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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monocrop 2006. 12. 5. 17:41
[역사] 한글창제에 대한 미스테리


- 월간개벽 10월호, 유내윤-전시안

1O월 9일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한글날’ 이다.

미국인 학자로 한글을 연구하고 있는 레드야드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한글을 다음과 같이 극찬하고 있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문자학적 사치!”

세계 문자사상 가장 진보된 글자.
그것이 바로 한글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 과찬이 아니다. 세계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은 나라는 우리 나라다. 한자나 영어 알파벳을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한글이 편리하고 쉬운 문자라는 것을 반증한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에는 한글 자판이 있다, 양손으로 자음과 모음을 오가며 아주 빠른 속도로 타자 할 수 있다. 알파벳이나 일본문자 한자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오늘날 정보화 시대에서 한글은 더욱 진가를 드러내고 있다. 휴대폰을 사용할 때도 매우 편리하다. 훈민정음의 천지인( · - | ) 세 개의 버튼을 사용하면 쉽게 모음을 입력할 수 있다. 세계 어떤 문자도 이것을 흉내낼 수 없다. 최근 한글의 체계를 컴퓨터에 도입하는 한국어공학이 주목을 받고 있다. 다시 말해 디지털세계의 총아로서 한글이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음소문자이면서 음절문자인 한글은 단순한 음소문자인 알파벳이나 한자에 비해 검색이 훨씬 용이하다고 한다. 이 점을 고려하여 한글을 다국어 번역 시스템에서 '중간언어'로 사용이 가능하다고 하며 학계에서 연구가 진행 중이다. 한글의 우수성은 이처럼 놀라운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이런 우수한 문자가 나오려면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져서 오랜 역사 속에서 다듬어지는 발전단계를 거쳤어야 할텐데 세종대왕 때 갑자기 만들어졌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일본인 학자는 한글이 세종의 창작품이라고 하나 "문자역사에 있어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세종 대왕이 뭔가를 이용해서 문자를 만들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는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지난날 우리는 세종대왕이 집현전의 여러 학자와 더불어 훈민정음(한글)을 창제하셨다고 알아왔다. 그러나 작년 한글날에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은 세종대왕이 어떠한 신하에게도 전혀 알리지 않고 친족을 데리고 한글 창제 작업을 진행했을 가능성이 짙다고 방영했다(
http://www.kbs.co.kr/history/review_txt/991009.txt 참고). 우리는 세종대왕이 그 일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신하들이 알아서는 안될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대부분의 관료들은 모화시대에 철저한 유학자들이다. 만약에 신하들이 먼저 알았다면 세종대왕은 그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거센 압력을 받았을 것이다. 유학의 소양을 가진 양반 관료들이 기득권을 지킬 수 있는 힘은 어려운 한자문화를 독점하는 것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역사를 통해 확인된다.


훈민정음은 고조선의 문자였다.

한반도화 만주에서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것으로 추정되는 문자가 새겨진 토기들이 발굴되었다. 그러나 현재 이것을 해독할 수 있는 학자는 아무도 없다. 고조선 말엽부터 한자를 사용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점차 한자 사용비율이 증가하면서 우리 문자를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한자를 사용하기 이전의 문화와 역사는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의 우리가 한글을 버리고 영어만 쓰게 된다면 동일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저 영어로 기록된 책을 통해 우리 역사를 간접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상고시대의 역사는 대부분 소멸되었다. 중국인들이 기록한 사서를 통해 간접적으로 우리 상고사를 연구하는 것이 고작이다 다행스러운 일은 『환단고기(桓檀古記)』등의 역사책이 비전(秘傳)되어 오늘날에 남게된 것이다. 물론 고조선의 문자로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독립운동가 계연수가 엮은 「환단고기」는 그 책이 공개된 이후 폭발적인 관심을 끌어왔다 현재 인터넷을 통해 청소년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동호회와 매니아가 형성되고 있으며 그 숫자도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더불어 이 책의 진위여부를 둘러싼 논쟁도 세기를 넘기며 계속되고 있다.

잠시 이 책의 내용을 살펴보자.
고조선에는 47분의 단군임금이 계셨다고 한다. 단군임금의 고조선 건국사를 신화로만 여겼던 상식을 뒤집는다.그리고 그 이전에도 환국(桓國)과 배달국(倍達國)이라는 나라가 존재했다. 그런데 이 『환단고기』가 전하는 수많은 내용 가운데 우리 문자와 관련된 기록이 있어 눈길을 끈다. 하나는 단군 이전의 나라인 배달국시대 문자에 관한 기록이다. 배달국은 18명의 환웅임금이 다스린 나라로 B.C.3898년에 건국된 나라였다. 우리 스스로를 배달 민족이라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현재 재야학계에서는 요녕성 지역에서 발굴되는 후기 신석기문화((홍산문화)와 청동기문화(하가점하층문화)가 배달국의 신시시대(1~13대 환웅)와 청구시대(14대~18대 환웅)라고 주장한다. 배달국 문자의 기록을 살펴본다.

초대 환웅께서 신지혁덕(神誌赫德)에게 명하여 녹도문(鹿圖文: 사슴의 발자국을 보고 만듦)을 만들고 천부경을 기록하게 했다고 한다. 녹도 문자로 여겨지는 글자는 1942년 발행한 『영변지』에서 등장한다. 이 책에는 『환단고기』를 엮은) “계연수가 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에서 천부경이 겨진 옛 비석을 발견한 내용을 상세히 적고 다른 책에 있는 신지 전자(篆字)를 옮겨 놓는다”라고 되어 있다. 더불어 녹도문 16지를 실어 놓았다. 

지난해 한글날에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에서도 흥미로운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심령산인(心靈山人: 생존연대는 미상)이 엮었다고 전해지는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諸)에는 고조선 신지의 글자(古朝鮮神誌字)라고 하며 『영변지』에 있는 녹도문과 동일한 모양의 문자를 소개했다. 이 밖에도 녹도문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펑안북도 용천군 신암리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에도 녹도문과 같은 모양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또 고조선의 영역이었던 여대(旅大)시 윤가촌에서 출토된 접시부분에도 녹도문과 유사한 문자가 새겨져 있다.

『대변설(大辯說)』의 주에 말하기를 "남해도 낭하리의 계곡 바위 위에 신시(神市:배달)의 고각(古刻)이 있다. 그 글에 환웅이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三神: 우리민족이 섬겨온 하느님이다. 「태백일사」에는 삼신상제(三神上帝)로 기록했으니 옥황상제와 같은 듯이다)께 드린다”고 했다. 학계에서는 어느 누구도 이것이 배달국시대의 문자라는 사실과 문자의 뜻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환단고기」는 이 녹도문자가 중국 최초의 문자 창힐전자가 되었음을 적고 있다. 「태백일사」의 삼한관경본기에는 "배달국의 자부선생이 칠회제신의 책력을 만드시고 삼황내문을 진상하니 환웅천왕께서 이를 칭찬하셨다. 삼청궁을 세우시고 그곳에 머무시니, 공공 ·헌원(중국의 시조) ·창힐 ·대요의 무리가 모두 와 여기서 배웠다”라고 했다.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세계문자의 시초인 배달국의 녹도문은 동아시아 문명을 일으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설문해자(說文解字)」자전에 실린 중국 고대문자는 녹도문자와 매우 비슷하다. 그리고 이것은 훗날 은나라의 갑골문자에 영향을 주었고 한자(漢字)가 되었다.


한글은 고조선의 문자였다.

문화일보는 1994년 12월 “古한글 비석 日서 발견”이라는 제목으로
한글과 거의 유사한 문자가 일본의 비석에 새겨져 있음을 대서특필했다.그 비석에는 ‘머우디니시오이디너무’ 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일본인들은 이것을 아히루(神代: 일본 초기시대) 문자라고 부른다. 우리 나라에는 잘 소개되지 않아서 그렇지 신대문자는 일본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일본 소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일본 이세신궁의 거울에도 새겨져 있고 그밖에도 일본 곳곳에서 이 문자가 발견된다. 최근에 이 문자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일본의 신대문자는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을 흉내낸 것이라고 주장하고 일본인들은 신대문자를 세종대왕이 모방한 것이라고 반박한다. 과연 어느 주장이 맞을까? 이세신궁에 소장된 신대문자 기록은 AD. 708년의것이다. 이 문자로 일본의 대표적인 역사책 r고사기(古事記)」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케이블 TV Q채널에서 방영된 「한글, 그 비밀의 문」에서 그 취재팀은 일본황실도서관에 들어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훨씬 전의 신대문자를 촬영했다. 따라서 신대문자가 훈민정음보다 오래된 것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훈민정음은 일본의 문자를 흉내낸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일본 신대의 역사는 분명 한반도인이 건너가 개창했기 때문이다. KBS 역사스페셜 99년 5월 15일에 방영된 「청동거울의 비밀, 일본천황은 백제인인인가」에서 일본 상고시대 역사의 주인공은 틀림없는 우리 민족임을 밝혀놓은 바 있다. 일본 왕실의 국새라고 할 수 있는 신기 삼종(청동거울 ·칼 ·곡옥)은 우리나라의 청동기 유물인 거울, 비파형동검, 곡옥(용, 또는 물고기, 태극을 상징하며 옛 배달국의 영역이었던 요녕성 지역의 홍산문화 출토 유물에는 곡옥의 원형으로 보이는 옥으로 둥글게 만든 용이 있다. 신라 금관장식에도 이와 같은 형상이 있다)과 대단히 유사하다.따라서 필자는 일본의 신대문자가 우리민족이 쓰던 문자일 것으로 단정한다.

우리는 「환단고기」「단군세기」의 다음 기록에 주목해야 한다.

3대 단군 가륵임금 때이다. “아직 풍속은 하나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전하는 진서(眞書: 배달국시대의 녹도문)가 있다 해도 열 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리 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三郞: 삼신상제(하느님)께 천제(天察) 지내는 관료]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라 하니 그 글은 다음과 같다”하며 그 문자를 기록해 놓았다. 지금부터 무려 4177년 전의 일이다.

한글은 인도에까지 전해졌다.

이제 한글이 누구의 작품인지는 명백해졌고 그 동안의 논란은 무의미해졌다.

그런데 한가지 미스터리가 남아 있다.

송호수 박사가 발표한 「한글은 세종대왕 이전에도 있었다」라는 논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인도 남방 구자라트 주에서 쓰고 있는 문자가 우리의 한글과 일치하는데 자음에서는 상당수가 같고 모음은 1O자가 꼭 같다. (중략) 구자라트 주의 간판에서 신기하게도 한글과 비슷한 글자들을 발견하고 놀랐다.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글과 비슷하여 한글식대로 읽을 수 있었다.”

지난 96년 3월 8일 중앙일보 기획시리즈 아시아 10만리」 19편에 구자라트 문자가 소개되었다.
인도구자라트주(인도 서북부 수라스트란반도)는 인더스문명의 주인공인 드라비다족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이 지역의 드라비다인들은 북방에서 온 아리안족(게르만인과 같은 백인종)의 문화와 잘 섞이지 않고 오랫동안 고유한 문화를 지켜왔다.
이들은 다소 검은 아시아인종인데 이상하게도 우리와 동일한 유전자(HLA-B-59)가 섞여 있다. 이 유전자는 북방계 몽골리안의 것이다. 동남아의 라후족도 이 유전자를 갖고 있는데, 중앙일보「아시아10만리」취재팀은 이 라후족도 북방계 몽골리안이며 우리와 거의 동일한 풍습을 갖고 있음을 소개했다.

여기서 문제는 인도의 학자들의 주장이다. 이 구자라트의 문자는 고대 산스크리트문자의 원시적 형태라고 하며 인도인들이 배를 타고 한국, 일본에 그들의 문자를 전해 주었다고 한다. Q채널의 「한글, 그 비밀의 문」취재팀은 그것의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인도문자역사에 대해 취재한 바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다.

인도 구자라트인들이 쓰는 타밀어는
이상하게도 우리말과 비슷하다. 무려600여 개의 단어가 일치한다고 한다.

나/난, 너/니, 엄마/ 엄마, 아빠/아빠, 다리/다리,보다/봐, 날/날, 오다/와, 나라/나르, 너 이리와/니 잉게와

이렇듯 우리말과 구자라트어의 유사성을 두고 일부학자는 고대인도인이 우리나라에 정착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근거로 메뚜기를 구자라트어로 '메디'라고 하고 벼를 '벼'라고 한다. 인도인이 와서 우리나라에 벼농사를 전해주고 글도 전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오히려 우리 민족이 인도에 건너가 벼농사를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벼의 원산지가 인도라는 것이 통설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몇 달전 우리 나라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탄화볍씨가 출토되었다는 신문기사(동아일보)를 보았다. 우리나라의 벼농사가 극히 오래된 것이며 원산지일 가능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잠시 필자는 「환단고기」 이외에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비사(秘史)를 소개하고자 한다. 신라인 박제상이 썼다는 「부도지」라는 사서가 전하는데 이 책이 나오게 된 상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부도지 17~18장의 기록을 간략히 풀이해 본다. 때는 단군조선 초대 임금 한배검 때이다. 중화의 요(堯)임금이 독자적인 법도를 만들며 단군조선과 대립하고 있었다. 단군임금께서 이를 심히 걱정하여 유호씨(有戶民:순(股)임금의 아버지 고수) 부자로 하여금 환부(鰥父)와 권사(權±)등 100여 인을 인솔하여 그를 깨우치게 했는데 요임금이 듣지 않았다. (중략) 우(禹)임금 때 유호씨는 월식생성의 땅(月息生星: 부도지 전체의 기록으로 보아 곤륜산 남쪽인 인도)으로 들어가니 그곳엔 백소씨와 흑소씨가 살던 땅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이때부터 인도와 우리나라의 교류가 시작되었고 많은 조선인들이 건너가 벼농사와 가림토문을 전했을 것이다. 일부 재야학자들은 우리의 철학과 종교문화도 건너갔을 것으로 주장한다.

인도의 수투파가 배달국과 단군조선의 종교인
신교(神敎)문화의 소도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한다. 인도의 수투파는 우리나라의 둥근 무덤과 비슷한데 실제로 무덤이었다고 한다. 영국의 사학자 빈센트는 인도 석가모니(샤카족의 '성인' 이라 뜻)의 족속(샤카족)이 본래 고리족(고구려가 건국되기 전의 원래 이름으로 중국사서에서는 고구려라는 이름보다는 고리, 고려라고 기록하는 경우가 많다)이라고 하여 석존 몽골리안설을 주장하였다.

한글의 역사적 가치

지금까지 우리는 한글과 관련된 비밀을 풀어보았다. 한글은 살펴본대로 근세조선이 아닌 단군조선 때부터 있었던 문자였으며 일본과 멀리 인도에도 전해졌다. 그리고그 이전에는세계최초의 문자, 녹도문이 있었다필자가 서두에서 밝힌 대로
한글과 같은 우수한 문자는 오랜 문자발전 단계를 거쳐 만들어진 것이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글은 고도의 철학체계를 갖추고 있다. 한글은 천지인원방각(·ㅡ ㅣ ㅇ ㅁ △)의 음양오행사상에 입각해 만들어진 것이며 우리민족의 고유한 철학이 담겨 있다.

독자들 중에는 세종대왕의 창작품이 아니라 해서 세종대왕의 업적이 손상되는 것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세종 대왕은 한글창제라는 것보다 훨씬 위대한 일을 해낸 것이다. 그것은 신화속으로 사라져 가던 우리 역사와 얼을 재현해낸 것이다. 그것도 까마득한 고조선시대의 문자를 오늘날에도 사용할수 있는 세련된 형태로 만들었다.세종대왕은 우리 고유의 문자문화의 맥을 계승함으로써 우리문화의 정체성을 지켜냈고 문맹을 퇴치하여 민족전체의 문화적 역량올 극대화 한분으로 새롭게 평가해야 한다.

출처 : Tong - greatcorea님의 역사왜곡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