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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삼국이 대륙에 있었다면 한반도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monocrop 2011. 9. 30. 01:13

무령왕릉 지석의 새로운 해석

 

                                                                                     성현식 컬럼니스트


무령대왕은 동성대왕의 뒤를 이어 등극한 후 백제의 중흥기를 이어간다. 그런 무령대왕의 릉이 한반도 공주에게 발견됨으로서, 식민사학계는 충청도 전라도 땅은 백제의 강역이라는 반도사관을 기정사실화 해버리는데 결정적인 증거로 철저히 이용한다. 그러나 무령대왕은 정상적으로 죽지 않고 독살당해 시신이 한반도 공주로 옮겨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고구려사초.략>의 안원대제 5년(523년) 기록에 따르면,
사마(무령대왕)의 처 연씨가 사오의 처 백씨를 투기하다가 사마를 독살하였고, 사마의 서자 명농(성왕)은 상을 당한 것을 숨기고 보위에 올랐다. 상이 사마가 제삿날에 사냥한 것을 싫어하였는데, 명농이 과연 아비 죽인 것을 숨겼다. (斯摩妻燕氏, 妬沙烏妻苩氏, 毒殺斯摩. 斯摩庻子明穠秘其喪而自立. 上悪斯摩祭日出獵, 明穠果秘其殺父.)

위 기록에 따르면 사마왕은 부인에게 독살을 당하고, 아들인 성왕이 아버지가 죽은 것을 숨기고 왕위에 올랐으며,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패륜을 계속 숨기려 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아마 무령왕은 독살당한 후 그의 죽음을 감추기 위해 측근들에 의해 한반도로 옮겨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무령왕이 독살당한 후 남의 나라 땅인(동신라의 땅) 한반도로 옮겨져 남의 나라 사람(동신라인)의 손으로 장례를 지내다보니 감히 대왕의 이름인 사마(斯麻)를 지석에 함부로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부왕이 정상적으로 죽었다면 지석에 존호인 무령왕을 안 쓰고 이름(휘)인 사마를 함부로 쓸 자식이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이 내용대로라면 무령왕이 한반도에 묻힐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  공주에서 발견된 무령왕릉의 지석. 대왕의 존호가 아닌 휘(이름)인 사마로 적혀 있고, 돈을 주고 땅을 사서 소유권을 확실히 한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무령대왕은 독살당한 후 남의 나라 땅에 묻힌 것이 역사적 사실로 보인다.  
앞에서 언급한 것을 종합한다면, 무령왕릉은 백제인이 백제 땅에서(대륙백제의 강역인 중국대륙 동부) 조성한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의 손을 빌어 타국 땅에(한반도의 동신라)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보이는 이유 중의 하나가 지석의 명문인 “토왕과 토백 토부모 상하중관에게 이천석을 주고 신지(땅)를 사 묘를 만들고, 권(買地卷)을 작성하노니 앞으로 이 토지에 관해서는 율령에 따르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해둔다.”라는 문구이다.

왕릉 조성에 필요한 토지를 매입하고 매지권을 작성하여 훗날 파묘될 지도 모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조치를 미리 지석의 명문으로 새긴다는 것은 분명 무령왕릉지인 공주가 백제 땅이 아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혹자는 실제적인 토지거래로 돈을 주고받은 것이 아니라, 지신(地神)에게 고하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글쎄 과연 그럴까?

지신에게 고하는데 이천석이란 정확한 금액이 표시되고, 매지권을 작성하여 “이 토지에 관해서는 율령에 따르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해둔다”라는 문구가 과연 필요할까? 이 문구로 인해 필자는 이 토지의 거래는 주술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 일어난 거래로 보고 있다. 그리고 아마 무령왕릉은 지석을 능 안에 넣는 대신 피장자의 신분을 밝히는 비석은 안전상 외부에 세우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결국 이 문구는 “지신에게 돈을 주고 토지를 산 것이므로 소유권이 있으니 어떠한 경우가 있더라도 아무도 이 묘를 건드릴 수 없다”라는 내용으로 혹시 있을지도 모를 파묘로부터 안전을 담보해 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문구가 들어갈 이유가 없다고 본다.  

 

 

    
그리고 지석에는 무령(武寧)이라는 시호를 쓰지 않고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이라고 새겨 놓았다. <삼국사기 백제국본기>에 따르면, 영동대장군은 양나라에서  책봉한 것으로 되어 있고, 사마(斯摩)는 대왕의 휘(이름)이다. 백제인들이 지석에 이런 표현을 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들인 성왕의 주관 아래 정상적으로 장례를 지내고 능을 조성했다면 즉 백제 땅에서 백제인에 의해 능이 조성되었다면 이런 문구가 당연히 들어갈 수가 없다.

<삼국사기>에도 “23년 여름 5월 왕이 죽으니 시호를 무령으로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夏五月 王薨諡曰武寧) 참고로 김부식은 삼국의 모든 왕의 죽음을 崩이라 안쓰고 薨이라 썼다. 왜 지석에 523년 왕의 시호인 무령을 안쓰고, 왜 굳이 양나라로부터 책봉받은 벼슬인 영동대장군과 왕의 이름인 사마(斯麻)를 썼을까? 이유는 단 하나 뿐으로 공주의 무령왕릉은 백제인이 능을 조성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을 수가 없다. 

고구려 장수왕은 부왕인 광개토태왕 비문에 다음과 같이 새겨놓았다. 아래에 다시 언급한 무령왕릉 지석의 문장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전략).전하여 17대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에 이르렀다. 18세에 천자의 자리에 오르니,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고 불리셨다. 그 은혜로움이 황천(皇天)과 같고, 무예와 위엄은 사해(四海)에 떨치었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평안히 그 생업(직업)에 종사할 수가 있었다.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번성하여, 오곡이 풍성하였다. 삼십구세에 승하하시니, 갑인년 9월 29일에 안장하고 비석을 세워 그 공훈과 업적을 기록하여 새겨서, 후세에 보이는 것이다.”

(무령왕릉 지석의 내용)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던 계묘년(523년) 5월 7일에 돌아가시고, 을사년(525년) 8월12에 올려 모셔 대묘에 기록하기를 이상과 같다. 병오년(526년) 12월 백제왕대비가 수를 다해 돌아가시니 서쪽 땅에 모셔졌다가 기유년(529년) 2월 12일에 개장하여 다시 대묘를 만들었다. 전일만문(錢一萬文)의 우건(右件)에 대하여 을사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은 전건(前其件)의 전(錢)으로 토왕과 토백 토부모 상하중관에게 이천석을 주고 신지(땅)를 사 묘를 만들고 권(買地卷)을 작성하노니, 앞으로 이 토지에 관해서는 율령에 따르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해둔다.“

위의 광개토태왕 비문과 무령왕릉 지석 명문의 차이는 뚜렷하다. 광개토태왕 비는 아들인 장수왕과 고구려 백성들에 의해 고구려 땅에서 능지가 조성이 되었고 온 국민이 추모하는 마음으로 비석을 세웠기에 시호와 연호가 당연히 들어가 있고 온통 태왕을 찬양하고 존경하는 문구뿐이다. 여기서 호태왕의 휘인 담덕(談德)이란 단어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유물인 '금동신발'

 

 

 

 

 

 

 

 

 

 

 

 

그러나 무령왕릉은 왕이 독살 당한 사실을 아들(성왕)이 감추느라고 쉬쉬하다보니 결국 타국에서 다른 나라사람에 의해 능지가 조성되었기 때문에, 양나라에서 일방적으로 책봉한 벼슬(영동대장군)과 왕의 이름(사마)이 함부로 쓰이고, 업적 찬양의 문구는 없고 지극히 사무적으로 매지권을 작성해 안전권을 확보한 문구만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령왕의 죽음에 관한 남당의 고구려 사략/초의 기록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남당의 고구려 사략/초보다 무령왕릉의 의문점을 속 시원하게 밝혀줄 기록이나 다른 유물이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한반도엔 어떤 나라가 있었나?

고구려.백제.신라의 주무대가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이라고 하면 많은 한국인들은 오히려 믿기 싫어하며, 역사의 진실에 대해 말하는 필자의 글에 심하게 항의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국민들 가슴 속에는 뜨거운 애국심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으로, 그래서 그런지 망국의 반도사관이 오히려 국민들에게 호응을 받는지도 모르겠다.

민족사학자들의 이론은 한반도가 삼국의 주 활동무대가 아니라는 것이지 한반도가 삼국의 영토가 아니란 말이 아니다. 한반도는 삼국의 변두리 강역으로 전쟁이 없는 평화지대 즉 대대로 신성한 소도(蘇塗) 지역으로 보아야 한다. 한반도에 무수히 널려 있는 고인돌이 그 증거이기도 하며, 한반도에서는 고대 전쟁 유물이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즉 우리 조상들은 중국대륙의 동부 평야지대에서 활동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한족에게 밀려 변방인 한반도와 만주로 쫓겨 들어온 것으로 본다. 그 시기는 고려 초로 보이며 근세조선 때까지도 만주를 잃은 적이 없었다. 명나라 사서인 <명일통지>에도 분명 “조선의 땅은 동서 이천리 남북 사천리이다.”라고 명기되어 있다. 이 기록은 간도(만주)가 조선의 영역임을 분명히 말해주는 물적 증거인 것이다.  

 

 

  
한반도는 대대로 단군조선의 영역이었다가 단군조선 이후 BC 195년 최숭이 낙랑국을 세워 한반도는 낙랑국의 강역이 되었다가, A.D 32년 낙랑국이 고구려에게 망하자 한반도는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으며, A.D 503년 신라의 지증왕이 즉위하면서부터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속국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자립국가의 길을 걷는다. 무령대왕이 붕어한 A.D 523년 경에는 한반도는 동신라의 강역으로 보인다. 
 

▲ 신라의 전신인 사라가 백제의 속국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양직공도

 

 

 

 

 

 

 

 

 

 

 

 

 

 

 

 

 

 

 

 

 

 

 

   

신라는 건국 이래 국호를 정하지 못하고 사로(斯盧) 사라(斯羅) 신라(新羅) 등으로 불리고, 존호(尊號)도 왕이 아닌 마립간(麻立干) 이사금(尼師今) 등으로 불렀다. 22대 지증왕 4년(A.D 503년)부터 국호를 신라라 하고, 속국에서 벗어나 신라국왕(新羅國王)이란 존호를 사용한다. 신라의 시호법이 이 때 비롯되어 왕이 죽자 지증이란 시호를 처음 쓴다. 


신라는 503년 이전에는 자주적인 독립국가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호태왕비문에 따르면 고구려 전성기인 광개토태왕 시절부터는 고구려의 속국이었다가, 백제의 전성기인 동성대왕이 들어서면서부터는 대륙신라는 백제의 속국으로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는 양나라의 공직공도로서 백제 사신의 그림과 함께 백제를 설명하는 글에 보면,  


“그 나라에는 22담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와 종족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 주변의 소국으로는 반파, 탁, 다라, 전라, 사라(신라), 지미, 마연, 상기문, 하침라 등이 부속되어 있다. (謂邑檐魯 於中國郡縣 有二十二檐魯, 分子弟宗族爲之. 旁小國有 叛波, 卓, 多羅, 前羅, 斯羅, 止迷, 麻連, 上己文, 下枕羅等附之.)”는 문구가 있어 신라가 당시 백제의 속국(부용국)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한반도에서는 동신라가 원래부터 속국으로 존재했다기보다는 원래 고구려의 영역이었는데 지증왕시기부터 한반도에서 신라세력이 커져 고구려로부터 자립하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한반도에서 A.D 450년 이후의 고구려 유물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아울러 지증왕 이전의 신라 유물도 나오지 않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남당선생의 고구려 사략/초의 기록을 연결시키면 무령왕릉의 의문점이 풀리게 된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백제 성왕이 두려운 무령왕의 추종세력들이 독살당한 왕의 시신을 몰래 빼내, 얼마 전까지 속국이었던 대륙신라에게 장례를 부탁했던 것 같다. 대륙신라 역시 성왕에게 탄로날 것을 염려해 한반도의 동신라에게 무령왕의 장지를 부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가설은 물론 기록에 근거를 두었지만 필자의 추정일 뿐 역사의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 아니고서는 현재 무령왕릉에 대한 의혹을 해소할 수가 없다. 분명 백제의 주 활동무대인 대륙에 있어야 할 왕의 무덤이 느닷없이 한반도 공주에서 발견된 이 기이한 일을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항간에서는 “무령왕릉은 가짜다. 누군가가 고의로 지석을 만들어 넣은 것이다”라고까지 말했던 것이다. 

삼국의 주무대가 대륙이라고 해서 한반도에 삼국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 보았다시피 이 살기 좋은 금수강산 한반도에는 고조선 마한의 도읍 --> 낙랑국의 도읍 --> 고구려의 영역 --> 동신라의 영역으로 대를 이어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백제는 장기간이 아닌 짧은 기간 담로라는 형태로 뭔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래서 삼국의 왕 중 유일하게 무령왕릉이 한반도 公州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 근거가 <삼국유사>의 무왕편에 나오는 무강왕이라는 칭호인데, “고본(古本)에는 무강(武康)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왕이 없다.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그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중략)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 아이 때 이름은 서동이다 (이하생략)”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서에 기록하면서 정식 왕이 된 인물을 과부의 아들이라고 함부로 쓸 수는 없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무강왕을 무왕이라고 단정했으나, 주해자는 무녕왕이 아니겠냐는 견해이고, 아니면 혹자는 무강왕은 백제의 본국왕이 아니라 한반도 백제 담로의 총독(왕)이 아니겠냐는 하는 것이다. 여하튼 백제가 한반도에 흔적을 남긴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로 본다.

그리고 남당 고구려 사략/초를 번역한 청송 김성겸선생은 <산해경>과 <남서>에 언급되어 있는 평화지역이며, 함초가 나는 지역이며, 불교가 전래된 동쪽지역인 부상국(扶桑國)이 한반도이며 부상국=우산국(于山國)일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여하튼 부상국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되어야 할 과제라고 본다. 

亡國的 <半島史觀> 을 믿으면 안되는 이유

식민사학계는 무령왕릉의 발굴을 계기로 더욱 더 매국적인 반도사관을 확장지어 버린다. 자신들의 엉터리 이론을 무령왕릉이란 확실한 유물이 뒷받침해 주니 이거보다 더 낭보가 어디 있었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독자들은 이런 의문을 가질 수가 있다. 필자가 툭하면 식민사학이니 반도사관이라는 용어를 자주 쓰는데 그게 그렇게 매국적인 것인지 반문할 수 있다.


반도사관은 일제가 우리의 민족혼을 빼기 위해 만든 역사이론이다. 당시는 일제치하였으니 그럴 수도 있다 하겠으나, 문제는광복 62년이 지난 오늘까지 국사교과서에 식민사관의 이론을 버젓이 실어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민족혼을 빼고 있으니 이 나라 식민사학계는 일제의 추종자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


▲  망국의 한국의 식민사학계가 주장하는 한사군의 위치도

 

 

 

 

 

 

 

 

 

 

 

 

 

 

 

 

 

 

 

  

그것은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해 친일파를 중용한 이승만에 의해 기용된 이병도/신석호/홍희로 대변되는 국사학계의 큰 독나방 몇 마리가 뿌리고 간 독가루가 이 나라 역사를 온통 흑탕물로 뒤범벅 시켜놓았기 때문이다. 학교의 강단을 점령한 그 후학들은 아직도 똑같은 독가루를 온 국민들에게 뿌려대고 있다, 여하튼 조상의 역사를 좀먹는 나쁜 독나방들을 박멸하기 위해서는 특효약의 개발이 절실하다는 것을 느낀다. 

왜 국민들이 반도사관을 절대로 신봉해서는 안 되는 이유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보겠다. 역사를 거꾸로 올라가 보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백제의 주무대(수도)가 한반도라면 마한으로 대변되는 삼한(三韓 마한 진한 변한)이 한반도 남부란 이야기이다. 나중에 삼한으로 발전하는 한(韓)을 세운 왕은 번(기자)조선의 마지막왕인 기준으로, 기준은 위만에게 패해 수도를 넘겨주고 남하하여 한을 세운다.

그렇다면 기준의 번(기자)조선은 한반도 남부인 한의 북쪽이므로 한반도 평양에 있었다는 것이 되며, 이 말은 위만조선이 평양에 있었다는 말과 같고, 위만조선이 망하고 그 자리에 한사군이 섰으니 결국 한사군은 북한 지역 특히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이론과 같은 것으로 이것을 반도사관이라고 한다.

일제가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만든 식민반도사관의 이론이란 다음과 같다.  고조선의 단군은 국가가 아닌 신화이고, 북한 땅에 중국인이 세운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나타나고,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이민족인 한나라가 식민지인 한사군을 설치한다. 따라서 조선의 조상들의 역사는 이민족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시작되므로, 지금은 천손민족인 천황의 일본이라는 이민족에게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그들이 주장한 이론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일본은 <일본서기>에만 나와 있는 신공왕후의 삼한정벌론(三韓政伐論)과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우기고 있다.(임나일본부설은 요즘 거의 폐지됐지만) 결국 반도사관의 주제는 북한 땅에는 한사군이 있었기에 중국 땅이고, 남한에는 신공황후가 삼한을 정벌했기에 일본 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땅은 어디 있는가? 그래서 반도사관은 무서운 이론이며, 망국적인 식민반도사관을 추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식민사학계는 반도사관을 정착시키기 위해 기자조선/위만조선을 대동강 평양으로 끌고 오려다보니, 진조선/막조선이 발전한 북부여와 낙랑국을 우리 역사에서 지워버리는 패륜을 범하게 된다. 번조선의 수도는 하북성 창려(진황도)였다. 그곳을 위만에게 빼앗기자 기준이 어디로 남하했느냐가 우리 역사의 최대 핵심 포인트이다. 왜냐하면 망국의 반도사관의 핵심은 기준이 한반도 남부로 내려가 삼한을 건설했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기준이 남으로 내려 간 곳은 한반도 남부가 아니라 번조선의 영토였던 중국대륙 동부평야지대의 중심인 황하와 회수 사이로 간 것이었다. 그 땅은 기준의 조상인 기자가 살았던 하남성 서화(西華) 땅과 죽어서 묻힌 안휘성 몽성(蒙城) 땅과 가까운 곳이다. 기준은 비록 수도인 창려를 위만에게 빼앗겼지만 자기와 연고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 한(韓)을 세웠던 것이다. 

 

 

결국 이것이 유.연.제.노.오.월 지역에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존재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한에는 50여국의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이중 비미국과 구노국은 왜(倭)로 발전되고, 사로(泗盧)-->사로(斯盧)-->신라(新羅)로 되고, 백제(伯濟)-->백제(百濟)로 발전된다.

반도사관은 역사적 사실도 아닐뿐더러 이렇듯 우리의 강역을 이민족에게 내어 주어야 하는 무서운 망국의 이론인 것이다. 역사적 진실에 근거해 중국대륙 동부가 원래 우리의 강역이었음을 알리는 것만이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황국사관을 무력화시키고 분쇄하는 길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 하루빨리 식민사학을 추방하는 길만이 이 나라와 민족을 살릴 수 있는 길임을 국민들은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망국의 반도사관을 이 땅에 확정시키는 유물로 철저히 이용된 것이 바로 공주에서 발견된 무령왕릉이었다. 이제 새로이 무령왕릉 지석을 해석함으로서 반도사관은 허구라는 것을 만천하에 밝히는 바이다.

 

 

 
 
 
출처 : 슈뢰딩거의 고양이
글쓴이 : 레이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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