元明의 심리적 갈등구조, 그 배경에 대하여
1)
日本書紀는 사서이므로 사관의 내재적 감정개입이 비교적 적다.
萬葉은 시가이므로 각각의 작품마다 작가의 마음이 실린다.
사실을 보는 시각과 마음을 보는 시각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에 비교방법론은 거북살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를 들여다 봄에 있어서 주관적인 작가의 마음으로 객관적인 사실을 유추할 수도 있다.
"잘난 동백이 밉다."
"持統의 몸짓이 노루를 불렀다."
평범한 노래, 평범한 수사일 수 있다.
그러나 사건화가 되면 달라진다.
持統이 文武에게 양위하면서 부른 노래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추운 겨울, 봄인 양 봉오리를 피우는 잘난 동백이 밉다."
이 때의 동백은 文武이고 東國이고 新羅다.
持統의 눈물외교는 자식을 죽이고 교태를 뿌리는 모습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이 때의 노루도 文武이고 東國이고 新羅다.
2)
707년 文武가 죽고 元明이 神의 큰딸이 되었다.
710년 3월 藤原宮을 버리고 寧樂宮으로 천도하였다.
712년 1월 太安萬呂가 古事記를 완성하였다. 天武의 명으로 稗田阿禮가 황실계보, 신화, 설화를 암송하였는데, 711년 元明이 太安萬呂에게 이를 기록하라 명하였다. 記紀神話부터 推古까지 전3권으로 이루어졌다.
713년 風土記의 편찬을 명하였다.
720년 舍人親王 등이 日本書紀 전30권, 系圖1권을 완성하였다. 記紀神話부터 持統까지다.
754년경 大伴家持(추정)에 의해 萬葉集이 완성되었다. 전20권 4500여수가 수록되었다.
720년 元正시대의 日本書紀 마저 元明의 의도로 보는 것은 元明이 보위를 넘겼어도 太上의 위치에서 실세라 보기 때문이다.
754년 완성의 萬葉集 역시 元明의 편집으로 1권이 완성되고 이후 지속적으로 채록되었다고 본다.
日本이 자랑하는 4대사서가 神의 큰딸 元明의 의도로 이루어졌다.
바꾸어 말하면 元明 없는 고대 日本史를 상상하지 말라는 거다.
日本이 고대사에서 밍기적거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元明의 神武, 元明의 神功, 元明의 雄略, 元明의 推古, 元明의 天智, 元明의 天武, 그리고 文武를 말하면서도 元明을 저 만치 밀쳐 놓았기때문이다.
3)
孔子(BC 552∼BC 479)는 BC 5세기에 활동한 인물이다.
老子(?-?)는 BC 6세기에 활약한 인물이란 설과 공자보다 후대에 활동한 인물이란 설이 있다.
莊子(BC 365-BC 290)는 BC 3세기에 활동한 인물이다.
동북아를 움직였던 유교, 도교 두 사상의 축이 한반도 고대국가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기록을 보면 유교가 먼저인 것 처럼 보이나 孔子는 시발점이고 老莊은 완성이다.
이는 유교, 도교의 성립 이전에 도교와 유사한 도덕적 사상규범이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며, 이 유사도교로 부터 孔子는 인간의 도덕규범을 추출해 내었고 老莊은 철학을 완성시켰다.
유사도교는 神政시대에 생활과 밀접하여 현세구복적 지침이 되었으리라.
필자가 도교적 정통성을 "잉태"라고 강변하는 것은, 고대 한반도에 영향을 끼쳤던 도교문화가 거창하고 복잡한 老莊철학이 아니라 단순명료한 상태로 행동지침이 되어 민중의 생활 속에 뿌리내렸다고 보는 거다.
우리 민중의 의식이 가정과 가족, 미래에 비중을 크게 두기에 "잉태"를 중심에 놓았고 국가, 왕조의 성립 역시 "잉태"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4)
단군신화는 잉태의 모델이다. 민중 속에 있던 도교적 양태 중에 엑기스를 추출하여 적용하였다.
이게 본래의 모습인지 변화된 모습인지는 알기 어려우나 일연의 단군은 天地를 엮는 정통성을 추구하였다. 다분히 의도적인 것으로 비쳐지는 이유가 그러하다.
가) 句 + 雄 = 朝
나) 雄 + 句 = 朝
뭐가 다를까?
가)의 정통성은 七神이다. 七神을 통하여 神界와 교감하였다.
나)의 정통성은 天神이다. 직접 하늘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그렇게 잉태한 고대왕조는 七神을 추방하였다.
BC 19년을 전후한 高朱夢과 召西奴의 갈등이 가)와 나)의 사상충돌이다.
召西奴는 瑠璃의 정통성을 승인하지 않았고 朱夢은 召西奴의 七神的 神權의 기능을 부정한 거다.
이러한 인식의 갈등은 시공을 넘어 AD 7세기, 新羅의 善德, 倭의 元明에게로 전이 되었다.
단, 善德, 元明에게는 七神의 기능으로 정통성을 부여할 대상이 마땅치 않았다는 점이 달랐다.
일전에 "朱夢, 善德, 元明이 똑 같이 하고 싶었던 말"의 의미는 사상의 변환시점이 일치했다는 말이다.
요람을 엮어야 잔등어리를 펴주고
생각을 엮어야 좋은 남편의 의미를 잉태하는 것이라.
차마 이렇게 나물이나 캐며 살자하고 있거든
아기노릇으로나 그칠 이름을 붙여주고
그나마 틀려버려
빌어먹기나 바라며 문턱을 넘나든다면
넘어지며 눌러 낳아도 되는 것을.
내 살아가는 그 삶이
내 본 받기울 이름값이요
내 나아갈 수 있는 위치는
내 하는 바 만큼이고
너희가 일깨워가면서
그 이름을 불러주기에 따르는 것이라. (① 만엽 1-1)
이러한 인식 변화의 결과로 朱夢은 瑠璃에게, 善德은 武列에게, 元明은 聖武에게 정통성을 추구할 사상적 바탕을 깔아 놓았다.
혹자는 권력을 가진 수장이면 그 힘으로 세상을 지배했을 것이라 여길지 모르나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정통성이 부여되지 않으면 세상을 다스리는 八神(王)으로 인정되지 않으며 關白, 幕府가 무소부지의 권력을 휘둘러도 천황위를 승계할 수가 없었다.
5)
元明은 天智와 姪娘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天智는 中臣鎌足의 의견을 받아들여 蘇我家의 遠智娘과 姪娘 두 자매를 취하였다.
遠智娘에게서 大田皇女, 持統, 建皇子를 얻었고, 姪娘에게서 御命部皇女, 元明을 얻었다.
그 외 많은 이복 형제자매가 있었는데, 飛鳥皇女, 新田部皇女, 山邊皇女, 大江皇女, 川島皇子, 泉皇女, 水主皇女, 知貴皇子, 大友皇子가 元明의 이복들이다.
이들 중 大田皇女, 持統, 新田部皇女, 大江皇女가 天武의 처가 되었고, 元明은 天武와 持統의 아들인 草壁의 아내가 된다. 요즘으로 말하면 이모와 조카가 혼인한 택이고 언니가 시어머니가 된 택이다.
일본서기 기록이 맞다면 天智, 天武가 형제이므로 天武 역시 4명의 조카를 취한 택이 된다.
天武 역시 많은 자식을 두었다.
草壁皇子尊, 大來皇女, 大津皇子, 長皇子, 弓削皇子, 舍人皇子, 但馬皇女, 新田部皇子, 穗積皇子, 紀皇女, 田形皇女, 十市皇女, 古市皇子命, 忍壁皇子, 磯城皇子, 迫瀨部皇子, 託基皇女가 있다.
草壁에게 尊, 古市에게 命이라는 神代의 극존칭이 붙어 있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남편 草壁에 대한, 풍전등화의 시기 나라의 기둥으로 열도의 神權을 지탱해 준 古市에 대한, 元明의 애정도 있었지만 그 만큼 이들에게 비중을 두고 있었다는 증거로 작용하였는 바 왜곡의 단초가 되기도 하였다.
6)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舒明은 백제 武王에, 天智는 翹岐에 비정된 바 있다.
이는 그 만한 인물들이 아니면 641년 시점의 한일관계를 정립하기 어렵거니와 추후에 일어나는 열도의 비극적 사건들도 설명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義慈王의 별칭인 海東曾子가 주는 느낌, ①萬葉1-12에 나타나는 天智의 회고에서 보위를 마다하고 섬 밖의 백제를 열망했던 것은 天智가 백제에서도 눅눅치 않은 위치에 있었음을 짐작케한다.
643년 3월 翹岐는 축자에 머무르고 있었고 6월엔 고구려 사신이 당도하였다.
皇極정권은 이들의 행동을 주시하여 보고하라 명하고 있다. 예사 사신이 아닌 거다.
642년 10월의 고구려는 蓋蘇文이 노선을 달리하는 英留王을 살해하고 寶藏王을 내세우고 있었다.
大海人이 고구려 왕족이라면 망명할 중분한 요건이 되고 있다.
643년 6월 어간을 백제에서 축출된 翹岐왕자, 고구려 망명왕족 大海人이 동병상련의 동질성으로 열도에서 동맹을 맺은 시점이라 추정해 본다. 奈良정권은 이를 감시하고 있었던 거다.
이 시기 皇極정권의 성격은 애매하다.
정상적이면 舒明이 죽고 古人大兄이나 天智가 보위에 올라야 할 텐데, 天智는 언급도 없고 古人大兄은 다음편에나 언급이 되며 舒明의 황후인 皇極이 보위에 올랐다.
실세는 열도의 神權으로 보이는 蘇我臣蝦夷가 대신으로 유임되어 사실상 蘇我臣蝦夷가 翹岐와 大海人을 감시하였다고 보는 게 옳다.
역시 추정이고 가설일 수 밖에 없겠지만 7세기 초의 동북아 사건일지를 다시 정리해보자.
612년, 隋煬帝가 고구려를 침략하였다가 국력의 손실로 패망하고 唐이 중원을 차지하였다.
642년의 고구려는 唐과 대적하려는 蓋蘇文의 군부와 전쟁을 피하려는 英留王의 노선이 충돌하여 英留王이 제거되는 내부갈등이 있었다.
백제 武王(602-641)의 40년은 隋와 고구려의 전쟁을 적절히 이용하여 국력을 신장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김부식 혹은, 유학자들의 시각으로 장사꾼의 이미지로 각인된 연유가 그러하다.
660년 시점, 唐이 백제를 먼저 친 것은 백제가 약했다거나 신라가 청해서라기 보다 과거 고구려 정벌에서의 실패 원인 중에 고구려 수군의 배후에 바다에 노련한 백제의 응원이 있었고, 지나친 국력의 낭비로 웅크린 고구려 보다 각지에서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백제해양세력이 唐의 동방정책에 거슬렸다고 추정해본다.
義慈王이 海東曾子가 된 연유도 武王의 잦은 외유로 실질통치는 義慈王이 주도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 641년 백제 武王이 죽고 翹岐세력이 축출되었다.
* 641년 열도의 舒明이 죽고 蘇我세력이 山背大兄王, 古人大兄, 中大兄 등의 伊家를 소외시켰다. 武王과 舒明이 동일인이라면 蘇我氏는 舒明을 雄神으로 받아들였다가 그가 죽은 후 열도권력의 재창출을 시도하려 한 것이다.
* 中大兄 天智가 翹岐와 동일인이라면 신라계의 中臣鎌足, 고구려왕족인 大海人등 삼국의 도래인들이 동맹하여 열도의 보수세력에 대항하려 한 것이다.
* 당시 古人大兄의 시각으로 보면 아버지 舒明, 이복동생 中大兄은 韓人이고 자신은 倭人으로 분류하였다.
* 643년 11월 蘇我臣 入鹿이 山背大兄王을 제거하였다.
* 645년 6월 中大兄이 蘇我臣 入鹿을 살해하였다. 大化改新은 도래인 동맹에 의한 蘇我세력의 축출이다. 孝德이 즉위하고 蘇我倉山田麻呂가 右大臣, 中臣鎌足이 內臣이 되었다. 皇極4년을 고쳐 大化元年으로 하였다.
* 645년 9월 中大兄이 古人大兄을 제거 하였다.
* 645년 12월 도읍을 難波로 옮겼다.
* 646년 1월 改新의 調를 반포 하였다.
* 645년의 동북아는 唐과 고구려 간의 대규모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 650년 1월 1일 孝德은 味經宮에 나가 신년 賀正禮에 참관하고 이날 궁으로 돌아왔다. 2월 연호를 白雉로 開元하였다.
孝德정부보다 우위에 있는 또 다른 정권이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白雉를 "백제치, 백제아치"로 보아 天智정권의 별칭으로 보았다.
* 653년 中大兄이 倭國의 도읍지를 옮길 것을 청하였으나 孝德은 이를 수락하지 않았다. 皇太子는 皇祖母尊(皇極), 間人皇后(孝德의 妃), 皇弟(大海人/天武) 및 공경대부, 백료들을 데리고 飛鳥河邊行宮으로 가 머물렀다. 難波에는 하급관리들만 남았다.
孝德정권은 실권이 없는 정부였다. 또한 中大兄은 倭와 白雉를 구분하고 있다.
* 654년 10월 孝德이 죽었다. 12월 장례를 마치고 皇太子는 倭國의 飛鳥河邊行宮으로 도읍을 옮겼다.
7)
* 655년 1월 皇極上皇이 齊明으로 즉위하였다.
元明을 초벽과 비슷한 660년대에 출생하였다고 본다면 이 즈음 부터가 가시권으로 봐야할 듯 싶다. 가시권이란 직접 보고 들어 1차 사료로 챙길 수 있거나 부모나 체험자의 가르침으로 元明의 성장에 영향을 줄 수 있었던 시기라 말할 수 있다.
* 657년 9월 有間皇子가 광인 흉내를 내었다. 有間은 孝德의 외아들이다. 齊明은 牟婁溫泉으로 보내 치료하도록 하였고 돌아온 有間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라 자랑하였다.
* 658년 11월 有間皇子가 모반혐의로 주살되었다.
皇子가
지 엄마인
내 대신에 묶여 훑어질 제
飯代라는 것은...
언덕의 풀뿌리한테야
걸어 묶인 손을 이름이려니. (②만엽 1-10)
658년 10월 15일 齊明天皇이 紀溫泉에 갔다가 659년 1월 3일에 환궁한다. 그 사이에 有間皇子의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시절이 좋았으면 有間은 孝德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올라야 할 위치였다. 孝德이 실세들에게 휘말려 비운의 생을 마치고 有間은 점차 성장하여 정신적 갈등을 겪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실세들은 사시의 눈으로 보고 함정을 파 제거하기에 이른 것이다.
齊明 및 中大兄등 실세들이 紀溫泉에 있었고 蘇我赤兄臣의 꾐에 빠진 有間은 체포되어 紀溫泉으로 호송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孝德皇后였던 間人皇后가 有間을 따라가며 飯代의 언덕에서 부르는 노래이다.
방망이를 도려내었나?
크게 잉태할 칠성님의 바구니
올룃놈이 휘감아 훑다가
쉬를 하나보오? (③만엽 1-9)
같은 시점, 紀溫泉에서는 바닷가 동굴풍경을 감상하며 中大兄이 額田王을 꼬드기고 있었다.
額田王은 大海人과 연인관계로 十市皇女를 낳았다.
노래는 변강쇠와 옥녀의 설화처럼 풍경을 神들의 섹스로 풀어 놓았다.
결국 額田王은 中大兄과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된다.
갈대숲을 헤매는 오리가
날개를 내버려 서리를 부르누나
춥고 어두운 저녁엔
倭로 가서 헤매려무나.(④만엽 1-64)
한참 세월이 흐르고 志貴황자가 706년 9월 25일부터 10월 12일까지 難波로 여행을 떠났다. 難波長柄豊宮은 孝德천황(645∼654)의 궁궐이다.
노래는 아버지 天智의 횡포로 비롯된 과거의 역사를 회상하며 피해자 孝德과 間人에게 연민을 띄우는 사죄의 모습이다.
蘇我 神權을 계승하면서도 天智를 아버지로 둔 元明 또한 혼돈 속에 있었을 것이며 志貴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志貴는 元明 이후 나라의 버팀목으로 자리하면서 만세일계의 중심축이 되고 있다.
8)
* 660년 백제 왕성이 羅唐연합군에 의해 무너졌다.
* 661년 5월 齊明이 신라 征討를 위해 築紫에 들어갔다. 7월 齊明이 죽었다.
* 663년 8월 백제 구원군이 白村江에서 패하였다. 9월 州柔城이 함락되었다.
* 667년 3월 도읍을 近江으로 옮겼다.
* 668년 1월 中大兄이 보위에 올랐다.
倭姬王(高人大兄의 딸)이 황후가 되고 大海人은 동궁이 되었다.
* 668년 10월 고구려가 멸망하였다.
* 670년 倭國은 나라이름을 日本이라 고쳤는데 그들은 말하기를 해뜨는 곳에 가까우므로 이렇게 이름한다 하였다. (삼국사기)
백제가 보는 열도는 奈良정권이고 섬(島)이라 불렀으며, 신라가 보는 열도는 東國정권이고 日本이라 부른다는 의미로 봐야한다.
668년 구원전쟁의 실패로 신라와 唐은 열도를 그냥 두지 않았다. 국제관계는 냉혹하여 강자가 약자에게 반드시 그 책임을 물었을 것으로 唐은 築紫都督府를 얻었다는 설이 있고, 신라는 東國정권의 성립을 보장받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天智가 좀 더 동쪽으로 가지 못하고 수성이 용이한 近江으,로 도읍을 옮긴 이유가 그러하다.
* 671년 大友皇子가 太政大臣이 되었다.
* 671년 10월 大海人이 天智의 건강을 빌기 위해 吉野에 들어갔다.
* 671년 12월 天智가 죽었다.
* 672년 6월 22일 병사차발을 명하였다. 7월 2일 大海人은 東國에 들어갔다.
* 7월 23일 大友가 山前에서 자결하였다.
이 672년의 壬申亂은 일본서기 기록상 숙부 大海人과 조카 大友가 싸웠던 열도사상 최대의 내분으로 기록되는데, 大海人과 大友는 장인과 사위의 관계다. 元明과 같이 자란 十市皇女가 大友의 妃다.
또한 大海人은 이 때에 東國에 신세를 졌다. 이를 필자는 東國密約이라 부르고자 한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 이러한 원인이 있기로 天武 死後의 비극들이 생성되는 때문이다.
* 678년 4월 十市皇女가 느닷없이 소리를 지르며 몸을 뒤틀더니 숨을 거두었다.
너희 셋 모두가 정녕 神인가?
神이라면 왜 쳐다만 보고 섰는가?
아니 졸아야 공덕이 많다 하더냐? (⑤만엽 2-156)
十市를 사모했던 古市가 十市의 죽음을 슬퍼하며 조상의 사당에 들어가 三女神에게 호통을 치고 있다.
十市는 天武의 딸이며 大友의 妃다. 정략결혼으로 大友와 혼인하였으나 天武의 딸이기에 살아 남았다. 天武시대, 天武의 딸을 독살 시킬 수 있었던 세력의 정체는 무엇일까?
당시 天武에게 압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세력은 바로 東國과 新羅다. 十市가 大友의 妃이고 天智의 며느리이며 백제가 지탱할 지푸라기로 있었다면 그녀를 제거해야 했다.
그리고 연인 古市와 친구 元明은 그녀의 죽음을 지척에서 바라보아야만 했다.
9)
* 679년 5월 5일 天武는 吉野宮으로 행차하였다. 6일 皇后, 草壁, 大津, 古市, 川島, 忍壁, 志貴 등의 왕자들을 불러 우의를 다졌다.
吉野는 天武와 持統에게 있어 壬申亂을 결심했던 의미 심장한 곳이다. 壬申亂의 경험과 東國密約, 신라의 압박은 天武에게 일종의 컴플렉스로 남았다.
* 683년 2월 大津에게 朝政을 보게 하였다.
후계체제를 皇太子 草壁, 太政大臣 大津의 이원체제로 구상하였다. 두 아들이 협력하면 東國과 신라의 압박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으리란 天武의 구상이다.
* 681년 7월 1일 王이 돌아가시고 文武라 謚號하였는데 그 유언에 따라 東海口의 大石上에 장사하였다. (삼국사기)
왜 이 기사를 끼워 넣는가 하면, 신라 文武王과 열도의 文武가 겹치어 이후의 역사를 설명하기가 난해한 때문이다.
의문 1) 이 시기의 신라는 唐과의 기나긴 전쟁에서 승리하여 국력이 정점에 다다른 시기이다. 東海의 龍이 되어 日本을 견제하겠다는 것은 내심 唐帝와 대등한 文武王의 발상일 수 없다.
의문 2) 文武王의 장례방식은 여태 신라의 국상과는 전혀 다른 형태이다.
의문 3) 奈良정권을 무혈로 인수할 수 있는 東國의 수장이면 어떠한 형태로든 그 영웅담이 나타날만 한데 전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다.
의문 4) 藤原宮 건립에 맞추어 신라 왕자들이 나타난다. 新文王의 東國 文武에 대한 예우는 어쩌면 신라가 藤原宮 을 지어 바치는 정도의 최고 예우이다.
의문 5) 坂本朝臣人麻呂는 일찌감치 그를 明日香에 비유하였고 志貴는 그를 井을 맑히는 日이라 정의하였다.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에 그를 정의할 정도로 명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의문 6) 지귀가 정의한 대로 文武가 죽은 후 그의 후계가 나타나지 않았다. 후대에 藤原氏가 설쳤을 뿐 東國에 있을 법한 반란조차 없었다.
의문 7) 감히 唐의 皇帝軍을 몰살시켜버린 신라, 그러나 681년 7월 文武가 죽고 난 후 唐은 그 책임을 묻지 않았으며 더이상 羅唐간의 물리적 충돌은 없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신라 文武王 = 日本 文武"로 보는 위장망명설이 제기 되었으며 필자 또한 "草壁, 元明의 子"라는 기록 보다는 신라 文武王의 위장망명설을 주시하고 있다.
* 683년 2월 大津에게 朝政을 보게 하였다.
후계체제를 皇太子 草壁, 太政大臣 大津의 이원체제로 구상하였다. 두 아들이 협력하면 東國과 신라의 압박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天武의 구상이다.
* 686년 9월 9일 天武가 죽었다. 11일에 곡하고 24일에 빈소를 차렸다.
* 686년 10월에 大津이 모반을 일으켜 持統은 大津과 동조자 30여명을 체포하였다.
* 686년 10월 3일 持統은 大津을 譯語田의 집에서 자결하도록 명하였다. 大津의 아내 24세의 山邊皇女가 맨발로 역어전까지 뛰어가 함께 자결하였다. 天武의 구상은 그가 죽은지 한달도 못되어 깨어지고 말았다.
大津의 모반은 持統이 외아들 草壁을 위해 大津을 제거한 음모이며, 大津과 절친한 川島의 입을 매개로 꾸며진 것이라는 설이 있다.
大津은 持統의 친언니인 大田姬의 아들이다. 大田姬, 持統, 川島, 山邊 그리고 元明이 天智의 자식들이고 草壁은 元明의 남편이다.
10)
大津이 없는데도 草壁은 보위에 오르지 못하였다.
大津의 제거는 持統에게 부담으로 남았다.
神權의 보수세력은 天智, 天武 이전의 神權체제를 갈망했다.
속이 타는 것은 草壁시대를 꿈꾸었던 坂本朝臣人麻呂였다.
萬葉 속의 坂本朝臣人麻呂와 神權 지식인들의 논쟁은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持統에게 있어 가장 큰 부담은 욕심 때문에 잊고 있었던 東國密約과 신라의 압박이었다.
이러한 양상은 ⑥신라와의 외교관계 기록에서도 나타나는데, 신라사신들의 모습과 草壁의 행동을 보자.
* 687년 1월 1일 草壁이 공경백료들을 거느리고 빈궁에 가서 곡하였다. 5일 빈궁에서 곡하였다.
* 687년 5월 22일 草壁이 빈궁에 가서 곡하였다.
* 687년 8월 5일 持統이 빈궁으로 가서 新穀을 올렸다.
* 687년 9월 9일 持統이 전국 사찰에 國忌의 齋를 를 올리게 하고 10일 빈궁에서 큰 법회를 열었다. 9월 9일은 天武의 기일이다.
* 687년 9월 23일 신라왕(神文王)이 왕자 金霜林, 급찬 金薩慕, 급찬 金仁述, 대사 蘇陽臣 등을 倭國에 파견하여 국정을 보고하고 조공을 바쳤다. 築紫大宰가 天武의 죽음을 알리자 신라사신들은 상복을 입고 동쪽을 향하여 세번 절하고 세번 곡하였다. 12월 10일 持統은 직광삼 路眞人迹見을 신라 사신들의 접견사로 임명하여 향응을 베풀게 하였다. 688년 1월 23일 持統이 金霜林에게 천무의 죽음을 알리자 빈궁을 찿아와 세 번 곡하고 돌아갔다. 2월 2일 築紫大宰가 신라가 바친 공물을 가져와 持統에게 올렸다. 2월 10일 持統은 신라 사신들을 위하여 축자에서 향응을 베풀고 선물을 내렸다. 2월 29일 金霜林 일행이 공무를 마치고 귀국했다.
金霜林은 奈良정권과는 별개로 5개월, 신라에서 보면 반년을 築紫에서 보내었다. 위 기사로 보면 金霜林은 奈良에는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 국정을 보고하고 조공을 바친 것이 아니라 築紫大宰가 중간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공무는 倭國에 관한 건이 아니라 築紫에 관한 건이라는 얘기다.
663년의 백제구원전쟁에서 패하고 667년 도읍을 近江으로 옮겨야만 했던 이유가 唐의 築紫都督府였다면 나당전쟁에서 승리한 신라가 築紫를 접수하는 것은 당연지사라는 얘기다. 덤으로 金霜林은 天武의 죽음과 奈良정권의 지도력 부재라는 정보를 얻었다.
* 687년 10월 22일 草壁은 공경백료, 국사, 국조 및 백성들을 이끌고 大內陵을 만들었다.
* 687년 11월 11일 天武의 시신을 大內陵에 장사하였다.
* 688년 8월 10일 持統이 빈궁에 新穀을 올리고 천무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 688년 11월 4일 草壁이 군신들과 외국의 사신들을 이끌고 빈궁에 가서 애도의 뜻을 표하고 楯節舞를 추었다.
草壁은 668년생으로 추정이 된다. 전술한 기사에서 보듯이 그가 한 일은 제를 올린 일 밖에 없다. 국가나 백성에 대한 功이 전혀 없다는 얘기다.
그러함에도 그의 이름에 尊이 따라 붙는다. 7세기 인물로는 이례적인 일이다.
11)
草壁이 사망할 무렵 내용이 전혀 다른 4개의 日本書紀 기사들을 한데 엮어 보았다.
* 689년 1월 8일 신라에 보냈던 田中朝臣法麻呂가 공무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 689년 1월 18일 持統이 吉野宮에 행차했다가 21일 돌아왔다.
* 689년 4월 13일 皇太子 草壁皇子가 세상을 떠났다.
* 689년 4월 20일 신라왕이 급찬 金道那 일행을 왜국에 파견하여 天武의 죽음을 애도하고 조의를 표하였다.
皇太子 草壁皇子가 세상을 떠났다. 촉망받던 열도의 미래가 사라졌다.
따르던 신료가 사망했어도 호들갑을 떨던 持統이 외아들의 죽음에 비통해 하거나 어떤 조치를 취한 흔적이 없다. 4대사서를 지은 元明도 남편의 죽음에 관하여 기록하지 않았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병사인지도 모르는 불가사의한 草壁의 죽음이 日本史의 중심인 거다.
688년 시점, 백제, 고구려를 병합하고 唐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한 마당에 白村江에서 주저앉은 倭國이 안중에나 있었겠는가? 神文王은 넓혀진 국가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관제를 정비하고 거의 모든 부서의 인원을 늘렸다.
688년 3월 신라로 돌아간 金霜林은 天武의 죽음을 본국에 보고하였을 것이다.
田中朝臣法麻呂의 공무는 天武의 사망에 관한 건이었고 신라는 田中朝臣法麻呂를 통하여 倭國의 후계에 관한 모종의 지시를 전달하였을 터였다.
신라의 지시는 持統과 草壁에게 불리한 것이었고 持統은 황급히 東國의 수장을 만나러 吉野宮에 행차한 거다.
후에 나타날 일이지만 神文王은 天武의 후계를 부정하고 열도를 접수하려 하였다. 여기에도 정당성이 있어야 하겠기에 "東國密約"이 존재했었다고 추정한 거다.
672년 天武의 吉野결단은 국가간의 거래 측면에서 "東國密約" 때문에 고심을 했던 것이고, "東國密約"이라는 정당성 때문에 草壁은 군사적 대응도 하지 못하고 자결을 택한 것이라 추정해 본다.
689년 4월 20일 金道那의 방문은 草壁의 죽음이 金道那의 출발과 함께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天武 死後 열도는 후계문제로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하였다.
草壁측은 서두르지 않았다. 당연히 天武를 승계하는 것은 草壁일 수 밖에 없으므로 느긋하게 天武의 장례나 치르고 보위에 오르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보수 神權 및 백성들의 의견은 달랐다. 그들의 눈에 舒明, 天持, 天武는 잠시 神權에 의탁한 손님이었을 뿐이다.
체제문제가 붉어지면서 당연했던 草壁의 권위가 저울질 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草壁은 天武의 계승권자이지 倭國의 계승권자는 아니었던 거다.
持統의 입장은 또 달라진다.
끔찍히도 아끼던 외아들 草壁의 미래를 위해 大津까지도 일치감치 제거하였다. 이제 草壁에게 보위만 넘기면 되는 것이다. 헌데 金霜林이 築紫를 접수하고 있는 거다.
東國과 신라가 동서로 압박을 가하면서 天武가 군사를 빌렸던 빌렸던 東國密約이 떠오르고 이에 대응하려는 젊은 혈기의 草壁이 떠오른다.
든든하던 天武시절에도 十市皇女를 제거하려 든 신라 아닌가?
草壁의 즉위는 草壁의 목숨을 위태로울 지경에 몰아넣는 꼴이 되는 거다.
이를 해결하고 草壁의 미래를 보장받기 위하여 持統이 할 수 있는 조치가 스스로 외교일선에 나서 몸으로 뛰는 것이었다.
30여차례의 持統의 외유는 그녀가 활달한 성격이어서가 아니라 정권의 안위를 위해 맨발로 나섰던 거다.
草壁을 옹립하려는 草壁의 측근들과 정통 神權을 유지하려는 토착세력은 草壁이 사망할 때까지도 이를 감지하지 못하고 갈등의 골을 파고 있었다.
여덟째 마디에서 내 자라 가지고서는
훑어 집어삼킬 天下이니
그이(天武) 나리워져 생각을 엮어
떡 하니 들어올려 삐꼼히 드러난 山川에
푸른 강 동쪽을 다스릴 마음으로
吉野에 나려가
꽃피워 번성하고자
촉촉이 적셔낸 들판에
그이(天智)의 宮柱 뽑아내고
앉은 밖의 버려진 성에
雄神이 되었는지라
배를 합친 채로 달콤한 시간이 냇물처럼 흐르고
배를 그리한 채로 밀월의 세월을 보내어
철철 넘치는 내를 끊어내고
튼튼한 산도 무너뜨릴 생각이라
珠水 그 격정의 물결이
宮子를 뱉어 잉태함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아니 싫어 계속할 모양일세라. (⑦ 만엽 1-36)
689년 1월 18일 持統의 吉野宮에 행차를, 같잖은 神權 지식인들과의 논쟁에 지친 坂本朝臣人麻呂는 持統의 마지막 결단으로 보고있었다.
天武와 함께 하면서 壬申亂의 결단을 이끌었던 吉野, 天武가 죽은 지 3년째 되는 시점에 天武와 의 추억을 되세기며 사랑하는 외아들 草壁을 보위에 올려 놓기 위한 결단의 시점으로만 알고 있었다.
이에 天武를 雄神에, 持統을 七神에 놓고 草壁의 정통성을 강조하려 이 노래를 지었던 거다.
그러나 持統의 吉野선언은 없었고 草壁의 즉위 건은 수면 아래로 내려 앉았다.
4월 13일 坂本朝臣人麻呂의 草壁皇子가 세상을 떠났다.
아니 볼 수가 없구나.
내 자라 왔노라 하는 雄神들의 긴 자루로
七神을 도와 갖출 세상 만들려거든
雄神받이
들이 집어넣은
그 거칠은 물결 속에
높은 집 지어
높직이 앉게나.
하늘에서 나리길 바라는 양으로
훑어 찾는 모양 세라니
늙고 늙어 부쳐
푸르른 담으로 가리운 七神네는
봄으로는
꽃 꽂은 머리를 해 가지고 있고
가을 쪽으론
단풍잎을 머리에 찌르니
어디 雄神에게 가서 도울 七神이라더냐?
神母에게
빌붙어 크게 다스려 먹을 그네들은
충심을 다하여 봉양하는 척
윗 여울의 아이는
젖무덤을 갈아 뭉게고
아랫 여울의 아이는
오그라진 그물을 찔러 넘는다.
온 산천이
神母를 의지로 하늘을 받쳐 가리우고
(끝내는 神母를)
다스려 대오리다. (⑧ 만엽 1-38)
坂本朝臣人麻呂는 도대체 持統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持統이 草壁을 승인만 하면 뒷 일이 무엇이든 간에 草壁이 감당할 일이었다.
持統이 草壁을 죽인 거다. 어머니의 미적거림이 외아들 草壁을 죽인 거였다.
노래는 持統의 부정을 빗대어 원망이 가득하다.
坂本朝臣人麻呂의 노래들은 이 시점 부터 변화하여 노골적으로 持統을 비판한다.
元明은 독한 여자다. 남편 草壁의 죽음에 관하여 일언반구 내뱉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坂本朝臣人麻呂가 持統에게 퍼부은 독설을 고스란히 萬葉에 실어 놓았다.
12)
* 689년 4월 20일 신라왕이 급찬 金道那 일행을 왜국에 파견하여 天武의 죽음을 애도하고 조의를 표하였다.
* 689년 5월 22일 持統이 金道那를 불러 ⑥관례의 부당함을 책하였다.
* 689년 6월 24일 築紫에서 金道那 일행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 689년 7월 1일 金道那 일행이 신라로 돌아갔다.
신라의 對倭 조문사절은 三位 蘇判 이상이었다. 689년 시점 九位 級찬을 보내었으니 持統이 화를 내었던 거다. 거꾸로 해석을 해 보면 신라는 이미 倭와의 관계를 국가대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건방진 신라를 위해 持統은 찬치를 베풀어야만 했다. 草壁 사망시 부터 3달도 안된 시점, 持統은 외아들을 위해 슬퍼할 겨를 조차 없었다.
* 690년 1월 1일 持統이 즉위하였다.
* 690년 2월 5일 持統이 腋上陂에 행차하여 말을 검열하였다.
* 690년 2월 10일 신라 사문 詮吉, 급찬 北助知등 오십 여명이 귀화하였다.(?)
* 690년 2월 17일 吉野宮에 행차하였다.
* 690년 2월 25일 귀화 신라인 한나말 許滿등 12인을 무장국에 가서 살게 하였다.
* 690년 5월 3일 吉野宮에 행차하였다.
* 690년 6월 6일 泊瀨에 행차하였다.
* 690년 7월 5일 高市皇子를 太政大臣에 임명하였다.
* 690년 8월 4일 吉野宮에 행차하였다.
* 690년 8월 11일 귀화 신라인들을 下毛野國에 살게 하였다.
* 690년 9월 13일 紀伊國으로 행차하였다.
* 690년 9월 23일 신라 송사 대나말 金高訓이 築紫에 들어왔다.
* 690년 10월 15일 築紫大宰에게 金高訓에 대한 향응을 대당유학생에 준하고 선물 역시 조서에 준하라 명하였다.
* 690년 10월 29일 高市皇子가 백료들과 함께 藤原宮止를 답사하였다.
* 690년 12월 3일 金高訓이 일을 마치고 신라로 돌아갔다.
* 690년 12월 19일 지통이 藤原宮止를 돌아보았다. 만조백관이 천황을 보필하였다.
* 691년 7월 3일 吉野宮에 행차하였다.
신라인의 귀화를 이해하기 어려운데, "689년 장차 達句伐로 도읍을 옮기려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고 되었으나 이 기사와의 관련여부는 알지 못한다.
4년 새 남편(天武 686년 9월)과 아들(草壁 689년 4월)을 잃은 사람 치고는 지나치게 왕성한 움직임이다. 상황은 급박하고 持統은 東國에 매달리기 바빴다.
이러한 持統의 모습이 坂本朝臣人麻呂에겐 바람 난 창녀로 비쳐졌다.
어허 이제 잘들 보셨겠지?
그녀
배에 올라 훑으라고 나대는 것이
마누라 꼴이라
구슬을 치매고자 하는 것이거든
十을 들고 다니면서 헹궈달라고
날뛰어 냄일세라. (⑨ 만엽 1-40)
이 시기 高市皇子가 실세로 등장했다.
7세기 말, 天武의 수족처럼 움직이다가 후세에 高市皇子命이라 불릴 만큼 비중있는 있물, 持統정권의 기둥으로 있다가 그가 죽은 1년 후 持統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 그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高市는 天武와 胸形君德善의 딸 尼子娘 사이에서 태어났다.
壬申亂 때, 사실상 일등공신임에도 어머니가 蘇我氏가 아닌 관계로 권력서열이 草壁, 大津에게 밀렸었다.
天武와 大津, 草壁이 사라진 691년 시점, 세상은 高市를 의지하고 있었다.
신라 송사 대나말 金高訓, 그의 일이란 게 무엇이었을까?
그가 있을 때 高市가 藤原宮止를 답사하였고 그가 떠났을 때 持統이 藤原宮止를 돌아보았다.
藤原宮이란 말은 允恭(412-453) 때 사랑하는 후궁을 위해 藤原宮을 짓고 藤原部를 설치한데서 유래한다. 天智가 大化改新(645)에 공이 큰 中臣鎌足에게 藤原이란 性을 하사하여 藤原鎌足이 藤原氏의 시조가 되기도 하였다.
690년 시점, 高市의 주도하에 藤原宮力事가 진행되었다.
藤原宮은 持統이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남편과 아들을 잃고 신라를 상대하기도 버거운 시점에 궁을 짓고 하필 藤原宮이라니, 藤原은 伊蘇와는 전혀 다른 인물의 궁이라는 것이다.
13)
* 691년 9월 9일 川島皇子가 세상을 떠났다.
天智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적자인 建皇子는 벙어리였고 大友, 川島, 志貴는 궁인들에게서 얻었다.
天智의 뜻이 大友에게 머물러 잠시 近江에서 실권을 잡았으나(弘文天皇) 672년 壬申亂에 패해 제거되었다.
川島는 大津과 친하여 함께 자랐으나 持統의 사주로 大津을 고발하였다.
686년 9월 9일 天武가 죽고 686년 10월 3일 大津과 山邊이 자결하였다.
그리고 689년 4월 13일 大津제거의 제1 원인이었던 持統의 욕심, 草壁마저 자결하였다.
川島皇子에게 있어 세상은 비정하였고 삶은 허무한 것이었다.
690년 9월 어느날 川島는 사람들에 이끌려 성황목 앞에 서게 되었고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神께 기도하는 모습을 발치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치렁 늘어진 칠성당 성황목이 있어
가지엔 紙錢物色 몇 대를 엮었길래
조여드는 하 많은 세월에
그렇게 걸려 날리고 있나. (⑩ 만엽 1-34)
691년 9월 9일, 天武가 죽은 지 5년이 되던 그 날에 川島가 자결하였다.
14)
* 692년 2월 11일 군신들에게 명하기를 3월 3일 伊勢國에 행차하려한다 하였다. 中納言 直大貳, 三輪朝臣高市麻呂가 농사일에 방해가 될 것이라 간하였다.
* 692년 3월 3일 三輪朝臣高市麻呂가 관복과 관위를 반납하고 거듭 伊勢國에 행차의 부당함을 간하였다.
* 692년 3월 6일 持統은 군신의 말을 무시하고 기어이 伊勢國으로 행차하였다.
* 692년 5월 23일 정광사 난파왕을 보내 藤原宮지에서 지진제를 지냈다.
* 692년 11월 8일 신라왕(孝昭王)이 급찬 朴億德과 金深薩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 693년 2월 3일 신라왕이 사찬 金江南, 한나마 金陽元 등을 보내어 神文王의 죽음을 알렸다.
* 693년 8월 1일 持統이 藤原宮止에 행차하여 둘러보았다.
三輪朝臣高市麻呂는 왜 자신을 내던지며 持統의 伊勢國에 행차를 막으려 하였을까?
神權은 天武가 죽은 후 도래 雄神정권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도래 선진정권은 그 힘을 향유할 뿐 백성들의 안위에 관심이 없었고 전통 기득권인 神權을 배제하여 점차 불만이 팽배하여 草壁의 등극을 극구 반대하였다.
시간이 흐른 692년 시점, 神權세력도 신라의 힘을 감지하였다.
天武, 大津, 草壁이 사라진 지금 倭를 이끌어 신라와 대항할 영웅, 神權세력이 본 그 영웅은 太政大臣 高市였다.
내 누이의 아들로 하여금
건져내기를 바라는 山한테
高 三神을 내쳤음에도
하루 해를 참지 못하고
내려서서 멀리 바라보고 있구나. (⑪ 만엽 1-44)
石上大臣이 행차에 따라가면서 부른 노래다.
伊勢國에 행차는 다름 아닌 東國의 수장을 만나러 가는 것이었고 神權들에겐 持統의 타협이 정권인수로 보였던 거다.
三輪山은 倭의 상징성이다. 近江遷都시 "三輪山을 버리고 南畝로 간다"함은 三輪山을 朝山으로 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石上神宮은 황실의 무기를 안치하던 戰神의 神宮으로 봐야 옳다. 七支刀가 石上神宮에서 출현하였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15)
* 693년 10월 2일 군신들에게 명하기를 淨冠에서 直冠까지는 갑옷 1영, 큰칼 1구, 활 1장, 병 1매, 안마 1필을 준비하고 勤冠에서 進冠까지는 큰칼 1구, 활 1장, 화살 1구, 병 1매를 준비하라 하였다.
* 694년 1월 16일 五位 이상의 관료가 모인 가운데 활쏘기 대회가 열렸다.
* 694년 1월 18일 六位 이상의 관료가 모여 4일 동안 활쏘기 대회를 하였다.
* 694년 1월 21일 持統이 藤原宮止에 행차하였다.
* 694년 4월 7일 吉野宮에 행차하였다.
* 694년 12월 6일 持統이 藤原宮으로 옮겨가 거주하였다.
* 694년 12월 12일 공경대부를 황궁에 불러 큰 잔치를 열었다.
* 695년 1월 16일 持統이 백관을 불러 향응을 베풀었다.
* 695년 1월 17일 활쏘기 대회를 열어 4일간 계속 되었다.
* 695년 3월 2일 신라왕이 왕자 金良琳, 보명살찬 朴强國, 한나마 金周漢, 金忠仙 등을 보내어 국정을 보고하였다.
持統의 伊勢國 타협은 실패로 끝났다.
持統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면서 藤原宮을 선점하였다. 藤原宮은 持統의 궁궐이 아니라 文武의 궁궐이었던 거다.
藤原宮 완공에 맞춰 신라에서는 왕자급 인사들이 출현한다. 그리고 그들이 신라로 돌아간 기록이 없었다.
藤原宮엔 持統, 文武 두 왕이 동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여덟째 마디에서 한꺼번에 자라온
높이 비치는 해 있어
황자 추슬러 밀어내고 藤井을 내었으니
그이 크게 다스림을 시작 해사리.
埴安(七神)네는 堤위에 있는
그이 있는 쪽으로 바라보아 가야할 것이리라.
해의 본분은 푸르름을 갖추고자 서 있는 것이라서
해의 법으로 크게 다스린다 함은
해는 봄 산일 적에 가서 그 아름다움을 도와 갖추려 있는 고로
산부리에 비추어 아름답게 서 있는 것이라.
해가 뜨고 지며 둘러 크게 다스린다 함은
그 해가 동서의 끝에 머물러 섰을 적에
땅의 양끝을 높여주고 푸르름을 골고루 하고자 서 있음이라.
중천에 떠서 크게 다스린다 함은
해 다운 이름값으로 埴安을 도와 갖추려 있는 것이어서
그 이름 새겨 놓을 땅 위에 서 있는 것이라.
음영을 벗하여 크게 다스린다 함은
떠도는 구름의 삶이라 구름은 곧 멀고
이게 머무름이 너무 높지막한지라
하늘이 다스리는 그림자는 하늘의 몫인 것이다.
해가 다스리는 음영은 물이 하는 것
곧 그 물이 늙었다 하더라도
늘 해가 있음으로 해서
다스리는 샘에는 늘 맑은 물이 흐른다. (⑫ 만엽 1-52)
志貴가 두 왕의 부적절한 藤原宮 동거를 규정하는 노래다.
文武를 日에 놓고 持統을 井에 비유하였다. 日은 높이 떠 井을 비추고 그 맑은 정이 세상을 다스린다.
16)
* 695년 9월 6일 신라로 파견되는 사신들이 길을 떠났다.
* 696년 1월 16일 공경대부 백료들에게 향응을 베풀었다.
* 696년 1월 18일 황궁 남문에서 공경대부, 백료들이 모인 가운데 활쏘기 대회가 열렸다.
* 696년 7월 10일 高市皇子가 세상을 떠났다. 持統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 697년 4월 7일 吉野宮에 행차하였다.
* 697년 8월 1일 文武에게 국사를 모두 맡겼다.
큰딸의 소매를 흔들어 귀찮게 하는
밝은 햇내음의 바람이 그리도 불어
오래 바라던 바 아무소용 없으니
이제 그를 펴내는 것이라. (⑮ 만엽 1-51)
藤原이
大宮都를 더한 값으로
七神과 雄神이 안에서 부딪칠 때
七神인 첫녀가 부대껴서
회피하려 들더라. (⑭ 만엽 1-53)
持統의 양위는 持統의 뜻이 아니었다.
文武는 草壁과 元明의 아들이라 하였다.
대략 草壁이 15세 쯤에 文武를 낳고 文武가 15세 쯤에 즉위해야 윗 구절이 성립한다.
文武가 持統의 손자라면 藤原宮 동거의 갈등도 없었을 것이다.
坂本朝神人麻呂는 文武를 가리켜 伊蘇밖 인물이라고 했다.
文武가 持統의 손자라면 坂本朝神人麻呂는 日神論을 창조할 필요가 없었다.
17)
707년 6월 15일 文武가 죽었다.
志貴의 말 그대로 日의 생애를 마쳐 후사가 없었다.
日이 사라지고 나서 사람들은 다시 井을 찿았다.
707年 7月17日 元明이 神의 큰딸이 되었다.
도래 雄神시대가 끝나고 다시 七神시대로 복귀한 거다.
元明은 좌표를 원했다.
도래시대의 비운이, 본의 아니게 이끌리게 되는 원인이, 기준 좌표가 없는 탓이었다.
사건, 사태의 발생도 문제지만 이를 해결하려는 근본 방향설정에 관한 기준점이 없는 거다.
元明이 과거에 매달려 사서를 발간한 이유는 도래정권의 실패를 거듭 반복할 미래에 대한 지향이었다.
飛鳥를 明日香이라
마을을 갈아 치다니
伊 내어 쇠하여 안 좋다면
쳐다보지도 말거라.
(나는 실체가 없는)연기라도 엮어 안아보련다. (⑮ 만엽 1-78)
가) 元明은 제 부족, 계파를 막론하고 열도를 통합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나) 元明은 과거 황실의 아픔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가)와 나)는 함께 가기 어려운 갈등이다.
가)의 신념은 古事記, 日本書紀, 風土記로 결실을 보았고 열도 민중을 日本民族으로 탄생시켰다.
나)의 기억으로 萬葉을 엮었다. 진솔한 고대의 심상들이 모여 아름다운 인류문화의 유산이 되었다.
"경외로운 아름다움, 부드럽고 조신한 그녀 (畏美柔備 爾)"라는 元明에 대한 고대인들의 평가는 明治 이후 군국주의에 의해 지워졌지만 가까운 장래에 元明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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