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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貊)족과 동호(東胡)는 한민족의 아류인가

monocrop 2011. 9. 30. 11:45

 

 

 :: 네티즌 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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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명 (2011-09-28 23:58:26, Hit : 348, Vote : 1
 맥(貊)족과 동호(東胡)는 한민족의 아류인가


<맥(貊)족과 동호(東胡)는 한민족의 아류인가>

《상서》에 이르기를 무왕이 상(商)을 정벌하자 화하(華夏)와 만맥(蠻貊)이 모두 다 복종하였다. 라는 기록으로 만맥(蠻貊)이 등장 한다.
물론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상서는 58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周) 당시의 원본이 아니라 동진(東晉)의 매색(梅賾)이라는 유학자가 조정에 바쳤다는 금문상서본을 기초로 하고 있는데, 대체로 그의 위작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이나 그 진위여부를 떠나서 우리가 알고 싶어 하던 맥(貊)족에 관한 처음 기록이라는 것에 의의를 둔다.

<공자세가>에 “옛날 무왕이 상나라를 멸하고 구이(九夷)와 백만(百蠻)의 땅으로 통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구이와 백만의 이족들로 하여금 각기 그 지방의 특산물을 가져와 조공으로 바치게 하여 각기 그들의 직무와 본분을 잊지 않도록 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상나라 당시 구이(九夷)가 등장 하는데, 구이(九夷)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은(殷)나라 시대 북쪽으로 북이,우이,도이로 맥(貊)의 종족으로 보며 동쪽으로는 래이,회이,서이,남이로 동이(東夷)라고 불리워 졌다. <상서>의 만맥(蠻貊)은 <공자세가>의 구이(九夷)중 북이,우이,도이 등과 서로 뜻을 같이 한다고 본다. 따라서 주(周)무왕 당시 맥(貊)의 종족은 위치상 북동쪽에 있었음을 추론 할 수가 있겠다.

기원전 850년경 강(羌)족의 침입으로 주(周)는 낙양으로 동천하게 되는데 이를 동주(東周)라 한다. 동주(東周) 당시 낙양 북동쪽 세력 분포를 간략하게 서술하면 今 산서성 곡옥지역 주변의 당진(唐晉)이 있고 그 북쪽 今 산서성 적태산 부근과 멀리 태원에서 부터 今 하북성 석가장시 지역까지 적(狄)족들이 할거 했으며, 今 하남성 안양지역 주변의 위(衛)와 연(燕)이 혼재하여 위치 했다. 또한 今 하남성 동창부에서 今 산동성 평음 지역까지 강제(姜濟)가 위치 하였다.

<춘추좌전>에 이르길 기원전 706년
北戎伐齊(북융벌제) : 북융이 제나라를 공격했으므로
齊使乞師于鄭(제사걸사우정) : 제나라 임금은 정나라에 군대를 요청했다
鄭大子忽帥師救齊(정대자홀수사구제) : 그래서 정나라 태자 <홀>은 군대를 거느리고 제나라를 구원하여
大敗戎師(대패융사) : 북융의 군대를 대파하고
獲其二帥大良小良(획기이수대량소량) : 북융의 장군 <대량>과 <소량> 두 사람과
甲首三百(갑수삼백) : 무장한 군사 300명을 체포하여
以獻於齊(이헌어제) : 제나라에 바쳤다

상기 기록에서 北戎(북융)은 어떤 종족인가 제나라 북쪽의 융이라 함은 언뜻 보아서는 맥(貊)의 종족으로 볼 수 있으나 제나라가 정(鄭)나라 군대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볼 때 낙양 동쪽 맹진에 위치한 정나라 군대가 제나라 북쪽으로 진군 하기에는 거리가 워낙 멀기도 하고 위나라 지역을 가로 질러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또한 제나라는 동쪽의 래이(萊夷)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던 와중이라 今 산동성 제남부까지 진출을 하지 못했고 그 북쪽은 제수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여건상 맥(貊)의 종족으로 볼 수가 없다. 今 하북성 석가장시 지역의 적(狄)족일 가능성이 가장크다. 다른 가능성을 제기하면 백이.숙제의 나라인 고죽국(孤竹國)이다.

적(狄)족일 가능성을 가장크게 생각한 이유는 기원전 661년 적(狄)족은 今 하북성 석가장시 남쪽의 소국 형(邢)을 공격하는데 다급한 제나라와 위나라는 형나라를 구하기 위해 출전 하지만 패하고 물러난다. 당진(唐晉)의 헌공은 군사편제를 2군으로 만들어 적(狄)족의 공격에 대비한다. 적(狄)족은 계속 남하하여 기원전 660년 형택(熒澤)에서 위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멸했다.
이렇듯 기원전 660년 까지 고대 중화족의 활동 범위는 황하 북쪽까지 미치지 못했고 황하 북쪽은 적(狄)족들의 활동 지역인 것이다. <모시정의>에 “노 희공(魯僖公)때 맥이 노에 가까웠다.”라는 기록과 <관자(管子)>에 “제 환공(齊桓公)이 승거(乘車)의 회합을 세 번 열고 병거(兵車)의 회합을 여섯 번 열어 제후들과 아홉 번 회합하여 천하를 통일하였다. 북쪽으로는 고죽(孤竹)ㆍ산융(山戎)ㆍ예(穢)ㆍ맥(貊)ㆍ구진하(拘秦夏)까지 이르렀다.”라는 기록은 漢대 이후 사가들이 적(狄)족과 맥(貊)족을 구분 하지 못한 결과이다.

물론 기원전 660년에 맥(貊)족이 존재하지 안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적(狄)족들의 활동사항은 상세하게 기록된 반면 맥(貊)족과 고대 황하족들의 접촉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당시의 맥(貊)족은 음산산맥에서 今 산서성 大同부 지역까지 넓게 분포 하였던 것이다.
기원전 5세기경에 들어와서 당진(唐晉)은 점차적으로 적(狄)족들을 공격하여 북쪽으로 밀고 올라 갔으므로 이에 적(狄)족은 당진(唐晉)에게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구하게 되는데 아래 기록을 보자

<춘추좌전 569년>
無終子嘉父使孟樂如晉(무종자가부사맹락여진) : 무종국의 임금 가보는 맹약을 사자로 진나라에 보내어
以請和諸戎(이청화제융) : 융의 여러 나라와 화해 해줄 것을 요청하게 하였다
晉侯曰(진후왈) : 그러자 진후는
使魏絳盟諸戎(사위강맹제융) : 위강에게 명하여 융의 여러 나라와 화목을 맹약하게 하였다.

상기 기록을 보면 無終國이 처음으로 등장하며 今산서성 태원지역에 활거하던 적(狄)족의 대표종으로 볼 수 있다. 이후 기원전 541년 진(晉)의 중행목자에게 태원에서 크게 패하면서 일부는 황하 상류 서쪽으로 이동하여 훗날 임호(林胡)의 융으로 불리워지고, 일부는 今산서성 대동부를 장악하고 있던 맥(貊)족에 흡수된 것으로 생각된다.
기원전 5세기경 맥(貊)족에 대한 풍습을 알수 있는 유일한 기록으로 《맹자》에 이르길 “맥에는 백곡이 자라지 않고 오로지 기장만이 자란다. 성곽, 궁실, 종묘와 제사 지내는 예가 없으며, 제후의 폐백과 음식에 관한 법도가 없으며, 백관과 유사(有司)가 없다. 그러므로 세금을 20분의 1만 거두어도 풍족하다.”라고 하였다.
맹자의 기록에 보면 맥(貊)족은 이동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수 있으며, 백관과 유사가 없다고는 하였지만 세금을 거두었다는 기록을 보면 부족장을 중심으로 여러지역에 분포 하였음을 추론 할 수가 있겠다.

기원전 4세기경 今 하북성 석가장시에서 今 하북성 하간부 지역까지 차지하고 있던 적(狄)족은 중산국(中山國)을 세우고 진(晉)과 치열한 투쟁을 벌인다. 1974년에 하북성 평산현 중산묘에서 청동도기까지 발견되었는데 발굴된 중산후월(中山侯鉞)에는. "天子建邦中山侯惟, 作玆軍鉞以警厥衆(천자가 봉토를 세운 중산후 유, 이 군월로써 그 무리에게 경계삼는다)"란 글이 적혀 있었다.
발굴된 鉞이라고 하는 도끼의 일종이며, 거기에 적힌 소유주의 이름에 따라 ‘중산후월(中山侯鉞)’로 불린다. 같이 발견된 청동기에 조상의 이름으로 武祖, 桓祖 등이 있고, 《사기 조세가》 헌후10년(기원전 414)의 기록에 “중산 무공이 처음으로 즉위하였다(中山武公初立)”이란 기록이 있음을 보아, 이들 유물은 戰國시대 적(狄)족의 중산국(中山國)이 존재하였던 것을 입증한다.

《사기 조세가》기원전 453년 기록에 “조양자(趙襄子)가 구주산(句注山)을 넘어 병(幷)과 대(代)를 격파하고 호(胡)와 맥(貉)에 임하였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고대 황하족들이 맥(貊)족들의 거주지까지 이르렀다. 임호(林胡),누번(樓煩)을 호(胡)라 생각되며, 대(代)지역 북동쪽은 맥(貊)으로 규정 할 수가 있겠다. 이 당시 황하 북동쪽의 세력 분포를 간략하게 서술하면 今 산서성 태원에서 상당을 넘어 今 하북성 환단 지역까지 조(趙)가 차지 하였으며, 今 하북성 상산에서 남쪽으로 今 하북성 직정부 지역까지 중산(中山)의 선우인들이 웅거 하였고, 今 하북성 하간부 지역을 중심으로 연(燕)나라가 서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후 기원전 414년 중산(中山)의 여러부를 통일한 무공(武公)이 새로 섰다. 기원전 408년 위문후(魏文侯)가 적(狄)족의 별종인 중산을 1차로 멸한다.

기원전 3세기로 접어들면서 황하 북쪽의 세력 판도가 크게 바뀌고 있었다.
<사기 조세가>에 “기원전 378년 조(趙)는 제나라를 공격했다. 이어서 제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하여 조나라가 연나라를 구했다. 기원전 377년 중산국(中山國)과 방자(房子)에서 싸웠다. 기원전 356년 제(齊)와 송(宋) 두 나라와 평륙(平陸)에서 회동하고 연(燕)나라와는 아(阿) 땅에서 만났다. 기원전 344년 제나라를 공격하여 고당(高唐)을 빼앗았다.” 라는 기록으로 당시 조(趙)는 연(燕)과 합종하여 중산국(中山國)과 제(齊)의 연합 세력과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것을 알수가 있다. 그러나 今산서성 태원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조(趙)의 동북쪽에 활거하던 맥(貊),호(胡)족들과 경계하고 있던 조(趙)와 연(燕)등 황하족들과 어떠한 접촉 기록도 볼수가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기 소진열전>에 보면 기원전 334년 연나라에 들어간 소진은 연문후(燕文侯)를 만나 6국합종연횡을 성사 시키고자 설득하는 대목 중에“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朝鮮), 요동(遼東)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林胡), 누번(樓煩)이 있습니다. 또한 서쪽에는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이 있으며 남쪽에는 호타(嘑沱)와 역수(易水)가 있습니다. 라는 기록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소진의 말대로 연(燕)나라의 강역을 추정해보면 산서성 대(代)지역에서 하북성 북경지역까지 사방 수천리의 강역을 가진 대국으로 볼수 있으나 <전국책 제책(齊策)> 기록중 소진(蘇秦)의 발언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지난날 중산국은 나라의 군대를 모두 동원해서 연나라와 조나라를 맞아 남쪽 장자(長子·산서성 진양·晋陽) 땅에서는 조나라를 패배시키고, 북으로는 연나라를 패배시켜 그 장수를 죽였습니다. 중산국은 겨우 천승(千乘)의 나라였는데, 두 만승(萬乘)의 나라를 이겼습니다.”라는 기록으로 볼때 기원전 334년경 연(燕)은 중산국(中山國)과 제(齊)의 연합세력에게 크게 밀려 왕조를 유지하기에 급급했던 상황으로 같은 처지였던 조(趙)와의 연대에 목을 메는 지경이었다. 따라서 소진이 합종연횡을 성사 시키기 위해 연문후(燕文侯)을 설득하기 위한 미사어구에 불과한 것으로 연(燕)의 강역을 필요 이상으로 크게 표현한 것이다. 결국 조(趙)와 연(燕) 북쪽과 동쪽에 있던 맥(貊),호(胡)족을 공격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무령왕 10년 기원전 315년 연(燕)에서 큰 사건이 벌어지는데, 상국 자지(子之)가 군주 자리에 오르고, 그 군주는 거꾸로 자지의 신하가 되었다. 조왕이 공자 조직(趙職)을 한(韓)나라에서 데려가 연왕의 자리에 올리기 위해 장군 악지(樂池)로 하여금 호송하도록 했다.라는 기록 이른바 자지(子之)의 난 이다.
<사기 연소공세가>에 이르길“자지가 왕권을 차지한 지 3년이 되는 해에 태자와 신하들이 변란을 일으켰고, 연나라는 수개월간 혼란에 빠진다. 이때 맹자가 제나라 왕에게 ‘연나라를 빨리 치라’고 간언한다.”제나라 선왕은 즉시 5도의 군사와 북지지중(北地之衆·북방의 군사)들을 이끌고 연나라를 공격 대승을 거둔다. 이때 연왕 쾌와 만 2년간 왕위에 올랐던 자지가 죽는다. 라는 기록을 살펴보면 연나라를 공격 할 때 북지지중(北地之衆) 북방의 군사들을 동원 하였다고 했는데, 이 군사들의 정체는 중산왕릉에서 발견된 철족대정 명문의 내용을 살펴보자.

“옛날에 연나라 왕 쾌가 재상인 자지(子之)에게 왕위를 내줘 나라를 잃고 그 스스로도 목숨을 잃었다.~이에 어린 왕을 보좌한 (중산국) 재상 사마주가 삼군지중(三軍之衆), 즉 군대를 이끌고 연나라를 토벌, 500리 땅과 성 10곳을 빼앗았다.”
바로 사기에 기록된 ‘북지지중’즉 북방의 군사라는 표현이 중산국의 군사일 것이다. 중산왕릉 명문에 나온 삼군지중과 사기의 북지지중이 일맥상통 하기 때문이다.

연(燕)의 붕괴로 위기의식을 느낀 조무령왕은 기원전 306년 백성들에게 호복를 착용하라는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사기 조세가>에 이르길 “왕이 이윽고 공자성의 집을 방문하여 호복의 착용을 청하며 말했다. 우리 조나라의 동쪽에는 하수(河水)와 박락(薄洛)이 있어 제(齊)와 중산국(中山國) 두 나라와 같이 국경으로 삼고 있으나, 그것을 지킬 선박이나 시설도 없습니다. 동북쪽의 대(代)에서 상산(常山), 상당(上黨)에 이르기까지, 동쪽으로는 연(燕), 동호(東胡)와 접하고 있으나 그들을 막을 기병(騎兵)과 사수(射手)가 없습니다. 또한 과인은 선박과 그 시설도 없이 물가에 의지하여 살고 있는 백성들로 어떻게 하수(河水)와 박락수(薄洛水)를 지킬 것인지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호복(胡服)으로 복식을 바꾸어 입혀 기병(騎兵)과 궁수(弓手)를 양성하여 연(燕),삼호(三胡),진(秦),한(韓)과의 국경을 방비하고자 하는 뜻입니다.”

상기 기록중 중요한 문구가 있는데 “동쪽으로는 연(燕), 동호(東胡)와 접하고 있고, 호복(胡服)으로 복식을 바꾸어 입혀 기병(騎兵)과 궁수(弓手)를 양성하여 연(燕), 삼호(三胡), 진(秦), 한(韓)과의 국경을 방비하고자 하는 뜻이다.”라는 기록 한 집안처럼 대하던 연(燕)을 적으로 보고 있다. 또한 연(燕)과 동호(東胡)를 나란히 기재한 것으로 보아 자지(子之)의 난이후 연(燕)은 동호(東胡)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당시부터 맥(貊)은 보이질 않고 동호(東胡)로만 기록 하였는데, 이것은 동호(東胡)가 맥(貊)족 이라는 것을 강하게 반증한다.

기원전 305년 무령왕은 중산국을 대대적으로 공략하였고, 서북쪽으로는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을 복속 하였다. 무령왕은 계속해서 조희(趙希)에게는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의 군사들을 지휘하게 하여 조나라의 깊은 험지를 통과하여 곡양(谷陽)으로 나와 같이 합류한 다음에 계속 전진하게 하고 조나라 본국의 군사를 이끌고 중산국으로 쳐들어간 무령왕은 호성(鄗城)을 취하고 석읍(石邑), 봉룡(封龍), 동원(東垣)을 점령했다. 드디어 혜문왕 3년 기원전 296년 중산국을 멸하고 그 왕을 부시(膚施)에 옮겨 살게 한다.
2차로 중산국이 멸망하던 당시 중산의 악의(樂毅)는 연(燕)소왕에게 구원을 청하지만 거절한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무령왕이 죽은 해인 기원전 294년에 조혜문왕은 막(鄚)과 역(易) 땅을 연나라에 주었다. 이는 동호(東胡)의 영향력 아래 있던 연(燕)을 조(趙)의 영향하에 둠으로써 제(齊)와 동호(東胡)를 견제하기 위한 사전 포석인 것이다.

기원전 2세기로 넘어오는 당시 지금까지 논란의 중심에 있는 진개(秦開)의 동정에 대해 짚고 넘어가보자.
<사기 흉노열전>에 이르길 “연(燕)나라에 현장(賢將,현명한 장수) 진개(秦開)란 이가 있어 호(胡)에 볼모로 갔는데 호(胡)가 그를 매우 신임했다. (연나라로) 되돌아와 동호(東胡)를 습격해 격파하니 동호(東胡)가 천여 리를 물러났다. 형가(荊軻)와 함께 진왕(秦王)을 암살하려 했던 진무양(秦舞陽)이란 이가 진개(秦開)의 손자다. 연(燕)나라 또한 장성(長城)을 쌓아 조양(造陽)에서부터 양평(襄平)에 이르렀고 상곡(上谷),어양(漁陽),우북평(右北平),요서(遼西),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해 호(胡)를 막았다.” 라고 했으며 < 鹽鐵論 >에 “연국이 동호를 습격하여 1000 리를 쫓아내고 요동을 넘어 조선을 공격했다.”라고 하였다. 또한 《위략(魏畧)》에 “기자가 죽은 뒤에 조선후(朝鮮侯)는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연(燕)나라가 스스로를 높여서 왕이라 하면서 동쪽으로 치려고 하는 것을 보고는 또한 스스로 왕이라 칭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연을 쳐서 주나라 왕실을 높이 받들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대부(大夫) 예(禮)가 간하자 중지하였다. 그러고는 예로 하여금 연나라로 가서 유세하게 하니, 연나라도 멈추고서 공격하지 않았다. 그 뒤에 자손들이 점점 교만해지자, 연나라에서 장수 진개(秦開)를 보내어 서쪽 지방을 공격하여 2천여 리의 지역을 차지한 다음 만반한(滿潘汗)으로 경계를 삼았다. 이에 조선이 비로소 약해졌다.” 라고 하였다.

상기의 3가지 기록을 근거로 진개(秦開)의 동정 진위 여부를 생각해 본다. 진개(秦開)의 동정 시기는 언제인가, <위략>에 연(燕)나라가 스스로를 높여서 왕이라 하던 시기는 기원전 333년이며 그 뒤에 자손들이 교만해지자 공격했다고 하니 연(燕)소왕 재위 시기로 볼수 있다. 그렇다면 연(燕)소왕 시기에 동호(東胡)를 공격할 수 있는 국력과 상황이 연출 되었던 것인가, 자지(子之)의 난 이후 기원전 296년 조나라로부터 막(鄚)과 역(易) 땅을 활양 받아 나라의 기틀을 새롭게 마련하던 연(燕)소왕이 동호(東胡)를 공격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또한 <사기 조세가>에 조(趙)는 기원전 273년 동호(東胡)에게 빼앗겼던 대(代) 땅을 다시 찾았다. 라는 기록은 동호(東胡)가 조무령왕의 중산공격 이후 기원전 273년 까지 대(代)의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진개(秦開)의 공격으로 동호(東胡)가 천여리를 물러 났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기록이다.

<사기 흉노열전>에 보이는 진개(秦開)의 실존여부를 알아보면 진무양(秦舞陽)이란 이가 진개(秦開)의 손자다. 라는 기록으로 보아 진개(秦開)는 실존한 인물임을 알수가 있다. <사기 자객열전>에 진무양(秦舞陽)의 단면을 볼 수가 있다.
“연나라에 진무양(秦舞陽)이라는 용사가 있었는데 나이가 13살 때 벌써 살인을 저질로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래서 태자단은 진무양을 부사로 삼았다.”
“어찌하여 태자께서 마음대로 사람을 보낸다 하십니까?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행차인데 어찌 더벅머리 아이놈을 보낸단 말입니까?
“북쪽 변방의 오랑캐 땅에서 천박하게 살던 자라 아직 천자를 본 적이 없어 그 위엄에 놀라 벌벌 떨고 있는 것입니다.

상기의 기록으로 진무양(秦舞陽)은 연나라 북쪽변방 오랑캐 다시말하면 동호(東胡)의 땅에 살았다는 것이 확인 되었고, 진개(秦開)가 연나라의 유명한 장수 였는데 그 손자 진무양은 오랑캐 땅에서 망나니로 살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의아스러운 일이다.
필자의 추론으로는 동호(東胡)의 영향력하에 있던 연소왕은 진개(秦開)를 볼모로 보낸다. 진개(秦開)는 그곳에서 결혼하여 아들을 낳지만 연소왕의 부름을 받고 연나라에 귀국하여 동호(東胡) 공격의 선봉장이 되지만 전투에서 사망한다. 당시 동호(東胡) 공격은 연과 조나라의 연합공격 이었는데 동호(東胡)는 연.조 연합군을 패배시키고 대(代)의 지역까지 차지 하였던 것이다. 진개(秦開)의 아들은 동호(東胡)땅에서 미천하게 장성하여 진무양(秦舞陽)을 낳는다. 결국 당시 동호(東胡)는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남쪽으로 조(趙)와 연(燕)을 압박하면서 서쪽으로 세력을 넓혀 가고 있었다.

기원전 2세기말에 들어와 중국 대륙은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있었다. 기원전 232년 연(燕)태자 단이 진(秦)에 인질로 갔으나 도망쳐 돌아왔다. 기원전 228년 진이 조(趙)왕 천을 사로잡고 조를 멸했다. 조(趙)의 공자 가는 자립하여 대왕이 되었다. 기원전 226년 진(秦)이 계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연왕은 도망하여 요동으로 옮겨 거하며 단을 참수하여 진에 바쳤다. 기원전 222년 진(秦)이 요동을 함락시키고 연왕 희를 사로잡아 마침내 연을 멸했다. 이 해에 진(秦)의 장수 왕분은 대왕 가를 사로잡았다. 이로써 羌(강)족의 진(秦)이 황하족들을 멸하고 통일을 이루어 낸다. 또한 진(秦) 북쪽에 옛날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의 유망민과 오르도스 지역의 토착민 세력을 통합한 흉노(匈奴)선우(單于) 묵특(冒頓)이 남진하고 있었으며 그 동쪽에는 동호(東胡)가 서진하고 있어 이들의 충돌은 피할수 없는 것이 되었다.

<사기 흉노전(凶奴傳>에“묵특(冒頓)이 강대하여 북방의 오랑캐를 모두 복종시켰다. 좌방(左方)의 왕(王)과 대장(大將)들은 동쪽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상곡(上谷)과 맞닿아 있고, 그 동쪽으로 예ㆍ맥ㆍ조선과 접해 있었다.”라고 했듯이 맥(貊)족과 흉노(匈奴)의 경계는 상곡(上谷)이라는 지역임을 알수가 있다. <한서 흉노전>에 대전쟁이 자세히 기록 되어 있다.

“묵특(冒頓)이 즉위했을 때에는 동호(東胡)가 강성했다. 동호는 묵돌이 부친을 죽이고 스스로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는 사자를 보내 묵특(冒頓)에게 흉노의 천리마(千里馬)를 요구 하였고 또한 묵특(冒頓)의 연지(閼氏) 다시말하면 후비 한 명을 요구 할 정도로 묵특(冒頓)의 흉노를 압도 하였던 것이다. 동호왕은 더욱 교만해져 서쪽으로 와서 침범했다. 동호와 흉노 중간에는 버려져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천여 리의 땅이 있었는데 각기 그 가에 거주하며 구탈(?脫)을 두었다. 동호가 사자를 보내 “흉노와 우리가 경계로 삼는 구탈(?脫) 바깥의 버려진 땅은 흉노가 이를 수 없는 곳이니 우리가 소유하고자 하오.”라며 묵특(冒頓)을 자극 하였다. 마침내 묵특(冒頓)이 나라 안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동쪽으로 가서 동호를 습격했다.“

흉노(匈奴)와 동호(東胡)의 전쟁결과는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흉노(匈奴)는 대(代) 지역 북쪽에서 今 내몽고자치주 용문 동쪽까지 동호(東胡)를 밀어낸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묵특(冒頓)에게 밀린 동호(東胡)라 불리워졌던 맥(貊)족은 今 산서성 북쪽 지역에서 동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흉노(匈奴)가 동호(東胡)족의 전지역을 차지 했다고는 볼수 없다.
<사기 이사열전>에 보면 “육국을 겸병한 영토는 결코 넓지 않은 것이 아니었음에도 북으로는 호(胡)와 맥(貊)을 쫓아내고 남쪽으로는 백월(百越)을 평정하여 진(秦)나라의 강성함을 이족들에게 까지 떨쳤으니 그 죄가 둘입니다.”라는 기록으로 진(秦)시황 통일 초기상황을 말하면서 호(胡)와 맥(貊)을 거론 했는데, 이때의 호(胡)는 흉노(匈奴) 묵특(冒頓)을 이르는 것이고 맥(貊)은 동호(東胡)를 말하는 것이다.

흉노(匈奴) 묵특(冒頓)에게 밀린 맥(貊)족인 동호(東胡) 세력은 今 열하승덕 부근에서 일부는멀리 대흥안령 동쪽 지역까지 넓게 퍼져 살게 되었다. 한(漢)고조 기원전 195년 황제는 번쾌(樊噲)를 대장으로 삼아 연나라를 토벌하도록 했다. 그해 4월 고조가 죽자 노관은 그의 무리들을 이끌고 흉노로 도망쳤다. 흉노는 노관을 동호노왕(東胡盧王)에 임명했다. 동호에 머물던 노관의 무리들은 쉴 사이 없이 만이의 침략과 약탈을 받아 항상 한나라로 돌아올 생각을 갖고 있었다. 노관은 1년여 후에 호 땅에서 죽는다.
태사공이 말한다. "한신과 노관은  한나라 초기에 천하가 안정되자 봉지를 받아 남면하여 왕을 칭했으나 안으로는 강대한 모습을 보여 시기심을 불러일으키고 밖으로는 만맥(蠻貊)의 무리들에게 원조를 청해 날이 갈수록 황실과 소원해져 스스로 화를 불러들였다. 일이 곤궁한 처지에 빠지자 지혜가 못 미쳐 결국 흉노로 도망쳤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한(漢)고조로부터 연왕에 봉해진 노관은 “만맥(蠻貊)의 무리들에게 원조를 청해 날이 갈수록 황실과 소원해져 스스로 화를 불러들였다”라는 사마천의 기록중 만맥(蠻貊)의 무리들에게 원조를 청했다는 문구는 노관이 봉해진 연(燕)지역이 동호(東胡)와 인접하고 있었음을 알수가 있다. 결국 노관은 흉노로 도망쳐서 동호노왕(東胡盧王)에 봉해지지만 쉴 사이 없는 맥(貊)족의 침략과 약탈을 받다가 기원전 194년에 죽는다.
결론적으로 맥(貊)족은 춘추전국시대부터 중국대륙 북쪽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흉노(匈奴) 묵특(冒頓)에게 격파 당하고 동쪽으로 밀린 이후 동호(東胡)라고 불리워 졌었다. <삼국사기>에 고구려의 별종으로 소수맥이 거론 되는 것을 보면 맥(貊)족은 한민족의 시원까지는 몰라도 한민족의 한 축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겠다.