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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려의 경주와 안동은 요녕에 있었다.(Goryo Gyeongju an Andong were placed in Liaoning,China)

monocrop 2013. 11. 13. 00:08

 

 

공민왕 13년조의 기록   

 

 

 

卷四十二 世家 卷第四十二 > 恭愍王 19> 1

 

時東寧府同知 李吾魯帖木兒, 聞太祖來. 移保亏羅山城, 欲據險以拒, 太祖至也頓村, 吾魯帖木兒來挑戰, 俄而棄甲再拜曰, “吾先本高麗人, 願爲臣僕, 率三百餘戶降. 吾魯帖木兒, 後改名原景. 其酋高安慰帥麾下, 嬰城拒守, 我師圍之. 太祖適不御弓矢, 取從者之弓, 用片箭射之, 凡七十餘發, 皆正中其面. 城中奪氣, 安慰棄妻孥, 縋城夜遁. 明日頭目二十餘人率其衆出降, 諸城望風皆降, 得戶凡萬餘. 以所獲牛二千餘頭, 馬數百餘匹, 悉還其主, 北人大悅, 歸者如市. 東至皇城, 北至東寧府, 西至于海, 南至鴨綠, 爲之一空.

 

이 때 동녕부 동지(東寧府同知) 이오로 첩목아(李吾魯帖木兒 이원경(李原景))가 태조가 온다는 말을 듣고, 우라산성 으로 옮겨 험한 곳에 웅거하여 막으려 하였다. 태조가 야돈촌(也頓村)에 이르자 오노첩목아가 와서 도전(挑戰)하였으나, 조금 후에 갑옷을 버리고 두 번 절하면서 말하기를,"우리 선대는 본래 고려 사람이니, 신복(臣僕)이 되기를 원합니다하며, 3백여 호()를 거느리고 항복했으나, 그 추장(酋長) 고안위(高安慰)는 오히려 성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으니, 우리 군사가 이를 포위하였다. 이 때 태조는 활과 살을 가지지 않아서 종자(從者)의 활을 받아 아기살[片箭]로 적을 쏘았는데, 무려 70여 번을 쏘아 모두 그 얼굴을 맞히니, 성 안 사람들이 놀라 기운이 빠졌다. 안위(安慰)는 밤에 처자를 버리고 줄에 매달려 성을 넘어서 도망하였다. 이튿날 두목(頭目) 20여명이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항복하니, 여러 산성(山城)도 풍문만 듣고 모두 항복했는데, 그 호수(戶數)가 무려 만여 호()나 되었다. 노획한 소 2천여 마리와 말 수백 필을 모두 그 주인에게 돌려주니, 북방 사람이 크게 기뻐하여, 저자[]로 사람들이 몰려가듯 귀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동으로는 황성(皇城)에 이르고, 북으로는 동녕부(東寧府)에 이르고, 서로는 바다에 이르고, 남으로는 압록강(鴨綠江)에 이르기까지 모두 텅 비게 되었다.

 

 고려사를 보면 고려후기 공민왕 4년에 원나라가 북원으로 도망가 망하기 직전 고려에서는 이미 천도 이야기가 나오고 남경의 백악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왜 그랬을까? 원에게 괄시 받아온 중국인들이 홍건적으로 변하여 고려를 전복시킬 정치적 위협을 느낀것으로 보인다. 운영자 비정으로 고려말 남경의 백악이 바로 현재의 개성이 아닌가 한다. 이후 홍두적(홍건적?) 4만명이 처들어와 개성을 접수당하고 왕실은 왕비와 함께 <안동>까지 피난가게 되는데 안동에서 배를 타고 물놀이를 하지만 공민왕은 왕이 백성을 두고 피난가는 일을 두고 얼굴을 들 수 없다고 신하에게 말한다.  

 

또 한가지 운영자의 245번글과 같이 우왕때 경주가 반란이 일어나 경주방어사를 폐하고 현재의 경주로 이동시킨다는 기록이있다. 조선왕조실록은 현재의 경주를 고려의 경주에 이치시켜 후대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혼란을 일으키게 하였으나 실제의 고려경주는 바로 현재 요녕성 봉황성으로 비정된다. 

 

봉황성에서 안동(현 단동)과는 멀리 떨어진 지역이 아니며 공민왕19년 기록 처럼 왕도개성은 동녕로 남쪽이며 압록강의 북쪽에 위치한다 하므로 현 압록강이 고려말기 압록이라 가정할때 경주(봉황성)의 위치보다 북쪽에 위치하며 철령(鐵嶺)으로 부터 300리(120km) 떨어진 어느 지역에 위치해야 지리적으로 맞게된다. 왜냐하면 고려 공민왕 스스로 遼,審이 본래 고려의 강역이라고 하였고 원나라 말기에 이지역을 복구했기 때문이다. 

 

 원사 동녕로편에 고려 서경(평양)은 본 고구려 평양에서 동으로 1천여리 떨어졌으며 원래 고구려 평양이 아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철령이 심양의 북쪽인바 공민왕시 고려왕도 개경은 지형적으로 현재의 역 120km 남쪽인 심양(沈陽)이나 무순(撫順)의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게 운영자의 생각이다. 심양은 요녕의 성도이고 현재 중공의 5대군구중 하나인 심양군구가 위치한 곳으로 동북평원을 제어하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위치를 갖는데 한개의 중심 도시는 갑자기 생겨난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지도에 고려경주가 요녕 <봉황성>이라는 증거가 보인다.

 

 

현 요녕 봉황성이 경주 황성이라고 표기한 조선 고지도

 

조선의 사행로상에 봉황성이 있다.

 

현재의 압록강변 단동은 바로 옛 안동이었음을 알수있다.

 

실제 봉황성은 중국당국에서 사진을 찍지못하게 하는 봉금지역으로 수년전 방문자의 전언에 따르면 실제 석성의 둘레가 19km 정도로 대단히 큰 성이다.

 

 

사진출처: 네이버 블로그 임동규의 사진세상

 

 

심제 글.

 

 

 

 

 

 

 

출처 : 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 : 心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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