜황제(恭閔惠皇帝)라고 했는데, 이는 주원장의 손자요, 의문태자(懿文太子)의 아들[2남] 주윤문(朱允炆)이다. 이에 비하여, 정종(定宗: 1399〜1400) 리방과(李芳果: 1357〜1419)는 리성계의 아들[2남]이요, 그 아우 리방원에게 양위하여 상왕(上王)이 되었으며, 천수를 다하였던 형제들이다.
넷째, 그 고황제가 통치한 기간이 40년이 되었다고 했다. 주원장이 건국한 1368년부터 그가 죽은 1398년까지 30년이니, 40년이란 말은 맞지 않으며, 이 글이 쓰여진 1402년까지로 보더라도 34년이다.
그런데 리성계(李成桂)는 1398년에 리방과(李芳果: 정종)에게 물려주고 1408년에 죽었으니, 40년이란 말이 어울리게 된다. 그렇다면 “洪武” 년호가 태조 리성계의 정권 시기였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이 글이 쓰여져야 할 시기는 1402년보다 6년이 지나서 1408년에 적혔어야 맞게 된다. 어쨌거나, 이 사료는 소급해 적힌 짜깁기한 흔적의 증거이다.
다섯째, “고황제의 건문사위(建文嗣位)”는 식민사학에서 보면, 혜종[惠宗: 주윤문(朱允炆)]을 말하며, 이를 력사학에서는 “태조가 죽고(1398), 손자 혜제가 즉위하여 봉건제왕의 세력을 누르고 혁신정책을 추진하자, 지방의 제왕은 중앙정부에 대항하였다. 이 가운데, 北京의 연왕이 황제 측근의 난신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靖難(정난)의 변을 일으켜 4년간의 싸움끝에 南京을 정복하고 황제위에 오르니, 이가 3대 永樂帝(1403〜1424)이다.”[申採湜,『東洋史槪論』(서울: 三英社, 2003. 14刷), p. 544.]고 설명하고 있다.
이 靖難의 變 4년간이 조선 력사에서는 王子의 亂 3년간과 그 맥을 같이 한다. 1398년에 제1차 왕자의 난[=방원(芳遠)의 난, 방석(芳碩)의 난, 정도전(鄭道傳)의 난, 무인정사(戊寅靖社)]으로 이복형제간의 왕위쟁탈전이 있었는데, 방원의 힘으로 리방과(李芳果)가 임금[정종]이 되었고, 1400년에 제2차 왕자의 난[=방간(芳幹)의 난, 박포(朴苞)의 난]으로 동복형제간의 왕위쟁탈전이었는데, 이것으로 방원이 임금이 되었으니, 이가 바로 태종이다.
이 내용은 분명 식민사학에서 서로 닮은꼴이며, 빈틈없는『明史』로 꾸며진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다.
여섯째, “홍무 35년”에 태종이 황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년호 홍무(洪武: 1368〜1398)는 그 기간이 30년간이니, 35년은 옳지 못하며, 건문(建文: 1399〜1402)을 중앙의 년호로 인정하지 않고, 줄곧 홍무 년호를 써왔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홍무/건문/영락이란 년호는 황제들의 일관된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사용된 관호(官號)로 보이며, 중앙조정(황제)의 년호와 지방조정(제후)의 년호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곱째, “너희 조선[爾朝鮮]”이란 말은 중앙조정의 황제가 지방[朝鮮全國]에 대하여 한 말이 된다. 이에 따라 맨 앞의 조정에서 온 사람들이 명나라 사신이 아니라, 조선의 중앙조정의 벼슬을 한 사람이 된다.
이러한 력사의 추적에서 보면, 년호의 사용은 중앙에서는 천자로서 홍무(리성계), 영락(리방원), 지방에서 제후로서 하나의 관호로 건문(주윤문)의 시기를 말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1402년 10월 13일에 다시 홍무 년호를 쓰기로 하고 년수를 35년이라 했던 것이며,[『太宗實錄』卷4 太宗2年 10月 癸亥(13日)] 그 이듬해에는 년호를 영락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글을 제대로 읽어보자. 그리고 제대로 인식하자. 무엇이 무엇인지를!
출처 : 대륙 조선사 연구회
글쓴이 : 최두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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