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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천삼백년전 발해 유물발굴로 본다.

monocrop 2006. 12. 14. 18:59

 

 

 

발  굴


1천3백년만에 베일 벗는 대규모 발해고분

발해는 대륙에서 숨쉬고 있다

 

 

 



◀도금 구리비녀

타는 성채를 뒤로 하고 조국 멸망의 피끓는 비분과 회한을 되씹으며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섰던 고구려의 후예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동북(東北)의 맹주였던 강성한 고구려의 여력을 모아 다시 거대한 나라를 이루었던 발해인들은 역사의 장에 또 하나의 종지부를 찍은 채 말갈기를 날리며 대륙의 어느 쪽으로 사라져 갔을까.

나는 홍콩특파원 시절이던 91년 발해의 옛 수도 동경성(東京城·중국 흑룡강성 영안시 소재) 부근에서 발해시대 제2호 왕릉이 발굴됐다는 소식을 국내 처음으로 보도했었다. 그로부터 발해의 자취를 더듬는 일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발해와의 기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해는 나에게 국사책에서 잠시 접했던가 싶을 뿐 항상 추상적이며 모호한 관념의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그것은 우리 역사라는 이름으로 가까운 듯했지만 따지고 보면 몽환처럼 덧없고 실체가 확인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동안 국내외 전문가들과의 접촉과 자료를 통해 발해연구의 실태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중에는 결정적인 정보와 사진· 자료 등도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도 모르고 지냈을까 싶을 정도로 국내에 진작 소개되었어야 할 것들이었다.

대규모의 고구려 양식 발해무덤들, 여기서 출토된 한민족으로 확인된 1천여구의 발해인 유골, 발해왕릉 8기의 소재 현장, 발해시대 인공호수와 대형 교량(橋梁)유적들, 발해 전성기의 궁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의 84년 발굴 직후 원형 등 모두 발해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아직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중국을 포함하여 해외에서도 처음으로 공개되는 귀중한 내용도 있었다.

이 자료들을 챙겨 들고 발해의 현장을 다녀와야겠다고 되뇌이던 것이 결행을 보게 된 것은 97년 가을께 중국의 대표적 고고학술지 최신호를 입수하면서였다.

97년 상반기에 발간된 『고고』(考古)에는 김태순(金太順)이라는 중국의 고고학자가 발표한 「발해묘장연구 중의 몇가지 문제」(渤海墓葬硏究中的幾個問題)라는 논문과 김씨가 속한 흑룡강성문물고고연구소 명의의 「흑룡강 영안시 양어장 부근 묘지 발굴」(黑龍江寧安市虹  魚場墓地的發掘)이라는 논문이 실려 있었다.

특히 김태순씨는 만 4년에 걸쳐 3백23기의 발해시대 무덤을 대대적으로 발굴했고 이를 상세한 도판과 함께 첫 보고서를 발표했다.


◀구리로 만든 허리띠 장식

사회주의 중국의 성립 이후 50여년 동안 발굴된 발해시대 무덤이 채 1백기를 넘지 않는 것에 비교하면 이번 발굴은 우선 물량적으로 전례가 없는 것이다. 약 4만평방m에 달하는 발굴현장에서 제단 7개소, 거주지 1개소, 그리고 2천여점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특히 전인미답의 대규모 발해무덤을 체계적으로 발굴, 정리한 점에서 발해사 해석에 결정적인 획을 그을 성과로 주목되는 것이다.

95년 말 발굴작업 완료와 동시에 그해 중국의 10대 문화재 발굴사업의 하나로 꼽혔던 관련 내용들을 한국에 소개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처리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중국측의 현장발굴조사 결과는 납득할 만한 근거도 없이 발해의 모든 것을 「말갈족의 것」이라고 판에 박은 듯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말갈? 왜 말갈인가? 그렇다면 3백23기의 발해시대 고분들은 중국 학술계의 주장처럼 발해가 말갈족에 의해 건국된 것임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근거를 찾았다는 것일까?


◀복원된 발해시대 질그릇

그러나 중국측의 발표내용이 사실과 다르게 왜곡되어 있다는 것은 함께 실린 고분의 도판이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식칼모양」 「삽모양」 등으로 불리는 고구려 양식의 발해시대 무덤이라는 것이 공개와 동시에 확인될 수 있는 것이었다. 흙구덩이에 살면서 무덤도 흙무덤을 쓴 말갈인들과는 달리 한결같이 돌이나 벽돌로 무덤을 꾸린 고구려와 그 연장선에 있는 발해의 묘제(墓制)가 명백했다.

그러나 누군가 「회의는 춤춘다」고 했던가. 과거 발해의 강역을 나누어 가진 남북한·중국·러시아, 그리고 발해와 교역했던 일본을 포함하여 발해에 대한 학설은 학자들의 소속 국적에 따라 또한 춤을 춰왔다.

가로막힌 발해연구

중국은 우선 말갈을 강조하면서 고구려 유민을 주동적 요소에서 배제함으로써 결국 발해란 중국의 소수민족이 세운 중국의 변방국가라는 관변학설을 관철하려 한다. 이번 발굴이 획기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갈」이라는 종족을 발해의 주체로 되풀이 주장한 것은 학문적 분석보다는 중국의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65년까지만 해도 중국은 발해연구에 폐쇄적이지 않았다. 북한과 공동발굴조사를 벌여 발굴물을 반반씩 나누어 가지고 그 연구결과를 공유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발발로 조·중 학술교류는 단절되었다. 중국이 발해연구에 공백기를 맞고 있는 동안 북한은 자체 지역의 발굴성과를 더하여 80년대부터 독자적인 입장을 취하고 나왔다. 『발해는 고구려의 후예들이 세운 한민족 국가이며 우리 땅』임을 절대권위인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말씀」으로 확고히 했다.


◀복원된 발해시대 질그릇

90년대 들어 북한학자들이 국제학술대회에 『김일성선집』(수십권으로 그속에 발해항목이 있을 것이다)을 한질씩 안고 나와 각국 학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아무도 감히 이 「무거운 짐」을 가지려 들지 않았다. 북한학자들은 다시 챙겨가는 수밖에 없었다. 가장 풍부한 유물자료를 갖고 있는 조·중 양국이 발해를 둘러싸고 앙숙이 되었다. 중국의 조선족 출신학자들마저도 북한측에 맞서듯 「발해는 말갈」이라는 정치적 대오에 발을 맞추고 있다.

연해주(沿海州) 일대의 발해강역을 배경으로 한 러시아 학자들은 국제학술대회에 참여하여 「말씀」도 「학설」도 아닌 「식탁」에 대단한 정열을 보임으로써 다른 참가국 학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왔다. 사회주의체제 붕괴 이후 경제적 혹한(酷寒)에 빠진 발해연구자들이 모처럼의 학술대회에서 가공할 식탐(食貪)을 부려 주최측인 중국인들마저 놀라게 했던 것이다.


◀구리거울

한편 일본인들은 마치 공정한 심판관처럼 행세하려 들지만, 발해를 일본의 부용국(附庸國)이라 하여 아무 곳이나 흡반을 들이대는 버릇만큼은 고치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30년대의 약탈식 발굴을 끝으로 발해의 역사적 현장에서 떨어져 있는 한계가 있다.

한국은 어떤가. 93년이던가. 한국학자 1백여명과 북한·중국학자까지 참가한 「고구려학술대회」에서 『잃어버린 땅을 되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중국 당국이 방관할 리가 없다. 또다른 방식으로 우리 것을 찾겠다는 무리도 있다. 집안의 고구려 왕릉의 벽화를 떼내어 간 것이다.

중국 당국은 수사에 나서 한국측이 관리인에게 2만달러의 뇌물을 주어 밀반출한 것을 밝혀냈다. 97년 3월에는 영안시 발해유물관리소의 관리인이 살해됐다. 일당 3명은 발해유물을 빼돌리려던 한국인 조직이었다. 발해무덤 발굴현장 주변을 집요하게 돌며 발굴물을 훔쳐낸 또다른 조직도 한국에서 왔다. 여기에는 연변에 유학온 한국인 대학생도 끼여 있었다. 앞장은 조선족이 섰고, 배후에는 한국인 물주가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적 후손을 자처하면서도 무분별한 행동을 일삼기 때문에 정확한 역사 복원을 하려는 한국학자들의 현장방문마저 기회가 가로막히고 있는 것이다.

이래저래 중국은 현장발굴 전모를 외부에 밝히지 않고 발해연구에 관한 한 자라목을 하고 있다. 국제 발해학술계가 서로 정치적 입지에 따라 해석과 주장이 난마(亂麻)처럼 얽혀 교착상태에 빠진 채 추상적 추측과 억지로 누구나가 주인처럼 행세하는 것이 이 분야인 것이다. 현장발굴이 공유되지 않는 상황에서, 주로 사서(史書)에 의존하면서 관념의 유희도 불가피해진다.


◀도금 구리꽃장식

『신당서』(新唐書) 권 219 「발해전」(渤海傳)에서 발해사람들이 귀중히 여기던 생산품을 들면서 「태백산의 흰 토끼, 남해의 곤포, 책성의 된장…」이란 대목도 그러한 예다. 「태백산지토」(太白山之兎)라는 원문을 직역하면 「백두산의 토끼」로 된다. 그런데 이건 50년대에 유행한 해석이다. 하필 토끼라니? 그후에는 토끼가 아니라 호랑이라는 주장이 우세했다. 지금은 그것도 아니다. 이 대목 전후에 식물이 나열되고 다음에 동물항목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특종식물일 것이라는 추측이 유력시되고 있다. 토끼가 호랑이로, 호랑이가 다시 식물로 변신한다. 「학술상」 그런 과정은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현실은 다르다. 그래서 고고학적 발굴작업은 중요하며 이를 근거로 학술적 돌파도 이루어질 수 있다. 발해시대 고분 3백23기의 발굴은 결코 건너뛸 수 없는 발해사 해석의 결정적 열쇠인 것이다.

중국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동북(東北)의 종족은 많다. 그중에서도 시대와 종족에 따라 숙신·읍루·말갈·여진·만족·동이, 그리하여 오늘의 「조선족」에 이르기까지 그 규정과 자리매김은 출발부터가 중국인에 의한, 중국인의 역사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는 차치하고 지금 중국의 학술적 환경이 과연 비정치적이며 학술의 독자성과 객관성을 유지하는지의 신뢰문제도 검증되어야 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1천여년만에 햇빛을 본 발해무덤과 그 현장들을 직접 확인하는 일이었다.

중국의 설명에 의존하는 것으로 진상이 가려지기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것이 분명했다. 전문가들의 증언과 현장의 묘제 ·인골·출토품 등에 대한 자료와 사진을 통해 발해가 고구려의 연장에 서며, 그 주역들이 오히려 순수한 「한민족」이라는 사실을 직접 확인하는 것이 필요했다. 여기에는 물론 직접 자료와 전문적 분석정리가 요구된다. 그러나 칼자루를 쥔 중국측이 진상을 밝히지 않는 정황에서 기다리고만 있을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현장으로 나가 실감있게 발해를 만나고, 당시의 상황을 체험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강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로 연결된 은제 귀후비개와 족집게

그러나 현장접근은 발해멸망 이후 그랬던 것처럼 외부인, 특히 한국인의 접근이 사실상 차단된 금구(禁區)였다. 어렵게 구한 발해의 중심지 동경성(東京城) 일대를 담은 5만분의 1 지도 상단에는 「기밀」(機密) 표시가 선명했다. 현장을 다녀온다는 것은 여러가지 난관을 무릅써야 할 불안한 여행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발해의 현장과 그 중심부의 전모에 접근하는 최초의 도전이 될 수도 있었다.

 

 

 

 시사월간 WIN 편집위원 전택원 글 펌.

출처 : 한민족참역사
글쓴이 : 바람이려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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