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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왜왕실에 잠들고 있는 우리 사서들

monocrop 2008. 2. 9. 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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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君) 인정한 일본 문서 발견  

 

[연합뉴스 1999-10-04]  
(수원=연합뉴스)  

 

한국 강점후 단군의 존재를 부정했던 일본이 사실상 단군을 인정한 문서가 발견됐다.
서지학자 이종학(李鍾學.73)씨는 개천절을 앞둔 2일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왕실의 재산, 문화재를 관리하기 위해 만든

이왕직(李王職)이란 기관이 발행한 문서 9쪽을 공개했다.
이왕직 장관을 지낸 시노다 지사꾸(條田治策)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문서는

소화(小和) 13년(1938년) 8월 이왕직에서 발행한 것으로 적혀있고, `종묘의 기원'이라는 소제목이 붙어있다.
이 문서는“단군의 사실여부에 관한 분분한 의견이 있으나

단군에 대한 기록이사실임을 확신한다”면서,

단군의 근거로 “사마천의 사기 등 많은 기록과 동사고기(東史古記), 삼국유사 등에서 단군에 대한 기록이 이미 있었다”고 주장했다.
문서는 또“배씨와 기씨 등 조선내 일부 가문의 족보에도 단군 개국설을 인정하는 기록이 있다”고 덧붙였다.
이씨는 “경성제대 총장을 역임했던 시노다 지사꾸는 조선역사에 정통했던 일본인이었다”며

“자료는 한반도 강점 후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단군의 존재를 부정했던 일제의 역사 왜곡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씨는 이와 함께 조선총독부 중추원이 기록한 조선사료(朝鮮史料) 중 3권을 공개하고

“조선사료에 단군의 출생과 사망, 유적, 평론 등과 단군건국에 관한 내용들을 상세하게 기록한 점으로 미뤄

당시 일본이 단군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bhcha@yonhap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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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명단 이병도 교수의 뒤늦은 참회

국내 역사학계의 태두인 이병도 교수도 한국사를 왜곡한 조선사 편수에 일한 경력으로 친일인사에 꼽혔습니다. - imbc 뉴스-

식민사관을 계승한 이병도 사관
 

 이병도와 더불어 『한국상고사입문』(1989년)을 발간했던 상고사연구가 최태영 박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한국땅에서 단군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실증사학을 내세워 단군을 가상인물로 보기 시작한 것은 이승만 정권 때부터이지요.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이지만 이병도 박사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박사는 말년에 건강이 나빴는데, 어느 날 병실에 찾아갔더니 죽기 전에 옳은 소리를 하겠다며 단군을 실존인물로 인정했어요. 그 사실을 후학들이 모르고 이박사의 기존학설에만 매달려 온 것입니다.
 
 
그리고 한민족이면 누구나 어린아이 때부터 배웠던 ‘동몽선습’이나 ‘세종실록’ 등 각 고전에도 단군기록이 나옵니다. 수백년전 기록을 어떻게 믿겠느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역사기록이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판소리할 때도 그 긴 내용을 한자도 바꾸지 않고 노래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역사기록은 더욱 정확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서울대법대 초대학장을 역임한 상고사연구가 최태영 박사, 2000년 1월3일자 문화일보 특별대담)


 

[식민사학 거두 두계 이병도 참회글]
 
단군은 신화아닌 우리국조
 
 
 
*다음은 이병도 박사가 죽음을 삼년 앞둔 시점에서 평생 자신의 학설을 뒤집고 단군 조선의 실재를 인정한 기사로 1986년 10월 9일 조선일보에 실린 글이다. 당시 사학계의 거두였던 두계 이병도의 이 참회기사는 조선일보 특집기사로 1면에 실릴만큼 사회의 파장은 엄청났다. 식민사관과 친일파들에게 의해 숨겨졌던 한민족의 고대사가 해방 후 세상에 처음 드러났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단군신화' 운운하며 강단사학은 우물안개구리마냥 허우적거리고있다.
고조선의 실증적 존재가 있는데 그 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단군'이 보통명사라는건 사학계에 공인된 사실임에도, 2096년간의 단군조선의 첫 왕인 단군왕검의 탄생을 아직도 신화라 치부함은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단군은 신화아닌 우리국조

- 조선일보 1986년 10월 9일자 인용

 
 
"역대왕조의 단군제사 일제때 끊겼다"

대체 천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지만 그중에서 천을 군장의 뜻으로 해석할 때에는 개천절은 즉 「군장을 개설한다」는 것이 되므로 개국, 건국의 뜻이 된다.

그러면 우리의 이른바 개천은 즉 최고 시조인 단군의 즉위와 개국을 의미하는 개천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그런데 삼국유사 기이 제1권의 「고조선(왕검조선)」조에 의하면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고 했다.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홍익인간」의 이념을 가히 실현할 만하므로 하늘이 그를 인간세계에 내려보내 다스리게 하니 환웅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정 신단수하에 내려와 이곳을 신시라 하고 그를 환웅천왕이라고 하게 되었는데, 그는 풍백(풍신) 우사(우신) 운사(운신)의 삼신을 거느리고 주곡 주명 주형 주선악등 무릇 인간삼백육십여사를 주관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일견 지상국가를 천상국가의 한 연장으로 관념한데서 생긴 신화와 같이 보이나 이 신화를 검토하면 환웅천왕의 존재는 실상 지상국가를 개창한 군장이라기 보다는 인간사회의 백사를 주관하는 수호신적 성격을 가진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서낭당은 천왕당

이 수호신의 주처는 곧 신단수로 이것은 지금 민속중에 생생히 남아 있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서낭당이 그곳이니 선왕당(서낭당)은 즉 천왕당인 것이다. 이 서낭당의 나무가 곧 신단수 그것이고 그 밑의 돌무더기가 신단이다. 그리고 옛날에 이 신단을 중심으로 한 부락이 신시였던 것이다.

신단수는 실상 원시사회의 수목숭배(수목숭배)에서 시작되어 처음에는 수목자체가 신 그것이었는데, 그후 변천하여 신단수는 천신 천왕의 강하계단, 혹은 천왕의 주처 또는 그것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렇다하고 옛날의 국호는 대개 도읍지의 이름과 일치하므로 단군의 도읍지라고하는 아사달(아사달)이 정작 국호였고 조선은 후에 이르러 「아사달」을 아역한 것이니 이에 대해서는 서울대 논문집(사회과학)제2집에 「아사달과 조선」이란 졸고를 통해서 자세히 발표하였다. 환웅천왕이 웅녀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고기에 전하여 오지만 여기의 웅녀는 고기에는 웅이 여신으로 화한 것이라 하나 이는 웅(곰) 토템족의 여자로 해석하여야 옳다고 나는 연래 주장해 오고 있다.

즉 웅을 신성시하여 자기의 조상이 곰에서 나왔다 하여 종족의 칭호로 삼던 족속의 여자란 뜻이다. 그리고 보면 웅녀는 지상족이라 할 수 있고 이에 대하여 환웅은 천상족, 천신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단군은 즉 이 천신족과 지신족과의 결혼에서 생긴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10월3일(음력)을 개천절이라 하여 단군의 개국일로 기념하여 온 데는 역시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원래 십월절은 종교적으로나 민족적으로 큰 의의를 가진 달이다.

즉 십월절은 4계절의 하나로서 계절과 농업과는 큰 관계를 가졌으므로 고대 농업사회에서는 계절이란 것을 상당히 중시하였다. 그래서 계절마다 부락공동체의 종교적 대제전이 행해져 신인공락(신인공락)의 놀이를 하였던 것이다. 이를 계절제(Season festival)라고 하는 것인데 계절제중에서도 더 중요시하는 것이 락종(하종)시의 계절제와 추수기의 계절제였다.

이 두 계절제는 어느 계절제보다 더 중요시하고 따라서 그 의식도 성대하였다. 전자는 즉 신에게 년사의 풍등을 기원하는 것, 후자는 수확에 대한 감사제 혹은 천신제로서 서양에서는 이것을 「Thanks giving」이라 하여 오늘날까지도 행하고 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낙종기의 제전을 오월에, 추수기의 그것은 10월에 행하여 군중이 한데 모여 천신에게 제사하고 가무와 음주로 주야를 쉬지 않고 즐겁게 놀았는데(군민이 동락하였는데) 이 제사를 수리라고 했던 것 같다. 후세에 5월단오를 수릿날이라 하며, 수리취떡을 만들고 술을 빚어 여러 가지의 놀이를 하며 십월을 상달이라 하여 초생에 집집이 신에게 고사하고, 선조무덤에 시제를 지내는 풍속이 있지만 이야말로 옛날로부터 내려오는 오월제 십월제의 유풍이라 할 것이다.
 

「상달」은 「수리달」

「수리」란 말은 상,고,산,신 등을 의미하는 고어로 그 어원은 「솟」「소슬」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보면 10월을 상달이라고 하는 것도 즉 「수리달」의 역으로 볼 수밖에 없다. 부여의 영고제, 고구려의 동맹제, 동예의 무천제가 다 이러한 추수감사제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고려시대에 성행하던 연등대회, 팔관대회도 춘동이기의 국가적 대제전이었지만 그중에도 가장 성대하던 것이 중동팔관이었다. 그런데 최근세 갑오경장이후로 민족의식 민족정신이 앙양됨에 따라 이 10월절의 고속을 갱생시켜 이로써 단군입국의 개천절을 삼은 것은 오랜 전통에 기인한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옛날 민속에 흔히 음력10월초생 특히 3일에 「고사」를 지내왔다는데 왜 3일을 택했느냐 하면 3이란 수는 세계적으로 널리 애용되는 수인 까닭이다. 3은 정족의 수인만큼 안정감을 가진 것이니 1이나 2는 실상 불안정감의 수이다.

일제의 멍에를 벗고 해방이 되자 그 해로부터 개천절을 우리의 전 민족적 국경일로 삼아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행하여 오다가 정부수립 후에는 양력 10월3일로 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위에 말한 것들은 졸저 「두계잡필」에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런데 현정회이사 이희수씨가 1977년 10월 「현정지」에 「사서상에서 본 국조단군」이라는 제목하에서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지금은 없어진 「고기」와 「구삼국사기」와 현존 위서와는 다른 또 하나의 위서의 단군기사에서 인용하였다고 그 출처를 밝히고 있을 뿐 아니라 사대의 입장에서 기술한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도 삼국이전의 사기를 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하면서도 여러 곳에서 고조선과 단군에 관하여 언급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단군에 관한 기재를 제외하였지만 동서권십칠 고구려본기오 동천왕이십일년춘이월조에 「왕이환도성경란불가복도축평양성이민급묘사평양자본선인왕검지택야혹운왕지도왕검」이라고 하였다(혹운이하의 왕지는 왕노릇을 하였다는 동사로 읽어야 하고 「도왕검성의 도도 동사로 읽어야 할 것을 잘못 「왕지도왕검」이라고 연서하였다. 그뿐 아니라 이때의 평양은 지금의 평량(평토량)이 아니라 고구려의 황성(황성, 즉 환도성)의 대안인 동황성(금강계)인 것이다. 지금의 평량에는 아직도 이때 낙랑군이 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인왕검지택」이라고 한 평량은 후일의 평량(지금의 평량)의 지칭이므로 전후자를 혼동하여서는 안된다.
 

당시 평양은 다른 곳

김부식과 같은 사가의 태도로 미루어보면 고성기자지택이라고 하지 않고 선인왕검지택야라고 한 것은 김부식의 머리속에 지금의 평량이 선인왕검의 도읍지인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외사서들이 한결같이 지금의 평량을 왕검성이라고 하는데 이의가 없었던 것 같다.

김부식이 고기를 인용한 부분을 보면 ①사기지리지고구려조에서 고기운주몽자부여도난지래본칙흘승골성 ②사기 지일 제사조에서 「고기운온조왕이십년춘이월설단사천지」 ③사기 열전 김유신상에서 김춘추가 강화하려고 고구려에 갔던 기록 가운데 주석을 달기를 「차여본언진평왕 십이년소서일사이소이이개고기소전고양존지」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고기에는 단군기사가 기재되어 있을 뿐아니라 그 기록이 고구려에 김춘추가 갔던 서기640년대까지도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김부식이 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이일년서이월조에서 「평량은 본래 선인왕검의 댁」이라고 한 것은 역시 고기이거나 단군기를 인용한 것으로 밖에는 볼 수 없다. 그리고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육촌도 조선의 유민이 산간에 와서 자리잡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삼국사기 권제일신라본기제일에 보면 「시조성 박씨‥즉위거서간시년십삼국호서나벌선시 조선유민분거 산곡지간위육촌」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일연이 인용한 고기의 단군기재를 근거있다고 볼 수 있으며 거듭 언급하지만 김부식이 평량이 선인(단군)왕검의 댁이라고 명기한 데서 고기가 단군기사를 실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일연이 마치 근거도 없는 고기를 들먹여서 단군기사를 지어냈다고는 볼 수가 없다.

우리 민족이 여러차례의 국난을 겪으면서도 단군묘에 제사하며 국가의 대행사인 축제때에는 노래(세년가)에 의하여 단군의 사적을 전해 내려온 사실은 너무도 명확하다.

세종실록권40 세종10년 무신6월조에 유관의 상서를 보면 문화현 구월산 동령허리에 신당이 있는데 어느 때에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북벽에 환웅천왕, 동벽에 환인천왕, 서벽에 단군천왕을 모셨는데 문화현 사람들은 이를 삼성이라고 일컬으며 산아래 부락을 성당리라고 한다고 하였다. 유관은 그 상서중에서 「구월산은 현의 주산이던 단군조선 때에는 아사달산이라고 하였으며, 신라에 와서 궐산이라고 고쳤다. 그때에 문화현을 궐구현이라고 처음에 이름하였다. 고려때에 유주감무로 하고 후에 또 문화현으로 고쳤다. 산 이름의 궐자를 느리게 소리내어 구월산이라고 부른다.
 

두 수의 시에 나타나

문화의 동쪽에 장장이라고 하는 지명이 있다. 부로들이 전하기를 단군의 도읍지라고 한다‥」하였으며 「구월산하에는 환웅을 남면으로 모시고 동서향으로 환인과 단군을 모신 삼성당이 지금도 존재하며 단군이 입도하였다는 자취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세종18년 병진 12월정해조 류사눌(류관의 조카)의 상서중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신이세년가고지단군초도평(토양)후도백악무정팔년을미입아사달산위신기가왈형국일천사십팔지금묘재아사달칙등무소처호우황고려건묘어구월산하기당우위판유존여세년가합」.

이로써 보면 고기 단군기 외에 가사형식으로 된 단군기사가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 세년가는 사실들과 부합되니 단군기재에 근거가 있다고 하였다. 유사눌은 한성부사를 지냈는데 또 상서하기를 「신이 단군세년가를 보니 단군은 조선의 시조입니다. 그 출생이 일반사람과 다르고 몰함에 신이 되었다」고 하였다. 어쨋든 조선세종대까지 단군세년가가 남아있었고 식자들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명기해 둘 만한 사실인 것이다.

앞에서 제시한 류관의 상서에 따르면 삼성당은 황해도 구월산 동령에 있다. 류관은 젊었을 때부터 거기에 내려가서 부로들로부터 단군사적이 오래되었음을 알았다고 했다. 삼성당에 환웅천왕을 상좌에 모셔서 남면하게 하고 동벽에는 환인천왕을 모셔서 서향하게 하고 서벽에는 단군천왕을 모셔서 동향하게 하였다고 한다. 삼성당의 경내외에는 새짐승들이 서식하지 않으며 산짐승도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또 가뭄이 심할 때 빌면 비가 내린다고 했다.

문헌비고 권64 찰고1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삼성사는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에 있으며 환인 환웅 단군을 모셨으며 춘추로 제사를 드린다 하고, 역시 문헌비고에 의하면 조선조 성종13년에 황해도 관찰사 이예지의 말에 좇아서 구월산에 삼성묘를 세우고 평낭(토량)의 단군묘의 예에 따라서 매년 향축을 보내어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람 권42 문화현사묘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삼성사는 환인 환웅 단군의 사이다. 춘추로 제사를 지내며 가물 때 빌면 효험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51 평낭조」에 보면 두 수의 시를 통하여 「개국한 지가 멀고 먼 단군은 조선시조이다. 단군의 역사는 언제 비롯되었는가. 요와 함께 개국하였다고 들었으니 거금 사천년이며 단군묘를 남겼다」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주체사상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조선 양조를 통하여 1천년간에 단군에 대한 국가적 태도는 묘를 세우고 제사를 받드는 등 자못 융성하였다. 이것은 단군을 국조로 섬겼음을 알 수 있다.
 

세종때 새 사당 지어

문헌비고 권13 여지고1 역대국계1에서는 단군조선국을 첫머리에 싣고 유사의 기록을 인용한 다음에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백악은 지금의 문화현이며 구월산의 본명은 궐산인데 단군의 궁궐터가 있기 때문이다. 궐산은 소리를 느리게 내어 궐산이 구월산으로 와전되었으며 구월산의 장당경은 또 장장평으로 와전되었을 것이다.

세종때의 사은주부 정척(정척)의 상서에 의하면 「평낭의 기자사당에 가보니 기자의 위패는 북쪽에 있어서 남향하였고 단군의 위패는 동쪽에 있어 서향하였다. 신의 생각으로는 단군은 당요와 같이 입국하였고 기자는 무왕의 명으로 조선에 봉하여졌으니 제왕역년수로 보더라도 제요에서 무왕까지는 1230여년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기자가 북향하여 남면하고 기자보다 앞서서 입국한 단군을 동쪽에 배향하는 것은 입국전세의 선후에 위배됩니다. 신이 본조의 제사의식을 고찰해보니 단군제의 진설도에 이르기를 「신위는 당의 중앙에 모셔서 남면토록 되어있으며 신이 기자사에서 본 서향의 좌는 진설도와 맞지 않다. 만일 단군을 기자와 나란히 남향하게 하더라도 단군을 상좌에 기자를 다음에 앉히는 것이 입국의 선후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름이 기자사당인데 단군을 주신으로 하는 것도 편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생각으로는 따로 단군사당을 지어서 단군을 남향하게 하고 제사를 받들면 사의에도 맞을 것 같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세종은 찰조에 명하여 정척의 장서대로 시행토록 하였다. 이상에서 보면 단군은 역대왕조에서는 국조로서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받들었으니 기자보다는 상위로 여기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단군의 제향이 끊어진 것은 일제 때부터였다고 본다.
 

단군조선 연구 숙제

삼국유사의 단군기재는 타서 등에서 뒷받침되는 바가 없지 않으므로 믿을 만한 것이며 일연의 창작은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일연이 인용한 고기도 김부식의 인용고기와 일치되는 바가 많으므로 고기는 당시에 분명히 있었으며 김부식도 선인왕검과 그 도읍지를 평양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기에는 단군사기가 분명히 있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단군의 세년가가 전하여져서 많은 식자들이 알고 있었으며 여러 곳에 단군의 사묘제천단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또 향단군진설도가 세전되어 왔고 그것은 단군제의가 끊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역대왕조에서는 조의에 의하여 건묘 봉제사했던 것이다. 만일 단군이 하나의 전설 신화거리에 불과하다면 위와 같은 일들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아무튼 단군과 단군조선에 관한 기재는 숙제로 남길지언정 신화로만 단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삼국사기에서 단군기재를 제외한 것은 김부식의 사대적 태도보다는 ①삼국사기의 명분상 삼국이외에는 부여등도 모두 제외하였으며 ②신라중심의 삼국사로 하였고, 신라보다 상대의 역사는 피하려고 한 데다 ③단군을 부인하려는 생각보다는 신라사를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한민족의 역사를 왜곡한 세 가지 해독 (펌글)

 

불과 수년 전 전국의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단군상 훼손사건은 우리 사회의 역사인식을 보여주는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10여 년 전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단군신화를 「근거있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32%(1992년 10월6일자 세계일보)였는데,

그렇다면 지금은 과연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뿌리를 알지 못하고 역사의식을 잃어버리면 그 나라의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다.

10월 3일 개천절을 국경일로 지정하고 있으면서도 국조 단군의 역사성을 확신하지 못하는 나라,

우리 사회의 역사인식이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초대 문교부장관을 지낸 안호상(安浩相) 박사는 10여 년 전에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지식인들이 중독(중국의 해독)과 왜독(일본의 해독)과 양독(서양의 해독) 등 3독에 빠져 있으며,

이 3독을 치유하려면 특히 식민사관에 물든 역사학자들이 반성하고,

민족주체성에 입각해 바른 역사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동 신문기사)
 
 민족사학자들은 이 삼독의 피해에 대해 대동소이하게 얘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소위 중독과 왜독과 양독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우리 민족 역사의 뿌리를 잃어버리게 한 그 사례를 찾아본다.
 
 
 중독(中毒): 사대주의 역사관
 

서기 650년부터 신라는 당나라 고종의 연호를 빌어다 썼다.

통일신라 때에도 당나라의 연호를 썼음은 물론이다.

그후 고려시대는 송나라의 연호를, 조선시대에 와서는 명나라, 청나라의 연호를 가져다 쓰는 것이 국시처럼 되어 있었다.
 
 그러다보니 역사를 쓰는 학자들이 아(我 - 나)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중국의 입장에서 역사를 썼다.
 
 중국을 대중화로 삼고 우리나라를 스스로 소중화로 비하시켜 보는 것이 바로 사대주의 역사관이다.
 
 이런 측면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랜 역사서로서 삼국시대의 정사를 기록한 「삼국사기」(1145년)가 역대 최고의 사대주의 사서로 꼽힌다.
 
 고려 중기때 사람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데 앞장섰으며 그후 삼국사기를 쓰게 되는데,

고구려가 수나라와 전쟁을 한 부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아(我)가 교오불공(驕傲不恭)해서 제장토지(帝將討之)라”
 
 해석-'고구려가 교만하고 오만하고 불손하여, 임금께서 장차 토벌하려고 했다.'
 
 이 부분은 누가 보아도 중국에 편중된 역사 서술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쓰면서, 우리가 교만하고 오만해서 중국의 임금이 치려고 했다… 는 식으로 쓸 수가 있을까.

지금 읽어보면 참으로 황당한 내용인 것이다.
 
 또 하나 예를 들면, 신라 650년 진덕여왕 4년에 당나라 고종의 ‘영휘’라는 연호를 처음 쓴 부분에 대해서도 주석을 달기를,
 
 “옛날에 법흥왕이 연호를 스스로 썼는데, 아, 편방의 소국으로서 왜 연호를 쓰나?

당 태종이 꾸지람을 했는데도 연호를 고치지 않다가,

650년에 고종의 연호를 갖다 쓰니, 허물을 능히 잘 고쳤다고 할 수 있도다”
 
 이런 식이다. 이것이 국보로 보존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의 역사서에 나오는 구절들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사정이 이러하니 중국의 입장에서 쓰여진 사대주의 책이라고 비판받아도 피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삼국사기에 보면 “진덕왕 3년(649년) 정월에 처음으로 중국의 의관을 쓰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부터 모든 관직이나 명칭에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모든 복장제도를 중국같이 바꿔 버렸다.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때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한국인의 가치관과 뿌리가 송두리째 뽑히고,

오직 중국에서 뿌리와 사상을 찾으려는 정신의 식민지시대가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고려 후기 때 편찬된 일연의 『삼국유사』(1281년)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고조선조에는 「고기(古記)」를 인용한 구절에 ‘석유환국’(昔有桓國 :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의 환국에 대해 주를 달면서

환국과 불교의 환인이 글자가 비슷해 보이므로 ‘위제석야(謂帝釋也)라’ 하여

환인천제의 환국을 국가가 아닌 불교의 수호신 제석천(帝釋天, 釋帝桓因陀羅, Sakra-Devendra)으로 바꿔놓았다.

다시 말해서 고려의 강산을 불국토로 만들려고 「고기(古記)」 원문에 없는 말을 제멋대로 갖다붙인 것이다.
 
 하지만 삼국유사는 「위서」와 「고기」(단군고기)에 나와 있는 기록들을 인용하여 서술하였다는 점에서,

또 고조선의 건국시기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최초의 역사책이라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던 고려시대 때 이러했다면,

유교를 국교로 삼았던 조선시대 때는 더 말할 나위도 없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서거정의 『동국통감』도 단군조선을 정통으로 다루지 못했으며,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는 우리나라 역사를 ‘기자’로부터 시작하게 된다.

당시에는 유림들에게 '사문난적'으로 몰릴 것이 두려워 감히 드러내놓고 주체적인 역사를 논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주: '사문난적'- '사이비 책으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인들'

조선시대에는 유교책 이외에는 대부분 '사문난적'으로 몰렸습니다.)

 

 

왜독(倭毒): 식민주의 역사관


 일제 식민주의자에 의한 역사왜곡을 왜독이라고 한다.

토인비는 “어떤 민족을 멸망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그 나라의 역사를 말살하는 것이 식민주의자들의 철학이다”라고 했다.

일제는 36년 동안의 식민통치 시절 우리나라 역사를 철저히 파괴했다.
 


 ■민족사서 20만권 강탈
 

1910년 조선총독부 산하에 취조국을 두고서 모든 서적을 일제히 수색했으며,

다음해 1911년말까지 1년 남짓동안 무려 20만권의 서적을 강탈해갔다.

그러니 한민족의 역사책 같은 것이 최우선적으로 압수되었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조선총독부 관보에 의하면, “51종 20만권 정도를 가져갔다”고 얘기하고 있다.

사료수집가 이상시 씨는,

한민족의 혼을 말살하기 위해 단군관련 기록을 중점적으로 약탈해 갔다는 사실을 신문지상에 발표하여 일제의 무도함을 다시 한번 세상에 드러낸 바 있었다(1985년 10월 4일자 조선일보).
 


 ■조선총독부의 교육시책 - 조상을 멸시하게 하라
 

1919년 3.1 독립운동 이후 제2대 조선총독으로 사이토(齊藤實)가 와서 문화정치를 표방한다. 이때 발표한 ‘교육시책’에서 사이토는 이렇게 발표했다.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등을 들춰내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아버지와 조상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조선)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跡-역사적 사실)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半)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이 내용을 잘 읽어보면,

새삼 우리 한국인들의 사고 속에 우리 나라와 민족에 대한 허무의식이나 부정적인 생각을 불러일으키도록 교묘하게 술책을 꾸민 것이

바로 일제 때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역사의 조작 및 날조의 산실 - 조선사편수회
 
 이러한 근본정신 속에서 일제는 1922년 12월 ‘조선사편찬위원회’(약칭 조선사편수회)를 만들고

1938년까지 35권에 달하는 『조선사』를 편찬했다.

그러나 조선사 편찬의 진짜 목적은 조선사의 뿌리를 없애는 데에 있었다.

일본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유구한 조선의 고대사를 통째로 말살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들에 의해 좌지우지된 조선의 역사는 처음에는 상고,삼한시대부터 다룰 듯 거론하다가, 차츰 연대가 낮춰지고 다시 삼국 이전이 됐다가

결국은 통일신라 이전부터 다루는 것으로 결정되기에 이른다.
 
 일제는 이 조선사 편찬을 위해서 당시 돈으로 쌀 10만 가마니 이상을 썼다고 한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조선의 역사를 조작, 개작하였는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온, 우리 민족 우리 조상의 역사는 일제에 의해 왜곡되고 조작되었다. 해방 이전의 역사가 완전 날조된 것이라니 정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 예로 2003년 8월 7일자로 발간된 「주간조선」에는 ‘구한말 지도’라는 게 실렸다.

1999년 6월 26일 국정홍보처가 영국과 공동으로 벌인 조사 결과

조선의 영역이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만주와 사할린 일대까지 그려진 지도가 대량 발견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기사에 의하면,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로마 교황청 등지에서도

조선의 영역이 만주와 흑룡강성 일대를 포함한 지역으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일제가 1909(순종3)년 9월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으면서,

만주 철도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 일대를 만주국 영토로 넘겨주었다는 것이다.
 
 ■이마니시 류가 환국(桓f)을 환인(桓因)으로 왜곡하다
 

일제의 뜻대로 한국 고대사를 주물렀던 주모자였던 당시 교토대 강사 이마니시 류(今西龍:후일 경성제대 교수)는 이병도 등과 더불어 신라부터 고려 때까지의 조선사를 뜻대로 왜곡한 장본인이다.


 ‘조선사편수회 회의록’을 통해, 일본인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가 ‘삼국유사’의 단군고기 중에 ‘昔有桓L’(석유환국)이라고 되어 있던 것을 ‘昔有桓因’(석유환인)이라고 고친 사실이 드러났다.
 
 이마니시 류가 소장하고 있던 1512년의 삼국유사 정덕본에는, 일연이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옛날에 환국이 있었다. 그 나라에 높은 서자 벼슬을 하는 환웅이 있었고

마지막 환웅대에 단군이 나타나 조선을 세웠다’라고 되어 있었다(현재 일본 천리대 소재, 국내에서는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그러나 이마니시 류는 변조된 내용을 경도제대 (경성제대를 뜻함) 영인본이라고 하여 발표한다.

그리하여 현재 전해지는 ‘삼국유사’의 판본에는 환국(桓L)이 환인(桓因)으로 변조되었고,

환인-환웅-단군으로 이어지는 민족사의 뿌리 역사를 송두리째 뽑아버렸던 것이다.
 
 이는 원래의 환국시대가 사실적이고 역사적인 것임에 반해,

‘桓因’이나 ‘帝釋’으로 바뀐 것은 불교적이고 신화적인 요소가 가미된 것이며,

시대적으로도 맞지 않은 명백한 조작이다.

 

지금으로부터 4336년 전에 세워진 단군의 고조선이 3000년 전의 불교의 부처보다 역사적으로 훨씬 이전의 사실이라는 점,

환국은 불교가 생기기도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점 등이 맞지 않다.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회개
 

그리고 이병도는 이마니시 류의 수서관보가 되어 ‘조선사 편찬’이라는 거대한 역사왜곡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광복 후에는 서울대 역사학과 교수, 문교부 장관까지 지냈다.

그는 『조선사』 편집에 참여하여 일제의 식민사관 수립 사업에 직접 기여하였고,

일제가 유포시킨 식민사관을 해방 후까지 이어주는 중대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 한국사학계에는 직접간접으로 이병도의 제자 아닌 사람이 드물다.
 
 일본은 한국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 역사는 주체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주변국에 의해서만 유지되어 왔다는 요지의 이른바 반도사관론을 대량 유포시켰으며,

우리 역사 사료들을 전부 빼앗아가고 불태우고서는 증거가 있어야만 인정한다는 식의 소위 실증주의 역사방법론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1920년대 ‘조선사편수회’의 학풍을 이어받은 이병도는 나중에 고대사 연구에 “일본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바 적지 않았다”고 스스로 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병도는 죽기 직전, 단군은 신화가 아니라 우리의 국조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반성문을 발표한다.

그간 최태영 박사, 송지영 KBS 이사장, 국문학자 이희승 박사 등의 설득으로

과거 자신의 역사관을 크게 수정하여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심정으로 조선일보 1986년 10월 9일자에 논설을 게재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이를 바라보던 제자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어떤 이는 ‘노망 드셨네’ 하며 비웃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때 그와 더불어 『한국상고사입문』(1989년)을 발간했던 상고사연구가 최태영 박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한국땅에서 단군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실증사학을 내세워 단군을 가상인물로 보기 시작한 것은 이승만 정권 때부터이지요.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이지만 이병도 박사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박사는 말년에 건강이 나빴는데, 어느 날 병실에 찾아갔더니 죽기 전에 옳은 소리를 하겠다며 단군을 실존인물로 인정했어요.

그 사실을 후학들이 모르고 이박사의 기존학설에만 매달려 온 것입니다.
 
 그리고 한민족이면 누구나 어린아이 때부터 배웠던 ‘동몽선습’이나 ‘세종실록’ 등 각 고전에도 단군기록이 나옵니다.

수백년전 기록을 어떻게 믿겠느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역사기록이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판소리할 때도 그 긴 내용을 한자도 바꾸지 않고 노래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역사기록은 더욱 정확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서울대법대 초대학장을 역임한 상고사연구가 최태영 박사, 2000년 1월3일자 문화일보 특별대담)
 
 
 양독(洋毒): 실증주의 역사관
 

양독은 서양에서 들어온 실증주의 역사학의 해독을 말한다.
 
 이는 “주관적인 판단 없이 역사적 사실을 원래 있는 그대로 기술해야 한다”는 역사학자 랑케(Leopold von Ranke)의 관점을 밑바탕으로 한 것인데,

이 계열의 역사학자들은, 오직 유적과 유물에 의해 실증된 역사적 사실만을 인정하는 반면, 문헌을 연구하는 사학은 비판한다.

그래서 대표적인 고대사 자료인 『환단고기』 등의 서적을 사료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 눈으로 보아야만 믿는다는 식의 고증이 중요하다면서,

왜 그들은 중국과 러시아 땅에 묻혀 있는 고조선의 유적과 유물들은 확인하려 하지 않는 것일까.
 
 해방 후 국사학계는 1930∼40년대 초기의 학풍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더욱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이 납북되었고

그나마 남아 있던 다양한 국사연구 학풍이 실증주의 학풍으로 단일화되면서 실증주의 사학자들이 우리 나라 국사학계의 핵심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앞서 소개했던 안호상 박사는,

고대 역사서들이 입증하고 있던 사실을 후대에서 중국과 일본의 역사가들이 이 사실을 왜곡 변조했으며,

식민사관에 물든 우리의 역사학자들이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여기에 기초해 국정교과서들이 집필되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지적했었다(1999년 3월 1일자 세계일보).
 
 역사가 단지 흘러가버렸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잊혀지고 마는 것일까?
 
 우리의 민족혼 속에는 서양식의 근대적인 과학주의 역사관만으로는 해석되지 않는 깊은 잠재적 사상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유적과 유물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의식 무의식 속에 살아숨쉬는 민족혼이야말로 역사의 실체를 찾아가는 단초가 아닐 수 없다.
 
 잃어버린 고대사의 복원을 통해서만 이러한 민족문화의 정수를 되살려 낼 수 있다.
 
 매년 설, 추석만 되면 수천만 명이 모든 일을 제쳐놓고 오직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고향을 찾아나선다.

이는 뿌리를 찾아가는 문화의 표상이다.

또 지난 2002년 한일월드컵 경기 당시 한반도를 붉게 수놓은 인간꽃, 태극 물결을 보라
 

 

 

<참고자료>

 

(펌글)

민족혼이 없는 역사가 우리의 역사인가?


저는 늘 마음속으로 우리의 역사교육이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민족혼이 정립되지 않은 역사학자가
과연 우리의 역사를 쓸 자격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BC200) 지나의 사마천은 당시까지 정립되지
않았던 지나의 역사를

260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자기들 지나(중국)의 역사를 편찬 하였읍니다
(그것이 소위 지나의 사기 입니다)

소위말하는 춘추필법으로 말입니다

즉 자기들은 한껏올리고 주위의 국가나 민족은 한껏

깍아 내리는 못된 필법으로 말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에는 그들 스스로도

그것을 역사서로 인정을 하지 않았읍니다

(그래도 약간의 양심은 있었던 모양?)

그것이 약 300년후에야 정식 지나의 사서로 채택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후대의 왕들이 자기들을 높이기 위해서는

안성맞춤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이었읍니다


그것을 우리의 어리석은 현대의 역사학자들은 역사경전으로
떠받들고 필독서로 모시고 있읍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요

2600 여년이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당시까지 정립되지 않았던 그들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정식역사라고 할만한 사료가 그때 까지도 없었다는 것 입니다

그것을 사마천은 260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단숨에 정립(?)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 자신도 어처구니가 없었던지

그것을 정식 역사로 인정을 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왜의 사기와 지나의 사기는 과대포장이란 점에는

일맥상통합니다

공통된 점은 2600년의 역사를 단숨에 편찬한 점입니다


왜국은 지금부터 불과 200년전에 그들의 역사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고심하던중 어용학자들이 모여서 역사서를 편찬하였는데

그들의 2600년역사중에서 그 앞의 1300년은 역사적 근거가

마땅치 않자 구차스러운 변명을 만들어 내었던 것입니다


즉. 그때 까지 궁중에서 은밀히 구전되어오던

역사적 사실을 내시의 구술에 의해 편찬되었다...는 것이지요 




사마천은 지나인으로 볼때에는 위대한 인물인 것이며

왜국의 어용학자들 또한 왜국으로 볼때에는 역시 위대한 인물들이지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고려때 ***이란 사대주의자가

정권을 휘두르면서 못된 짓을 했읍니다

그는 기왕에 있었던 고조선의 수많은 역사서를 전부 무시하고

옛일은 상고하기가 어렵고 믿을수 없기 때문에

기록을 할수가 없다..... 고 하면서

그 모든 기록을 지나의 역사서만을 근거로 하여

우리의 역사를 편찬한 것입니다

우리의 상고사를 일체 언급하지 않고

삼국사기란 역(逆) 역사서를 썼읍니다

역 이란 반대 또는 거스른다 가 아닙니까?

자기자신을 깍아 내려서 사서를 썼다는 것입니다



해방후에 ***란 역사학자가 있었읍니다

저도 어릴때 초등학교에서 *** 편수의 국사 국정 교과서로

우리의 역사를 배웠읍니다만

그 사람도 ***보다 더한 사대주의자 입니다

그는 식민주의자 이기도 합니다

그는 우리의 역사를 한껏 깍아 내렸기 때문입니다

즉 삼국사기를 축소외곡해서 해석을 한 것입니다


그래도 삼국사기에서는 은밀하고 애매한 부분이 더러 있는데도

애써 외면하고 자기의 선생인 왜국인의 가르침을

너무나 충실하게 따라서 우리의 역사를 축소,또 축소시켰던 것입니다


평생을 그는 단군에 대해 일체 인정을 하지 않다가

죽기직전에야 바른말을 하고 죽었던 것입니다

"단군조선은 실존했던 국가이다." 라고 말입니다

이런 고약한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더 어이 없는 것은 그가 우리나라 제일의 명문대학의
역사학자였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에 그의 제자들은 50년여년간 수천명이 배출되어
열심히 엉터리 우리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민족혼을 상실한 사람들이 역사를

연구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민족혼

꼭 되찾아야할 우리의 본래의 정신 이기도 합니다


아래 글을 읽어봐 주시기 바랍니다




제1호 단군 세기의 서문에 이러한 말씀이......


나라를 잘되게 하는길은 선비의 기상보다 중요한 것은없고

역사를 바로 아는것보다 급한 것이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역사를 분명히 알지 못하면 선비의 기상이 올라 가지 못하고

선비의 기상이 올라가지 못하면

나라의 뿌리가 흔들리고 정치와 법이 엇갈린다

역사를 올바로 배우는 길은 잘못된 것을 바른것으로 받아들이며

사람을 저울질하여 시대의 형편을 잘다루는 것이 길이 표준이 되어야 한다

이민족이 살아온지도 참으로 오래다

세상이 열린후 질서들이 많이 바로 잡혀나라와

역사는 함께 이어 지고

사람은 정치와 함께 드러났다

이 모두는 나 자신보다 우선 되어야 할 소중한 일이다


아 ! 정치는 그릇과 같고 사람은 도와 같다

그러니 그릇이 어찌 도를 떠나서 있을수 있는가 ?

나라가 몸이라면 역사는 혼과 같다


몸이 어찌혼을잃고 보존될수 있겠는가

도와 그릇을 함께 닦는 자는 곧 나 자신이요

몸과 혼을 갖추어 나갈자도 또한 나 자신이다

때문에 천하 만가지 일이 먼저 나 자신을 아는데 있다

나를 알려면 먼저 무엇부터 알아야 하는가?


그것은 삼신일체의 도 이다

이 도는 대원일에 그 뜻이 있다

조화의 신이 내려와서 나의 성이 되고

교화의 신이 내려와서 나의 명이 되고

치화의 신이 내려와서 나의 정이 되었다


때문에 오직 사람이 만물중에 가장 귀하고 높은 것이다

자연 그대로의 성 명 정 이 삼신일체의 하느님이며

우주만물과 더불어 하나이며 같은 몸이다


....... 이하 생략......


지금부터 650 여년전. 고려 말기에 행촌 이암 선생께서

나라의 어지러운 분위기를 통탄해 마지하지 않으시면서

쓰신 글이

지금 이시대에 .

650 년이 지난 지금에 .

저의 가슴을 이렇게 치는지 ?

우리는 과연 우리의 진정한 역사에 얼마만큼

관심을 가지고있으며

우리의조상의 슬기로움에 대해서

얼마나 알려고 노력하고 있을까요 ?

명예를 자기의 생명보다 더 중요시 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도덕심을 잃은 것같은 철면피한 행동들.....

우리는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될려는 노력이

너무 부족한것 같읍니다

 

출처 : mars의 진실 찾아 떠나는 세상
글쓴이 : mar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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