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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양직공도를 통해 보는 왜의 위치와 백제위치 비정

monocrop 2011. 9. 30. 01:11

천오백년 전 일본인의 모습은 어떤가?
편집부
최근 일본 정부는 독도가 자기네 영토라는 것을 교과서에 명기하겠다하여 한.일간에 외교 분쟁을 일으키고 있다. 참으로 역사왜곡에 능한 뻔뻔한 일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아무런 기록의 근거도 없는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면서 교과서를 통하여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죽도는 일본 땅이다”라고 교육하겠다는 그 파렴치한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역사의 진실에 대해 많이 아는 필자는 일본의 이러한 행위를 볼 때마다 조소를 금할 길이 없다. 그 이유는 일본이 저런 우스꽝스러운 짓을 할 때마다 1,500년 전에 현 일본의 전신인 왜국 사신의 모습을 그려놓은 양직공도라는 그림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문화민족이다. 그러나 일본은 그러한 역사 자체가 없는 민족이다. 일본서기에 기술되어 있듯이 일본은 백제의 일개 담로에서 시작되어 A.D 405년에야 백제왕족인 응신(應神)왕에 의해 처음으로 야마토왜(大和倭)란 국가 형태를 갖추고, 백제의 왕족들이 왜왕을 할 정도로 백제의 영향 아래 있었던 일개 분국이었던 것이다.

왜 왕실이야 백제의 왕족이었으니 백제와 거의 대등한 문화수준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대부분 피지배계층인 왜인들은 당시 그야말로 야만인 그 자체였다. 필자가 야만인이라고 일본을 폄하하는 말을 하자 일본을 찬양하는 일부 친일파 독자들은 “당신이 뭘 안다고 어떻게 그렇게 함부로 단정해 말할 수 있느냐? 당시에 당신이 살아봤느냐 아니면 그 당시 사진이 있느냐?”며 항변할 수 있다.

우선 대답을 말하자면 “그렇다. 필자는 1,500년 전 왜인의 모습을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 봐서 알고 있다. 그 그림에는 왜인들이 무식한 야만인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 그림이란 도대체 무엇이기에 필자가 일본의 조상인 왜인들은 야만인이란 표현을 함부로 쓰는 것일까?


양직공도에 그려진 왜국사신의 모습은?

그 그림이란 현재 중국 남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양직공도(梁職貢圖)라는 그림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 전에 남북조시대의 남조의 한 나라인 중국 양(梁)나라의 원제(元帝) 가 무제(502~549)의 재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편집한 것으로,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들을 그림으로 그리고 그 나라에 대한 짤막한 해설까지 첨부한 그림이었다. 먼저 왜국 사신을 그린 그림을 보면 아래와 같다.

▲  양직공도에 그려진 왜국 사신의 모습. 머리에 천을 감고 몸에는 옷감을 두르고 있으며 각반을 차고 더욱 가관인 것은 맨발의 청춘이다.

원래 사신이란 그 나라의 국왕을 대신해서 외국에 가는 법이다. 오늘날에도 외국에 나가는 대사는 장관급에 해당하는 직급이다. 예나 지금이나 외교사절은 거의 장관급이나 아무리 낮아도 차관급 정도는 되리라 본다. 그런데 중국에 외교 사신으로 나타난 장차관급인 왜국 사신의 모습을 보자면, 완전 거지 모습으로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왜국 사신은 키가 작고 헝겊조각을 머리에 두르고, 몸에는 재단되어 봉제된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천을 그냥 둘둘 감고 있는 상태에서 종아리에는 각반을 차고 있다. 그리고 더욱 가관인 것은 맨발인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외국 사신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는가? 장.차관급인 사신의 모습이 저 모양이니 왜국의 수준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왜국 사신의 모습이 백제인에 비해 너무나도 초라해서 일본학자들은 왜국의 사신도가 악의적으로 잘못 그려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양원제가 최초 35개국의 사신도를 그렸다 하는데 왜국에만 유독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그렇게 우스꽝스럽게 그렸겠는가!!! 다른 나라의 사신들의 복장과 모습은 왜국의 사신처럼 우스꽝스럽지가 않고 화려하고 정중하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바로 왜국사신의 복장이다. 먼저 머리에 헝겊을 두른 것은 인도식 터번과 비슷한 것으로 인도지방과 같이 더운 지방에서 사용하는 복식이다. 그리고 몸에 옷을 입지 않고 헝겊을 두른 것은 그 나라 사람들이 거의 옷을 입지 않고 지낸다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특히 사신이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인 것은 그 나라의 기후가 신발이 필요 없는 즉 겨울이 없는 남방지방으로 보아야 한다.

▲  기모노 안에 훈도시를 착용한 일본 여성. 원래 훈도시는 남자용이고, 여성은 알몸이었다.  
이 사신의 모습은 현 일본의 전통의상과 무관하지 않다. 일본인의 전통의상은 여성의 경우 "기모노"요, 남자는 알몸에 "훈도시"이다. "기모노"는 팬티도 입지 않은 알몸에다 천 조각을 둘둘 감아 허리끈을 질끈 잡아 맨 것이고, "훈도시"란 것은 일본 씨름인 "스모" 선수들이 입고 나오는 애들 기저귀 같이 거시기만 겨우 가린 것이다.

남자는 길에서 볼일(?)을 볼 때 훈도시를 옆으로 비집기만 하면 되고, 기모노 여인은 앞섶만 들추면 된다. 이때 맨땅에 눕혀진 여인의 엉덩이를 보호하기 위해 항시 꺼내어 엉덩이 방석으로 쓰기 위한 걸 갖고 다닌 것이 바로 기모노 차림의 등허리에 찬 손수건만한 방석인 것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현 일본의 지리적 위치는 북위 30도~40도 사이이다. 이 일본의 위치를 놓고 사신의 복장을 논한다면 이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본의 위도 상 위치로 볼 때 어떻게 머리에 터번을 쓰고 거의 옷을 입지 않으며 신발을 안 신을 수가 있단 말인가? 이것은 왜국이 현 일본열도가 아니라 훨씬 더 남방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참고로 사서에 나국(裸國) 즉 벌거벗고 사는 나라가 나오는데 이는 현 캄보디아 근처를 말하는 것이라 한다.

서울대 박창범교수가 <일본서기>의 일식을 분석한 자료를 보면, A.D 709년 이전의 10개의 일식 기록에서 왜국의 위치는 남지나해상으로 결집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결집도가 매우 높아 실제로 관측된 자료로 보고 있다. 이 과학적 근거와 양직공도의 왜국사신의 모습을 보면 일치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현 일본의 전신인 왜의 위치는 현 일본열도가 아니라 남지나해상의 어딘가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이론에서 사서의 기록을 더듬어 보면 왜는 절강성에 그 근거를 두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  좌측은 709년 이전의 야마토왜 시대로 남지나해상으로 결집되고,   우측은  1,189년 이후로 일본열도로 결집된다

19세기말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여 지배하기 위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設)이란 엉터리 이론을 만들어냈다. 그 이론의 뼈대는 왜가 가야지방인 임나에 일본부를 두어 200백년간 지배했다는 것으로, 예전에도 조선 땅은 일본의 식민지였으니 지금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임나일본부설은 여러 근거로 인해 허구임이 밝혀졌다.

이 나라 식민사학계가 망국의 반도사관을 고집하는 한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허구의 임나일본부설을 학술적으로 부정하려면, 우리의 이론부터 제대로 갖추어 대응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의 사학 이론이 처음부터 엉터리 허구이다 보니 역시 엉터리인 임나일본부설을 확실하게 제압을 못하기 때문이다.

양직공도에서 보다시피 우리는 일본의 전신인 왜국의 사신의 모습을 통해 당시 왜국의 문화 수준을 잘 알 수 있다. 그런 수준 이하의 왜가 가야지방을 지배했다는 것이 말이나 될 법한 이야기인가? 그리고 양직공도에서도 백제는 한반도에 있지 않고 대륙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일본의 전신인 왜가 대륙 남부나 남지나해상에 있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가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임나일본부설은 허구가 되는 것이다.

▲  좌측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 병사의 군모이고, 우측은 동남아시아의 필수픔인 베트콩 모자를 쓴 월남 여인이다. 이 모자만 보더라도 남지나해상에 있던 왜가 일본열도로 흘러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양직공도의 백제에 대한 기록은?

양직공도에 백제 사신의 모습은 발을 약간 왼편을 향하여 나란히 하고 있다. 단아한 용모에 관(冠)을 쓰는 좌임(左扉)의 대수포(大袖袍)를 무릎을 약간 덮을 정도로 착용하고 그 아래에 바지를 입었으며, 검은 신을 신고 양손은 모은 채 가리고 있다. 백제의 복식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둘도 없이 소중한 자료이며, 특히 삼국시대 백제 사신의 모습과 이에 대한 기술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 양직공도에 그려진 백제사신의 모습. 우아하고 단정하고 화려하다

그러나 양직공도가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백제 사신의 모습보다 거기에 적혀있는 해설로 백제의 실체를 잘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백제에 대한 해설문구와 그에 대한 번역은 아래와 같으며, 필자의 중요한 내용의 설명을 덧붙인다.

百濟舊來夷馬韓之屬 晉末來駒驪略有遼東樂浪亦有遼西晉平縣 自晋已來常修蕃貢, 義熙中, 其王餘腆, 宋元嘉中其王餘毗, 齊永明中其王餘太, 皆受中國官爵,
梁初以太 除征東將軍, 尋爲高句驪所破, 普通二年, 其王餘隆 遣使奉表云, 累破高麗,
號所治城曰固麻, 謂邑檐魯 於中國郡縣 有二十二檐魯, 分子弟宗族爲之. 旁小國有 叛波, 卓, 多羅, 前羅, 斯羅, 止迷, 麻連, 上己文, 下枕羅等附之.
言語衣服略同高麗, 行不張拱 拜不申足, 以帽爲冠, 襦曰複袗, 袴曰褌. 其言參諸夏, 亦秦韓之遺俗.

백제는 옛 래이로 마한의 무리다. 진나라 말기에 고구려가 일찌기 요동과 낙랑을 경략하고,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현에 있었다. 진나라 이래로 백제는 번공(蕃貢)으로 항상 수교를 하고 통하였다. 의희 연간(405-418)에 부여전(전지왕), 송 원가(424-453)에는 부여비(비류왕), 제 영명(483-493)에 부여태(동성왕) 모두 중국의 관작을 받았다.

양나라 초에 부여태(동성왕)가 정동장군을 제수 받았다. 얼마 뒤 고구려를 격파했다. 보통 2년(521년)에 부여융(무녕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여러 번 고구려를 무찔렀다고 했다.

백제는 도성을 고마라 하고 읍을 담로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과 같은 말이다. 그 나라에는 22담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와 종족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 주변의 소국으로는 반파, 탁, 다라, 전라, 사라(신라), 지미, 마연, 상기문, 하침라 등이 부속되어 있다.

언어와 의복은 고구려와 거의 같지만, 걸을 때 두 팔을 벌리지 않는 것과 절할 때 한 쪽 다리를 펴지 않는다. 모자를 관이라 부르고, 저고리를 복삼, 바지를 곤이라 한다. 언어에는 하나라의 말이 뒤섞여 있으니, 이것 또한 진한의 습속이 남은 때문이라고 한다.

양직공도에서는 백제국의 출자(出自)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1) 첫째 : “백제는 옛 래이로 마한의 무리다(百濟舊來夷 馬韓之屬).”라는 문구이다. 래이라 함은 옛날부터 산동성에 살고 있는 이족(夷族)를 가르키는 말로, 사전(書傳) 권5 하서(夏書)에 보면 “양주에는 도이가 있고, 청주에는 래이가 있고, 서주에는 회이가 있으며, 량주에는 화이가 있다 (揚州之島夷 靑州之萊夷 徐州之淮夷 梁州之和夷)”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의 청주는 대륙의 산동성을 말함이다.

▲ 기원 전  6~7세기의 중국을 그렸다는 일본의 지도. 산동성에 분명히 래이(萊夷)라고 표기되어 있다.  위 지도도 이미 지명조작이 많이 되어 잇는 지도로 보인다.

그리고 <양서 백제전>에서는 이를 더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百濟國其先 東夷有三韓國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弁韓辰韓 各 12國 馬韓 54國 百濟卽一也” 즉 동이에 3한국이 있었는데, 백제는 마한 소속 54개국 중의 하나인 백제(伯濟)가 그 모체라는 것이다. 마한은 황하와 회수 주변에 있었으며 나중에 백제에 병합된다.

먼저 마한이 형성되는 이전의 상황과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한단고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 하>에 보면, 22세 색불루 단군 때 3한을 3조선(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으로 바꿔 불렀다. 이 중 진조선은 천왕이 직접 다스리고, 여원홍이 마한이 되어 막조선을 통치케 하고, 서우여를 번한으로 삼아 번조선을 통치케 하였다.

막조선이 언제 망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진조선은 B.C 239년 해모수의 쿠데타로 망하게 된다. 진조선과 막조선은 해모수의 북부여와 최씨 낙랑국으로 발전한다. 번조선에서는 기자의 후손이 마지막 6대에 걸쳐 왕이 되어 통치하였는데, 번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箕準)은 B.C 195년 연나라 출신 위만에게 패해 왕위를 빼앗기고 남하하여 한(韓)을 세우게 된다.

여기서 번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이 어디로 갔느냐가 우리 역사의 가장 핵심 포인트이다. 매국식민사학자들은 대동강 평양에 있던 단군조선을 기자조선이 무너뜨리고, 기자조선은 위만조선에게 망했다고 한다. 이 때 기자조선의 왕 기준이 남하하여 한반도 남부에 삼한을 세우는데 이를 마한/진한/변한이라 하며, 삼한이 백제/가야/신라로 발전했다고 교과서에 적어 놓고 있다. 실로 엄청난 역사왜곡인 것이다.

식민사학계는 반도사관을 정착시키기 위해 기자조선/위만조선을 대동강 평양으로 끌고 오려다보니 진조선/막조선이 발전한 북부여와 낙랑국을 우리 역사에서 지워버리는 패륜을 범하게 된다. 번조선의 수도는 창려로 요동성이 있던 곳이며 낙랑군이 있던 산서성 원곡 일대로 추정된다. 
 
그곳을 위만에게 빼앗기자 기준이 남하한 곳은 한반도 남부가 아니라 해대(海岱)의 해(海) 지방으로 남하하여 옛날에 기자가 살았던 하남성 서화와 안휘성 몽성 지역에서 한(韓)의 왕이 되었는데 진국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유.연.제.노.오.월 지역에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존재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여러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마한의 54국의 한 나라였던 백제(伯濟)가-->백제(百濟)로 발전되며, 변한 12국의 하나였던 사로(泗盧)가-->사로(斯盧)-->신라(新羅)로 되고, 비미국과 구노국은 왜(倭)로 발전된다.

일반적으로 백제는 백가제해(百家濟海)의 준말로 "백가(百家)가 바다(海)를 건너왔다(濟)."라고 해석을 하여 고구려에서 바다를 건너와 백제를 세운 것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백가가 제수(濟水 : 황하의 지류)와 해(海 : 산동성 동남쪽과 강소성 북부)에 있었다."라고 해석을 하여 백가제해(百家濟海)라고 할 수도 있다고 민족사학자 신완순선생은 설명한다.

그 이유는 백제는 래이(萊夷)였고 마한(馬韓)의 종족이며, 래이와 마한은 지금의 산동성과 산서성 하북성 인근에 걸쳐서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여러 사서에 나오는 동청주자사(東靑州刺史)라는 직위가 가능하며, 산서성의 요서와 대방군에 관한 설명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2) 둘째 :
다음은 “진나라 말에 고구려에 요동과 낙랑이 있고, (백제) 또한 요서.진평현을 두었다(晉末來駒驪略有遼東樂浪亦有遼西晉平縣)”라는 문구이다. 우리 역사를 무조건 축소왜곡하려는 식민사학계는 이 문구의 해석을 “진나라 말에 고구려가 요동에 있고, 낙랑 또한 요서와 진평현을 두었다.”라고 해석하여 요서.진평은 백제와는 상관없이 낙랑의 영토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전혀 근거 없음이 드러난다.

우선 진(서진 265~316, 동진317~420)말기라 함은 서기 400년경을 말함으로 그 때는 낙랑이 이미 멸망하고 없었을 때다. 따라서 여기서의 낙랑은 당시 존재한 국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요동.요서와 같이 낙랑이라는 지명을 의미한다고 봐야 한다. 또한 같은 양나라의 사서인 <양서 권54 열전48 백제조>에는 “晉時駒驪略有遼東, 百濟亦据有遼西晉平郡矣自置百濟郡)”라는 문구가 있는데 거기에는 낙랑 대신에 백제가 자치백제군으로 요서와 진평군을 두었다고 뚜렷이 명기되어 있어 그러하다.

식민사학계는 여기서 고구려의 요동이라 함은 현 요녕성 요하 동쪽인 만주를 가르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현 요하는 11세기 요나라가 성립되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그 전에는 요동.요서의 기준이 달랐다. 당시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점은 산서성 분하의 남북 흐름으로 산서성을 동.서로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백제의 요서 진출을 최초로 기록한 사서는 양나라 이전 왕조인 송나라(420~479)의 사서인 <송서 백제전>으로 “高句麗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治所謂之晋平郡晋平懸)”라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백제는 요서 지역인 산서성까지 시작하여 남하했다가 나중에 고토인 요서와 진평에 진평에 백제군을 설치했던 것이다.

백제가 설치한 진평군에 대해서는 <중국역사지명사전>이 설명하고 있다. “진평군은 태시(泰始) 4년(468년) 설치되었으나 471년 진안군으로 개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가 요서.진평에 백제군을 설치했다는 기록은 <송서>와 <양서> 이외에 <남제서>와 <구당서>에도 기록되어 있고,  <통전 권185 백제전>은 “663년 백제 멸망 시 요서지역의 백제군은 돌궐과 말갈에 의해 소멸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백제가 설치한 요서군은 산서성 최남부 서쪽으로 온조의 건국지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사학계는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하고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다는 기록은 목에 힘주어 강조하면서서 교과서에도 수록했으면서도, 백제가 산서성 남부에 요서군과 진평군이라는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했다는 기록에는 잘못된 기록이라며 오히려 이를 부정하고 있으니 참으로 나라를 팔아먹을 친일식민사학계라 아니할 수 없다.

▲ 백제는 대륙 동부를 본부로 하여 한반도, 일본열도, 대만(탐라), 필리핀 등 동남 아시아와 광서자치주(흑치)에 담로를 설치했다.
3) 셋째 : “백제에는 22담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와 종족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는 기록이다. 백제의 주요 담로는 왜국(광동성 일대), 흑치국(광서장족자치구), 탐라국(대만) 이외에 한반도 일본열도 등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필리핀 월남 인도네시아 버마 태국 등 동남아시아에도 담로를 설치했다고 한다.

여하튼 일본의 왕실족보인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많은 왜왕을 백제왕족이 했고, 흑치상지는 왕족인 부여(夫餘)씨였는데 흑치국의 제후였기에 흑치란 성으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 또한 주변의 소국으로는 반파, 탁, 다라, 전라, 사라(신라), 지미, 마연, 상기문, 하침라 등이 부속되어 있다”는 기록이다. 여기서 반파/탁/다라/상기문은 왜 관련 지명으로 보여지며, 전라/지미는 확인이 어려우며, 하침라는 탐라(대만)으로 보여진다.

1929년 낙양 북망산의 한 고분에서 흑치상지의 묘지석이 발견되었는데 그 묘지명은 천여자에 이르는 방대한 것으로, 그의 가계의 내력에 관한 것이 아래와 같이 적혀있다.

“부군(府君)은 이름은 상지(常之)이고 자(字)는 항원(恒元)으로 백제인이다. 그 조상은 부여씨(夫餘氏)로부터 나왔는데 흑치(黑齒)에 봉해졌기 때문에 자손들이 이를 씨로 삼았다. 그 가문은 대대로 달솔(達率)을 역임하였으니, 달솔이란 직책은 지금의 병부상서와 같으며, 본국에서는 2품 관등에 해당한다. 증조부는 이름이 문대(文大)이고, 할아버지는 덕현(德顯)이며, 아버지는 사차(沙次)로서, 모두 관등이 달솔에 이르렀다.”

묘지석에서 보듯 흑치상지의 가계는 백제왕가의 일원으로 그의 증조부부터 달솔이라는 벼슬로 22담로의 하나인 흑치국의 제후(왕)로 분봉(分封)된 것이었다. 대를 이어 흑치국의 왕위를 계승했으며 언제인지는 모르나 흑치를 성씨로 삼게 되었다는 기록이다. 또한 중국장수전전의 기록에는 흑치상지(?∼689년)에 대하여 “흑치상지는 당 고종 이치, 측천무후 때 명장으로 백제(지금 광동성 흠현 서북) 서부인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광동성 흠현 서북은 현재 광서장족자치구 흠주 서북 옹령현 백제향(百濟鄕)을 말하는 것으로, 그곳에는 아직도 백제허(百濟虛)라는 불리고 있으며 아직도 백제를 여러 명칭에 붙여 쓰고 있다. 그들은 百濟虛라고 적어놓고 중국식 발음으로 읽지 않고 우리식 발음인 대백제(DaiBaekJae)라고 읽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   백제의 서부인인 흑치상지의 고향은 광서장족자치구 흠현 백제향 출신이다.
▲  광서장족자치구의 흠주와 옹령 사이에 백제라는 지명이 지도상에 보인다.

이렇듯 22개 담로(제후국)를 거느렸다면 백제는 일개 왕국이 아닌 대왕국(황제국)이었던 것이다. 백제의 왕들이 대왕(황제)이었는지는 공주에서 발견된 무녕왕릉의 지석에 명문으로 뚜렷이 남아 있다. 지석에는 백제 사마왕이 523년 62세의 나이로 붕(崩)했다고 기록이 되어 있어 무녕왕이 대왕(황제)임을 나타내고 있다.

중국에서도 천자(황제)의 죽음에만 붕(崩)자를 쓰고, 제후(왕)의 죽음에는 훙(薨)자를 쓴다. 그 이유는 공자가 <예기>에서 사람의 죽음에 대해 “천자가 죽으면 崩, 제후는 薨, 대부는 졸(卒), 선비는 불록(不錄) 서인은 사(死)”라고 교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흑치상지의 묘비에는 제후에게 쓰는 훙(薨)으로 기록되어 있다.

▲  충남 공주에서 발견된 백제 사마왕의 지석에 62세에 붕(崩)했다고 기록되어있다.

4) 넷째 : 여기서 가장 중요한 기록은 사라(斯羅)가 백제에 부속되어 있었다는 기록이다. 사라는 신라의 옛 이름이란 것은 중국 기록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양서 신라전>에 의하면 “위나라 때는 사로, 송나라 때는 신라 또는 사라라고 불렀다 (魏時曰斯盧 宋時曰新羅 又曰斯羅)”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신라국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는 건국 이래 국호를 정하지 못하고 사로(斯盧) 사라(斯羅) 신라(新羅) 등으로 불리고, 존호(尊號)를 왕이 아닌 거서간, 이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 등으로 부르다, 22대 지증왕 4년(A.D 503년)부터 국호를 신라라 하고 신라국왕(新羅國王)이란 존호를 사용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신라는 중국의 사서와 <삼국사기>를 보더라도 지증왕 이전에는 백제의 속국이기 때문에 왕이란 칭호를 쓰지 못하고 간(干)이란 칭호를 쓴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백제가 강성할 때(근초고왕~근구수왕)에는 백제의 속국이었다가, 고구려가 강성할 때(광개토태왕~장수왕)에는 고구려의 속국으로 되며, 다시 백제의 중흥기인 동성왕 때는 백제의 속국이었다가 지증왕 때부터 독자적인 자립국가로 태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5) 다섯째 : 백제의 언어에는 하나라 말이 뒤섞여있다 했는데 말이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의 좁은 땅덩어리 내에서도 경상도 사람은 대대로 경상도 말을 쓰고, 전라도 사람은 대대로 전라도 말을 쓰는 법이다. 백제의 언어가 하나라 말과 뒤섞여있다는 의미는 이는 하나라의 영역과 백제의 영역이 상당부분 겹쳐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단고기 단군세기>에 따르면, “4세 오사구단군 때 하나라 왕이 백성들에게 덕을 잃어버리니 단제께서 식달에게 명하여 람.진.변의 3부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하를 정벌케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고, “13세 흘달단군 때 은나라 사람이 하를 정벌하니 하나라 걸왕이 구원을 청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만일 단군조선이 저 멀리 대동강 평양에 있었다면 이런 기록들이 있을 수 있겠는가? 단군조선의 번한은 분명 하나라와 접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실제로 중국 대학교재의 지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하나라의 작은 영토 주위로 서이(견이), 북이(北夷), 구이(九夷), 회이(淮夷), 유/묘(有/苗) 등 동이족(東夷族)들이 뺑 둘러싸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구이 지역은 후에 기준이 위만에게 패해 왕위를 넘겨주고 남하하여 한(韓)을 세운 곳으로 나중에 백제가 이 지역을 차지하게 된다.

따라서 옛 구이의 땅 즉 번한(조선)의 땅에서 백제가 생겨났으니 양직공도에서 백제의 말에 하나라의 말이 뒤섞여 있다고 한 것이다. 백제가 만일 한반도 충청/전라도에 있었다면 어떻게 하(夏)나라 말과 뒤섞일 수 있겠는가!!! 이 문구 하나만 보아도 백제의 주무대는 대륙 동.중부임을 알 수 있다 하겠다. 양직공도는 참으로 중요한 자료를 우리에게 주었다 하겠다.

▲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나라 주변은 단군조선이 둘러싸고 있었다.  이 구이 지역을 나중에 백제가 차지한다.

이렇듯 양직공도의 백제사신도의 명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역사적 사실이 실로 엄청나다 하겠다. 비록 백제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지만 백제의 거의 모든 것을 설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국적인 반도사관을 주장하는 대한민국의 식민사학계는 다른 것 제쳐두고 양직공도에 적혀있는 백제의 개요를 설명한 문구부터 다시 공부해서 교과서를 반드시 수정해야 할 것이다.

일본 정부는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는 아무런 역사적 근거도 없이도 그러한 것을 교과서에 명기하겠다고 한다. 그건 미래의 일본의 국익을 위해 자라나는 학생들을 그렇게 교육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인류 문명의 모태가 되고 대륙을 지배한 위대한 조상들의 유구한 역사를 생매장한 상태에서 아직도 꺼내지 않고 있다. 즉 국민들의 정신이 썩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정신이 썩어가고 있는 나라가 언제까지 유지되겠는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조상의 역사를 복원하여 국민들에게 정신적 교육 자료로 삼아야 이 나라의 미래가 활짝 열릴 것이고, 감히 일본 따위가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엉터리 주장을 하지 못할 것이다.

▲  동이족의 분포도.

출처 : 슈뢰딩거의 고양이
글쓴이 : 레이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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