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관련 글들/새 카테고리

만엽가중 제주어 만엽가는...

monocrop 2011. 9. 30. 19:17

[망중한]재일제주인
김순두 제주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2011년 08월 21일 (일) 19:10:57 제민일보 webmaster@jemin.com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가요인 '삼다도 소식'에 '삼다도라 제주에는 아가씨도 많은데'라는 가사가 있다. 제주에는 왜 여자가 많을까. 여기에는 참으로 아픈 역사가 묻어 있다.

조선조인 성종 원년(1470)부터 인조 2년(1624)까지 제주에는 굶주린 백성이 너무 많아 상당수의 사람들이 제주도를 몰래 빠져 나갔다. 이에 조정에서는 출륙금지령을 내려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 기간이 인조 7년(1629)부터 순조 25년(1825)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이 된다. 제주섬은 바다에 떠 있는 큰 감옥이 된 것이다.

조선왕조의 통치가 강화되면 강화될수록 민초들의 반항은 더욱 거세어진다. 섬을 빠져나간 것이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해안가나 섬으로 몰래 빠져나가 산 제주사람들을 두무악(頭無岳) 이라고 불렀다. 물론 일본으로도 숨어 들었다.

제주대학교 주강현교수가 펴낸 「제주기행」을 보면 출륙금지령에 따라 포구에서는 승선자의 허가증을 검사했다. 특히 놀라운 것은 제주여성은 다른 지방 사람과 결혼도 못하게 했다. 그래도 탈출하자 이번에는 돛을 단 배를 만들지 못하게 하고 테우만 만들게 했는데, 여자는 돛단배든 테우든 아예 타지 못하게 했다.

또한 이원조의 「탐라지초본」을 보면 배에 절대 싣지 못하게 금지한 품목에 제주 여성이 포함될 정도다. 제주 여성들은 다른 지방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다른 지방 사람들과 결혼도 못하게 해서 전복이나 캐어서 진상하게 했던 폭정이 '제주에는 여자가 많다'는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아픈 역사인가. 제주사람들의 밖으로의 진출은 국내 뿐만 아니라 일본에까지,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이영희씨가 쓴 「노래하는 역사」를 읽다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일본이 8세기 후반에 대반가지(大伴家持) 라는 시인의 주도로 엮은 「만엽집(萬葉集)」은, 무려 4516수의 노래를 묶은 책이다. 일본이 자랑하는 「만엽집」 가운데 권 1-9의 액전왕의 이중가와 권2-156의 고시(高市) 왕자의 노래는 제주어로 쓰여졌다는 것이다.

고시 왕자의 노래는 십시 왕녀의 장례때 지은 진혼가다. 고시 왕자는 탐라국의 고씨 집안 사람은 아니었을까. 이 무렵 탐라국(耽羅國)의 왕자 도라(都羅) 일행이 일본의 도읍 아스카에 와있었다고 기록은 증언하고 있다.

우리가 재일제주인을 말할 때 1910년을 전후해 일본으로 건너가 1940년대에 가장 많았다고들 한다. 그런데 「만엽집」이나 '출륙금지령'만을 보아도 재일제주인들이 1910년대부터 건너갔다는 이야기는 새로 정립해야 할 것 같다.

지금 일본에는 12만 5000여명의 제주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들 가운데 소위 1세대로 불리우는 사람들은 약 1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고향발전을 위해 크게 기여한 사람들이다. 감귤나무를 보내주고 전기·수도는 물론 도로까지 포장해 줬다. 우리가 이만큼 살기까지는 그들의 큰 희생이 따랐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80~90세로 많이 연로하셔서 거동이 불편하다. 고향에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고, 쓸쓸하게 타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그들을 도울때다. 혼자서는 움직이기가 어려운 분들에게는 보호자와 같이 고향을 방문하게 하고, 혹시나 오래 병원에 입원하고 계신 어른들에게는 의료비를 보태줘야 한다. 그들이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베푼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는다는 생각에서이다.

만일에 이 일이 성사된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의 양로원에 계신 어른들을 제주의 양로원에 모셔서 여생을 보내게 하는 것은 어떨까. 내년 4월에 있을 총선과, 12월에 있을 대선에는 해외에 사는 동포들도 투표권을 행사한다. 역사적으로 큰 변화의 획을 긋는다.

이제 우리도 재일제주인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