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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만엽집 권1-7, 金野乃 美 草(띠 밭의 좋은 띠)

monocrop 2011. 9. 28. 22:06

 

 만엽 권1-7, 金野乃 美 草(띠 밭의 좋은 띠)


明日香川原宮御于天皇代(天豊財重日足姬天皇;皇極天皇). 額田王歌(未詳).

  

金野乃 美 草

쇠얏틔 존 새 촐려 일 집

(艹/刈) 葺 屋

려 일 집

杼礼 里之兎

례여 머져도

道乃 宮子能

도넨 궁자케

借五百磯 所念

꿔다 수백기 바웨염네.    


右, 檢山上憶良大夫類聚歌林曰, 一書戊申年幸比良宮大御歌. 但, 紀曰, 五年春正月己卯朔辛巳, 天皇, 至自紀溫湯. 三月戊寅朔, 天皇幸吉野宮而肆宴焉. 庚辰之日,天皇幸近江之平浦.



 배경


明日香川原宮에서 나라를 다스리던 天皇(皇極)의 시대에 額田王이 부른 노래이며 額田王은 未詳이다.

右, 山上憶良大夫가 類聚歌林에 이르되, 一書에, 648년 比良宮에 납실 때의 大御歌라 하였다. 그러나 紀에 이르기를 5년(齊明5년;659) 1월3일 紀溫泉에서 환궁하다. 3월1일 吉野宮에 들어 잔치를 베풀다. 3월3일 近江의 平鋪로 행차하다. 라고 하였다.

이 노래는 皇極天皇때 額田王이 지은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그 역사적 배경은 옛사람들조차 확실히 파악치 못하고있는 듯하다. 皇極은 舒明의 姪女로 高向王에게 출가하였다가 뒤에 舒明의 皇后가 되고 舒明死後 35대 皇極天皇(642~645)이 된다. 大化改新의 혼란 속에 皇極은 동생 孝德(645~654)에게 양위하였다가 孝德死後 다시 齊明(655~661)으로 즉위한다. 따라서 648년은 孝德4년이 되고 659년은 齊明5년이다.

額田王은 鏡王의 딸로 大海人皇子(天武)와의 사이에 十市皇女를 낳고 뒤에 中大兄皇子(天智)에게 불리었으며 生沒연대가 불분명하나 萬葉歌人중 1급으로 치는 여류가인이다.

시대가 皇極시대라면 노래의 주체는 皇極과 入鹿이 되고 大化改新 이후라면 齊明과 中大兄皇子가 되는데 후자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皇極과 齊明은 동일인으로 두 번 등극한 여인이다.

齊明이 백성들의 생활상이 궁금하여 額田王을 불러 제철에 집 단도리는 잘하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이에 額田王이 바깥상황을 보고하는 노래인데 神權勢力의 몰락과 新政治勢力의 부상을 초가지붕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제주어 풀이


1, 쇠얏틔 존 새 촐려 일 집                    

   려 머져도                                   

   도랭이네 궁자케                           

   꿔다 수백기 바웨염네.                          


2, 곰드르엔 존 새 려 일 집

   려 머져도

   도랭이넨 궁색케

   채다가 순백케 바웨염네.

    

    

 표준어 풀이


1, 띠밭의 좋은 띠 챙겨 일 집                  

   띠가 모자라 멈추어 있는데도                  

   왕자네는 굉장하게                            

   어디서 구해다가 수북히 마무리하고 있더라.    


2, 七神都엔 좋은 띠 챙겨 일 집

   띠가 모자라 멈추어 있음에도

   왕자네는 구차하게 

   채어다 욕심내어 마무리하고 있더라. 



 감상


이 시기의 日本歷史는 투명하지 못하여 日本書紀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으나 이에 의구심을 갖는 이가 많다.


* 642년 1월 百濟 義慈王의 어머니가 죽고 弟王子 翹岐 및 同母妹 4명, 內佐平 岐味, 고명한 범부 40여명이 섬으로 쫓겨났다. (百濟 武王死後 太子 義慈를 중심으로 한 夫餘의 보수세력과 배다른 동생 翹岐를 중심으로 하는 신진 해양세력간에 모종의 알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해양세력이 遷都를 추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대립의 결과 동북아의 패자로 군림하면서도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었을 때 힘을 하나로 결집시키지 못한 원인으로 작용하였고 오히려 축출 당했던 당사자인 翹基가 百濟를 도우려 하였다. 내칠 때 한발 물러서서 맞대결을 하지 않았고 위기에서 과거를 잊고 도우려 한 점은 야망보다 大百濟人이라는 自尊과 순수로 봐야할 듯싶다. 義慈王도 장기간 훌륭한 정치를 하였으나 그 대신 翹岐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 허망한 생각이나마 떠올려본다.)


* 642년 2월 일본에 와있는 義慈왕의 아우 塞上이 늘 악행만을 일삼았다. (義慈王의 집권으로 아우 塞上마저 축출된 듯싶다. 죄를 받은 것도 아닌 듯 하고 관직으로 파견된 것도 아니다. 죄를 받은 翹岐가 상황을 이해하는 것과는 달리 塞上은 兄의 정치적 격리조치를 이해 못하고 세상을 원망하였던 것으로 추정해 본다.)


* 642년 5월24일 翹岐가 百濟의 大井으로 거쳐를 옮겼다. (百濟本土가 아니라 日本內 百濟 본거지로 추정된다.)


* 645년 6월14일 孝德天皇이 즉위하고 中大兄皇子를 皇太子로 봉하였다. (入鹿을 제거하고 大化改新의 실세로 부상한 翹岐가 정권을 장악한 것으로 추정된다.)


* 650년 白雉元年 1월1일 天皇이 味經宮에 나가 新年賀正禮에 참관하고 長丙豊岐宮으로 돌아왔다. (孝德天皇 6년이 白雉元年이 되어 정월초하룻날에 도읍인 長柄豊岐宮을 놔두고 味經宮으로 가서 新年賀正禮에 참관하였다. 학자에 따라서는 孝德과 白雉라는 양 정권이 병립하여 655년까지 있었다는 설이 있으나 기실 百濟王弟, 해양세력의 대표성, 大化改新의 실세로 있는 天智의 위상이 孝德政府를 무력화시키지 않았나 싶다.)


* 650년 한 백성이 白雉를 獻上하자 義慈王의 아들 豊璋을 불러 자문을 구하였다. (日本書紀는 흰 꿩으로 인하여 白雉라는 연호가 등장하였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백치〉백제치〉백제아치〉백제무리’라는 인식이 가능하여 사실상 百濟의 식민정부로 추정된다. 단, 百濟官吏를 파견하는 등의 직접통치가 아니라 王弟의 위상을 인정하여 봉건성을 띄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 650년 2월15일 白雉를 산에 놓아주는 의식에 豊璋, 塞城, 忠勝 등이 참관하였다. (日本내 百濟高官들이 대거 참석하였다. 이는 百濟出身들의 위상을 높이려한 의도가 짙다. 翹岐, 塞城, 忠勝 등은 義慈王의 집권당시 退出되어 日本에 들어왔으나 豊璋의 움직임이 주목된다. 三輪山에 養蜂을 시도하였다가 실패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使臣이 아니며 派遣官으로 보기도 어렵거니와 허약한 孝德政府의 인질일 수도 없다. 이즈음 翹岐가 日本의 실세로 부상하여 그 힘이 커지자 義慈王이 화해를 시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집권을 하고 보니 해양세력을 배제한 百濟란 있을 수가 없어서 아버지 武王의 경영전략을 부정할 수만은 없었고 또한 이복동생 翹岐가 왕권에 도전만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남보다 나을 수도 있었다. 따라서 太子와 그를 보필할 형제 중 도움이 될만한 아들에게 해양경영을 배우도록 할 필요를 느꼈고 豊璋을 화해의 연결 고리로 翹岐에게 보내진 듯하다. 따라서 豊璋의 日本內 위치는 百濟王子로 翹岐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카로, 제자로 翹岐의 수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본다. 단, 궁중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百濟王子의 대우로 있는 듯싶다.)


* 653년 皇太子가 倭로 도읍지를 옮길 것을 주상 하였으나 孝德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황태자는 皇祖母尊, 間人皇后, 皇弟 등과 함께 倭國의 飛鳥河邊行宮으로 가서 머물렀다. 이때에 공경대부 및 백료들도 모두 皇太子를 따라가서 皇宮에는 하급관리들만 남았다. (皇祖母尊은 孝德의 친 누님인 皇極天皇이며 間人皇后는 孝德의 皇后이다. 上皇과 공경, 백료는 물론 부인마저 天皇을 버리고 떠나는 기막힌 상황이 연출되어 654년 10월까지 계속되었고 孝德이 죽어 장례를 마친 12월 그들은 다시 飛鳥로 떠났다.)

 

이상 648년을 전후한 百濟系 실세들의 모습을 기록에서 찾아보았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七骨의 일부이면서 新勢力을 무시할 수도 없는 額田王의 입장이 난처하다. 2,가 七骨의 입장에서 齊明에게 보고하는 것이 된다. 神權도 백성을 생각하여 추진하지 못하는 일을 新勢力은 강압적으로 하고 있다.

1,은 新勢力이 보아도 아무 문제가 없을 여지를 연출하여 겉으로 보기에 오히려 1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노래의 내용과는 별도로 白雉, 혹은 天智로 상정되는 新百濟系가 당시 日本의 중심을 장악해 나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구 풀이


金野乃 쇠얏띈〉새왓엔〉띠밭에는.

  金드르엔〉곰들에는〉감은 들에는〉감싸안은 벌판에는〉어머니가 통치하는 곳에는〉七神    이 관장하는 곳에는.

* 노래라는 것이 원래 내용과 내재된 상징적 의미가 있게 마련이지만 額田王은 아예 두 가    지 내용을 설정하고 그에 맞는 문자를 구하여 장난하기를 즐겼다. 시절이 하 수상하여 그    런 것인지도 모른다.


美 草 존 새〉좋은 띠〉잘 자란 띠.


艹/刈 葺 屋 려 일 집〉챙겨 지붕 이을 집들.

* “집을 일다” 라는 말은 초가집 지붕의 낡은 띠를 추슬러 새 띠로 갈아 덮는 작업을 말한    다. 벼 짚으로 되었다면 1년에 한번, 띠로 일었다면 2년에 한번정도 이런 작업을 해야 한    다.


杼礼 里之兎 려 머져도〉모자라 멈추어 있는데도〉띠가 부족하여 지붕을 갈아 덮지     못하고 있음에도.


道乃 도네는〉도랭이 네는〉왕자가 관장하는 지역은.


宮子能 궁자케〉궁의 자식답게〉굉장하게.

  궁색케〉궁색하게도.


借五百磯 꿔다 수배기〉꿔다 수북하게〉융통하여 쌈박하게.

  채다 순백기〉채어다가 숨 토하도록〉욕심으로 뺐어다가.

* 오백이란 제주에서 “아주 많다〉가득하다”의 의미로 쓰이며 문자로 보기에 언뜻 그렇게     보이나 額田王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표현이 거북한 용어를 숫자로 처리하고 있어서 동류    로 보았다.

* 磯를 “尒, 有, 伊, 有, 能”등으로 쓰지 않고 磯로 표기한 것은 “자글락 거리다〉재잘재잘     귀찮게 하다〉못마땅하다”의 의미를 내포하려 하였다.


所念 바웨염네〉처마 끝을 쳐내고 있네〉마무리하고 있다네.

* 所의 “바위다〉바웨다”라고 하는 말은 원래 “주변, 언저리”를 의미하며 “입술을 입바웨,     절벽 주변을 기정바웨”라고 말한다. 이 말이 동사로 변하면 “닳아지게 하다〉스쳐가게 하    다〉훑다〉깎아내다〉마무리하다”로 쓰인다.


일본 해독

  

가을들 참억새 베어

지붕이어 머물던 宇治시절

그 초가집이 그리웁구나.

출처 : 아래아 마을
글쓴이 : 섬이야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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