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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몽골에서 바로본 고려의 위상은 제후국에서도 능동적 주체

monocrop 2008. 8. 27. 02:04

<세계제국 몽고에서 바라본 고려>


 

김호동 교수 "쿠빌라이 집권이 결정적"

 이른바 몽고간섭기 고려와 몽고 관계를 바라보는 국내의 시각은 일반은 물론이고 학계에서도 부정 일변도라 할 수 있다.

고려에 시집온 공주들을 매개로 고려 국내 정치에 깊이 간여함으로써 "원의 지배체제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김성준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주장이라든가, 고려왕은 "독립된 왕국의 통치자"가 아니라는 장동익 경북대 교수의 견해는 이런 시각을 대표한다.

이런 이해는 어쩌면 일제식민통치라는 한국 근ㆍ현대의 역사상이 투영된 결과일 수도 있다.

몽고사를 비롯한 중앙아시아사가 주된 연구영역인 김호동(金浩東.52)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는 몽고제국이라는 관점에서 고려를 바라볼 필요도 있다고 역설한다.

"몽고제국에 대한 이해는 고려 후기의 대외관계사뿐만 아니라 (고려의) 내적 역사전개를 이해하는 데도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고 말하는 그가 최근에 낸 '
몽골제국과 고려'(서울대출판부)라는 비교적 짧은 단행본은 그런 생각을 구체화한 결과물이다.

'쿠빌라이 정권의 탄생과 고려의 정치적 위상'이라는 부제를 표방한 이번 연구물은 언뜻 몽고를 앞세우면서 고려는 종속변수 취급한 느낌을 주는 까닭에 아무래도 고려라는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대다수 한국사 연구자나 일반에는 불편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연구에서 몽고제국사라는 거대한 영역 안에 '포박'(抱搏)된 고려는 의외로 시종일관 세계제국에 끌려다니기만 한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그 제국에서 당당히 '주권'을 행사하기도 한 능동적인 주체로 다시 태어난다.

크게 2부로 구성된 이번 단행본에서 김 교수는 먼저 쿠빌라이가 치열한 대칸 후계전쟁에서 승리하는 과정을 분석한 다음, 그 성과를 바탕으로 그의 대칸 즉위(1260)와 동시에 몽고에 항복한 고려의 정치적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구명하고자 했다.

김 교수는 이른바 몽고간섭기 고려군주는 군주로서 독자성을 유지한 '국왕'이면서도 대칸의 '부마'라는 지위도 동시에 지녔다면서, "표면상 모순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 두 지위는 1281년 (고려)
충렬왕이 '부마고려국왕인'(駙馬高麗國王印)을 받음으로써 일체화되었다"고 말한다.

나아가 당시 몽고제국에서 민(民.백성)과 사(社.사직)를 동시에 보유한 제왕(諸王.제후)은 고려군주가 유일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고려국왕이 이들 두 지위를 동시에 획득하게 된 것은 1260-1264년, 쿠빌라이가 친동생 아릭 부케와 치열하게 벌인 대칸 후계전쟁과 밀접한 상관성을 지닌다고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이런 상황에서 쿠빌라이는 다른 무엇보다 고려가 남송(南宋) 및 일본과 연합전선을 구축해 몽고에 대항할 것을 심각히 우려한 데다, 특히 이 와중에 터진
삼별초의 난에 더욱 위기감을 느껴 '부마'가 되고자 하는 고려측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김 교수는 고려국왕이 '부마'로써 대칸 선출을 위한 회의인
쿠릴타이에 참석하는 등의 방식으로 몽고제국에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덧붙이면서, 이런 관계가 '정동행성'(征東行省) 증설과 그에 따른 내정간섭 심화로 흔들리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고려는 쿠빌라이가 고려국왕에게 약속한 '국왕'과 '부마'의 이중 지위 유지를 주장했다고 덧붙였다.(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출처 :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
글쓴이 : 庭光散人글돋先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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