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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대마도/ 광개토대왕비

monocrop 2008. 1. 26. 03:32
 

대마도는 한국인의 땅이었다.

 

『환단고기』에 자고로 구주, 대마도는 삼한에서 나누어 다스린 삼한 분치지역으로 본래 왜인이 대대로 살던 지역이 아니었으며 임나가 나뉘어 3가라가 되었으며 좌호는 신라에 속하고, 인위 가라는 고구려, 계지 가라는 백제에 속한다 하였다.

대마도 출신 문장가 강수도 자신이 임나 출신이라 한 적이 있고, 성종 때의 청백리
황희 정승은 '대마도는 예로부터 우리 땅으로 고려말기에 국가기강이 크게 허물어져 도적의 침입을 막지 못해 왜구가 웅거하게 되었다'고 한 바 있다.

또 이 황은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를 중국 역대왕조의 대 오랑캐 정책을 원용하면서
부자관계로 비유하고 해마다 정초에 내리는 세사미두(歲賜米豆)의 의미에 대해 대마도가 충성을 다해 바다를 든든하게 지키는 수고로운 공적을 가상히 여겨 해마다 하사하는 것이라고 했으며 안 정복은 '대마도는 우리의 부속도서로 신라, 고려 이래로 국초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속도로 대해왔다.

그리고
<여지승람>에는 옛날 경상도 계림 땅에 예속되었다고 하였으며, 태종이 기해년에 대마도를 정벌할 때 교서에도 대마도는 본래부터 우리나라 땅이었다고 하였고, 그 이외에도 수많은 증거물이 있다. 그리고 그 땅을 정벌한 알은 마땅히 속도를 꾸짖은 방책이었다'고 했다.

"너희 섬(대마도)은 조선 지방이니 마땅히 조선 일에 힘을 써야 한다." 에도 막부 장군의 측근이 대마도 고위관리에게 한 말이다. 서기 1617년 통신사 이경직이 통신사 일행을 수행하던 대마도의 고위관리에게 이 말을 듣고 적어 놓았다. 대마도는 … 대대로 우리 조정의 은혜를 받아 조선의 동쪽 울타리를 이루고 있으니, 의리로는 임금과 신하 사이요, 땅으로는 조선에 부속된 작은 섬이다.

서기 1444년 대마도에 보내졌던 초무관 강권선이 세종에게 보고한 글에서 11세기 후반(1000년경)부터 13세기 후반(1200년경)까지 200여 해 동안 대마도의 고려에 대한 진봉관계가 연구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대마도는 고려 때에도 우리의 영토였음)

<증보동국문헌비고>에는 '지금 비록 일본의 폭력으로 그들의 땅에 강제 편제되었으나 본래는 우리나라 동래에 속했던 까닭에 이에 대한 기록들이 우리의 고사에 많이 있어 아울러 기록한다'고 하고 '섬 안의 남자들의 언어와 부녀자들의 의복이 조선과 같았다. 대마도인들이 왜를 칭할 때는 반드시 일본이라 하였고, 일본인들도 그들을 일본 왜와는 크게 차별하여 대우하였으므로 대마도민 자체가 일본에 예속된 왜로 자처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우봉의 논문『한국인의 대마도인식』에서 대마도는 섬으로서 본래 우리 나라의 땅이다.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부터 뛰어놀기 시작하였다.

태상왕이었던 태종이 세종 때 대마도 정벌을 하기 전에 군사들에게 내린 교유문에서
대마도는 섬으로서 경상도의 계림에 예속되었던 바 본시 우리 나라 땅이라는 것이 서적에 실려 있어 확실하게 상고할 수 있다. 다만 그 땅이 매우 작고 또 바다 가운데 있어서 왕래함이 막혀 백성들이 살지 않았을 뿐이다. 이에 왜놈으로서 그 나라에서 쫓겨나 갈 곳 없는 자들이 몰려와 모여 살며 소굴을 이루었던 것이다.

대마도 정벌 이후 일기도로 파견된 조선 관리인 강권선에게 일기도 영주 대내전(
大內殿)의 관반(館伴)인 노라가도로(老羅加都老)가 한 말에 "풍신수길이 조선 침략에 대비하여 무장에게 명령해서 만든 지도인『팔도 전도』에는, 독도 뿐 아니라 대마도도 조선의 땅으로 나와 있으며, '공격 대상'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일본도 대마도를 일본 땅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고 했다.

조선말 국운이 쇠약한 틈을 타 1869년 소위 「판적 봉환」이라는 정책아래 이즈하라 번으로 편제되었다가 1877년 나가사키 현으로 편입된 대마도가 조선 영토임을 보여주는 지도로는 <소라동천(小羅洞天)>이라는 세계지도와 부속지도인 <동국 조선 총도>, <강원도도>, <경상도도>가 남아있어 역사의 진실을 고증하고 있다. 대마도는 원래 한국땅

 
[여지도(1806)]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 소장)

 


[대동여지전도(1860)](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조선전국도(제작시기 미상 - 일본 가고시마현 현립도서관 소장)

' 무릇 대마도는 옛날에는 신라국과 같은 곳이었다.

사람의 모습도 그곳에서 나는 토산물도 있는 것은 모두 신라와 다름이 없다.'

― 13세기 말의 일본 책인『진대(塵袋)』 제 2권에서

『산가요약기(山家要略記)』(:12세기 말 일본 천태종의 승려가 쓴 책)에 말하기를

' 대마도는 고려(고구려를 뜻함-고구려의 정식국호는 고려)의 목(牧 : 목장)이다.

(고구려에서 대마도에서 말을 기름.) 옛날에는 신라 사람들이 살았다.'

― 1723년 대마도인 등정방(藤定房)이 쓴 대마도의 역사서인『대주편년략(對州編年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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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때의 청백리 황희 정승은 '대마도는 예로부터 우리 땅으로

고려말기에 국가기강이 크게 허물어져 도적의 침입을 막지 못해 왜구가 웅거하게 되었다'고 한 바 있다.

또 퇴계 이 황은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를 부자관계로 비유하고

해마다 정초에 내리는 세사미두(歲賜米豆 - 새해에 조선 조정에서 대마도에 내리는 쌀)의 의미에 대해

대마도가 충성을 다해 바다를 든든하게 지키는 수고로운 공적을 가상히 여겨 해마다 하사하는 것이라고 했으며 안 정복은 '대마도는 우리의 부속도서로 신라, 고려 이래로 국초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속도(속한 섬)로 대해왔다.

그리고 <여지승람>에는 옛날 경상도 계림 땅에 예속되었다고 하였으며,
태종이 대마도는 본래부터

우리나라 땅이었다고 하였고, 그 이외에도 수많은 증거물이 있다.   

<증보동국문헌비고>에는

'대마도가 지금 비록 일본의 폭력으로 그들의 땅에 강제 편제되었으나

본래는 우리나라 동래에 속했던 까닭에 이에 대한 기록들이 우리의 고사에 많이 있어 아울러

기록한다'고 하고 '섬 안의 남자들의 언어와 부녀자들의 의복이 조선과 같았다.

대마도민 자체가 스스로를 일본의 일부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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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마도는 대대로 우리 조정의 은혜를 받아 조선의 동쪽 울타리를 이루고 있으니, 의리로 말하면 임금과 신하 사이요, 땅으로 말하자면 조선에 부속된 작은

섬이다.'

― 서기 1590년, 임진왜란 직전에 통신사 부사로서 일본을 다녀온 김성일이 조선에 돌아온 뒤 낸 보고서에서

11세기 후반(1000년경)부터 13세기 후반(1200년경)까지 200여 해 동안 대마도의 고려에 대한 진봉관계(고려의 한 지역으로 되어 있었음) 가 연구로 밝혀지고 있습니다.(대마도는 고려 때에도 우리의 영토였음)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는 선종 2년(1085) 이래 대마도주를 '대마도구당관(對馬島勾當官)'으로 불렀다고 하는데 이 점이 시사하는 바는 상당히 흥미롭다.

(고려에서 대마도에 신하를 파견하여 다스렸다는 의미.)

이와 비슷한 사례로는 제주도의 성주(星主)를 '탐라구당사'(耽羅勾當使)로,

일기도(대마도와 구슈 섬 사이에 있는 이키 섬) 도주(島主)를 '일기도 구당관'이라고 명명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당관'은 고려시대 변방 지역 내지 수상(水上)교통의 요충지를 관장하는 행정 책임자들에게 붙인 관직명이다.

이를 보면 탐라, 대마도, 일기도의 지배자에게 고려가 '구당사' 혹은 '구당관'이란 명칭을 붙인 의미를 알 수 있다.

즉 앞의 세 섬을 고려의 속령(고려의 영토에 속한 땅)으로 인식하였거나 아니면

고려 정부가 대마도와 제주도를 고려 고유의 지배 질서 속에서 같은 차원으로 취급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하우봉의 논문『한국인의 대마도인식』에서

풍신수길이 조선 침략에 대비하여 무장에게 명령해서 만든 지도인『팔도 전도』에는, 독도 뿐 아니라 대마도도 조선의 땅으로 나와 있으며, '공격 대상'이라고 적혀 있습니다.일본도 대마도를 일본 땅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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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마도는 우리땅' 독도서 표지석 >>

동아일보 2002년 10월 01일

경북 울릉군 소속의 독도박물관(관장 이승진·李承鎭)은 1일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박물관 입구 약수공원에 대마도(쓰시마섬)가 한국땅이었음을알리는 표지석(사진)을 세웠다.

높이 4.2m, 폭 1.6m 규모의 표지석에는 세종실록에 있는 ‘대마도본시아국지지(對馬島本是我國之地)’라는 문장과 ‘월인천강지곡’에서 이를 풀이한 ‘대마도는 본시 우리나라 땅’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표지석 하단부와 좌우면에는 대마도가 원래 조선 경상도의 영토였음을 보여주는 지도와 함께 말을 기르던 땅이었음을 알리는 내용,
왜구의 침략으로 빼앗긴 내력 등이 세종실록과 삼국사기 기록을 토대로 자세하게 적혀 있다.

이 관장은 “우리 땅이던 대마도가 일본 영토로 넘어간 것은 우리가 제대로 돌보지 못해 빼앗긴 측면이 있다”며 “이를 거울삼아 독도 문제에도 경각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마도는 현재 일본 나가사키(長崎)현에 딸린 695㎢ 규모의 섬으로 부산에서 50㎞ 떨어져 있다.

(펀주: 맑은날에는 부산에서 대마도가 보인다. 일본에서는 멀어서 안보인다.)

[울릉〓이권효기자boriam@donga.com]

일본인 선조 한반도서 건너왔다"


 

 

도쿠나가 교수

 

인간유전자(게놈) 정보를 이용한 연구 결과 현재 일본 본토에 사는 일본인의 선조 집단이 한반도를 경유한 도래인(渡來人)이라는 주장이 처음 제기됐다.

일본 도쿄(東京)대 의학부 인류유전학교실 도쿠나가 가쓰시(德永勝士·49·사진) 교수는 23일 “최근의 게놈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인간의 6번 염색체 내에 존재하는 HLA(인체 백혈구 항원) 유전자군을 동아시아 여러 민족과 비교한 결과 일본 본토인과 가장 가까운 집단은 한국인과 중국의 조선족이란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연구 내용은 7월 중 도쿄대출판부가 출판할 예정인 ‘공개강좌’ 총서에 수록된다.

도쿠나가 교수는 HLA 유형을 기준으로 일본인 한국인 한(漢)족 만주족 조선족 몽골족 대만원주민 등 동아시아 내 12개 민족(집단)을 비교분석한 결과 일본 본토인은 오키나와(沖繩)인이나 북쪽 홋카이도(北海道) 아이누족보다 한국인과 중국의 조선족에 가까웠다고 밝혔다.

▽연구의 의미=이번 연구는 일본 야요이(彌生)시대(BC 300년∼AD 200년경) 일본인의 형성에 한반도를 경유한 선조 집단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기존 학설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주로 유물이나 인골, 혈액형 분포 등을 활용한 그동안의 연구는 한계가 지적돼 왔기 때문에 최신 게놈 연구 결과를 응용한 이번 연구는 ‘뿌리 학설’의 결정판으로 평가되고 있다.

도쿠나가 교수는 “HLA는 유전자 결합방식에 따라 이론상 34억쌍 존재할 수 있어 유전자 지표로서의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특정 HLA유전자가 특정 민족에 많이 존재하는 점과 이 유전적 특징이 수천년 이상 존속된다는 점은 이미 학계에 보고된 바 있다.

▽연구 내용=일본 본토인에게 많이 나타나는 HLA유전자 형태는 HLA-B52-HLA-DR2. 북 규슈(九州) 지방에서 일본 열도 중앙부를 거쳐 야마가타(山形)현까지 12% 이상 존재했다. 반면 오키나와에서는 2%, 아이누족에서는 1%였다. 중국 남부인에게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은 반면 몽골인에게서는 5∼8% 나타났다. 이로 볼 때 도쿠나가 교수는 몽골과 중국 동북부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 열도 중앙부에 이른 집단이 현재 일본인의 선조집단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 한국인에게 가장 많이 존재(7.0%)하는 HLA유전자인 HLA-B44-HLA-DR13 관련 연구도 흥미롭다. 일본의 기타큐슈(北九州) 지역은 5.4%, 동해에 인접한 후쿠이(福井) 지역은 7.2%, 니가타(新潟)지역은 5.5%, 시코쿠(四國)섬의 경우는 4.0%였다. 반면 오키나와나 아이누족에는 1%에 그쳤다. 이 역시 선조집단이 한반도에서 일본 중앙부로 이동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그는 해석했다.

도쿠나가 교수는 ‘인간 게놈 계획과 유전자 진단의 장래’(1999년), ‘몽골계의 지구’(1995년) 등 저서를 냈고, 도쿄대 인류유전학교실은 HLA형을 조사하는 데 필요한 간이 DNA검사법을 10여년 전 개발한 권위 있는 연구기관이다. 현재 이 DNA검사법은 골수은행 등록 등에 폭넓게 응용되고 있다.

▼HLA(human leucocyte antigen)▼

6번 염색체 내에 존재하며 100개 이상의 유전자가 밀집된 유전자군. ‘인체 백혈구 항원’으로 불리기도 하며 면역기능을 통제한다. 장기 이식 때 HLA형이 다르면 거부반응이 일어난다. HLA는 게놈 정보 중 1000분의 1에 불과하나 유전자 지표로서의 가치가 매우 커 당뇨병 고혈압 등 질병을 연구하는 이들이 주목하는 대상이다.


임나(任那)는 지금의 대마도이다.

日임나일본부說 외국 웹사이트 급속 확산

[연합뉴스 2004-12-06 10:01]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고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이 스페인,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등 세계 주요 포털, 교육, 백과사전 사이트 등에 급속히 퍼지고 있다
 (기사전문보기 click)


임나일본부 에 대한 기사를 보면 그것이 잘못되었다는것을 알지만 정확하게 해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우리가 불행했던 과거를 숨기는 양 말이죠...
지금까지 나온 역사 검증의 결과로도 임나일본부는 아주 역사왜곡의 극치라고 하는것을 알 수가 있는데도 말입니다
임나일본부의 실체에 대해서 잘 알 수 있도록 정리한 글입니다
회원님중에서 외국어가 되시는 분들은 아래의 글을 번역하여서 알려주시기 바라구요 외국인들이 물어오거나 외국의 잘못된 교과서 내용의 경우 아래 내용의 핵심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변분들에게도 알려주세요 ~
 

    일본의 배은망덕의 표본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실체

 

그 동안 한중고대사문제에 있어서 논란이 되어온 것이 기자조선과 한사군문제였다면 한일고대사문제의 핵심쟁점은 고대 일본이 한반도에 설치한 식민통치기구, 즉 일제시대의 조선총독부와 같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실재여부였다. 여기서 도출된 문제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조선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로서 제기되어 왔기 때문에 한일고대사 논쟁의 시발이자 양국관계의 걸림돌이 되어왔다.

이에 대해 한일 양국 모두 자국의 역사를 희생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대치하는 상황이다. 일제 식민사관에 오염돼있던 우리 나라 학자들은 임나문제 만큼은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던지 삼한분국설로 맞불을 놓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일본이든 임나든 모두 조선족 이주민이 건설한 분국이며 야마토(大和)정권 역시 백제의 위성국가라는 것인데 그 근거로 일본 천황릉과 일본 전역에 산재한 고분들의 부장품들이 삼국의 요소가 뚜렷하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에 대한 최초의 연구는 에도바쿠후(江戶幕府)시대에 국학(國學)운동이 일어나 고전(古典)에 대한 연구가 활기를 띠면서부터였다. 그리고 본격적인 임나연구는 메이지유신이후 일본의 대조선 침략이 구체화되면서 함께 추진되었다.

임나(任那)는 지금의 대마도이다.
임나(任那)는 지금의 대마도이다. 임나는 본래 대마도 서북 경계에 있었던 의부가라(意富加羅)의 개호(改號)로, 후에 대마도 전체를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다. 그 뒤 광개토대왕이 고대 일본을 정복하여 임나(대마도)·일기도(一岐島) 및 규슈(九州) 전체를 10개국 연방체(임나연방)으로 만들어 다스렸으며, 기내(畿內)지방에 위치한 야마토(大和) 왜(倭)를 속국으로 지배하였다.
이와 같이 지금까지 한·일 양국 사학계에서 최대 논란이 되어왔던 임나의 정확한 위치는 바로 지금의 대마도인 것이다. 일제 식민주의사관의 주장처럼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가야지방이 결코 아니다. 임나의 위치에 대해서는 일본의 정사(正史)인 {일본서기}에서도 "임나는 쯔꾸시국(筑紫國, 지금의 규슈 후꾸오까현)으로부터 2천여 리 떨어져 있으며,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고 계림(경주)의 서남방에 있다(任那者, 去紫國二千餘里, 北阻海, 以在鷄林之西南)"고 하였듯이 지금의 대마도임이 틀림없다. 이 {일본서기} 숭신(崇神) 천황 65년 조의 기록은 임나에 관한 원전(原典)인 것이다. 여기서 대마도로부터 쯔꾸시국까지의 거리를 2천 리라고 한 것은 한·중·일 고대사서들에 의하면 고대사 지리상의 상식이다.

<대마도는 전체가 산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북에는 좌호평야가 있어 신라가 차지했고 중앙에는 인위평야가 있어 고구려가 차지했으며 남쪽에는 계지평야가 있어 백제가 차지했다 이것이 바로 오오노 야스마로가 말한 '시소위지삼한是所謂之三韓也'이다 통곡하는 민족혼 책 323p>

그런데 일찍이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임나가 한반도 남단에 위치했다고 억지 생떼를 쓰고, 고대에 일본이 이 임나=가야지역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백제·신라를 속국으로 지배했다고 하는 허구의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을 날조하여 일본의 한반도 강점(强占)은 침략이 아니라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일제의 한반도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합리화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정리하면 한국 고대사는 크게 두 시대로 구분되는데 전기(前期)는 한나라의 식민지시대였고 후기(後期)는 야마토정권의 한반도진출의 거점인 임나일본부의 식민지배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입증하는 근거로서 ① 광개토대왕비문 ② 칠지도(七支刀)의 명문(名文) ③ {일본서기}의 기록을 들고 있으며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임나일본부설의 기본 골격이 되고 있다.

첫째로, 식민사학자들은 {일본서기}의 기록에 근거하여 임나일본부가 신공(神功) 시대에 개척되어 6세기까지 존속했다고 주장해 왔다. 그들은 임나일본부의 기점을 신공황후의 신라정벌에 두고 있는데, 신공의 연대를 전체로 2주갑(二周甲) 즉 120년을 끌어내려 신공은 원래 3세기가 아닌 4세기의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설 입증의 전제로 삼고 있는 2주갑(120년) 인상설은 터무니없는 억지주장이다. 신공왕후 곧 야마다이국의 여왕 히미꼬(卑彌呼)는 {일본서기}의 신공기 기사와 중국 사서들({후한서}, {삼국지} [왜인전])에 의하면 '3세기의 인물'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 사학자들이 일본서기의 기록마저 뜯어고쳐 조작하면서까지 신공 연대를 120년 끌어내린 근본 목적은 오로지 광개토대왕비문에 있는 연대(391년)에 뜯어 맞춰 놓으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공왕후의 삼한정벌은 바로 대마도의 정벌을 말한 것이다. 종래에 일제 식민사관은 일본의 정사인 {일본서기}에서 신공왕후가 고구려·백제·신라의 삼한을 정벌하였다고 한 기록을 이용하여, 고대에 일본이 200여 년 간 한반도 남부(백제·신라·가야)를 지배·경영하였다고 하는 허구의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는 근거의 하나로 삼아왔었다. 그러나 신공왕후의 저 유명한 '삼한정벌'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고구려·백제·신라의 삼한(삼국)을 정벌한 것이 결코 아니며, 바로 '대마도 정벌을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2∼3세기경의 인물인 신공왕후(=卑彌呼=細烏女)가 정벌한 삼한은 당시에 삼국이 각기 나누어 다스리던 대마도(임나)의 3가라 즉 "좌호가라(신라), 인위가라(고구려), 계지가라(백제)"를 말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네리친왕(舍人親王)이 편찬한 {일본서기}에서도 "이것이 소위 삼한이다(是所謂之三韓也)" 하여 한반도의 삼한과 쓰시마(대마도) 내의 삼한(곧 3가라)을 명백히 구별하여 기록해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일제 식민사학은 신공왕후의 삼한정벌을 마치 삼국을 정벌한 것 인양 과대망상적으로 엉뚱하게 확대 해석하였으며, 그 뒤로 계속 200여 년 간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로 지배했다는 식의 억지 주장을 펴왔다. 그리하여 일제시대 때 다시 한반도를 침략하여 식민지로 통치하는 것은 침략이 아니라 신공왕후에 의해 정복된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일 뿐이라고 함으로써 침략사관을 정당화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img34.gif둘째로, 임나일본부에 의한 남한경영설(南韓經營說)을 입증하는 결정적 근거자료로서 가장 절대적인 비중을 두었던 내용이 광개토대왕비문의 영락(永樂) 6년(396)조에 있는 다음의 기사이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 羅以爲臣民 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 즉 신묘(辛卯, 391)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신라를 정벌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해석대로 왜가 백제와 신라를 쳐서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가정하자. 고구려는 응당 자국중심의 조공체제를 깨뜨린 왜를 응징해야 한다. 그러나 백제만을 공격했다. 백제와 함께 왜의 신민이 되었다는 신라는 공격하지도 않았다. 비문에서 도리어 신라는 고구려의 구원 대상으로 나타난다. 신라가 신묘년에 왜의 신민이 되었다면 영락 9년에 신라가 왜의 침공을 받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인식에 따라 최근 학계에서 공인되고 있는 학설은 고구려를 주어로 하여 "신묘년 이래로 왜가 건너오니 그때마다 격파하였다"라는 해석이다. 이것은 일찍이 정인보(鄭寅普)가 주장하였고 박시형(朴時亨) 등 여러 학자들이 정인보 학설에 토대를 두고 수정 보완된 여러 해석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어지는 百殘 羅의 부분은 글자가 지워져 무슨 내용인지 정확히 확인되지 않으나 百殘(백제를 비칭한 것) [新]羅를 신민(臣民)으로 삼은 것은 역시 고구려 광개토대왕이지 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신묘년 기사를 실은 비문 자체가 일본 참모본부가 밀파한 군사 스파이 사꼬오 가케노부(酒 景信) 중위에 의해 변조됐다는 것이 여러 학자들에 의해 명백히 밝혀진 바 있다.
 

     

  광개토대왕비문 변조  일본 참모부가 밀파한 군사 스파이 사꼬오 가케노부 중위에 의해 광개토대왕비의 주요 글자가 변조되고 지워지게 되었다.


사꼬오 중위는 1884년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가지고 귀국한 뒤, 일본육군참모본부가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하여 1889년 {회여록(會餘錄)} 5집에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의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 등을 통해 임나일본부설을 공식화하였다. 이에 대해 정인보는 해석상의 모순을 지적하였고, 1972년 재일(在日) 사학자 이진희(李進熙)는, 일제가 사꼬오가 위조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비문을 파괴하고 3차의 석회도부(石灰塗付) 작업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문제의 비문 중 왜(倭) 이하 도(渡)·해(海)·파(破) 등 4자가 위조된 것임을 밝혀냈다. 또한 1972년 사에키 유세이(佐伯有淸)도 참모본부가 비밀리에 이 문제에 개입한 전말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이어 1981년 이 비문을 연구해 온 이형구(李亨求)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들어, '倭'는 '後'를, ' 來渡海破 '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그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왜구·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으로 되어, 이 주장이 공인을 받으면, 일본 사학계의 '고대남조선경영론'은 그 근거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아울러 광개토대왕비문의 내용은 열제(烈帝)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지 왜의 그것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왜는 고구려를 위협하던 세력들의 부수적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비문에 나오는 많은 간지(干支)에는 '신묘년'과 같이 년(年)자가 붙어 있는 예가 없을 뿐 아니라, 신묘년 기사와 앞뒤 문장의 내용이 연결되지 않고 모순되고 있어 변조가 가해졌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둘째로,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19세기 말에 관정우(菅政友)가 발견한 이소노가미신궁(石上神宮)의 칠지도를 {일본서기} 신공(神功) 52년(252) 9월조의 기사에 나오는 칠지도(七支刀)와 같은 것으로 조작하여, 이 칠지도는 백제왕이 일본 천황에게 헌상(獻上)한 것이니 백제가 왜의 속국이고, 일본이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백제 등 한반도 남부를 지배 경영했다는 것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고 억지를 썼다. 그리고 저들은 신공의 연대를 120년 끌어내려 칠지도를 바친 백제왕을 근초고왕(346∼375)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칠지도의 명문(銘文) 내용을 보면 그 명문의 서식이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내리는 하행(下行)문서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백제가 왜의 속국이었음을 증명해 주는 산 증거였던 칠지도는, 그와는 반대로 대왕인 백제왕이 후왕(侯王)의 하나인 왜왕에게 하사한 칼이었다는 것이 되고, 따라서 칠지도는 백제가 왜의 종주국이었고 왜는 백제의 속국이었음을 증명해 주는 움직일 수 없는 물증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신공 49년조에서 신공이 황전별(荒田別), 녹아별(鹿我別) 등을 보내 백제 장수 목라근자(木羅斤資)등과 함께 신라를 공격하여 비자벌(比自 )·남가라(南加羅)·녹국( 國)·안라(安羅)·다라(多羅)·탁순(卓淳)·가라(加羅) 등 7국을 평정하고 서쪽으로 돌아 고계진(古奚津)·침미다례( 彌多禮) 등을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고 한 기록을 해석하면 그 정복활동의 실질적인 주체가 왜가 아니라 백제였고 왜는 백제의 정복활동에 동원된 속국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일제가 날조한 허구의 임나설에 대한 반증은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일본(日本)'이라는 명칭은 7세기 말(670년)에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삼국사기}·{구당서}). 따라서 일본이라는 말은 그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니, 임나일본부라는 것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 임나일본부라는 이름은 {일본서기}에만 있고, 그 원전이 되는 {고사기}에는 전연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극히 최근에 밝혀진 사실로는 1669년에 필사된 가장 오래된 {일본서기}에는 일본부(日本府)에 대한 주석이 붙어있는데 그것은 어사지(御事持), 또는 미코토모치, 즉 사신(使臣)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에 대해 스즈끼 교수는 일본부라는 말은 일본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고 일본서기가 편찬된 이후에 붙여진 말이며 이전에는 '어사지', '미코토모치', 즉 임나와 안라에 보낸 사신인데 후대에 일본부라고 기록한 것이라며 임나일본부설이 허구임을 시인했다.
{일본서기}에는 일본부 사신이 가야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흠명천황(欽明天皇)조에는 일본부가 야마토정권의 뜻과는 상관없이 신라 고구려와 내통하고 가야의 국익만을 위해 활동하는 모습이 나온다. 기실 임나일본부라는 것은 가야연맹의 외교부서였으며 오히려 안라국의 통제를 받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야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200년이나 고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하면 그 곳에 일본계 유적, 특히 일본 특유의 묘제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나타나야 하는데, 숱한 발굴조사에도 불구하고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동시대 삼국·가야의 유적 유물이 일본열도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을 뿐이다. 특히 안라국이 강성해진 무렵에는, 기존의 토사기(土師器) 대신 가야식 토기인 스에끼(須惠器) 토기가 사용되고 가야의 철제 갑옷도 사용되었음이 밝혀졌다. 안라국은 동북아 최대의 철 생산국이자 수출국이었는데 이 때문에 야마토조정은 가야의 동맹요구를 수락하여 외교관계를 맺고 줄곧 백제 가야와 연합해 신라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이 허구하는 사실은 일본 역사가들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빗발치는 반론에 직면하자 일부 일본 역사학자는 그것을 수정하여 발표한 바 있다.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는 일본의 야요이(彌生)시대에서 고분(古墳)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급속하고 그 내용이 이질적이어서 자체적인 발전으로 없다는 생각에서 소위 기마민족설(騎馬民族說)을 발표한 바 있다. 그 내용은 대륙 북방계 기마 민족 일부가 한무제(BCE 140∼80) 연간에 남한에 내려와 변한의 일부를 차지하여 나라를 세우고 삼한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4세기초에 변한의 한 지역인 임나가야(任那伽倻)를 떠나 북구주(北九州)에 상륙하고 4세기말에서 5세기초에 북구주를 떠나 야마토(大和)에 진출하여 야마토왕국을 수립하였으며 이들의 세력은 최강국 고구려와 맞서 한반도 남부에서 군사행동을 주도할 정도로 강성했다는 것이다.

그의 논리는 표면적으로는 한반도 세력이 일본을 정복하여 야마토왕조를 세운 것으로 보고 백제왕족과 일본의 천황족이 동원(同原)으로 파악하였하여 종래의 설에서 크게 후퇴한 듯 하나 내면에는 식민사관의 핵심주장인 임나가야 한반도지배설을 고스란히 계승하고, 일본열도에 진출한 퉁구스계 기마민족의 기원추정에 무려 17종의 민족을 제시하여 실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기마민족(일본의 조상?)이 한민족도 지배했다는 것을 은연중에 강조하여 당시 후진적이었던 일본이 선진적이었던 한반도를 점유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다.

아무튼 광개토대왕비문을 변조하고, 칠지도의 제작연대를 깎아내고, 비문의 신묘년(391) 기사 연대와 맞추기 위해 자신들의 역사교과서 {일본서기}마저 뜯어고쳐 고대사의 편년을 120년 끌어내리는 등의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광적인 역사집착은 오로지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경영했다고 하는 임나일본부설을 역사적인 사실로써 조작해 놓으려는 데 그 모든 초점이 맞추어졌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자료참고 : 한민족의 뿌리와 미래.   글 내용은 우리 역사를 의심한다 라는 책속에 인용된 임나일본부에 대한 연구의 역사(이영식 교수)를 주로 참고를 하였습니다 그외 통곡하는 민족혼 책의 지도와 글을 참조하였습니다

출처 : 쥬신코드
글쓴이 : 별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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