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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케이넨의 정유재란 종군기(1) -역사적 원인과 배경

monocrop 2009. 12. 11. 04:22

본글은 운영자가 그 서적을 읽고 간략하게 정리한 내용입니다 2편에 서술되었습니다.임진왜란에 이은 정유재란의 처참함 ,조선정부의 무능, 왜군의 잔인함, 명군의 전쟁중재 와중에서 실리챙기기 등이 글 내용에 있습니다. 정유재란이 발생하게된 원인과 임진왜란의 결과를 정리합니다.

 

왜조정은 조선정부와의 강화(즉,명이 중재한 조선에서 왜병이 철수하되 조선의 왕은 풍신수길이한다 라는것에 대한 조선정부의 반대)가 결렬되자 1597년(선조 30) 1~2월 14만 1,5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재차 침략했다.

 

명나라도 병부상서 형개(邢 )를 총독, 양호(楊鎬)를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 총병관 마귀(麻貴)를 제독으로 삼아 5만 5,000명의 원군을 보내왔다. 이때 조선군의 전선 동원병력은 3만 명으로 권율부대를 대구 공산에, 권응수부대를 경주에, 곽재우부대를 창녕에, 이복남(李福男)부대를 나주에, 이시언(李時言)부대를 추풍령에 각각 배치했다. 7월초 일본은 주력군을 재편하여 고바야가와[小早川秀包]를 총사령관으로, 우군은 대장 모리[毛利秀元] 이하 가토·구로다 등으로, 좌군은 대장 우키다 이하 고니시·시마즈[島津義弘] 등으로 편성한 뒤 하삼도를 완전 점령하기 위해서 공격을 감행했다.

 

왜군은 남해·사천·고성·하동·광양 등을 점령한 후 구례를 거쳐 전병력으로 남원을 총공격했다. 이에 이복남·이춘원·김경로 지휘하의 수성군은 격전을 벌였으나 수의 열세로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후 왜군은 전주에 집결한 후 좌군은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약탈을 하고, 우군은 충청도로 북진했다. 9월초 충청방어사 박명현부대는 여산·은진·진산에서 일본군을 공격했고, 이시언부대도 회덕에서 일본 좌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정기룡(鄭起龍)부대는 고령에서, 조종도(趙宗道)부대는 황석산성에서 일본 우군과 치열한 격전을 전개했다. 9월 5~6일 권율·이시언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해생(解生) 지휘하의 명나라 연합군은 직산에서 가토군·구로다군을 대파했다. 이에 왜군은 더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남하하여 고니시군은 순천, 가토군은 울산으로 후퇴하여 농성했다. 그해 11월 명의 형개가 4만 명의 병력을 3로로 재편하자 조선군도 이시언·성윤문(成允文)·정기룡이 각각 1영(營)씩 지휘하여 남진을 시작했다.


한편 그해 1월 왜군측의 거짓정보와 서인 일부의 모함에 의해 정부의 출동명령을 집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순신은 파직당하고 대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4월 조선수군은 조선 연해로 들어오는 일본수군을 중도에서 공격하려다 태풍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수군의 부산상륙을 허용했다. 이어 왜군이 제해권을 빼앗기 위해 해전에서 맹렬한 공세를 취하자,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6월 안골포전투와 7월 웅포전투, 칠천도전투에서 대패했다. 8월초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복귀한 이순신은 9월 16일 12척의 함선을 이끌고 출동하여 서해로 향하는 300여 척의 왜전선을 명량(鳴梁)에서 대파했다.

 

이 승리로 왜군의 수륙병진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조선수군은 다시 제해권을 장악했다. 육지와 바다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패주하여 남해안 일대에 몰려 있었다. 그해 12월과 다음해 1월에 걸쳐 울산 도산성에서 권율 지휘하의 조선군은 가토군을 공격했고, 각 지역에서 왜군 잔당들을 섬멸했다. 그리고 이순신 지휘하의 수군도 절이도와 고금도에서 일본 수군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1598년 8월 마침내 도요토미가 죽자 왜군은 철수하기 시작했고, 이에 조선군은 마귀·유정(劉綎)·동일원(董一元) 등이 지휘하는 명군과 함께 육상에서 일본군을 추격했으나, 명군의 유정이 고니시로부터 뇌물을 받고 명군을 철수시킴으로써 일본군을 섬멸하지 못했다. 한편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진린(陳璘) 지휘하의 명 수군과 함께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11월 노량(露梁)에서 일본전선 300여 척과 해전을 벌였다. 그결과 조선과 명이 일본의 함선을 200여 척이나 격침시키는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순신은 전사하고 말았다. 이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일본과의 7년에 걸친 전쟁은 끝나게 되었다.


[전쟁의 결과]


이 전쟁은 16세기말 동아시아 3국이 모두 참전한 국제전으로 가장 큰 손실을 입은 것은 조선이었다. 조선은 전국 8도가 전장으로 변해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엄청난 재산피해를 입었다. 토지대장과 호적이 대부분 없어져 국가운영이 마비상태에 빠졌고, 전쟁 전에 170만 결에 달했던 토지결수도 54만 여 결로 줄었다. 이는 물론 양안(量案)에 등록된 결수(結數)이므로 실제 경작면적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 초기에 비하면 1/3도 안 되는 면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전란으로 인한 문물의 파괴, 재력의 탕진을 복구하기 위한 개혁이 정권의 급선무였다. 제도적 개혁으로는 비변사(備邊司)의 강화와 훈련도감을 비롯한 군사기구의 개편이 이루어졌다. 원래 비변사는 군사만을 담당하는 기관이었지만, 영의정 이하 삼공육조판서(三公六曹判書)가 모두 당상제조(堂上提調)에 임명됨으로써 서정일반에 관여하는 기관이 되었다. 이어 국가의 모든 국사가 국방문제와 관련되어 처리됨에 따라 의정부·육조의 업무 대부분까지 비변사가 담당함으로써 행정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군사적으로도 명의 제도를 받아들여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오군영제(五軍營制)를 마련했고 지방에는 초관과 속오군을 조직했다. 그런데 전쟁중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납속책(納粟策), 서얼허통(庶孼許通), 향리의 동반직(東班職) 취임허용, 병사의 면역(免役), 노비의 방량(放良) 등이 일부 허용됨에 따라 중세적 신분질서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또 근본적으로 군역(軍役)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양전(量田)이 실시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정책들은 많은 모순을 안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국가의 조세수입은 줄어들었지만 군비의 확장, 국가의 지출 경비는 계속 늘어나게 되어 농민들에게 과중한 부역·공납·납세를 강요했고 이에 따른 이농현상이 광범하게 나타났다. 그결과 공물의 미납화, 양전수세의 간편화, 면세전 확대 방지책, 병역의 납세화, 환곡책, 모곡(耗穀)의 회수책 등이 제도화되었다.

 

문화적으로는 전란으로 궁전·관청건물들과 홍문관·춘추관 등에 보관되었던 서적, 실록들이 소실되었고 많은 귀중한 문화재들이 약탈당했다. 사상적으로 봉건집권세력은 일반민들로부터 신뢰를 상실하고 내부 분열이 심해져, 해이해진 기존 질서를 더욱 강화시킬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이에 따라 주자학 이념의 교조화가 더욱 심해지고 집권세력 내부 간에도 비판을 용인하지 않는 경직된 풍토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더욱이 집권세력·지식인층들의 사상에는 명군의 원조에 대해 존화의식이 강화되어, 이는 이후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북벌론을 형성하게 되었다.


한편 왜는 전쟁을 통하여 도요토미 정권이 붕괴하고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 정권이 등장했다. 도쿠가와 바쿠후는 국내적으로 〈무가제법〉·〈대오법도〉·〈참근교대제〉 등을 제정하여 신분위계제에 근거한 봉건지배체제를 세우고, 도요토미의 팽창주의와는 달리 쇄국정책(鎖國政策)으로 대외교역의 단일적 통일체제를 갖추었다. 더욱이 도쿠가와 바쿠후는 조선과의 통교회복을 서둘러 일본에 잡혀간 조선인들의 귀환문제 등에 적극적인 유화책을 썼다. 그리하여 1604년 승려 유정이 일본으로 가 교섭을 하여 14만명중 3,000여 명을 귀환시켰다.

 

1607년에는 도쿠가와 정권의 화의를 받아들여 여우길(呂又吉) 등의 사절을 파견했으며, 1609년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여 무역을 재개했다. 일본은 전쟁중 조선으로부터 약탈해간 활자·그림·서적 및 포로로 데려간 우수한 활자 인쇄공을 통해 성리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과 인쇄문화를 발전시켰다. 더욱이 조선에서 데려간 도자기 기술자에 의해 일본의 도자기 문화가 크게 발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명나라는 전쟁으로 국력이 많이 소모되어 재정압박이 가속되었고, 각종 봉건징세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봉기와 지방의 봉건군벌들의 반란이 잇달아 일어났다.

 

만주에서는 명의 세력이 약해진 것을 계기로 누르하치[奴兒哈赤]가 건주위(建州衛) 및 하다[哈達]·휘파[輝發]·우리[烏拉] 등 여러 여진족을 통일한 뒤 1616년 칸[汗]에 즉위하여 후금(後金)을 세워 명·청 교체의 기틀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을 계기로 지금까지 동아시아의 유교문화권에서 후진국으로 인식되어왔던 일본과 여진족이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고 중화문화의 정통을 자부해온 명과 조선이 상대적으로 쇠약해져 17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새롭게 변화되었다.

 


(400년후의 흐름은 명이 중공으로 조선이 한국으로 대체되었을 뿐 미국을 보스로한 일본의

 힘 키우기와 대리전 불사는 변한것이 없습니다.)

 

 

출처 : 잃어버린 역사,보이는 흔적
글쓴이 : 도불원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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