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cient Culture & .../수메르

[스크랩]1만 2천년 이전의 찬란한 문명 발굴, 수메르어와 한국어의 유사점

monocrop 2019. 7. 29. 16:00

1만 2천년 이전의 찬란한 문명 발굴, 수메르어와 한국어의 유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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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괴베클리 테페의 놀라운 점은 12000년 전 유적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당시 괴베클리 사람들이 신전을 보수하고 건축하는 기술이 시간이 갈수록 저하됐다는 것이다.

 

가장 초기의 원환은 가장 크고 기술과 공예 수준에서도 가장 발달했지만 후대로 진행됨에 따라

모양이 갈수록 초라해졌고 대수롭잖게 설치된 듯했다.

 

게다가 기원전 8200년 경, 이 공정은 완전히 정체 상태에 빠졌는데

괴베클리 테페는 철저히 쇠락해졌고 더는 부흥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괴베클리 테페뿐이 아닙니다.

 

볼리비아, 푸마푼쿠 14000년 전

이 문명도 날이 갈수록 기술 수준이 쇠퇴했습니다.

푸마푼쿠의 초기 기술들은 현대 정밀가공 장비로도 재현 불가능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지금까지 알려진 역사 모델을 가지고 인류사를 멋대로 단순화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우리 1만년 역사를 수긍하지만, 

인류사는 우리 1만년 역사가 인류시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모델이 아닙니다. 

 

 

인류사는 지구 다수의 지역에서 다수의 인종과 다수의 문명이 명멸한 '멀티형 모델'을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문명이 항상 발달한 것도 아니고 존재치 않았던 기술력이 나타났다가 시간이 흐를 수록 잊혀진 문명이 있습니다. 

그 문명의 주인공들이 누군지 모르는 겁니다.

 

칠레에서 수 백구 발굴되는 긴머리 두개골은 인간의 두개골과 골편이 다릅니다.

인간은 정수리가 3쪽인데 긴머리 두개골은 2쪽입니다. 

최근 발굴에서 밝혀지고 있는데 이 사실을 수긍하자니

모든 것을 틀렸다며 뜯어고쳐야 하니까 과학계에서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선도적인 고고학자들은 기존학계에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호모플로렌시스 발굴에 따른 인종다원론입니다.

국제 학술회의에서 인정받았습니다.

 

 

하나로 시작해서 한줄기로 진보해온 인류사가 아니고 훨씬 복잡한 인류사.

 

별이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듯이

인종도 하나가 아니면 하나가 아니라고 인정한 위에서 토대를 세우면 될 텐데,,

유일신이니 뭐니.. 자꾸 자기것 하나라고 박박 우기는 인간의 습성이 진보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북극성, 직녀성 기원이 있으면 시리우스 기원을 철썩같이 전승해오는 인종도 있는데 하나로 다 처박을라니 그게 됩니까?

그것은 남의 기원을 말살하고 하나로 처박을려는 제국종교적 생각입니다.

 

도곤족 찾아가면 시리우스에서 왔다며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데 

그 문물을 말살하고 '너는 북극성에서 왔으니 엎어져'.. 이런 소리 하지 마십시오.

만일 그런다면 우리가 그토록 싫어하는 그 사람들과 다를 바가 뭐가 있지요?

 

 

볼리비아 푸마푼쿠, 14000년전

 

 

 

 

터키 괴베클리 테페, 12000년전

 

 

[시사중국]

1994년 가을, 독일의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는 터키 동남부 지역의 가장 큰 도시인 우르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약 14km 떨어진 긴 산맥의 가장 높은 산봉우리는 둥그런 지형이었다.

슈미트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방대한 부싯돌 부스러기를 발견했다.

수 천년 전에 수십 명 혹은 수백 명 사람이 모여 공동 작업을 한 장소임을 직감했다.

그는 곧 독일 고고학연구소와 우르파 박물관과 합작해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발굴에 착수했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 알려진 터키의 괴베클리 테페는 지금까지 발견된 고대 건축 구조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괴베클리 테페의 ‘테페(tepe)’는 곧 테페이(teppay)라고 발음하는데 터키어로 ‘배꼽 언덕’이라는 뜻이다.

 

수십 개의 거대한 돌기둥이 겹겹이 둥근 원을 이루고 있으며,

인류가 처음으로 만들었던 기존의 가옥구조 보다 더욱 크고 복잡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 돌기둥들은 1만 1600년 전에 세워졌으며 기자 대 피라미드보다 7000년이나 앞섰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전(神殿)의 형태도 있다.

터키 남동부 지역에서 건축물이 세워진 시기에 세계 어디에도 이와 비교할만한 규모의 건축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의 돌기둥이 다른 하나의 돌기둥을 받치는 형태는 마치 영국의 스톤헨지를 떠올리게 하지만

스톤헨지보다 약 2배는 오래됐다.

괴베클리 테페의 기둥들은 거칠게 깎인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조각되고 새겨진 석회석 기둥이다.

돌기둥엔 가젤과 뱀, 여우, 전갈, 멧돼지 등 동물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발굴 초기 슈미트 팀은 지면에서 몇 센티미터도 안 되는 곳에서 정교하게 조각된 돌을 발견했다.

계속해서 또 다른 돌들을 발견했는데 나중에는 여러 개의 직립된 돌기둥으로 형성된 원환(圓環)을 발굴해냈다.

몇 년 사이에 슈미트 팀은 두 번째의 돌기둥 원환을 발견했고 잇따라 세 번째, 뒤에는 더욱 많은 원환이 발견됐다.

그렇게 해서 2003년 탐사 결과, 발굴단은 적어도 20개의 원환이 복잡하게 겹쳐서 흙속에 묻혔다고 발표했다.

 

돌기둥은 매우 방대했다. 가장 높은 것은 5.5미터이고 무게는 16톤에 달했다.

돌기둥 표면엔 각종 동물 형상이 부조됐고 모양은 서로 다른 풍격을 지니고 있었다.

조각이 거친 것을 비롯해 비잔틴 예술품처럼 정밀하고 상징적 의미가 풍부한 것도 있었다.

슈미트는 또 산자락의 여러 곳에서 고대 유물이 어마어마하게 널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곳은 신석기시대의 칼, 도끼, 투척 무기 등 창고였다.

이 돌은 인근지역의 골짜기에서 운반해온 것이었다.

슈미트는 “이곳의 1, 2평방미터 범위 내에 널려있는 돌들은 많은 고고학자들이 기타지역 유적에서

발견한 것보다 더 많았다”고 말했다.

 

괴베클리 테페의 고고학적 연구를 종합해보면 그 원인을 알 수는 없지만 당시 괴베클리 사람들은

몇 십 년에 한 번씩 돌을 묻고 새로운 돌기둥으로 대체하다가 이후 모든 원환이 부싯돌로 메워졌고

사람들은 또 부근에 완전히 새로운 구조물을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전반 유적지는 이렇게 발굴됐다가는 메워지고 다시 보수되는 식으로 몇 백 년이 지난 것으로 보인다.

 

 

 

특이한 점은 당시 괴베클리 사람들의 신전을 보수하고 건축하는 기술은 시간이 갈수록 저하됐다는 것이다.

가장 초기의 원환은 가장 크고 기술과 공예 수준에서도 가장 발달했지만 후대로 진행됨에 따라 모양이

갈수록 초라해졌고 대수롭잖게 설치된 듯했다.

게다가 기원전 8200년 경, 이 공정은 완전히 정체 상태에 빠졌는데 괴베클리 테페는 철저히 쇠락해졌고

더는 부흥하지 않았다.

 

 

 

괴베클리 테페의 발굴 작업은 아직도 진행 중에 있으며 이를 둘러싼 고고학계의 논쟁 또한 그치지 않고 있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 유적지가 기존 과학계를 뒤집는 인류 이전 과거의 유물로서 가장 중요한 곳임을 공통적으로 인정한다. 20년 전만 해도 대다수 고고학자들은 신석기혁명이 발생된 시간과 지점, 대체적인 과정에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괴베클리 테페의 고고학적 발견이 진행되면서 학자들은

기존의 역사 시기 분류와 관련한 학설을 뒤집어야만 하는 인류사적 고민에 직면해 있다.

 


 

한국경제가 IMF 금융위기로 치닫고 있던 1997년 7월 경향신문에는 대단히 기이한 기사가 등장했다. 기사의 제목은 ‘수메르어와 한국어는 같은 뿌리’라는 것이었고 그 주장자는 다름 아닌 히브리대학에서 수메르어를 전공하고 가르치던 조철수 박사였다.

일반 호사가도 아닌 수메르어 전공자, 그것도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히브리대학 앗시리아학과에서 수메르어와 앗시리아어를 가르치던 언어학자의 주장이니 그 충격은 대단했다.

 

조철수 박사는 그러한 자신의 주장을 밝히기 위해 아예 논문도 썼다. 한국 언어학회지에 게재한 ‘수메르어-고어국어 문법 범례 대조분석’이라는 논문이 그것이다. 그는 국내 유일의, 그리고 세계에서 11번째의 수메르어 전공자였다.

당시에는 나라 전체가 경제파동에 휩쓸려 조철수 박사의 수메르-한국어 동원관계론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 후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수메르에 대한 국내 아마추어 역사가들과 재야사학자들의 관심이 폭증했다.

인류 최초의 문명 수메르와 고대 한국간의 문명사적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온갖 추측과 황당한 억측들이 난무했다. ‘환단고기’는 그 정점에 있었다.

수메르가 다름 아닌 환국 12연방 가운데 있던 ‘수밀이국’이라는 것이 그 요점이었다. 국내 언어학계는 침묵했다. 역사학계라고 딱히 검토 연구가 나온 것도 없었다. 침묵의 다른 표현은 ‘무시’였다.


한국어와 수메르어의 공통점

조철수 박사의 주장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수메르어는 한국어처럼 교착어다. 교착어라는 것은 몽골어나 터키어 일본어처럼 어간을 변화시키지 않고 어미를 변화시키는 특징을 갖는다.

아울러 전치사가 아닌 조사가 발달해 있다. 동시에 수메르어는 한국어처럼 주어+목적어+동사(SOV) 순서를 갖는다.

수메르어에서 제3자 인칭 복수를 가리키는 ‘~네’는 한국어의 ‘너-네’처럼 ‘네’와 같다. 한국어로 ‘시골-내기’ ‘신출-내기’처럼 ‘내기’는 수메르어로 ‘naki'다.

그래서 ‘아누나키’(Anu-naki)라는 수메르어는 하늘(Anu)-내기(naki), 즉 ‘하늘에 속한 이’라는 뜻으로 천사나 신들을 일컫는 말이 된다.

 

이쯤 되면 경탄할 독자가 있을 법하다. 하지만 사실 수메르어가 고(古) 한국어와 가까운 정도는 차라리 중국어나, 인도유럽어, 헝가리어, 터키어, 심지어는 이란어가 더 고대 한국어와 가까울 지경이라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수메르어는 사어(死語)이자 고립어이기 때문에 전 세계 여러 나라들의 언어와 부분적으로 같고 부분적으로 다른 현상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 나라마다 수메르어를 자국의 언어와 비교분석해서 그 연관성을 주장하는 것은 보통이다. 그러한 예로 수메르-헝가리어, 수메르-터키어, 수메르-일본어, 수메르-중국어, 수메르-타밀어, 수메르-산스크리트어간의 대조 분석은 이미 넘치고 넘쳐난다.

 

BC 4000~2000년경의 수메르어의 수수께끼는 오늘날에도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문화란 진화적인 속성이 있기에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듯이 전혀 새로운 문화가 등장하는 법은 없다. 수메르의 문화도 외계인이 어느 날 만든 것이 아니라 오랜 진화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 맞다.

다만 우리는 수메르 문명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정확히 모른다는 것이고 오늘날 많은 연구들은 수메르와 인도 간에 오간 오래된 교역에 주목하고 있다.

그래서 언어학자 데이비드 맥알핀(David McAlpin) 같은 학자는 인도와 중근동 간의 문화적 연속선을 고려해 ‘엘라모-드라비디안’(Elamo-Dravidian) 어군에 수메르어를 포함시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 수메르어 umun 우리말 우물이다

 

 

같고도 다른 고대어들 간의 상관관계

이는 수메르 문명과 인더스 문명 간의 연속점을 고려한 것이다. 분명한 것은 수메르어가 동시대의 인근 아카드어나 아랍어와는 아예 다르다는 점이다. 그 차이는 오늘날 중국어와 영어만큼이나 다르다.

그런데 수메르어가 드라비다어와 상당히 친연적인 면이 있다는 점에 학자들은 주목했다. 오늘날 수메르보다 그 문명의 출발과 전개가 늦다는 인더스 문명은 의외로 그 시작이 매우 이르다는 점이 밝혀지고 있다.

하라파 문명의 주변에서는 BC 4000년 경의 인장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를 ‘아나우 문명’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세계 최초의 문명이 인도에서 비롯됐다는 ‘ 아웃 오브 인디아’(Out of India)론이 새로이 강세를 띤다.

 

어떤 이유로든 이 ‘엘라모-드라비디안’ 어군이 수메르어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다면 한국어와 수메르어간의 공통분모도 이 드라비다어-한국어 관계 속에서 드러날 수 있다는 전망도 가능해 보인다.

이미 타밀어와 드라비다어의 많은 어휘들이 고대 한국어와 관계가 있을 거라는 연구들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엘라모-드라비디안 가설이 이보다 더 넓은 범위의 어떤 어군 하에 있다는 주장이다. 바로 ‘노스트라틱’(Nostratic) 어군이 그것이다.

현재 정통 언어학자들은 이 가설을 ‘미친 언어학자들의 잠꼬대’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이 노스트라틱 어군은 크게 유라시아와 인디아를 포함해 저 신대륙의 아메리카 인디언어까지를 공통어군으로 추적하기 때문이다.

 

  
▲ 수메르의 청동기(BC3000)

 

 


1만 년 전 유라시아에서는…

‘노스트라틱’이라는 말은 라틴어로 ‘이웃’이라는 뜻이다. 연구 중심에 섰던 학자들은 러시아의 비교언어학자들이었고 알란 봄허드(Allan Bomhard)가 대표적인 학자다.

이들은 언어도 유전자처럼 그 기원에 대해 재구를 통해 추적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한 성과로 이들은 인도유러피언어와 알타이어간의 친연성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이때까지만 해도 언어학자들은 나름 이 방식에 흥미를 보였지만 러시아대학의 언어학자 세르게이 스타로스틴 박사가 노스트라틱어의 재구법칙을 확립하자 상황이 변했다.

 

그 재구 방법이 유라시아 대륙에 분포하는 어군 전체와 드라비다어, 중국어, 중근동어 쪽으로 확대됐고 신대륙의 인디언들이 다름 아닌 고시베리아어와 함께 묶일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언어학자들은 비로소 이 노스트라틱어학자들을 ‘미쳤다’고 판단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유전자 인류학이 이 노스트라틱어 가설에 힘을 실어줬다. 유전자 거리와 언어 거리에 상당한 관계성이 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인도유러피언어의 본고향이 현재의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 대륙 쪽에 좀 더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주장이 현재 인류학계의 큰 별 콜린 렌퓨에 의한 것이니 쉽게 반박하기도 쉽지 않다. 물론 한국어도 이 노스트라틱어군에 들어간다. 다시 말해 지금으로부터 약 1만 년 전에는 유라시아 일대에서 어떤 한 종류의 말로 모두가 소통이 가능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세르게이 스타로스틴은 이 연구에 ‘바벨 프로젝트’라는 이름을 붙였고 미국 산타페고등연구소와 공동연구를 했다. 흥미로운 것은 ‘금융계의 황제’ 조지 소로스가 이 프로젝트에 후원을 했다는 점이다.

수메르어와 한국어 간에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이 노스트라틱어와 관계가 있을 수 있다. 수메르인들에게 1만 년 전 노스트라틱어로 인사를 건네보자.

‘jar nal!’ (좋은 날 > 안녕)

이 인사는 무려 100여개의 서로 다른 어군에서 자신들의 옛 언어로 ‘밝은 해(Bright Sun)’ 그리고 좋은 날(Good Day)로 해석할 수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

'길가메시 서사시' 의 가장 완벽한 판본은 아시리아 왕 아슈르바니팔(재위:기원전 668~627)의 서고가 있는 니네베에서 발견된 것으로, 12개의 명판에 아카드어로 씌어 있는 것이다. 명판에서 누락된 내용은 부분적으로 메소포타미아나 아나톨리아 등 다른 곳에서 발견된 여러 자료에서 메꾸었다.시와 서사시 명판에 나타나는 길가메시라는 인물은 일찍이 기원전 3000년대 전반기에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우루크 지방을 통치했던 길가메시를 일컫는 것으로 보이며, 그는 키시의 통치자였던 아가와 동시대 인물이었다. 우루크의 길가메시는 수메르 왕들의 명단에서도 대홍수 다음에 통치하였던 왕으로 나와 있으나, 시나 서사시에 묘사된 그의 영웅적 공적들이 역사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니네베에서 발견된 서사시는 길가메시를 찬양하는 머리말로 시작되는데 그는 신성과 인성을 함께 지녔고, 위대한 건설자이자 전사였으며, 땅과 바다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자였다. 무자비해 보이는 그의 통치를 막기 위해서, 아누신은 야생 인간 엔키두를 창조하였다. 엔키두는 처음에는 동물들과 함께 지냈지만 곧 도시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가 우루크로 갔을 때 길가메시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번째 명판에는 두 사람이 힘을 겨루어 길가메시가 승리하는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그 뒤로 엔키두는 길가메시의 친구이자 동반자(수메르인의 원본에는 하인으로 되어 있음)가 되었다.

 

세 번째에서 다섯 번째 명판에서는, 외딴 히말라야 삼나무숲을 지키도록 신에게서 명령받은 수호자 후와와(또는 Humbaba)에게 두 사람이 함께 대항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만이 나타나 있고, 그뒤 싸움에 대한 것은 현존하는자료에 남아 있지 않다. 여섯 번째 명판에서는, 사랑의 여신 이슈타르가 우루크에 돌아온 길가메시에게 청혼을 거절당하자 신의 황소를 보내 그를 해치려고 했으나 길가메시가 엔키두의 도움을 받아 그 황소를 죽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일곱 번째 명판에는 엔키두가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는 데서 시작한다. 꿈속에서 아누 · 에아 · 샤마시 등의 신들은, 황소를 죽인 엔키두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결정한다. 이 꿈을 꾸고 난 뒤 엔키두가 병이 들었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죽음의 집' 을 꿈꾸게 되었다. 여덟 번째 명판에서는 길가메시가 친구의 죽음을 비통해하는 내용과 국장으로 치른 엔키두의 웅장한 장례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뒤 길가메시는 죽음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바빌로니아 홍수에서 살아남은 우트나피슈팀을 찾아 위험한 여행에 나서 결국 그를 만나(아홉 번째, 열 번째 명판) 홍수 이야기를 듣고 불로초가 있는 곳을 알게 되었다(열한 번째 명판). 길가메시는 불로초를 구했지만 다시 뱀에게 빼앗겨 슬픈 마음으로 돌아와야 했다. 서사시에 첨가된 부분인 열두 번째 명판에는 이슈타르가 길가메시에게 준 푸쿠와 미쿠 ('북' 과 '북채' 로 생각됨)라는 잃어버린 물건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이 서사시는 엔키두의 영혼이 돌아오는 것으로 끝나고 있는데, 엔키두는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아줄 것을 약속하고 지옥의 무시무시한 인상을 말해준다. (700년후 노아가 이내용을 편집하여 노아의홍수를 집필(이때도 대형홍수 있었음 배구입비용 때문에 노예로 팔리기직전 배타고 도망간내용 역사학자가 찾음))

노아는 구약대로 하면 기원전 약 2890년경에 태어났으며, 홍수는 노아 600세때이므로 기원전 약 2290년경이 됩니다. 아브라함을  B.C. 2166년에 태어난 것으로 잡으면 홍수는 B.C. 2450년경이 되지요. 그러므로 홍수는 대략 기원전 25세기에서 23세기 사이가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원전 25세기 ~ 23세기 세계사 연대표

 * 한국 : 고조선 시작 (B.C. 2333)

 * 중국 : 황하문명 번창(B.C. 2500년경에 황하문명 시작)

 * 인도 : 인더스문명 번창(황하문명과 비슷)

 * 이집트 : 제1중간기 - 중앙의 절대권력이 무너져 내전으로 인한 혼란이 있었음.

                 이집트는 B.C. 4500년경에는 마을문화가 형성되었으며,

                 B.C.4200년에 이집트력을 사용하였고, B.C. 3100년경에는 상형문자를 사용함.

 * 메소포타미아 지역 : 수메르 시대

 

 참고 : 이스라엘인들은 기원전 3760년경에 인류가 시작된 것으로 봅니다. 이들의 계산법대로 하면 인류역사는 현재 5774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